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 16일 새벽설교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히 11:11).
아브라함의 믿음의 이야기가 나온 다음에 이어서 아내인 사라의 믿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본문을 해설하기 전에 먼저 그 이게 얼마나 복된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죠. 지금 오늘날 현실도 그렇고 우리의 경험도 그렇고, 또 멀리 가면 성경도 마찬가지예요. 돌아가 보면 남편과 아내가 함께 좋은 믿음을 갖는다고 하는 것이 참 쉽지 않습니다. 여기 나오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야기나 혹은 뒤로가면 브리스길라와 아골라의 이야기도 나오지만 다윗같은 경우만 보더라도 벌써 미갈과 그리고 다윗의 믿음이 같지를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는건 참 그게 쉬운게 아니죠. 또 욥과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죠. 그렇죠? 욥은 믿음이 좋았지만 아내는 그렇지 못하죠. 이렇게 정말 쉬운게 아닙니다. 부부가 함께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믿음을 가지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저는 그래서 비유를 할 때 아내가 믿음이 없거나 남편이 믿음이 없을때 그건 마치 하나의 바퀴로 수레를 끄는 것과 같이 힘이 들어요. 둘다 믿음이 좋으면 두개의 바퀴가 수레를 끄는 것과 같이 보람되고 행복합니다. 또 하나님의 일도 훨씬 많이 할 수 있고 그런거죠. 이 아브라함과 사라과 이렇게 똑같이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의 사람으로 올라 있습니다. 부럽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래서 어느 목사님이 그런 얘기를 해요. 제자 훈련을 해보고, 성경 공부를 해보고, 별걸 다 해봐도 부부가 자꾸 이혼한다고 해요. 근데 둘이 손잡고 새벽기도 나오는 부부치고 이혼하는 부부가 없다, 그만큼 함께 믿음 생활해 나갈 때에 단지 교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 믿음이 똑같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때 그 가정도 또한 안정적이다라는 그런 이야기가 되는 거죠. 어쨌든 이 아브라함과 사라는 그렇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근데 사라가 오늘 여기에서 이렇게 믿음이 있는 사람으로 등장하는데, 아브라함도 그렇고 사라도 그렇고 제일 처음 주의 사자가 와서 그래서 그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아들을 너희에게 주시겠다 그렇게 말했을 때 이 두 부부다 아멘하고 절실하게 믿었던 것은 아니죠. 그래서 그 이야기가 맨 처음에 들렸을 때 아브라함이 엎드려서 속으로 웃었습니다. 내 나이 이제 100세가 되었고 내 아내의 나이가 이제 90세인데 어떻게 우리가 아들을 낳을 수 있겠습니까?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고백을 하죠. 그때에 아니다, 반드시 아이를 낳을 것이고, 그리고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와 같게 해 주겠다 그랬죠? 아마 하나님께서 오늘 하나님을 많이 경험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과 그 당시에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외방 사람으로서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이나 만들어서 살던 그런 사람들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그 약속들을 붙들고 살아가는 그 믿음을 똑같은 거라고 보지 않으셨던거 같아요. 그러니까 그들에게는 작은 믿음이 있어도 그것을 크게 인정해 주셨던 것이죠. 그래서 어쨌든 사라가 처음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의 그 약속을 굳게 믿는 믿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죠.
우리들이 흔히 오늘날 이야기하는 믿음은 너무나 자기 중심적입니다. 자기가 이루어지기 원하는 소원이 있으면 그것을 자기의 필요에 따라서 믿기도 하고 안 믿기도 하는거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자녀를 낳는 이 아브라함과 사래의 가정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사라와 아브라함을 훈련시키시기를 아이를 갖게 되는 그 약속, 그리고 그 아이를 실제로 출산하는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의존의 마음을 배우게 하시는 것이죠. 이것이 믿음의 정체입니다.
자신이 존재와 삶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기대려고 하는 그런 의존의 마음은 없고, 단지 자기가 받을 어떤 축복을 위해서 심리적으로 그것을 믿어야 한다고 자기 암시를 하는 그것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믿음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그것을 그렇게 약속대로 이루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아멘하고 믿는 그걸 뜻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 하나님께서 자기의 인생의 의지자가 되어 주신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향해 전적으로 의존하는 마음을 갖는 것, 그게 바로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 신앙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성경에도 보면 사라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고 계시는데, 이런 의존의 마음을 가졌던 것이예요. 그래서 아브라함과 사라가 오래동안 정들고 잔뼈가 굵었와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한 곳으로 갔지만 그곳은 텅비어 있고, 많은 금은 보화가 기다기고 있는 곳이 아니라 남의 땅에 나그네로 살아가는 삶이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이 아브라함과 사라를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이방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런 환경에 두심으로 이들이 더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그런 신앙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도록 만드는, 그렇게 자신의 존재와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는 가운데 자녀를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았을 때 그때에 처음에는 의심했지만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사실을 굳게 믿게 됩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그리고 나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고, 그리고 주님이 매 순간마다 붙들어 주시지 아니하시면 우리의 인생도, 우리의 섬김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거기에서 우리의 삶이 절대적인 순종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의지하시는 주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시고 그리고 우리에게 지시하시는 바를 우리들이 순종하지 않을 수가 없고,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그런 삶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삶이라는 것이죠.
그런 사람들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그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을 축복하시고 하나님이 그 믿음을 정말 어여쁘게 보시는 것이예요. 오늘날 우리의 삶은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순종함이 없어요. 그 믿음이 뭐냐하면 하나님께 독립된 가운데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은 없이 어떤 사실을 내가 굳게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 그건 사실 믿음이 아니라 심리적인 자기 암시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마음, 너나할 것없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해서 그리고 주님이 없는 이 세상에서 주님이 붙들어 주시지 아니하시면 우리의 힘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그런 연약함, 자기 자신의 연약함을 아는데서부터 믿음이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믿음의 본질 자체가 그런거기때문에 그 믿음은 반드시 순종을 내포하는 것이예요. 순종을 내포하는 것이지 순종을 제외한 그런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어요. 여기에 나오고 있는 아벨이나 에녹이나 여기에 거론되고 있는 아브라함이나 이런 모든 사람들이 그 인격의 특징 자체가 어두운 시대에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뢰했던 사람들이예요.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굳게 믿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속에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시고,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결코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으세요. 이 세상을 살면서 때로는 마음의 큰 고통도 허락하시고, 또 시련도 허락하시고 왜? 그런 시련과 폭풍, 그리고 마음의 많은 고통, 이런 것들을 통해서 무얼 깨달게 되냐면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그리고 정말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지 아니하시면 우리의 인생이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아주 깊이 뼈저리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깊이 깨닫게 될 때,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사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는 마음이 있는 것만큼만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그래서 마음이 물같이 녹도록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는 사람, 시시때때로 주를 바라보고 그의 도우심과 은혜를 구하며 마음이 상한 마음이 되는 사람들이 결코 독립선언해서 혼자서 잘살겠다고 그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충분히 약해진 사람들, 그 사람들이 오히려 강한 믿음을 소유하게 되고 그렇게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는 마음이 있을때 그때에 정말 순종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순종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는 삶을 살고 싶은 그런 진실한 소원들이 그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예요. 그래서 오늘 우리도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먼저 하나님이 우리의 강한 것을 도와주시고, 강한 것을 약하게 하시고 하나님없이도 살 수 있다는 강함, 그리고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넉넉히 살수 있다고 생각하는 강함, 이런 것들을 하나님이 먼저 어루만져 주셔서, 사실이 아니거든요. 하나님이 어루만져 주셔서 우리가 얼마나 연약하고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해 주세요.
그때에 우리의 마음이 녹으면서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않을 수 없고, 그렇게 주님을 의지하게 되면 마음속에서 주님이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든지 그대로 행하고 싶은 소원들이 생겨나고, 거기에서 힘이 생겨나고 하나님을 의지할 힘이 생겨나요. 아브라함과 사라가 대체적으로 그렇게 남의 나라 땅에 와서 마지막 숨을 거둘때까지 대체로 그렇게 하나님을 바라는 삶을 살았던 것이예요.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이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하게 하셨고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셨어요. 그래서 일평생 의롭게 살고 도덕적으로 살아온 그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 거절당했어도 일평생 죄를 짓고 살아온 세리는 의롭다 함을 얻고 그 성전에서 내려 갔어요. 무엇때문이었을까요? 바리새인이 행한 모든 도덕적인 선함보다도 한 순간의 마음이 무너지고,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리고 고개를 들지 못하는 이 세리의 눈물어린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 마음이 가진 의가 그 도덕적인 바리새인의 의를 능가했다는 말이죠. 이게 바로 하나님의 마음, 그래서 그 안에 힘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에도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와 간절히 빌면서 내가 이러한 죄인이기 때문에 주님을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용서해 주셔요. 그리고 그 죄인들의 마음 상한 자들의 피난처가 되어 주시고, 환란과 시련을 당해도 마찬가지죠. 환란과 시련속에서 자기에게 피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피난처가 되어 주시고,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입는 것은 절대적인 인간의 고통의 크기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 그래서 하나님을 깊이 의지할 때 죄 있는 자들에게는 용서를, 환란을 당한 자들에게는 보호를 마음이 상하고 아픈자들에게는 위로를 그래서 시편 31편에 주를 경외하는자, 사람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예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주께서 저를 주의 은밀한 장막에 감추시고 구설의 다툼을 면케 하시니라, 모함을 받거나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을 때에도 하나님께 피하면 하나님이 그 속에서 놀라운 위로를 주십니다. 그렇게 환란 가운데 용기를, 그리고 외로움 가운데 위로를, 고통 가운데 어루만지시는 사랑을 주시는 그 하나님을 일평생 그렇게 그런 방식으로 의지하며 사는, 그러며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는거 그게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렇게 의지하면서 마음이 깨뜨려지고, 그 마음이 녹는 일은 하나도 없고 뭐 하고 싶니? 아멘 믿습니다, 하나님이 보기에는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믿음이 사람에게서 믿음이 나오는 거지 그렇게 해가지고 그릇된 길을 걸어가는 그런 신앙은 유치한 신앙입니다. 그래서 일평생 숨질때 되도록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그것을 행복해 하는 것예요. 얼마나 좋아요? 환란을 만나도 피난처가 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피난처라고 소개하시고, 환란을 만나도 주님께 피하고, 억울한 일을 만나도 주님께 피하고, 죄가운데 있어서 견디기 힘든 고통을 받을 때에도 주께로 피하고, 앞날에 대해 불안할 때에도 주께로 피하고,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거예요. 그게 바로 믿음의 삶이예요. 아브라함과 사라가 바로 이런 믿음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이 사람들을 기뻐하시고 아브라함이 한 나라의 왕이었습니까? 대기업의 사주였습니까? 아니면 이 사라가 무슨 유명한 커리어 우먼이었습니까? 아니면 여성 지도자였습니까? 아닙니다. 그래도 그저 유목이나 하면서 지내는 필부필부(匹夫匹婦)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열국의 아비로 그리고 모든 조상의 머리로 그리고 열국의 어미로 그렇게 사용하시는 그래서 믿음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없다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의미인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를 사랑해주시고 오늘 이 시간에도 기도하게 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좋으신 하나님, 오 주님,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살 수 없는 정말 연약한 존재들이오니 오 주님 우리가 주님을 이렇게 의뢰할 마음을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이렇게 의지할 마음을 주시옵소서. 그래서 매순간 주님앞에 독립선언하며 살려고 하는 우리의 패역한 자아를 꺽으시고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의지하며 일평생 동행하며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