이 부분이 카톨릭 교에서 고해성사라는 교리를 지지하는 아주 중요한 성경 구절입니다. 그래서 고해성사라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가 잘못한 죄를 사제 앞에 가서 고백하는 거죠. 그래서 성당에 가면 고해실이 있습니다. 고해실이 있는데 이쪽에서 저쪽을 볼 수 없도록 그렇게 막으로 이만하게 막아 놓고 그리고 저쪽에서 이야기 하면은 이쪽에서 다 듣고 그리고 이제 소위 이야기 하는 보석이라는 것을 내리죠. 이게 뭐냐면 은 용서해 준다. 하나님이 주신 권한으로 내가 용서해 주는데 그 대신 이러이러한 보석을 해라. 그게 뭐냐 하면 뭐 옛날 같으면 성지 순례를 하라던지 죄가 크면. 근데 뭐 지금이야 성지 순례하라고 하면 관광이죠. 그렇죠. 성지 순례 갔다오라 하면 좋아하겠지. 옛날에는 성지 순례를 한다고 그러면 그건 거의 생명을 건 거였거든요. 왜냐하면 이교도에 위협 그 다음에 육로에 위험 이런 것들이 있으니깐 정말 생명을 걸고 아주 성스러운 마음으로 성지에 가는 것이죠. 그런거나 선행이나 이런 것들을 명령하는 거죠. 그래서 이제 하는거죠. 이제 이게 사실 유래로 보자면 초대 교회 때 이 야고보 선생에 이르는 보도 같은 걸 보더라도 초대 교회 때는 아마 성도들이 이렇게 모여서 각각 자기에 죄를 공동체 앞에 고백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던 그런 흔적이 있는 거 같아요. 근데 이제 그런 교회에 영성과 그런 아주 강력한 부흥으로 말미암은 공동체 정신들이 있을 때에는 이게 어느 정도 가능했을지는 모르지만 현재 세월이 흘러가고 상황이 바뀌면서 이러한 형식을 유지하는 것이 상당히 힘든 그런 상황이 됐다 이거죠. 그런 걸 예를 들자면 초대 교회에서는 입맞춤으로써 서로를 문안했다 라는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실제 키스가 제가 어느 기록에서 보니깐 한 8세기 8세기라고 그러던가? 하여튼 정확히 기억이 안나는데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상당히 오래 실제로 게속됐다 라고 그래요. 그래서 성직자가 예배당 문 앞에 있으면 지금 악수하는 것처럼 그런 입맞춤을 하는 거죠. 근데 이게 사실 기독교가 많이 전파 되면서 이 나라마다 가기 문화가 있고 하는데 만약에 지금 오늘날 저기서 뒤에서 목회자가 입을 맞추겠다 라고 서 있고 만약에 그런다고 할꺼 같으면 교인이 많은 교회에선 목회자가 입이 불으틀꺼에요. 그럼. 보통일이 아닐꺼라. 그러니깐 이런 것들은 하나에 치명적인 중요한 교리를 형성한다기 보다는 하나에 당대 문맥과 문화적인 문맥과도 많은 관계가 있다. 그렇게 보는 거죠. 그래서 근데 이제 서로 죄를 고백하다 보니깐 그게 참 얼마나 웃기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에서도 보면 가끔 말로 인해서 시험에 드는 적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소위이야기 하는 기도 제목을 교환한다. 라는 미명으로 자신에 아주 은밀한 이야기들을 하는 거예요. 그게 이제 교회 안에 떠돌면서 문제가 되기도 하고 그래요. 그래서 개개인에 성숙함이나 이런 것들도 많이 좌우가 되겠다 이렇게 생가합니다. 근데 이제 여기서는 죄를 하나님 앞에 용서받는 수단으로써 그렇게 이야기 한거지 누가 누구의 죄를 사해주는 수단으로써 이야기 한 것은 아니거든요. 그러니깐 교리자체가 잘못된 성경해석에 입각해서 세워졌기 때문에 이제 고해성사 교리를 여기서 이끌어 내는 것이죠. 그런 건 아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러한 성경 구절에 정신에서 볼 때에 이제 이거를 만약에 오늘날 우리에 문맥에 적용 한다고 할꺼 같으면 은 그러면은 어떻게 될까 그런 생각을 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들이 믿기로는 우리에 죄는 직접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루신 속죄를 기초로 하나님께 용서를 간구하고 그래서 개인적으로 직접 주님께로 부터는 죄 용서를 경험함으로써 이제 새 삶을 살 수 있겠끔 되는 거거든요. 근데 이제 그런데 이제 개중에는 이렇게 이미 예수님께서 이루신 속죄 사역을 기초로 주님 앞에 나아가서 죄의 용서를 빌고 이렇게 고백하면서 새 삶을 살아가면은 되는데 개중에는 무슨 문제가 남는가 하면은 심리적인 문제가 남아요. 그게 뭐냐 하면 죄인들에게는 자기에 죄를 숨기고 싶은 죄인에 심리도 있지만 그걸 토설하고 싶은 심리도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토설한 것만으로 만족이 안돼는 거죠. 다시 말하자면 주님이 용서해 주셨는데도 자기 자신은 용서가 안되는 심리적인 압박이 남아 있는 경우가 있어요. 그래서 내가 이럴 때에는 사죄의 조건은 아니지만 소위 이야기 하는 심리적으로 자기 자신이 그런 압박감을 느끼면서 고통받는 것은 사실 성경적으로 옳지 않지만 그러나 그것을 너무 이기기 힘들 때에는 그 죄를 고백하는 것도 도움이 되겠다. 그렇게 생각 합니다. 근데 그 죄를 아무나 붙들고 교회에서 고백을 하면 나중에 상처가 됩니다. 실제로 1907년에 평양에 대붕이 있을 때 어떤 일이 있었냐 하면은 대선주씨를 필두로 해가지고 그때 장로했거든요. 그래서 자기가 미화 160불인가 뭐 그 당시로서는 뭐 상상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거액이였죠. 이제 자기 친구가 죽으면서 돈이 많은 사람인데 자기 아내가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니깐 유산을 좀 관리해 달라고 준 돈에서 자기가 좀 띠어서 썻다 이거죠. 근데 그거를 회개한 거를 필두로 해서 강력한 성령에 역사가 일어나면서 너도 나도 할꺼 없이 줄을 서서 자기에 죄를 고백한 거예요. 그 때에 역사에 나오는 건지 모르는데 어떤 사람이 하나 나와서 남편 몰래 바람 핀것을 눈물로 회개 했어요. 그러니깐 그 남편이 또 은혜를 받은 거야. 그래서 와가지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니 죄를 용서한다. 그니깐 얼마나 은혜로웠겠어요. 근데 결국은 한 6개월 뒤에 여자는 쫒겨 났어요. 그게 왜냐하면 은혜를 받았을 때에는 다 용서가 됐는데 이게 6개월 쯤 지나서 은혜가 떨어지고 나니깐 저 인간이 나 몰래 바람폈지 그니깐 그 당시로는 있을 수 없는 일 아니에요. 잘라내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자기에 그런 문제들을 고백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게 보고 죄를 용서 받기 위한 조건은 아니지만 그러나 만약에 그런 가책 속에서 견디기 힘들어서 양심에 송사가 올무가 된다면 그러면 목회자에게 고백하는 것은 가하겠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지로 저는 교인들을 다루면서 근데 실제 목회자의 입장에서 그런 고백을 듣는게 참 유쾌한게 아니거든요. 저는 별로 그렇지 않은데 돌아가신 우리 선배 목사님 하나는 그데 그런거 하지 말아야 되겠더라. 그러더라구. 왜요 그러니깐 누가 와서 굉장히 교회에서 착실한 자매였는데 어느날 목사님 한테 고백을 할게 있다고 그러더래요. 그래서 그 목사님은 칼같은 분이였거든요. 뭐 나한테 고백하냐 하나님한테 열심히 고백하고 잘 살지 그니깐 그래도 목사님한테 고백을 해야되겠데. 그러면서 또 아까 이야기한 것과 같은 유사한 고백을 한거에요. 그 목사님 말씀이 참 재밌어요. 그 사람 볼때마다 그 생각이 난다는 거에요. 근데 이제 그거는 옳지 않다고 생각 하거든요. 근데 그것은 목회자 마다 정서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은 절대로 우선은 상담을 통해서 체득한 부끄러운 비밀들을 죽어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전 그걸 이야기 하면은 그 사람은 목회자 자격이 없다고 봅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 몇 번입니까? 아홉 번짼가? 아홉 번째 맞아요? 여덟 번짼가 아홉 번째 보면은 뭐가 나오냐 하면은 나는 환자를 치료하는 중에 환자로부터 취득한 개인에 비밀을 일평생 누구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겠노라. 그게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나와요.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고대에 히포크라테스가 그걸 얘기 한거죠. 그게 왜 그랬냐 하면은 이 몸이 아파서 자기 몸을 의사한테 맡길 때하고 영혼이 너무 아파서 자기 몸을 목사에게 맡겼을 때가 감정적으로 가장 자기를 많이 개방하고 상대방에게 자기를 의뢰하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이빨 아픈 사람이 와가지고 이쪽 이빨 패션으로 빼달라고 그런 사람 없잖아요. 아프니깐 와서 어떻게 하든지 같에 통증을 멎게 해달라고 그러잖아요. 그러니깐 그렇게 자신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그런 것들을 말하자면은 그런 속에서 말하자면은 그런 우월한 지위를 남용해서 그 사람을 지배하려 한다던지 그러면 안된다는 이거에요. 그러기 때문에 그것을 취득하고는 말하면 안되는 거에요. 절대로 그거는 절대로 말하면 안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어야 되요. 여기는 말이죠 상상할 수 없는 비밀 창고에요. 열면 진짜 큰일나요. 주님 앞에 갈때까지 가지고 가야되요. 그중에서 늘 가지고 가는거에요. 그걸 가지고 집에가서 부인하고 상의하고 그러면 큰 일 납니다. 절대로 이야기 하는게 아니에요. 이게 딱 가지고 가는거에요. 그래서 일단 들어가면 절대로 나오지 않는 것이 원칙이 되야해요. 그래서 이 속에서 차곡차곡 뭉치는 거에요. 상상할수 없는 사연들이 여기에 많이 있어. 그거를 듣는다 들어준다. 그리고 그것을 인해 들으면 끝나는게 아니라 똑같이 그 죄인에 마음으로 아파하고 그것을 기도하고 그래야 되잖아요. 그니깐 사실 정신 건강에는 안좋을 수 있어요. 솔직히 얘기해서 그런데 또 어떻해요. 그래도 들어야 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저는 권합니다. 그러나 단 목회자에게 그렇게 고백하는 것이 용서에 조건은 될 수 없다. 용서에 조건은 될 수 없다. 용서는 주님이 해 주시는 거지만 심리적으로 그렇게 다 고백했을때 임금님 귀는 당나귀귀 그거 있잖아요. 그게 말하자면 말할수 없는 사연을 안고 그렇게 살아가면은 그게 정신건강에 엄청나게 어려운 거에요. 근데 그걸 이기면 더 좋죠. 그데 그 수가 없을 때에는 고백을 하는데 그대신 그게 상대방으로 넘어 목회자에게 넘어가는 거죠. 목회자는 그거를 말하지 않으면 막 안되고 그런 심정을 가지면 안되요. 인격적으로 오래 단련이 되어서 여기에다 딱 그걸 일체 말하지 말고 평생 가슴에 간직하고 그렇게 가야되요. 그런 면에 있어서 목회자를 교인들이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면서 이제 이 구절을 전 그렇게 보는 거죠. 그니깐 고해 성사를 위한 사제주의도 배격하고 그리고 성도들 상호간에 서로 자기에 죄를 함부로 고백을 해서 나중에 문제가 되는 것도 제거하고 가능하면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이 자기에 죄를 용서 받되 그것이 심리적으로 너무 어려울 때는 고백을 할 수도 있다. 목회자에게 하라. 그리고 목회자는 그 점에 있어서 생명이 다하는 날 까지 그 비밀을 가슴 깊은 곳에 묻어 두고 그리고 주님 앞에 가야된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