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0월 21일 새벽예배
“또 어떤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히 11:36-37).
인생을 살다가 보면 환란을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환란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 삶에 상황이 평소와는 달리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우리에게 가져다주고 우리에게 많은 인내를 필요로 하는 일들이 일어나서 우리에 존재 자체가 불안해 지는 시기를 우리가 환란에 때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근데 이 환란은 크게 둘로 나뉘어서 밖으로부터 오는 환란이 있고 안으로부터 오는 환란이 있어요. 밖으로부터 오는 환란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많이 흘리고 마음 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긴 하지만 우리에 신앙이나 이런 것들이 흔들리지 않은 가운데 하나님에 섭리 속에서 우리에 환경들이 막 흔들리는 거죠. 믿음에 견고하게 서서 살려고는 하는데 사업에 위기를 맞는다던지 아니면 가정에서 자녀들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던지 건강에 위협이 온다던지 혹은 나와 관계가 있는 가족들에게 고통스러운 일이 닥쳐서 그래서 나에 삶에 환경들이 흔들린다던지 하는 그런 환란이 있구요.
또 하나는 그런 게 아니라 우리에 내면에서 오는 환란이에요. 그 내면에서 오는 환란이 대개 바깥으로부터 오는 환란과 함께 일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때로는 우리에 삶에 있어서 외부적으로는 커다란 변동이 없지만 내면적으로 알 수 없는 고통과 어려움을 겪으면서 신음하게 되는 때가 있다는 거죠. 영혼에 기품에 떨어진 모든 사람들이 다 육신적으로 큰 환란을 겪으면서 요동치는 환경 속에서 내동댕이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가만히 있으면서 어느 순간에 자신에 마음속에 견디기 힘든 고통이 일어나고 그리고 환란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이 마음에 진통이 시작되는 때가 있다는 거죠. 그럴 때를 우리들이 환란이라고 하고 이 두 가지가 한꺼번에 결합이 되어서 밖에서 우리에 삶에 기반이 흔들리고 안에서 우리의 마음이 큰 심정적이 고통을 경험하게 되면은 우리는 그야말로 마음 둘 곳 없이 고통스러운 환란에 때를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많이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종종 이런 환란에 때를 허락하십니다. 그때에 신자들에 반응은 두 가지입니다. 어떤 신자들은 그런 환란이 올 때에 그런 커다란 환란이 올 때에 그냥 그런 환란을 겪으면서 그냥 괴로워하고 고통하기만 할뿐 그 이상에 진전을 보지 못하는 신자들이 있어요. 물론 그보다 더 나쁜 경우는 환란이 오는데도 그것이 정말 환란이 닥쳐오는데도 그 환란을 환란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그렇게 정신없이 세상 것에 빠져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물론 있죠. 그치만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런 종류에 환란이 오게 되면 괴로워하게 됩니다.
또 하나에 반응은 이런 환란이 닥칠 때에 재빨리 이렇게 환란이 다가오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진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환란을 통해서 나에게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그거를 인식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죄 가운데 있는 신자들에 경우에는 전자에 해당하기가 쉬워요. 그래서 환란이 닥치면 두려움이 확 생기면서 하나님이 이제 나를 치시나 보다. 하나님이 이제 나를 징벌하시나 보다라고 하는 두려운 의식을 확 두려운 의식이 확 밀려오는 것 같은 그런 공포를 느끼게 된다는 것이죠. 그 때에 그 사람에 마음에 두려움이 확 밀려오게 되면 그 마음속에 이 단순한 환란이 아니라 심정적으로 자기가 이제껏 가지고 있었던 평안들이 뒤흔들리기 시작하면서 견딜 수 없는 두려움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가 환란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복수하시는 심정으로 우리에게 환란을 주시는 방법은 없다. 이거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인도하시는데 어떤 사람은 딱딱한 막대기로 때리면서 인도하시고 어떤 사람은 부드러운 사람은 부드러운 막대기로 인도하시는 경우가 있는데 왜 그렇게 하시는지 우리는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또 우리에 인생에 대해서 어떤 때에는 하나님이 딱딱한 막대기로 몇 번 때리셔서 우리를 정신 차리게 해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때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이 부드러운 막대기로 툭툭 건드려서 정신을 차리게 만드는 경우도 있어요. 그래서 왜 그런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 좋은 방법으로 우리에게 맞게 우리에 때에 합당하게 인도하시는 거라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대학에서 9년을 선생 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면 학생들을 한 9년 다루다 보면 이제 그 나름대로 노하우가 생깁니다. 이 학생은 소리를 지르고 야단을 쳐서 다루어야만 말을 들을 학생인가 아니면 앉혀놓고 천천히 그 인격에 호소해야 말을 들을 학생인가. 그런 구분이 생겨납니다. 아니면 저 학생은 절대로 직접 상대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 다루어야 할 사람인가 이런 것들에 판단이 생겨나게 되고 그런 경우에 학생들은 저를 보고 불공평하다 이렇게 생각하겠죠. 누구는 잘 못했는데 데려다가 차까지 먹여주고 밥까지 사주면서 잘 하라고 이렇게 하고 누구는 데려다 방문 열고 들어오자마자 레포트 들어 던지면서 소리를 지르고 너 같은 톰 신학교 오라고 도장 찍어준 목사님은 누구냐고 교회에 전화 한다고 엄포나 놓고 말이지 그럼 불공평하고 말할지 모르지마는 그러나 내 편에서는 가장 그 학생들을 잘 아는 지도 방법을 선택한 겁니다. 그 딱딱한 막대기로 다루어야 할 학생을 부드러운 막대기로 툭툭 치면 꿈쩍도 하지 않고 지 갈 길을 갑니다. 또 같은 사람이라도 어떤 때는 툭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때가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막대기로 후려쳐고 그 막대기를 붙들고 대들 때가 있는 거죠. 그 때는 칼을 목에 대고 위협을 해야지. 조폭같이. 우리 선생들도 그런거를 안다면 당연히 당연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알고 그렇게 인도하신다는 거죠. 어떻게 되었든 지간에 어떻게 되었든 지간에 하나님이 딱딱한 막대기로 우리를 인도하시든 부드러운 막대기로 인도하시든지 간에 확실한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환란을 주시는 것은 환란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의미를 깨닫기 하시기 위함이에요. 그 의미를 깨닫는 다는 말은 하나님에 섭리를 깨닫는 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에 뜻에는 두가지가 있는데 드러난 하나님에 뜻이 있고 감춰진 하나님에 뜻이 있어요. 드러난 하나님에 뜻은 성경이에요. 이게 다 돼있어 펼치면 이럴 때는 저럴 때는 하나님이 싫어하신다 이런 내용들이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어요. 근데 섭리는 살아 봐야 알아. 왜?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선택하신 요셉이 형들에 간교한 꾀에 팔려서 애굽까지 팔려가서 죽도록 고생하는지는 그 때는 누구도 알 수 없었어요. 다 살고 나고 보니깐 요셉도 하나님이 만백성을 구하기 위해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애굽에 보내셔서 여러 환란을 겪으며 국무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본인도 나중에야 깨달은 거거든요. 그러면 우리들도 마찬가지라 이거에요. 하나님께서 우리에 삶 가운데 일어나게 하시는 환란도 하나님이 허락해 주시지 않으면 일어 날수 없는 일이죠.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도 하나님에 주권 아래 있는데 하나님이 허락 안하시는데 어떻게 환란이 일어나냐? 근데 그런 환란이 일어날 때 그때에 의미를 생각할 줄 아는 것이 인간과 동물에 차이에요. 인간은 환란에 의미를 생각할 줄 알아. 더더욱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더더욱 환란에 의미를 생각할 줄 아는 거죠. 근데 거기에는 하나님에 감추어진 뜻이 있어요. 그 감추어진 뜻 섭리가 가는 방향이 뭐냐 하면 우리를 예수님이 구원하실 계획을 따라서 가는 거예요. 그리고 그 구원하시는 계획은 결국 우리를 창조하신 계획과 일치하기 때문에 결국은 그 모든 환란과 시련이라고 하는 섭리를 통해서 우리를 데려가고 싶으신 곳은 어디냐 하면 창조의 원래 목적으로 돌아가서 그래서 우리 하나님에 이름을 높이며 진실된 삶을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가장 바라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해 놓으셨을 때 두셨던 그 자리 거기 있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면서 뭐라고 그러시냐 하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리 생각하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에 마음에 정말 들기만 하면 그러면 하나님에 사람을 많이 받기만 하면 그러면 하나님은 아까우실 것이 없는 분이에요. 그래서 무엇을 구하든지 다 주신다고 약속을 하셨어요. 문제는 구해도 얻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지정해 놓으신 원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지는 않고 자기가 하나님 나라에서 창고에서 꺼내서 그 자기만 누리면서 살려고 하니깐 하나님이 안주시는 거예요. 그런 사람에게 자꾸 주시면 그 사람은 창조에 본래 목적으로 돌아가지 않는데 하나님이 주신 그것들을 사용한다 그거죠. 그러니깐 하나님이 그 사람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허락을 안 하시죠.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정말 형통하게 사는 비결이 뭐냐 하면 하나님에 뜻대로 살고 하나님에 창조에 목적에 부합하도록 끊임없이 자기를 두며 사는 것이 바로 그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런 삶이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환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에 죄를 깨닫고 그리고 그렇게 그 죄 속에서 환란을 만나 하나님께 돌아오는 과정을 통해서 환란을 당할 수 밖에 없게 되었던 우리 안에 있는 창조에 본래 목적을 떠난 바르지 못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청산하게 한거에요. 그래서 우리를 고치시는 거예요. 그래서 참 저도 인생 살면서 환란 많이 만났거든요. 얼굴 봐요. 환란을 많이 만난 얼굴이지. 제가 그렇게 누구한테 호락호락 무릎을 꿇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오죽 했으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겠어요. 환란을 많이 만났는데 무릎을 하나님 앞에 꿇기까지 많은 환란과 어려움을 만나게 되는게 참 신기한게 뭐냐 하면 인간이라고 하는 이 동물은 말이죠.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틸 수 있는 재주를 가지고 있어요. 이게. 근데 그러면 그럴수록 더 환란을 많이 당해요. 애들도 학교에서 선생님이 이러면 무조건 빌고 보는 애들은 확실히 덜 맞아요. 아버지가 때릴려고 해도 무릎을 딱 꿇고 조금 있다가는 똑같은 짓을 하더라도 일단은 잘못했다고 김밥 싸는 애들이 이게 김밥 싸는 거에요. 김밥 싸는 애들이 제일 빨리 덜 얻어 맞습니다. 근데 이 소힘줄 같은 애들이 있습니다. 때려라 니 자식이 죽지 내 자식이 죽냐. 그런 사람들은 맞아도 몇 대 훨씬 더 맞습니다. 옛날에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중동 고등학교를 나왔는데 거기는 그렇게 애들을 잘 때리는 학교였어요. 선생님도 잘 패고 애들끼리도 잘 패는 그런 학교였는데 공부도 열심히 하고 매도 많이 맞는. 이렇게 막 비는 애들은 선생님이 확 한 대 때리다가 마는데 엎드려서 꿈쩍 안하는 애들은 선생님이 시계 벗고 안경 벗고 때리더라고. 근데 인간이 말이죠. 하나님 앞에 버티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웬만큼 어려움을 만나면은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할까 그러고 생각하면서 곰곰이 생각하면서 그것을 해결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환란을 주신 계획이 성취된 거거든요. 하나님은 환란을 보내실 때에 그 계획이 성취되기만 하시면 더 그렇게 하실 이유가 없어요. 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뜻은 하나님에 자녀들에 고생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제가 아는 목사 아들래미가 하나 있는데 얌전한데 이 친구가 군대를 간단말이죠. UDT를 지원하다 그랬데요. 그게 수중 폭파대거든요. 그건 진짜 지옥 훈련 시키는 데에요. 죽어도 가겠다는 거예요. 부모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어요. 그냥 가서 논산 훈련소 훈련 받고 총 한자루 메고 청소하다 와도 그게 가슴이 아픈데 그 수중 폭파대 들어가서 그 지옥훈련 받고 훈련받다가 사람도 죽고 그런다는데 너무 괴로운데도 가지 말아 가지 말아라 그래도 난 가겠습니다. 가겠습니다. 몇 달 후에 가서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서 목사님 어떻게 됐어요? 활짝 웃으면서 못 갔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됐습니까? 내가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게 부모 마음이에요. 왜 부모가 자식 고생하는 것을 보고 싶겠어요. 말로는 남자로 태어나서 군대는 가야 된다 그러지만 가서 얻어 맞았다. 위험을 만났다. 밥을 굶었다. 눈위에서 텐트 치고 잔데드라. 그러면 그 부모에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지는 생각해 보세요. 그게 하나님 아버지에 마음이라는 거죠. 근데 그렇게 안돌아와. 그리고 버티는 거죠. 근데 하나님께서 그런 과정을 통해서 만약에 환란을 만났는데 버티고 그 의미를 해석하지 않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하나님은 강도를 높이셔서 더 큰 환란을 보내시는 거예요. 그러니깐 왜 그렇게 하냐 이거죠. 오죽했으면 하나님이 답답하셨으면 성경에 보면은 왜 그렇게 매를 맞는냐?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터졌는데 그런데도 아직까지도 돌아오지 않느냐? 하나님에 안타까운 음성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근데 이렇게 환란을 만날때에 인간에 마음은 결국은 흔들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결국은 우리에 마음 속에 있는 많은 정욕 우리 마음속에 있는 많은 욕심 때문에 사실 사물이 올바로 보이지 않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사람에 눈이 어두워져서 그래서 그렇게 옳게 못 보는 것이 그것이 우리에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럼 환란에 과정을 통해서 우리에 눈에 비늘을 벗기시고 나면 그 다음에 죄와 우리속에 있는 욕심 때문에 보이지 않던 우리 영혼에 현실이 보여요. 내가 굉장히 부자 인줄 알았는데 내 영혼은 한 없이 가난하다 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요. 그리고 나는 정말 모자라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깐 내가 버린 받은 것처럼 이 세상에 버려져 있는 것 같은 때를 만나는 거예요. 그런 모습을 발견하는 거죠. 그러니깐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 자신에 영적인 상태와 모습을 보여 주셨을때 그때에 우리가 비로소 이게 오늘 바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오래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근데 우리 자신에 힘으로는 이런 상태를 개선할 수 없는 거예요. 성경에서 이 옷이라고 하는 것은 성도에 올바른 행실을 나타내는 것이 거든요. 그래서 계시록에 보면은 주님 앞에 서는 사람들이 새하얀 새마포 옷을 입고 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근데 언젠가 한 번 꿈을 꿨는데 말이죠. 나는 뭐 그렇게 큰 문제가 없다 라 이렇게 생각하고 살았는데 언젠가 꿈을 꿨는데 다 그 아마 예배당 앞에 서 있는지 어디 서 있는지 하여튼 그렇게 서 있는데 내가 양복을 입었어요. 아주 그냥 근사하게 넥타이까지 탁 매고 이게 양복 카라까지도 최신형으로 쫙 빼입어서 근데 이게 기분이 이상해 이렇게 내려다 보니깐 말이지 양복은 기가 막힌 양복인데 신문지로 만든 양복이에요. 그러고 나서 그날 새벽에 가만 생각해 봤어요. 어떻게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살았으면 주님이 꿈을 통해서 내게 보여주시는데 아 이게 모직 양복을 입었서도 겨울에 추울텐데 이게 동아일보하고 조선일보로 만든 옷을 입고 이러고 있나. 그리고 한참 회개한 기억이 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도 잘 모르던 우리에 영적인 상황을 환란을 통해서 보게 만들어 주시는 거예요. 환란을 통해서 그걸 딱 보고 나면은 그 다음에 자신에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 할 수가 없어요. 돈으로 해결될 것같은 문제면은 은행에 가서 찾아오고 친구에게 빌려 오기라도 하겠는데 이거는 이 영혼에 문제는 돈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하늘 자원으로 해결될 문제지 지상의 자원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거든요. 지상에 있는 자원은 우리가 얻어 올 수 있지만 하늘에 있는 자원은 하나님 한 분 이외에는 우리에게 주실 분이 없고 더욱이 나를 향해서 하늘 문이 열리지 아니하고는 그 하늘 자원이 부어질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러니깐 자신은 그런 하늘 자원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환란을 당한 위치에 있고 그리고 자신은 그것을 스스로 공급할데가 없을 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뭐냐하면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것이다 라는 거죠. 여기서 부르짖는다라고 하는 의미는 단순한 통성 기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고통과 그리고 꺾일 수 없는 열심 가운데서 마음 속에서 나오는 간절한 탄원을 하나님 앞에 꺾기지 않는 열렬함을 가지고 토해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그래서 마치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 가까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 부르짖어야지만 주님이 응답하시는 것과 같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게 하신다는 거죠. 그러면 우리에게 이런 의문이 생기는 거죠. 아니 환란을 주시는 분 혹은 넓은 의미에서 환란을 허락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래매 그리고 어떻게 환란을 당해야 했는지도 하나님이 아시고 그런 환란을 통해서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무엇을 제거하려고 하시는 계획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대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 처한 상황도 알고 우리에게 뭐가 필요한지도 알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도움을 필요로 하시는지 다 아는데 왜 하나님은 환란은 허락을 하시고 우리가 부르짖을 때까지 기다리시는가? 왜 우리가 그렇게 부르짖을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기다리시는가 하는 거죠.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나님께서 그렇게 부르짖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잘 못된 것들을 고치고 싶어하시는 거예요. 밖에 있는 환란은 하나님이 하루 아침에도 그치게 할 수 있고 하나님이 무엇은 할 수 없겠어요? 하늘을 보세요. 한번은 어떤 사람하고 같이 내가 차를 타고 가다가 그런 얘기를 했어요. 비가 막 쏟아졌어요. 집회에 나선 모양입니다. 그래서 목사님 비가 쏟아지는데 저 언덕이 있는데 저기 비가 올꺼 같아요 안 올꺼 같아요? 둘이서 나는 안 올것 같은데 목사님은 올것 같데. 차를 몰고 그 길로 가보니깐 기가 막혀 그 언덕에서 자로 긋 듯이 비가 딱 끊어져. 여기는 물이 확 젖고 그 다음 빠삭 마른 땅이야. 그게 소나기구나. 소나기가 원래 소내기에서 왔데요. 그게 맞는지 모르겠는데 저기 소가 있는데 저 소가 있는데 비가 오겠냐 안오겠냐? 그랬더니 한 사람은 온다 한 사람은 안 온다. 소내기 할래? 그러고 가 봤더니 그 소가 반은 비를 맞고 반은 비가 안 맞았데요. 뭐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소나기에요. 하느님이 그렇게 하실 수도 있어요. 이거 오늘 폭풍우가 와도 자고 일어나면 맑은 하늘이 빛나는 것처럼 하나님이 그렇게 한번에 우리에 인생에 폭풍우를 거두실수도 있고 환란을 가져가실 수도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우리 자신은 하나님이 하루 아침에 그렇게 바꿔 놓으시지 않으세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환란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게 만드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들이 오랬동안 천식이나 기관지염으로 고생을 하면서 이 기도에 막 가래같은게 달라 붙었을 때 애처로울 정도로 기침을 하면은 오히려 그것들을 통해서 그것들이 다 빠져 나오고 기도가 청소되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부르짖게 하시는 거예요. 간절히 부르짖는 동안에 그 때에 죄가 가져다 준 고통 그 죄로 인해서 형성된 우리에 마음에 틀들이 변형 되면서 그러면서 우리가 정말 새로워 지도록 하나님께서 고치시는 기회로 활용하십니다. 그런걸 통해서 우리가 정말 새로워지고 변화되고 나면은 비로서 하나님이 그런 환란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셔야 했던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내면에 이유들이 정리되고 그리고 환란을 통해서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뭐라고 그랬냐면 환란 아래 나를 부르라 내가 내게 응답하겠고 너는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그니깐 거꾸로 생각해보면 이 환란은 또한 우리가 하나님에 이름을 높힐 수 있는 기회라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이 환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올바로 기도하고 하나님에 도우심을 구하고 메달리기만 하면 오히려 그 속에서 하나님에 큰 응답을 만나고 그 환란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들이 기도할 때에 여러분들이 안팎으로 환란을 당하고 있다면 어제 새벽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염려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그리고 왜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는 자녀인 나에게 이런 환란을 주실 수밖에 없었는 가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오히려 여러분들을 그 환란에 계곡 속에서 만나주시고 오히려 오늘 당하고 있는 환란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기회로 바뀌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이런 응답을 받는 아침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