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택 목사님 새벽설교 강평
녹취자: 이재현
요한 일서 3 장 1절에서 3절 입니다. 자 읽어봐요. 요한 일서 1장 1절로 3절. 새벽에 설교를 했는데, 잘 했어요, 잘했고 그리고 정확한 시간에 시작했고 복장도 깔끔했고 잘했어요. 임신택 목사는 그 특유의 설교 스타일이 있더라구요, 다 괜찮았어요, 전달도 괜찮고 나쁠 거 없는데, 근데 이제 조금 충고를 하자면 그 어법이 왜 표준 어법을 사용을 안하고 그 어법이 좀 많이 틀려요. 예를 들자면은 ‘뿐 아니라’ 그런 말은 없거든, ‘뿐 아니라’ 하려면 앞에 접두부가 바로 나와야 돼. 무엇 무엇 했을 때 뿐 아니라, 혹은 고난을 받을 때 뿐 아니라 그거는 되지만 맨 처음으로 문장 첫번 째 시작 할 때는 만을 항상 붙여야 돼 뿐만 아니라 이렇게 나가야 된다 이거야. 그래야지 어법 중으로 매우 잘못된 거고 그게 의사 전달이 안되겠냐는데 의사 전달은 다 되요 근데 그거를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노이즈라고 해요. 그러면은 임목사 지금 올라가서 설교를 하는데 지금 양복을 입고 올라가서 설교를 하니깐 노이즈가 없는거야 그런데 빨간 티셔츠에 다가 반바지 입고 그리고 펑크머리하고 올라가면 설교가 전달 안되는건 아닌데 노이즈가 되는거야 자꾸. 그래서 설교를 하는데 왜 머리를 저렇게 하고 나왔을까 그러면서 상상을 자꾸 하는거야 그래서 소통이 안되는거야 그래서 그게 노이즈가 되는거야 그 노이즈가 심해지면은 그만큼 설교 본문 자체에 대한 집중도가 떨어지는거야 그 어법은 고쳐야 되고 또 하나 어법은 무엇이냐면은 우리 나라 그렇게 되는 이유가 뭐냐하면 잘못된 번역서 때문에 그런건데 자동사를 수동태로 만드는거 그거는 어법에 틀린거야. 하다의 수동태는 되다야 되어지는거 그 말은 없다고. 그 다음에 또 하나 인하여 라는 말을 쓰는데 무엇무엇을 인하여 이 어법에 안맞는거야. 으로 인하여 이렇게 되어야 되는거야. 그래서 우선 제일 중요한 것은 어법이 정확하게 맞아서 저도 사실은 그렇게는 못해요 그렇지만은 노력은 내가 많이 하는 편이야. 말하는거를 다 쓰면 내용의 깊이는 없어도 문장이 딱 맞아 떨어져야 돼 길던지 짧던지 그런데 이렇게 베껴놓고 보면은 이게 그런 식으로 자동사를 수동태로 만들어버리는 이거는 전혀 어법에도 없는거야. 그 뿐 아니라 등등 이러한 것들이 어법적인 것이 안맞는 것이 계속 많이 나오다 보면은 그러면 이제는 노이즈가 많이 생겨 그래서 설교를 들을 수는 있는데 지지직 거리는 소리가 많이 나면은 나중에는 짜증이 나서 포기 하게 되잖아 그렇게 되는거야. 그래서 한 문장의 말을 해도 정확하게 할려고 애를 써야되요. 두 번째는 뭐냐면 설교가 너무 느려 좀 빨라야돼 지금 자네가 이제 30대야 20대야 30대야? 30 넘었어? 30대에 그렇게 느리면 나 정도 50대로 넘어가게 되면 있지. 그거 자네 설교 못해 내가 초창기 설교 우리 김경해 전도사님 즈음 이었는데 쏟아내는 어휘와 단어의 양이 지금 보다 최소한 30% 내지 25% 정도는 많았어 같은 시간 분량안에 근데 그게 나이가 들면 그렇게 안해도 자꾸 떨어져. 근데 너무 느려 그래서 듣는 사람이 어떤 저항감이 생기면은 자꾸 이렇게 그 무게 잡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거야. 그래서 설교를 할 때 내가 가성을 사용하지 말라는 이유가 바로 그런거야 평상시 언어로 설교를 해 버릇을 해야 돼 좀 빨리 해 할 수 있잖아. 조금 더 빨리 하세요. 그리고 또 하나는 뭐냐면 설교자가 너무 무표정해. 그래서 쉽게 얘기하면 감정적인 동요가 너무 없어. 감정적인 이행이 너무 없어. 이러니깐 사람들이 설교자를 이렇게 쳐다볼 때 설교는 말만 설교가 아니라 설교자의 이 표정이 설교야 어느 한 순간에 설교자가 목이 메어서 말을 못할 때 그게 말보다도 더 강한 설교야 클라이막스라는 걸 얘기하는 거거든,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울먹이고 그래서는 안돼 이거는 말하자면 창녀가 하는 짓이야 그럼 안돼. 그렇지만은 그 모든 것이 다 설교여야 돼 그래서 스펄전의 설교학에 보면은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해야 할 때는 이렇게 위대하심은 이렇게 그거 다 가르쳐줘요. 그 때는 이 마이크가 없었던 시대이니까 더더욱 그 제스처의 중요성은 엄청나게 강조되었죠. 그런데 지금은 마이크가 잘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거 너무 필요한거에요. 아프면은 그 주님의 그 어떤 아픔을 이야기 하면서 자기 자신도 아주 아픈 그것이 이게 절절히 전해져야 돼 표정과 이 모든 것에서 그런데 그거는 훈련 안하면 마치 기브스 하면은 몸이 굳어져 버리듯이 훈련 안하면 계속 굳어져 그래서 막 그런거 흉내낼려고 그러는 것은 치졸한 것이지만은 그거를 배워야 되요 그리고 그런 것들이 있는데 (??) 하라는 게 아니라 설교할 때 그런게 별로 없다 이거는 아주 중요한 결함이에요 그것은 무엇이냐하면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정서적인 요소가 결핍되는거에요 그런데 그것을 말씀이 자기 안에서 덜 익을 경우에 그렇게 된다는 거지. 그래서 자기가 느끼지 못하는 것을 설교하는 것은 그거는 말하자면 전달의 효과가 없어요. 그래서 그런 것들이 내가 보기에는 없는게 아니라 자네는 표현 자체를 안해버릇을 해서 그래서 마치 우리 같은 사람도 춤추라고 그러면은 차라리 매맞고 마는 것처럼 그렇게 인제 되는 거거든. 그런데 그렇게 하면 자유함이 너무 없는거야. 그래서 감정이 흘러가게 하라 이거야. 그래서 그 유명한 이야기가 있잖아 이름을 이제는 잊어버렸는데 청교도 시대의 일이에요 모두 모여서 기도를 하는데 아무개 목사님 기도해 주시겠습니다 했더니 아무 말도 못해. 한참 있다가. 오 주님 이게 성령이 임했어요 그 때. 그 몇 분만에 터져나온 오 주님, 그 한 소리에 성령이 임하고 사람들이 말하자면은 불을 받았어요. 그리고 가슴 저미는 주님의 심정을 느꼈던 것이에요. 그런 점에 잇어서 기술적인 것들을 고쳐야 되요. 그래서 지금 충고 한 것들이 중요한 것은 아니에요 기술 적인 것인데. 설교의 두 번째를 이제 이건 일반적인 태도고 설교의 자체에 내용에 들어가서 보자면은 설교에서 아주 정확하게 말하려고 하는 그 최종적인 메시지가 무엇인지가 좀 불분명했어요. 그런데 어렴풋이 파악하기에는 이런 사귐 속으로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해야 되지 않겠느냐 그거였거든요. 그거 제가 맞게 봣을 겁니다. 그건데 강조가 매우 약했어요. 그래서 마치 전체적으로 설교가 좋은 경치의 사진을 찍었는데 그게 무엇을 초점으로 놓고 찍으려고 했는지 의도가 잘 안나타나는 그런 거였거든요. 경치 앞에 사람이 있으면 항상 사람의 얼굴에 포인트를 맞추어 놓고 찍잖아. 그러면 사람은 선명하게 나오고 주위의 배경은 희미하게 나오는. 그런데 이렇게 되면서 이제 초점이 무언가 라고 하는데 그런 것들이 좀 부족했어요. 그리고 제가 보기에 임목사의 설교에 있어서 좀 많이 아주 본인이 심사숙고해야 될 부분은 무엇이냐면은, 긴장감을 가지고 설교에 진전을 보게 하는 그러한 발단 전개 파국 결말 이런 것들이 희곡의 네 요소잖아. 설교에 그런 것들이 있어야 하는 것이거든. 그런데 그런게 없고 계속 밋밋하게 나가요. 그래서 이렇게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그러면 도대체 우리가 왜 그렇게 살아야 되는걸까요. 그 다음에 발단에서 전개로 넘어가는 거거든. 전개로 넘어가면서 근데 우리가 그렇게 살면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그런 다음에 이제 파국으로 넘어가는 거거든. 그로므로 우리가 굳게 이 삶을 붙들어야 됩니다.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습니까. 이 결말이에요. 그래서 그 때마다 설교가 쭉 가다가 휙휙 몇 번 이렇게 돌아야 돼 그래야지만 사람들이 심리적인 텐션을 안놓치면서 설교를 따라가는거야. 그래서 마지막에 복음을 전해야 되는거라면 처음에 그거를 얘기하지 말아야 돼. 얘기도 꺼내지 말아야 돼. 그래서 전개를 해 나가다가 그러면 이 사귐이 이렇게 복되다면 사람들이 이 사귐 속으로 들어오는 방식이 무엇입니까. 복음이 전파되지 않고는 들어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눈치를 못채게 하고 감추고 가다가 파국에서 그거를 확 벗겨야 된다는 것이에요 그래야지 충격이 오는 것이에요. 그런 거였어요. 그래서 인제 그렇게 설교를 하면 설교가 재미있어요. 흥미가 있고. 그리고 박진감이 있어요. 긴장을 늦출 수가 없어요. 그런데 말해도 이런거죠. 내가 소설 이야기를 해줄게 그러면서 시작해서 이제 재미있게 그래서 서울로 올라갔단 말이지 응 그래 둘이 만나거야 못 만난거야 얘기를 하는데 가만히 있어봐 그러고 천천히 얘기를 해야 되는데 뜬금없이 갑자기 나중에 둘이 같이 죽어버리거든 그러고 그 다음에 다시 얘기 전개를 해야 되는데 재미가 하나도 없어요 감추어야지 파국을 감추어야 돼 그 마지막에 확 하고 열어 보는거야 신선한 충격을 받는거야 그게 하나의 문학적인 기법이에요 아주 기본적인 기법이에요. 그랬고. 교회에 많이 있어요 그런데 지금 비판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마지막으로 크게 세 번 째 신학적으로 보려면 말이죠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뭐냐면 만약에 그 본문을 가지고 강단에 섰을 때에 복음을 전파하자는 것이 설교의 최종적 타겟이었다면 그러면 굳이 그 본문을 잡을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느껴져요 왜냐하면 문맥을 설교하기 전에 문맥을 여러번 읽어야 돼. 그러면은 계속 만지다보면 울퉁불퉁 튀어나오는게 있어요 그 튀어나오는게 사실은 복음을 전해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사귐이에요 사귐 3절이 핵심이에요 사귐 그런데 그 사귐 안에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그런 사귐이다 라는 거거든. 짧은 시간이었으니깐 그랬겠지. 신학적인 요소가 설교에 너무 결핍 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경험적이기도 하고 은혜도 있는데 잘했어요 근데 신학적인 요소가 너무 작아요 만약에 나에게 그 본문을 설교하라고 그랬으면은 나는 서슴없이 1절 2절이 아니라 3절에 칼을 꽂았을거 같아. 자네 설교를 들으면서 느끼는 느낌이 뭐냐하면은 지난번에 000 목사 설교 평을 하다가 좀 내가 많이 찔렸는데 똑같이 호도를 통째 넣고 입에서 굴리는 것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왜냐하면 핵심이 사귐이거든. 3절에다 칼을 대서 그거를 북하고 찢어가지고 What is followship, followship 이 무어냐 그거를 얘기했을 꺼다라는 생각이 되고 나에게 설교하라 그랬으면은 3절을 가지고 아마 사경회 한번 정도 했었을 꺼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충 마음 속으로 잡아본 골격이 된거는 사귐이 도대체 뭐냐 발단의 과정은 생략하고 본론에 들어가서 사귐이 뭐냐. 사귐에 성경신학적인 정의를 내리고 그 사귐이 바로 우리들은 우리가 이렇게 성도의 사귐 안에서 하나님과의 사귐이 구체적으로 구현이 되는거야. 근데 신학적으로 이제 뭐 성경신학적인 과정은 좀 생략하고 시간이 없으니까. 조직신학적으로 넘어가면은 그 사귐이 뭐야. 그 사귐이. 사귐의 원천적 사귐은 하나님과 사람의 사귐 아니야 그치. 그렇지? 맞잖아. 그렇지? 그러고 그 결과로 말미암아 인간이 사귀게 되는거잖아. 그치? 그러면은 하나님과의 사귐이 원천적으로 하나님과의 사귐이 의미하는 그 내축, 본질이 뭘까. 하나님과의 사귐의 본질이. 하나님과의 사귐의 본질은 아주 쉽게 얘기하면은 영생을 누리는 형태야. 그래서 하늘의 자원이 인간들과 관계없었던 죄인들과 접속되면서 누려지는 상태야. 그게 사귐이야 이게 단순한 코이노니아를 얘기하는게 아니라고 그래서 그게 어느 성경구절하고 만났냐 하면은 마태복음 28장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속으로 세례를 주며 근데 이게 접붙여 지는거야 그래서 이것들이 한 생명이 되어서 공유되어서 그 통로를 통해서 예전에는 영적죽음의 상태에선 없었던 신령한 자원들이 흘러 들어오는 이 연결된 형태. 이것이 성서신학적이고 조직신학적인 이 사귐에 대한 그 견해에요. 이게. 그래서 욕심이긴 하지만 뭐 내가 자네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설교를 못했어. 그러니깐 용기를 가져요. 근데 욕심을 좀 더 내자면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과의 사귐이라는 것이 뭡니까 그러고 들어가는 거야 이것은 삼위일체와의 사귐이다. 삼위일체와의 사귐을 이야기 하면서 거기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있어서 개별적 위와 신자의 사귐에 대해서 설교할 수 있다면 이거는 최상에 까지 들어가는 거야 그게 뭐야 하나님과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도 어떻게 사귀어? 하나님과 성부 하나님과 인간이 어떻게 사귀어? 사랑. 성자 하나님과는 어떻게 사귀어? 은혜. 성령 하나님과는 어떻게 사귀어? 위로. 이거에요. 그래서 이 세 위와 성도가 함께 사귀는거야. 사귐이라는 번역이 이게 적절한 번역이 아니야. 이 너무 차원이 000한 차원이야 오히려 교통이라고 봐야 된다는거야. 근데 그 세 위와 사귀는거에요. 이걸 그 신학적으로 잘 논설한 사람이 누구냐하면은 존 오웬이에요. 그래서 삼위와 성도가 교통할 때 개별류와 교통하는 거에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격이 하나야 둘이야 셋이야 셋이잖아. 그런데 이게 무슨 얘기냐하면은 하나님이 세분이라는 얘기야 한분이라는 얘기야 그렇게 말하면 안되지. 인격이 셋인데 어떻게 하나야 그럼 자네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몸통이 하나고 머리가 이렇게 셋인 하나님이야? 하나님이 삼위일체라고 하는 말은 인격은 셋이야 체라고 하는 이야기는 몸이 하나라는 뜻이 아니야 셋은 각자 000 하게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세분이야 근데 삼신론하고 삼위일체론이 틀린 이유는 뭐냐하면은 세분이 계신데 세분이 각각 본질이 다르다고 말하면은 삼신론이야 근데 세분이 계신데 본질에 있어서 같다, 일체라는 말이 한몸을 이루었다라는 뜻이 아니라 본질에 있어서 신적본질이 동일하다라는 뜻이다 이거야 세분이야 세분. 그럼 무슨 얘기가 됐냐하면은 인격을 가지고 있으면 인격대 인격의 일대일 교통이 이루어지는거 아냐 그렇지? 그러니깐 삼위일체 하나님을 개별적으로 교통할 수 있다라는 이야기가 되는거야 그러나 인제 그 삼위 하나님과 교통에 있어서 어느 한 위와 교통할 때 신적 본질의 특성상 나머지 두 위가 000 되는것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어느 한 위와 교통되는거죠. 그래서 우리가 사랑을 많이 느끼게 되면은 성부와 지금 우선적으로 교통하고 있는거에요. 위로가 넘치게 되면은 성령님과 교통하고 있는중이고. 그리고 은혜가 넘치게 되면은 성자와 교통하고 있는 중. 이런것까지 이렇게 파고 들어가면은 지금 생각해봐 이게 어떻게 한번 설교에 되겠어. 열 번 정도는 설교를 해야지 이 진도가 나가지. 그래서 잘했어요. 근데 좀 부족해. 잘했어요. 근데 좋은 점은 살리고 예를 들어서 뭘 하던지 간에 사람들이 신학적인 깊이를 느낄 수 있도록 만드세요. 그게 설교에 나와야 되는거에요. 잘했어요 박수 한번 쳐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