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57
목 차
내 영혼의 피난처(시 57:1) 25
구원하시는 하나님(시 57:2-3) 30
고난 중에 드리는 간구(시 57:4-5) 34
확정된 마음(시 57:6-7) 37
영광의 찬송(시 57:8) 40
궁창에 미친 하나님의 영광(시 57:9-10) 43
간절한 기도(시 57:11) 47
시편57편 강해 1
시편57편 강해 1
시편57편 강해 1
시편57편 강해 1
시편57편 강해 1
시편57편 강해 1
시편57편 강해 1
내 영혼의 피난처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시 57:1)
본문해설
다윗은 왕이 되기를 꿈꾸었던 야심 있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 했던 한 사람의 언약백성에 불과하였는데 하나님이 그를 쓰시겠다고 불러서 기름을 부어주셨습니다. 모든 준비가 다 끝나고 왕의 보좌에 나아가기 직전에 기름을 부어주셨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진작 기름을 부어주시고 상당한 시간동안 사울에게서 고통을 받게 하셨습니다. 다윗이 일평생 세 번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첫 번째 기름부음은 그에 있어서 평생 잊혀지지 않는 강력한 하나님의 신이 임재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강력한 기름부음을 다윗에게 허락한 이래로 그는 내적으로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뛰어난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어 가는 사람이 되었지만, 그 후부터 사울의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 시는 다윗이 사울을 피하기 위해 굴에 숨었던 때의 경험을 노래하면서 하나님 앞에 지은 시입니다. 그는 누구에게 호소하거나 정치적인 수를 쓸 수 있는 힘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사울이 치면 맞고, 추격하면 도망을 해야 하는 처지에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만을 의지했습니다. 굴에 숨어 있는 가운데 가장 고통스러운 은신의 때에 그것을 하나님께 비는 기도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고난 가운데 온전히 의지함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두 번이나 같은 기도를 반복하는 것은 다윗의 처지가 얼마나 외롭고 비참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을 가진 사람과 신앙이 없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얼마든지 내가 원하지 않는 질서 가운데 놓이게 되는 고통과 고난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위해 애매히 당하는 고난이든, 혹은 자기의 죄와 잘못 때문에 당해야 하는 고통이든지 간에 그런 깊은 고통과 괴로움을 당해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주님께 피합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때를 하나님을 의지하는 훈련의 기회로 삼습니다.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이러한 극심한 고난의 때 고난의 이유가 무엇이든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신의 처지에 절망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깊은 어두움 속에 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든 이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을 소유함에 있어서는 타락하기 이전의 인간이 우리보다 뛰어났지만, 하나님은 타락을 통해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결코 인간이 알 수 없었을 하나님을 향한 의존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비록 타락한 이후 타락하기 전과는 비교되지 않는 불리한 위치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풀어 주신 좋은 것들을 상실하였지만, 역설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죄 때문에 주님을 더 많이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아담도 몰랐던 비밀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때보다 더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아담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탁월한 지성과 올곧은 의지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덜 의지할 가능성이 많았지만 은혜 안에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 안에 남아있는 죄와 이 세상의 불완전함 때문에 하나님을 더 많이 의존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면서 마음이 녹아내린 적이 있을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을 하나님 앞에 올리는 제사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의지와 감정이 하나님의 모든 뜻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이며 자기를 완전히 굴복시킨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과 인간들이 당신을 의지하며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당신의 사람으로 쓰시기 위해 사면을 두루 살펴도 아무도 돕는 자가 없게 만드시고, 불같이 치열한 시련을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보게 하시고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는 정신과 의존의 마음 안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알게 하셨습니다. 의존의 마음 때문에 용상에 올랐으나 자신은 하나님 앞에 그분을 섬기는 한 사람의 종일뿐이요, 자신은 모든 권세를 지니고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으나 곤고하고 궁핍한 하나님의 자녀일 뿐이라는 고백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처지를 재앙 아래 있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굴 밖에는 사울의 군사들의 치열한 추격이 있고, 자신의 인생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성에 에워싸여 있습니다. 큰 재앙을 지나면서 그는 오로지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괴로운 일과 고통, 시련과 고난이 자신의 허물로 말미암은 것이든 애매히 당하는 고난이든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품 안에서만 진정한 쉼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평탄한 인생의 길을 걸어가게 하지 아니하시고 끊임없는 시련과 도전에 직면하게 하십니다. 남이 보기에는 평탄을 가더라도 내면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고통을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허락하셔서 그로 하여금 고난의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 한 분만을 온전히 갈망하고 의지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기시고 모든 것을 주셔도 이 세상의 근본은 괴로움과 고통일 뿐이라는 고백 속에서 인생사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 한 분 만을 의지하고 바라게 하십니다.
폭풍과 같은 추위가 오고 얼음을 얼리는 것 같은 사풍이 몰아칠 때 그 역경을 인해서 이 세상이 자신의 고향이 아님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시게 하십니다.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기도할 때 형통한 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면서, 이 어두운 세상에서 살도록 부르시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도록 자기를 선택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시간과 공간과 세상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주님을 위해 살게 하십니다. 이 모든 섭리는 시인으로 하여금 하나님 한 분만을 전심으로 갈망하고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주님의 사람으로 세우심에 있어서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좋거나 고통스러운 일들을 사용을 하십니다.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할지 시인은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질 것이고, 주님이 주신 약속은 성취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을 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목적지는 이미 정해졌고 거기에 도달할 것은 확신하는데, 거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시인에게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래사를 우리에게 미리 보여주시지 않는 이유는, 만약 미래사를 우리에게 보여주신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확실성속에서 우리는 말씀을 붙드는 믿음을 갖게 되고, 불확실성 속에서 우리는 기도하는 의존의 심정을 갖게 되고, 불확실성 속에서 우리는 혼자갈 수 없는 길에서 주님의 손을 붙들기를 원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함
불확실성 속에서 시인은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주님은 종종 독수리로 묘사되었습니다. 기품 있게 하늘을 나는 독수리의 영광은 그의 날개에 있습니다. 큰 날개로 시인을 덮어 눈으로는 원수들이 찾을 수 없게 하고 발견했다 하더라도 독수리의 보호를 받음으로 그들의 강함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 ‘날개 그늘 아래’라는 것은 보호를 의미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품 가까이 있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인 교재의 기회를 갖게 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이러한 방식으로 고난의 때를 이겼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무엇이라고 소리치든지, 율법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송사와 정죄의 외침이 들려올지라도 그는 아무것도 부인하지 않고 모든 것들을 안고 하나님을 의존하였던 것입니다.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 내가 피하겠습니다.”라는 기도였습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의 인생의 모든 일들은 기쁘고 행복한 것 같아도 이미 그 안에 슬픔이 내재되어 있고 슬프고 쓰라린 것 같아도 그 안에 기쁨과 행복이 담겨있습니다. 신앙은 이 표상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모든 인생사에 일어나는 일들 뒤에 그 모든 것들을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순경(順境)이든 역경(逆境)이든지 그 모든 것을 인하여 주님께로 피하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신앙입니다. 우리의 인생 중 어느 때도 주님을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때가 없는 줄 알아 그분이 우리의 마음의 전부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일어나는 좋고 나쁘고 크고 작은 모든 사건과 기회들을 그분의 성품을 알고 그분의 성품이 행사되는 방식을 이해하는 기회로 삼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당신의 날개 그늘 아래 지키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저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찌라(셀라)
하나님이 그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시 57:2-3)
본문해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찬송가가 많이 작곡되었던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그때가 교회가 평안하고 음악가들이 많았던 시대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찬송가가 많이 작곡된 때는 대부분 전쟁이 있거나 큰 재난이 일어나서 사람들이 큰 고통을 받을 때입니다. 그 때 특별히 찬송시들이 써집니다. 이것은 고난이 교회로 하여금 얼마나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임하는 많은 고통과 시련은 오히려 잠자던 교회를 일깨워서 하나님을 찬송하게 만들어 주고 하나님의 선포를 생각하게 합니다.
본문을 보면 시인이 그런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고 있습니다. 원래 죄 된 인간은 하나님을 부르짖고 사는 것이 본성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거듭난 새 본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려고 하지만 우리에게 남아서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옛 본성은 하나님 없는 삶을 꿈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시인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으면서 간구합니다. 시인의 이러한 간절하고 절실한 부르짖음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악한 자들의 압재로부터 건져주시기를 바라는 절실한 기도였고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이러한 간절할 부르짖음 속에서 시인은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건져주시리라는 것을 신앙 안에서 확신합니다.
시인의 신앙 1: 전능하신 하나님
첫째는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루실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사람에게는 힘든 것과 덜 힘든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일을 이루기 위해 큰 능력과 적은능력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그런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뜻하시기만 하면 능히 이루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믿음이 시인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절실하고 간절하게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시인의 신앙 2: 인자와 진리로 구원하시는 하나님
두 번째로 이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해 주시되 어떻게 구원해주실 것인가 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인자와 진리, 이 두 가지를 보내셔서 자신을 구원해 달라는 기도는 시편에서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인자와 진리는 무엇일까요?
‘인자’는 히브리어로 ‘헤세드’(dsej)인데, 이 말이 보여주는 것은 인간의 공로를 따르지 아니하고 하나님 자신의 사랑의 성품을 따라서 인간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호의입니다. 시인을 괴롭히고 고통을 주는 사람들은 악인이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들이고, 자신은 그들에게 피해를 받는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의롭고 완전함을 주장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악인에게 고통을 받는다는 이유로 우리 자신이 갑자기 의로운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 호소하기를 “내가 저 악한 사람들보다 의롭기 때문에 나를 건져주시고 승리하게 하소서.” 하는 기도를 드린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수들보다 더 낫게 하나님께 대우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나의 의로움으로 인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 때문이라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고난과 어려움을 주시는 이유는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거룩하신 속성에 우리를 깊이 젖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자기 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적인 교통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자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고난과 어려움을 당할 때 이런 기도가 필요합니다. 주님의 성품을 묵상할 기회로 삼아야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의 빛 아래서 그분을 묵상하고 알게 하시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고난 속에서 기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진리’는 히브리어로 ‘에메트’(tm,a)라고 되어있습니다. 이것을 진리라고 번역을 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말의 원래 뜻은 ‘신실함’입니다. 그러므로 ‘진리’, 혹은 ‘신실함’으로 번역이 됩니다. 사실 두 가지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신실하다’, ‘믿을 만하다’는 것은 일관성입니다. 믿을만하고 신실한 것, 이것은 일관성입니다. 일관성은 객관적인 기준에 따라 꾸준히 같은 쪽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마음먹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객관적인 기준이 없는 것을 변덕스럽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 안에서 변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당신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에게 항상 동일하게 예측할 수 있게끔 당신의 성품을 따라서 움직이시고 행동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성품을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하십니다. 그런 신실하심 때문에 시인이 하나님 앞에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인간은 변덕이 심하기 때문에 오늘은 저 사람에 대한 열렬한 후원자가 되었다가 내일은 배신자가 되고, 내일은 저 사람의 배신자였지만, 모레는 저 사람을 향해 돌아서는, 신실함 없는 마음과 행동을 얼마든지 갖습니다. 그가 변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그를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함없이 신실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함없이 신실하신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이끄시고 돌보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자와 신실하심을 진리의 말씀을 통해 알게 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인자와 진리를 보내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환란과 시련을 당하면 그 답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아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같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예측할 수 있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눈에 보이는 원수들의 강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결론과 적용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에 아브라함 링컨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원수의 수가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의 문제이다.” 우리의 원수가 많건 적건 전능하신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고난 중에 드리는 간구
“내 혼이 사자 중에 처하며 내가 불사르는 자 중에 누웠으니 곧 인생 중에라
저희 이는 창과 살이요 저희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시 57:4-5)
고난에 처했을 때
전반부에서 시인은 자기가 원수를 인해서 당하고 있는 고난을 극단적인 필치로 묘사합니다. “내 혼이 사자 중에 처하며”, 여기에서 ‘혼’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네페쉬’(vp,n<)를 번역한 것인데, 영혼이라는 뜻도 있지만 문맥상으로 볼 때 이것은 ‘목숨’입니다. ‘네페쉬’라는 단어는 영혼, 사람, 정신, 목숨이라는 다양한 뜻으로 쓰입니다. 시편에서는 ‘네페쉬’가 목숨이라는 뜻으로 자주 쓰입니다. “내 목숨이 사자 중에 있으며”라는 뜻입니다.
굶주린 사자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사자는 대개 군집생활을 하지 않습니까? 그 때 먹을거리가 하나 나타났다고 생각해봅시다. 한 마리의 사자가 그 짐승을 사냥했다 할지라도 여러 사자들이 달려들어서 콧등이며 얼굴전체를 피로 범벅하면서 포획물을 함께 뜯어먹을 것입니다. 자신의 처지가 자기를 괴롭히는 원수들에게 그런 상태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포획물은 뜯어먹기 위해 달려드는 사자 앞에서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는 힘없는 존재입니다. 마찬가지로 시인은 자신이 처한 역경이 스스로는 극복할 수 없고, 자기는 원수들에게 무력하게 뜯어 먹히는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섬뜩할 정도로 사실적인 묘사로 다가옵니다.
“내 혼이 사자 중에 처하며 내가 불사르는 자 중에 누웠으니 곧 인생 중에라”, 시인은 자신의 목숨이 사자들 중에 뜯기며, 자기를 불사르는 자 중에 누워있다고 말합니다. 자신은 메마른 풀밭에 누워있고 사면에서 원수들이 불을 지릅니다. 불길이 가득할 때 시인은 자신의 힘으로 사방에서 밀려오는 뜨거운 불길을 이기고 극복하고 갈 방법이 없습니다. 시인은 인생 중에 거하는 자신의 처지가 이러하다는 것을 피력을 하였던 것입니다.
“저희 이는 창과 살이요 저희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그들은 창과 화살과 혀로 시인을 공격합니다. 창은 한 번에 꿰뚫어 절명시킬 수 있는 무기이고, 활은 보이지 않는 먼 곳에서 날아와 자기를 죽이거나 커다란 상해를 입힐 수 있는 무기이지만, 혀는 고통 받는 시인에게 괴로움을 더하는 근거 없는 비난과 욕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
그 속에서 깊이 고통을 받으며 시인은 하나님 앞에 원수를 향한 복수와 많은 이설들을 이야기할 것 같은데 오히려 그는 마음과 뜻을 모아 특이한 기도, 다윗에게 전형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은 원래 하늘에 계신 분으로 묘사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의 질적인 차이 때문에 그 초월성을 가리켜 이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라는 말은 주님의 이름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주와 주의 이름은 항상 동격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것은 똑같은 것입니다. 주님을 더불어 힘을 얻는 것과 주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힘을 얻는 것은 동일합니다.
시인은 주님의 이름이 세상에서 멸시받지 않고 하늘에 높이 들리도록 호소하고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시인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했고, 그가 고난을 이기는 방법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자신의 고통스러운 처지가 아니라 영광을 받으셔야할 하나님을 주목하면서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의 거룩한 성호가 모든 사람들에게 받들려 영광을 받으시기를 구했습니다. 자신이 고난 받는 모든 과정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과정이 되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문제는 그것만 들여다 볼 때는 복잡해보여도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면 의외로 단순한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확정된 마음
“저희가 내 걸음을 장애하려고 그물을 예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저희가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스스로 그 중에 빠졌도다(셀라)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시 57:6-7)
악인에게 고통 받을 때
시인은 악인으로 인해 고통을 받던 때를 회고하고 있습니다. “걸음을 장애한다.”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걸어가는 걸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걷는다.’라는 히브리어 ‘할라크’(&l'h)는 ‘인생을 살아간다.’라는 뜻으로 훨씬 더 많이 사용됩니다. 나그네가 출발해서 걸어가는 보행에 인생길을 빗댄 것입니다.
“저희가 내 걸음을 장애하려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인생의 길이 있는데, 그것을 방해한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인생길을 방해하기 위해 그물을 예비하였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물’은 사람들이 짐승을 낚는데 사용하거나 전쟁에서 적군을 포획하는데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그물의 특징은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볼 수 없도록 감추어져 있다가 한 순간 내려와서 짐승을 포획하듯이 낚아채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그물을 이해할 때 짐승을 잡는 그물도 있지만 새를 잡는 그물을 말하기도 합니다. 당시 새를 잡는 그물은 나무와 나무사이 같은 곳, 새가 많이 날아다니는 통로에 가느다랗고 질긴 실로 엮어 그물을 칩니다. 새가 그물을 빠져나갈 수 없도록 넓은 면적에 걸쳐 놓습니다. 새의 눈은 초점을 맞춰서 먹잇감이나 사물을 볼 때는 명확하게 보지만,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가느다란 실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물이 없는 줄 알고 날아갑니다. 그러면 몸이 그물에 걸리게 됩니다. 앞으로 빠져 나가기에는 너무 좁고, 뒤로 빠지려고 하면 깃털이 반대방향으로 쓰러져 있어서 한번 잡히면 깃털이 망에 걸려 절대로 나올 수 없다고 합니다. 그것이 새의 그물입니다. 이 때 새는 남의 도움 없이는 자력으로는 그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시인은 “악인들이 그물을 예비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의 인생에 악인들로 말미암은 난관이 있으며, 이것은 예측하기 매우 힘들고 예측했다 하더라도 그물에 걸리게 되면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내 영혼이 억울합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억울하다’는 의미는 원통하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압박을 받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억눌리고 압박을 받나이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 속에서 시인은 얼마나 깊이 고통을 받았겠습니까?
확정된 마음
고통을 받는 중에 놀랍게도 악인들이 시인을 넘어트리기 위해 판 웅덩이에 자신들이 빠지는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고통, 악인들의 위협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은 결과, 하나님께서 그들을 웅덩이에 빠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보호하고 인도하시는 것을 경험하면서 오히려 인생의 커다란 위기를 통해 흔들리는 마음을 확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7절에서 고백하기를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라고 합니다.
오늘날 신앙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마음의 정함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상으로 떠돌고 신앙도 떠돌고 하나님에게도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도는 상황이 오늘날의 상황 아닙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신앙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올곧음이 없습니다. 마음을 쏟지 못하기 때문에 종교의 본질은 왜곡됩니다. 시인은 자신의 마음이 확정되고 확정된 가운데 자신을 쏟아 부을 수 있었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습니다. 인생에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 악인이 도처에 창궐하고 자신은 홀로 된 것 같은 인생의 위기에서 하나님 앞에 간구할 기회를 얻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건져주셨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그의 마음은 확정되었습니다. 그랬더니 가장 시련이 많았던 그 시기에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마음에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시인이 보여주는 노래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가장 고통스러워 보이는 과정, 우리의 영혼이 억눌리는 것 같은 인생의 고난의 시기를 통해 오히려 하나님이 매우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확정되지 못하고 흔들리는 우리의 마음이 확정되고 또 확정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굳건히 붙들고,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하고 노래할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합니다.
영광의 찬송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 57:8)
˚내 영광아 깰지어다˛
시인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확정되고 또 확정되었더니 하나님을 찬송할 감격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여기에서 ‘영광’이라는 것은 자기를 하나님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소중한 존재로 만드는 그 무엇을 가리킵니다.
여기에서 “내 영광아”라고 한 것은 최소한 두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로 이것은 자기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영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자신의 고유성을 갖지 못한 사람을 가리켜서 우리는 영혼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 영혼은 인간의 영광을 누리게 하는 가장 중요한 내적인 요소입니다. 한 사람의 위대함은 정신의 크기에 달린 것이고 이 정신이 얼마나 올바른 힘을 가지고 있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의 정신의 힘의 올바른 크기가 그 사람의 영광의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의미는 시인이 가지고 있는 외적인 장점들을 가리킵니다. 시인이 어떤 권세를 가지고 있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무엇을 가지고 있다면 그 모든 것들이 전부 다 깨어서 하나님을 알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인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감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시인이 “비파야 깰지어다 수금아 깰지어다” 이렇게 노래하는 것은, 마치 비파나 수금이 영혼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주체인 것처럼 의인법적인 대화를 나누는 광경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송의 주체는 자신의 영혼이지만 자신의 육체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장점이 하나님을 향한 찬송에 참여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 비파와 수금으로 일컬어지는 모든 악기들이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에 참여하게 되기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난과 시련 속에 있다가 하나님이 거기에서 자기를 건져주시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게 되었을 때 시인의 마음속에서 생겨났던 현상입니다. 깊은 감격과 하나님을 향한 강력한 찬송이 시인의 마음속에 어우러지고 솟구치게 되었습니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그는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새벽이 잠을 자는 것도 아닌데 새벽을 깨운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새벽은 고요한 시간의 대명사입니다. 밤은 모든 사람들이 휴식과 안식을 취하느라 고요한 시간이지만 새벽 시간은 일하여야할 시간과 쉬고 있는 시간이 겹치는 시간입니다. 쉼과 안식, 죽음으로 상징되는 밤이 끝나고 생명과 노동, 활기로 대변되는 하루의 아침이 시작되는 시간입니다. 새벽을 하나님 앞에 깨우겠다는 의미는 일차적으로는 자기 안에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감격을 그칠 수 없는 상태를 보여줍니다. 새벽이 밝기를 기다리면서 하나님 앞에 쏟아놓듯이 터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아침에 만나게 될 모든 만물들을 향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선포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시간이 새벽인 것도 아주 놀라운 수사법적인 시간의 묘사입니다. 지나간 어두운 밤은 시인이 원수들에게 걸음이 장애를 받고, 그물이 준비되어 영혼이 억눌린 것 같은 상태에 있었던 시간들을 상징한다면, 새벽은 지난 어두운 밤이 모두 끝나고 새로운 날이 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날을 하나님의 보호와 섭리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악한 자들은 웅덩이를 팠으나 스스로 빠지고 미끄러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시작의 날을 맞이하면서 하나님 앞에 비파와 수금으로, 온 마음과 영혼으로, 자신의 육체의 모든 영광과 영혼의 아름다움으로 하나님께 노래하고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는 것은 정확히 자신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만큼만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명백한 것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이 경험된 것만큼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고난과 시련을 통해 가득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에 이제는 자기 혼자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어두움이 물러나고 아침의 햇살과 함께 마주하게 되는 모든 세상을 향해서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도록 이 새벽을 깨우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오늘날과 같이 무기력한 신앙생활이 보편화되어있는 때는 우리에게 이런 신앙의 감격과 바깥세계를 향해 터져 나오는 신앙의 기쁨들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힘을 가진 내적소명입니다. 그 소명은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계에 가득하고 자기를 비롯한 모든 이웃과 만물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궁창에 미친 하나님의 영광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열방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대저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시 57:9-10)
˚주께 감사하오며˛
본문의 배경은 시인이 환란과 시련을 당한 바로 그 때일 수도 있겠지만 그 사실을 회상하는 가운데 신앙의 감격이 넘치는 것을 기록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이것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존재가 누구인지를 알고 자기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안에서 돌봄을 받는 것을 인하여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원수들로부터 자기를 건져주시는 기이한 은혜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관계에 충실하게 당신의 할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돌보심 때문에 받는 은총의 표현인 것입니다.
‘감사’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가장 훌륭한 기도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면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의식들이 감사에 맞추어서 움직이는 영향력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감사는 어느 곳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일종으로, 또 어느 곳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찬송으로 불립니다. 그만큼 감사는 우리 자신을 움직이는 커다란 힘이고 정신의 작용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이 우리를 움직이는 큰 힘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것을 하나님 앞에 늘 드리기 원하십니다. 찬송과 감사, 이것은 언약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드려야할 최고의 제사입니다.
그러면서 “주를 찬송합니다.”라고 말하는데 하나의 대구법입니다. 만민 중에서 감사하고 열방 중에서 찬송한다고 했으니 만민과 열방이 짝을 이루고, 감사과 찬송이 짝을 이루는 것입니다. 같은 의미의 반복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의 대표로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시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열방과 만민이 하나님께 마땅히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먼저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의 인자와 신실하심
시인은 하나님의 속성을 노래합니다.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여기에서 ‘진리’라는 말이 나오는데 히브리어로 ‘에메트’(tm,a,)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진리’라고 번역해도 좋지만 ‘신실하심’(faithfulness)에 가깝습니다. ‘에메트’라는 명사는 ‘아만’(@m'a)이라는 단어에서 나옵니다. 거기에서 여러분이 잘 아는 ‘아멘’이 나오는 것입니다. 모세가 “내가 그들의 유모입니까?”라고 했던 말에서 그 단어가 나옵니다. “연약하고 힘이 없는 것을 굳세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신실하심은 궁창에 이르나이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두 가지 속성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신실하심은 궁창에 이르나이다” 여기에서 사용된 ‘궁창’이라는 단어는 ‘sky’, 푸른 하늘입니다. 우리가 하늘을 쳐다보면 파란 하늘이 보입니다. 그것을 히브리인들이 ‘궁창’, ‘라키아’(['yqir;)라고 불렀습니다. “하늘에 미친다.”라는 것은 ‘솨마인’(@yIm'v;)인데 우주를 가리킵니다. 이 ‘하늘’은 우주를 가리키기도 하고,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늘나라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 묘사는 하늘과 온 우주에 가득한 하나님의 두 가지 속성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인자’와 ‘신실하심’, 두 가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푸신 호의와 구원의 기초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실하심’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언약관계에 충실하신 하나님의 모습에 대한 노래, 찬송입니다. 그 신실하심이 궁창에까지 가득 미치는 것입니다.
당신을 알리시는 하나님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가 영이시고 무한하시고 완전하시고 불변하시고 단순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의 속성과 속성이 시행되는 방식에 대해 아는 것을 말합니다. 시인이 하늘에까지 가득한 하나님의 인자하심, 궁창에까지 가득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감격적으로 노래하는 것은, 하늘을 보면서 발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속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속성을 가지신분인가 하는 사실을 가장 잘 발견할 수 있는 첫 번째 무대는 자신의 마음속입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우주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중세의 사람들은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개혁주의자들은 그렇게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살아계셔서 당신의 속성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때에도 우리의 마음을 통해서만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지성 속에 비췰 때 가능합니다.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이 성경의 증언을 통해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보여줄 때, 우리는 진리와 성령의 도움으로 비로소 거기에 하나님이 나타내 보여주시는 속성과 그 속성이 시행되는 방식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깊이 깨닫게 될 때 우리의 인생과 인간들의 삶속에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고 계신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다시 상승하는 지식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방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가장 잘 보여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아는 방법에는 상승의 방법과 하강의 방법이 있습니다. 상승의 방법은 인간에게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 가지 이유로 하나님화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올바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앎, 삼위 하나님에 대한 앎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시지만 이것은 상승의 방법이 아닌 하강의 방법을 통해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기 전부터 삼위 하나님이셨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시는 성육신을 통하여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계시하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식도 먼저 그분을 시인함으로 믿고 받아들이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신앙으로부터 더듬어 내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강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을 알고 난 후에는 얼마든지 우리 안에 이미 계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인해서 창조된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발견하며 감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과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신앙생활입니다.
결론과 적용
시인은 한 때 곤고하고 고난을 받았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인자가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가 궁창에 가득한 것을 인하여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찬양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가장 훌륭한 신앙은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 때문에 감격하고 감사하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돌아와야 할 분이 하나님이 아니라 돌아가야 할 사람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분의 이름을 높이고 찬송하는 것, 이것이 신앙의 본질인 것입니다.
간절한 기도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시 57:11)
본문해설
본문에서 시인은 “하나님은 본래 하늘에 계신데 그 하나님이 하늘 위에 높이 들려지시기를 원합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렇게 고백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에서는 11절 자체가 병행법으로 되어있습니다. 병행법은 히브리어 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하고, 사전적으로는 잘 이해되지 못하는 단어들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줍니다. 병행법이라는 것은 “낮은 낮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전하니”처럼, 앞의 구절과 뒤의 구절이 각각 동일한 사상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단순 반복하는 것도 있고, 발전하면서 반복하는 것도 있고, 두 개가 짝을 이루는 경우도 있고, 세 개가 짝을 이루는 경우도 있고 다양한 기법으로 나타납니다.
이 구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에 높이 들리시며”, 뒤에 보면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이라는 단어와 ‘주의 영광’이 짝을 이루고, ‘하늘 위에’라는 단어와 ‘세계 위에’라는 단어가 짝을 이루고, ‘높이 들리며’라는 단어와 ‘높아지기를’이 짝을 이루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높아지기를’이라는 단어가 없지만 생략된 것으로 봅니다. “하나님이여 하늘위에 높이 들리기를 원합니다.”라고 할 때 이것은 실제로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영광
성경에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이 동일하게 사용됩니다. 성경의 사상에 의하면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당신의 이름은 이 세상에 두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 없으시냐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계시지만 계신다고 할 때는 “여기에 있다.”라고 표현하는 것과는 의미가 많이 다릅니다. 예를 들면, “여기에 돌멩이가 있다. 물이 있다. 공기가 있다. 사랑이 있다.”라고 할 때 모두 ‘있다’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의미가 다 다릅니다. “여기에 김 아무개가 있다.”라는 것과 “우리 안에 사랑이 있다.”라는 것은 현저하게 다릅니다. 하나님은 어떤 형태로든 인간이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사물이 아니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세계에 계시다고 할 때 흙이나 바위, 돌, 사람, 나무, 짐승, 이렇게 형체를 가진 사물이 이 세계 안에 있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미신적인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하나님의 이름을 이 세상에 두셨다는 것은 성경의 일반적인 진술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세상에 없다고 말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주의 영광’이라는 말과 짝을 이루며 등장합니다. 결국 “나는 하나님 당신의 이름이 하늘 위에 높이 들려지기를 원합니다.”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높이 들려지기를 원한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영광이 높이 드러난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깃발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땅에 깔아놓았을 때는 사람들이 그 깃발을 볼 수 없지만 높은 국기게양대에 달아서 수십 미터나 되는 꼭대기로 올라가고 바람이 불 때 국기가 펄럭이면서 수만 명의 사람이 그 국기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이름이 높이 들리게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언약백성들의 갈망
그렇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깨닫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 땅에 있는 언약백성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은 안 보이지만 하나님을 그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보이고 그 삶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성품과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사랑을 경험하고 그 사랑을 따라서 살 때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그 사랑을 행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결국은 우리 안에 있는 진리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입니다. “주의 영광, 주님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도록 하는 힘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시인이 억울한 일을 당하고 패인 웅덩이를 앞에 두고 그 속에서 고통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악인들의 창과 살, 날카로운 칼과 같은 혀가 시인을 찌르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왜 악한 사람들이 시인에게 고통을 주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을 일으켰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이름이 하늘 위에 높이 들려지지 않은 세상에 살면서 나그네와 객과 같은 취급을 받고 때로는 원수와 같은 취급을 당해서 만물의 찌기와 같은 존재로 취급되었습니다. 그것을 볼 때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이 온전히 높아지지 못한 세상에 살고 있는 비참함을 경험하며 깊이 탄식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더욱 처절한 사모함이 생긴 것입니다. 이것이 11절의 의미입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의 사람들은 시인을 본받아야합니다. 악인에게 많은 고통을 받을 때 자기 자신의 괴로움과 고통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얼마나 하나님을 싫어하고 미워하는지를 보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구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런 현실을 볼수록 시인의 마음속에서는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았던 모든 것에 더욱 복종하고 더 온전히 순종해서 자기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를 사모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고난을 통해서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시편57편 강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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