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판단은 큰 바다와 일반이라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보호하시나이다”(시 36:5-6)
녹취자: 백지영
하나님이 자비로우신 분이시지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이 자비를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이 세상에 하나님을 안 믿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하고 어떤 사람은 그런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하지 못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종종 다른 사람을 향해서 자기의 뜻을 꺾기도 하고 자기를 또 포기하기도 합니다. 특별히 사랑이 이런 것을 시킵니다.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그 관계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내 고집을 버리고 내 뜻을 그 사람 앞에서 꺾습니다. 사랑하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이렇게 내 뜻을 꺾고 그 사랑의 성향을 계속 유지하면서 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싶을 때 우리들이 꺾게 되는 것입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자식 사랑입니다. 그래서 자식을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합니다. 결국은 부모가 무능하다는 얘기가 아니라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보다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훨씬 더 크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때로는 사랑이 없어도 어떤 큰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꺾일 때가 있는데, 그런 큰 힘을 가진 사람 앞에서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잘 꺾을 때 그것을 아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자기를 꺾인다고 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꺾이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꺾이는 것은 자기사랑을 포기하면서 꺾여야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꺾이는 것입니다. 부부가 같이 살면서 이렇게 자기를 꺾지 않으면 결국은 갈라서야 합니다. 갈라서든지 남남처럼 살든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인간들에게도 자기를 잘 꺾으면 사랑을 받습니다. 왜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 사랑이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질서 속에 들어올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주기 때문입니다. 소위 노무현 정부 있을 때 초기에 코딩한 사람이 그런 것 아닙니까? 누구든지 그런 위치에 있으면 그렇게 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흉내 내는 것이니,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고향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존재들이기 때문에 결국은 어떤 식으로든지 그 하나님을 흉내 내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극도로 대적하는 것조차도 사실은 하나님을 흉내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유일하심과 주권 그리고 그의 판단을 본뜨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어쨌든 오늘 시편에서 보면 시인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노래합니다. 이 인자하심을 모든 사람이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인자하신 분이시지만 그 인자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목적과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든지, 최소한 거꾸로 가던 길을 돌이켜서 참회하며 그 길로 돌아서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둘 중의 하나가 있어야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앙의 어려운 점은 자기 갈 길은 계속 가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은 자기는 자기의 길을 가면서도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싶다는 그런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자기 길대로 가고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싶다고 하는 것인데 결국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정신이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각자 자기 중심축을 가지고 제멋대로 달려가는 데, 이 사람이 달려가는 길이 저 사람이 달려가는 길하고 충돌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이 사람도 기뻐하고 저 사람도 기뻐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라고 하는 성품에 대한 이해가 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무한히 자비로우신 분이시지만 그러나 일단 당신의 목적과 그 뜻에서 이탈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그 자비와 사랑을 경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서 그렇게 공을 들였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삶에 대해서 철저히 성찰하면서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살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고민을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로부터 이탈하고 나면 아무리 삶의 형식이 그런 길을 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계속 참회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노래한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삶의 중심축이 자신에게 그냥 있고 자신의 길을 자기 멋대로 가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인간의 그런 아첨에 의해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시고 마시고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행히 그런 아첨에 속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인간이 그렇게 아첨을 해도 시간이 지나면 그 정체를 드러내게 되고 결국은 한계를 보이게 됩니다. 그때는 그 사람을 좋아했던 만큼 분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아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해가 아주 쉬울 것입니다. 비행기를 타면 고도 일만 미터 정도에서 비행을 하게 되는데, 거기는 산소도 희박합니다. 그리고 비행기가 날아갈 때 그 공중에서는 엄청난 바람이 붑니다. 대개 구름이 뜨는 것이 아주 높은 새털구름 같은 것들은 8km 정도 되는데 비행기는 10km 위에 있으니까 거기는 바람이 불어도 바람이 분다는 것이 감지가 안 됩니다. 그래서 누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전투기 같은 것들은 한 시간에 3200km씩 날아가기 때문에 부산까지 4분정도 걸린다고 하니, 거기 만약 목을 내 놓는다면 목이 댕강 부러진다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10km 꼭대기에서 엄청난 바람이 어떤 때는 초속 몇 십 미터의 바람이 불기도 합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비행기가 이리 오는 데 바람이 같은 방향으로 불면 한 시간 정도 일찍 도착합니다. 그리고 기름도 엄청 절약이 됩니다. 배를 타보면, 돛단배가 아니고 발동 걸어서 가는 배인데 바람이 같은 방향으로 불어주면 덕적도에서 인천까지 오는데 30분 정도가 절약됩니다. 그런데 만약에 거기에다가 돛을 달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큰 돛을 달고 거기에 바람을 가득 품고 맞으면서 어느 한 쪽으로 항해를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거스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람이 부는 것과 똑같은 방향으로 배의 위치를 잡으면 굉장히 빠르게 달려갈 것이고, 만약에 뱃머리를 돌려서 바람을 거스른다고 할 것 같으면 배는 끊임없이 바람의 저항에 부딪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사실은 여기 나오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의 구성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성실하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일관되고 그리고 자신의 열과 성을 다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그러한 성실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서는 그 사람과 관련해서 미리 일어날 일들을 예측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한 사람이 신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실한 사람이라고 해서 항상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신실하다는 것은 변덕스럽지 않고 일관되기 때문에 이럴 때는 이 사람이 화가 날 것이고, 이렇게 하면 이 사람이 기뻐할 것이라고 하는 것을 예측할 수 있는 이것이 바로 신실함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신 이유는 그렇게 같은 방향으로 계속 당신 자신의 성품을 발산하기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또한 소망이 되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따라서 주님이 내리는 판단은 오늘 바다와 같다고 하였는데, 당시 바다는 사람들에게 끝이 없는 것으로 비치는 것입니다. 신비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과 함께 이 바다는 고대의 사람들에게 끝이 없이 신비한 것으로 여겨진 것입니다. 바로 그런 신비함, 그것으로서 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판단은 바다와 같다. 무한하다. 많은 하나님의 지혜가 감추어져 있다. 그래서 결국 그 하나님의 크신 사랑, 놀라운 뜻들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믿음으로 그 판단을 받아들이고 사는 것이다.” 라는 고백을 우리들이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인생을 사는 지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꺾으려고 하지 말고 자신이 끊임없이 그 중심축을 포기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그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일생 전체가 참회의 과정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그 참회 속에서 끊임없이 유일하신 그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를 힘입으면서 사는 길입니다. 그래서 고대의 교부 가운데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라는 사람은 “나는 이 땅에 참회하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통찰입니까?
끊임없이 참회함, 오늘날은 그 기독교의 참된 정수들이 무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 중심의 신앙을 가지려고 하고 그리고 내가 무슨 짓을 하든지 후원해 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미친 짓입니다. 절대로 그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혹시 만약에 어떤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건 정말 우연한 것이고, 말하자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지 참된 신앙의 근거들을 그 안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는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버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는 아주 불가해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정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그 하나님의 자비, 인자, 이런 것들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결국 자기를 끊임없이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그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그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죄인들이 아무리 자주 죄를 짓고 멀리 떠나도 다시 참회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경험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