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을 세우는 원리
녹취자: 이경순
가족관계 회복시리즈 세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가정을 세우는 원리를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유교적인 관점으로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천륜’이라고 합니다. ‘하늘이 맺어주신 인연이다.’ 그리고 아들딸을 시집장가 보내는 것은 ‘인륜의 대사’라고 말합니다. 즉, ‘인간사에 이루어지는 일 가운데 가장 큰일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인륜이라고도 합니다. 이와 달리 기독교적인 관점은 다릅니다.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가정의 기본적인 단위를 남편과 아내라고 보며, 가장 중요한 관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의 기본적인 제도는 부모와 자녀들로 세워집니다. 이렇듯 유교와 기독교의 관점은 다릅니다.
기본적으로 가정은 사랑으로 세워집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신체의 일부를 취하여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에게 데리고 오셨을 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고 아담이 하와에게 고백합니다. 이 고백의 표현은 히브리 문학에서 최고의 사랑을 표현할 때 쓰입니다. 또한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할 것을 보여줍니다. 이 고백을 길게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신 것과 같습니다. 그 계명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입니다. 이 계명의 가장 중요한 원리는 ‘네 자신’은 ‘네 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담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는 고백 속에 부부사이 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가 이런 사랑으로 하나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가정다운 가정을 세우기 위해서 사랑이 제일 필요합니다. 그 사랑은 인격적인 사랑입니다. ‘인격적’이란, 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귀하고 가치 있는 사람으로 인정하면서 서로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격적인 사랑은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인격체로 서로가 서로를 인정해주는 관계에서 옵니다. 그런 관계에서 오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화면을 보면 연애하는 한 쌍이 나옵니다. 남자가 무릎을 꿇고 꽃을 줍니다. 여자는 웃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이 연애라고 한다면, 결혼은 연애와는 달라서 꽃밭을 가꾸는 것과 같습니다. 꽃다발은 불과 3일이면 시들어버리지만 꽃밭은 아름다운 꽃이 새롭게 피어납니다. 그래서 꽃밭을 만들어놓고 2주 동안 손을 안보면 잡초가 자라고 엉망이 됩니다. 꽃밭에 물을 주고 비료를 주며 가꾸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결혼은 꽃밭을 가꾸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항상 결혼에는 책임이 따르고 노동이 따라옵니다. 남녀가 서로 사랑 안에서 결합을 합니다. 결합을 하면서 소명을 가지게 됩니다. 남자는 ‘여자와 함께 일생을 살아갈 소명’이고, 여자는 ‘남자와 함께 일생을 살아갈 소명’입니다. 그런 소명을 따라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맨 처음에 남녀가 결합할 때, 서로 아름답고 좋은 것을 보고 결합을 하지만 결합 후에는 함께 생활하는 현실에 접하면서 그가 가지고 있는 모습을 공정하게 보게 봅니다. 그때 우리는 상대방의 단점과 결점까지 보게 됩니다. 당연히 상대방의 결점과 단점은 자기가 일평생 지고 살아가야할 무거운 짐이 됩니다. 그래서 그 짐을 덜어보려고 “바꿔! 바꾸라고. 고쳐! 나는 못 참겠어! 당신 왜 그러는 거야?”라고 소리치며 다툽니다. 그렇게 해서 고쳐지는 것도 있겠지만, 대부분 그렇게 해서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될 때 잘못하면 고치지도 못하고 관계만 파괴됩니다. 그래서 부부가 결합하면 소명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여자를 데리고 내가 일평생 살아야 되겠구나.’ ‘이 남자를 데리고 내가 일평생을 살아야 되겠구나.’ 이러한 소명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교회 어느 전도사 한분의 이야기입니다. 그 전도사님은 집안도 좋고, 공부도 잘했고, 똑똑합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는 얼굴도 빠지지 않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연애를 썩 못했던 모양입니다. 어느 날 노총각이었던 그가 자랑을 하며 연락이 왔습니다. “목사님. 저 드디어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잘되었다.” 나중에 직원들을 통해 사진을 봤는데 자매도 예뻤습니다. 정말 잘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결혼식 날짜가 잡혔습니다. 그래서 제가 결혼하기 며칠 전에 그 전도사님을 불렀습니다. “아무개야. 좋지?” “아유. 좋지요.” “남의 결혼식에 초치는 것 같은데, 내 이야기 잘 들어라. 연애한지 얼마 되어서 결혼하니까 넌 마냥 좋겠지만 한참 살다가 보면 숨이 턱 막히면서 ‘아. 이 여자하고 내가 일평생 살아야 되는구나.’ 하고 앞이 캄캄해지는 순간이 온단다. 그 때에는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여라. 결혼은 순간의 즐거움이 아니라 일생을 소명으로 여기며 살아가야 된다.” 조언해줬습니다. “왜 그러세요? 난 지금 좋은데요.” 대답하며 의아해했습니다. 결혼 후, 일주일 휴가를 받아서 신혼여행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제게 찾아와서 “목사님. 목사님이 얘기한 앞이 캄캄하고 가슴이 답답해지는 순간이 전 좀 빨리 온 것 같아요.” “왜?” 했더니 신혼여행지에 가서 이틀째 되는 날 자매가 무슨 이유때문인지 폭발한 것입니다. 그런데 폭발하는 기운이 이 형제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기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가슴이 답답하고 앞이 캄캄해지면서 ‘어떻게 이여자하고 살아야 되나?’ 그랬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한 6개월이나 1년 살아보고 느끼는데, 너는 이틀 만에 느꼈으니까 하나님이 널 참 사랑하시나보다, 진작 깨닫고 확실한 길을 가게하시나보다.”라고 위로해줬습니다.
이게 부부의 관계입니다. 순간의 즐거움을 찾아서 결혼한다면 바보 같은 짓입니다. 결혼하면 소명을 느껴야합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자기만 사랑하고 살았던 사람이고 어떤 사람을 일평생 해야 할 사랑과는 다릅니다. 친구들을 만나서 사랑해주고 잘 해주지만 떠날 수도 있고 내가 버릴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부모도 그렇습니다. 부모를 끝까지 사랑해야하지만 도저히 맘이 안 맞으면 내가 방을 얻어서 나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혼은 그게 쉽지 않습니다. 한사람과 살아보면서 자기가 얼마나 불완전한 인간지 깨닫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나는 도저히 몰랐던 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것을 우리가 자기완성의 기회라고 부릅니다.
‘샌드페이퍼’로 어떤 금속이나 돌멩이로 물질들을 갑니다. 색깔은 초록색인데 긁으면 가루가 초록 가루가 아니라 하얀 가루가 떨어집니다. 또 어떤 때는 분명히 까만 돌인 데 긁으면 푸른 가루가 떨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처럼 혼자 살 때에는 자기가 제법 굉장히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떤 센 사람과 만나서 부딪히면서 살아보니 자기는 혼자서 발견한 적이 없었던 자신의 진면목을 발견합니다. 이것은 자기를 완성해 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닌 사랑의 관계가 되어야 됩니다.
우선 사랑과 함께 또 강조되어야 할 것은 환경입니다. 어떤 환경이냐면 이것입니다. 최근에 상담을 하나 받았는데 우리 교회 교인이 아닙니다. 그분의 경우에는 목회자입니다. 요즘은 어떻게 된 일인지 자식들은 서로 어떠하든지 화합하고 살려고 하는데 부모가 발 벗고 나서서 이혼하게 하는 가정이 의외로 많습니다. 대개 그런 가정의 부모님은 본인이 결혼생활에 별로 기대가 없었던 부모님입니다. 이런 부모는 그렇게 갈등을 하고 고통을 받으면서 가정생활을 하지 말고, 때려 치고 너 혼자 편안하게 살아라. 이런 주의입니다. 어떻게 보면 자식의 행복을 바라는 갈망이 잘못된 방향으로 표출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막기 위해서는 성경의 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화면을 보면, 부모가 있습니다. 자식이 있습니다. 때가 되면 자식을 놓아주어야 됩니다. 그래서 이 아이가 떨어져 나와야 합니다. 부모로부터 독립을 합니다.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룰지니” 라고 했는데 ‘떠난다’는 히브리말로 ‘아자브’라는 단어입니다. ‘버리다’라는 뜻입니다. 때가 되면 이 아이가 떨어져 나와서 독립합니다. 독립은 부모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부모님에게 속했던 아이가 자라서 새로운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독립해야 아내와 결합을 이루게 됩니다. ‘결합’은 육체의 결합과 정신의 결합도 포함하여 일컫습니다.
이로써 한 사람이 주체로서 독립하게 되고 부부결합을 보호하게 됩니다. 어느 가정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남편이 그렇게 수입이 많지 않은데 아내가 아이에 대한 교육열이 뛰어나서 겨우 사립학교에 입학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찾아와서 한바탕한 것입니다. 핵심은 ‘내 아들이 얼마나 뼈 빠지게 번 돈인데 너는 그 돈을 가지고 돈도 안 벌어오면서 왜 애를 사립학교에 보내느냐’였습니다. 어떤 원리에 어긋나는 것입니까? 부모로부터 자식의 독립 원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정반대로 생각해봅시다. 시어머니가 봉투를 하나 들고 갑니다. ‘우리 집 가정형편도 넉넉지 않지만 우리 손주를 사립학교를 보내서 교육을 잘 받게 하겠다는 며느리의 마음은 얼마나 소중하니?’ 그리고 ‘얘야. 네가 우리집안에 시집와서 고생이 많은데 우리 손자를 좋은 교육을 시키려고 어려운 형편에 애 쓰는 것을 보니까 정말 고맙다. 그리고 이거 얼마 안 되지만 보태서 써라.’라고 말하면서 돈을 주면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얼마나 존경하겠습니까? 아들을 장가보냈지만 며느리도 별로고 그 밑에 태어난 손주도 별로 여기면서 아직 자식을 자기 마음속에서 못 놓아주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안쓰러운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는 진정한 가정이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실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속상하면 바로 보따리 싸서 친정엄마한테 가버립니다. 이런 행동들은 이미 정신적으로 결혼생활에서 실패한 것과 같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부모를 떠나서 남자와 연합해서 한 가정을 이루기에는 아직 사회적으로 미성숙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혼하면 안 됩니다. 좀 사람이 된 다음에 결혼해야 하는데 물론 나이가 많아서 누가 데려갈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정신적으로 유아기에 있는 사람과 결혼하면 사는 것이 고달파집니다. 왜냐하면 한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서 살기도 힘든데 사회적으로 성숙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사회적으로 성숙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인간하고 살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한 인간으로서 성숙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다음으로, 남자가 부모를 떠납니다. 부모를 떠나서 여자와 합해서 한 몸을 이루었습니다. 여기서 자식을 낳습니다. 아이가 하나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를 가고 중고등학교를 가고 자라서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노인이 됩니다. 이 부부가 삶의 모든 상황을 거치면서 온갖 삶의 풍파들을 만나면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인생은 때로는 기쁜 때, 슬픈 때, 가슴 아픈 때, 이런 삶의 구비를 파도를 넘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때 이 부부가 하나님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면서 살아가면 하나님이 끊임없이 인생의 다양한 시련의 시기들과 다양한 삶의 사태를 겪으면서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을 주십니다.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에게 ‘인생은 이렇게 사는 것이다.’ 가르쳐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참 인간이 되는 교육을 받은 사람은 결혼했을 때 최고의 아내, 그리고 가장 좋은 남편이 됩니다. 그런데 그런 고민이 전혀 없이 살아온 사람들은 인생의 무겁고 쓰라린 힘든 시기들을 지나면서 하나씩 하나씩 깨달아가니까 그와 함께 같은 배를 탄 남편이나 아내는 더불어 고생을 합니다. 더군다나 두 사람이 다 그런 사람일 경우에는 보통 힘든 게 아닙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자녀가 사람이 되어갑니다. 부모로부터 인생을 사는 지혜와 사랑을 배우면서 사람이 되어가고 사람의 도리를 행해가는 것입니다.
아내와 남편이 있습니다. 아내와 남편이 연합합니다. 연합의 두 핵심은 ‘육체적인 연합’, ‘영적인 연합’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이라는 존재자체가 무엇과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르쳐 드렸습니까?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내와 남편의 결합은 육체의 결합인 동시에 영혼의 결합입니다. 그러면 육체적인 결합과 영적인 연합을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요? 육체적인 결합은 결혼생활에 있어서 남편과 아내가 한 공간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쩔 수 없는 경우 있습니다. 남편이 갑자기 발령 나서 한사람은 세종 시로 가고 한 사람은 서울에 남고 그래서 한 1년 참다가 직장을 옮겨서 살게 되었고 등 그런 예외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장소적으로 함께 있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결혼생활에 있어서 좋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남편과 아내를 결합시켜서 살게 하실 때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게 하셨는데 그 관계는 장소적으로 한 공간속에 있어야 합니다. 만약 부부가 공간적으로 떨어져야 하는 이유가 어떤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을 때는 위험합니다.
언젠가 제가 외국에 갔는데 누군가 나를 안다고 인사를 합니다. 저는 직접 만난 적이 없지만 누구냐고 물으면서 반가워했습니다. 그 사람이 외국에 있는 이유는 아이들을 공부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남편은 서울에서 직장 다니고 돈을 벌어준다고 합니다. 그게 3-4개월이 아니라 3-4년이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게 정상적인 부부의 결합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우선순위가 잘못되었습니다. 자녀를 외국에서 교육시키고 싶으면 부부가 기도를 많이 하고 결단해서 함께 이민을 가던지 무엇인가 다른 방도를 취해야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기러기 아빠가 생긴 것입니다. 어떻게 됩니까? 자녀를 교육하기 위해 아내가 남편과 떨어져서 살다 보면 정신적인 연합까지 다 끊어집니다. 또, 어느 날 남편이 자기 아이가 외국 사람을 아빠라고 부르는 광경을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우연히 보게 되었다는 황당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가정의 원리에 어긋나는 일들입니다.
두 번째는 ‘성적인 결합’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연합’은 ‘정신적인 결합’과 ‘정서적인 결합’입니다. ‘정신적인 연합’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 정신적으로 하나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일정시간 지나면 보고 싶어야 하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관계는 정상적인 결혼이 아닙니다. 또한, 정서를 느낄 수가 있어야 합니다. 의무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따뜻하게 서로를 사랑하고 돌볼 수 있는 이런 결합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배운 내용을 다섯 가지로 요약을 하면 첫째, 부부관계는 인격적인 사랑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지난시간에 배운 것처럼 누가 누구를 지배하고 억누르는 관계가 아닌, 서로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존귀한 사람으로 보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관계여야 합니다. 둘째, 부부사랑을 함께 가꾸어 가야 합니다. 특히 여성들은 결혼을 하고 여전히 연애시절에 꽃다발만을 받던 환상을 가지고 결혼생활 속으로 들어가면 안 됩니다. ‘이제 꽃다발을 받던 시대는 끝났고 꽃밭을 가꾸는 시기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부부가 함께 노력하고 지불해야할 책임과 의무를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연합해야 합니다. 부모가 이상한 성격이어서 끊임없이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방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실화입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머니가 외아들을 천신만고 끝에 혼자 키웠습니다. 결혼을 안 시킬 수는 없어서 결혼은 시켰지만 마음속에서 여전히 내 아들이 아니라 내 새끼입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아들집에 놀러오면 아들하고 같이 자고 며느리는 건너 방으로 건너가서 자고, 또는 셋이서 잘 때도 있습니다. 부부 가운데 부모가 자고 이런 이야기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들은 어떻게든 살려고 하는데 어머니가 나서서 ‘야. 네가 차라리 독신으로 사는 게 편하다. 너 나하고 살자.’ 하며 아들을 괴롭힙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상황에는 어떻게 하던지 어머니의 영향력을 축소해야 하고 도저히 불가능하다면 어머니하고 의절하고라도 가정을 지켜야 합니다. 어머니 마음에 상처를 주더라도 가정을 지켜야 됩니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넷째, 부부의 연합을 유지해야 합니다. 육체적으로 유지해야합니다. 한 공간 안에 같이 있도록 하고, 성적인 결합을 굳게 하고, 그런 것들에 대해서도 솔직한 대화가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영혼의 연합입니다. 마지막에 정신적인 결합이고 정서적인 결합입니다. 가정을 세우는 원리는 사랑, 독립, 연합입니다. 이러한 세 가지로 가정이 세워져 가는 것이니 여러분들이 이런 원리 안에서 좋은 가정을 세워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질의 응답
(질문1) 선교의 의미로 불신자와 결혼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리는 것도 중요한 것이 아닌지 궁금합니다.
초신자로서는 충분히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선 현실적으로 보면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데 불신자와 결혼을 합니다. 그러면 자기가 불신자를 감화시켜서 예수 믿게 할 수 있을지 혹은 하나님 없다는 그 사람의 생각에 자기가 세뇌되고 신앙을 버리게 될지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오히려 사소한 이유입니다. 더 큰 이유는 결혼에 대한 성경의 생각입니다. 성경의 생각은 남편과 아내가 결혼을 하는 것이 영적인 결합이라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결혼은 이미 구원 받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 결혼을 하는 것입니다. 즉 한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와 결합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예수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고 이 안에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그리스도와 연합되어서 영적인 생명을 누리는 한 사람이 또 다른 사람과 결합하는 것이 결혼이라고 보는 것이 성경의 관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신자와의 결혼은 성경이 원칙적으로 인정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도 보면 불신자 상태에서 그 사람과 결혼을 했는데 결과적으로 좋게 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좋게 된 사람들은 우리 곁에 남아 있으니까 확인이 되지만 안 좋게 된 사람들은 우리 곁을 떠났기 때문에 확인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불신자하고 결혼하게 되었을 때에는 조금 기다려야 됩니다. 그 사람을 교회에 나오게 해서 예수를 믿고 최소한 학습을 받게 한 후 결혼을 해야 됩니다. 가끔 목사에게 주례가 들어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불신자입니다. 그리고 저쪽에서도 기독교식 결혼을 원하지 않습니다. 결혼이 어째든 양쪽 가정이 싸우면서 시작할 수는 없으니까 와서 목사님 우리가 결혼을 하는데 기독교식 말고 일반주례로 주례를 서 주실 수가 없습니까? 그러는데 그것은 교회법에서 금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는 그런 결혼의 주례를 설수 없습니다. 실제로 제가 아는 한 노회에서는 목사가 교회법을 어기고 그렇게 주례를 섰기 때문에 목사 지위 자체를 면직시켜버린 사례가 있습니다. 그것은 목사로서 아주 중대한 과실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을 고백하게 하고 결혼해야 한다. 그렇게 얘기 하고 싶습니다.
(질문2) 남편은 성실하게 직장생활을 했고 신앙생활은 안하고 있다가 다시 남편은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아내는 아직까지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 직장 다니다가 외도하는 상황입니다. 심증은 편지로는 그게 나왔는데 물증은 잡지 못한 가운데지만 남편은 엄청난 충격에 의해서 지금 별거를 하고 심지어 이혼까지 했는데 여자는 이혼을 했지만 같이 살 생각을 계속 하는 것입니다. 남편 되는 사람은 살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주위에 자녀로 인해서 주위사람들은 합치라고 계속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내도 같이 살았으면 하고 계속 연락을 합니다. 이런 가운데 지금 용서를 해야 되는지 같이 살아야 되는지?
우선 성경의 가르침으로 돌아가 보면 부부 증 한 사람이 외도를 했을 경우에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은 그 결혼관계를 끊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살기 싫으면 쉽게 이야기하면 결혼생활이라는 것이 그냥 사는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 결합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할 수가 없는 것 입니다. 그러면 그 남자 쪽에서 보면 성경적으로 이혼할 권리가 있고 그담에 이혼한 상태에서 다시 합치지 않을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우선 그렇게 첫 번째 정리를 하고 두 번째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여자는 아내의 입장으로 보면 잠시 자기가 실수로 외도를 했지만 꼭 육체적인 외도가 아니라 정신적인 외도도 외도입니다. 이미 그것은 우리나라 법원에서도 이혼사유로 충분히 해당된다고 봅니다.
함께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어도 그런 인정이 한국 법원에서 굉장히 폭넓어 져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 하자면 자기야 사랑해 이정도 하나만도 이혼사유가 됩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부부 중 한사람이 외도를 했을 때 한쪽은 아주 분명하게 이혼할 권리가 있다 그리고 이혼을 한 것 때문에 그는 누구도 그를 비난할 수 없고 하나님도 그를 비난 하지 않으신다. 두 번째 그렇지만 더 좋은 것은 용서하고 사는 것이다. 거기에는 기준이 있는데 명백하게 돌이켜 서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하고 또 하나는 그렇게 했을 때 다시 남편이나 아내와 결합의 관계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될 때에는 누구도 그것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제가 직장 다닐 때 성경공부 모임을 인도했습니다. 여성의 집안이 굉장히 부유하고 아버지가 굉장히 높은 지위에 있었고 남편은 별 볼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둘이서 죽도록 사랑을 한 것입니다. 결혼을 했는데 그리고 나서 남편이 지방 발령이 난겁니다 문제가 거기에 가서 장기가간 외도를 한 것입니다. 그것이 주위의 사람들에게 발각이 되어서 그 때는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될 때가 아니니까 그 남자를 진심으로 염려하는 마음으로 충고를 해주기를 네 부인한테 가서 진심으로 고백을 하고 그리고 이 관계를 정리해라 그렇게 해줘서 아내에게 용서를 빈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내는 임신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이 아내가 자기가 내려가서 그 자매를 다 설득하고 해서 남편을 가정으로 돌아오게 하고 두 사람 사이를 진짜 내가 그 스토리를 들어보면 너무너무 지혜롭게 그때 그 사람 예수 믿는 때도 아니었는데 어디서 그런 사랑이 나왔는지 한 없이 그 아이가 불쌍하게 느껴지면서 그 사이를 떼어 낸 것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난 것입니다. 폭풍이 지나고 나니까 한 숨 돌린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 이 남자의 정체가 뭔가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서 이 결혼생활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남자는 이제 폭풍이 지나가고 감정정리가 다 되고 진심으로 잘 해주려고 하는데 이 여자는 이제 생각이 나면서 다시 이것들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입니다. 어쨌든지 간에 그 자매를 얽어매는 것입니다. 그게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해결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기는 남편에게 실망을 느끼지 않았더라면 예수를 믿어야 될 이유가 없는 사람이랍니다. 살면서 요만한 불평과 불만도 없이 충분한 자존감속에서 일생을 살아온 것입니다. 외모도 아주 아름다우시고 그런데 나중에 아주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그것은 주위에서 그렇게 강요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강요를 해서 그 남자가 결합을 한 다음에 반드시 좋은 결과가 올 것인가에 대해서는 저는 좀 그렇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의 인생도 중요하지만 그 남자의 인생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방법은 진심으로 용서하고 그리고 다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사람으로선 하기 어려운 사랑이지만 주님은 그 이상의 사랑을 하셨으니까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야 된다. 그것이 오늘의 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