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자를 건지시는 하나님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요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하리로다"(시 35:9-10).
하나님께 대한 찬송은 그냥 부르는 노래라기보다는 우리 영혼 안에 일어난 활기찬 움직임을 하나님 앞에서 드러내는 것입니다. 찬송은 영혼과 마음의 움직임을 통해 부르는 노래입니다. 만약에 마음 안에서 어떤 움직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면 그것이 아주 놀라운 찬양을 불러일으키는 도구가 될 것이고, 만약에 그렇지 않은데 찬송을 하려고 한다면, 어려움이 생길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일까요? 영혼과 마음의 움직임은 없는데 노래를 불러야하는 어려움이 생깁니다. 어떤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다가 보면 그 마음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영혼과 마음의 움직임이 일어나지 않을까요?"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렇게 마음 안에서 어떤 움직임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 안에서 어떤 움직임이 찬송을 통해서도 일어날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것입니다. 찬송을 부르다가 보니까 찬송할 이유가 생겨날 수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마음 안에서 이미 찬송할 수 있는 이유가 생겨나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것이 찬송의 참다운 정신입니다. 오늘 시인을 보면 그런 커다란 인생의 위기를 만났는데 거기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건져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내 영혼이 기뻐하며 내 영혼이 구원을 즐거워함이로다. 영혼의 기쁨이 있으니까 거기에서 찬양이 솟아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승리, 놀라운 능력, 은혜. 이런 것을 경험하고 나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찬양, 감격, 감사. 이런 것들이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감격의 원인이 구원이라고 한다면, 그런 것의 정체는 무엇이냐. 두 가지 말로 요약될 수 있는데 능력과 자비입니다. 뒷 편에 보면 내 뼈들이 소리를 쳐서 증거한다. 뼈들이 말한다. 혹은 뼈들이 소리쳐서 증거한다 라는 이야기는 자기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외침을 가르칩니다. 뼈가 바로 인간의 마음과 심령에 깊은 자리를 가리키는 하나의 비유로 은유로 사용 됩니다. 그래서 뼈가 아프도록, 뼈아프게 사랑한다. 뼈가 아픈 고통이다. 뼈를 깍는 노력이다. 뼛 살에 의해서 우러나오는 고백이다. 이런 표현들이 사용하는 것이 결국은 골수를 보호하고 있는 뼈를 가르킵니다. 그래서 그 뼈들이 말한다, 증거한다. 무엇을 말하냐하면, 첫째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자신이 힘도 없고 권세도 없고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 만한 완력도 없는데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주셨고 건져주셨다 라고 하는 그 능력. 이것에 대한 찬송. 이것에 대한 찬양입니다. 두 번째는 그렇게 하나님께서 큰 능력을 아무에게나 행사하신 것이 아니라, 그렇게 크고 놀라운 능력을 당신이 특별히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자비가 됩니다. 그 능력으로 나를 건지시고, 나를 보호하시고, 나를 미워하고 내 생명을 찾는 원수들을 징벌하셨으니까 그 놀라운 능력 그것이 나에게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됩니다. 아무리 긍휼히 여기고 사랑해도 만약에 능력이 없다면 그 사랑과 자비는 열매를 맺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능력이고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자비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랑과 자비, 놀라운 능력. 이런 것들은 바로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능력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긍휼을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푸실 수 있고 자비를 베푸실 수 있는 것입니다. 악한 자를 징벌하는 일 없이는 선한 자를 보호할 수 없고 또 선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는 일이 없이는 악한 자를 징벌할 수 없겠죠. 그러니까 이 자비와 능력은 함께 쌍을 이룹니다. 시인이 바로 그 두 가지를 하나님 앞에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도 인생을 살아갈 때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를 힘입고 싶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런 능력과 자비를 힘입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선을 행하고 자비를 베푸시는 것과 같은 방향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합니다. 그래야지만 이런 자비와 능력, 선, 은총을 입을 수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복을 받길 원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가야합니다. 자신이 걸어가는 길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이 아니라면 그가 비는 복은 응답될 수 없겠죠. 그가 가는 길이 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이 아니라면 복을 비는 그의 기도는 의미가 없고, 정말 자신이 가는 길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이라면 하나님께서 그의 길에 복을 내리실 것입니다. 가는 삶의 방향과 비는 기도의 방향이 일치할 때, 이 때 하나님께서는 더 큰 복을 자기 백성들에게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삶을 보면 가는 자신의 길을 고치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복만 받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 인생에는 어려움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인이 하나님을 나의 구원 나의 빛이라고 부를 수 있을 때까지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맞추며 하나님 자신이 이 시인에게 기쁨이 되시기까지는 또한 이 시인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일들이 있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자기를 기뻐하는 자들에게 하나님도 당신의 기쁨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높은 덕을 하나님께 대한 초월적인 사랑에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아니고서는 이 둘을 완전하게 합치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