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54
목 차
나를 판단하소서(시 54:1-2) 43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시 54:3-4) 47
성실하심으로 도우소서(시 54:5) 51
주님의 이름에 바치는 감사(시 54:6) 56
신실하신 하나님(시 54:7) 59
시편56편 강해 1
시편54편 강해 1
시편54편 강해 1
시편54편 강해 1
시편54편 강해 1
시편54편 강해 1
나를 판단하소서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판단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시 54:1-2)
본문해설
시편 54편도 다윗의 시입니다. 특별히 사울에게 쫓겨 다니던 때에 지은 시라고 여겨집니다. 이 시에서 다윗은 고난 받을 때에 하나님께 피하는 그의 독특한 신앙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를 판단하소서˛
본문에는 “나를 판단하소서”, “귀를 기울이소서”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다윗의 시편에서 이런 구절들은 후렴구처럼 자주 등장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가지고 있는 신앙에서 하나님 주권사상과 연결이 됩니다. 하나님이 모든 세계와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자이시라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인간사에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고, 우연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 같고, 또 우연적인 일들이 일어나는 많은 사건들이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미치지만 그것이 결국 인간들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사상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선한일과 악한일의 모든 것을 사용해서 결국은 당신이 기뻐하시는 일들을 섭리 속에서 이루어가시지만, 일어나는 사건 하나하나는 모두 하나님께서 선악 간에 판단하시고 거기에 대해 평가를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주권사상입니다. 시인이 보여주고 있는 또 하나의 생각은 그러한 주권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께 피한다는 신앙사상 보여줍니다. 판단을 내리시는 하나님께로 피하고 도망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판단을 내리실 때 그 판단을 내리시는 주님께로 피하는 것이 다윗이 생각하는 신앙입니다.
시인은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는 한 번도 왕이 되겠다는 마음을 품거나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 간청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선택하셔서 이 사람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으셨는데, 그것 때문에 그는 사울에게 지독한 미움을 받으면서 핍박의 멀고먼 길을 걸어가야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나를 판단해 달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가 완전한 사람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살고자 하는 주권사상이 없었다면 할 수 없는 기대입니다.
판단이라는 말은 법정적인 용어입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시험해서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판단을 하나님께서 개인에게 행하시기도 하시고 나라에게도 행하십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러한 판단을 통해 심판을 내리십니다. 그러면 전쟁도 일어나고 기근이 들어서 큰 환란을 만나게 됩니다. 이 판단은 무조건 자신에게 유리할 수는 없습니다. 유리하게 되기 위해서는 비록 완전하지 않지만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는 신앙이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그분께 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편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오류와 잘못이 있어도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은총을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울여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를 판단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판단이 다윗에게는 곧 구원이었습니다. 완전하지 않지만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고 매달리기 때문에 악인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을지라도, 언약백성인 자신에게 주께서 자비를 베풀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기도를 들으시며˛
2절에서는 기도를 들어달라는 간구를 하나님께 올리고 있습니다. 1절의 내용이 하나님 앞에 자신이 판단받기를 원하는 마음이었다면, 2절의 내용은 귀를 기울여달라는 탄원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판단하실 때 그릇판단하시거나 잘못 판단하실 리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공정하게 판단을 하신다면 다윗을 괴롭히던 사람들은 완전히 악한 사람들로, 다윗은 하나님 앞에 완전하게 선한사람으로 구별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판단에서 모자라고 부족한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호소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러한 판단이 속히 임하여 자신을 악인으로부터 건져주시기를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중적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올바르게 살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에게는 구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 만약에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날이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여호와의 날’이라고 불리는 심판의 날이 악인에게는 두려워하는 날이고, 의로운 백성들에게는 기다려지는 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날이 바로 주님께 큰 위로와 상급을 받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라는 탄원은 단순히 기도를 들어달라는 말일 뿐 아니라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관계를 기초로 모든 것을 판단함에 있어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호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살지만 올바르게 사는 것 자체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다윗은 인생 중 가장 고통스러웠던 역경의 때를 하나님 앞에 이겨나가는 비결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신앙의 원리는 오늘날도 계속됩니다. “하나님은 내편이시라 여호와가 나와 함께 하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이렇게 기도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주님이 중심이 되셔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완전하게 살지는 못할지라도 마음의 중심이 주님께 곧게 고정하고 우리가 부족할 때 주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면서 도움을 구하는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합니다.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
“낯선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들이 나의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셀라)
하나님은 나의 돕는 자시라 주께서 내 생명을 붙드는 자와 함께 하시나이다”(시 54:3-4)
하나님 앞에 살아간다는 것
여기서도 시인은 일관되게 악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이것이 악인의 정체입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고 하는 사상은 크게 두 가지를 내포합니다. 우선 첫째는 하나님을 인간이 피할 수 없다는 사상입니다. 어디에 살든지 인간은 하나님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그런 고백을 합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선을 행하면 자비롭게 여기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만약에 그가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면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어디로 가겠습니까?”라고 반문을 합니다. 마찬가지의 맥락입니다. 인간이 어디에서 살고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면전을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면전에 살아간다고 하는 것을 충분히 느끼는 것에서 두 번째 의미가 나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 앞에 산다.”라고 말합니다. 세례 요한이 태어났을 때 아버지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면에서 “성결과 의로써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성경 전체, 특별히 구약에서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앞에서 살아가면서 그분의 은총을 입고 그분의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최고의 행복입니다. 그것이 신앙이고 믿음생활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라는 말은 두 번째 의미로서 악인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며 교제 속에서 살아가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중심을 하나님으로 놓고 보면 자기를 하나님 앞에 두는 것이고, 중심을 자신에게 놓고 묘사하면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는 것입니다. 악인에게는 자기중심적인 삶이 있으니까 자기를 중심으로 놓고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삶
부족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올바른 삶을 살고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끊임없는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그 지식에 적용하려고 애를 쓰지 않아도 하나님에 대한 즉각적인 실천성을 가집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아는 지식, 하나님의 속성과 그 속성이 행사되는 방식에 대한 지식은 즉각적인 실천성을 갖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가 어떻게 살아가야 되겠다는 것을 별도로 고민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깨닫고 속성이 행사되는 방식에 대한 지식을 갖고 나면 즉각적인 삶의 실천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지식이 무엇인가?” 물음이 있어왔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학지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여기에서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학교에서 공부하는 신학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말합니다. 신학지식은 크게 두 가지 흐름이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지성의 활동이라는 지식을 중심에 두고 정의를 내리는 사람들이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을 중심에 놓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참된 신학지식, 즉 하나님을 향한 앎이라는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는 생활이라고 정의를 내립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라는 하나님의 성품을 깨닫고 그 성품이 행사되는 방식에 대해 알게 될 때 즉각적으로 삶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속성이 행사될 때 악인은 징벌하시고 의롭게 살며 고난을 받았던 사람들은 보상하시는 것을 생생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그 때 비로소 불의한 자신의 삶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옳다고 믿고 그 길을 걸어가는데 너무 힘이 듭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 언약백성들을 위로하시고 돌보시는 것을 경험하면서 격려를 받으면 쉬운 길을 버리고 어려운 길을 계속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앎은 우리의 삶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찬란한 하나님의 속성들을 알게 될 때, 그것이 우리의 인생에 개인적으로 교회의 지평에서 공동체적으로 그리고 국가적으로 인류 역사적으로 하나님이 당신의 속성을 행사하시는 방법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정동되고 감동을 받게 됩니다. 수많은 하나님의 성품들이 찬란하게 우리에게 개시되어 깨닫고 끊임없는 감동을 받는 것이 수준 높은 신앙생활입니다. 그 때 말할 수 없는 은혜와 놀라운 변화와 감격을 가져다줍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은 자연세계에 있는 모든 사물들과 사실들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전달이 되고, 성경의 진리를 통해서도 전달됩니다. 직접성의 정도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우리의 영적 생활 속에서 성경의 계시를 기초로 전달되는 하나님의 속성과 그것이 행사되는 방식에 대한 지식은 직접적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직접 가르쳐준다는 것입니다. 자연세계에 있는 것들을 통해서는 직접성이 떨어집니다. 우리가 접하는 자연세계와 일반학문의 세계가 훨씬 더 많지만 하나님에 대한 직접성의 측면에서 본다면 성경이 가장 강한 직접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기 위해서 비행기를 타고 오대양 육대주를 수없이 헤매는 것 보다는 요한복음 3장 16절 한 절을 제대로 읽고 깊이 은혜를 받는 것이 하나님에 대해 아는데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에게는 그러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 그 속성에 대한 방식에 대한 앎, 자신의 삶이 그 지식에 의해서 정동되고 변화되는 것이 없습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삶, 저 밑바닥에 있는 인간의 마음은 부패한 것들을 쏟아내는 악과 부패의 원천이 됩니다. 그래서 악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가운데 언약백성인 다윗의 생명을 수색하고 구박하고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그 때 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악인과 더불어 싸우면서 피를 흘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도우시고 생명을 붙드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나의 돕는 자시라 주께서 내 생명을 붙드는 자와 함께 하시나이다”, 여기에서 “내 생명을 붙드시는 자와 함께 하시나이다”라는 것은 정확한 번역이 아닙니다. “주님이 내 생명을 붙드시는 자입니다.”라고 번역을 해야 합니다. 원수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하나님께 붙어있는 자신을 수색하고 악을 행하지만 자신의 생명이 악인의 손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빼앗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특별히 영혼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시인이 인생의 풍랑을 겪으면서도 결국은 “나를 도우시는 자는 하나님 한 분 뿐이시며 내 생명은 주님이 붙들고 계시다.”라는 신앙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이고 믿음생활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행복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그분께로부터 오는 지식의 빛 아래 은혜를 받고, 삶의 모든 상황에서 그분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올바른 신앙의 길을 걸어간다는 이유 때문에 시련이 와도 궁극적으로 나를 돕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면서 의지하는 삶을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성실하심으로 도우소서
“주께서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저희를 멸하소서”(시 54:5)
하나님의 속성으로 악인을 다스리심
하나님께 대한 고백이 있고 나서 자신에게 악을 행한 사람들에 대해서 탄원하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그 탄원의 내용은 “주께서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라는 고백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해가 안 갑니다. 하나님은 악을 행하실 수 없는 분인데 하나님이 나의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실 것이라는 고백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까? 이 문제는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선도 악이 된다는 것입니다. 기준점을 하나님께 놓고 보았을 때 악은 그릇된 질서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일어나는 악한 행동들은 그릇된 질서에 대한 사랑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들입니다. 성경에서 ‘악’이라는 말은 종종 죄를 가리키기도 하고, 악을 가리키기도 하고, 마음에 있는 죄의 결과로서의 악을 의미할 때도 ‘악’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악의 사용은 현상학적으로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 말로 사용이 됩니다.
“하나님이 나의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당신을 거스르며 악하게 살 때 찾아가셔서 개개인에게 벌을 내리시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속성을 따라 모든 세계를 통치하십니다. 이미 하나님과 하나님의 속성, 그분이 세계와 맺으시는 관계를 설명한 것과 같은 이치로,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배울 수밖에 없습니다.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 둘이 있을 때 한 사람은 은혜 언약 안에서 선하게 삶아서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만나고, 악하게 사는 사람은 그 옆에 있으면서도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악인이 당하는 악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악하게 살기 때문에 만나는 악입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선한 성품이 행사되는 방식, 자체가 악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바위에 자신의 몸을 세게 부딪친다고 생각해봅시다. 살짝 부딪힐 때는 조금 아프지만 힘차게 달려가 암벽을 향해서 머리를 앞세우고 돌격을 한다면 머리가 부딪치면서 피가 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악을 행할 때 당신의 큰 섭리와 경륜 속에서 그들이 행한 것을 갚으시기도, 악을 행하는 사람들 스스로 그 악을 자기 자신에게 행하는 격이 되도록 하나님의 속성의 효과를 나타내 보이십니다.
선을 행하고 하나님께 복종하는 사람들이 그분과 매우 가까이 있는 것처럼, 악을 행하고 반역하는 사람도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다만 자신의 영혼 속에서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느껴지지 않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하나님의 속성을 알고 그 속성이 시행되는 방식을 아는 것이라고 단정할 때 앎의 방식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악인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속성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가 악을 행함으로 하나님이 그를 징벌하시고, 그의 외적인 생활과 내적인 심령 속에서 끊임없는 고통을 경험합니다. 그가 그런 괴롭힘을 당한 것이 하나님을 알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악인으로서 하나님의 징벌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하나님을 많이 알았다는 결론이 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속성과 속성이 시행되는 방식을 알되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앎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인에게 고통을 주는 악인을 당신 자신의 성품을 따라서 다스리실 때 그것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 악이 되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선은 하나님께 좋은 것이고 상대적인 선은 나에게 좋은 것입니다. 나의 마음과 영혼의 경향성이 하나님과 일치되어 있을 때는 하나님께 좋은 것이 나에게도 좋은 것입니다. 이것이 일치하지 않을 때는 하나님께 좋은 것이 나에게 나쁜 것일 수 있고 나에게 좋은 것이 하나님에게 나쁜 것일 수 있습니다. 성화의 삶은 이 둘을 끊임없이 근접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많이 성화된 사람일수록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자기도 좋아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일수록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원수들은 다윗에게 끊임없이 고통을 가하는데 그들은 그것이 좋아서 그 일을 하지만 하나님은 매우 싫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당신을 향하여 당신의 질서대로 살기를 원하셔서 당신의 속성을 발현하십니다. 그것이 악인에게는 악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악으로 나의 원수들을 멸해달라는 다윗의 기도는 전혀 모순이 없는 기도로 해석되는 것입니다.
박해받으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사람들이 왜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를 미워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하고 마지막에 자신들에게 생명주시기 위해 오신 분을 십자가에 죽여서 그 생명을 빼앗았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눈에 예수님은 악한 분이었습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가 악하실 수 있는가?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무슨 나쁜 일을 하셨는가?”라고 하겠지만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나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물을 것입니다. “그분이 누구를 속이셨는가? 누구의 물건을 빼앗으셨는가? 누구를 죽이셨는가?” 그러나 그들의 눈에는 반란을 일으키고 사람을 죽인 바라바라는 흉악한 강도가 더 좋은 사람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칼 한 자루, 창 한개 없어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진리를 따라 세상에서 살아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자체가 하나님을 거슬러 악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찌르는 칼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으신 이유는 그분이 진리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집요하도록 예수를 미워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모든 성품의 빛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이 세상에 내려오신 분이십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찬란하게 비추는 하나님의 속성을 보면서 하나님을 향한 적개심을 그대로 보여준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 그리스도는 악하게 보였습니다.
˚주의 성실하심으로 저희를 멸하소서˛
시인이 “주께서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저희를 멸하소서”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성실하심’이라는 것은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품의 발현입니다. 그 신실하심은 결국 진실하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진실하심은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향하여 모순이 없으신 것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 안에 모순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분명히 올바르게 살아야 된다고 말하면서 어떤 부분은 적용하고 자기에게 불리하거나 힘든 부분은 꺾어서 스스로 모순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그런 진실하심으로부터 신실하심이 나옵니다. 신실하심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언약에 충실하신 속성입니다. 신실하심 뒤에는 진실하심이 있고 진실하심은 하나님의 불변성에 기초합니다. 하나님의 불변성에 기초해서 진실성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의 속성의 핵심과 같은 것입니다.
시인은 “주의 성실하심으로 저희를 멸하소서” 하고 하나님 앞에 고백합니다. 수많은 파도가 암벽을 때립니다. 바람이 불지 않고 조용할 때는 찰싹거리는 파도가 풍랑이 일고 바람이 불 때는 집채만 하게 밀려오면서 암벽을 때립니다. 파도는 언제나 바위에 부딪쳐서 하얀 거품을 내며 흩어지는 것처럼, 파도의 크기는 각기 달라도 언제나 똑같은 방향으로 일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당신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당신의 불변하신 성품을 따라 반응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변함이 없는 성실하심으로 저희가 멸망 받을 것이라는 신앙의 고백이자 간구입니다.
결론과 적용
“악한 자는 잠시 번성하는 것 같으나 한낮의 벤 풀과 같이 속히 마르게 될 것이다.”라고 시인은 고백합니다. 하나님 없는 잠시의 번영을 인하여 부러워하지 말고 주님께 붙어있는 사람들은 영원히 주님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이긴다는 확신을 가지고 나아갑니다. 시인이 악한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고통을 받을 때마다 항상 묵상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성품 묵상하는 것입니다.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보리라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곤란과 어려움이 닥칠 때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깊이 묵상하면서 주님의 주권 아래 복종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며 산다고 할 때, 그것은 결국 주님의 속성을 의지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속성과 성품을 의지하면서 사는 것이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삶의 의미입니다.
주님의 이름에 바치는 감사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시 54:6)
기도할 때 주시는 평안과 감사
시의 결론으로 내려가면서 시인은 원수들에게 고통을 받고 괴로움을 겪다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루시는 방법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 자신이 선하시고 성실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거슬러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멸하실 것이라는 확신과 기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세계의 신비입니다. 기도생활을 하다보면 이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문제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미 그 일이 이루어진 것처럼 기쁘고 마음에 평안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감사할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문제는 문제대로 남아있고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습니다. 그런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궁금해집니다. 미래에 이러한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응답이 주어진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응답이 주어질 때 주님 앞에 감사하게 된다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모든 문제가 그대로 남아있는데도 마음에 밀려오는 놀라운 평강과 은혜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물론 주님으로부터입니다. 빌립보서에서는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다.”라고 합니다.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요동치고 분요하던 마음은 사라지고 응답이 있는 순간 놀라운 평강이 우리 심령에 젖어들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릴 때 주님이 응답하시면 미래에 일어날 일인데도 오늘 우리에게 평강을 주십니다. 믿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비록 내가 원하는 상황과는 다르지만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다고 했으니 주님의 손에 이끌려서 거기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미래에 대한 확신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평화를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삶의 환경에 따라 요동치지 않는 평안함과 안식이 있습니다. 비록 그 일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이루진 것과 같은 기쁨이 나의 마음과 삶 속에 밀려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큰 감동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굽이굽이에 많은 시련들이 시인에게 있었지만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그에게 커다란 행복을 주었던 것입니다.
주께 드리는 감사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시인이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라는 고백은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확신 속에서 나오는 감사입니다. 여기서 ‘낙헌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제입니다. 형태에 따라서는 번제, 관제, 요제, 거제 등으로 나누지만 제사의 목적을 따라서는 속죄제, 감사제, 화목제 등으로 나눕니다. 낙헌제는 감사제의 하나입니다. 이것은 꼭 드려야 하는 제사는 아니지만 감사하는 사람이 드리는 제사입니다. 시인이 원수들로 인해 많이 고통을 받는 가운데서 “낙헌제를 주께 드려서 주님께 제사할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현재적인 기쁨과 감사가 마음속에서 확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고, 원수들은 빈들에 마른 풀처럼 시들어 갈 것이며, 나는 하나님의 집에 감람나무처럼 번성하리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선하신 하나님
시인은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십니다. 그러나 자신을 주인삼고 자기 욕망을 따라 살면 하나님의 선하심에 부합하게 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직접적으로는 원하지 않아도 자기를 중심에 놓고 살면 결국은 하나님의 원수처럼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에 참다운 도우심과 은혜가 없습니다. 불을 켜서 두면 어둠을 환하게 밝혀주지만 거기에 손가락을 내밀면 데이듯이,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과 같은 마음을 품고 그분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질서를 따라 살면,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게 느껴져서 언제나 선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결론을 내리기를 “하나님은 선하십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은 선한 일이 아닙니다. 악인에게 고통을 당하고 원수에게 핍박을 당하는 고통스러운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누구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길 자가 없습니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대저 주께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나로 목도케 하셨나이다”(시 54:7)
신실하신 하나님
마지막 구절에서 시인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도하셨던 일들을 회고하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주께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이 환난은 지금만 만나는 환난만이 아니라 예전에도 만났던 환난을 말합니다. 예전에 환난을 만났을 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주님의 은혜를 구했더니 하나님이 자신을 건져내셨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그렇게 건져내셨다면 지금도 그렇게 건져 내실 것이요 앞으로도 그렇게 건져내시지 않겠습니까? 사람은 변덕이 심하기 때문에 오늘은 도와주었어도 내일은 마음이 변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시종이 여일하신 분이기 때문에 지난날 하나님이 나를 도와 주셨다면 지금도 나를 도와주시고 앞으로도 도와주실 것이라는 자연스러운 확신입니다. 그것은 신실하신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인간은 변덕이 심하고 스스로 자기 말을 어길 수 있는 불완전한 존재지만, 하나님은 변함없이 신실하셔서 환난 속에서 간구하면 예전에 건져주셨던 것처럼 지금도 건져주신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시인이 이 모든 것에서 완전히 구출 받은 상태가 아닙니다. 그래서 과거를 회상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하나님이 나를 위해 행하신 일을 회상함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을 되새겨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건져 주시고 도와주신 사건들을 통해 주님의 성품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할 때는 결국 하나님의 속성을 알고 속성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아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속성, 즉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변함없으시고 시종이 여일하셔서 언제나 당신의 성품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에서 시인은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자신을 환난에서 건져주시는 것이 한 사건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보편적인 성품으로부터 나온 하나님의 구원행동인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내 기도 때문에 하나님이 겨우 움직이셨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원래 그런 분이시기 때문에 언약백성인 나를 건져주신 것입니다. 기도는 도구일 뿐이고 하나님의 성품이 나의 도움이 된 것입니다. 이런 환난을 겪고 나면 기도에 대해 배우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배우는 것이 훨씬 더 많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원수가 보응 받게 하심
두 번째는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나로 목도케 하셨나이다”입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환난 가운데 건져 주신 것과 원수가 보응을 받는 것은 별개의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선하신 질서에 어긋나게 살아가는 사람 때문에 고통 받는 나를 위해 당신의 선하신 성품으로 그들 가운데 행하심으로 건져냄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점령당해서 36년 동안 식민지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해방이 되었습니다. 압박 받고 있던 사람들에게 아주 놀라운 기쁨의 날이었지만 압제하고 있던 일본 사람들에게는 공포의 날이었습니다. 해방이 되던 바로 그 때 일본 사람이 쓴 글을 읽어 봤는데, 우리나라가 해방되던 때 한국에 있던 일본 사람들이 느꼈던 공포는 굉장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폭행을 당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여호와의 날’이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날이 이를 것이다”, “여호와의 날에 내가 너희를 건지겠고”, “여호와의 날에 내가 그들을 심판할 것이며” 그런 표현들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이 방문하시는 날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하나님이 권고하시는 날에”라고 나오는데 ‘권고’라는 것은 잘 하라고 타이르는 것이 아니라 옛날 말로 ‘방문하다.’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 ‘파카드’(dq'P;)라고 합니다.
비유를 하면, 평상시에는 하나님이 저 하늘 높이 계신데 여호와의 날에는 하나님이 직접 내려오신 것 같은 효과가 나타나납니다. 이전에는 구김살이 있는 것처럼 보이던 모든 질서들을 하나님이 바로 잡으시는 것입니다. 이 때, 억울하게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자유와 구원이 주어지고,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질서 속에서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던 이들에게는 종말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통해 그들을 굳게 붙드셔서 주님 앞에 다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전의 신실하심을 기억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한다고 해서 항상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인생을 항해하는 것도 아니고, 항상 만족스러운 복이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은 그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실 것이라는 믿음, 그것을 바라보면서 주님을 의지하며 이 길을 가는 것입니다.
시편56편 강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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