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6월 23일 새벽예배
“그 오시는 앞에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요한이 그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 풀기도 감당치 못하리라 하였으니 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성경에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살리신지라”(행 13:24-30).
스데반의 설교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다만 차이가 나는 것은 스데반의 설교는 구약시대에 많이 집중을 했는데 이제 이 바울의 설교는 신약시대로 바로 들어와서 그래서 설교를 전개하고 있다는 것이 좀 틀리죠. 물로 스데반도 끝까지 설교하게 놔두었다면 아마 훨씬 더 많이 설교가 진행되었을 것이고 신약시대로 넘어왔을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이제 다윗의 이야기가 나온 다음에 껑충 건너뛰어서 곧바로 세례요한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구약시대의 마지막선지자이고 또 동시에 신약시대에 걸쳐있어서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푼 그러한 선지자입니다. 아주 구약의 역사와 신약의 역사가 만나는 수문과 같은 위치가 바로 세례요한의 위치다고 하는 것이죠. 이 세례요한도 역시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고 그 세례요한도 예수그리스도를 뵈었을 때 이분이 바로 하나님의 어린양이라 말하면서 그 예수님에 관해서 옳게 증거하고 백성들에게 그 사실을 말하였다는 사실을 적시하고 있어요.
이 세례요한은 당시에 유대인들이 세례요한은 참으로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라고 굳게 믿고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너희들이 신뢰하는 이 선지자 그 사람도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하고 우리를 구원하기위한 구원자 이렇게 백성들에게 소개했다. 그것을 강조하는 거죠. 그래서 그들에게 전하고 있는 복음적 사실의 신뢰성을 더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바로 유대인들이 깊이 존경해마지 않는 그러한 선지자였기 때문에 그 권위에 호소해서 또한 예수그리스도가 참으로 우리를 구원하기위해서 오신 분이라고 하는 것을 전하고 있는 것이죠. 세례요한보다도 훨씬 더 풍부하게 바울이 오늘 이 유대의 역사를 이용해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활용해서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이러한 역사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었고 그리고 그 유대인의 역사를 통해서 예수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을 지금 증거하기위해서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다윗 그리고 다윗이후에 세례요한에까지 내려오고 있는 것이거든요. 바울이 정통적인 유대인이고 히브리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아주 친숙하게 구약의 역사에 정통하고 또 신약에서 선지자인 세례요한에까지 예를 들면서 훌륭하게 이 문제를 접근해가고 있는 것이에요. 그런 것이 바로 오늘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에 일어난 일들을 여기서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는데 바로 너희들이 예수그리스도를 죽이지 않았느냐. 유대인과 유대백성들 회당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이었단 말이죠. 죽였다. 심지어는 빌라도조차도 예수의 죄를 도저히 찾을 수 없었는데 재판장도 죄를 찾을 수 없는 사람을 죽여 달라고 너희들이 그렇게 간청해서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이제 빌라도가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준 것, 죄가 없다고 믿으면서도 백성들에게 이제 이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준 것은 상당히 정치적인 결정이었어요. 그래서 뭐 어떤 사람들은 당시에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사람이 유월절에 잔뜩 모여서 위협을 가했기 때문에 폭동이 일어날까봐 예수님을 그들에게 내어주었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서 생각해보면 유대인들은 참 다루기 힘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때에 그런 기회에 그들의 부탁을 들어줌으로 말미암아 정치적으로 환심을 사려고 예수님을 그들에게 내어주었다 이렇게 봐야 되는 것이죠. 이렇게 예수님을 자신의 정치에 활용해서 결국은 십자가에 죽게끔 만들었는데 빌라도의 죄도 크지만 그러나 더 커다란 죄는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밖에 없도록 요구한 유대인들이에요. 그리고 실지로 예수그리스도께서 빌라도에게 사형언도를 받으신 다음에 형을 집행하는 과정에 있어서 로마의 법을 빌리기는 했지만 그러나 법정까지 끌고 올 때까지 이미 종교적인 재판이 다 이어졌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도 유대인들은 그 죄를 모면할 수 없어요. 책임을 회피할 수없다는 말이죠. 이렇게 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신 거죠. 이것은 이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였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제 이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고난을 당하게 하신 것은 마치 겉으로 보기에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이 힘이 없어서 세상 사람들에게 찢기고 고난을 받으며 죽으시는 것 같았지만 오히려 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가 나타나서 사람들을 구원하고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보여주기 위한 도구가 되었던 것이죠. 그래서 밤하늘에 별이 빛나는 것은 별이 빛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늘이 어둡기 때문에 빛나듯이 이 인간들의 모든 불순종과 죄가 어두움이 되자 그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의 역사들이 샛별처럼 빛나게 되었던 것이에요.
마지막으로 이제 여기에서 바울이 예수그리스도를 너희가 그렇게 죽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분을 다시 살려내셨다는 이야기로 일단 여기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역시 그 모든 아브라함부터 시작되는 역사를 이어왔지만 진짜로 바울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예수는 메시아라는 사실을 선포하고 싶었던 것이다. 예수는 메시아다. 예수그리스도는 메시아다. 예수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라는 사실을 선포하고 싶었던 것이 바울의 설교의 핵심이었어요. 너희가 죽였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지혜 가운데 예수그리스도를 너희들이 죽였지만 그 죽음을 이용하셔서 하나님이 너희와 우리 모두를 죄 가운데서 건져내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 증거로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아나게 하셨다는 것이죠.
유대인들이 끝까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은 바로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거든요.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이야기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가지고 뭐라고 얘기하든지 간에 하나님은 그의 죽음을 인정해주셨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의 죽음을 인정하시고 어여삐 여기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다시 살려내심으로 말미암아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은 사람들이 모두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자기의 죄 때문에 돌아가신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그렇게 인정해주신 사람이기 때문에 그 죽음에는 다른 신학적인 의미가 있다고 믿은 거예요. 만약에 자기의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면 하나님이 죽은 자를 그렇게 다시 살려내셔서 그분이 행한 바를 인정해 주실 수가 있겠어요. 그럴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했던 것이죠. 그게 바로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그 희생에 대한 해석이라 이거죠. 구속에 대한 대속에 대한 말하자면 해석이다. 그러면서 이것이 핵심이 되는 거예요. 이 예수그리스도를 붙들고 이 예수그리스도가 그 후에 다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오셔서 행하신 위대한 일과 그 이후에 오신 성령의 위대한 역사 거기에 붙들려서 우리들이 이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로 이어져야 되는 거예요. 이것을 보면서 우리들이 깊이 사모하게 되는 것이 있어요. 교회가 살아있다. 한 시대에 기독교 신앙이 살아있다는 이야기는 이처럼 복음에 사로잡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에 굳게 사로잡혀서 그래서 이 복음을 전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복음의 정신으로 살고 이 복음의 정신으로 죽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