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3월 18일 새벽예배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히 6:9-10).
이제 그 우울한 이야기를 앞에서 쭉 했습니다. 백요 그리고 채소를 심은 밭에 가시와 엉겅퀴가 계속 난다면 하나님께서 그 농부들이 그 가시와 엉겅퀴를 불살라 버리지 않겠느냐. 우리도 배교하면 그렇게 된다. 그렇게 우울한 이야기를 하고 이제 사도가 안 됐던지 이제 그렇지만 너희들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로 얘기하자면 열린교회 이야기가 아니고 닫힌 교회 얘기다. 그러듯이 너희 이야기가 아니고 너희들은 그래도 구원에 가깝다. 그러면서 이제 그들을 격려하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히브리서 배경 그 자체가 다소 후기에 쓰였다고 보거든요. 이제 신약에 책들 가운데는. 그래서 그때 제일 먼저 쓰여진게 대살로니아 전서라고 보죠. 그래서 한 54년경쯤 쓰여졌을 꺼라고 보고 제일 늦게 쓰여진게 계시록이라고 보는데 95년경쯤이 아닐까 뭐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거는 연대를 확정 지을 수는 없지만 54년 보다는 훨씬 더 뒤고 95년 보다는 조금 다르지만 그 후기에 쓰여 진 걸로 보죠. 인제 그 때에서 로마 제국에 대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아주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그런 때를 배경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깐 이런 배교의 위험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제 이 이야기가 나온거죠. 그래서 이제 사도가 오늘 읽은 9절과 10절에서 두 가지를 이야기 하는데 하나는 너희는 이보다 낮고 구원에 가깝다 해서 뭐냐면은 결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은 그러나 그렇게 배교와 또 이런 것이 이렇게 그렇게 되겠느냐? 그래서 그렇게 배교가 완전히 확정돼서 불사름을 당하게 될 그런 사람들보다는 너희가 훨씬 낫다. 그러나 완전히 안전한 것은 아니다. 그렇게 경고 하면서 그러면서 이제 구원이 가깝다. 근데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아마 두 가지 의미가 있겟죠. 우선 핍박이 구체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믿음을 배반치 않고 잘 참아라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다. 그런 의미이고 또 하나는 이것은 아마 주님이 오시는거 그걸 염두에 둔거 같아요. 마찬가지 이야기가 되겠지만요. 그래서 단순한 도움에서 건져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구원에 날이 가깝다. 이제 그렇게 신앙은 시간을 초월하는 국면이 있어요. 그래서 영원한 진리들을 순간에 느끼도록 만들어 주는 힘이 있거든요. 그래서 신앙에 현재성이라고 말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주 먼 미래에도 오실텐데도 우리가 은혜를 많이 받으면 곧 주님이 오실 것처럼 그렇게 경성해서 살게하는 힌이 있단 말이죠. 미래적으로. 또 과거적으로는 은혜를 받고 나면은 아주 과거에 일어난 사건인데 십자가 사건이 지금 현재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사건처럼 그렇게 받아 들여 진단 말이죠. 그런 거거든요. 그러면서 이제 두 번째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뭐냐 하면은 히브리서를 받고 있는 그 수신자들의 신앙과 삶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불의하신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그들의 행위와 하나님에 이름을 위해서 성도를 섬기고 또 지금도 섬기고 있는 것을 기억하신다. 그래서 결국은 뭐냐 하면은 신앙에 있어서 자기가 신앙을 가졌다고 확신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구원에 확신을 갖지 못 하면은 우리들이 늘 흔들립니다. 그리고 그런 구원에 확신을 가질 때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살면서 하늘에 은혜를 맛보면서 살아 갈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들이 힘을 공급을 받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는 확신이라고 하는 것이 아주 훌륭한 하나님의 선물이고 또 우리 모두 가져야 할 그런 필수 불가결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거죠. 근데 그 확신이라고 하는 것이 확신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 확신 때문에 하나님께 더 나아가고 하나님 앞에 더 단정하게 살고 주위에 도움을 받고 하는 그런 쪽으로 나아가야지 그 확신이라고 하는 것이 확신하기 때문에 이제 넉넉히 죄를 지어도 좋다 태만하게 살아도 좋다 이런 쪽으로 기여하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 아닐 수도 있고 또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면 그것을 올바로 사용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확신을 그런 쪽으로 사용해야 되는 거죠. 확신을. 내가 구원 받았다 라는 확신을 그럼으로 이제는 내가 흔들릴 필요 없이 더욱 주님을 섬기는 자로 살자 내가 그렇게 구원을 받아서 흔들릴 수 없으니깐 이제 내가 더 이상 방황할 필요 없이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내가 구원을 받았으니깐 내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면서 살아야 한다. 이런 쪽으로 이어져야 되잖아요. 근데 그렇지 않고 그 확신이 우리로 하여금 부패한 삶에 우리를 방임하고 그리고 구원받았고 또 확신을 내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웬만한 것은 문제가 안된다. 이런 식으로 자기를 방임하는 삶을 사는 것은 백여하기에 아주 적합한 마음가짐이다 하는 것이죠. 그게 우리는 그렇게 살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항상 우리 안에 이런 타락에 가능성 부패에 가능성이 늘 남아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에 깊은 은혜 가운데 있을 때에도 우리들이 졸지에 타락해서 비참한 인간이 될 수 있다라고 하는 그런 것을 생각하면서 자기가 늘 그런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겸비한 그 마음으로 매일 매일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죄가 우리를 이기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깐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시고 또 나를 나에게 은혜를 주시고 이랬을 때 그런 은혜의 상태를 감사는 하지만은 이것이 영원히 내게 있어서 안전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은 반드시 넘어 집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되고 항상 그렇게 내게 주신 은혜의 상태가 감사하지만 이게 영원하게 아니라 그리고 매일 매일 나 자신을 부인하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 이거죠. 그것이 우리들이 이런 백요의 타락에 흐르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중요한 대비책이 되는 겁니다. 오늘 사도가 편지를 쓰고 있는 사람은 편지를 보내고 있는 수신자는 그들은 행위가 있고 하나님에 이름을 위해서 산 사람 이였어요. 그리고 실제로 성도들을 섬기고 그리고 지금도 섬기고 있는 중이였고 그래서 그것을 하나님께서 알아 주실 만한 많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였습니다. 그렇지만 요한 계시록을 보면 똑같은 얘기가 나오잖아요. 예배서 교회를 향해서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고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하고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위해서 아닌 자들을 시험하는 것도 알고 쭉 나오잖아요. 근데 결국 처음 사람을 버리 잖아요. 그리고 주님을 배반하게 되잖아요. 그러니깐 이러이러한 것들이 일단은 너희가 근본부터 하나님을 이렇게 배반할 사람이라고 하는 것들은 여겨지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안심할 수 없다. 흔히 얘기하는 거죠. 그래서 가장 좋은 방어는 공격이라는 말이 있죠 전쟁에서 마치 거기서 똑같이 우리 신앙생활에도 죄에 의해서 우리가 부패해지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죄를 막기 위해서 애를 써야지만은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거룩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요. 백여할 까봐 어떻게 백여하지 않을까 염려하며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은 에수 그리스도가 내 인생에 전부이고 그리고 그 분이 없다면은 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인식을 가지고 그분을 단단히 붙들고 그분과 함께 동행하며 승리하려 하는 그런 진실한 삶의 추구가 뒤따를 때 그 때에 그것이 그를 모든 죄에서 지키고 백여의 위험으로부터 지켜주는 것이죠. 그런 삶을 우리들이 매일 살아가야 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