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75
목 차
주의 이름이 가까울 때(시 75:1) 1
바르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시 75:2-3) 6
낮추시고 높이시는 하나님(시 75:4-7) 12
예비하신 진노의 잔(시 75:8) 16
야곱의 하나님을 찬양함(시 75:9) 21
하나님의 공의에 참여함(시 75:10) 26
시편76편 강해 1
시편75편 강해 1
시편75편 강해 1
시편75편 강해 1
시편75편 강해 1
시편75편 강해 1
시편75편 강해 1
주의 이름이 가까울 때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시 75:1)
본문해설
75편 전체는 분류상 찬송시에 속합니다. ‘아삽의 시’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을 아삽의 시로 보는 사람도 있고, 다윗이 기록하였거나 혹은 다른 이의 기록을 아삽의 가문에서 보관한 시라고 해석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미 시편 중 80여 편에 달하는 다윗의 시와 문체의 특성과 어휘를 비교하고 분석하면서 이것은 다윗에게 속한 시인데 아삽이 보관한 것이라고 판단을 내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75편도 그런 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시편 75편을 읽으면서 이것이 다윗의 시여야만 한다는 확증을 발견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아삽이 지은 시이든, 혹은 아삽의 가문에서 보관한 시이든, 75편은 성전에서 찬양을 인도하는 지휘자의 인도를 따라서 ‘알다스헷’이라는 당시의 부르던 곡조에 맞춰 부르게 되어 있었던 시입니다. 이것이 표제에 나오는 설명의 내용입니다.
역사에 간섭하시는 하나님
본문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이름이 가깝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주의 귀한 일들을 전파합니다.” 사실은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주님의 이름이 가까이 온 것을 주님의 기사들이 선포하고 있습니다.”라고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항상 함께 하시지만, 당신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시는 분이며 그들을 통치하시는 주인이라는 것을 역사 속에서 명확하게 보여주시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 개입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날 수 없지만, 어느 시점에서는 하나님이 평소보다 더 깊이 백성들의 역사에 간섭하십니다.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간섭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시기 위한 역사의 개입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시기 위한 역사의 개입입니다. 긴 안목에서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의 과정이지만 짧은 안목에서 보면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일수도 있고 징벌일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 에 개입하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나라가 왕으로 세워진 사람에 의해 통치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에 의해 움직이는 나라라는 확신을 갖게 만들어줍니다. 징계를 받을 때는 돌이켜 회개하고 축복을 받을 때는 더욱 하나님을 사랑 하도록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가 언제 쓰였는지 알 수 없고, 그때의 역사적인 상황이 어떠했는지도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는 하나님이 역사에 깊이 개입하셔서 오만하고 교만한 자들에게 경고하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가까운 것을 주의 기사가 선포합니다.”라고 할 때의 ‘하나님의 이름’은 시편뿐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 자신을 표현할 때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가깝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가깝습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 것을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이 선포하고 있습니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사라지고 나면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삶의 기준점이 되어 그 앞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은 살아있는 신앙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내가 이렇게 살면 세상에서 인정받을 것이다.’ 이런 생각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야지만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고 나중에 큰소리 칠 수 있다. 그건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것은 적극적인 의미에서 나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 되었고 내 인생의 진정한 가치는 하나님이 나를 세상에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 사는 것이라는 믿음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따라 산다고 할 때,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중요한 성패의 관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당신 앞에서 살기를 기뻐하십니다.
여기 계시는 하나님
“주의 이름이 가깝습니다.”라는 말은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다는 뜻입니다. 예전에는 주님이 멀리 계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실 수도 없고 가까이 계실 수도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이 공간에서 저 공간으로 이동하시는 분도 아니고,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옮겨 다니시는 분도 아닙니다. 세계 어느 곳이든지 안 계신 곳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어느 곳에는 하나님이 안개처럼 많이 모여계시고, 어느 곳에는 맑은 공기처럼 하나님이 거의 계시지 않는 곳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고 모든 물질을 초월해 계십니다.
그런데도 주님이 가깝다고 시인이 말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이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의 의미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거기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나타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으시지만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거기 계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입니다. 시인이 “주님의 이름이 가깝다는 사실을 주님의 기사가 선포하고 있습니다.”라는 것이 그런 의미입니다. 주님이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이 사람들 속에 나타나고 하나님께 무관심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며 두려움으로 그분 앞에 부복하고 자기 삶의 기준을 하나님의 계명에 맞추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어제 밤늦게 문상을 갔습니다. 모든 장례식장이 그러하듯이 시끄럽습니다. 사람들이 식탁에서 밥 먹는 소리, 손님들이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문상하는 빈소에 다 들리도록 건물을 통으로 설계해서 예배드리기가 불편했습니다. 거기에 조그마한 초등학생 하나가 정장을 하고 까만 넥타이를 하고 서있었습니다. 그 집 손자입니다. 시끄러운 와중에 설교를 하고 있었고 오히려 어른들은 산만한데 이 아이는 옆에 앉아서 나를 올려다보며 말씀을 끝까지 경청합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으니까 그 아이는 초등학교 5학년인데 회심을 한 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경청했던 것입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면서 ‘아, 이 시간이 객담하고 노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간이구나.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이구나.’라는 것을 의식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가까운 것입니다. 이것은 인식론적인 것입니다. 진짜로 하나님이 가깝다 안 가깝다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이 매우 가깝게 느껴지기도 하고 아무데도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느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전도사 때 청소년들을 데리고 수련회를 갔습니다. 회심하지 않은 아이들이 대부분이어서 수련회를 진행해 나가기가 어려웠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었더니 한 아이가 대답하기를 자기는 유치원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생각이 안 든다는 것입니다. 집에서는 감히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수련회에 와서 전도사에게 솔직하게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그날 저녁에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있었고 아이들은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났습니다. 다음날 아침, 아이들을 모아놓고 어젯밤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습니다. 바로 전날 하나님이 아무데도 안 계신 것 같다고 말하던 자매가 이야기 합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이 하늘에 계셨는데 지금은 제 마음속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에나 계신 분이지만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느냐에 따라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통해 우리에게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주권적인 은혜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며 사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훈련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따르고 순종하며 사는 것을 훈련시키십니다.
본문은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한다.”고 말합니다. ‘주의 기이한 일들’이란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심판하시고 신앙을 지키려는 의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일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역사하신다는 뚜렷한 증거들이 세계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 안에 나타는 것을 봅니다. 한편으로는 두려움으로,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자비와 사랑 때문에 예전과는 다른 태도로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상황입니다.
결론과 적용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주 멀리 계시거나 안 계신 것처럼 실천적인 무신론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가장 커다란 문제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간절히 은혜를 구하며 이 땅을 고쳐주시고 역사에 간섭해 주시기를 원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하며, 주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고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알도록 도와주십시오.” 이것이 우리의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회심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거룩하신 그분의 뜻대로 살게 될 때, 사람들은 ‘하나님이 참으로 거기 계시는구나.’라는 것을 또렷이 느끼게 됩니다. 먼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르게 심판하시는 하나님
“주의 말씀이 내가 정한 기약이 이르면 내가 바르게 심판하리니
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거니와 땅과 그 모든 주민이 소멸되리라 하시도다”(셀라) (시 75:2-3)
본문해설
시편에는 종종 독특한 구성이 등장합니다. 내가 주어가 되어 이야기하다가 어떤 암시도 없이 화자가 갑자기 하나님으로 바뀌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예언적 화법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을 화자로 삼아 자기가 전달하고 싶은 말씀을 전달하시는 방식입니다. 우리도 흔히 아이들을 타이를 때, “너 이렇게 하지 말아라. 아빠가 오면 ‘이놈’한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어린 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직접화법을 사용하는데 직접화법의 주어는 글 전체의 주어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르게 해석을 합니다. 그러한 해석의 원칙을 시편에 인용된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적용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구절이 정확하게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또, 그런 구절들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예언적 화법이 다른 선지서나 성문서에서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런 추측은 얼마든지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저는 더 많은 경우, 이것이 신탁의 말씀으로 주어졌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적으로 전달되던 시대였습니다. 특히 시편의 대부분을 이루었던 선지자 다윗에게도 그런 신탁의 말씀이 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모세 오경에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시편에서는 그런 도입부들이 생략된 형태로 시적 구성을 이루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말 성경으로 보면 그것이 잘 안 나타지만 히브리어 성경으로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자체가 시어입니다. 시를 쓰기에 좋은 언어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이라는 표현을 기술할 필요 없이 물 흐르듯 시를 쓰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신탁의 말씀을 전달하는 하나의 수단이 된 것입니다. 물론 어느 것이 신탁의 말씀이고 어느 것이 예언적 화법인지를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저는 후자의 가능성이 전자의 가능성보다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2절에는 ‘주의 말씀에’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히브리어 성경에는 없는 말인데 주어가 안 맞아서 넣은 표현입니다.
인내하시는 하나님
1절에서 시인은 “주께 감사하는 것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라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늘 가까이 계신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이 백성과 관계를 맺고 영향을 끼치는 것을 사람들이 보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들은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하신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보고 기억하면서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며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감격에 차서 하나님께 고할 때 2절로부터 이어지는 하나님의 신탁의 말씀이 주어진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권고하신다.”라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권고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파카드(dq'P;)입니다. 사람을 권면하고 타이른다는 뜻이 아니라 방문한다는 뜻입니다. ‘주께서 권고하시는 날에’를 쉽게 번역하면 ‘주께서 오시는 날에, 주께서 임하시는 날에’ 일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성경에서는 ‘여호와의 날’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가까운 날은 두 가지 국면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심판의 국면과 축복의 국면입니다. 주께서 오시는 날은 신실하게 하나님을 의지했던 사람들에게는 원한을 푸는 위로의 날이 될 것이고, 주를 거스르고 악하게 행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사태를 공정하게 하기위해 불의한 자들을 징계하시는 날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과 징계가 명료하지 않은 것에 대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안 계신 증거가 아니냐며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에 대해 회의를 가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멀리 계시거나 안계시기 때문에 악을 행하는 자들이 여전히 번성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자들이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인내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밭에 곡식을 심었는데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뿌렸고 거기서 가라지들이 자라납니다. 하나님의 공정하신 성품에 비추어 보면 가라지들을 모두 솎아내서 정리해야 됩니다. 그런데 추수 때까지 버려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가라지들을 싫어하는 땅 주인의 마음이 변한 게 아니라 추수 때까지 곡식을 보호하려는 알곡에 대한 사랑이 가라지들을 내버려두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포괄적으로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알곡을 상하지 않고 가라지를 뽑아낼 능력이 없지만 하나님은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악인들의 활동과 번영은 의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악인들 없이는 하나님의 뜻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하나님은 악을 사람과 공동체와 사회에 요긴하게 사용하십니다. 인간이 쏟아놓은 악한 의지의 행사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사용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이고 계획입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이한 일들을 사람들이 전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온 땅의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일들만 일어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역사에 개입하고 계시는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선인과 악인이 모두 함께 보고 느끼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한 기약이 이르면 내가 바르게 심판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세상과 관계를 맺으시며 통치하시지만, 특별한 시점이 오면 모순처럼 보이는 악들을 제거하고 고통 받는 의인들에게 상주고 격려하시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마치 장부를 적어놓고 물건을 외상으로 산 후에 월말에 가서 돈을 내고 정산을 해서 외상 장부에 줄을 그어버리듯이 하나님은 말할 수 없는 지혜로운 섭리 속에서 일하십니다. 악이 번성하고 의가 억눌리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어느 시점에서 이것들을 깨끗이 정리하시고 만물을 온전한 상태로 돌리시는 일들을 행하십니다. 부분적으로 사회적으로 혹은 국가적으로 하나님이 끊임없이 일하심으로 공의를 다시 세우십니다.
시인은 먼저 “하나님의 이름이 가까우니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번영과 축복이 쏟아지고 있다는 의미와는 거리가 멉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경건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여호와의 날에 대한 희망이었습니다.
그 예가 하박국서에 나옵니다. 하박국서에는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외양간에 송아지 없어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기뻐하리라.” 이 고백을 하던 때는 나라가 거의 갈대아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상태였고 처처에서 악인들이 갈대아인들과 내통하며 민족을 박해하고 나라를 거덜 내고 있었습니다. 악인들이 승승장구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발견할 수 없었고 하박국 선지자는 회의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깊이 은혜를 받으면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깨닫게 됩니다. 믿음의 중요성에 대해 눈뜨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C급 선지자에서 A급 선지자로 등극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미래에 일어날 심판을 보여주셨습니다. 심판의 결과,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무화과나무에 소출이 없고 외양간에 송아지가 없으며 가옥이 완전히 초토화되었습니다.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바라보면서 선지자는 오히려 기뻐합니다. 심판을 받아서 모든 번영이 사라지고 재앙이 오게 되었는데도 기뻐합니다. 그는 하나님 여호와를 인하여 기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심판하실 때 그들만 족집게처럼 골라내서 고난을 주시겠습니까? 한나라가 악해서 전쟁이 일어나고 외적에 의해 나라가 파괴되면 경건한 사람들도 함께 고통을 받습니다. 이것이 구약에 나오는 바디(body)사상입니다. 언약 공동체를 하나의 몸으로 보는 해석입니다. 선지자는 그것을 보면서 즐거워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환란을 당하고 초토화되었지만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번영과 궁핍을 초월하여 드러나는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 때문에 그는 기뻐했습니다. 그것으로 양식을 삼는 것이 언약 백성의 삶입니다.
“내가 정한 기약이 이르면 바르게 심판하겠다.”는 하나님의 경고는 시인에게 복음처럼 들렸습니다.
백성의 주권자, 하나님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거니와”, 이 시대 사람들은 지구가 마치 수박 반 덩어리를 잘라 놓은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땅은 평평한 쟁반 같고 그 위에 반구형의 유리막 같은 것이 쳐있어 그것이 하늘을 이루고, 그 하늘에 별들이 매달려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쟁반같이 넓적한 땅은 무엇이 받쳐줘야 하는데 그 밑에 기둥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시 고대인들의 생각을 염두에 두시면서 그들의 생각으로 이해 할 수 있는 언어로 말씀하셨습니다. “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다.” 이것은 “창조된 모든 세계를 지탱하는 기초는 내가 세웠다. 나에 의해 모든 땅의 사물들은 존재의 근거를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거니와 땅과 그 모든 주민은 소멸되리라”, 땅은 변함없지만 그 위에 사는 주민들은 죽기도 하고 나라는 사라지거나 새로 세워지기도 합니다. 모두 덧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이 흔들리지 않도록 기초를 세운 이가 나인데 땅위의 주민들을 향하여 나의 주권이 없겠느냐?”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언제든지 소멸하고 그 땅을 다른 자들에게 주기도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한 것이 예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의로워서가 아니라 그 땅 백성들이 패괴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결론과 적용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들이 무엇을 구하며 살아야 할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이 땅의 번영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가난을 추구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번영과 가난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 땅을 창조하신 목적, 언약백성들을 선택하신 목적대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며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목적에 이바지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참된 행복입니다. 시인에게 들려오는 2-3절의 말씀은 커다란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전에도 시인은 그것을 구하면서 살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동일한 소망을 품고 살아가도록 우리는 부름 받았습니다.
낮추시고 높이시는 하나님
“내가 오만한 자들에게 오만하게 행하지 말라 하며 악인들에게 뿔을 들지 말라 하였노니
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며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지어다
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시 75:4-7)
본문해설
“내가 오만한 자들에게 오만하게 행하지 말라 하며 악인들에게 뿔을 들지 말라 하였노니”라는 설명 후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며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지어다”, 어떻게 보면 4절이 하나님의 직접화법이고, 5절은 시인의 이야기라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석을 하든 큰 차이는 없지만 문제는 그 의미에 있습니다.
오만한 자의 공격
“내가 오만한 자들에게 오만히 행하지 말라 하며”라고 할 때, 성경에 나오는 ‘오만한 자’는 ‘거만한 자’를 뜻합니다. 거만하고 마음이 높아서 다른 사람들을 하찮게 여기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오만’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데서 오는 것으로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모든 도덕적인 판단의 기준이 되고 근원이 되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없게 될 때 인간 존재의 선과 악에 대한 구별은 분명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제거해 버리고 나면, 규율 받아야 할 객관적인 도덕 기준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은 삶을 겸손하게 만들어 주는 요인이 됩니다.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전혀 인정하지 않게 될 때, 거기서부터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며 도덕적인 부패와 해이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오만한 자와 그의 악함을 연결시킵니다.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에 대해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서술하며 오만한 자가 죄인보다 더 나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악이 점점 발전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악인의 꾀를 좇는다.’는 것은 악인의 말을 가끔씩 듣는 것, 유혹에 넘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죄인’을 뜻하는 히브리 단어에는 ‘다게쉬 포르테’라는 점이 찍혀 있습니다. 이것은 죄를 짓는 것을 업처럼 생각하며 살아서 죄가 인격적인 특징이 된 사람을 말합니다. 죄인은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지만, 오만한 자는 신학적으로 문제가 된다는 데 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죄를 지으면서 가책을 느끼는 사람은 그래도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만한 자는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그런 자리에 항구적으로 주저앉고 그런 사람과 동류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만한 자더러 오만히 행치 말라 하며”라고 할 때, ‘오만한 자’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신앙이 없는 것은 모든 문제의 궁극적인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악인에게 뿔을 들지 말라 하였나니”, 여기에서 ‘뿔을 든다’는 말이 나옵니다. 여러 가지 해석들이 분분하지만 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던 팔레스타인 지역의 문화적, 환경적인 맥락과 관련이 있는 묘사라고 생각합니다. 팔레스타인에는 사슴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시편에는 사슴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사슴들은 가을이 되어 교미기가 되면 암컷을 놓고 뿔을 부딪히며 처절한 투쟁을 벌입니다. 뿔을 높이 치켜들고 돌격을 해서 부딪치고 그 뿔로 엉켜서 서로 싸웁니다. 그러다 결국 어느 한 쪽이 패배하거나 피를 흘리며 쓰러지면, 다른 한 쪽이 암컷을 차지합니다. ‘뿔을 든다’는 것은 교만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상대방을 대적하고 공격한다는 의미입니다. ‘악인들이 뿔을 든다’는 것은 악인으로서 하나님과 언약백성들을 향하여 강하게 악의를 품고 대적을 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습니다. 악인들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적하기 위해 뿔을 높이 들고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악인을 낮추시는 하나님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지니라”는 말씀이 이어서 나옵니다. 사랑의 원리를 저버리고 말로써 사람들을 무시하며 하나님을 안중에 없이 여기는 태도를 이야기합니다. 그 후에 ‘높이는 것’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들이 오만하고 교만하여 뿔을 높이 들고 모든 사람들 위에 뛰어난 것처럼 행동하지만, 진정으로 높이는 일은 동쪽에서나 서쪽에서나 남쪽에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저 높이는 일이 동에서나 서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무릇 높이는 일은 자연적으로나 우연히, 혹은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진정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도록 높아지거나 멸시를 받도록 낮아지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하나님께서 낮추시고 높이시는 일을 재판장의 자격으로 행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위로가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악인의 번성함은 어느 때든지 볼 수 있는 일이고 의인이 고통 받고 찌그러지는 일들도 항상 만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영원한 일처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파도가 치면 물위에 거품이 일어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거품이 모두 사라지는 것처럼 악인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높아져 뿔을 들고 교만하게 되는 일이 있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반드시 낮추실 것이요 진정으로 낮아지고자 하는 사람들을 높이실 것입니다. 잠시 역사가 꼬이는 것 같고 잘못되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는 깊이 개입하시고 역사하셔서 언약백성들 속에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도록 만드십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는 인생이 꼬일 때도 있고, 어려움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형통할 때 이것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번영인지,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시는 것인지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비하신 진노의 잔
“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어 술거품이 일어나는도다 속에 섞은 것이 가득한 그 잔을 하나님이 쏟아내시나니
실로 그 찌끼까지도 땅의 모든 악인이 기울여 마시리로다”(시 75:8)
본문해설
시인은 8절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악인을 낮추시고 의인을 높이시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며 오만하게 행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낮추시고, 모순된 시대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려는 거룩한 성도들을 어떻게 붙드시는지를 제시합니다. 하나님은 진노의 잔을 악인들에게 쏟으심으로써 악인을 낮추시고 의인을 높이십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하나님의 손에 있는 술잔에 비유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진노의 일곱 대접은 구약의 비유와 은유를 토대로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는 것이 진노의 잔으로 비유된 것은 구약과 신약 전체를 관통하면서 공통적으로 사용된 은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어 술거품이 일어나는도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술잔을 따르는 광경입니다. 하나님이 그 잔을 충분히 채우고 계신 것을 보여줍니다. 높은 곳에서 기울여 포도주를 따를 때 포도주는 공기방울을 일으키며 잔에 가득 차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상의 악인들을 심판하실 때 일체의 긍휼 없이 진노의 잔을 충만히 채우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본문에서는 “그 속에 섞은 것이 가득하다”고 했는데 주석가들은 이것을 적절히 주석하지 않았습니다. 진노의 잔이 평범한 포도주잔으로 비유되지 않고 약을 섞거나 독을 탄 술잔으로 묘사하며 그날에 쏟아 부어지는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엄중하고 무서운지를 보여주는 비유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해석해봅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지혜
“그 잔을 하나님이 쏟아내시나니 실로 그 찌끼까지도 땅의 모든 악인이 기울여 마시리로다”라고 합니다. 기울여 마시는 것은 잔을 받아 높이 들어서 술을 목구멍 속으로 들어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악인들의 의지를 초월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악한 의지가 잘못된 것을 선택하고 하나님께서는 섭리 속에서 그 결과로서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의로운 백성들은 물론이고 악한 백성들조차도 자신이 선택한 결과가 그대로 발생하지 않도록 다양한 방법으로 막아주십니다. 인간사회가 더 큰 혼란과 더 큰 고통에 휘말리지 않도록 보호하시고 지켜주심으로 당신이 원하는 일들을 성취해 가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의 백성들에게만 자비를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이교도들과 심지어는 당신을 모욕하는 세상의 패역자들에게도 은총을 베푸심으로 인류가 멸망하지 않고 유지되도록 도우십니다. 실제로 우리의 삶을 보면 악인과 의인의 삶이 그물처럼 함께 얽혀있고 하나님의 섭리적인 배려는 당신이 사랑하는 백성들의 행복과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은 세계화 시대라고 합니다. 예전 같으면 관심을 가질리 없는 일들이 오늘날에는 중요한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우파정권이 물러가고 18년 만에 좌파정권이 뜨게 된 것, 그리스에서 총선이 이루어졌는데 집권여당이 참패하고 야당에게 의석수가 더 많이 부여된 것, 유럽의 구제금융, 경제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해결책을 동의하였던 집권당의 패배에 대해 지구 반대편에 있는 한국이 깊이 관심을 갖고 신문마다 대서특필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의 정치적인 상황이 우리가 먹고사는 문제와 현실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수출을 해서 먹고사는 나라이고 많은 물건을 수입해서 재생산하고 있기 때문에 만약 그들이 금융위기를 적절하게 극복하지 못하고 경기가 심하기 위축될 때 우리나라의 산업이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많은 고용해고를 가져올 것이고 많은 기업체들의 도산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러면 수출을 위해 물건을 납품하는 소규모 회사들이 문을 닫을 것이고 그들에게 원료를 납품하던 원자재 생산업체들이 줄줄이 도산하게 될 것입니다. 근로자들이 해고될 것이고 그 가족들은 돈을 쓸 수 없기 때문에 물건을 팔고 재화를 생산하는 업체들은 다시 위기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 위기는 회사들에게 간접적인 영향을 끼쳐서 대량 해고사태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국가 전체의 구매력이 떨어져서 경제가 더 심각하게 소용돌이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먼 나라에 있는 경제가 우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악인들의 행복과 불행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들의 행복과 불행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 설명할 수 없는 섭리의 지극한 지혜 속에서 모든 것을 규율하고 통제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심판으로 진노의 잔을 쏟아 부으시는 일들을 아침에 한번, 저녁에 한번, 내일 아침에 한번, 이런 식으로 행하시지 않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신앙 있는 사람도 때로는 하나님은 자비롭고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막살아도 된다는 식의 잘못된 인생관을 갖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능하거나 너무 멀리 계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지극한 지혜 속에서 모든 것들을 이끄시고 돌보십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자기의 백성들을 보살피고 긍휼이 여기시면서 모든 섭리의 그물망을 지혜롭게 움직이고 모든 것들을 통해서 당신의 계획과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악인이 번성 할 때
악인들이 독주의 잔의 찌꺼기까지 모두 기울여 마신다는 것은 결국 회개하지 않는 악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아낌없이 쏟아 부으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8절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은 이것입니다. 악이 창궐하는 것 같고 진리가 모두 사라진 것 같은 때, 믿음의 자녀들은 그분의 살아계심을 굳게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 우리의 뜻과 같지 않아서 진노와 부흥을 우리의 시간표대로 주시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가장 적합한 때 인간의 지식을 초월하는 탁월한 지혜 속에서 일을 행하심으로 당신의 공정한 속성을 세상에 펼쳐 보이십니다. 악인의 행복과 의인의 불행사이에서, 혹은 의인의 불행과 악인의 행복사이에서 당신의 공정한 진리의 심판을 펼치십니다.
우리의 때는 하나님의 때와 다르지만 하나님은 당신이 모든 세계를 통치하시는 궁극적인 주관자이시며 당신의 위대한 영광을 보여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시는 때가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회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악인들이 처처에서 악행을 일삼고 갈대아 사람들과 결탁하여 나라의 권력을 독차지하고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심판 없이 번성하였습니다. 악인들의 번성을 보면서 선지자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가 의심하였고 그의 신앙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와 주권을 깨달으면서 확고한 신앙을 가진 믿음의 선지자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고백이 마틴 루터에게 커다란 감화를 주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은 악인이 번성하는 때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충분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의 번성은 벤 풀의 무성함과 같다고 했습니다. 시골에서 사람들이 밭 가까이 있는 잡초들을 낫으로 제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잡초가 땅의 지력을 빨아먹기 때문에 그것을 갈아엎거나 베어내 버립니다. 길같이 자란 풀들을 낫으로 베어서 밭 위에 그냥 버려둡니다. 금방 베었을 때는 커다란 지게에 실을 만큼 풍성해 보이지만 한 낮에 뜨거운 햇빛을 받고나면 그것들은 모두 검불이 되어 흩어집니다. 며칠이 더 지나면 다 부스러지고 바람에 날려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되어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악인의 종말이자 미래입니다.
결론과 적용
언제나 우리주변의 사물들의 질서가 우리 원하는 대로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신앙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나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그 신앙 말입니다. 이 신앙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위로가 있습니다. 그가 악인들이 심판당하는 것을 원치 않고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정하신 때에 심판을 행하사 모든 일의 질서를 당신의 계획대로 돌려놓으십니다. 이 날은 악인에게는 재앙의 날이지만 믿음을 지키며 의롭게 산 사람들에게는 기쁨의 날이요 신혼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진정한 기쁨과 영광이 심판을 통해서도 세상에 드러날 것입니다. 이것이 악인들에 의해 공의가 더렵혀지고 무질서 속에서 고통 받을 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시는 방법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자녀들의 소망이 있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을 찬양함
“나는 야곱의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며 찬양하며”(시 75:9)
본문해설
9절과 10절은 이 시의 결론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고 찬양할 것이라는 결의를 보입니다. 그것은 또한 자신과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선포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외치고 알린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단지 설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모든 것이 도구가 되어 하나님을 선포하고 알린다는 뜻입니다. 말로 듣고 직접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도록 언어와 시와 글과 실존하는 삶과 윤리적인 모습으로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선포의 도구가 되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큰 시련과 환난 속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성품을 통해서 자신의 삶이 다시 한 번 하나님을 향해 재편된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찬양함
찬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사실상 하나님을 높인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충분히 높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찬양의 목적은 기도와 마찬가지로 찬양하고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 가운데 어떤 효과를 불러 일으켜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창조하고 구속하신 의도와 목적을 따라 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높임과 찬송,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경배, 이것이 바로 시인이 하나님 앞에 결심하고 있는 바입니다.
하나님의 무엇을 찬송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분이시며 우리의 감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선포하고 찬양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과 맺으신 관계를 통해 드러난 그분의 속성을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인식과 존재의 관계
이와 매우 비슷한 유비(類比)가 인간에게 있습니다.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가장 중요한 점은 반성입니다. 자연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도덕적인 의미에서의 반성입니다. 자연적인 의미에서의 반성은 짐승도 합니다. 계속 같은 곳으로 가서 먹이를 찾다가 실패하면 다시 그 곳으로 가지 않고 다른 길을 선택합니다. 어떤 것을 먹잇감으로 알고 덤벼들었다가 몇 번 실패하면 자신이 맞상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포기합니다. 이것이 짐승에게 있는 반성인데, 이것은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반성입니다.
인간은 도덕적인 반성을 할 수 있는 유일한 피조물입니다. 도덕적인 반성의 궁극적인 대상은 자신 안에 있는 마음가짐입니다. 그러나 마음 자체를 직접 들여다보지 못하기 때문에, 하루를 보낸 후에 그 날 일어났던 일들을 반성하게 됩니다. 자신이 행동하고 경험했던 일들을 시작점으로 어떤 마음이 이런 행동을 가져왔을까 추론하며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경향과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하게 반응하는 자신의 마음 구조나 성향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을 진리의 틀 위에 올려놓고 재보는 것입니다. ‘나의 이런 성향이 도덕적으로 옳은가?’ 모눈종이 위에 놓듯이 올려놓아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질서들이 보이게 되고 그 질서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질서에서 이탈한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거기에서 반성은 회개로 이어지게 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신의 책 속에서 말하기를, “주변의 질서가 정연한 가운데서 어떤 사물의 추함은 증진된다.”고 말했습니다. 아름다움 혹은 추함이라는 것 자체가 인식과 존재 사이에 걸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족들과 야유회를 갔을 때 하늘을 날아다니는 파랑새는 참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예배당 안에 파랑새가 20여 마리가 날아다닌다면 우리는 예배를 중지하고 그것부터 쫓아내거나 잡을 것입니다. 도저히 쫓아내거나 잡을 수 없다면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것은 추하기 때문입니다. 푸른 풀밭과 나무들, 시냇물이 흐르고 꽃들은 활짝 피어 있는 가운데 파랑새가 노래하며 하늘을 나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날아다니는 파랑새와 예배드리는 환경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즉, 추함이라는 것은 주변의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어떤 마음이 하나님 앞에 올바르지 않다 하더라도 올바르지 않은 사람들 속에서는 올바르지 않음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눈종이와 같이 질서정연한 규격 위에 올려놓고 볼 때, 추악함은 크게 증진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을 직시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와 이웃과 교회와 그리스도와 천사와 악마와 모든 피조물들과 맺은 관계를 통해 마음 안의 성향과 경향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발견이며, 우리는 그 속성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찬양이기도 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자신의 책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지만 인간이 그것을 이해하고 당연한 그것을 찬양할 때 기뻐하십니다.” 하나님 당신의 이익 때문이 아니라 찬양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어떤 변화 때문에 그 찬양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마음의 변화가 없는 사람들의 찬양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리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선포하고 찬양한다는 의미입니다.
야곱의 하나님
본문에서는 하나님을 한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합니다. 야곱은 이스라엘의 족장 중 한 사람입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많이 등장합니다. ‘이삭의 하나님’은 흔히 나타나지 않고, ‘야곱의 하나님’으로 많이 표현됩니다. 선지서를 보면 ‘야곱’ 자체가 이스라엘에 대한 애칭으로 사용됩니다. 이것에 대한 명쾌한 해설은 듣지는 못했지만, 많은 학자들은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맺으신 ‘언약관계’에 대한 강조라는 점에서 공통적으로 합의를 합니다. 왜 이삭은 제외하고 야곱에게서 언약관계에 대한 강조가 나타날까요? 저는 여기에 이런 해석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과 야곱, 모두 결함이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생애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나타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많이 돋보이는 사람이 야곱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은 처음부터 사기꾼적인 기질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 앞에서 한번 결심하면 굳세게 밀고나가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기회주의자였고 시기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삭은 자연적인 본성에 있어서 너그럽고 다투기를 싫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치열하게 경쟁하고 이를 악 물고 악착같이 남을 눌러 이기려고 하는 육욕적 승부의 기질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이삭에게도, 야곱에게도 하나님의 언약은 등불이었지만 야곱의 방이 제일 캄캄했기 때문에 등불이 더 환하게 빛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하나님’에 대해서 깊이 감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야곱의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며 찬양하며”, 곧 거룩하신 ‘언약의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인생을 돌이켜 보십시오. 가슴을 저미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우리가 불순종하고 패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용서해 주실 때 나타났습니다. 참되고 눈부신 진리의 불빛은 우리가 오류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인식되었습니다. 우리는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리의 빛의 찬연함을 드라마틱하게 경험하려고 어둠 속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고 다만 오류가 좋아서 그리로 간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크게 나타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그저 남들에게 상처를 주는 게 좋아서 상처의 길로 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하기 위해서 비참해진 것이 아니라 죄와 불순종의 대가로 비참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악한 것들까지 사용하셔서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이 대목에서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가슴이 미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노래하다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하고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하나님의 공의에 참여함
“또 악인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시 75:10)
본문해설
10절에서 시인은 언약의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자신이 결심한 바를 고백합니다. 그것은 “악인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라는 결심이었습니다.
성경에는 뿔이라는 말이 빈번하게 나옵니다. 뿔이라는 은유적 표현이 갖는 의미는 문맥에 따라 여러 개가 있습니다. 뿔이라는 말이 오만, 고집, 돌이키지 않은 패역함 같은 것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보다 많은 문맥에서 뿔은 영광을 가리킵니다. 여기에서 뿔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 성경에서 복수로 나옵니다. 뿔이라는 똑같은 단어가 의인에게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 뿔을 오만, 고집, 교만으로 해석 해버리면 악인에게는 적합한 비유이지만 의인에게는 부적합 표현이 됩니다. 같은 의미를 부여해야지만 해석의 통일성이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영광으로 해석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참여함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슴을 가까이 대하면서 살았습니다. 광야에는 사슴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슴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고 당시 유행하는 가락 중에 ‘사슴 곡조’라는 곡조가 있을 정도로 사슴은 그들에게 친숙한 것이었습니다. 뿔을 가진 짐승이 한 둘이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사슴을 염두에 두고 이 시를 썼을 가능성이 많다고 여겨집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녹용을 좋아합니다. 뿔이 크게 자란 것을 보면 ‘아깝다.’고 생각합니다. 뿔이 크게 자랐을 때 자르면 녹각이 되어서 영양이 없습니다. 말랑말랑하게 솟아날 때 뿔을 잘라서 약으로 사용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슴의 뿔이 크게 자라서 커다란 나뭇가지와 같이 된 것을 하나의 영광으로 보았던 것 같습니다. 가을철이 되면 사슴은 뿔을 가지고 치열한 왕위 쟁탈전을 벌입니다. 뿔을 서로 부딪치면서 싸웁니다. 부딪칠 때 나는 소리는 커다란 바위가 부딪히는 소리와 같습니다. 결국은 뿔이 약한 사슴이 지게 됩니다. 때로는 치명적인 상처를 몸에 입기도 합니다.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뿔을 갈아 뾰족하게 만들어서 상대방을 공격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기에 사슴의 뿔이 길게 솟아 위엄 있게 자란 것은 동물세계의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는 영광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노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에 뿔이 잘린 사슴을 본다면 그것은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광경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악인의 뿔을 다 벤다”는 말은 하나님의 통치에 내가 동참하겠다는 뜻입니다. 이 시기는 의인과 악인이 함께 섞여서 혼란스럽고 부패한 사회상을 형성하였습니다. 결국은 주님이 오셔서 그들을 심판하시고 악인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며 모두 파멸되었습니다.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았던 의인들에게는 신원의 날이 되었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며 다시 세움을 입는 회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때 시인은 반성합니다. 모순과 갈등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언약백성들의 의무는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만큼의 힘과 권력은 없지만 그분의 도우심을 힘입어 자신에게 주어진 힘과 자원 안에서 최대한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언약백성들의 삶입니다. 불의에 항거하고 옳지 않는 것과 싸우고 불쌍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면서 그들에게 어떤 보상이나 대가를 바라지 않은 사랑과 자비를 끊임없이 베푸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이고 언약백성들의 믿음생활입니다. 시인은 모순과 억압의 시대를 살면서 그 일들을 다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심판의 약속을 주셨을 때 시인은 “언약의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 하겠습니다.”라는 결의를 보여준 것입니다. 이것은 악인의 영광을 다 베어버리겠다는 말이었습니다. 사회가 굽고 나라가 어지러운 가운데 불의한 자들이 득세하고 악인들이 영광을 얻는 모순된 현실과 싸우겠다는 말입니다.
악인들의 영광이 사슴의 뿔처럼 아름답게 솟아났는데 이것들을 베어 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사슴은 위엄과 영광의 상징인 뿔을 길러서 영광을 자랑합니다. 그런데 몇몇 사슴을 잡아서 뿔을 톱으로 켠 후, 뿔이 잘린 사슴을 무리 속에 다시 집어넣는다면 그것은 얼마나 수치스러운 것이겠습니까? 시인의 고백은 그런 수치를 당하게 하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또한 시인은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릴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때, 나는 하나님이 통치에 참여하여 그 일이 이루어지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도록 이바지하겠습니다.”라는 시인의 마음과 자세를 보여줍니다.
의인의 뿔을 높이 드심
하나님 앞에 올바른 사람들, 의로운 자들이 사회의 구조적인 악과 불이익으로 짓밟힘을 당하기도 합니다. 존귀히 여김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모욕을 당하고 짓밟히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으로 악인이 처처에 횡횡하는 것보다 의로운 사람이 부당하게 억눌리고 짓밟히는 것에 더 가슴 아파하십니다. 애굽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나라였습니까? 자기의 마음에 좋은 대로 우상을 섬기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사는 이들이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그들을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통을 받으며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정하신 도덕법칙에 어긋나는 일들이 일어날 때, 하나님은 섭리 속에서 개입을 하십니다. 저는 중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주화의 봄을 그렇게 봅니다. 북한의 역사를 그런 시각에서 바라봅니다. 망하기를 원하고 원하지 않는 차원을 떠나 악이 극에 달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개입하셔서 어떤 식으로든지 나라를 바로 잡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통 받을 때 그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상달되었고. 하나님은 애굽을 심판하셨습니다. 그 심판의 결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해방되었습니다.
이것은 의인의 뿔을 높이 드는 일이 하나님의 얼마나 커다란 관심사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뿔을 베고 의인들의 뿔을 높이 들어서 심판과 함께 당신의 공의를 펼치실 것을 믿으며 자신도 거기에 참여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매 순간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동행하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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