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 3일 새벽예배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1-13).
토요일 날, 제가 앞부분을 설교를 했거든요. 그래서 계속 강팍하게 하는 이야기 안식의 이야기가 나오다가 갑자기 뜬금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찾고 능력이 있어서 좌우의 날선 그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영과 혼과 관절감이 쪼개기까지 하며, 마음의 생각과 뜻이 드러난다.
이게 아주 그 매력적인 성경의 기록의 기법입니다. 이 사람들이 그런 문화, 물론 사도 바올같은 경우, 사도 바올의 저자라고 많이들 생각하니까요. 타고난 학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기법들을 연구했을 수도 있겠지만, 이게 하나의 성령님의 감동이라고 봐지는 거죠. 원래 음악 같은 것을 연주할 때 화음이 맞게 되어있자나요. 어떤 순간에 여태까지 계속되던 선율을 박차고 올라갈 때에는 불협화음이 나옵니다. 그래서 비상을 느끼는거죠. 치고 올라가는 그런 것들이 성경에 가끔 기록에 나옵니다. 이런 경우가 그런 경우이지요. 왜 그러는 지를 잘 살펴보지를 않으면, 왠 뜬금없이 갑자기 나오나, 끊어지는 것이 아닌가. 이런 느낌이 들어요. 근데 이런 것들이 이제 히브리인들이 쓴것이기 때문에, 히브리 문학에서 글을 써내려가는 방식하고 관계가 있어요. 그 얘기를 다 할 수는 없지만, 이런 게 그렇게 깨고 들어오는 것이거든요. 근데, 성경에 특히 히브리 문학에 특성을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편집한, 짜깁기한 흔적처럼 보이는 것이에요. 그게 전혀 아닙니다. 이렇게 깨고 들어오는데 그게 무엇이냐면, 왜 갑자기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느냐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도 자신들이 불순종 하면서도 심각하게 자신들이 불순종하는 것이 아니었고, 가난에 들어온 이후에도 그들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히브리서 기자가 이야기 하는 두 번째 안식중에서 소위 이야기하는 카타파우시스 라고 이름하여지는 그리스도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평화로 말미암아 하는 안식. 이런 것을 누리지 못하고 살았잖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살면서도 자신들이 심각하게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렸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에게는 진정한 안식이 없다라 하는 그런 것을 사람들이 잘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참 신기한게 뭐냐면은 정결하게 사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죄인이라고 뼈저리게 생각하고, 막 사는 인간일수록 자신이 먼 죄가 있나 이렇게 생각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머가 필요하냐면, 영적인 은혜의 각성이 필요한 것이지요. 하나님이 눈의 비늘을 벗겨 주시고 어느날 자기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서 정확하게 보도록 만들어 주는 영적인 각성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눈을 뜨고 쳐다보면, 반드시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지요. 저 뿐 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객관적인 모습을 정확하게 깨닫게 되는 일들이 없이는 우리들이 지속적으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유지할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쉽게 무디어 지고 우리의 신념이 얼마나 쉽게 강팍해 지는 지를 생각해보면은 우리 자신이 얼마나 믿을 수 없는 사람인가를 느껴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것을 자기도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그래서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면서도 알지 못하는 자신을 파해쳐서 자신의 영혼의 상태가 어떠하고 그리고 무슨 마음을 품고 있으며 그리고 그속의 어떤 생각이 있는지를 그것이 앞으로 어떻게 발전되어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해칠지 그런 것들을 파헤치는 도구가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 이거죠. 이것이 재미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살았고, 생명력이 있어서 두 번이나 반복을 하는거죠. 살아 있는데 살아 있는 것도 두 종류가 있는데 가사상태에서 숨만 꼴딱 쉬는 상태가 있고 행동은 못하죠. 하지만 그렇게 살아 있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하게 생명을 g가지고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생명력이, 운동력이 있어서 막 활동을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게 정말 놀라운게 뭐냐면은 죄인으로서 죄 가운데 살면서 아무 희망이 없이 살아가는데, 어떤 때는 말이지요. 그 죄가 몸부림 치면서 거기서 헤어나오고 싶어서 그렇게 애를 쓰는데 마치 범죄 조직에 빠진 사람이 그렇게 애를 써도 못 빠져 나오듯이 그게 그렇게 힘이 드는 것이야. 근데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에는 계 빗겨나라. 그리고 은혜를 받아. 그러고 나면 빛이 깨뜨려지면서 도저히 하나님 앞에서 돌아오지 못하게 만들었던, 자기 힘으로 끊을 수 없었던 죄와 악한 세력과 하나님께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그런 것들을 끊을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는 것이죠. 오늘 오셨는지는 모르겠는데, 다음주에 남편 섬김의 밤 하자나요. 지난 번에 한분 저희 교회 등록 하셨어요. 근데, 10년을 교회 안 다녔답니다. 10년을 안 다녔으니 거의 불신자의 삶을 산 것이지요. 그 전에 교회 열심히 일도 하시고 하셨다는데 그러다가 10년을 교회를 안 다녔는데, 그 날 남편 섬김의 밤 와서 같이 참여하면서 감동을 좀 받고 막 바로 주일날 와서 은혜를 받았어요. 상영회때 한번도 안 빠지고 은혜 받고 그러면서 열심히 나오고. 그러면서 신문에 간증도 스셨더라구요. 무슨 얘기냐면, 세상적인 안목에서 보면 그냥 10년을 교회 안 나가는 거지만 영적인 안목에서 보면 발목이 잡힌거에요. 못 나가게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그 마음속에 돌아와서 역사하는 거에요. 그런 경험 못 해보셨어요? 설교를 들을때도 감동이나 은혜를 받았는데 집에 들어가서 가만히 누워있는데 말씀이 살아서 계속 역사하는거. 마치 외부에서 생물체가 자기 속에 쏙 들어와서 여기를 봉해버린 것처럼, 이 나가지도 않고 이 안에서 계속 움직이는 것이에요. 시간만 되면 움직여서 내 양심을 뒤흔들어 놓아서 괴로워요. 목사하면서, 1년전에 들은 말씀을 1년 후에 생각이 나서 회계하고 그런 사람을 봤어요. 말씀이 살아서 운동력이 있어서 계속 역사하는 것이에요. 마치 이속에 누가 들어와서 움지기은 ㄴ것 4같이 역사한다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하며, 해부학 적인 것이 아니지만, 그러면서 인간이 그런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거든요. 여기에서 혼이라고 번역 된 것이 문제가 되는 부분이긴 한데, 인간의 사상이나 감각이라고 하는 모든것을 통신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바깥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이에요. 이 혼은 영의 작용이고 그것을 뚫고 영으로 지나가면서 이제 관절과 골수로 나오니까 결국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인간이 탐지 할수 없을 정도로 깊이 감추어진 인간의 아주 깊은 영혼의 그 깊은 속까지 하나님의 말씀이 미치는 영향력을 말하는 것이에요. 왜 이야기를 하는거냐면, 앞서 안식을 보지 못하고 불순종함으로써 안식에서 배제되었던 많은 실패한 선조들이 궁극적인 원인이 자기 자신 깊은 속에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그 말씀에 의해서 그것들이 찔림을 당하고 쪼갬을 당하고 해서 거기에서 악들을 쏟아내고 마음의 더러운 생각과 악들을 참회하였다면, 그러면은 저들이 저렇게 지속적으로 강팍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ㅇ앞에 불순종 하고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것을 강조하고 싶은 거죠. 그러면서 뜻과 생각을 드러내나니. 그래서 결국은 안식을 누리지 못한 불행 뒤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이 있고 그 이면에는 강팍해진 마음이 있었고 그 마음의 대한 해결책은 이처럼 어떤 검보다도 예리한 하나님의 말씀이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밝히는 드러내는 것의 기회를 갇는 것이 이 강팍해지고 고통스러운 영혼의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이것이죠. 그래서 얼마나 우리 자신이 연약하고 정말 악한 존재인지 몰라요. 큰 기적을 보는 것도 소용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 것도 소용이 없고 하나님의 많은 사랑을 받는 것도 소용이 없고. 중요한건 오늘 나도 알지 못하는 나의 내면에의 세계를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역사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의 악한 생각을 찌르고 쪼개고 우리도 알지 못하는 우리 마음의 깊은 속 생각들을 드러내어서 깨트려지는 그런 역사가 일어날 때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순종하는 마음을 가질수 있는거죠. 성격에 기록이 안 나오지만, 요서와 갈렉이 왜 어떻게 그렇게 순종할 수 있을까? 그들에게는 말씀에 비추어 보자면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없는 세계가 있었던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찔러 쪼갬을 당하는 참회의 세계가 있었기 때문에 유지 할 수 있었던 것이죠. 성경에 암시가 나와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막을 만들어 놓고 기도할 때 모셉까지도 다 돌아가고 그 회막을 지키고 있던 사람이 있었죠. 여호와라는 것이죠. 회막은 기도하는 곳이라는 거죠. 그런 거에요. 그래서 정말 우리들에게는 그래서 우리 자신을 신뢰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깊이 찔러서 우리를 변화시켜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죠. 로마시대니까 로마시대의 검. 이렇게 쳐도, 저렇게 쳐도 칠 수 있는 검이자나요.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자기 맘에 나마 달콤한 요리 같은 설교나 듣고 그렇게 살아서는 마지막에 광야에 엎드려진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되는거죠.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비달해서 은혜를 받으며 자기 깨어짐 속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생각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드러낸 자기 자신의 부족과 불결, 오류등을 발견하고 깨뜨려지는 참회의 세계를 우리들이 죽을때까지 유지하며 살다가 죽어야 되는거죠. 그래야지만, 우리들이 참다운 안식을 누리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