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78
목 차
내 율법과 내 입의 말(시 78:1) 1
비유로 말할 지혜(시 78:2-3) 6
여호와의 행하신 일을 전함은(시 78:4-5) 12
계명을 지키게 하시려고(시 78:6-8) 16
그의 기이한 일을 잊을 때 1(시 78:9-11) 20
그의 기이한 일을 잊을 때 2(시 78:12-17) 26
하나님을 시험한 이스라엘(시 78:18-20) 31
여호와께서 노하신 것은(시 78:21-22) 36
기적으로 먹이신 예수님(시 78:23-29) 42
욕심, 불순종의 원인(시 78:30-31) 49
두려움으로 보내는 날들(시 78:32-33) 56
악한 자가 하나님을 찾을 때(시 78:34-35) 63
허무한 것들을 사랑하심(시 78:38-39) 70
이스라엘의 반항과 시험함(시 78:40-41) 76
불신앙의 원인(시 78:42) 82
하나님이 행하신 일 1(시 78:43-44) 87
하나님이 행하신 일 2(시 78:45-48) 92
하나님이 행하신 일 3(시 78:49-51) 96
광야에서 보호하심(시 78:52-53) 101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심(시 78:54-55) 106
이스라엘의 배반(시 78:56-58) 111
배반한 이스라엘을 다루심(시 78:59-62) 117
불과 칼에 사라진 노래(시 78:63-64) 123
용사 같으신 하나님(시 78:65-66) 128
시온과 성소를 택하심(시 78:67-69) 134
다윗을 세우신 하나님(시 78:70-71) 139
내 율법과 내 입의 말
“내 백성이여, 내 교훈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시 78:1)
본문해설
오늘날 우리가 처해있는 역사적 상황과 난관들의 형태는 바뀌었지만 이것은 과거에도 있었던 것들입니다. 과거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했으며 그들에 대한 하나님과 평가는 어떠했으며 결과가 어떠했는지 아는 것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를 지혜롭게 합니다.
시편 78편에 “마스길”이라는 표제가 붙은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시인은 “내 백성이여 내 율법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라고 노래합니다. 얼핏 보면 하나님의 음성 같지만 이것은 시를 쓰고 있는 주체자의 서론적인 초청입니다. 시인은 다른 사람들을 지도할 수 있는 영적 총명을 가지고 이 노래를 지었습니다. “내 백성이여”라고 했는데 여기서 내 백성은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이 노래는 정치적인 권위를 가지고 부르는 소리라기보다는 신앙적인 호소력을 가지고 부르는 초청입니다. 언약공동체에 속한 한 지체로서 시인은 자기의 백성들이 지혜 없이 살아가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그들에게 참 지혜를 나누어 주고 싶었습니다.
두 종류의 구제
구제에는 육적인 구제와 영적인 구제가 있습니다. 육적인 구제는 섬김을 필요로 하는 이를 물질로 돕고 그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줌으로써 결핍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구제는 소극적으로는 그의 죄를 용서해주는 것이고, 적극적으로는 그에게 지혜를 나눠 주는 것입니다. 지식의 말씀과 지혜를 나눠 주는 것이 영적인 구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지라도 육체와 영혼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도울 때도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해야합니다. 한편으로는 육신의 필요를 채워서 모자람에[서 벗어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혼의 필요를 채워서 하나님 의지하며 살도록 도와주어야합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잘못한 것이 있으면 용서해주고 새롭게 관계를 맺으며 하나님 앞에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 영적인 구제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시인은 영적인 구제에 힘쓰고 있습니다.
˚내 율법˛
“내 율법을 들어라,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 는 표현은 모세오경 특히, 출애굽기와 신명기에서 자주 나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에게 “내 율법을 들으며 내 율법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라고 선포하는 표현과 일치합니다. “내 율법, 내 입의 말”이라는 표현은 짝을 이루는 말을 비슷하게 배열하는 평행법입니다. “내 율법/ 내 입의 말/ 들으며/ 귀를 기울이며/ 들어라/ 귀를 기울일지어다” ABA'B' 이렇게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율법에 친숙해진 상태를 보여줍니다. 사도 바울도 “내 복음, 나의 복음”이라고 똑같은 표현을 썼습니다. 내 복음, 나의 복음이라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두 다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자신의 율법 곧, 인간의 율법이라는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율법은 모세의 율법이자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아닙니까? 내가 마음을 다해서 율법을 사랑하고 나의 내면의 세계가 율법에 친숙해진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마치 이 율법이 내 것처럼 된 것 같아집니다.
홀트 아동복지센타에 위탁양육 프로그램이 있다고 합니다. 이 단체는 부모들이 버리진 아이들을 모읍니다. 그 아이들을 가정에서 기르는 것이 가장 좋기 때문에 입양을 보내는데, 심지어 외국으로 보내기도 합니다. 입양되지 못한 아이들은 가정에 위탁해서 일정 기간 기르게 합니다. 이것을 위탁양육이라고 합니다. 6개월 동안 아이를 돌봐주면 복지센터에서 생활비를 보조해줍니다. 가정에서 양육을 받으면 아이의 정서적 성장에 도움이 됩니다. 혼자 살면 심심하고 생활비도 보태주기 때문에 위탁양육을 신청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6개월 정도 아이를 기르면서 재미가 있어서 6개월을 더하게 되다가 1년을 채우는 경우가 많답니다. 그런데 아이를 떠나보낼 때가 되면 모두 눈물을 흘립니다. 자기 아이는 아니지만 아이에게 우유도 먹이고 재워주고 병원에 데려가며 키우다보니 아이에게 정이 생겨서 내 아이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시인에게 그와 같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율법이었습니다. 어떤 죄인이 하나님의 율법을 처음부터 좋아합니까? 그런데 점점 율법이 하나님의 은혜의 표시이자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율법대로 살게 됩니다.
율법의 의미
율법은 좁은 의미의 율법과 넓은 의미의 율법으로 나뉩니다. 좁은 의미의 율법은 우리에게 지키라고 주신 의무이자 명령이지만, 넓은 의미의 율법은 세계와 인간에 대해서 주신 계시를 총칭합니다. 율법은 영혼을 소생시킵니다. 율법이 우리를 쇄신시키고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율법을 듣고 익히면서 그것이 자신의 일부가 된 것처럼 사랑스러워지고 마음에 녹아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내 율법이 되고 내 입의 말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영화를 본 이야기를 해주는데 내가 직접 영화를 본 것보다 훨씬 더 실감나게 전해주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목회자의 설교를 듣고 난 후 자신이 받은 은혜를 다름 사람에게 더 생생하게 전해주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자신의 마음속에 익숙하고 친숙해진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졌다고 할 수 있는 경지입니다.
‘가졌다’는 희랍어로 ‘에코’라는 동사를 사용하는데 그 뜻은 이렇습니다. 언제든지 내가 내 맘대로 쓸 수 있고 내 맘대로 활용할 수 있을 때 ‘가졌다’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한국은행에 돈을 가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돈은 내가 쓸 수 있는 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갑에 있는 돈은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기 때문에 “내가 가졌다, 쓸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율법이 시인에게 ‘내 율법’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자신의 일부가 된 것처럼 그 법을 사랑하는 사람의 입술을 사용하셔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도록 당신의 뜻과 계획을 알려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특권입니다. 하나님이 손수 하시거나 또는 천사를 통해 직접 음성을 전하는 대신에 지극히 유약한 인간을 사용하셔서 이 일을 행하십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사랑하는 종을 통한 육화된 언어로 전달해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진리를 전달해 주셨습니다. 인간에게 친숙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신으로 오셔서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신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위대한 경륜이고 방법이었습니다. 이것이 시편 78편 1절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는 바입니다.
결론과 적용
다음의 두 가지를 생각해 봅시다. 첫 번째는 우리가 ‘내 율법’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친숙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다시 말해, ‘내 율법’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의 진리에서 친숙성을 느끼고 있습니까? 진리가 나의 일부가 되고 또 항상 진리를 붙들고 함께 살기 때문에 ‘진리 없는 나, 나와 상관이 없는 진리’는 생각할 수 없는 신자의 삶을 살고 있는지 반성해봅시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머리에 이해될 뿐만 아니라 우리를 두루 적시고 심령 속에서 깊이 배여 있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두 번째는 율법을 우리에게 친숙한 것으로 만들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이것들을 전하기 위해서 힘쓰고 있는지를 반성해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통해 빛을 발견한 사람이라면 어둠속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느낌이 들어야 하는데,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는 것은 진정으로 그 빛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진리의 빛은 사랑의 빛이기 때문에 진리를 소유한 사람들은 진리가 없는 사람들을 보며 긍휼한 마음을 갖고 민망히 여기는 심정을 갖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시편 78편 1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친숙해질 뿐더러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어서 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가르쳐줍니다.
비유로 말할 지혜
“내가 입을 열고 비유를 베풀어서 옛 비밀한 말을 발표하리니
이는 우리가 들은 바요 아는 바요 우리 열조가 우리에게 전한 바라”(시 78:2-3)
본문해설
“내 율법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고 했던 시인이 2-4절에서 가르쳐 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설명해나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신앙으로 사는 사람이므로, 신앙의 지혜는 곧 인생의 지혜입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에 대한 지혜를 소유한 사람입니다. 이 지혜는 다른 사람에게 들은 것이 아니라 ‘내 율법’, ‘내 입의 말’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자신 속에 체득되어 깊이 녹아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이 그분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아야하며,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살지 못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보여주고 싶으셨습니다.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여기서 ‘감추어졌던 것’은 ‘내 율법, 내 입의 말, 신앙의 지혜’입니다. 이것은 시인 자신이 고안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은 날부터 전해내려 온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인생의 지혜를 터득해서 시련과 고난을 감매하고 인생의 길을 올바르게 살아간다고 할 때, 그것은 무엇을 알기 때문입니까? 그것은 인간이 어떻게 행하고 살아가야 하는 지에 대한 도리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도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비록 학식이 모자라도 그것을 굳게 붙들고 살아갈 때 보람 있는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의 지혜
불신자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상들 중에는 교육을 거의 받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조상들로부터 배우며, 자신의 삶을 통해 신앙이 무엇이며 인생이 무엇인지 깨닫고 올바르게 살아간다면, 사람들에게 기림 받을 만한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비록 교육을 많이 받지 못했을지라도 인생을 사는 도리가 무엇인지 알아서, 아내로서 남편에게, 남편으로서 아내에게 헌신하고 자녀를 잘 양육하고 어른들 공경하고 이웃에 대해서 신의를 지키며 살아간다면 살면서 후회할 만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저의 할머니께서 77세에 돌아가셨는데 만약 지금까지 살아계신다면 104세쯤 되셨을 것입니다. 할머니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셨지만 딸이라 교육을 별로 받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보면,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아보신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철이 들고 나서 할머니와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았는데 할머니가 단 한 번도 누구를 원망하거나 험담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명백하게 자신에게 큰 상처와 고통을 준 사람조차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말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흔히 인복이라는 말을 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자기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사람됨과 상관없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행운이 아닙니다. 관계 속에서 자신이 뿌린 씨앗들을 거두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잠시 만나고 헤어질 것처럼 이용하려고 하지 않고 오래도록 관계를 맺을 사람처럼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메아리처럼 갚음을 받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인복이라는 것입니다.
˚감추어졌던 것˛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독특한 형태로 남아 있는데 그것은 바로 율법입니다. 율법은 도저히 지키려 해도 지킬 수 없는 명령이거나 어기면 죽음의 위협을 가하는 부정적인 의미만을 가졌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총체적인 계시를 포함합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이 우리를 향해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를 알게 됩니다. 명령과 지시에는 명령자와 지시자의 본성을 깨닫게 해주는 가르침이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어떤 분인지 알고 의지하며 살도록 하는 많은 계명과 계시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후손들에게는 주셨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감추셨던 바로서, 언약백성들도 각각도 깨닫는 분량이 저마다 달랐습니다.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라는 말은 하나님이 이미 보여주셨지만 불신자이거나 언약 밖의 백성이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언약 백성일지라도 주신 바를 다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감춰져 있는 비밀스러운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설교를 듣거나 성경을 읽으면 많이 깨달을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공부를 많이 했다고 많이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가 진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분을 전심으로 의지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달아집니다.
˚입을 열어˛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라는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 ‘입을 열어’라는 말씀과 비슷한 말씀이 마태복음 5장 2절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라고 서두를 꺼내며 산상수훈이 쏟아져 나옵니다. 이 표현은 하고 싶은 말이 마음속에 많이 있을 때 쓰는 표현인데, 특히 구약성경에서 자주 나옵니다. 마치 저수지에 물이 가득 담겼을 때 수문이 열리면서 봇물 터져 나오듯이 입을 여는 것을 가리킵니다. ‘내가 입을 열어’라는 표현은 동시대의 백성들이나 후손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지혜가 화자 안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지혜를 비유의 방식으로 말하겠다고 합니다. 왜 직접 말하지 않고 비유로 말하는 것입니까? 심지어 성경에서 예수님께서는 “비유가 아니면 말하지 아니하시더라”고 나올 때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비유는 청자가 화자보다 수준이 낮거나 청자가 화자를 이해할 능력이 되지 않을 때, 그 사람의 눈높이에 맞춰서 이야기하는 방식입니다. 비유적 화법의 묘미는 핵심을 찌르는 동시에 짧지만 거기에 해석이 적용될 때 수많은 진리들이 쏟아져 나오는 데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비유로 가르치셨던 이유이며 시인이 비유로 말하겠다고 했던 이유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지혜가 충만하여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답답했을 것입니다. ‘인생을 저렇게 살아가다니, 저 사람들은 정말 무지하고 지혜가 없구나. 그래서 그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구나. 저것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고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마음이 시인으로 하여금 “내가 입을 열어서 비유로 말”하게끔 만들었습니다.
˚조상들이 전하여 준 바˛
시인은 그것이 어디에서부터 온 것인지를 설명합니다. “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신앙의 지혜, 곧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지혜’는 우리 스스로 생산해 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셨고 선지자들과 조상들이 우리에게 대대로 전하여 준 것입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 중에는 최근에 나온 책 읽은 것을 자랑처럼 항상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식은 늘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 나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지식의 궁극적인 목표는 지식 그 자체를 사람들에게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인생을 살아서 내가 하나님 안에서 복되고 사람들을 복되게 하는 데 이바지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개혁신학자이자 목사이자 설교자이자 작가인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연구가인 ‘거스너’라는 사람의 제자인데 지금은 연세가 많이 드셨습니다. 그가 어느 미국 신학교에서 강의가 마치자, 한 학생들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혹시 최근에 이런 책들을 읽어보셨습니까? 이런 책들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저런 책들에서는 저렇게 이야기합니다.” 그 질문에 그 분은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그 책은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나보다 요즘 책들을 많이 읽었지만 나는 여러분이 읽지 않는 옛날 책들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지에 대한 지혜를 배우고 있습니다.”
지혜의 문제에 있어 중요한 것은 지식의 많고 적음이나 새것이냐 옛것이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인생을 사는 지혜와 용기와 현명함을 얼마나 잘 담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이러한 지혜를 시인은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하여 준 바”라고 말합니다. 조상들도 조상들로부터 전달받았고, 전하여 준 바대로 살면서 거기에 나의 고백이 더해진 것을 다시 후손들에게 전해주고 후손들이 그 고백을 따라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객관적인 계시의 말씀이 내 율법, 내 입의 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려 한다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교회나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웃에게 베풀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은 진리의 떡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육신의 떡으로 구제하여 그들의 육신을 이롭게 하고 영혼의 떡인 진리의 말씀을 전하여 그들의 영혼을 이롭게 함으로써, 그들을 완전한 하나님의 자녀로, 믿음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도와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인처럼 입을 열어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 안에서 체화된 하나님의 거룩한 지혜, 곧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인생을 살아야 할 것인가?”에 관한 지혜를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머리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깨닫고 손과 발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많은 사람들을 빛 가운데로 돌아오게 해야 합니다. 지혜를 세상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그것을 받지 못했더라면 불행하게 살았을 사람들을 주안에서 온전하게 살게 하는 것이 바로 세상을 향한 최고의 섬김입니다. 성경에서 자신을 돌이켜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하는 것은 천하를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사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여호와의 행하신 일을 전함은
“우리가 이를 그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 능력과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여호와께서 증거를 야곱에게 세우시며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정하시고
우리 열조에게 명하사 저희 자손에게 알게 하라 하셨으니”(시:78:4-5)
후대에 전할 것
시인이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는 자기가 지어낸 것이 아니라 조상들이 전해준 바입니다. 대대로 전할 내용은 여호와의 명예와 능력과 행하신 기이한 사적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과 그분의 이름의 영광을 조상들로부터 후대까지 전달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명령이자 조상으로부터 받은 명령입니다. 조상들도 그들의 조상들에게서 들은 것입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의 명예와 능력 및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신 역사입니다. 이러한 역사의식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었는데, 본문 5절에서는 이것이 왜 필요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 까닭은 하나님이 행하신 놀랍고 위대한 일을 찬송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키면서 살도록 주신 계명을 잘 준수하고 따르도록 독려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에 대해 책임지면서 살 것이 요구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들 중에 가장 높으신 분이시고 세계에 대한 당신의 의도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을 받은 인간이 어떤 존재가 되어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에 대한 명료한 의도를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그 의도는 우리에게 책임을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사람 되고 이렇게 살아라.”하고 명령하시는 것이 하나의 상징 일뿐이라거나,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고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시고 혹여 관심 있어도 그것을 하나님의 생각대로 행하실 능력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얼마나 모순됩니까?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후손들에게 전하게 하는 것은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가르쳐 주기 위함인데 그것은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신약에서 뿐만 아니라 구약에서도 신앙의 중요한 화두입니다. ‘사시는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노니’,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살아계시는 여호와’ 이런 표현들이 신앙고백 속에서 수없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그에 대한 합당한 책임을 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특별한 언약관계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자비와 긍휼과 사랑을 베푸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아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엄중한 두려움을 의식할 뿐 아니라 많은 언약적 유익을 받아 누립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모든 인간이 그 분 앞에 책임을 져야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 책임이 훨씬 더 컸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독점적인 사랑과 자비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셨고 남들이 가지지 못한 지식과 탁월한 은혜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누리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증거와 법도
‘여호와의 영예와 그 능력’이라는 표현에서 영예라고 하는 것은 효과적 영광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일을 널리 전파하게 하시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만드셨을 뿐더러 ‘하나님의 증거와 법도’를 세우셨습니다. 야곱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에 대한 애칭입니다. 친밀한 언약관계를 누리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증거를 세우시고 법도를 정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증거’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말로 ‘에두트’라고 하는데 법정에서 효력이 있는 증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증인은 ‘에뜨’라고 합니다. 증인에 의해서 행해지는 일들을 ‘에두트’, 증거라고 합니다. 법궤를 가리켜서 증거의 궤라고 불렀습니다. 법궤는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먹이신 증거이고 율법을 주신 증거이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적을 행하셨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존재의 증거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은총과 법도와 기적적인 보호의 상징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증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신 보호와 법도와 기적적인 능력을 의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증거를 야곱에게 세우셨습니다.
증거를 세울 뿐만 아니라 법도를 세우셨습니다. 증거궤 안에 들어있던 가장 중요한 물품 중 하나가 십계명입니다. 법도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하시고 후손들에게 알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일을 행하심은 너희에게 행하신 능력의 여호와이심을 가르쳐 주고 그분의 증거와 법도를 따라서 살라고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자비, 크신 영광과 위대한 일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행해졌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매우 특별한 은총을 베푸셨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은혜에는 언제나 소명을 내포되어 있습니다.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자비로운 은혜는 언제나 자비에 대한 반응을 요청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법도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큰 명예와 능력과 행하신 사적을 그들에게 보여주시고 후손들에게 전하게 하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은 입으로 시인은 하지만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도 많이 있는데, 그 해결책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4절과 5절은 이런 질문에 대해서 결정적인 두 가지 요소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위대한 일과 능력들을 현실적으로 경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직접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는 부흥이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위대하신 분이고 그분의 위대하심 앞에서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인식이 생겨나게 됩니다. 두 번째는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키며 살도록 주신 증거와 법도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야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자는 영적인 부흥의 측면과 관련되고 후자는 지적인 측면과 관계됩니다. 두 개가 함께 어우러지면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다운 삶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과 교리와 신학을 가르친다 하더라도 이 모든 것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위대한 일과 능력, 그분의 영광을 아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은혜, 이것들이 없이는 우리들이 그분의 증거와 법도를 따르며 살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두 가지 요소,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과 권능의 나타남 그리고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떤 증거와 법도를 따라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두 가지 대답을 함께 얻을 수 있어야지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교회의 백성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계명을 지키게 하시려고
“이는 저희로 후대 곧 후생 자손에게 이를 알게 하고 그들은 일어나 그 자손에게 일러서
저희로 그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의 행사를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 계명을 지켜서
그 열조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그 심령은 하나님께 충성치 아니한 세대와 같지 않게 하려 하심이로다”(시 78:6-8)
잊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행하신 큰 영예와 능력과 기이한 사적들을 후대에 전하는 동기와 목적에 대해서 6-8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잊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후대에 태어난 자손들은 하나님이 행하신 크고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에 대해서 잘 모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큰 축복은 조상들에게 행하셨던 크고 놀라운 일들을 입과 입을 통해 대대로 전수되게 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전에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진정으로 물려받은 사람이라면 그와 같은 일들이 자기 안에서 일어나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은 기념비적인 송축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크고 위대하신 능력을 이전 시대에만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느 시대든지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가르고 바산 왕 옥과 아모리 왕 시혼을 깨뜨리고 가나안을 유업으로 받은 위대한 역사를 찬송할 때는 언제였습니까? 그와 동일한 하나님의 큰 능력이 자기들의 시대에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믿었을 때, 그들은 이전에 행하신 하나님의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찬송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후손에게 전파하라고 하는 것은 잊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계명을 지키게 하기 위하여
둘째는 계명을 지키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그분이 행하신 일을 잊지 아니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무엇을 뜻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고, 그분께서는 우리가 세계와 인간에 대해 어떤 태도로 살아야할 지에 대해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더욱이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계시되었다면 그러한 책임성은 점점 더 가중될 것입니다. 이것은 객관적인 계시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자신이 진리를 깨달은 바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더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더 많은 책임이 요구됩니다.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특별히 관계를 맺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그 소망 안에서 그분이 주신 계명이 우리를 가장 행복하고 충만하게 살게 하는 것임을 깨닫고 그 계명을 지키며 살아합니다. 결국 그분은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정직하게 하기 위하여
셋째는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충성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조상들이 하나님 앞에 완고하고 패역했는데, 이것은 그들의 마음이 정직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음 세대는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정직’이라고 하는 것은 솔직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는 ‘올곧음’을 말합니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하나님을 믿고 따르지만 간헐적으로 마음에 부딪히는 것이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고 없으면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붙어있어서 그분으로부터 오는 모든 계명과 말씀을 지키는 것에서 의지와 마음의 자세가 흐트러짐 없이 올곧은 것을 뜻합니다. 올곧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살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후손들에게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백성들이 하나님을 잊지 않기를 원하시고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며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충성되게 하기 위하여
넷째는 하나님 앞에 올곧게 충성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이 세상에서 선택하고 구원하신 이유는 최초에 사람을 지으신 목적과 동일합니다. 최초에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셨을 때 원하셨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그 계명에 순종하고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에 섬김의 행위를 보태어 창조시의 의도와 계획들이 잘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것 위에 한 가지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처음 창조된 아담은 죄가 없는 사람이었지만 우리에게는 죄와 부패가 가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우리자신이 정결하고 깨끗하게 되는 일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 정결하고 깨끗하게 되는 일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섬김을 보태어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 맞도록 이 세상을 고치는 것이 우리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은 언약백성들에게 하나님을 기억하고 계명을 지키고 충성되게 살라고 요구하셨습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소명을 내포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크고 작은 은혜를 주시는데, 그것이 소명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마음을 다해 소명을 따라 살고 하나님 앞에서 섬기도록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순간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하는 많은 오류들이 섞여있어서 우리는 하나님 기억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를 사랑하고 내 중심으로 살려고 하는 마음을 날마다 하나님 앞에 씻어 버리고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계명을 따라 살려고 애써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맡겨주셨다는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으로도 충성되게 살아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고백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의 기이한 일을 잊을 때(1)
“에브라임 자손은 병기를 갖추며 활을 가졌으나 전쟁의 날에 물러갔도다
저희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고 그 율법 준행하기를 거절하며
여호와의 행하신 것과 저희에게 보이신 기사를 잊었도다”(시 78:9-11)
본문해설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계명을 어겼을 때, 무슨 일이 발생하는지 역사적인 실례를 들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브라임은 이스라엘의 열두지파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이 지파에서 여러 유력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나왔습니다. 에브라임이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북왕국 이스라엘 전체를 표현하는 애칭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야곱이라는 말이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유다사람 전체를 가리키기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에브라임은 남왕국과 북왕국이 갈라졌을 때, 북왕국에 속했던 가장 대표적인 지파였습니다. 제유법적으로 에브라임을 북왕국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단어로 사용됩니다. 남왕국과 북왕국이 갈라졌을 때, 남왕국은 두 지파 밖에 안 되었지만 북왕국은 열 지파를 이루었습니다. 북왕국은 여로보암이라는 유능한 왕이 나라를 다스렸기 때문에 상당히 강성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무기와 활을 만들어 군사력을 갖추고 무역도 잘해서 경제력도 갖추어 부강해졌습니다.
이들이 물러간 ‘전쟁의 날’이 어느 시기였는지 이 짧은 구절을 통해 다 예측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북왕국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외국과의 전쟁에 미리미리 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날에 패배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들이 패배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고 율법을 준행하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명시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훌륭한 증표였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전쟁의 승리를 통해 국가적인 난국 속에서도 그들을 붙들고 계심을 보여주었고, 전쟁에서 이기고 패배하는 과정을 통해 왕에 대한 호불호를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
에브라임 자손들은 세상 나라가 부러워하는 국력을 갖췄음에도 전쟁의 날에 패배했는데,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경영의 원리는 세상 나라의 경영의 원리와 똑같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세 가지를 잘하면 강한 나라가 됩니다. 첫째는 국민들을 잘 먹여 살리는 강한 경제력, 둘째는 외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강한 군사력, 마지막으로는 다른 나라들과 원만한 관계를 갖는 외교력, 이 세 가지를 가지고 있으면 강한 나라가 됩니다. 물론 현대에는 이외에도 다양한 것들이 필요하지만 세 가지를 기본적으로 갖추면 강성한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은 그것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나라를 통해 당신이 이 나라를 통치하는 실질적인 왕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에브라임이 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패배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시면 우리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심으로 영광을 받으십니다. 세속의 정치가들이나 전쟁전문가들은 에브라임이 전쟁에서 패배한 원인에 대해 다양한 평가를 내립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전쟁에서 패배한 원인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고 율법을 준행하기를 거절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라를 개인으로 축소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 의해 자신의 행복을 침해당하지 않고 안전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두 가지가 필요한데, 첫 번째는 경제적으로 능력이 있어야 하고, 두 번째는 자기를 지킬만한 어느 정도의 권력이 있어야 합니다. 권력이라는 것이 높은 사회적 지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존엄한 인간으로 인정해주는 법적인 보호와 필요한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르네상스시대에 이탈리아의 사상가, ‘피코 미란돌라’(Giovanni Pico della Mirandola, 1463-94)는 자기의 책 속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중세 교회에서 가난하고 후진하게 사는 것이 최고의 덕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르네상스가 되면서 사람들은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경제적인 여유를 강조했습니다. 왜냐하면 극심한 경제적 궁핍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지킬 수 없고 그들의 삶이 노예와 같이 비참한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농장을 중심으로 사는 농노의 경우, 소유가 없기 때문에 영주에게 예속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점차로 사람들의 생각들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근대사상이 출발하는 효시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경제력이 필요합니다. 아울러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권력도 필요합니다. 게다가 함께 지내는 많은 사람들과 원만한 인간관계도 필요합니다. 물론 이 세 가지 이외에도 학식이나 여타의 것들도 포함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들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무진장 애를 씁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자기계발서는 세 가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돈을 이렇게 벌어라, 성공해서 높은 지위에 올라라.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라.” 왜냐하면 오늘날 인간에게는 행복과 안락함이 최고의 관심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실패했을 때, 대부분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기사를 잊었도다˛
에브라임이 가지고 있었던 인생과 국가의 관한 개념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도무지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이기게 할 때가 있고 도무지 질 수 없는 전쟁임에도 지게 할 때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정복 초기에 잘 나타납니다. 단적인 예가 여리고성 전투와 아이성 전투 사건입니다. 큰 여리고성 전투에서는 창 한번 쓰지 않고 하나님이 이기게 하십니다. 하지만 그보다 작은 아이성 전투에서는 하나님이 그들을 패하게 만드십니다. 패배의 원인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며 언약과 율법을 준행하기를 거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신실하게 언약을 지키고 율법을 준행하며 살아야하는데, 어째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을 지키지 않고 율법을 준행하지 않았습니까? 11절에 보면, 그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것과 그들에게 보이신 기이한 일을 잊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기이한 일’은 ‘기적적인 일’입니다. 신약성경에 ‘싸우마시온’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것은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표적입니다. 하나님이 기적을 베푸신 목적은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갖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시편 119편에 ‘나의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라고 나옵니다. 하나님 말씀 안에 있는 기이한 것을 보게 되면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갖게 만들어주는 기이한 것들을 기억하고 간직하며 살아야 했는데 그들은 그것을 잊었습니다.
‘잊어버렸다’는 것은 히브리말로 ‘샤카흐’입니다. ‘자카르’라는 단어는 ‘기억하다’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샤카흐’는 불신앙하고 통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잊었다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기억한다’는 것은 ‘기념한다’는 뜻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이것을 선물 받았다면 이것을 보면서 ‘아무개가 이렇게 선물을 했구나.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정말 나를 향한 마음이 따뜻하다. 정말 좋은 사람이었는데 보고 싶다. 그를 만나면 잘해줘서 갚고 싶은데……’ 이런 것이 바로 기억하는 것이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기억한다’는 단어는 간단한 단어가 아닙니다. 깊은 히브리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너희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찬의 말씀 역시 구약과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잊었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단순히 ‘잠깐 잊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잊었다’는 히브리 단어는 ‘마음에 없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내가 너를 잊었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굉장히 커다란 심판의 말씀입니다. ‘내가 어찌 너를 잊겠느냐’는 말씀은 하나님의 커다란 자비와 은총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잊어버렸다”는 호세아서 말씀은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들에 대한 믿음을 철저하게 저버리고 불순종의 길을 걸어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잊어버린 것이 언약을 지키지 않고 율법을 지키지 않도록 만들었고 결국 전쟁에서의 패배를 가져온 원인이 되었습니다.
실천적 무신론의 삶
우리가 삶속에서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읽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기억하면서 신앙을 북돋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모든 힘의 근원입니다. 새벽마다 제가 하는 일이 있는데 새벽기도 종이 울리면 나올 때 핸드폰의 뚜껑을 열어서 배터리를 갈고 나옵니다. 그렇게 해야 핸드폰을 하루 종일 쓸 수 있습니다. 어느 날 깜빡 잊고 나오면 오후쯤 되어 배터리가 부족하다고 ‘삐삐’거립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과처럼 받아들여집니다. 전원이 없으면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우리 마음이 채워지지 않고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사는데, 그렇게 사는 것이 바로 실천적으로 무신론의 삶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고백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기억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반복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애굽 땅에서 건지셨습니다. 그리고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광야를 지나는 동안 먹고 마시게 하셨습니다. 바산왕 옥과 시혼을 깨트리고 가나안의 족속들을 멸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다 아시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우리 입술을 통한 고백을 듣기를 기뻐하십니다. 이렇게 언약백성들이 하나님을 기념하는 가운데 생명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결론과 적용
모든 사람이 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앞서 말했던 세 가지만 있으면 행복한 줄 알고 사느라고 하나님 덜 의지하며 살고, 그 세 가지가 떨어지면 마음이 괴롭고 여유가 없어서 하나님을 찾지 않고 심지어 원망하기까지 합니다. 풍부하면 풍부한대로 하나님을 떠나고 결핍하면 결핍한대로 하나님을 떠나며 살아갑니다. 매일매일 하나님이 우리의 어두운 눈을 말갛게 씻어주셔서 세상의 생각에 흔들이지 않는 정신의 명료함을 유지하는 일이 너무나 필요합니다. 판단력의 명료함은 마음의 은혜의 상태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은혜 속에 있으면 판단이 비교적 명료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는 판단이 분명하지 않고 마음의 모든 작용들이 어지러워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이지만 매일매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말씀과 은혜를 통해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의 기이한 일을 잊을 때(2)
“옛적에 하나님이 애굽 땅 소안 들에서 기이한 일을 저희 열조의 목전에서 행하셨으되
저가 바다를 갈라 물을 무더기 같이 서게 하시고 저희로 지나게 하셨으며
낮에는 구름으로, 온 밤에는 화광으로 인도하셨으며 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깊은 수원에서 나는 것 같이 저희에게 물을 흡족히 마시우셨으며
또 반석에서 시내를 내사 물이 강 같이 흐르게 하셨으나
저희는 계속하여 하나님께 범죄하여 황야에서 지존자를 배반하였도다”(시 78:12-17)
본문해설
하나님의 위대하고 놀라운 능력을 모르는 세대들에게 그것을 전해주어서 기억하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사람은 그것을 직접 목도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실 때 바로가 순순히 놓아주었겠습니까? 몇 백만이나 되는 노예를 내보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열 번의 재앙을 내리십니다. 나일 강이 변하여 피가 되는 것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에 모든 초태생들이 죽이 재앙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주게 됩니다.
출애굽 후에도 놀라운 기적들이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이 기적들을 행하셔서 사람들을 건져 내시는데 홍해 바다를 가르시는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보내고나니 억울한 마음이 들어서 군인들을 시켜서 추격을 합니다. 저쪽에서는 군인들이 추격해오고 이쪽에는 바다가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갇힌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바다를 가르셔서 물이 양쪽에 무더기 같이 서게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마른 땅으로 지나게 하시는 놀라운 이적을 행하십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해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직접 본 것입니다. 낮에는 너무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니까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서늘하게 가리며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반석이 쪼개지고 생수가 나와 시냇물처럼 흘러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마시는 놀라운 기적들을 하나님이 행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계속 보았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계속하여 하나님께 범죄 하여 마른 땅에서 지존자를 배반하였더라”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패역한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배반의 유전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조상으로부터 전수받고 그것을 후손들에게 전수해서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깊이 받아들이고 이해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거기에 따르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기적을 두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감사하지 않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범죄하고 배반하는데 조상들로부터 듣기만 한다고 신앙생활이 충분하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탐구하고 배우지만 배우고 듣는 것 위에 신앙을 더해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야겠다는 확고한 각오와 절실한 신앙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 아래서 범죄하고 밤에는 타오르는 불기둥 앞에서 범죄하고 아침에는 만나를 먹고 하나님 앞에 죄짓고 불순종 했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하고 놀라운 일을 듣는 것만을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일들이 성경에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성경말씀을 아침에 듣고 저녁때 불순종 할 수 있고 저녁때 듣고 아침이 오기 전에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을 깊이 깨닫고 난 후에 적극적으로 그 내용에 부합하는 삶을 살려고 애를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해나 갈수가 없습니다.
시인은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들을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행하신 크고 위대하고 놀라운 일을 보면서 계속 불순종하고 죄를 짓는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는 하나님을 배반하며 살려고 하는 유전자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이야기겠습니까? 모든 사람들 속에 있는 유전자일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악을 행하고 불순종하는 삶을 강력하게 규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배웠다는 것,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경험했다는 것, 하나님이 내 인생 중에서 함께 해 오신 수많은 간증들이 있다는 것들을 가지고 즐거워하고 감사하며 자부심을 느낍니다.
은총에 합당한 반응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해 우리들이 신앙으로 사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에게 은총을 베푸십니다. 은총을 베푸시는 것에 대한 훌륭한 반응은 믿음입니다. 인간의 믿음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총에 대한 반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믿음을 요구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사랑하고 신뢰하면서 그분이 하시는 일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여기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믿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서도 계속해서 불평하며 불순종합니다. 도대체 어떤 민족에게 하나님이 바다를 갈라 벽처럼 서게 하고 민족들을 지나가게 하였습니까?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빛으로 40년의 세월을 인도하신 분이 어디에 있습니까? 물 없는 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어 강같이 물이 흐르게 하여 마시게 한 일을 경험한 족속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모세의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가까이해주신 민족이 어디에 있습니까? 친근히 대해주시고 말씀해주시고 가르쳐주신 그런 민족이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말입니다.
은혜를 기억하라
그럼에도 그들이 불순종으로 일관했던 것은 은혜를 덜 받아서가 아니라 많은 은총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인생을 살다가 자기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보니 너무 힘들고 괴로운 것입니다. 너무 괴롭고 아파서 ‘왜 나만 이렇게 고단하고 힘든 인생을 사나?’ 정말 살고 싶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은혜를 받기 전에는 내게 없는 것들만 보였습니다. 돈도 없고 건강도 없고 명예도 없습니다. 그러다 은혜를 받으면 비로소 하나님의 행하심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은혜받기 전과 후에 변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 생각나는 것입니다.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
며칠 동안 신학교에서 집회를 했습니다. 청중이 다들 신학생들이니까 저의 옛날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니까 설교를 하면서도 ‘아,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는데 내가 잊어버리고 살았구나.’ 갑자기 생각해보니 살아온 순간순간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나 같은 쓰레기 같은 인간에게 그런 은혜를 베푸셨는가?’ 그것을 항상 기억하며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누가 불순종 하겠으며 누가 하나님을 배반하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잊어버린다’는 것은 불순종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 입니다.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고 그곳에서 심지 않는 포도원의 포도열매를 따먹고 짓지 않은 집에서 살게 될 것이다. 너희들이 의로워서 그 땅을 차지한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그곳의 백성들이 패역해서 그들을 심판하고 그 땅을 깨끗하게 하려고 너희에게 준 것이다. 너희는 한 가지를 잊지 마라. 죄인 된 너희를 구원하신 여호와를……" 하나님이 인생의 가장 곤고한 날에 우리를 지켜주시고 건져주셨던 놀라운 은혜를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일을 행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면 현재 우리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도 기적 같은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여러분 은혜를 많이 받고 나면 아침에 눈을 뜨면 살아 있는 것이 기적 같지 않습니까? ‘아, 하나님이 아무 쓸모없는 인간의 생명을 오늘아침에도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간밤에 죽었는데 하나님이 나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주의 자비와 성실하심이 아침마다 새롭다’고 노래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하나님이 매일처럼 기적과 같은 놀라운 은혜를 베풀고 계시는데 그것을 모르고 계속 불순종하고 범죄하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다시금 회개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생각하며 주 앞에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을 시험한 이스라엘
“저희가 저희 탐욕대로 식물을 구하여 그 심중에 하나님을 시험하였으며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능히 식탁을 준비하시랴
저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시매 시내가 넘쳤거니와 또 능히 떡을 주시며
그 백성을 위하여 고기를 예비하시랴 하였도다”(시 78:18-20)
본문해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을 시험했던 내용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도했기 때문에 만나를 내려 주신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편을 기억하셔서 만나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만나를 내리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먹다가 지겨워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눈물을 흘리기까지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고기도 먹었는데 여기서는 맛없는 만나만 먹고 있다면서 애굽 생활을 그리워했습니다. 입안의 탐욕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 때 심중에 하나님을 시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과거에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반석을 쳐서 물을 내시고 만나를 주시는 놀라운 일들을 하셨지만 그래도 이것은 못하실 것이다.’ 이런 생각을 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고기를 구하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고기를 먹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구하지도 않은 약속의 땅으로 간다고 하면서 광야에서 왜 이 생고생을 하고 있나? 차라리 애굽에서 종살이 하며 살던 때가 더 좋았던 것을……’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불평의 핵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함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시험하였고 그분을 배반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한다는 것이 믿음에서 완전히 이탈해 배교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마음으로 원망하면 그것이 배반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망을 들으실만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견딜 수 없다고 울부짖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찾아가서 권고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열 번의 재앙을 내리심으로 그들을 기적적으로 건져주시고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굶주릴 위기에 있을 때 먹여주시고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시며 이끌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환란과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주실 영광스런 기업을 얻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손에 커다란 선물을 들고 ‘빨리 와서 어서 받아가라. 너 주려고 가지고 왔어.’ 그러면 선물을 받으러온 사람이 그것을 노동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은총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마음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바라보는 시각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그분의 인도를 온전히 따르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배반하였다고 규정한 것입니다. 광야에서 심판을 당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분과 연합된 삶을 살지 못하는 순간에 배반이 일어납니다. 되는 것입니다. 배반이라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과의 마음의 합치에서 이탈하는 것입니다. 큰 배반과 작은 배반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한 번 배반하고 나면 크게 배반하는 데까지 어렵지 않게 흘러간 것을 봅니다. 거기에서 배교라고 하는 것도 나오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이라고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살고, 빛의 자녀들이지만 어둠속을 걷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조상의 임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전함
성경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하나님을 시험한 것에 대해 준엄하게 책망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이 사람들은 과거에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만나의 사건을 매일매일 경험하고 반석을 터트려서 물을 내신 것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 모순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행하신 기사를 기억하고 이것을 후대에 전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은 하나의 객관적 사건입니다. 객관적 사건은 우리가 어떤 마음과 믿음으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각각 다른 결과가 나옵니다. 구약에 관해 논쟁을 벌일 때 권위 있는 증거가운데 하나가 고고학적인 증거입니다. ‘이런 유물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당신의 의견은 틀렸다.’라고 증거를 댑니다. 그러나 고고학도 객관적인 학문이 아닙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실제로 존재했던 수많은 것들 중에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들은 일부입니다. 또 남아 있는 것 가운데 발견된 것은 극소수입니다. 발견된 것 가운데 그것이 문서화되고, 문서화된 것이 해석되는 것은 비율상 0.0000001분의 1이라고 할 정도로 아주 미미합니다. 최근에 구석기시대의 발자국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 시대의 발자국이 얼마나 많은데 발자국 몇 개 발견한 것 가지고 소동을 벌이겠습니까? 실제로 존재한 발자국 가운데 일부가 발견된 것입니다. 그것을 어떤 의미로 해석할 것인가는 또 수많은 경우의 수를 지니고 있습니다. 내가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후손의 임무: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믿음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한 것이 성경의 증언을 따라 주전 15세기라고 생각하고 해석하면 그럴싸해 보이고 13세기 중반이라고 생각하고 해석하면 그럴싸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전수받는다고 해도 내가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하나님을 의지할 마음이 생기고 감격하게 됩니다. 그래야 역경과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고 원망하는 삶을 살지 않게 됩니다. 후손에게 하나님이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전한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함께 내포하고 있습니다. 사건을 객관적으로 전하는 것은 조상이 해줄 수 있는 최대의 일이지만, 믿음으로 받아들여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해석하고 경험하는 것은 후손들의 몫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유럽의 역사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 해 전 영국에 갔을 때 일입니다. 제가 존 오웬을 좋아하니까 후배 목사가 존 오웬 유적지를 구경시켜주었습니다. 존 오웬 목사님이 두 번째로 부임하셨던 서포크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는 거기서 목회를 크게 했는데, 약 이천 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예배당은 작습니다. 본당이 우리 예배당의 절반정도 되었습니다. 여기서 어떻게 예배를 드렸냐고 물었더니, 성도들이 기립해서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거기서 사역했던 존 오웬 목사님부터 지금까지의 목회자들의 명단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교회는 성공회로 변했습니다. 거기에서 지금 사역하는 목회자도 만나고 교회 관리하는 장로님도 만났습니다. 교회당에 처음 들어갔을 때 그곳이 유적지 인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교회를 한다고 했습니다. 마당에는 풀이 무성하고 돌보는 사람이 없었으며 지금은 약80명쯤 나온다고 했습니다. 존 오웬 이래로 대략 400년이 흘렀는데 동네 사람들은 여전히 존 오웬 목사님을 기억합니다. 그분에 대한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온답니다. 그런데 성공회가 된 그 교회의 교인들에게 물었습니다. “존 오웬 목사님이 대단하고 위대한 말씀으로 이단들을 제압했던 ’영국 복음주의의 신탁‘이라고까지 불렸는데, 당신들은 여전히 그 사람에 대해서 존경심을 가지고 있습니까?”라고 물었더니, 그들은 ‘우리 교인들이 그 사람을 알아야 존경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성공회 교인들에게 청교도의 찬란한 유산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국교회를 찢어서 나간 비국교라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결론과 적용
후손에게 전한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전해주는 것처럼 간단한 작업이 아닙니다. 교리와 신앙의 내용을 가르쳐줄 뿐만 아니라 그들이 회심하고 주님을 만나게 해 주어야합니다. 그 두 가지를 유념할 때, 비록 자신의 시대에는 할아버지나 아버지 때 일어났던 위대한 일들은 일어나지 않더라도, 지금도 그 일이 일어날 것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이고, 믿음생활입니다.
여호와께서 노하신 것은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듣고 노하심이여 야곱을 향하여 노가 맹렬하며 이스라엘을 향하여 노가 올랐으니
이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며 그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한 연고로다”(시 78:21-22)
본문해설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반역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반응하셨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그 반역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물이 없을 때 넘치게 주셨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탐욕대로 음식을 구하며 “누가 능히 떡도 주시고 고기고 예비하시랴”라며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21절에 하나님이 노하셨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노가 얼마나 컸는지 ‘불같이 노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진노가 매우 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굉장히 커다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죄가 들어온 후부터 원망하는 습성이 생겼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난 후 하나님은 제일 먼저 아담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가 언약의 당사자였기 때문입니다. 아담에게 ‘네가 어찌 이같이 행하였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그는 자기의 범죄의 원인을 하와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죄가 처음 들어와서 한 일이 자신의 죄를 남의 탓으로 전가하여 자기의 정당성을 변호하는 것이었습니다. 죄의 놀라운 습성은 하나님 앞에 정직해지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을 때는 그분 앞에 정직합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판단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입니다. ‘주님이 의로우시다’고 인정하고 그 판단에 비추어 자기를 성찰하면서 하나님의 시각에서 진심으로 돌이키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한 회개입니다. 죄의 특성자체는 이런 것을 회피합니다.
원망이란
원망이란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통과 어려움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는 것인데 이것은 매우 부당한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런 비난을 받으셔야 된다면 그 원인은 크게 두 가지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그렇게 다루시는 처사가 정당하지 않고 불법적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되면 안 되는 사람인데 하나님이 지금 잘못 아셔서 혹은 하나님이 잘못 판단하셔서 나에게 이와 같은 고통과 어려움들을 주고 계신다.’는 생각을 갖고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잘 모르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일들을 당신의 통제 안에 두지 않았거나 부주의하시기 때문에 이와 같은 고통과 어려움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든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합당한 비난일 수가 없습니다.
그 원망은 결국 하나님께 대한 부당한 도전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원망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는 마음은 결국 그를 절망으로 데려갑니다. 그 절망의 끝은 하나님을 원망하며 스스로 파멸해버리는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는 죽음에 이르는 유일한 병이 절망이라고 했습니다. 이 죽음은 육적인 죽음인 동시에 영적인 죽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원망이 하나님 앞에 그토록 심각한 죄이며 중대한 도전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원망을 시작할 때 인간의 마음은 급속도로 굳기 시작하고 심판도 무서워하지 않는 굳은 마음으로 변하고 맙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원망했기 때문에 그분이 진노하신 것입니다.
때로는 섭리와 경륜을 모두 이해할 수 없을 때조차도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원망은 자신의 영혼에 대한 중대한 자해행위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극대화 되는 것이 자살입니다. 오늘날 이유 없이 살인을 저지르고 심지어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총기를 난사하는 끔찍한 범행들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결국 절망의 표현입니다. 그 절망 속에는 자기가 알든 알지 못하든, 절대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극도의 원망과 좌절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에 대한 근원을 파고 들어가 보면 결국은 사랑이 없음에서 비롯됩니다. 최근에도 어떤 사람이 끔찍한 범행을 저질렀는데 그 사람의 휴대폰을 조사해보니 누군가와 주고받은 메시지나 통화 기록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렇게 교통이 완전히 단절될 때 절망은 쉽게 찾아오고 절망했을 때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파멸의 길로 떨어지기 십상입니다. 사랑과 절망은 아주 놀라운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이 극대화 되면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누군가를 깊이 사랑해면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원망하고 절망해도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원망의 원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면, 그들이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게 한 궁극적인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믿음은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흔히 말하듯,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심리적인 믿음과는 다릅니다. 믿음은 훨씬 더 포괄적이고 전체적인 성격을 가지고 다가옵니다. 믿음은 단순히 심리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어떤 사실을 믿는 지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믿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온전히 의탁하고, 믿는 바에 자신의 마음이 쏟아지고 기울어지며, 믿는 대상의 말이나 약속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중세의 철학자들은 ‘믿는 성향’이 곧 ‘사랑하는 성향’이라고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믿어줍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을 가르쳤습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여기서 ‘생각한다’는 것을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깊이 하면 할수록 서로를 오해할 여지가 현저히 줄어듭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떤 사람이 나에게 모진 말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면 굉장히 마음이 상하고 괴로워할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도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가 그런 말을 왜 했는지 이해할 수는 없지만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했던 말속에 악의가 없고 선의가 있다고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레오 10세 교황에게 보낸 서한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언제나 사랑을 불러일으키지만 사랑이 반드시 믿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을 진정으로 믿게 되면 그 뒤에는 항상 사랑이 뒤따릅니다. 마르틴 루터가 이야기하는 전자와 후자의 ‘사랑’은 의미가 다릅니다. 후자의 사랑은 ‘자선’이라는 뜻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자선을 사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나를 위한 유일한 구원의 길이 되시며 그를 통해서 제시된 모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수 있다는 신앙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믿는 사람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쌍한 사람을 구제하고 병든 사람을 치료해줄 마음이 생겨서 그런 사랑의 행위를 한다 해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그 안에서 솟아올라 그분을 신뢰할 수 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르틴 루터는 믿음중심으로 모든 것을 파악한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이 항상 있을 것인데’ 이 땅에서는 세 가지가 서로를 배제하면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믿음, 곧 사랑한다는 것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고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믿음이 많을 때는 세상을 향해 담대하고 두려움이 없고 굳건합니다. 무슨 원인을 알 수 없으나 큰 시련이 와서 나에게 고통을 준다고 해도 이내하며 기도합니다. ‘이 환란과 시련이 무슨 죄 때문에 오는 것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대답이 없습니다. 나는 양심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비난을 받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를 비추어 봅니다. 그러나 거리낌이 있든지 없든지 고통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하물며 시련과 고통을 당할 때 그것이 나의 죄 때문이든 아니든 고통스럽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다만 그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고 살아갈 때, 우리는 세상 앞에서는 담대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연약한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이 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것을 ‘하나님을 의지하는 인간의 마음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이라고 아름답게 묘사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바깥에서 이루어진 질서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것보다 가장 먼저 한 인간의 마음의 중심에서 영광을 받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마음은 그분에 대한 절대적인 의지의 마음, 의존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 안에서 가장 영광을 받으십니다. 은혜는 우리에게 이 세상을 헤쳐갈 수 있는 영적인 힘을 공급해줍니다. 이와 같은 영적인 힘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은혜는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듭니다. 세상의 힘을 많이 갖고 있어도 은혜의 힘이 없으면 인간은 점점 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독립하려고 합니다.
언젠가 교도소에서 선교하고 있는 사람에게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형언도를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흉악한 죄를 저질렀지만 말씀을 전하면 신기하게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형수들은 기독교로 회심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국회에서 여러 가지 의견이 오가면서 사형집행을 안 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사형수들의 마음들이 변하더랍니다. 그것이 간사한 인간의 마음입니다. 사형집행을 못하도록 국제사회에서 압력이 들어오고 이런 움직임들이 사회적으로 일어나니까 ‘절대 죽지는 않겠구나!’하는 안도하는 마음이 생겨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싹 빼앗아가 버렸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걱정거리가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의 마음에 아프고 괴로운 것은 사실이지만, 또한 그것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세상에 매달리지 않고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주님을 앙망하게 됩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의 몸에 상처가 나서 병균이 침투하면, 온몸이 깨어 일어나 상처가 난 부외로 피를 보내서 병균을 물리치게 됩니다. 침술의 원리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침을 찌르면 몸이 외부로부터 공격이 들어온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잠자던 기능까지도 깨어나서 몸으로 침투하는 적들에 대항하게 됩니다. 그것을 통해 잠재되어 있던 몸의 에너지들을 일으켜서 치료하는 것입니다. 시련과 어려움은 침과 같습니다. 한번 찔리면 우리의 온 영혼과 신앙이 밑바닥에서부터 깨어나면서 하나님을 찾으려고 몸부림치며 저항하게 됩니다. 성경은 여러 부분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시험과 시련을 주신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했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큰 진노를 불러왔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잠시 머물 이 세상 헛된 것들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
매 순간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사는 비결입니다. 날마다 상한 마음으로 주님의 은혜의 보좌를 찾을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복된 사람들입니까? 그렇게 마음을 쏟으며 기도할 때 세상의 모든 형편이 자신을 배반하고 기대에서 어긋나고 좌절하게 하는 것 같아도, 그 속에서 주님 우러르고 바라보는 시간을 통해 믿음이 자라게 됩니다. 어린아이처럼 매순간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적으로 먹이신 예수님
“그러나 저가 오히려 위의 궁창을 명하시며 하늘 문을 여시고 저희에게 만나를 비 같이 내려 먹이시며
하늘 양식으로 주셨나니 사람이 권세 있는 자의 떡을 먹음이여 하나님이 식물을 충족히 주셨도다
저가 동풍으로 하늘에서 일게 하시며 그 권능으로 남풍을 인도하시고 저희에게 고기를 티끌 같이 내리시니
곧 바다 모래 같은 나는 새라 그 진중에 떨어지게 하사 그 거처에 둘리셨도다
저희가 먹고 배불렀나니 하나님이 저희 소욕대로 주셨도다”(시 78:23-29)
자기편애
앞 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완악함과 불신앙에 대해 제시했습니다. 본 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은총과 능력을 베푸셨는데도 불구하고, 그와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과 예리하게 대조하고 있습니다. 나 혼자만 놓고 보면 하나님 앞에 회개할 것도 많지 않고 돌이킬 것도 크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무런 기준 없이 나 스스로를 판단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성향을 가지고 내 편을 들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을 ‘자기편애’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인간은 언제든지 자기를 편애할 수밖에 없고 그러한 인생의 마지막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진리의 빛입니다. 진리의 빛이 없이는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진 인간의 육체만 사랑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진리의 빛으로 공정하게 볼 때 우리의 영혼도 함께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묵상하고 정확히 아는 것은 편애에 빠지지 않는 훌륭한 지름길입니다. 물론 우리가 죽을 때까지 자기편애의 습성을 버리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과도하게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의 빛이요 진리의 힘입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시각에서 모든 사물들을 보게 만들어주는 힘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스스로를 바라보면 자기 편애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과도한 자기사랑과 집착을 버리고 객관적인 말씀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지성과 의지를 볼 수 있습니다.
자기사랑
혹자는 이런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목사님, 요즘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자기를 너무 사랑해서 문제가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학대해서 문제가 되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요즘 많은 자기 계발서들은 자기를 사랑하라고 권하고 있는데 이것은 어떻게 생각해야합니까?” 자기를 학대하고 미워하는 것도 자기사랑의 또 다른 표현 방식입니다. 진리의 빛이 없기 때문에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기를 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고 주의 교훈과 교양으로 자녀를 양육하고자 하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인식 없이 부모가 자녀의 미래와 행복을 염려하고 아이에게 과도하게 집착해서 부당한 압력을 가하면,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깨지기도 합니다. 그것은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은 있지만 자녀를 향한 사랑이 빗나갔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차라리 부모가 자녀에게 무관심했다면 그렇게까지는 안 되었을지 모릅니다.
자기사랑이 잘못된 방식으로 표출되었을 때 그것은 절망, 자기학대, 자기원망의 방향으로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까리따스(Caritas)의 사랑만이 모든 것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것입니다. 까리따스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면 모든 것들이 완전한 균형에서 벗어나 한쪽으로 치우치고 일그러지게 되어있습니다. 모든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유일무이한 원인이 사랑입니다. 바로 까리따스의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의 불행은, 참된 사랑을 거짓으로 여기고 거짓된 사랑을 참된 것으로 여기면서 사랑하지 말아야할 것을 사랑하고 진정으로 사랑해야할 것을 사랑하지 않는 데서 비롯됩니다.
만나를 내리심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지극한 은혜를 베푸셨음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반역과 원망을 일삼았습니다. 23-29절에서는 하나님을 모질게 대적하고 악을 행하는 인간에게 베풀어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크게 두 가지 사건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만나를 내려주신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날 때 가지고 나온 양식이 모두 고갈되었을 즈음, 그들의 선조들과 후손들도 들어보지 못했던 독특한 방법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셨습니다. 약 300만 명쯤 되었을 것으로 추산되는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는 문제는 현실적인 문제였고,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먹는다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만나를 내리셔서 그들을 먹이셨습니다. 그것은 정말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홍해를 건너 광야생활을 시작한 다음부터 만나를 내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기억해보십시오. 물이 없어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고 다양한 이유로 하나님을 시험하며 원망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실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향해 반역하고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떼를 쓸 때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만나를 내리셨고 만나는 가나안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곡식을 거둘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대적한 것도 하나님이 주신 만나를 먹고 힘내서 행한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만나를 먹고 힘내서 죄짓고 우상숭배하고 하나님 모독하고 했음에도 계속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그분이 진노하셔서 어느 날 만나를 못 먹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언제나 만나는 내렸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일용할 양식으로 삼았습니다.
육체의 양식
양식을 먹는 것은 인간 육체의 생존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영혼의 은혜를 그분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시지만 육체의 양식은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십니다. 오늘날 식량난 때문에 전 세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려주신 식량을 전 세계가 모자람 없이 충분히 먹을 수 있을만한 분량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탐욕과 탐심 때문에 식량이 공정하게 배분되지 않습니다. 풍년이 들면 곡물의 값을 유지하기 위해 곡식을 태우거나 폐기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양식이 모자라게 됩니다. 부유한 나라에서는 먹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짐승들에게 곡식을 먹입니다. 소고기 1kg을 얻기 위해 곡식 12kg을 소비해야한다고 합니다. 이런 불균형들이 세계를 굶주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북한에서 1년 동안 부족한 양식이 150만 톤이고 우리에게 남는 쌀이 150만 톤이라고 합니다. 자로 잰 것처럼 정확합니다. 하나님은 평균하여 그것을 누리기 알맞게 한반도에 양식을 주셨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이것이 막히고 유통이 안 돼서 굶어죽는 사람이 나옵니다. 고난의 행군 때 200만 명이 넘는 -어떤 사람들은 400만 명이라고 하는데- 사람들이 굶어죽는다고 합니다.
제 생각에는 정치적인 이유를 떠나서 북한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우리가 회개해야 할 죄라고 생각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는 종교나 인종이나 정치의 차별 없이 모두에게 골고루 나눠 주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가져다 군인들이 먹는다고 해도 주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군인들이라 해도 그것을 가져다 무기로 쓰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들에게 먹고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신 것은 종교와 정치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슬람 무장단체라 할지라도 굶어죽는 사람들을 향해 가진 하나님의 뜻은 그들도 먹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품어야할 자비이며 언약백성들의 헤세드입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및 이방 백성까지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영혼의 양식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은 계속됩니다. 우리가 성령충만 하고 하나님을 진실하게 섬길 때만 일용할 양식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음식을 먹고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원망하고 죄지을 때조차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살게 하십니다. 언약에 충실하신 하나님과는 대조적으로, 언약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방종하게 사는 인간의 불신실함 사이를 대조하는 놀라운 그림을 제시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순간 주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며 신앙생활하기를 원하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깊이 의지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벌주실지도 모른다는 하나님의 율법과 진노에 대한 생각이 우리의 죄를 억제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죄의 뿌리를 사라지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오직 나 같은 죄인을 선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목이 메는 마음, 나는 그 은혜 때문에 하나님께 온전히 빚진 자라는 사랑의 부채의식, 그 속에서만 자기 죄와 불순종에 대한 욕망을 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적인 죄 죽임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리신 것에 대해 신명기 8장에서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속사적 해석인데 하나님이 만나를 내리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일 만나를 거두어 음식을 만들어서 먹을 때, 아이들은 엄마에게 이런 질문을 했을 것입니다. “엄마, 우리의 몸은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로 매일 배부른데, 우리의 영혼의 양식은 어디에 있어요?” 만나는 하나님이 이 땅에 있는 물건들을 재조직하거나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매일 아침마다 새롭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곡식들을 모아서 어떤 조작을 통해 재생산해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의 능력이 매일 아침마다 나타나서 우리를 먹이셨다는 것입니다. 그 양식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아이들과 동일한 질문을 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에 있는 지식이나 좋은 것들을 집약하고 조작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창조하시고 내려 보내신 것입니다. 만나를 내리신 사건은 장차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실 것을 예표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는 하늘로부터 온 산 떡, 생명의 떡이니라”고 하신 것은, 신명기 8장을 구속사적인 맥락으로 자신과 연결 지어 해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은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떡을 먹이신 사건이 아니라 기독론적, 구원론적, 종말론적으로 중요한 사건입니다. 구약에서 일어난 사건 중, 이보다 더 깊은 구속사적 의미를 가진 사건이 흔치 않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메추리기를 먹이심
둘째, 메추라기를 먹인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설음의 눈물을 흘리면서 애굽에서는 고기도 먹었다고 원망을 토해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에 쓸어버려도 마땅한 악한 사람들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발목이 빠질 정도로 메추라기를 먼지처럼 쌓아놓으시고 그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권능을 보이는 방법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난다고 말할 때 우리는 일상적으로 볼 수 없는 어마어마한 일을 통해 그분의 능력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능력은 사랑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얼마나 긍휼히 여기는지를 통해서 권능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심판을 통해 당신의 권능을 보여주실 때가 있습니다. 심판의 권능은 믿음이 없는 사람도 확인할 수 있지만 사랑의 권능은 신앙이 있는 사람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인생을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말할 수 없는 기적을 베푸셔서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오게 하셨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
내 영혼이 핍절하였을 때 하늘의 양식과 하늘의 고기를 먹이셔서 영혼을 살찌게 하셨던 그 사랑과 은혜를 깨달을 때 마음이 녹아내립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가장 커다란 기적과 가장 위대한 권능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마른 땅에서 나오는 연한 줄기 같아서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것이 없도다” 연약하신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권능이었고 능력이었습니다.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죽음에서 구해내시며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주님의 평화를 누리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분의 거룩하신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생각해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반역할 때조차 그분은 신실하시며 결코 우리를 배신하지 않으십니다.
결론과 적용
죄인들이 오늘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줄에 잇대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우리를 묶으신 사랑과 은혜의 줄을 굳게 붙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때로는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떠날 때도 있지만 다시금 그분께 돌아올 수밖에 없습니다.즐거운 곳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오라고 해도 나에게는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밖에는 참된 기쁨이 없습니다.이렇게 고백하며 그 사랑의 줄에 더 단단히 묶이는 것입니다. 그 줄에 매여서 “내 안에 주님이 사시니 나의 죽음도 유익하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로 더불어 먹고 마시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욕심, 불순종의 원인
“저희가 그 욕심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저희 식물이 아직 그 입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 저희를 대하여
노를 발하사 저희 중 살찐 자를 죽이시며 이스라엘의 청년을 쳐 엎드러뜨리셨도다”(시 78:30-31)
불순종의 뿌리, 탐심
30-31절은 집요한 불순종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불순종과 범죄의 뿌리는 탐심이었습니다. 성경에 탐심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는데 탐심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정리해보겠습니다. 탐심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크게 세 가지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첫째, 가장 좁게는 성적인 욕망입니다. 둘째, 조금 더 넓게 사용되는 말은 인간의 분수에 어긋나는 욕망입니다. 직설적으로 설명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욕망의 총체를 가리킵니다. 셋째, 자기를 주인 삼은 삶을 살아가게 하는 정욕을 가리킵니다.
이 세 가지를 세 개의 원인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들이 순서대로 첫째가 제일 큰 원, 둘째가 중간 크기 원, 셋째가 제일 작은 원입니다. 세 개의 원은 넓이는 다르지만 중심은 하나를 향하고 있습니다. 원이 서로 비스듬하게 걸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작은 원의 중심을 뚫고 가는 축이 그 밖에 있는 두 번째 원과 세 번째 원의 중심축이 됩니다. 한 곳을 중심으로 잡고 컴퍼스를 대고 그리면 아무리 확대해도 크기가 큰가, 작은가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중심은 한 곳을 향합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죄를 짓는 사람의 가장 중심에는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을 인생이 주인 삼은 중심축이 존재합니다.
자기사랑
얼마나 작은 범위를 그리느냐, 큰 범위를 그리느냐에 따라 자기중심성은 다양한 욕망으로 나타납니다. 크기는 달라도 한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사랑입니다. 오늘날 신문을 보면 성범죄가 만연합니다. 예전에는 교육을 못 받은 사람들이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발생하는 성범죄가 일반적이었는데, 이제는 그것과 상관없이 빈번한 범죄가 광범위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대정신을 따르며 자기를 주인 삼고 살아가고 자신이 가진 욕망과 마음의 소원들을 밖으로 분출시키면서, 도덕적인 기준들을 제거해 버렸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주인 삼고 곧 자기를 중심축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 자기 사랑입니다.
자기 사랑은 산업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아무리 환경과 문화가 달라도 이러한 정신에 감염된 사회에서는 자기를 위한 소비가 중심을 이룹니다. 최근에 잡지에서 보았는데 자신에게 선물하는 풍습이 있다고 합니다. 특정한 날짜를 정해서 자신에서 선물을 한다고 합니다. 인간사의 슬픈 군상의 일면을 보여줍니다. 인간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에 몰두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며 교제하며 살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창조의 경륜에서 어긋나게 됩니다.
아담이 정말 행복했던 때는 하나님이 하와를 창조하시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했을 때였습니다. 그 고백이 사라지고 나니 하와는 하나님이 주셔서 자신을 괴롭게 하는 여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은 하지만 “너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 사랑 안에서 자신이 가장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라는 말을 해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 외에 자신이 사랑받는 제3의 사랑이 있다는 오해의 여지를 남겨둘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면 됩니다. 그 사랑 안에서 인간은 가장 큰 사랑을 받기 때문입니다.
탐심의 정체
여기서 탐심의 정체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탐심은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우연적인 욕망의 분출들을 사용합니다. 탐심이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어떤 경향이라고 말한다면 마음속에서 팥죽 끓듯이 올라왔다 사라집니다. 이 욕망들을 손으로 붙들게 될 때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죄를 짓게 됩니다. 마음속에 탐심이라는 죄의 경향성이 없을 수는 없지만, 탐심이 현저히 적다면 마음속에 크고 작은 정동들과 욕망들이 일어날 때 이것을 붙들 힘이 없습니다. 이것은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하루 종일 얼마나 많은 욕망들이 생기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사람이 좋은 옷을 입으면 “가을이 왔는데 저 옷을 입으면 좋겠다.”는 욕망이 생길 수도 있지 않습니까? 먹는 것에 대한 욕망, 고단할 때 여행을 가고 싶은 욕망 등등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그것이 모두 죄는 아니지만 죄가 아닌 중립적인 것부터 죄 된 욕망까지 가슴에 거품처럼 떠오릅니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마음속에 하루에 십만 가지의 생각이 스쳐간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의 성품이 성인과 같아서 십만 가지의 생각 중 90%는 선한 생각이 떠오르고 10%만 악한 생각이 떠올랐다고 하더라도 만 가지의 악한 생각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붙들 힘이 우리 안에 없기 때문에 많은 것들이 떠올랐다가는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이내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강한 소원이 있으면 그 경향성에 맞는 소원을 붙들게 됩니다.
탐심을 물리치라
성경은 탐심을 물리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에서는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마지막으로 이야기하는데 사도바울은 골로새서에서 탐심은 곧 우상숭배라고 하며 십계명의 열 번째 계명을 처음 계명으로 올립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으로부터 시작해서 탐심을 품지 말라는 계명이 모두 우상숭배를 초래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우상숭배라고 할 때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탐심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이런 탐심을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동안에는 우리를 위해 자기를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감격이 공존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의 세계는 탐심이 장악하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것에 대해서 애통하는 서로 다른 두 정서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장 악한 사람에게도 선하게 살고자 하는 소원이 있고 가장 선한 사람에게도 악하게 살아보고자 하는 순간적인 욕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표피적인 것이지 심층적인 것은 아닙니다. 간헐적으로 악을 행하는 사람이 쌓아진 악으로부터 악을 낼 수가 없고 간헐적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이 쌓아진 선으로부터 선을 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탐심에 대해서 강력하게 권고하고 책망하면서 탐심을 버리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탐심은 사람 안에서 한꺼번에 덮치듯이 작용할 때도 있지만 의식 속에서 파악되지 못할 정도로 서서히 스며들어 탐욕에 사로잡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반성과 자기성찰의 중요성을 고래(古來)로부터 강조하였습니다. 옛 성현들은 일일삼성(一日三省)이면 그 마음이 명경지수(明鏡止水)라고 했습니다. 하루에 세 번 자신에 대해 성찰하고 반성한다면 그 마음이 거울과 같이 맑은 물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 이야기를 백퍼센트 신뢰하지는 않지만 욕망으로 출렁이는 마음보다는 잔잔한 침잠 속에서 사리분별과 판단이 올바른 이치를 따르게 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넓은 의미로 보면 이것도 성령의 일반적인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사랑과 거룩한 욕망
성경에서는 그들이 욕심을 버리지 아니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버릴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주셨고 그들에게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심으로 하나님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욕심을 지속적으로 간직했고 결국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불순종하는 길로 떨어졌습니다. 먹을 것이 아직 입에 있을 때 그들의 욕망이 채워지자 새로운 욕망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탐심은 하나의 개별적인 욕망이 채워지면 다른 것에서 또 다른 것으로 이동하면서 자기중심성의 사악함을 드러냅니다. 물질에 대한 욕망에서 명예에 대한 욕망으로, 명예에 대한 욕망에서 성적인 욕망으로, 성적인 욕망에서 자기우월감에 대한 욕망으로 계속해서 팥죽이 끓듯이 솟아오르며 헤아릴 수없는 다양한 욕망들과 만나 극대화되어 그것을 채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갈망을 만들어냅니다.
자기 사랑의 욕망은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욕망과 아주 흡사합니다. 자기를 사랑해서 자기의 욕망을 만족시켜야겠다는 중심성에 한번 사로잡히면 다른 것으로는 만족이 안 됩니다. 돈을 얻어서 부요해지고자 하는 사람에게 주위에서 칭찬을 해주면 욕망을 누그러뜨릴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안 됩니다. 개별적인 욕망들이 극대화되면 그것이 만족되기 전까지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없고 그 하나가 충족되고 나면 또 다른 갈망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도 똑같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누군가가 마음속에서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너무 사랑한다고 합시다. 기도시간에 늘 하나님을 향한 감격과 기쁨이 있고 지금이라도 순교의 자리가 주어진다면 기꺼이 죽고자하는 자발적인 헌신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마음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열망들이 생겨납니다. 전도를 해야겠다는 욕망이 끓었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성향이 잃어버린 영혼이라는 주제를 꼭 붙들었습니다. 그러면 열렬하게 전도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전도했고 전도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의 갈망은 다 채워져서 ‘하나님을 위해 할 만큼 했으니까 이제 원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전도하다보니 가난한 사람이 보이고 불쌍한 사람들을 도우며 살고 싶어집니다. 팥죽 끓듯이 욕망이 부글부글 솟아오릅니다. 그것을 붙들었습니다. 다음에는 그것을 위해 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마음속에 수없이 떠오릅니다. 무엇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고 어떤 소원이 있어서 하나님을 위해 일해도 이것이 마음에 충족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더 간절히 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욕망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도록 하는 일들에 대한 욕망이 끈끈한 연합을 이루면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탐심과 까리따스
탐심의 경우를 보면 마음에서 팥죽 끓듯이 솟아오르는 정동들을 탐심의 경향성이 붙듭니다. 그 일들을 자신을 위해 할 것입니다. 그것들은 하나의 조각들이 아니라 자기의 행복을 위해 살고 싶고 자기를 가장 소중히 섬기고 싶다는 자기사랑의 마음과 단단한 연결을 이루는 것입니다. 증명을 해보겠습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살던 사람이 어느 순간 하나님을 만나고 이렇게 사는 삶이 쓰레기 같고 이렇게 사는 나 자신 때문에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뼈아픈 회개를 합니다. 그러면 마치 연에 매달려 있던 끈들이 떨어져 나가면서 연이 모두 땅에 떨어지듯이 자신을 위해 명예와 욕망을 좇고 부귀와 영화를 좇던 모든 것들이 의미 없는 일이 되어서 떨어지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에 대해 열심을 생각해봅시다. 전도도 하고 성경도 배우고 선교도 하고 교회 청소도 하고 진리의 말씀도 가르칩니다. 마음속에서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동안에는 이 모든 것이 연관을 이룹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변심해서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사라져버립니다. 그러면 나머지 것들은 떨어집니다. 주변의 평판이나 자신의 의무 때문에 그 일을 지속할 수도 있지만 더 이상 하나님을 사랑하던 때의 마음의 원리가 아닙니다.
탐심과 하나님을 향한 까리따스는 어떤 면에서 닮은꼴입니다. 이 두 가지는 공존할 수가 없습니다. 잠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불을 가슴에 품고서야 어떻게 타지 않겠느냐?’ 사악한 욕망이 가슴에 타오를 때 가슴이 욕망의 불에 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여움을 나타내십니다. “강한 자를 죽이시고 이스라엘의 청년을 엎으셨도다” 청년처럼 쓰러지지 않을 것 같이 기운이 왕성한 자를 치심으로 하나님의 권능이 얼마나 크신지를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그분의 뜻대로 하지 않으면 복수심에 불타서 죽여 버리는 분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의 경륜으로 볼 때 우리 개인은 한 사람으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넓게는 인류전체를 하나의 공동체로 부르셨고 좁게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의 무리로 부르셨습니다. 더 좁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언약 안에 있지만 후에 언약 밖으로 떨어져 나갈 사람들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강한 자들을 죽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엎으셨다고 할 때 이들은 언약 안에 있었지만 언약을 파기하고 떠나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징벌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속한 몸을 온전하게 하여 하나님께 붙어 있도록 만드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광야에서 나타난 이 일을 거울삼아 광야 같은 우리의 인생길에서 탐심이 하나님 사랑과 양립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날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 앞에서 탐심을 버리고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두려움으로 보내는 날들
“그럴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범죄하여 그의 기사를 믿지 아니하였으므로
하나님이 저희 날을 헛되이 보내게 하시며 저희 해를 두렵게 지내게 하셨도다“(시 78:32-33)
본문해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과 불신앙에 대해 진노하시고 그들을 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복수라기보다는 그들을 치셔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해서 범죄 했고 하나님 앞에 불순종했습니다. 성경은 이들이 하나님 앞에 행한 악을 두 가지로 제시하는데 범죄 한 것과 믿지 않은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짓는 범죄가 탐욕 때문이었다면 탐욕을 가능하게 한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이었습니다.
마음으로는 믿고자 하지만 여러 가지 약함 때문에 믿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는 믿지만 그 믿음이 온전하지 않아서 의심과 믿음이 공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약한 믿음, 혹은 회의를 가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믿지 않는다는 것은 의지를 가지고 믿지 않기로 다짐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는 고집이고 그러한 고집은 하나님을 믿게 만드는 많은 증거들을 기각해버립니다. 하나님의 훌륭한 말씀을 공급받는다 할지라도 마음 안에 믿고자 하는 성향이 없으면 제시된 믿음의 내용들을 굳게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성향
믿고자하는 성향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믿고자하는 성향은 사랑하고자하는 성향과 일치를 이룹니다. 잘 믿는 길은 잘 사랑하는 길과 일치를 이룹니다. 중생 시에는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사랑의 성향을 한 번에 주셔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신다면, 성화의 과정에서는 성경의 진리를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심으로써 하나님을 점점 더 사랑하도록 정동을 불러일으킵니다. 하나님이 의지하고 믿을 만한 분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공급받고 마음으로 그것을 붙잡고자 할 때 그분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을 두 가지로 제시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일로 제시하고 또 하나는 사람의 일로 제시합니다. 이것은 이의적이고 다의적인 것이 아니라 일의적인 것입니다. 모든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은 믿음을 가리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정확한 사실이지만 또한 믿음은 100% 인간의 일입니다. 인간이 믿고자 하지 않으면 누구도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졌다고 할 때 어느 쪽에서 보면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어느 쪽에서 보면 우리가 믿은 것입니다. 두 가지 면을 다 생각하지 않는다면 믿음이 없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이지 우리의 책임이 아닐 것입니다.
로마서에서는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신앙생활을 강조합니다. 전자의 믿음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물로 우리에게 심겨지는 믿음이라면, 후자의 믿음은 그 믿음을 토대로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협력하여 성화로 나아가는 신앙을 가리킵니다. 매순간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마음의 활동, 의지의 결단,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의지할 분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믿음의 성향을 강화하는 데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집요한 불순종
이스라엘 백성들은 의지적으로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기뻐하시는데도 믿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으라고 제시하는 많은 증거들이 이성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마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있으면 이성의 판단보다 오성을 통해 초자연적으로 얻어지는 하나님의 증거에 더 마음을 쏟게 됩니다. 은혜가 사라지고 나면 오성의 감각들이 세상의 욕심들과 표상들로 채워지게 되고 이성만 남아 하나님에 대해 판단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하실 때 섭리 속에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는 2차적인 원인들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펑’하고 메추라기 수십만 마리를 요리해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채로 식탁에 놓으신 것이 아니라 메추라기들이 하늘을 날고 있을 때 동풍을 불게 하셔서 그것들을 한 곳으로 보내어 이스라엘 사람들의 발에 떨어지게 하였습니다. 신앙이 사라지고 나면 모든 것을 움직이신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하나님이 사용하신 자연적인 원인과 결과만 보이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라 얼마든지 자연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해석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점점 더 믿을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어떤 일들을 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중립적인 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옆집에서 화단에 꽃 다섯 그루를 심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에서 새로운 조례를 발표했는데 교회 앞에 횡단보도를 설치해서 거기로 건너지 않으면 유치장을 보낸다고 했다고 합시다. 이 두 가지 사실은 이미 존재하는 사실이지만 우리에게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웃에 꽃을 심은 것은 나의 삶과 무관하고 사소한 의미밖에는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건널목은 나의 생활을 실질적으로 구속합니다. 그렇듯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하시고 계시다는 명제는 이웃집에 꽃을 심은 것과 같은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의 인생을 움직이신다면 우리는 그분께 순종하고 무엇을 하든지 그분의 판단을 받고 그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한다는 실제적인 구속의 효과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사람들은 이런 속박 자체가 싫은 것입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많은 증거가 있음에도 하나님이 없다고 단언합니다. 이것이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은 이유입니다. 집요한 불순종은 하나님 앞에 범죄 하는 삶을 지속하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욕망을 보여줍니다.
바꾸시는 말씀의 위력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는 말씀의 씨앗은 놀라운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 밭에 떨어져 인격과 함께 역사하며 그 속에서 자라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마음에 떨어질 때 어마어마한 위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떨어져도 뿌리를 내리지 않습니다. 아름드리나무를 만들고 숲을 형성하려면 씨앗이 땅에 떨어져 드릴처럼 파고들어가 뿌리를 내려야 하는데 말씀을 배척하는 사람들 속에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음에 떨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지성과 의지, 마음 안에서 사랑을 받으며 뿌리를 내려갑니다.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바꾸는 위력으로 나타납니다. 신앙생활은 자신이 하기 싫으면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렇게 하려고 하는 자에게만 역사합니다. 자신과 이웃들, 사랑하는 성도들과 가족들을 위해 기도해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에 도와달라는 편지가 일주일이면 꽤 많이 쌓입니다. 그중 어떤 것은 진실성이 있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아 보이는 것도 있습니다. 모두 도와주면 좋겠지만 사실은 불가능합니다. 어느 교회가 가난하다는 사연을 듣고 다른 교회가 그 교회를 여러 해 도왔다고 합니다. 나중에 담임 목사님이 5-6년을 도왔던 그 시골교회를 직접 방문했는데 교회가 3년 전에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그 교회의 재정집사가 그것을 받아서 쓰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일들도 일어나기 때문에 조심스럽습니다. 교회가 행정적으로 정확히 확인을 안 해서 한사람이 범죄 한 것 아닙니까?
이번에 우리교회가 이웃리치를 간 교회에 태풍이 불어서 교회는 남아있는데 사택이 완전히 폐허가 되었습니다. 장로님이 이 상황을 보고를 하는데 마음이 아파서 우리가 교회를 지어주자고 했습니다. 모두 완공이 되면 직접 가서 예배를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장로님들이 그 교회 목사님이 기도를 많이 하신 것 같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고자하시면 우리에게 그 소원을 품게 만들어 일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주목하면서 하나님께 위탁하며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순종하던 사람이 내일 불순종할 수 있고 어린아이처럼 성결하게 하나님을 믿던 사람이 내일은 안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헛되이 보내게 하심
계속해서 범죄하고 하나님을 불신앙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33절은 이것을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헛되이’ 보내게 하셨습니다. 히브리어로 헛되다는 것은 ‘공허한, 가치가 없는’이란 뜻입니다. 참된 행복은 어떤 것이든 일시의 쾌락을 통해서는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목적과 가치가 있는 삶을 실현하며 살아갈 때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도 유익을 얻고 자신도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 사는 것으로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세상적인 의미의 행복을 포기한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완전한 행복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죄가 들어온 후 인간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끊임없이 마음과 영혼이 정화되어야할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뼈 속까지 부패한 죄가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는 선을 갈망하고 원해도 그것을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스키선수가 하늘 높이 날아서 새처럼 날아가는 광경을 보면 스키를 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똑같은 운동복을 입고 활강대에 오른다면 솟구치기는 하겠지만 착지를 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정화되어야하고 세상을 향하여는 창조적인 행위를 더해서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의 뜻에 이바지해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이라도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안정감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에서는 “이 세상도 지나가고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영원히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보람 있게 사는 삶입니다. 아무리 큰 즐거움을 느끼고 행복해도 그 감정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이바지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지 않으면 그 순간만 지나고 나면 허망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과 진리 밖에서 기쁨을 찾으면 인간의 영혼을 부패하고 더럽혀집니다.
종종 우리는 ‘열심히 일했으니 쉬어야겠다.’라고 말합니다. 진정한 쉼이 어디에 있습니까? 쉼이 일을 멈추고 쉬는 것이라면 부패밖에 나올 것이 있겠습니까? 육체의 노동으로부터 벗어나 마음이 진리에 다가가고 영혼이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 이외에 어디에도 쉼은 없습니다. 정신과 영혼이 합당한 것을 위해서 부지런히 노동할 때 거기에 진정한 쉼이 있는 것입니다.
두려움으로 보내게 하심
두 번째, 두려움으로 보내게 하신 것입니다.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강퍅한 마음들을 가진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치셔서 엎드러지는 자들을 보면서도 지속적으로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믿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들이 큰 힘을 가진 것 같지만 하나님과의 불화로 말미암은 어두운 그림자가 영혼에 드리워져 두려움 속에 살아갔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으로 그분을 떠난 자들에게 합당하게 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실제적으로 그에게 형벌을 내리셔서 죽음이나 큰 고난을 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고 돌아서는 순간부터 그 마음과 영혼에 커다란 번뇌와 두려움과 양심의 가책들이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내버려 두는 것에 대해 존 오웬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산 결과가 무엇인지 스스로 깊이 깨달아 주님께만 붙어 있게 하시기 위함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멀리 떠난 사람들, 불순종하고 그분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인생입니다. 하나님께 불신앙하고 불순종하면서도 여유롭고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뿐입니다. 빈방에서 홀로 자는 밤, 홀로 일어나는 아침에 두려움으로 눈을 감고 눈을 뜰 것입니다. 이것은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들, 소망을 주님께 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커다란 시련이 몰려오고 때로는 비난과 모함을 받아도 그의 마음에는 평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프고 괴롭고 고통스럽지만 언제나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해주신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할 수 있으면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을 베풀며 긍휼히 여기면서 신앙의 길을 달려갑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평탄한 길을 걷게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같이 마음으로 그분의 손에 붙잡혀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복됩니까? 하나님께서 많은 물질과 능력과 기회를 주셨지만 그것을 사용할 뿐, 자신이 의지할 분은 주님 한분임을 믿으며 그분 앞에 나오는 사람들은 얼마나 복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며 나올 때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평안과 보호하심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본분이며 특권입니다.
악한 자가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이 저희를 죽이실 때에 저희가 그에게 구하며 돌이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고
하나님이 저희의 반석이시요 지존하신 하나님이 저희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도다”(시 78:34-35)
본문해설
이스라엘 백성들이 탐욕으로 하나님 앞에 계속하여 범죄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셔서 이스라엘의 강한 자를 죽이고 청년들을 엎드러지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실 뿐 아니라 그들을 고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간섭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세 가지로 반응을 합니다. 첫째,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커다란 진노와 심판에서 자신들을 용서해주시도록 간구합니다. 둘째, 삶의 개혁을 했습니다. ‘돌이켰다’고 하는 말은 히브리말로 ‘수브’인데 이는 삶의 개혁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이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던 것을 개혁했습니다. 셋째,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하나님을 추구했습니다. 이러한 반응에 대한 평가는 다음 구절에서 나오는데 이것은 정상적인 회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신들이 받은 형벌을 면하기 위해 보인 반응이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고 평안하고 싶어 합니다. 실연이나 고통을 당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옳은 일을 위해 당하는 고난이든 그렇지 않은 고난이든 괴롭고 아프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고난은 달콤하고 어떤 고난은 쓰라린 경우는 없습니다. 간혹 성경이 고난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고난을 통해 데려가려는 목적이 선하기 때문이고 그 때 하나님이 특별히 함께 해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달콤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달콤함은 고난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가 주는 것입니다. 고난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정확한 묘사가 아니라 금욕주의적인 사고에서 나온 해석들입니다. 고난이 우리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움직이시기 때문에 영혼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고난을 사용해서 우리를 고치십니다. 인간은 누구나 옳은 일로 말미암았든 그른 일로 말미암았든 일단 고통 받으면 고통을 피하려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통을 피하려고 할 때 인간은 얼마든지 종교적일 수 있습니다.
참다운 회개와 거짓된 회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구하고 돌이키며 간절히 찾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매달리는 이스라엘을 보면 참다운 회개인지 아닌지 구분이 가지 않습니다. ‘바실레아 슈링크’는 ‘진정한 회개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하나님이 용서해주기를 비는 것이 아니라 저지른 잘못에 대해 합당한 심판을 받을지라도 하나님과 화목하기를 원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한 신자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진정으로 회개했다는 것은 그 죄를 싫어하는 것이고 그 죄를 싫어하기 전까지는 하나님과의 평화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많은 사람들은 진정한 회개를 하는 것이 아니라 탐욕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노하셨던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살려달라고 매달리는 동물적인 종교심으로 반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회개는 자기중심성을 버리지 못한 회개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요단강변에서 세례요한이 말씀을 선포하자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요한은 그들의 마음을 간파했습니다.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과 하나 되어 평화를 누리기 위해 세례를 받으라는 것이 요한의 메시지의 핵심이었는데 그들은 이것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이든 하고 자기를 사랑하면 자기를 위해 무엇이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순교도 하고 살인도 하는 것입니다. 원래 ‘회개하다’는 단어는 ‘메타 노에오’인데, ‘메타’는 ‘후에’, ‘노에오’는 ‘다시’라는 뜻입니다. 이 희랍어 단어에 ‘회개하다’라는 의미가 있지만 이 단어가 신을 상정하기 않았기 때문에 중심 뜻은 ‘다시 생각하다’입니다. 회개하기 전과 후의 생각이 완전하게 바뀌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지정의의 회개가 이루어져야 하지만 지정의의 전인격적인 표는 지성에 남는 것입니다.
얼마 전 미국 출장 중에 어느 목사님 집에서 하루를 묵었는데 사모님이 의사였습니다. 사모님이 병원에서 검사를 해주면서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으니 새우를 드시지 마세요.”라고 했습니다. 물론 새우가 콜레스테롤 수치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의사에게 경고를 받은 후에는 새우를 보는 느낌 자체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새우를 좋아하는데 그 이후로 새우를 전혀 먹지 않았습니다.
이런 것이 회개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간절히 찾고 돌이키고 구했지만 회개의 가장 중요한 중심의 이동이 없었습니다. 회개하기 전에는 자기중심적이었던 사람이 회개한 후에는 하나님 중심이 되는 중심의 이동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회개가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의 행복과 평안을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합니다. 때로는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종교적인 아부로 나타날 수도 있고 하나님께로부터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을 위해서 많은 부분을 포기하거나 희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율법적 회개
성경은 종종 회개하면 잃어버릴 것과 회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을 비교하면서 백성들을 유아적인 방법으로 다루기도 합니다. “양치하면 먹을 것 줄게.”라는 식의 유아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훈련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정도의 회개에 만족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를 교육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더 진실한 기도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처럼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께 받을 심판이 두렵고 무섭다는 이유로 진정한 회개를 하게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런 회개를 가리켜 율법적 회개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심판, 공의, 두려움 때문에 회개하는 것이 율법적 회개인데 이는 회개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입니다.
인간이 죄에 대해 진실하게 자각하지 않고는 진정으로 회개할 수 없습니다. 죄를 자각하게 하는 요소가 율법입니다. 율법의 기준에 자신의 삶이나 성품을 비춰볼 때 율법의 빛이 “너는 잘 못된 사람이다.”라고 말하기 전까지는 죄에 대한 확신(conviction)이 도입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율법은 꼭 필요합니다. 율법에 대한 많은 지식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말씀을 통해 깨달은 내용들 속에 율법이 들어 있기 때문에 말씀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회개하기에 충분한 율법의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한 절도 읽어보지 않아도 회개할 수 있습니다. 죄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너를 위해 죽으셨다.”라는 복음적 사실을 가르쳐주기만 해도 그 빛 아래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한 율법의 빛을 가지고 회개하게 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런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복음적인 감각을 가질 때 인간의 마음이 녹아져 내립니다. 신앙생활의 경험을 주관적으로 해석하면 신앙생활에 도움이 안 되지만 성경의 빛으로 정확하게 해석하면 도움이 됩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마음이 녹는 것을 경험합니다. 율법이 주는 심판 때문에 마음이 녹는 경우는 없습니다. 가나안 족속들이 이스라엘 백성에 관한 소식을 듣고 마음이 녹았다고 할 때 이것은 하나님의 엄위에 대해 두려움으로 떠는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이지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놓으며 통회하는 의미의 녹아내리는 마음(melting heart)이 아닙니다. 공포 속에서 녹아내리는 마음은 새롭게 형성이 되지 않지만 하나님의 참된 사랑으로 녹아내리는 마음은 새롭게 형성이 됩니다. 종모양의 쇠를 용광로에 녹여서 거푸집에 붓습니다. 병 모양에 부으면 병모양이 나옵니다. 그러나 두려움으로 녹는 마음은 그런 식으로 재형성되는 마음이 아닙니다.
복음적 회개
그래서 복음적인 회개를 거론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깊이 회개하고 고통 할 때 하나님은 그에게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면 ‘내가 이렇게 큰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불순종하고 악을 행했구나’ 하면서 하나님 앞에 더 깊이 회개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큰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였다는 인식과 그렇게 배반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는 인식이 마음을 녹이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 마음이 오그라드는 것을 경험하는데 저는 그것을 마음에서 일어나는 ‘피의 펌프질’이라고 부릅니다. 마음이 오그라들면서 펌프질 같은 기도를 하면 죄가 죽고 자기사랑이 빠져 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피의 펌프질 같은 기도를 일평생 모르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기도가 주는 진정한 영적 생활의 깊이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플라스틱이나 쇠를 녹이는 것처럼 마음을 녹이실 때는 그것을 다른 형태로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율법으로 떨게 하시고 복음으로 녹게 하시는 것은 이 마음이 아닌 다른 마음으로 우리를 빚으시고자 하는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자신의 마음이 다시 형성될 필요가 없을 만큼 굳세고 청결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자기가 얼마나 불결하고 잘못된 인간인가 하는 것을 어떻게 깨닫습니까? 우리는 자신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를 단번에 보실 수 있으십니다. 우리에게 가장 감춰진 것이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보다 남의 마음을 보는 것이 더 쉬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마음이 그린 궤적입니다. 그 궤적을 보면서 우리의 마음을 생각합니다. 자신의 행실이나 말, 마음의 움직임들을 객관적으로 놓고 마음이 병들었는지 판단하는 자기성찰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는 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글짓기를 해놓고 스스로 교정하라면 잘 보입니까? 자신은 잘 볼 수 없습니다. 남이 봐주어야합니다. 자신의 행실을 구체적으로 성찰하면서 병적인 징후들을 찾아내야하는데 자기를 두둔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는 안 됩니다. 진리를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마음이어야 가능합니다. 나를 희생하더라도 그 진리에 합치시키고자 하는 확고한 의식과 분명한 존재감이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A를 잘못했을 때 A를 징계해서 깨닫게 하기도 하시지만 A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 B라는 것을 지적하셔서 우리의 진정한 문제가 또 다른 것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도 하십니다. 사업의 위기가 와서 하나님께 돈을 달라고 했는데 응답이 안 옵니다. 생각해보니 여태까지 나는 불순종의 삶을 살아왔고 하나님께서 축복과 물질을 주셨음에도 이기적인 탐욕 속에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을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그것과 상관없어 보이는 것들로 우리를 고치시고 연단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지만 이것은 이기적인 자기중심성을 버리지 못한 자기사랑에서 비롯된 거짓 회개였습니다. 그러한 회개가 전혀 쓸데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반석이신 구속자를 기억하라
35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들의 반석이며 지존하신 하나님이 구속자임을 기억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반석’이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추르’라는 말인데 이는 구약성경에서 의미심장한 단어로 사용됩니다. 반석이라는 말은 언제나 구원과 관련해서 사용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행했던 애굽을 살펴보면 바위가 있습니다. 자연적으로 바위가 잘 형성되고 바위에 구멍이 파져 있어서 바위에 숨으면 적들이 찾을 수도 없고 화살이 비 오듯 쏟아져도 화살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반석은 구원을 상징하는 최고의 단어입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요즘에는 군사용 병기가 발달했습니다.
미국이 무인병기를 사용하면 굴이 뚫어진 곳에 탈레반이 숨어 있어도 거기로 들어가서 터지는 폭탄의 음파 때문에 고막이 찢어져서 죽는다고 합니다. 지금과 같은 현대전이 아닌 과거의 전쟁에서 반석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찬송가에 보면 ‘큰 바위에 숨기시고 주손으로 덮으시네’라는 말의 의미는 완벽한 구원입니다. 적군이 발견할 수도 없고 화살을 비 오듯 쏘아대도 절대 죽지 않습니다.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는 것도 구원과 관계됩니다.
결론과 적용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의 구원이며 구속자이심을 부분적으로 기억했습니다. 마치 징계로 말미암는 각성은 잠자기로 운명이 지워진 거인이 게슴츠레 눈을 떴다가 어려움이 끝나자 다시 깊은 잠속에 빠져는 것과 같은 회개요 각성일 뿐입니다. 그들이 가는 길을 근본적으로 돌이키지는 못했습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당하고 징계를 당할 때 고난을 면하기 위해 하나님께 아첨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전체를 돌아보며 바른 길을 찾아가는 것에 진정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허무한 것들을 사랑하심
“오직 하나님은 자비하심으로 죄악을 사하사 멸하지 아니하시고
그 진노를 여러번 돌이키시며 그 분을 다 발하지 아니하셨으니 저희는 육체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로다”(시 78:38-39)
자기사랑
이스라엘 백성이 징계가운데 큰 고난과 시련을 만났을 때, 그들이 보인 반응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진정한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회개란 자기가 지은 죄의 본질을 깨닫고 그 원인에 대해 하님 앞에 뉘우치고 마음 아파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이러저러한 계명을 준행하라”고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준행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러저러한 일을 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행하는 궁극적인 동기와 힘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결국 자기사랑입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사랑의 대상은 하나님 혹은 인간 둘 중의 하나이지, 제3의 것은 없습니다. 만약 그 외의 다른 것을 사랑한다면 둘 중의 하나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지 그 자체를 위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좋아하는 자신을 만족시키는 길이 세상에 있기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극단적인 자기사랑과 극단적인 하나님 사랑은 놀라운 일치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을 극단적으로 사랑하면 자신에게 진정으로 만족을 주는 것 외에 모든 것이 다 의미가 없고 시시해 보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극단적으로 사랑해도 이와 유사한 사고방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떨어진 다른 모든 것들은 아무 의미가 없듯이, 자기를 만족하게 하는 것에서 동떨어진 모든 것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하듯이, 인간은 하나님을 본뜰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올바르게 본뜨면 가장 아름다운 생활을 하게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아주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악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을 잘못 본떴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자기사랑이 가져온 죄를 회개하고 중심축 자체를 옮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간절히 부르짖는 것 자체가 자기사랑의 발로였습니다. 그들을 징계를 받아 멸망을 당하고 큰 고통이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께 매달리고 있습니다. 사람은 기도의 외형을 보고 그 기도가 가식인지 진심인지 구별하기 쉽지 않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에 속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는 기도가 거짓이라고 하셨고, 그 이유는 그들이 언약에 성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죄악을 덮어주심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죄악을 덮어주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분을 다 쏟아내지 아니하셨더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오직’이라는 단어는 ‘그러나’로 번역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첫 번째는 죄악을 덮어주셨습니다. ‘덮다’는 히브리어로 ‘카파르’라는 단어인데 노아가 방주를 만들고 배의 표면에 역청을 발라서 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고 할 때 사용했던 단어입니다. 어떤 물건 위에 무엇을 덧발라서 밖에 있는 것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덮어준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와는 모순되는 것 같습니다. 만일 잘못이 있으면, 확연히 드러내서 벌 받을 사람은 벌 받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에 부합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악을 덮어주십니다. ‘죄악을 덮어준다.’는 말은 첫째, 하나님이 죄를 구속해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진정으로 용서하시고 죄의 허물에서 그를 벗어나게 해주신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둘째, 하나님이 그냥 넘어가신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죄를 넘어가십니다. 넘어가실 때 그 죄를 없다고 여기거나 사라지게 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과 섭리 때문에 그 죄를 가려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합니다. 죄를 없애고 용서해주셨다기보다 죄에 대한 해결을 미루시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은 시편 73편에 나오는 악인들의 죄입니다. 멸망 받을 사람들이 세상에서 악을 행하며 번영할 때 내버려 두셨다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큰 진노를 보이시며 그들을 심판하시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는지를 보시고 하나님이 섭리의 손길로 다양한 변수를 사용하셔서 우리가 올바르고 정직하게 살아가도록 훈련시키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을 간절히 찾는 것이 거짓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진정으로 돌이키고자 하는 마음이 없고 언약에 불성실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죄를 모두 용서하시고 덮어주셨다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멸망시키지 않으심
두 번째는 멸망시키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망시키려는 장면이 성경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내가 이 백성을 멸하고 너를 통해 새로운 나라를 이루리라.’고 말씀하실 때 모세는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을 멸하시면 이방 사람들이 여호와라는 신이 저들을 광야로 인도하였으나 끝까지 데려가 약속을 지킬 능력이 없어서 멸망시켰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명예는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간구했습니다. 모세는 생명책에 기록된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뜻을 돌이켰다기보다 이것은 교화적인 진술입니다. 하나님께 매달리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뜻을 보이심으로 그들을 교육하는 것입니다. 모세로 하여금 자신의 민족을 위해 더 헌신하게 하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매달리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멸망시키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을 세우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은 이러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번영하다가 소멸하고 왕성하다가 소멸하고 마지막에는 이스라엘의 영광이 사라지지만 신약시대에 그리스도의 왕국이 실현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잘하고 못하는 것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예표로 삼아 그리스도의 왕국을 도입하는 하나님의 비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고 몇 번이나 진노를 돌이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악을 행하고 죄를 짓고 불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한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고 경감시키셨습니다. ‘그 분을 모두 쏟아내지 아니하였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진노를 쏟아내시는 날이 바로 여호와의 진노의 날입니다.
긍휼의 하나님
이렇게 하신 궁극적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에 충실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신의 성품 때문입니다. 그 성품이 바로 긍휼입니다. 긍휼에는 크게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 가치 없는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둘째, 이들이 처한 비참한 상태를 원인과 연결하여 보지 않고 결과와 연결하여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까불다가 어디에 부딪혔는데 많이 안 다쳤으면 ‘잘했다. 까불더니, 싸다 싸.’라고 합니다. 그런데 크게 다쳐서 피가 낭자하면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긍휼의 마음은 비참한 결과를 원인과 결부시키지 않습니다. 인간의 비참함의 궁극적인 원인은 대부분 자신의 죄에 있습니다. 애매하게 다른 사람으로 인하여 피해를 보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신문에 나오는 것처럼 가만히 집에 있는데 범인이 문 열고 들어와 죽이는 것은 피해자에게 원인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비참함에는 원인이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의 과오와 불순종입니다. 이 두 가지를 연결시키면 긍휼이 작용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긍휼의 마음이 아닙니다. 긍휼은 원인과는 상관없이 어떤 사람이 불행하고 비참한 상태에 있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아파서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긍휼은 사랑의 한 요소입니다.
사랑의 삼각형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는데 오래 참음, 자비, 긍휼히 여김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다른 국면들입니다. 다이아몬드는 보는 각도에 따라 빛깔이 달라지듯이 하나님의 사랑은 어느 측면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렇게 까불더니 다친다.’라는 원인은 모든 사람들에게 보이지만 그가 당한 비참함 자체를 직시하면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사랑이 있기 때문에 나오는 마음입니다. 긍휼은 전적으로 사랑의 표현입니다. 자기에게 악을 행하고 고통을 준 사람의 비참함을 보면서 아파할 수 있다면 그것을 사랑의 힘입니다. 그것은 사랑이 시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긍휼이 작동할 수 없습니다.
솔로몬의 재판을 기억하십니까? 아이를 둘로 가르라고 했을 때 가짜 부모는 그렇게 하라고 했지만 진짜 부모는 그 아이를 차라리 저 여자에게 주라고 했습니다. 사랑이 이것을 결정합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 들려진 공의의 칼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데 조금밖에 기여하지 못합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 질병이 걸리면 쓸모없게 되었으니 죽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히틀러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장애인이나 열등한 존재는 죽이고 아이도 낳지 못하게 했습니다. 우등한 종자들을 퍼트려야 게르만족의 우수성을 입증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 비극은 헤로도토스의 역사책, ‘게르만족의 우수성’에 관한 한 줄의 글을 읽고 나치즘이 생겨나면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있으셨기 때문에 모든 혜택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습니다. 39절 “저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도다” 여기서 육체, ‘바사르’는 고깃덩어리를 가리킵니다. 육체는 유한한 물질로 되어있고 쉽게 사라집니다. 육체는 시간적이고 사라지고 변하는 것으로 영혼과 대조됩니다. 불멸하는 존재가 아니고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들의 영화나 영광은 바람과 같아서 사라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는 하찮은 것은 하찮게 여깁니다. 그러나 하찮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입니다. 육체는 바람일 뿐이지만 인간은 하나님께 선택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지극히 긍휼히 여기셔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받고 생존을 계속하도록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에 호소하는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의 더 많은 자비가 우리에게 임합니다. 하나님 스스로 알고 계시지만 하나님의 성품을 상기시켜 드릴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몰랐던 것을 아셨기 때문이 아니라 기도자가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하며 그분의 성품을 기리면서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닮은 성품이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반항과 시험함
“그들이 광야에서 그에게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가
그들이 돌이켜 하나님을 거듭거듭 시험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노엽게 하였도다”(시 78:40-41)
본문해설
40-42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해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에 성실하지 않고 돌이키는 것이 거짓되다는 평가를 하셨습니다. 그렇게 평가하신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행한 일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를 볼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그를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반항’이라는 단어는 반역을 말합니다. 즉, 합법적인 통치자의 다스림에 항거하고 대항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합법적인 통치자에 대한 반항과 대항을 했다는 것이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였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싫어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행한 불순종을 반항이라고 보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통치를 싫어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통치 속에는 왕국을 세운 경륜과 이미 존재하는 왕국을 더 나은 왕국으로 완성해가고자 하는 지도자의 의도가 있습니다. 그 의도를 나라에서 실행해 갑니다. 법을 재정해서 세금을 내고 국방을 든든히 하기 위해 양민들에게 군복무를 시키고 나라의 산업을 발전시키고 물길을 내기 위해 부역을 시키는 등의 희생이 없다면 어떻게 나라가 유지되겠습니까? 그러한 헌신은 나라를 다스리는 왕의 계획에 찬동하고 복종할 때 가능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반역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바로왕의 통치를 받으면서 비천하게 노예생활을 하던 시절을 그리워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평가였습니다. 이러한 반항심은 모든 불순종의 원인이 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거룩함을 하나님의 성품과 뜻에 우리가 합치된 상태”라고 말했습니다. 거룩함을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로 설명되겠지만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는 결과를 어떻게 나타내며 살아가는지의 관점으로 본다면 에드워즈의 설명은 적실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온 땅과 만물위에 탁월하고 놀라운 분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지 않으신 적이 있었습니까? 그분의 거룩하심에 부합하는 삶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과 뜻이 하나님의 성품과 의지에 합치된 상태가 되어야합니다. 그런 합치와 일치는 사랑의 합치이고 사랑의 일치입니다.
한 신자가 마음 깊이 우러나오는 눈물을 가지고 주기도문을 기도할 수 있다면, 그는 지상에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나라가 임하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지게 해주시옵소서”라는 기도가 절박하고 절실한 마음의 기도라면 그의 마음은 하나님께 합치된 상태입니다. 신자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뜻과 최고로 합치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을 슬프게 함
슬픔이란 감정은 어떻게 생깁니까?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자신의 마음속에 상정한 틀에 온전히 합치되거나 현저히 어긋났을 때 기쁨이나 슬픔이 찾아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배고플 때 자신이 좋아하는 특정한 음식이 있으면 기쁩니다. 더욱 그 음식이 공짜로 생겼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풍광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 좋아하는 풍광이 있을 때 그 풍광을 만나면 기쁩니다. 반대로 슬픔은 마음속에 바라는 것과 현저히 어긋날 때 생깁니다. 어떤 사건이 한 사람에게는 기쁨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슬픔이 될 수 있습니다. 전쟁이 종결되었을 때, 승리국은 기쁠 것이고 패전국은 슬플 것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바라보시면서 슬퍼하셨다.’라고 하는데 어떤 것이 슬프셨다는 것입니까?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일시적인 장애를 만나서 당신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을 보고 슬퍼하고 근심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반항해도 그분의 뜻은 결국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둘째로, 반항하는 백성들의 삶이 너무 비참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바라보시며 슬퍼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그의 백성들이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수많은 감정으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향한 느낌 없이 말씀을 주지 않으십니다. 표면에 나타난 하나님의 발화가 의미하는 것을 깨달은 것 가지고는 그 의미를 제대로 알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발화로 주신 말씀 이면에 있는 마음을 깨닫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사랑을 알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반항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슬퍼하신 이유입니다.
사도 바울이 회심할 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에 이것이 나와 있습니다. 주를 대적하고 교회를 핍박하는 사울을 향해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는 것이나? 네가 나를 핍박하는 것이 마치 가시 채를 뒷발질하는 것과 같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의 뒷발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 걷어찼는데 그것이 가시 채였고 그로 인해 뒤꿈치를 다쳐서 피를 흘렸습니다. 그것이 불순종하고 반항하는 사람들의 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그와 같은 모습을 보면서 슬퍼하십니다.
하나님에게 반항함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돌이켜 하나님을 거듭거듭 시험하며 거룩하신 이를 노하게 했다”라고 했습니다. ‘돌이킨다’는 말은 앞 구절에 나오는 ‘돌이켜서 하나님께 간구하며’라는 의미와 같습니다. 돌이킨다는 것은 가던 길을 돌아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을 향한 반항이 완벽한 반항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옛말에 ‘오십보백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전쟁에서 군인의 의무는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적을 섬멸하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패한 것에 대한 죄를 물을 때 군인이 돌이켜 도망을 갔다면 오십 보를 도망갔든 백 보를 도망갔든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돌아서지 않고 도망치려는 마음만 없었다면 달려가서 싸운 사람, 천천히 간사람, 지쳐서 잠시 주저앉은 사람들에게 차이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반역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완벽하게 하나님께로부터 돌이켜 반항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돌이켜 어디로 가고자 했습니까? 그들은 아우성치며 “애굽의 날이 좋았으니 돌아가게 해 달라.”고 항의했습니다. 애굽에서 살던 그들이 어떻게 광야로 나왔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친히 하감하사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보냈습니다.
여기에서 상반된 종교 심리를 보게 됩니다. 세상에서 주님께 구원을 간청하고 하나님께 나올 때는 그들에게 세상살이에 대한 공평한 인식이 있었습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즐거움도 주지만 그 본질이 고통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잠시 느끼는 즐거움이 있을지라도 이것은 마취주사와 진통제 같은 것일 뿐, 본질은 슬픔의 바다와 같은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자신의 비참한 처지에서 구원해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구원의 길은 순종하고 은혜 받으면서 걸어가면 걸어갈 만한 길입니다. 고통과 함께 은혜와 권능과 영광을 주시고 새 힘을 주십니다. 그러나 불신앙 때문에 모든 것을 잊고 나면 믿음의 길을 걸을 때 하나님께서 주셨던 기쁨은 사라지고 고통만 떠오르게 됩니다. 주님께 도망치도록 만들었던 세상의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들은 기억이 안 나고 즐거움만 기억나기 때문에 또 다시 세상의 유혹을 받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그렇게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함
“하나님을 시험했다”고 했습니다. 시험한다는 것은 믿음으로 받아들여야하는데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사라지고 불신앙이 생기면서 모든 것이 과연 그러한가를 입증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신뢰할 수 없는 분이라는 생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불쌍해서 여러분에게 도와주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어려우십니까? 내일 돈을 줄 테니 쌀도 사고 먹을 것도 사서 가난을 면해 보십시오.”라고 말했다면 상대방이 “고맙습니다.”하며 깊이 감사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내가 당신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라고 한다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깡그리 사라질 것입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시험은 신앙이 충만한 상태에서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시험은 하나님을 얕잡아보는 행동입니다. 경외의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시험이 가능합니다. 이것은 행동만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얕잡아보는 것이고 경외심이 없는 것에 대한 표현입니다. 그것이 행동으로 표출된다면 하나님은 더욱 노하십니다.
하나님을 노엽게 함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노엽게 하였더라” 여기서 ‘이스라엘’이라는 말을 덧붙인 이유는 이스라엘이 언약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야곱과 맺은 언약으로 생겨난 이스라엘이란 뜻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입니다. 야곱이 하나님보다 힘이 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야곱이 씨름에서 환도 뼈가 상하여서 슬피 울며 통곡하는 모습이 하나님의 자비심을 자극해서 하나님을 이겼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심이 이스라엘의 반역과 모든 불신앙을 이겼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와 긍휼과 사랑과 끊을 수 없는 언약 관계를 내포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언약의 하나님을 그들이 분노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요 불순종이었습니다.
결론과 적용
그러면 우리는 어떤지 생각해봅시다. 우리의 날들은 광야와 같은 인생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차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주님을 슬프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을 얕잡아보는 태도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분을 경멸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보면서 노여워하지는 않으실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살 수 있게 하는 자신감과 용기가 하나님과의 평화, 그분을 향한 어린아이 같은 의존의 마음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명심해야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우리 마음의 반항의 씨앗, 슬픔의 씨앗들을 제거해야합니다.
불신앙의 원인
“그들이 그의 권능의 손을 기억하지 아니하며
대적에게서 그들을 구원하신 날도 기억하지 아니하였도다”(시78:42)
본문해설
앞 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에 대해 말했습니다. 42절은 불신앙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규명합니다. 이것은 기억과 관련이 있습니다. 히브리사람들에게 ‘자카르’, ‘기억하다’라는 단어는 매우 중요합니다. 히브리인들에게 기억은 단순한 상념이 아니라 마음을 장악하여 그 사람으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행하게 하는 힘 있는 정신의 작용입니다. 성경에서 ‘기억하다’라는 단어는 단순히 머릿속에서 기억한다는 뜻이 아니라 ‘기념하다’라는 뜻으로 더 많이 사용됩니다. 쉽게 표현하면 ‘인정하다, 찬송하다’라는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히브리인들이 가지고 있는 ‘기억하다’라는 뜻이 단순한 사유가 아니라 강력한 정신작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신앙의 원인: 기억하지 않음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신앙에 떨어진 두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권능의 손을 기억하지 않은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대적에게서 그들을 구원하신 날을 기억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같은 말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손’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야드’인데 ‘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손이라는 말이 능력을 의미하는 은유적 표현으로 자주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손이 누구 위에 있다.”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능력에 누구와 함께 했다.”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능력은 손을 통해 발휘되기 때문에 히브리인들이 이런 표현을 사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권능’이라는 말을 없고, ‘손’이라는 말만 있는데 손 자체가 힘을 나타냅니다. 팔이란 단어도 똑같은 용법으로 사용됩니다.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냐?” 히브리말로 ‘제로아’라는 단어를 쓰는데 ‘팔, 손’은 하나님과 능력과 권세를 나타냅니다.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는 구절은 선택과 능력이 함께 내포된 구절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능력이 있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날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43절부터 길게 반복되는 내용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시킬 때 행한 큰 능력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애굽의 십대 재앙을 골자로 서술하기 시작해서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까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배신하는 삶을 살았던 가장 큰 원인은 그들이 잊었기 때문입니다. 잊어버린 것이 불신앙의 원인입니다.
신앙과 불신앙 사이
신앙과 불신앙 사이를 생각해봅시다. 신앙이 없어지는 것은 특별히 어떤 일을 해야 하거나 적극적으로 노력해야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내버려두어 경건한 자극이 없도록 하면 저절로 믿음이 없어집니다. 구원받은 자의 경우, 완전히 믿음이 없어지는 않지만 현저히 약해져서 그 사람의 인생을 규율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믿음이 됩니다.
믿음이란 사랑입니다. 믿고자 하는 성향은 사랑하고자 하는 성향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면 그분이 하시는 일을 다 몰라도 반드시 하나님이 선하게 내 인생을 인도해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즉, 믿음이 사라지고 나면 하나님이 나를 인도해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며 살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째,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사랑은 기독교 경건의 진수입니다. 이것은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기보다는 신앙으로 이해됩니다. 내게 가장 나쁜 것처럼 보이는 일이 일어날 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은 그분이 주권적으로 자기를 인도하시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 신뢰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며 산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중요한 표지입니다.
하나님의 행사를 기억함
‘기억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광야에서 하나님을 끊임없이 대적하고 원망하고 언약에 불성실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큰 능력, 그들을 구원하신 위대하신 능력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하는 내내,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도 하나님을 기억하는 재료였습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건지시고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고, 가나안에서 하나님을 배반한 백성들을 징계하고 붙드셨던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죽었던 때는 가나안을 정복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가나안 정복의 역사를 기억해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을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에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여서 하나님께 징계를 받았던 역사의 한 토막을 기록합니다. 이로써 후대로 하여금 무엇을 찬송하고 기억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선조들이 빠졌던 불신앙의 범죄에 떨어지지 않도록 교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구원의 능력을 출애굽에서 분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라를 징계하신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애굽과 같이 거대한 나라가 흔들리고 그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구원받도록 한 사건은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 전대미문의 대재앙을 열 번씩이나 행하셔서 하나님의 큰 능력과 권능을 믿게 만들어준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이 이것을 계속 기억함으로써 자신들이 하나님께 어떤 은혜를 받은 자들이며 자신들이 주라고 부르는 분이 어떤 능력을 가지신 분인지 알고 신뢰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노래함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찬양가운데 거하시는 분입니다. 찬양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이유는 역사적인 사실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을 노래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하나님이 모르시는 내용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바로의 손에서 건지셨나이다. 애굽의 나일 강을 피로 만드시고 마지막에 애굽의 모든 것들 중 처음 난 것들을 모두 치시므로 바로의 마음을 녹이시고 우리를 해방시키셨나이다. 홍해에 직면했을 때, 그 물을 가르사 우리를 마른 땅같이 걷게 하셨나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아시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새롭게 깨닫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찬송하는 자들의 마음속에 구속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생겨나고 그 사실이 마음을 장악하여 은혜를 입은 자의 합당한 삶을 살도록 만들어줍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심히 기뻐하시는 찬양입니다. 찬양이 하나님께 어떤 영향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찬양을 통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권능의 손과 구원의 날을 잊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주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렇게 찬양과 말씀에 대한 깨달음, 무엇인가를 새롭게 기억하도록 하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 안에 강한 인상을 남기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신앙을 유지하게 하는 음미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찬송입니다. 소리 내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찬송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실만한 어떤 사실들을 묵상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훌륭한 찬송입니다.
결론과 적용
성경은 ‘기억하다’라는 단어를 부정명령어의 형태로 많이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잊다’에 부정어가 붙어서 ‘잊지 말아라’라고 쓰입니다. ‘기억하라’와 ‘잊지 말아라’가 함께 나옵니다. 잊는 것은 죄이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는 것이며 기억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경건한 행위입니다. 기념하는 것은 자신뿐 아니라 모든 후손들이 기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 두면 절대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마음을 붙잡아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행동에 붙들어 매는 일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말이나 소가 얼마나 힘이 셉니까? 그런데 코 둘레에 매달린 줄, 재갈에 매달린 줄을 낚아채면 커다란 몸을 일으켜 세우면서까지 속도를 줄입니다. 작은 손 하나로 짐승을 그렇게 움직일 수 있듯이 불경건과 불신앙으로 나아갈 때마다 우리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을 공동체적, 개인적으로 기억하면서 마음을 단속해합니다. 고통스러운 나 자신의 상황을 생각할 때는 기도가 잘 안되지만 주님이 나를 위해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기억하며 찬양하면 마음이 열리며 주님을 붙들만한 신앙의 마음이 떠오릅니다. 이것은 경건에 이르는 아주 중요한 기술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1)
“그 때에 하나님이 애굽에서 그의 표적들을, 소안들에서 그의 징조들을 나타내사
그들의 강과 시내를 피로 변하여 그들로 마실 수 없게 하시며”(시 78:43-44)
분문해설
43절부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할 때 하나님께서 내리셨던 재앙들을 차례대로 거론하고 있습니다. 광야 뿐 아니라 가나안 정착 이후까지의 놀라운 역사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때에’라고 번역된 부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반역할 때를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행한 일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반역하던 것보다 선행합니다. ‘그 때에’라고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 ‘아쉐르’인데 영어의 관계대명사처럼 쓰이면서 목적과 이유를 나타냅니다. 43절은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그의 표적들을 나타내실 때에 소안들에는 그의 징조들이 있었다. 그들의 강과 시내를 피로 변하여 마실 수 없게 하셨다.’ 그 표적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43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열 개의 큰 재앙을 바로와 애굽에게 내리시면서 커다란 징조를 나타내셨습니다. 그 징조는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위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재앙
첫 번째 재앙은 강과 시내를 피로 변하여 마실 수 없게 하신 것입니다. 나일 강은 애굽의 풍요로운 생산을 좌우하는 강입니다. 홍수가 나면 상류에서 비옥한 검은 흙을 하류로 흘려보내고 그 퇴적물로 인해 땅이 기름지게 되어서 많은 수확을 거두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치수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사람들은 치수가 왕의 덕에 달려있다고 믿었습니다. 강이 자주 범람하면 사람들은 신이 왕을 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과학의 발전을 이룬 종자 씨가 애굽 문명에서 시작됩니다. 그들을 이미 기원전 수천 년 전에 원의 넓이를 계산할 정도의 수학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문적인 수학자들을 길러내어 관청의 요직에 등용했습니다. 홍수가 나면 땅의 지형이 계속 바뀌기 때문에 토지 분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것을 정확하게 측정하는 일이 중요해지면서 수학이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약 3000년 전인데도 원형의 넓이를 거의 정확하게 측정해냅니다. 오늘날의 수학과 비교해보면 오차가 불과 소수점 이하로 내려갈 정도로 정확하게 측정했습니다. 나일 강은 풍요를 가져오는 강이었기에 사람들은 강을 중요한 신처럼 생각하며 섬겼습니다. 성경에 보면 다곤 신이 나옵니다. ‘다간’이 낱알 곡식을 뜻하는데 어떤 학자들은 그 신이 나일 강을 섬기는 신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 정도로 나일강은 신성시되었습니다.
베트남, 캄보디아 등은 매우 가난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끔찍한 전쟁과 기근이 들어 농사를 지을 수 없음에도 백성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메콩 강의 물줄기 때문입니다. 파란 물이 흐를 때는 거의 없습니다. 항상 비가 많이 와서 상류로부터 시뻘건 흙탕물이 흘러 내려갑니다. 그 물속에 먹을 것이 풍부한데 심지어 600kg에 달하는 민물고기가 산다고 합니다. 사람이 강에 빠졌는데 민물고기가 잡아먹었을 정도라고 합니다. 많은 고기가 거기에 서식하기 때문에 배고프면 언제든 물고기를 잡아먹을 수 있습니다.
나일강은 애굽 사람들에게 이와 비슷한 축복을 가져왔습니다. 가뭄이 들어 나일강이 마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숭배의 대상을 첫 번째 재앙으로 치셔서 피로 변하게 합니다. 가장 먼저 나일 강이 완전히 피가 됩니다. 심지어 집안의 모든 물까지도 모두 피가 되어 마실 수 없게 됩니다. 상상해보십시오. 어마어마한 나일 강이 피가 되어 흐른다면 고기들은 모두 죽어 떠오를 것이고 피가 강변에 엉겨 썩는 냄새가 진동을 하였으며, 우물과 집안의 모든 물에 파리가 날리고 그 냄새는 역겹기 그지없었을 것입니다.
열 재앙의 의도
열 개의 재앙이 아무렇게나 내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 백성들이 가진 전통적인 신앙을 하나하나 겨냥해서 무력화 시킵니다. 그 절정이 바로 태양이 빛을 잃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태양신 ‘레오, 라’를 섬겼는데 그 신이 무력화됩니다. 그리고 악질 독종이 퍼져서 애굽 사람들이 희생제물을 지낼 수 없게 만듭니다. 이것은 애굽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신이 여호와 앞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이 애굽의 모든 신을 능가하는 최고의 신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그들에게 신앙을 심어줍니다. 애굽 사람들의 신앙은 해체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심어주었습니다. 열 개의 재앙이 차례대로 기획되어 정교한 의도를 가지고 진행됩니다.
첫 번째가 애굽의 모든 물을 피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그 때 애굽 백성들이 느낀 두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종교적인 것으로는 어마어마한 공포가 있었고 현실적으로는 물을 마실 수 없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이렇게 큰 능력을 행하셔서 이스라엘을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신 과거가 있음에도 그들이 하나님을 돌이키고 시험하며 그분을 노엽게 할 수 있냐는 논리를 펼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의무인, “하나님을 생각하라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라”고 명령하신 이유입니다.
표적과 징조
하나님이 그들에게 큰 ‘표적’을 행하신 것은 하나의 ‘징조’가 되었습니다. 표적과 징조는 무엇입니까? ‘표적’은 믿음을 요구하는 기적입니다. 기적을 보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강화된 믿음을 갖도록 의도하시면서 보여주는 표적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어떤 기적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자연을 초월하는 초자연적인 기적이 아니더라도 인간으로서는 일어나기 어려운 놀라운 기도의 응답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신 표적이라면 그것이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잘 믿고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분이 나를 위하신다는 신앙심이 우리의 모든 삶을 장악하고 규율할 수 있는 원리가 되게 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커다란 표적들을 보고도 믿지 않을 때에는 불신앙의 죄가 훨씬 큽니다.
이러한 표적들은 ‘징조’가 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표적을 행하셔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분은 나를 위하신다는 것을 나타내셨다면 그것은 이번 한번만이 아니라 앞으로 이보다 더 위대한 능력의 일을 행하실 것이라는 징조가 됩니다. 악인들에게는 하나님의 거룩한 심판의 표징이 될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는 은총의 표징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적을 행하신 이유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가장 먼저 강을 피로 변하게 만들어서 나일강을 섬기는 애굽인들의 종교심을 훼파하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오랫동안 잊었던 조상의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을 현실적으로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애굽에게 커다란 재앙이 될 것임을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결론과 적용
이 세상이 하나님의 자녀들과 그리스도의 교회를 박해하고 모욕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대적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마음을 가져야하겠습니까? 우리를 핍박하고 모욕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고해서 그 심판에 동조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심지어 교회를 박해하고 핍박하는 사람들도 불쌍히 여겨야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돌이키도록 기도해야합니다. 그들을 심판하시도록 기도하지 말고 그들에게 은혜를 주시도록 축복하며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은 필요할 때에 악인들을 심판하십니다. 우리는 심판하는 도구가 되기를 자처하지 말고 그들을 무한히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이것이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따라 살아가는 백성들의 신앙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커다란 표적들을 베푸시고 징조를 나타내사 나일 강을 피로 물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원한이 가득차고 구원의 날이 다가오면 이런 일을 행하여 달라고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 스스로 애굽과 같은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굳게 믿으며 우리의 관심사는 언제나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며 주님이 뜻하시는 바를 따르는 것입니다. 언약백성으로 살며 나머지를 모두 하나님 손에 맡기고 감사하며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삶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2)
“쇠파리 떼를 그들에게 보내어 그들을 물게 하시고 개구리를 보내어 해하게 하셨으며
그들의 토산물을 황충에게 주셨고 그들이 수고한 것을 메뚜기에게 주셨으며
그들의 포도나무를 우박으로, 그들의 뽕나무를 서리로 죽이셨으며
그들의 가축을 우박에, 그들의 양 떼를 번갯불에 넘기셨으며”(시78:45-48)
열 가지 재앙을 회고함
44절부터는 하나님이 애굽에서 행하신 열 번의 커다란 재앙에 대한 회고가 시작됩니다. 이 회고는 하나님이 실제로 재앙을 내리신 순서를 따르지는 않습니다. 시간적 순서보다 시인의 마음의 관심사에 따른 범주대로 말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이 나오는데 첫 번째 재앙은 물이 피로 변한 것, 두 번째 재앙은 개구리가 올라와 온 땅을 덮은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애굽의 술사도 따라합니다. 비록 물을 피로 만들고 개구리를 올라오게 한 것을 애굽의 술사가 흉내 낼 수는 있었지만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세 번째 재앙은 이 재앙, 네 번째는 파리 재앙입니다. 쇠파리라고 번역되었는데 오늘날 우리가 한국에서 보는 쇠파리와는 큰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네 번째부터는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시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재앙이 미치지 못하도록 보호하십니다. 다섯 번째는 악질, 여섯 번째는 독종을 내리셨습니다. 짐승들이 악질에 걸려 모두 다 결함 있는 재물이 되었기 때문에 애굽 사람들은 제사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일곱 번째는 우박과 불이 함께 내리는 재앙이고 여덟 번째는 메뚜기 재앙입니다. 엄청나게 많은 메뚜기가 수확물들을 모두 다 쓸어버립니다. 아홉 번째로 흑암이 땅에 임하였고 마지막 열 번째로 모든 처음 난 것들이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재앙의 목적 1 : 이방신을 쳐부수심
이런 재앙들이 과학적으로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질문사항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기적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커다란 재앙을 애굽에 내리시면서 그 땅의 백성들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들에게 가졌던 신뢰와 믿음을 부수셨습니다. 재앙으로 나일 강이 피로 변한 것은 애굽 사람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신성하게 여겼던 나일강 전체가 피로 변하여 죽음의 강으로 바뀌면서 그들에게 두려움이 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개구리를 땅에 모두 올라오게 하신 후 단번에 죽이신 것은 그들이 가졌던 신앙심과 관계가 있습니다. 재물들에 악질과 독종이 생기면서 자신의 신들에게 제사할 수 없게 되자 그들의 신앙심은 심각한 위협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신을 경배하지 않으면 자신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하늘에서 불이 내렸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리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신의 진노를 뜻합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린 것은 여호와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분명한데 자신의 신들이 막아주지 못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참신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불편한 진실이었습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어둠이 내렸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신은 태양신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로가 태양신의 아들이라고 믿었습니다. 태양이 빛을 잃고 온 땅에 캄캄한 어둠이 내린 것을 보았을 때 그들에게 엄습한 공포심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재미있게도, 어린양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전에도 캄캄한 어둠이 내렸습니다. 이것은 두 사건이 구속사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재앙의 목적 2 : 이스라엘을 통한 선교
하나님께서 이 모든 재앙들을 한꺼번에 내리셨다면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빨리 내보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재앙을 하나씩 하나씩 내리십니다. 그래서 한 가지 재앙이 지나가고 비로소 숨을 쉴 수 있게 되자 바로가 다시 강퍅해지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강퍅함을 이용해서 당신의 권능을 나타낼 기회를 삼으십니다. 이를 통해 애굽의 백성들의 잘못된 신앙을 파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은 강화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교적인 목적을 성취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앙을 불어넣어주지 않았다면 430년 동안 애굽을 떠나본 적 없는 그들에게 가나안을 주시겠다고 하셨을 때 보통 신앙으로 따라 나설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이 따라나선다고 한들 애굽의 바로가 신사협정을 맺듯이 순순히 보내주었겠습니까? 보내준다고 해도 광야에 넓은 신작로가 있어서 자기들이 원하는 곳으로 마음대로 갈 수 있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전쟁을 겪었고 주변의 나라들은 3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의 이동을 정치적, 군사적으로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앙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그들은 애굽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믿음 없이 이 세상을 버릴 수 있습니까? 출애굽기 12장을 보면 출애굽 시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허다한 족속들이 따라 나왔다고 되어있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수많은 외국인들도 모세의 말을 듣고 재앙의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중다한 잡족’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출애굽 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에레브 레브’라고 되어 있는데, ‘에레브’는 족속이고 ‘레브’는 많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수만 많은 것이 아니라 다양한 종족들이 함께 따라왔습니다. 전 세계에서 이런저런 사연으로 애굽에 끌려온 많은 종족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따라 나왔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선교적 성격을 나타내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는 흔히 이스라엘이 꽉 닫힌 공동체라는 편견을 갖고 있지만 이 때 다양한 종족들이 혈통과 상관없이 신앙을 고백하고 할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에 속하게 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역동적인 선교의 공동체성입니다. 하나님이 뜻하신 교회가 다양한 잡족들로 이루어졌습니다. 일단 들어오면 그들은 차별받지 않고 한 신앙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선교적인 성취를 위해서도 하나님의 기적은 절실하게 필요했습니다. 이러한 기적은 애굽 사람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보내라고 애원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떠날 때 애굽 사람들부터 많은 은총을 입게 하셨습니다. 각종 금은 패물을 비롯해서 광야에서 돈이 될 만한 재물들을 애굽 사람들로부터 얻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광야를 지나면서 민족적인 재정으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백성들을 붙드시고 주권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선교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시련을 만나든 축복을 만나든 나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헤아리며 선교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3)
“그의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와 고난 곧 재앙의 천사들을 그들에게 내려보내셨으며
그는 진노로 길을 닦으사 그들의 목숨이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의 생명을 전염병에 붙이셨으며
애굽에서 모든 장자 곧 함의 장막에 있는 그들의 기력의 처음 것을 치셨으나”(시 78:49-51)
본문해설
본문은 애굽에서 일어났던 심판적인 재앙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기록한 것은 하나님이 재앙의 천사들을 통하여 이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을 돌보고 수호하기 위하여 창조된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를 전달하기 위해 천사가 사용되었습니다. 히브리서에 1장에서 보면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신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주석가들은 천사들을 통해 하나님이 심판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이렇게 보면 천사들이 심판적 기능을 행한다는 것은 히브리서의 언급과도 일맥상통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해 세상을 향한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를 내리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역사에 간섭하시는 하나님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의 신앙에만 관심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도가 지나치게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면 하나님께서는 역사에 간섭하셔서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비록 지금은 하나님 자체를 무시하는 시대이지만 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신국론』(De civitate Dei)에 보면 하나님께서 로마를 축복하신 이유 가운데 하나를 오현제(五賢帝)의 시대라고 제시합니다. 네 명의 지혜로운 왕들이 로마를 훌륭하게 다스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축복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나라의 신앙심을 보고 축복한 것이라기보다는 일반은총의 빛 아래서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에 맞게 살아가는 나라에게 어느 정도의 복을 주시고 번영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반면, 악을 행하는 나라들은 어느 시점에서 망하게 하십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길 만큼 충분히는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본성의 빛을 가지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비교적 가깝게 행하여 질서를 적게 훼손하는 사람들이 있고, 전면적으로 대항하여 크게 훼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 따라 각기 다르게 대하십니다.
전염병에 붙이심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전, 애굽의 큰 패역과 악함을 징벌하는 수단으로 열 개 재앙을 사용하시어 애굽 사람들의 토속신앙을 무너뜨렸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을 강화시켰습니다. 다음 절에는 “그들의 목숨이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하시고 생명을 전염병에 붙이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당시에 전염병은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어마어마한 규모의 유적지들이 발굴됩니다. 그러나 그 왕국이 왜 멸망했는지는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로 남습니다. 페루의 마추픽추(macchupicchu)를 보면 산 위에 어마어마한 유적지가 남겨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훼손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이 나라가 어떻게 멸망했을까?’ 생각합니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유적지는 정글 숲에 가려져서 잘 안보입니다. 중국에도 그런 유적지가 있다고 합니다. 이런 나라들의 멸망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지만 전염병 때문이라는 추정을 하기도 합니다.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갈 때 약 86명이 승선했는데 전염병으로 죽습니다. 지금은 백신이 발견되어서 인간의 수명이 증진되었지만, 당시에는 전염병이 병균과 미생물에 의한 것이라는 개념조차 없었기 때문에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 것은 재앙이라고 여겼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전염병으로 사람들을 죽이시고 ‘진노의 길’을 내셨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죽고 그 중 살아남은 사람은 전염병에 걸렸는데, 이것을 표현하기를 진노로 길을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길을 내어놓으면 유통이 활발해집니다. 물길을 내면 한쪽으로 쓸려 내려가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애굽에 진노의 길을 내셔서 당신의 분노를 집중하셨다는 것입니다.
애굽의 장자를 치심
더 결정적인 것은 애굽의 모든 장자, 함의 장막에 있는 기력의 시작을 치셨습니다. 노아의 자손 중의 하나인 함은 애굽을 비롯한 아프리카의 선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저들을 강력하게 치셔서 바로의 장자로부터 짐승의 처음 난 것에 이르기까지 사망으로 데려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처음’은 ‘the best’라는 말과 같습니다. ‘빼냈다’는 뜻입니다. 처음 난 것은 부모의 기력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처음 것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처음 것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구별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사상이 있었습니다. 장자의 축복은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이 있습니다. 애굽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처음 난 것까지도 모두 죽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그들이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 인방과 설주에 바르면 죽음의 사자가 와서 그 피를 보고 그 집을 넘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넘어간다’라는 말에서 유래되어 ‘유월절’이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원래는 모두 죽게 되어있었지만 어린양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처음 난 것들이 죽지 않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먼저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지식이 있어야 하고, 그 지식은 은총에 기반을 둔 것이었으며, 그 은총에 믿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이 삼박자가 맞아야 피를 바를 수 있고 죽음의 사자가 그 믿음을 보고 넘어갔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의 마음에 명료하게 심겨진 것은 너희의 처음 난 것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남은 것들이니 처음 것들은 하나님께 바쳐야한다는 적인 개념이었습니다. 이 유월절 사건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원하실 것을 명백하게 예표해주는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것을 치셨습니다. 처음 것을 쳐서 죽이셨다는 것은 나머지 모든 것에 대한 생사여탈권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나타내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앞으로도 위대한 능력을 행사하실 것임을 보여줍니다.
교회를 세우신 뜻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백성뿐 아니라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의 역사까지도 주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안 믿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할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땅이 패역하지 않도록 하나님께 구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녀답게 살지 못했기 때문에 이 땅이 패역한 것입니다. 교회와 세상은 어떤 면에서는 각각 다른 나라에 속하여 서로 대척점(對蹠點)이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세상이 섬기는 주인과 교회가 섬기는 주인이 다르고 세상이 지향하는 바와 교회가 지향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세상을 교회와 같이 만드시기를 원하기 때문에 우리가 대척점에 서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흘러가야할 곳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대척점만 강조하거나 세상을 원수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뜻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빛과 어둠에 대한 가르침은 절묘합니다. 빛과 어둠은 대척점에 있지만 두 개는 서로 상반하고, 하나가 있는 곳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어둠은 빛을 필요로 하고 빛은 어두움이 있을 때 빛으로 드러납니다. 그런 점에서 세상과 교회는 분명히 대척점에 서 있으면서도 세상을 교회로 만들기 위해 교회를 부르신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선교적으로 세상을 끌어안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설령 하나님이 포기하실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우리는 포기하면 안 됩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놓고 의인 오십 명, 사십 명, 삼십 명, 이십 명, 열 명, 다섯 명만 있어도 살려달라고 간구했던 것처럼 기도해야합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에 대해 한쪽은 루터파의 전통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의 대척점을 강조합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극단적인 카이퍼리안 전통을 가지고 세상과 교회 사이에는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것 외에 아무 구별이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두 견해 모두 성경에서 치우친 견해입니다. 교회와 세상의 구별을 뚜렷하게 생각하고 마음으로는 대척하지 않되 원리적으로는 대척점에 서서 구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이 세상을 위한 하나의 밀알로 세우셨다는 것을 생각하며 세상을 위해 썩어질 때 이 세상이 선교될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보호하심
“그가 자기 백성은 양 같이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양 떼 같이 지도하셨도다
그들을 안전히 인도하시니 그들은 두려움이 없었으나 그들의 원수는 바다에 빠졌도다”(시 78:52-53)
본문해설
51절까지는 하나님이 애굽에 십대 재앙을 내리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탈출하게 하신 사건을 기록합니다. 52절부터는 출애굽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하여 역사를 이어가는 내용이 끝까지 이어집니다. 52절 이하의 내용은 51절 이전의 내용과 분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을 다루는 방식과 이스라엘을 다루는 방법이 현저하게 대조를 이룹니다. 하나님이 애굽을 징벌하여 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고 지도하며 다루셨습니다. 하나님이 애굽을 다루시기를 “진노로 길을 닦으사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다루시는 방법은 “양같이 인도하시고 양 떼 같이 다루셨다”고 말합니다.
양 같은 이스라엘
성경에는 양이 자주 등장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양에 비유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동물들은 자기보호기능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데 양은 자기보호기능이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세계적으로 산양이 엄청 많았는데 지금은 멸종위기에 놓였습니다. 산양 배꼽으로 만든 것을 사향(麝香)이라고 하는데 굉장히 희귀합니다. 세계적으로 협약을 맺고 그것을 채취하지 못하게 하여서 이제는 우황청심환을 사도 사향성분이 없는 약이 대부분인 이유가 그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양은 산양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대로 목축을 하면서 길러온 양을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을 양이라고 표현하고 일반인들도 양으로 비유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다음을 의미합니다. 모든 짐승이 자기를 보호하는 기능을 가졌지만 양은 그러한 기능이 없습니다. 양은 광야에서 홀로 자라는 짐승이 아니라 창조부터 인간 가까이에서 돌봄을 받으며 자라야 하는 가축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돌봄을 받으면서 살아야하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그들을 '양 떼'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들이 착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양 떼를 돌보는 마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본다는 의미입니다. 양은 맹수의 생활방식과는 다릅니다. 맹수도 무리를 지어 생활하지만 수백 수천 마리가 무리를 이루지는 않습니다. 양 떼는 많은 수가 무리를 지어 사람의 돌봄을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특징이 되어야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양의 특징들을 살펴봅시다. 첫째, 양은 지독한 근시입니다. 그래서 멀리 있는 사물을 또렷하게 보지 못합니다. 성경에는 길 잃어버린 양의 비유가 많이 나옵니다. 양은 지독한 근시여서 무리지어 가까이 살아야지 따로 떨어져 있다가는 돌아오지 못합니다. 둘째, 자기를 방어하고 남에게 해를 입힐만한 뿔과 같은 무기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혼자 힘으로 살 수 있을 것처럼 씩씩하게 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그 결과는 언제나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 신앙의 가장 진실한 표현은 하나님에 대한 의존입니다. 세상 끝과 모든 나라들에서 영광 받으시기보다 당신을 의존하는 사람에게서 영광 받으시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이 가득할 때 기도도 잘되고 헌신도 잘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위해 큰일을 하면서도 교만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의존에서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시고 이끄십니다.
목자 되신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목자는 아주 특별했습니다. 목자는 양들의 단점과 약점을 모두 알아서 그들을 사랑으로 인도했습니다. 너희가 그렇게 양을 소중하게 여기면서 돌보고 이끄는 것처럼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그렇게 인도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출애굽 때만이 아니라 광야에서의 모든 역사를 염두에 두고 52절을 기록했습니다.
이어서 53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사람과 대조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되 안전하게 인도하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야할 길을 알고 인도할 능력을 가진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까지 안전하게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에게는 두려움이 없었지만 그의 원수들은 징벌을 받아 바다에 수장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애굽 백성을 인도하시는 방법의 차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특별한 은총을 받은 자들임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보호와 탁월한 인도 속에서 살았습니다.
53절이 저에게 동의가 잘 되지 않는데 “그들은 두려움이 없었다”고 합니다. 사실 두려움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두려워 떨었습니다. 홍해 앞에서는 모세를 원망하며 폭동을 일으킬 기세로 대들어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두려움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경건하고 건설적인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둘째, 불경건하고 파괴적인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 두려움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순종하게 만듭니다. 두려움이 처음부터 이렇게 나뉜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이 어떠한가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너희를 잠잠히 있어 오늘 여호와의 행하심을 보라”는 구절과 같이 위기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기회라고 여깁니다. 역으로 믿음이 없는 자는 ‘하나님이 우리를 수장시켜 죽이려고 여기로 이끌어냈다.’며 악에 받쳐서 하나님과 지도자를 원망합니다. 살아가는 매순간의 삶들이 쌓여져서 결정적인 어려움이 올 때, 서로 다른 믿음의 반응이 나오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작은 일에 있어 매순간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그것들이 쌓여서 결정적인 어려움이 올 때 파괴적이고 불경건한 두려움 대신, 창조적이고 경건한 두려움을 품고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하는 언약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게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그들의 원수를 바다에 빠뜨리신 것을 보면서 애굽을 재앙으로 치실 때 경험했던 것보다 더 큰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점진적으로 성장시켜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양 떼처럼 지도하셨는데 이것은 이후의 광야에서의 모든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절대의존의 마음으로 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함
신앙의 성공은 외적인 성취나 내적인 신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진실한 신앙생활에 있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그분을 의지하며 살 때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믿음을 따라서 우리를 지도하고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다 아시고 인도하십니다.
저는 교회를 시작할 때부터 10년 후가 참 궁금했습니다. 20대에는 ‘30대가 어떨까?’ 30대에는 ‘40대가 어떨까?’ 늘 10년 후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늘 예상을 빛나갔습니다. 지금도 ‘10년 후는 어떻게 될까?’ 생각을 확장해서 ‘이 세상은 어떨까? 주님은 언제 오실까? 이 나라가 20년 후면 더욱 그리스도를 열심히 믿는 신앙을 갖게 될까? 아니면 기독교 신앙을 현저히 배반하는 나라가 될까?’ 너무 궁금합니다. 하나님은 과거는 기억나게 하십니다. 과거는 살펴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미래는 안 보여주십니다. 과거는 다 보여주시면서 미래는 왜 안 보여주실까요?
최근에 어떤 여자가 투신자살을 했는데 쓰레기 버리러 나왔던 남자 위에 떨어져서 두 사람 다 죽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이틀 동안 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쓰레기 버리러 나가던 그 남자가 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자신도 죽게 되리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이와 비슷한 사고가 약 20년 전에도 있었습니다. 88도로에서 차가 달리다가 동작대교 갈림길에서 난간을 뚫고 떨어졌는데 밑에는 프라이드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떨어진 차 운전자는 살아남았는데 프라이드에 탔던 나들이 가던 온가족이 죽었습니다. 나들이 가던 사람들이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을 상상했겠습니까? 이런 일을 10초 전에라도 알 수 있겠습니까? 바늘 끝만큼도 안 알려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보여주시면 두 가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좋은 일이 일어날 사람은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므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나쁜 일이 일어날 사람들은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심으로 하나님 의지하며 살라고 미래를 안 보여주십니다. 호기심을 갖는 것조차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고 언제까지 살지, 무슨 일을 만날지, 어떤 상황에 접어들지 알 수 없습니다. 작년에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신학교에서 그 학교 총장님과 식사를 하고 담소를 나눴습니다. 채플시간에 활기차게 저를 소개해주시던 분이었는데 그 주일날 돌아가셨습니다. 한치 앞도 못 내다보는 것이 인간사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그리하십니다.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자에게는 두려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을 주님의 손에 맡기며 사는 사람들이 실망하고 낙심하지 않도록 그 인생과 이후까지도 이끌어주시고 도와주십니다. 그 믿음으로 살기를 바라는 것이 이스라엘과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마음입니다.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심
“그들을 그의 성소의 영역 곧 그의 오른손으로 만드신 산으로 인도하시고
또 나라를 그들의 앞에서 쫓아내시며 줄을 쳐서 그들의 소유를 분배하시고
이스라엘의 지파들이 그들의 장막에 살게 하셨도다”(시 78:54-55)
본문해설
53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시키고 광야에서 보호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54절과 55절은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시고 시온으로 안전하게 인도하신 은혜를 찬송하고 있습니다. 먼저 54절에서 “그들을 성소의 영역 곧 그의 오른 손으로 만든 산으로 인도하시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소의 영역’이라는 것은 ‘거룩한 곳의 테두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때 그들은 여리고 성을 함락하고 들어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정복하게 됩니다.
구약의 성소사상
그 때 하나님이 한 장소를 택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데 이것이 구약의 성소 사상입니다. 예루살렘을 둘러싼 산지를 가리켜 ‘시온’이라고 합니다. 히브리말로 ‘찌온’이라고 하는데 ‘요새, 마른 땅’이라는 의미입니다. 원래 그곳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 곳이 아니었지만 하나님이 택해서 거룩한 곳으로 구별하심으로 말미암아, 시온은 예루살렘과 함께 거룩한 산으로 인정됩니다. 본문에는 “그의 오른 손으로 만드신 산으로 인도하셨다”고 나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오른손, 왼손이 없습니다. 이 오른손은 하나님의 선택을 가리킵니다.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특별한 언약 안에 있고 그 언약을 따라 보호하신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만드신 산’은 특별히 선택한 거룩한 산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구별한 땅, 가나안
시온뿐 아니라 예루살렘도 원래부터 거룩한 땅이 아니었습니다. 가나안은 원주민의 터전으로서 우상숭배와 패역이 판치던 곳이었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일으켜 그 땅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곳을 거룩하게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것 중에 거룩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인간의 죄와 우상숭배에 의해 모든 것이 더렵혀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떼어 놓음으로 그것은 거룩하게 구별됩니다. 예를 들어, 십일조를 떼어 놓는 순간, 그것은 거룩한 돈이 됩니다. 모든 날이 하나님의 날이지만,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평범하게 살아가다가 어느 하루를 특별히 구별하여 떼어놓으면 그날은 거룩한 날이 됩니다. 항상 같은 마음이지만, 특별히 하나님을 위해 어떤 일에 바쳐질 때 우리의 마음은 구별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그 산을 거룩한 성소의 영역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소의 영역 곧, 시온 산을 주시고 더불어 산 아래에 펼쳐진 비옥한 땅까지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을 거룩한 곳으로 만들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소의 영역을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온과 예루살렘이 구별된 곳이 된 것처럼, 그 정신을 따라 이스라엘의 온 나라가 거룩해져야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하나님께서 우상숭배 하는 원주민과 교류하지 말고 그들을 내쫓고 멸하라고 하신 이유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구별된 나라가 되어 주변의 나라들에게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며 살라고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인도하여 가나안으로 들여보내신 것입니다.
당시 가나안과 그 주변국들을 아주 발달한 문명을 소유했습니다. 지도를 보면 이스라엘은 북방의 나라들이 애굽과 유통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 나라였습니다. 온갖 문명이 거기에서 만나 교류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애굽에서 온 외교문서도 발견될 정도였으니까 얼마나 활발한 국제적인 교류가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곳에 이스라엘을 두셔서 당신의 나라와 당신의 영광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이 세상에서 구별하여 자녀 삼으신 원리도 이와 같습니다.
믿음으로 들어가는 땅, 가나안
그 다음으로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시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줄을 쳐서 그들의 소유를 분배하시고 지파들이 그들의 장막에 살게 하셨도다” 가나안을 정복하기 전에 제비를 뽑아 그 땅을 어떻게 구획지어 지파별로, 족속별로, 가족별로 세분화해서 배분할지를 결정했습니다. 이미 배분해서 얻은 땅이지만 정복전쟁을 거쳐 취하여야 얻을 수 있는 땅이었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땅을 유업으로 주셨을 때 그 땅은 빈 땅이 아니었고 이방 나라들이 그 앞에 있었습니다. 맨 처음 이스라엘 정탐꾼들이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도저히 저들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고 낙심하게 했던 무시무시한 사람들이 여전히 그 땅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스라엘이 좋은 신앙을 소유하여 예전의 두려움을 이기고 가나안을 정복해가는 광경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미래에 들어갈 하나님의 나라가 믿음으로 들어가는 거룩한 나라를 예표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이 그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전쟁이 필요했습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기적적인 방식으로 가나안의 모든 족속을 파멸하시고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가장 처음에 맞이했던 여리고 전투와 이어지는 모든 전투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순전히 의지하는가에 따라 승리를 주기도 하고 패배를 주기도 하면서 가나안을 정복하는 전 과정을 통해 그들의 신앙을 성숙시킵니다. 하나님께서 크고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끄시고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땅, 가나안
“그들을 장막에서 살게 하셨다”는 말씀은 의미심장한 내용입니다. 예전에 그들은 장막에 산 것이 아니라 잠시 우거하는 나그네의 신분이었는데, 이제는 땅주인이 되어 한 곳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유리하고 방황하는 아람족속으로 알려졌고 ‘강을 건너온 무리’라는 뜻으로 ‘히브리’라고 불렸습니다. 그러한 이들이 나라를 건설하여 살게 하셨으며, 짓지 않은 집에 살고 심지 않은 포도열매를 먹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누리며 하나님 앞에 복락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런 복락을 주신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이스라엘이 의롭고 훌륭해서가 아니라 그 땅 원주민이 너무 패역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땅과 기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기에 살면서 부강한 나라가 되는 것을 꿈꾸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곳에 심으실 때 당신의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신앙과 생활을 다른 모든 나라들에게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러한 목적을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에게 약속하신 것부터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중다한 무리가 되도록 번성시키신 것, 그들을 애굽에서 탈출시키신 것, 광야에서 수많은 기적으로 보호하신 것, 마지막으로 가나안에 들여보내 그 땅을 차지하고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신 모든 것은 이 계획을 위해 베푸신 은혜였습니다.
적용과 결론
은혜는 항상 값없이 주어지지만 은혜 안에는 반드시 계획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살 때 우리 안에서 유지됩니다. 신앙생활의 경험을 반추해보면 은혜는 받는 것도 어렵지만 유지하는 것도 매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처럼 계획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이스라엘에게도 이러한 계획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좋은 것을 누리게 하실 때는 그 자체에 탐닉하고 만족하도록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항상 은혜 뒤에 있는 하나님의 계획을 생각해야합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이 내게 이런 은혜를 주셨을까? 이런 은혜를 주시면서 나에게 기대하는 바가 무엇일까?’를 생각하면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려야합니다.
그러면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그 뜻을 따라 살라고 주신 것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육체의 어두움은 빛이 사라짐으로 찾아오지만 영혼의 어려움은 불순종함으로 찾아온다.” 주신바 은혜를 따라 계속해서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자기 백성들에게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이스라엘의 배반
“그러나 그들은 지존하신 하나님을 시험하고 반항하여 그의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며
그들의 조상들 같이 배반하고 거짓을 행하여 속이는 활 같이 빗나가서
자기 산당들로 그의 노여움을 일으키며 그들의 조각한 우상들로 그를 진노하게 하였으매”(시 78:56-58)
본문해설
54절, 55절까지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던 애굽의 종살이로부터 이스라엘을 건져내고 이끄시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집니다.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들을 행하신 이유는 그들에게 가나안을 기업으로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입성한 후 행한 일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크게 세 가지인데 불순종과 배신과 우상숭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소유를 분배받고 지파를 따라 정해주신 장막에 거하였습니다. 그들은 약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했고 애굽에서 떠나온 세대들은 대부분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얻었습니다. 광야에서 고생한 기억밖에 없는 그들이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받고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불순종하는 그들 안의 이기적인 유전자가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
첫 번째 죄악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하고 반항하며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주셨을 때 하나님이 가지고 계셨던 의도와 전면적으로 배치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을 가나안으로 보내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풍성한 물질을 누리며 안락하게 생활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인도하실 때 당신의 의도와 백성들의 행복을 언제나 일치시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이 있는 곳에서 그 뜻을 이뤄드리며 사는 가운데 그들이 행복을 누려야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곳에서 행복을 얻으려고 하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소명과 그들의 행복이 충돌을 일으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사 기업으로 얻게 하신 것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주신 유업들, 구원의 은혜는 소명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져버리고 불순종하게 됩니다.
불순종은 하나님께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자 그분의 거룩한 뜻에 대한 전적인 배신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매우 가슴 아픈 사건이었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하심을 따라 그들을 징벌하였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분 앞에 악하게 살고 있음에도 외적으로, 내적으로 아무런 고통이 없다면 하나님은 결코 선하신 분일 수 없습니다. 악이 존재한다는 것은 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가장 훌륭한 증거입니다. 악인이 고통 받은 것은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최고의 증거입니다. 하나님 참으로 선하시고 그 선이 거스를 수 없을 만큼 강한 것이라면 악을 행하는 모든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막고 계시다는 증거이며 하나님의 선을 입증하게 됩니다.
비유를 해봅시다. 헤엄을 치는데 물을 따라 떠내려간다면 수영이 힘들지 않습니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이 없어도 발장구만 치면서 떠 있어도 흘러 내려오는 물의 힘이 상당한 거리를 이동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반대로 물을 거슬러 올라가려 한다고 합시다. 앞으로 나아가려고 물장구를 쳐도 거의 나가지 못한다면 그 자체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증거가 됩니다. 홍수가 났을 때 물을 건너는 것이 위험한 이유는 수위가 가슴까지 밖에 오지 않아도 물의 부력 때문에 발을 헛디뎌서 넘어지면 떠내려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악을 행하는 사람이 고통을 받는 것을 보고 ‘어떻게 하나님이 그럴 수 있느냐?’고 힐문하지만 반대로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악을 다루십니다.
이스라엘의 배반
두 번째 죄악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반입니다. 배반은 신의를 저버리고 언약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과 약속한 바가 없거나 삶의 규칙을 받지 못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그들은 자신 안에 존재하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배신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과 어떤 언약을 맺고 그것을 배신했다면 그것의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과 중요한 약속을 했는데 불가항력적인 자연재해로 인해 약속을 못 지켰다면 배신이 아닙니다. 배신이 아니라 사정이 있어서 못 지킨 것입니다. 배신은 타의에 의해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약속을 이행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서 일어난 이기적 욕망 때문에 신뢰의 원칙을 위배하고 약속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배신은 밖으로부터의 작용이 아니라 자기 안의 이기심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계약 위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어기고 가나안으로 보내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릴 수밖에 없는 불가항력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짓지 않은 집에서 살게 하시고 심지 않은 포도원에서 열매를 따게 해주셨습니다. 이 모든 일들을 하나님이 친히 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앞에 배신한 것은 외부의 요인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 부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배신을 하고나니 거짓이라는 구체적인 행동이 나타납니다. 외형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이미 부정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간의 혼인 관계를 더럽히는 행동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속이는 화살’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속이는 활같이 빗나간다는 뜻입니다. 활을 제대로 만들었다면 시위에 화살을 먹이고 과녁을 조준해서 활을 쏘면 명중합니다. 그런데 활자체가 잘못 제작되었다면 빗나갑니다. 죄를 희랍어로 ‘하마르티아’라고 말합니다. ‘하마르티아’는 ‘과녁을 빗나가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의도하신 바를 벗어난 것을 죄라고 합니다. 마치 잘못 만들어진 시위에 화살을 먹이면 언제나 빗나가듯,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를 지은 것이 어쩔 수없이 벌어진 한 두 번의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그들을 가나안으로 보내어 큰 축복을 주려고 하신 하나님의 계획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광야 같은 곳을 여행한다면 지도와 나침반을 가지고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수시로 확인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정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달려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의도하는 길을 가고 있는지 항상 물어야합니다. 한 달이나 일 년이 아닌 인생의 커다란 방향을 정했다 하더라도 걸어가면서 매일 매일 자신을 살펴야합니다. 나침반은 자력의 원리를 따르기 때문에 가리키는 방향이 일정합니다. 그러나 나침반 옆에 자석이 있다면 그 힘 때문에 방향을 잘못 가리키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침반과 같아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고 순종하려는 의지가 결핍되면 하나님의 뜻을 바로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는 우리 안에서 솟아나는 자기중심적인 욕망에 의해 그렇게 됩니다. 이로 인해 '속이는 살같이' 계속 죄를 짓고 하나님의 의도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
세 번째 죄악은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싫어하시는 죄를 인간들이 어떻게 그토록 집요하게 지을 수 있을까 의아해집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적인 열심이 그렇게 하도록 했을 거라고 여기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우상숭배도 종교의 형태를 띱니다. 여호와의 종교와 우상의 종교가 나란히 또는 대립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나의 마음과 모든 삶을 주님께 합치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상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도덕성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상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들은 바알, 아세라와 같은 우상을 섬겼지만 그들이 실제로 섬기고 싶었던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그들의 욕망을 하나님께 빌어서 성취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상에게 빌었습니다. 우상에게 빌어서는 성취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 빌어서는 성취되지 못하는 욕망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가 번제와 제사를 드려서 간절한 소원을 빌었다면 둘 중 하나의 결과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라면 들어주시지만 기뻐하지 않는 바라면 회개하고 그것을 버리라는 명령을 받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주는 신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대만에서 보았다고 합니다. 한 사람이 우상을 손바닥 위에 놓고 회초리로 때리더랍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이것이 우리 집 신인데 요즘 게을러서 복을 주지 않아서 때린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을 싫어하시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상은 결국 자기 욕망의 투영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우상에게 투영합니다. 우상은 거룩함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네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졌느냐? 이 제물이 정당한 제물이냐? 제사를 지내는 너의 마음은 이웃과 평화를 누리느냐?’ 우상은 이런 것을 묻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우상숭배에 빠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탐심이라고 불렀습니다.
결론과 적용
결론적으로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셨습니다. 그 땅은 결국 사라지고 언젠가는 빼앗겨서 주인이 바뀔 땅이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땅의 실체인 그리스도를 유업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에 살게 하시듯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혹시 거기서 하나님께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그 땅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당신 안에 있게 하신 거룩하고 존귀한 뜻을 드러내는 백성으로 신실하게 살며 그분께 순종하고 그분만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배반한 이스라엘을 다루심
“하나님이 들으시고 분내어 이스라엘을 크게 미워하사 사람 가운데
세우신 장막 곧 실로의 성막을 떠나시고 그가 그의 능력을 포로에게 넘겨 주시며
그의 영광을 대적의 손에 붙이시고 그가 그의 소유 때문에 분내사
그의 백성을 칼에 넘기셨으니”(시 78:59-62)
본문해설
앞 절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했다면 본 절에서는 배반한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여줍니다. 당신과의 언약을 어기고 배반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반응은 크게 분내어 미워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과연 인간처럼 정동되는 분이십니까? 새로운 것을 보면 신선한 느낌이 일어나고, 더러운 것을 보면 혐오의 감정이 일어나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사랑의 감정이 생겨나는 것 같은 변화가 하나님에게 있습니까?
엄밀히 말해서 이러한 변화가 하나님께 있다면 그분은 하나님이 되실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당신이 창조하신 것들인데 그것을 보면서 예전에 없던 감정들이 생겨나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완전한 하나님이 되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것들이 없었을 때는 부족한 하나님이셨던 것이 되고, 그런 것들이 없어도 충분히 하나님이 되실 수 있다면 그런 것들을 쓸데없이 생겨난 것이 됩니다. 어떤 식으로 해석하든지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위배됩니다.
하나님의 감정표현
하나님이 무언가를 느끼고 정동되시는 것은 성경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영적으로 경험됩니다. 우리들은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합니까? 이것은 신학적으로 어렵고 논란이 많이 되는 문제입니다. 물론 철학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정리를 해서 답을 해봅시다. 하나님에게 본질적으로 예전에 없던 것들이 생겨나거나, 모르던 것을 알게 되거나, 없던 정서를 새롭게 겪게 되는 일은 없습니다. 본질에 있어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렇기만 하다면 하나님이 살아계시어 이 세상 만물을 돌보시며 기뻐하고 아파하고 즐거워하는 일은 추호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없는 분과 마찬가지이고 인간을 교화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식에게 말을 하지도 않고, 그를 통해 새롭게 느끼는 것도 없고, 자식이 어떻게 행하든 거기서 희노애락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들은 불상이나 돌멩이와 진배없습니다. 본질적으로는 불변하시는 하나님이지만, 관계적으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사느냐, 어떤 생각을 갖느냐에 따라서 그에 상응하는 감정 표현을 하시는 것처럼 인격적으로 느끼게 됩니다.
신인동형론적 표현
그러면 본질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분이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느껴지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순수한 인식에 관한 것입니까? 아니면 실제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작용을 하는 것입니까? 이러한 질문들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나 사물이라면 본질적으로는 변함이 없으면서 관계적으로는 변한다는 것이 납득되지 않지만, 영원하고 무한하셔서 어떠한 존재의 유비도 이 세상에 갖고 계시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러한 추론은 가능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매일 경험하고 성경에서도 발견하는 바입니다. 성경은 마치 하나님이 인간과 같이 겪으시고 변하시고 움직이시는 것처럼 신인동형론적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이것은 우리의 교화를 위해 관계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초월하시는 영원하고 완전하고 불변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두 개의 신앙고백을 가져야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악을 행하고 언약을 파괴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분내시고 그들을 크게 미워하셨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 관계적으로 경험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합니다. “제가 요즘 신앙이 식어 하나님을 멀리 떠났습니다.” 혹은 “여러 해동안 주님을 떠나 세상 연락을 즐겼습니다.” 이것처럼 엉터리 같은 말이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날 수 있는 존재입니까?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면 온화하고 좋으신 하나님을 만나지만 불순종하면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대면할 뿐,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어디로 가리이까?” 하나님께 순종하다가 불순종할 때 예전에는 자신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지만 지금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시인은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붇드시나이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당연한 말이지만 그 당시에 이것은 파격적인 표현이었습니다. 당시 중동지역에서는 지역신(local god)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땅의 구획마다 그 땅을 주관하는 신들이 있어서 그 신들에게 밉보이면 관할 구역에서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애굽과 광야는 하나님의 구역이지만 가나안에 입성하고 나면 그 터를 주장하는 고유한 신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여호와도 못 버리고 바알신도 못 버리는 혼합주의를 가져온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요나가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탄 것도 하나님의 관할 구역에서 이탈하려는 의도였다고 합니다. 나중에 큰 폭풍을 만나 온 땅과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해석합니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붇드시나이다”라는 표현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선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노하심 1 : "성막을 떠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분내고 미워하심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세 개의 동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떠나시고’, ‘붙이시고’, ‘넘기시고’라고 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슬퍼하실 때 그들을 ‘떠나셨다’고 했습니다. “사람 가운데 세우신 장막 곧 실로의 성막을 떠나시고” 실로는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입성한 후에 처음 장막을 쳤던 장소로, 거기에 법궤가 놓였습니다. 그분의 임재의 장소였던 실로는 미래에 이뤄질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고 장차 이뤄질 교회를 바라보고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하는 하나님의 왕국을 전망하던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거기에서 떠나셨다는 것은 언약을 파괴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미움의 표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능력과 위엄은 그들과 함께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유의 관계에 대한 최고의 표현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임마누엘’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노하심 2 : "대적의 손에 붙이시고"
둘째는 ‘대적의 손에 붙이셨다’고 했습니다. “그의 능력을 포로에게 넘겨주시며 그의 영광을 대적의 손에 붙이시고”라는 말의 뒷부분은 해석이 명확하지만 앞부분은 그 뜻이 불분명합니다. ‘능력을 포로에게 넘긴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두 가지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능력이 전쟁을 통해 잡아온 포로들보다 뛰어났지만 하나님이 그 능력을 대적에게 넘겨주셔서 이스라엘은 약하게 되고 그들은 강하게 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더 가능성 있는 두 번째 해석은 포로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포로에게 넘겨주었다’고 한 것입니다. 문학적으로 말하면 비꼬는 표현(cynicism)입니다. 하나님이 실로를 떠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할 자가 없어 대적의 손에 끌려가는 것을 향해 비꼬는 표현입니다.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의 능력을 포로에게 넘겨주셨다”는 것은 이스라엘과 함께하는 하나님의 큰 능력이 사라지고 그들은 비참하게 포로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영광을 대적에게 붙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던 독특한 존귀함과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게 만들었던 것들을 대적의 손에 넘겨주었습니다. 이를 보고 ‘하나님이 함께 하던 이스라엘은 넘어뜨리다니 바벨론은 대단하구나.’라고 인정하게 만듦으로써 그의 영광을 대적의 손에 붙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노하심 3 : "칼에 넘기셨다"
세 번째, “그가 그의 소유 때문에 분내사 그의 백성을 칼에 넘기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소유’라는 표현은 분명하지 않은 표현입니다. ‘소유’라는 번역은 조금 어색한 것 같습니다. 히브리말로는 ‘나할라’라고 하는데 옛날 성경에 ‘기업’이라고 번역된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기업은 땅입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물려주는 것이 기업입니다. 대대로 운명처럼 물려받아 그것을 토대로 번영을 이루며 집안이 영위되는 것을 기업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육적인 기업은 가나안 땅이었지만 영적인 기업은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하나님께도 기업이 있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기업이 됩니까? 하나님은 기업이 필요 없으신 분입니다. 창조세계의 인간들이 하나님을 떠났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이 기업을 통해서 세상을 하나씩 정복해 나아가 당신의 나라로 만드십니다. 이때 토벌대장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 점에서 은유적으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기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의 기업 때문에 분내사 이스라엘을 칼에 넘겼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기업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화나게 했습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in with’라는 단어가 들어가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속속들이 맺은 깊은 연합의 관계에서 분노하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주 긴밀히 사랑을 나누던 사람들끼리 갈등이 생겨 싸우게 될 때를 가리켜 사랑이 변하여 뼈 속까지 사무치는 미움이 된다고 문학적으로 묘사합니다. 이 전치사가 그것을 표현합니다. 그의 소유였던 이스라엘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에 대못을 박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백성들을 칼에 넘기셨습니다. 이것은 앗수르나 바벨론 같은 나라의 칼에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사건을 의미합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어떻게 된 것입니까? 변치 않고 사랑하겠다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미워하시다니 어떻게 된 것입니까? 물론 이스라엘의 배반은 잘못된 것이지만 떠나지 않겠다고 하시던 분이 떠나고, 보호하겠다고 약속하셨던 분이 그들을 대적에 손에 붙이고 원수의 칼에 넘긴 것이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성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게 만듭니다. 이것은 이렇게 해석해야합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스라엘을 강대국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적인 이스라엘 안에 영적인 이스라엘을 씨앗으로 심어놓으시고 그것이 잉태하여 활짝 꽃피우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일관성과 신실성이 변함없다는 것을 입증하셨습니다. 다윗의 위를 영원토록 보존하셔서 오늘에 이르렀고 이것이 바로 흔들리지 않고 서있는 영적인 교회로서의 이스라엘입니다.
불과 칼에 사라진 노래
“그들의 청년은 불에 살라지고 그들의 처녀들은 혼인 노래를 들을 수 없었으며
그들의 제사장들은 칼에 엎드러지고 그들의 과부들은 애곡도 하지 못하였도다”(시 78:63-64)
본문해설
63절, 64절에서는 ‘떠나시고, 붙이시고, 넘겨주시는’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행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이끄신 후에 외적에게 침탈당한 사건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뒤에 나오는 내용을 종합해보면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한 것뿐 아니라 536년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당하는 상황까지를 포함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이 북왕국을 택하지 않고 남왕국을 택하신 것으로 보아서 앗수르에 의해 멸망한 북왕국의 사건까지를 포함해서 역사를 회고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여기에 나오는 심판에 관한 이야기들이 시간순서를 거슬러서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시이기 때문입니다. 63절, 64절에 보면 무시무시한 내용이 나옵니다. 앞 절은 청년과 처녀들의 파멸, 다음절에 제사장과 과부들의 파멸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일부만의 위기가 아니라 국가 전체가 멸망당하는 그림을 퍼즐처럼 보여주는 것입니다.
"청년들이 불에 살라짐"
“청년들이 불에 살라졌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청년’은 아이들이나 젊은이들을 의미합니다. 청년에는 나이가 많은 장년도 속하지만 나이가 어린 아이도 포함됩니다. 청년들이 불에 살라졌다는 것은 국가가 외적으로부터 이들을 보호할 힘이 사라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청년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나라의 미래가 사라진 것을 의미합니다. 외적이 침입하여 도시를 불을 지르고 파괴하는 과정에서 나이든 사람보다도 더 신속하게 피할 수 있는 젊은이들이 죽어간 것을 보면 그 침탈과 파괴가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줍니다. 젊은이들은 나라의 기운이요, 미래인데 하나님이 자기의 기업에 진노를 쏟으신 것입니다. 처녀들은 외적에게 겁탈당하거나 노략물과 함께 끌려갔습니다. 순결을 빼앗기고 결혼할 상대가 모두 죽어서 처녀들은 혼인 노래를 부를 수 없었습니다. 이 나라의 미래가 철저히 짓밟혀졌다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칼에 엎드러짐"
이어서 “제사장들이 칼에 엎드러진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경에도 이러한 표현이 종종 나오는데, 이는 도륙을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커다란 도륙이 있어서 공격자가 굳이 겨냥하여 그의 목숨을 끊지 않아도 도망하고 우왕좌왕하면서 이미 엎드러진 사람의 세워진 칼에 사람들이 수없이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사장들이 칼에 엎드러졌다”는 것은 두 가지를 암시합니다. 첫째는 도륙이 극심하였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둘째로 굳이 제사장을 언급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은혜와 공로를 잊어버리고 타락하게 된 것이 많은 부분 제사장들의 책임인 것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호와를 경외하도록 이끌어야할 세 기관이 있습니다. 첫째는 왕입니다. 왕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엄격하게 집행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따르는 나라가 되도록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왕은 백성들이 여호와를 경외하도록 그들의 외적 생활을 책임져야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어도 법을 엄격하게 만들고 정당하게 처벌하면 죄지을 생각이 억제됩니다. 이것이 일반은총의 효과입니다. 언약 백성들의 마음이 미끄러졌다할지라도 미끄러진 마음의 상태를 급기야 불신앙의 행동으로 토해놓아 하나님의 법을 짓밟지 못하도록 억제시킵니다. 그런 점에서 왕은 나라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국가로 서게 하는데 중요한 몫을 담당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왕의 힘만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법은 봇물과 같아서 누군가가 한 번 밟고 지나가면 정신없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요즘 어린아이들을 성폭행하는 것에 대해 극형에 처해야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나라의 법원은 이상하리만치 이런 자들에게 굉장히 관대합니다. 미국에서는 엄격하게 처벌하는데 우리나라는 그 부분에서 잘못하고 있습니다. 법학자들과 사회심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범죄의 형량을 높이거나 사형을 처한다 해도 별 효과가 없을 거라고 합니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행동을 할 때 법을 의식하지만 사이코패스가 되어 죄를 짓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 행위에 대해 어떤 책임을 져야한다는 사고가 없습니다. 예전에 유영철 같은 살인마도 웃으면서 살인 현장을 재현했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아무리 형량을 높여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왕의 통치나 법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의 의무
그래서 하나님은 왕 이외에 두 그룹을 따로 정하셨습니다.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와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하나님을 향해 올바로 살도록 촉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전통에 서있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죄지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나갈까?’였습니다. 두 그룹이 제 역할을 담당했다면, 선지자의 기도와 제사장의 바람이 충돌을 일으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 너그러워지는 것은 좋지만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인색하고 남에게 너그러운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는 자기에게는 너그럽지만 남에게는 인색합니다. 성화되어가면서 우리의 인생 전체가 하나님과 남을 위한 삶이 되어가는 것 아닙니까? 그런 점에서 제사장들은 잘못했습니다. 제사를 통해 죄가 얼마나 엄중한 것이며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잘못을 했는지 정확하게 지적하여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향해 돌이키도록 했어야했습니다. 백성들은 반복적인 제사 속에서 의례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제사장들은 제사를 죄를 회개하고 뉘우칠 기회가 아닌 죄를 정당화할 기회로 삼는데 일조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나라와 함께 종교 지도자들도 망하게 되었습니다.
한 시대의 종교지도자의 면류관은 그 나라의 번영과 형통이 아니라 공의롭고 인애가 있는 나라, 언약에 충실한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은 종교지도자, 곧 제사장들에게 책임을 묻고 그들이 도륙되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위기가 임박했을 때 백성들에게 회개를 선포하고 제사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는 일들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역사 속에서 심판을 당해 연기처럼 사라졌던 것입니다. “피 흘림이 없이 제사가 없다”고 했습니다. 제사는 죄가 무엇이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 어떤 상태이며 범죄 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다루실지를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는 훌륭한 기회였습니다. 그들은 그런 기회들을 활용하지 못했고 이스라엘을 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예배가 우리자신을 돌이키게 하기에 충분합니까? 다른 곳에서는 온 땅과 만물위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했는데 예배 속에서 그분을 의식하고 “온 천하는 그분 앞에 잠잠하라”는 선언을 듣게 됩니다. 예배를 통해 자신이 티끌임을 발견하고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 자기가 불결하기 짝이 없는 더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인간임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어긴 것에 대해 처절하게 회개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절대적인 순종의 삶을 살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예배를 통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만나는 대신, 이런 식으로 예배드리면서 살아도 된다는 종교적 위안과 담대함을 얻는 역사가 수없이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과부들이 애곡하지 못함"
“과부들이 애곡을 하지 못했다”는 것은 나라를 위해 싸울 수 있는 장정들, 가장들이 전쟁터에서 모두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성경에는 “7일 동안 애곡 하였더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서 ‘애곡하다’는 표현은 단순히 운다는 것만이 아니라 ‘장사 지낸다’는 것을 뜻합니다. ‘애곡하지 못했다’ 즉, 장사를 지낼 수 없었다는 것은 남편들의 시체를 찾을 수 없고, 찾아도 옮길 수 없고, 조문객도 없었다는 말입니다.
인간사에서 태어나고, 결혼하고, 죽는 이 세 가지는 매우 큰일입니다. 태어난 아이를 진심으로 축복하고 죽은 자를 진심으로 애도하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행사인데 이것을 제대로 못할 정도였다는 것은 파괴와 파멸이 얼마나 컸는지를 말해줍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이렇게 비참하게 짓밟히게 내버려 둘 수 있습니까? 그리하여 여기에서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하는 신정론의 문제가 대두됩니다.
용사 같으신 하나님
“그 때에 주께서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포도주를 마시고 고함치는 용사처럼 일어나사
그의 대적들을 쳐 물리쳐서 영원히 그들에게 욕되게 하셨도다”(시 78:65-66)
본문해설
본문에서 ‘그 때’라는 것은 앞 절에서 언급했던 칼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혼인의 노래들이 사라졌던 ‘그 때’입니다. 이때는 이스라엘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버려서, 그분이 진노하사 그들을 미워하신 ‘그 때’입니다. 이때는 하나님께서 실로의 성막을 떠나시고 그의 영광을 대적의 손에 붙이시던 ‘그 때’입니다. 자신들의 비참함이 극에 달했다고 생각하는 ‘그 때’, 하나님 이외에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 바로 ‘그 때’에 하나님께서 용사처럼 일어나셨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군사, 용사, 전쟁의 능하신 이’로 자주 비유합니다. 이스라엘은 늘 전쟁 속에서 살던 민족이었기 때문에 ‘용사, 싸우는 이, 전쟁에 능하신 이’라는 표현은 그들의 가슴에 와 닿는 실감나는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전쟁의 승패는 얼마나 많은 군대가, 얼마나 용감한 사람들이, 얼마나 뛰어난 전략으로, 얼마나 훌륭한 무기를 가지고 싸우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이스라엘이 거느리고 있는 군사와 병기와 모든 전력은 인간적으로 계산해 보았을 때 대적들을 이기기에는 터무니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시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원인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원인과 관련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기쁘지 않으시기 때문에 다른 나라를 통하여 그들을 징벌하십니다. 악인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를 고통 받게 하십니다. 그러나 악한 나라의 의지에 반하여 하나님의 강권적인 힘으로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섭리 속에서 그들의 의지를 사용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통을 가하시는 것입니다. 칼빈의 표현을 비려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태를 멀리서 볼 때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만, 가까이에서 볼 때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악인이든, 선인이든 각기 자기 의지를 가지고 일하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작정과 사람의 자유, 영원 속에서의 하나님의 결정과 시간 속에서의 인간의 자율의 문제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악한 나라들이 자신 안의 악한 마음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을 치고 징계하는 일들이 멀리에서 보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그렇게 하도록 사태를 지정하신 것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악한 나라들이 이익을 위해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이스라엘을 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나라를 약탈하여 “제사장들을 칼에 엎드러트리고, 과부들이 애곡하지 못하도록 청년을 불사르고, 처녀들이 혼인 노래를 들을 수 없도록 만든” 모든 도덕적 책임들은 하나님 앞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식을 키울 때, 아이들이 마음에 들지 않게 행동하면 속상하지만, 그렇다고 남의 집 아이가 우리 집 아이를 때리며 아프게 만들면 가만히 있을 부모는 없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때리더라도 남들이 내 아이에게 손대면 참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용사처럼
바로 이때에 “주께서 잠에서 깨어난 용사처럼, 포도주를 마시고 고함치는 용사처럼 일어나셨다”고 말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깨우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성경에 “여호와여 깨소서, 여호와여 이제 일어나소서”라는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신다”고 고백한 사람들이, ‘깨어라, 일어나라’고 말하며 마치 하나님을 깊이 주무시는 분처럼 묘사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주무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분의 가시적 은총이 사라진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이 주무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신앙이 잠자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여호와여 깨소서’라고 고함치는 것은 주님을 향해 “잠자고 있는 우리의 신앙을 깨우사 우리의 믿음을 떨쳐 일어나게 하소서”라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포도주를 마시고 고함치는 용사처럼
여기서 하나님을 ‘용사’로 표현합니다. ‘잠에서 깨어난 용사, 포도주를 마시고 고함치는 용사’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전쟁 때 술을 마시는 것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습니다. 전쟁 중에 음주하는 자는 즉결사형에 처할 정도로 무섭게 다뤄집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전쟁행위 자체는 비이성적인 것일 수 있지만 전쟁에서 살아남고 아군의 생명에 위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는 극도로 이성적이어야 합니다. 술은 이성을 마비시키거나 이성에 의한 통제를 느슨하게 만듭니다. 술을 마시고 미사일을 잘못 발사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더군다나 술을 마신 자가 지휘관이면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전투 중에 술을 엄금하는 것입니다. 물론 안 그런 나라도 있습니다. 술은 사람을 담대하게 하게 합니다. 술을 마시면 양심과 정신을 통제하는 기능이 상실되기 때문에 담대함이 생겨납니다. 일례로, 6.25때 중공군들이 술을 가지고 전쟁했다는 사실은 유명합니다. 술로 인해 담대함을 북돋으며 전쟁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구절을 읽으며 술을 마시고 강한 용기를 내어서 전쟁에 참여하는 용사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포도주를 마시며 고함치는 용사’는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이스라엘을 치는 자들을 향해 일어나시는 하나님의 위엄과 커다란 용맹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대적을 물리치심
그리고 “그의 대적들을 물리쳐 영원히 그들에게 욕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록 타락하고 불순종하여 악을 행했지만, 청년들을 불태우며 처녀들이 혼인노래를 부를 수 없게 만들고 제사장들을 칼에 엎드러트리고 과부들이두려움으로 애곡할 수 없게 만든 대적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이스라엘의 대적, 하나님의 대적’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언약적인 연대를 이루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대적이 곧 이스라엘의 대적이고, 이스라엘의 대적이 곧 하나님의 대적이었습니다.
“그 대적들을 물리쳐서 영원히 그들에게 욕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대적들에게 치욕과 수치를 안겨준 것입니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승리국에게 대단히 명예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전쟁에서 패배하면 패전국의 왕이 포로처럼 끌려가 승리국의 왕도 아닌 장수 앞에 무릎을 꿇고 신하의 예를 갖추며 살려주기를 간청해야했습니다. 이것은 커다란 수치와 모욕입니다. 이것은 왕국의 멸망을 의미하고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완전히 복속되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왕국의 운명 중 패망하는 것보다 더 큰 수치가 어디 있겠으며 임금이 적군의 장수 앞에 무릎을 꿇는 것보다 더 치욕스런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쳐서 물리치고 그들을 욕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대적에게 넘겨주심
그러면 “하나님이 분을 내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악한 나라에게 넘겨주었다”, “그들을 향하여 쳐서 물리쳐 그들을 욕되게 하셨다”는 두 말씀에 나타나는 상반된 행동을 어떻게 해석해야합니까? 우리는 이것들 사이에서 연결점을 찾아야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악을 행하고 불순종했을 때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어 거듭된 경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그것을 무시하고 반역하고 악을 행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민족을 들어서 그들을 징계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이키며 간절히 매달리자 다시금 불쌍히 여기셔서 이민족을 치시고 이스라엘을 구했다는 공식이 가능합니다. 어느 정도는 그런 공식이 성립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 하나에만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고 불순종할 때조차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지 않고 기다리며 오래 참으신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철저히 회개하고 뉘우치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이 이들을 건지신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민족에게 고통 받는 이스라엘을 건져주시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가지고 있는 언약적 태도 하나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언약에 충실한 그분의 일방적 은총에 토대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죄의 용서가 이와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을 파기하고 우상을 섬기며 그들의 조상처럼 하나님을 배반하고 속이는 활같이 빗나가고자 할 때, 그들을 심판해서 영원히 멸하실 권한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런데도 다시금 그들을 용서하시고 하나님 앞에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일방적 은총, 일방적인 헤세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끊임없이 관계를 갖고자 하는 성향입니다. 당신의 백성들을 파멸하여 사라지게 하면 그들과의 관계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결국 사랑하는 사람이 도리어 약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재판에서 두 여인이 왕 앞으로 나아와 살아있는 한 아이를 두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우겼습니다. 지혜로운 임금은 두 아이를 반으로 잘라서 나눠주라고 했습니다. 한 어미는 그렇게 하라고 하고 다른 어미는 그렇게 하지 말고 저 여인에게 아이를 주라고 말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아이를 잃게 되더라도 아이가 멸절되는 것은 원치 않았습니다. 사랑이 그렇게 시킨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없이도 충분히 살 수 있다고 믿고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보다 더 약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하지도 않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이 돌이키면 용서해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용사처럼 일어나 대적들을 물리치신 것입니다. 이러한 일방적인 은총을 붙들고 사는 것이 바로 언약백성들의 축복이요, 의무입니다.
시온과 성소를 택하심
“또 요셉의 장막을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가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며
그의 성소를 산의 높음 같이, 영원히 두신 땅 같이 지으셨도다”(시 78:67-69)
본문해설
본문은 이스라엘 왕국이 남과 북으로 분열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왕국이 분열된 가운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왕국을 보존하고 보호하시며 당신의 언약을 이어가셨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절에 보면 “요셉의 장막을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라고 되어 있는데 이 두 지파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구성하는 가장 강력한 지파였습니다. 열 지파와 두 지파로 나뉘었기 때문에 북쪽에 있는 이스라엘이 영토로 보나 규모로 보나 대세를 이루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찢어서 두 왕국으로 가른 것은 정치적으로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솔로몬 때에 사치스런 생활과 수많은 토목공사들로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웠고 민심이 떠났습니다. 그것을 왕이 품고 위로하고 다독여야했는데 르호보암은 신앙이 없는 왕이었던 터라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북왕국 지도자 여로보암은 신앙은 없었지만 세속적으로 영명한 군주였습니다. 이때 르호보암은 신앙과 지혜, 둘 다 없어서 어리석게도 더 강력한 철권통치를 하겠다고 선언합니다. 많은 참모들이 있지만, 최종 결정권은 왕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종류의 지혜
지혜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부적인 지혜와 상부적인 지혜가 있습니다. 무엇을 실행하는데 필요한 구체적인 지혜는 빌려 쓸 수 있습니다. 더 상위로 올라가서, 궁극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판단하는 지혜는 빌려 쓸 수 없습니다. 어리석어도 지혜를 빌려 쓸 수 있으면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연평도 폭격 사건과 같은 때 대통령은 무마를 할 것인가, 대응을 할 것인가를 결정합니다. 상부의 대통령은 무마를 하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 외교적, 정치적으로 파장이 없게 할 수 있을지를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하부의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됩니다. 전쟁을 하려면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군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빌려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혜를 빌려 쓴다고 할 때 하부적인 지혜는 빌려 쓸 수 있지만 상부적인 지혜는 빌려 쓸 수 없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음을 일평생 운명처럼 짊어지고 삽니다. 성경은 운명인 것처럼 이러한 지혜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성경도 지혜 없는 사람이 지혜로워지는 것이 어렵다고 거듭 말합니다.
지혜로워지는 비결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지혜는 가치판단과 사물의 존재의 질서에 관한 것입니다. 가치판단이나 사물의 존재의 질서에 관한 것들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 의해 결정됩니다. 모든 사물들의 궁극적인 질서의 맨 끝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이 최고의 가치라는 명석한 판단에 의해 나머지 모든 것들이 자리를 잡고 위치가 정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의 유용성입니다.
세상나라의 성립조건
하나님과 똑같이 판단할 수는 없지만 사물들의 질서를 나름대로 이해하고 국가의 가치를 실현시키는 등등, 이것들을 어떻게 적용하는가에 따라 국가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몽테스키외’(Baron de La Brde et de Montesqu)의『법의 정신』에서 국가의 법이 어떻게 결정되는가를 크게 4가지로 설명합니다. 전통적으로는 자연법사상이나 공동체가 협정으로 맺는 것, 2가지 견해로 나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4가지로 나눕니다. 자연법사상, 실행법사상, 국가가 지향하는 공동체의 가치, 국가를 에워싸고 있는 상황 등 몇 가지의 조건에 의해 국가의 법이 결정된다고 보았습니다. 합리적인 설명입니다. 국가 자체가 어떻게 존재해야하며 법을 어떻게 만들어야하는가에 대한 판단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사물이 어떤 질서 속에 위치해야 세상 왕국이 건전하게 성립되는지에 대한 이해를 겸비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분열의 이유
이스라엘이 분열되고 나서 여로보암 왕국은 강력한 국가를 이룹니다. 그와 함께 종교적인 배교도 일어납니다. 세속적으로 보았을 때는 왕국이 갈려질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정치적인 이유로만 보아서는 안 되고 신앙적 이유를 아울러 생각해야 하는 나라입니다. 이들은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그릇된 길로 갔습니다. 나라가 출범될 때 인간적으로 보면 북왕국은 강력한 나라를 이루는 것 같았습니다. 귀족들이 여름별장과 겨울별장을 다니며 수입품들을 가지고 호화롭게 생활하는 것이 선지서에 나옵니다. 세속적인 시각으로는 부강해보였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유다지파와 시온 산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교회의 모형이었습니다. 영적인 집단인 교회, 하나님의 나라는 세속적인 생각으로 접근하고 다뤄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강아지 모양의 장난감과 진짜 개가 있다고 합시다. 장난감에 로봇기능이 있어서 짖기도 하고 뛰기도 합니다. 진짜와 가짜, 모두 문제가 생겨 정상적이지 않을 때 둘을 고치는 방법은 다릅니다. 로봇은 장난감입니다. 수리했는데 고칠 수 없으면 그만이지만, 개는 살아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수술한 후 어떻게 살릴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제 동생의 친구가 동물을 좋아합니다. 길거리를 지나다가 도둑고양이를 살짝 쳐서 동물병원에 데려갔습니다. 수의사가 수술비가 150만원이 나오니 안락사 시키라고 했는데 많은 돈을 지불하고 치료해서 집에서 키운다고 합니다.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생각이 다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의 집단에 통용되는 이론을 가지고 교회를 찢고 상처 내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을 보면서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유다지파와 시온산을 택하심
기초가 완전히 다른 것은 이교(異敎)입니다. 같은 기초로 시작했으나 잘못된 기초로 나아간 것이 이단(異端)입니다. 기초는 큰 문제가 없으나 자기의 사사로운 견해 때문에 교회를 찢어간 것은 열교(裂敎)입니다. 열교의 죄는 굉장히 무서운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찢어져 둘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보았을 때는 왕국이 갈라지기에 충분한 이유가 있었고 북왕국 이스라엘은 번성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다지파와 시온 산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징벌하실지라도 이스라엘이 찌어지는 것은 원치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성소를 남왕국에 두시고 그곳이 이스라엘의 신앙의 고향이 되게 하셨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성소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무 곳에서나 경배를 받지 않으시고 당신이 정한 곳에서 경배를 받으신다는 예루살렘 성소의 중앙사상에 대한 콤플렉스를 버리지 못합니다.
히스기야 왕은 세속적인 면에서는 탁월한 군주는 아니었지만 신앙이 뛰어난 군주였습니다. 신앙적인 통치의 지혜와 세속적 통치의 지혜를 함께 겸비한 왕이 있을 때 왕국이 번영합니다. 여로보암 왕은 신앙은 없고 세속적인 통치만 있었습니다. 반대로 히스기야는 신앙적인 지혜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역사 속에서 당신의 놀라운 일을 이루어가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성소를 향한 그리움이 항상 있었습니다. 급기야 여로보암은 단을 만들고 이곳이 하나님이 세우신 성소라며 토착신앙과 우상숭배를 부추깁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사랑은 변함없었지만 그들이 불신앙으로 악을 행한 것은 징계하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그루터기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이스라엘을 밀알과 같이 썩게 하셔서 그리스도의 왕국이 태어나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장면입니다.
다윗을 세우신 하나님
“또 그의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사
그의 백성인 야곱, 그의 소유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시 78:70-72)
본문해설
78편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윗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67-69절에서는 하나님이 요셉과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고 유다지파와 시온 산을 택하셨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역사의 전개를 통해 왕국이 분열된 후, 하나님이 어떻게 섭리하셨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작정을 따라 일들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왕국이 갈라지기도 전에 요셉의 장막과 가장 강건해 보였던 에브라임 지파를 버리시고, 오히려 이스라엘의 많은 지파들을 아프게 했던 유다지파와 시온 산을 택하기로 작정하십니다. 그렇게 보면, 여기에 나오는 다윗의 이야기는 왕국의 분열을 이야기를 하다가 시간을 거슬러 되돌아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왕국의 분열을 내다보시며 앞으로 전개될 일들을 이미 작정하셨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다윗은 양을 치던 목자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취하사 당신의 백성인 야곱을 기르게 하셨습니다. 야곱은 이스라엘 북왕국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이스라엘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애칭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왕의 모본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하나님이 마음에 맞게끔 다스려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데 이바지했습니다. 그는 두 가지 자질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스렸습니다.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름
첫째로, 다윗은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백성들을 길렀습니다. 완전함은 순수함을 뜻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마음이 꽉 찬 상태입니다. 물에 물이 아닌 것이 섞이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완전함이라기보다 순전함을 의미합니다. 그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어떠했는지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뒤따라오는 자’, 혹은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자’라고 나옵니다. 여기서 완전함은 하나님의 마음을 다윗이 헤아려 그분이 원하시는 뜻대로 백성을 돌보고 이끌었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백성의 지도자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입니다.
모든 사람이 지도자일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마음의 순전함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지도자로서 사람들 앞에 나타날 때는 남다른 사람으로 드러나야 하지만, 그도 여러분과 똑같은 형제들 중 한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부르셔서 교회를 이끄는 지도자가 되게 하시고,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는 매우 특별한 자질을 필요로 하는데 그것이 마음의 순전함입니다. 다윗은 마음의 완전함과 순전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보고 이끌었습니다.
다윗의 섬김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커다란 은총의 표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신이 직접 이끌지 않고 다윗을 세워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가 마음의 완전함으로 백성들을 기르게 하셨습니다. 한 교회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의 마음이 지도자를 통하여 전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이 지도자를 통해 전달되고 이끌어지는 교회 생활이야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손의 능숙함으로 지도함
둘째로, 다윗은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도하였습니다. 손이라는 단어는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성경에서 손은 능력을 가리킵니다. 이사야 53장에서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나의 의로운 오른 손이 너를 붙들리라”고 할 때, 팔과 손 등은 힘이나 선택이나 능력을 가리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지도할 힘과 통치의 기술을 아울러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음의 순전함은 너무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가졌다면 그것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됩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그것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맡기신 뜻에 따라 백성들을 인도할 수 있는 실제적 능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해 마음의 완전함과 그러한 능숙함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도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최고의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다윗을 의지하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의 훌륭한 영도력 아래 있으면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야했습니다. 다윗도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동안에는 그분의 마음에 합한 지도자가 될 수 있지만, 그 마음을 저버릴 때 깊은 영적침체 속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다윗, 그리스도의 통치를 보여주는 예표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다윗의 치세가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서 오는 샬롬의 구조가 육적 이스라엘 왕국이 무너진 후 영적 이스라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보여주는 모본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왕국이 다윗의 아래에서 지도받았던 것처럼, 영적인 이스라엘의 시대에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지도를 받게 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편 78편의 장대한 서사시적인 노래는 여기에서 끝납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태평의 치세를 이룬 것은 하나님과 화목한 나라 안에는 그분의 사랑과 평화가 강물처럼 흐른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장차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중요한 소재가 되었습니다.
다윗의 시대는 끝나고 이스라엘 왕국은 하나의 밀알처럼 썩어 사라졌습니다. 그 실체인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하였고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이러한 완성에 이르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종자 씨로 택하셨습니다. 교회는 다윗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치할 때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바라보며 앞으로 이루어질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전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의 나라
하나님 나라의 본질적인 실체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랑의 나라입니다. 온전한 사랑의 질서가 하나님과 사람들을 향해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사랑의 질서가 왜곡되지 않고 가치의 순서에 따라 사랑의 질서가 정해집니다. 주님이 정해놓으신 교회와 왕국의 질서들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되 억압이나 강요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순수하고 꾸밈없는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는 나라입니다. 불완전한 세상에서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교회와 나라의 질서를 따라 사는 것은 우리가 미래에 완성될 영광스런 하나님 나라의 백성임을 입증합니다. 그곳에서는 모든 사람이 완전한 영화의 상태에 들어가 불순물 없는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것이기에 사람들도 그러한 마음으로 일치를 이룰 것입니다.
아직도 공중권세 잡은 자들이 세상의 죄악을 대부분 주관하고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이 그들을 괴멸시키셨지만 그들은 남아서 여전히 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죄가 부분적으로 잔존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며 하나님의 생명이 그 안에 흐른다는 점에서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아직까지 완전하고 순전하게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당신의 교회에 진리와 생명을 주시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자신을 꺾고 순종하며 살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사랑한 것처럼,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가장 먼저 교회 안에서 사랑을 배워야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네게 한 가지 소원이 있으면 말해보아라. 내가 그것을 이루어 주리라.”고 하실 때, 우리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사랑, 그것을 나에게 충만히 부어주셔서 당신을 따르게 해주십시오.”라고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구하는 모든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있을 때만 필요한 것입니다.
남편의 건강, 부모의 장수, 아이들의 형통함을 구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나면 모두 한 가족이 될 것이기 때문에 한계성과 한시성을 가진 그러한 기도는 영원한 기도제목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많은 것을 주신다 해도 모든 것 위에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지체로 살아갈 때 가장 먼저 배워야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랑을 배우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배워야할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따라 순종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하며 사는 자기복종의 삶이야말로 불완전한 세상의 질서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사는 유일한 길입니다.
결론과 적용
오늘날 우리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신앙 안에서 사랑을 배우기보다는 신앙의 이름으로 자신의 욕망을 확장하고 예수조차도 영달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을 겸손히 사랑하고 자신을 티끌같이 낮추기 보다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떠받들어지기를 좋아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순종의 삶은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순종에 관해 듣기는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자신 안의 질서들을 포기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어린 아이가 길거리에 주저앉아 먹던 것을 팽개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고집을 피우는 것처럼 하나님의 질서조차도 자기의 마음의 질서와 맞지 않으면 무시해버립니다. 그것을 어떻게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이바지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 앞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깊이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일평생 사랑을 배우고 자기복종을 배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구원하시고 목양하시며 마음의 완전함과 손의 능숙함으로 지도하시는 모든 것은, 이 땅에 영적인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하는데 우리로 하여금 티끌만큼이라도 이바지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편 78편을 마무리하며, 우리가 받는 도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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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78편 강해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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