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0월 13일 새벽예배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히 10:26).
교회역사상 가장 논란이 되어왔던 성경 구절 중에 하납니다. 왜 그렇게 논란이 되었냐 하면은 이제 로마시대 때 노바티아니우스라는 황제에 대 박해가 있었는데 예수 그리스도 께서 부활하고 승천하신 이후에 육십년대 쯤 된다고 볼까요. 이미 벌써 박해가 시작이 됐고 박해가 부분적으로 시작이 됐고 그러면서 한 이백여년 동안 치열한 박해가 주어지게 됩니다. 그때에 십대에 박해에 사건이 나타나는데 그 때 노바티아니우스라는 황제가 나타납니다. 그 때에 엄청난 박해가 이루어 집니다. 그리구 이제 나중에 313년에 콘스탄티 대제에 의해서 기독교가 용인이 될 때까지 엄청난 박해가 시작되고 초창기에는 그냥 단순한 박해였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박해가 아주 조직화 되고 그리고 로마 자체가 이 기독교를 박멸해야 할 악으로 간주하게 됩니다. 그래서 뭐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이 박해 기간 중에 죽게 되죠. 근데 이제 문제는 뭐냐 하면 그 박해 기간 중에 특별히 노바티아니우스 황제에 박해 이후에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한 문제에요. 그래서 살아남은 게 그냥 살아남은 게 아니라 신앙을 부인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한 문제 그래서 그들이 배풀어 준 세례가 유효하냐? 부터 시작해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전면적으로 부인했던 사람들에 구원 문제는 어떻게 되느냐? 하는 이런 것들은 모두 문제가 됩니다. 사실 핍박이 지나고 가면은 꼭 그런게 문제가 됩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일제시대때 미소기바라이라는게 있었습니다. 미소기바라이 천조대신에 이름으로 천조에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일본이 이야기 하는 소위 이야기하는 텐노, 천왕에 이름으로 천조대신에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서 그래서 이 천왕에 자녀가 되는 거죠. 그렇게 해가지고 거기서도 그것을 빛에 자녀라고 그렇게 불렀다고 그러는데 태양이 그 사람들에 상징이잖아요. 그렇게 했다는데 그렇게 세례주는 것을 엄청난게 많이 강요하는 거죠. 근데 이제 다fms 사람들한테는 문제가 안되는데 교회 사람들한테 문제가 된 거죠. 천조대신에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하지 않다. 아주 강렬한 반대가 있었고 박해가 있고 근데 또 교회의 의견이 갈라진 거죠. 국민에 의례다. 그까짓게 무슨 문제가 되냐? 자원하는 마음으로 일본에 건너가서 그래서 그 신사에서 참여하고 그리고 세례를 받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광복되고 나서 근데 그게 문제가 된거죠. 그렇게 미소기바라이를 받은 사람들에 그런 사람들이 주는 세례가 유효하냐. 그런 사람들이 가르치는 교훈을 하나님에 말씀으로 받아야 하느냐? 그게 옳으냐? 또 구원에 문제는 어떻게 되느냐? 하는 막 한동안 한국교회에 핫 이슈가 됩니다. 굉장히 어려운 구절이에요. 또 왜 그렇게 어려운 구절이냐 하면은 역사적으로도 그렇게 교리적으로는 이게 무슨 문제하고 맞물리냐면은 그럼 이게 구원이 취소 될 수 없는데 그러면 이게 구원 받았던 사람들이 또 취소된다는 건가? 예외적인 조항인가? 등등에 많은 문제들을 야기하게 됩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제가 설교를 하긴 하겠습니다. 아마 오십번 정도 설교를 해야지만 이 문제가 다뤄지리라 봅니다. 근데 새벽기도 시간에 이것만 할 수 없으니깐 정리를 해서 이야기 하자면은 이렇게 결론이 되는 거죠. 이 죄를 배교의 죄라고 우리는 이렇게 보는데 지금은 배교한 것처럼 보이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 올수 있는 길이 원천적으로 봉쇄된 것은 아니고 열려 있다 이렇게 보는 거에요. 그런데 그들 가운데는 그 진리를 아는 여기에 보면 뭐라고 맺여 있냐면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이랬거든요. 그래서 여기서 이야기 하는 두 가지 조건인데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이거는 이제 이거는 구원에 문제라기 보다는 구원 받은 사람이 다시 구원이 취소된다 이렇게 되면 안돼. 총괄적인 결론이 뭐냐 하면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배교할 수 없다.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진실로 배교 할 수 없다. 이렇게 보는 거죠. 그렇게 해야지만 성도에 견인에 교리나 이런 모든 교리하고 맞는다 라고 보는거죠. 그러면 어떻게 그러면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았다 그러는데 그게 어떻게 되냐? 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사람 말이죠.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이 사람들은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고 보는 거죠 결국은. 그래서 상당히 많은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하늘에 신령한 은사를 맛보고 그리고 또 그 다음에 뭔가 이렇게 커다란 은혜의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가 있다는 경험도 하고 영적인 경험도 하고 또 하나님에 진리에 말씀에 대해서 뭔가를 알게 되고 등등에 이런 신앙에 체험들을 상당히 많이 했는데 그것이 곧 구원에 경험은 아니라고 보는 거죠. 그래서 만약에 구원받은 사람들이 다시 배교한다. 그렇게 되면 그러면 구원받은 자들을 하나님이 지켜 주신다 라고 하는 견인에 교리가 무너지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상당히 기독교에 대한 많은 체험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바로 자신이 본질적으로 변화되어서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된 그 흔적은 아니다 라고 보는 거죠. 그 뒤에 보면은 짐짓 범죄한 즉 그리고 나오거든요. 짐짓 범죄한 즉 이거는 단순히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짓는 죄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배교에 죄를 이야기 합니다. 아주 의도된 가운데 배교에 죄를 저지르는 걸 이야기 합니다. 그렇게 될 때 다시 살 길이 없다. 이렇게 되는 거죠. 그래서 구원이라고 하는 그것은 바깥으로 드러나긴 하지만 외적으로 그가 어떤 경험을 체험했는가에 하는 것에 달려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우리들이 흔히 그러잖아요. 구원에 확신이 있으십니까? 이러잖아요. 그러면 그 말이 완전히 잘 못 됐다 라는게 아니라 확신은 구원받은 사건 이후에 따라 오는 것이기는 한데 확신이 있습니까? 라고 물어 볼 때 우리는 확신만 있으면 그것이 구원에 증거인 것처럼 말하는데 근데 잘못된 확신도 있을 수 있는 거예요. 그건 주관적인 거라는 거죠. 언떤 사람은 구원을 받았는데 확신이 부족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전혀 구원 못 받았는데도 확신을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깐 확신 하나만을 가지고 그 사람을 구원 받았는가 여부를 확인하다 라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고 오히려 복음을 제시 받고 구원에 이르도록 그렇게 인도되어야할 영혼들이 자기가 확신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이 구원받은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그런 효과를 가지고 있다 이 얘기에요. 그런 문제가 있는 것. 분명하게 그렇다면은 이거는 그러면 뭐냐? 그래서 이렇게 누가 지금 배교를 했는 지금 기독교를 떠나는 것 같은 태도를 취하고 그리고 그렇게 했는데 그 사람이 돌아 올수 있는 길이 전혀 없다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 마지막 까지 그렇게 겉으로 주님을 떠난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다시 회개하고 돌아 올수 있는 길이 있다고 보지만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지식을 아는 깊은 경험을 가지고 있고 구원받지 못했지만 하늘에 은사를 맛보고 하나님께서 구원에는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런 하나님에 은혜에 세계에 대해서 많이 보여준 그런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배교에 죄를 범하게 되었을 때 그들에 마음이 굳어지고 그것을 계기로 해서 영원히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게 되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거죠.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될 때에 그것은 다시 사함 받을 수 있는 길이 완전히 차단이 되는 것이에요. 그럼 신자는 어떻게 살아야 되겠느냐. 하는 거죠. 그래서 자기 자신이 단지 구원 받았다라고 하는 확신 때문에 내가 결단코 배교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그러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거죠. 언제든지 자기가 그렇게 이 신앙을 버리고 배교 할지도 모른다 라고 하는 긴장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는 거죠. 그래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즉각적으로 구원을 받고 그 구원 받은 그 안에서 또 다른 성화에 구원을 이뤄가기 위해서 애를 쓰는 사람들은 구원이 안전하다라는 이유로 도덕적인 삶에 고삐를 늦추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막 살아갈 수 있는 안심할 수 있는 근거로써 그것을 활용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렇게 하는건 그건 잘못된 것이고 그리고 만약에 그렇게 살아가면 그가 진짜 구원받은 사람일수가 없다 이거죠. 오히려 진정으로 복음을 알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내가 에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았고 이 구원이 결코 취소 될수 없는 구원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긴장감을 가지고 도덕적인 삶을 살고 하나님 앞에 온전한 신자가 되려고 힘쓴다 이거죠. 그 증거가 뭐냐 하면 사도 바울이 그런 고백을 하죠. 내가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 예수께 인도하고 자신은 버림을 받을 까봐 두려워 한다. 그게 자기를 처서 복종 시킨다. 그리스도와 그에 부활에 권능과 권한에 참여함을 알려하려 표대를 향해 달려간다. 이런 등등에 모든 고백들은 뭐냐 하면 참신자가 구원을 확신 했을 때에 가지는 오히려 실존적인 긴장을 이야기 합니다. 그런 긴장을 가지고 나아가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내가 배교할 지도 모른다 하는 이 긴장은 구원에 확신에 부족에서 기인한 거라기 보다는 구원을 확신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있는 현실적인 실존적인 삶에 대한 긴장이고 그리고 그런 긴장 속에서 그리스도 인은 점점 아름답게 성화되어 간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마음 지킴에 교리 안에서도 우리들이 그런거를 발견하게 되는데 마음을 잘 지키는 비결이 뭐냐 하면 자기자신이 그 하나님에 주신 그 은혜에 마음들을 잘 간직하며 살지 못할 때에 미끄러지게 되고 미끄리지게 돼서 자신이 타락하게 되고 타락하게 될 때에 더 더 깊은 타락 속으로 나아가게 돼서 결국은 마지막에 미끄러지고 미끄러져서 마지막에 배교할 것이다 라고 하는 그런 위험까지 생각할 때에 오늘 내가 하나님 앞에 자신에 마음을 잘 지키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게 된다. 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결코 이렇게 배교할 수 없지만 하지만 모든 그리스도 인들은 자신이 그렇게 배교자가 될 수 있다라는 두려움을 가지고 오늘 하나님 앞에서 주님이 자신의 인생에 최고의 가치라고 믿고 말씀을 따라서 사는 그런 삶을 매일매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게서 기뻐하시는 생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