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여기서 왜 갑자기 주을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얘기가 나왔냐 하면요. 이런 얘기 거든요. 그럼 천사보다도 뛰어난 그 성자를 그럼 하나님은 왜 사람에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셔서 천사보다 조금 못한 삶을 살게 하셨을까. 성자가 그렇게 모든 피조물 위에 뛰어나고 또 뛰어난 분이시라면 왜 그 성자가 사람에 몸을 입고 오셔서 이 세상을 사시는 동안에 천사보다 못하게 하셨을까? 그런 의문이 들어오잖아요. 그거를 그 앞전에서는 우리를 위해서 죽음을 맛보게 하시기 위해서 그래서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을 예로 들었고 근거로 들었고 지금 또 하나 나오는 것은 뭐냐 하면 고난을 통해 그 아들을 온전케 하기 위해서 사람에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게 하심이니라. 이런 논리거든요. 그럼 온전케 된다는 것이 무엇일까? 그럼 온전케 된다는 것이 무엇일까? 이것이 만약에 우리에게 적용이 된다고 말할 것 같으면 우리들에게 적용한다라고 할 것 같으면 죄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부패 때문에 불안전 하고 온전하지 못한 인간을 하나님께서 온전하게 만들어 가신 그것을 가리킬 수 있거든요. 근데 여기서는 그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던 분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끊임없는 회개와 죄의 용서 이런 것들을 통해서 더 정결해지고 온전해져가는 성화에 작용속에서 이 온전함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왜?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죠? 그러면은 무엇 때문일까? 여기서 이렇게 말씀하실 성경에서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는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이 온전해진다 라고 하는 것일까?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죠. 예수님은 죄는 없으신 분이였지만 그렇지만 스스로 사람에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신성을 인성 밑에 감추시고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죄는 없으셨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연약한 것들을 기쁘게 감당하신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시는 예수님은 근본적으로는 모르시는 것이 없는 분이 셨지만 은 그러나 사람에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예수님께서도 성경을 배우시고 또 글을 배우시고 성경을 배우시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러한 것처럼 살아가면서 인생에 이치를 배우셨어요.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성자였지만 사람에 몸을 입고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 예수니께서는 그런 방식으로 이 세상에 지식을 쌓아가고 알아가셨던 것이죠. 물론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께서 그 신성으로 역사 하시면 예수님은 배우지 않으신 것이라도 아실 수 있었어요. 그렇지만 그거는 아주 특수하고 특별한 방법이였고 일반적으로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시면서 그렇게 그렇게 배워가신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만약에 사람에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지 않으셨다라고 할꺼 같으면 어떻게 마지막 때를 모르실수 있어요. 한 하나님이신데 그죠? 근데 사람에 몸을 입고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 스스로 신성을 인성 밑에 감추심으로 나는 나도 그 마지막 날을 모른다. 지금 부활하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에 보좌 우편에 계시는 동안에 성자 예수께서 마지막 심판에 날을 모르신다고 말하실 수 있을까요? 그럴수 없는 거죠. 그니깐 사람에 몸을 입고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 스스로 온전케 되어지실수 있는 부분을 남겨두고 계셨다 라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이 거기에서 권한을 통해서 더 온전해 하신 것이죠. 예수님은 사람이신 하나님과 한 분이셨기 때문에 예수님 역시 사람이셨죠. 그래서 우리에게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죠. 그렇지만 그렇게 우리와 함께 계신 사랑이 많으신 분 이셨지만은 그러나 사람에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개인적인 생애를 지내시고 공적인 생애를 들어가시는 동안 그래서 자기에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돌보고 그들에 질병을 고치고 그들에게 진리에 말씀을 전해주고 이렇게 하는 동안에 예수님께서는 원래도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셨지만 그러나 그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그들을 있는 동안 그들과 함께 계시는 동안에 죄인들을 더 많이 사랑하시게 되었고 그리고 죄인들에 그 비참함을 예수님이 몸소 사람에 몸을 입으시고 오셔서 그들 가운데 거하시면서 죄는 없으셨지만 그 죄인들이 고생하고 유리하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그 죄이에 비참한 형국을 직접 보시면서 그러면서 한 예수님이 더 우리를 사람하심에 있어서 더 온전해 지신 것이죠. 그래서 히브리서 뒤편에도 넘어가 보면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을 인하여 순종을 배워서 온전케 되었음 즉 그래서 인성 안에 있는 예수그리스도께서 고난을 통해서 더 온전하게 되신 거죠. 그래서 마지막에 십자가에 자기 자신을 드릴 때에는 아주 순결한 상태로 주님 앞에 자기를 드리게 되셨던 것이죠. 이것이 바로 오늘 성경 구절에 의미인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여기서 그런 거를 배우는 거죠. 하나님에 아들도 고난을 통해서 이렇게 온전케 되어졌다 그럴 꺼 같으면 하나님에 아들이신 성자에 비해서 성자와 비교할 때에 죄 없으신 그 분에 비해서 죄도 많고 그 다음에 부패성도 많고 그리고 사랑도 온전하지 않고 아주 더러운 비참한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더 온전해져 가야는 지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이 흔히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한다 그러는데 이렇게 온전케 되어져 가는 성화에 과정이 열심히 주님을 섬기는 것과 함께 가야되요.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 오래 성화된 사람 그렇게 성화되면서 주님에 일을 수종들고 그래야지 하나님에 영광을 가리지 않지 이름간데 혈기와 이런 것들 다 살아있는데 그냥 일만 할뿐이지 전혀 그런것들이 변화가 안되는 거에요. 그러면서 그 열심을 가지고 주님을 섬긴다고 하는데 정말 수치스러운 거죠. 그리고 그렇게 말하면서 주님 앞에서 정말로 부끄러운 것이죠. 그러니 살아가면서 정말 부끄러움을 그래서 온전하게 되어 가는 신앙에 세계가 없으면은 예수님처럼 주님을 열심히 섬기면서 하나님과 연합된 속에서의 아름다운 신앙생활 이런 것들이 불가능 하다 라는 것이죠. 안되는 거다. 그러니깐 어떻게 해야 되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정말 저희들이 주님에 말씀을 따라서 더 온전해 지고 주님에 말씀을 따라서 더 순종해지고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신앙생활들 우리들이 해나아 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깨어짐에 세계 은혜에 의해서 새롭게 비춰지는 변화에 세계 이런 것들이 반드시 자기 안에 있어서 그래서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