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기뻐하는 자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 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시 32:11).
앞에서 고난에 관해서 노래하던 시인이 여기에서는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 하나님을 즐거워하라 이렇게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 그 시의 앞부분을 여러분 기억하시죠? 내가 죄가 있는데 그걸 하나님앞에 고백하고 토설하지 않을 때에는 그것이 내 뼈까지 삭히면서 그렇게 큰 고통을 주었는데 그것을 고백을 하고 나니까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고 그리고 그 많은 시련과 고난속에서 건져주시고 하나님께 피할때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피할 수 있도록 보호해주시고 그랬던 사연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그 하나님을 기뻐하는 이 의인의 정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그 의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물론 의인은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따라 행하면서 올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인이죠. 그러나 이 시 전체의 문맥으로 볼 때에 여기 이 의인은 허물의 사함을 입고 그 죄를 가리움을 입은 사람 이예요. 토설치 아니하고 그것을 부여잡고 있을 때에는 악인이었지만, 그것을 하나님 앞에 모두 토하고 하나님의 용서로 인하여 허물의 사함을 받은 사람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 앞에 의인이다. 이런 이야기죠. 그래서 마루틴 루터 같은 종교 개혁자는 이 의인의 개념은 하나님의 의를 덧입은 사람이다 31편 우리의 시 바로 앞에 보면은 ‘그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의를 덧입은 사람, 그 의를 덧입은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고 그 여호와의 의로 하나님이 구해주신 그 사람이 바로 의인이다’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추호의 흔들림이 없이 하나님 앞에 옳게만 살아온 사람이 의인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그리고 그 죄에서 깊이 놓임을 받았던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롭고 올바른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신앙의 삶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시인이 오늘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 의인들 보고 하는 말이 ‘여호와를 기뻐하라 히브리 성경에서는 이 여호와를 기뻐하라’ 라고 하는 말을 여러 곳에서 ‘여호와속으로 기뻐하라’ 이렇게 나와요.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속으로 기뻐하라’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그 신자는 거기에서 그 큰 행복을 느끼고 그 속에서 무한한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는 일들이 거기에서 일어나게 되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자신의 경험을 고백하고 있는 거예요. 자, 그러면 여기에서 두 가지 아주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죠. 의인이 아니면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을 자가 없고, 의인이면 하나님을 기뻐해야 되는데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거예요. 성경을 읽으면서 항상 중요한 것은 그저 이렇게 맥없이 성경을 읽어 가면 우리 영혼에 그렇게 큰 도움이 안됩니다. 마치 여름에 자두도 있고, 천도 복숭아도 있고, 요즘은 아오리 사과도 나오고, 포도도 나오고, 바나나도 나오고, 많은 것들이 나오지만 그걸 껍질을 깍지 않고 여러분들이 쭉쭉 빨아 먹으면 수 없는 과일을 빨아먹어도 그게 자신에게는 양분이 되지 않아요, 그죠? 그걸 깨물어서 껍질을 벗겨서 그것을 깨물을 때, 요즘 좋아하는 그 수밀이 많은 복숭아 과육이 씹히면서 복숭아의 참맛을 느끼죠. 자두도 마찬가지고, 사과도 마찬가지고,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않고 물에 깨끗을 씻어서 빨아 먹는 다면, 그 빨란 사과나 빨갛게 익은 자두나 그 허드러지게 익은 수밀도 복숭아나 틀릴 게 머가 있겠습니까? 다 맛이 없긴 마친가지죠.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영혼이 금방 병들고, 그리고 영양실조에 걸리게 되는 거죠. 그래서 깊이 그 속으로 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들어가 봅시다.
자, 그럼 여기서 우리들이 의인어어야 하지만,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는 의인이어야 하는 데 그럼 여기서 기뻐하는 의인의 정체가 머냐, 의인의 정체가 머냐, 우선 첫째는 그 허물의 사함을 입은 사람들이예요. 그 허물의 사함을 입은 사람 그래서 예전에는 올바르게 살지 못했지만은 자신이 그렇게 살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서 깊이 참회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데 그 의의 기초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죄값을 지불하신 예수그리스도야 그 예수 그리스도계서 율법대로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대신 죽으신 것에 기초해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은 바로 우리의 의를 우리의 불의를 제거하고 거기에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혀 주시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그릇행하다가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놀라운 감격이 있어요. 우리 예수에 대한 아주 놀라운 신앙의 감격이 있어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아주 놀라운 신앙의 감격이 있어요. 그 놀라운 신앙의 감격이 아주 놀라운 신앙의 감격이 있어요. 그게 의인 이예요. 만약에 그 의인이 하나님이 율법을 그대로 지키면서 어긋남이 없이 살아온 사람이어야 한다면, 그러면 한번 미끄러진 사람들은 다시 여호와를 기뻐할 수 있는 희망이 없겠죠? 그렇죠?
근데 그게 아니라 이렇게 참다운 의인은 참회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의를 다시 덧입은 사람들이다 이러 얘기예요. 그러니까 누구든지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참된 기쁨이 없었던 그 사람이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속으로 들어가게 될 때 그 안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기쁨과 행복을 발견하게 되요. 그게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이고 믿음 생활이 거죠. 그럼 또 의인은 누구냐 그렇게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게 될지라도 삶의 공을 들이지 않으면 금방 더러운 자가되죠. 그러면 하나님을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신자가 만약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서 돌이켜 주셔서 다시 하나님을 기뻐할수 있는 의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으면 그 다음에는 자신의 삶에 공을 들여야 되요. 자신의 삶에, 여기에서 이 삶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이나 영혼의 상태와는 상관이 없는 단순한 행동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예요. 인간의 본성과 삶은 샘에서 흘러나오는 물과 같은 거예요. 같은 질의 것이 흘러나오는 거죠. 같은 질의 것이 흘러나오는 거, 그게 바로 우리의 인생이예요. 우리의 믿음 생활이예요. 그게 우리의 삶이예요. 그러니까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죄를 참회하고 하나님 앞에 다시 돌아왔을 때에 하나님이 새롭게 해주신 그 본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과 동시에 또 하나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그 주신 그 마음과 내면의 세계를 은혜로 유지하면서 삶의 모든 방면에 있어서 자신의 죄를 모두 용서해 주시고 다시 불러주실 때에 하나님 앞에 바쳤던 그 온전한 순종을 계속 하면서 살아야 되는 거죠. 그게 삶의 공을 들이는 거예요. 그러am로 말미암아 그 사람이 죄의 용서를 통해 의인이 되었으나, 또한 이러한 삶을 통해서 의인이 되어가는 거예요. 이미 되었으나 또 의인이 되어가는 거예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배에 나오지만 그 예배 속에서 깊은 하나님과의 만남의 감격을 느끼는 사람들은 지극히 소수예요. 그게 왜 그러죠?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들은 의인들인데 그게 되는 방법은 둘 이예요. 깊은 참회를 통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자신의 삶에 공을 들여야 되요. 근데 싫어요. 왜냐하면 그것은 마음으로 하는 건데 마음이 그렇게 하나님께 붙어있질 않아요. 그러면 여기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모든 것이 다 공허하게 들리는 것이예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세요? 사람은.. 사람은 그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들릴 때 자신의 삶이 그 진리에 합치하고자 하는 몸부림이 있으면 그 진리를 그에게 커다란 위로와 힘이 되요. 그러나 삶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등지게 되면 그다음에 그 사람의 마음속에 진리가 들릴 때에는 진리에 대한 미움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 진리가 그 진리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위로와 격려를 주지만 그 자신의 삶을 진리에 합치하기 싫어하면서 돌아서는 사람들에게는 그 진리가 그들을 책망하기 때문이죠. 그 책망을 아주 아프게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의 이 육신의 행복보다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영혼의 행복을 찾아가야 되겠다는 마음이 있으면 참회가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 진리를 버리고 미워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 사람들이 예배당 안에 가득한 거예요. 천국은 그렇게 넓은 곳이 아니예요.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신앙은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추호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는 세상 때문에 갈등을 하고 세상에 가서는 교회 때문에 갈등을 하면서 살아가는 거죠. 이런 박쥐와 같은 삶 이런 삶속에서 그들은 하나님께도 버림받고 세상에서도 버림받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이죠. 그게 하나님 없는 삶이예요. 종교적 형식 속에 있는 하나님 없는 삶 가장 커다란 문제는 그 안에 하나님을 향한 기쁨이 없는 거예요. 잘 들으세요. 성도가 하나님 이외에 어떤 곳에서 기쁨을 발견하면서 살면 그건 벌써 영혼이 병들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곳을 통해서 영혼의 질병은 계속 주입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그의 영혼이 부패해 가는 거죠. 인간이 짓는 모든 죄 인간이 행하는 모든 불순종은 그것을 기뻐하는 인간의 마음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것을 기뻐한다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좋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을 죽이고 돈을 뺐는 것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나쁜 것이 라고 생각해요. 악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러나 적어도 그 일을 행하는 사람은 그것이 자기를 행복하게 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돈을 빼앗는 것이예요.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예요. 인간의 모든 부패와 그리고 영혼의 병듦, 그리고 사람의 모든 고통은 옳지 않은 것을 사랑하고 거기에서 기쁨을 누리게 되는데 거기에서 발생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기쁨이 없는 삶, 그 삶은 가장 병든 삶이고 지금 비록 그가 행위로 어떠한 죄를 집지 않고 그리고 아주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을 할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는 아무 것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아니예요. 왜냐하면 마음은 다른데서 기쁨을 찾고 있기 떄문에 마음을 빼놓고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죠. 결혼생활에서 배우자가 만약에 마음으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행위로 다른 배우자를 섬기고 있다면 그 사람은 배우자를 자신을 향해 헌신하고 있는 그런 배필이라고 생각할수 있을 까요? 우리의 신앙생활은 결혼생활과 같은 것이죠. 마음과 모든 뜻들이 하나님 앞에 들여져야 하는 것이죠. 거기에서 한없는 기쁨을 느끼며 살아가는 거예요. 그 기쁨이 머냐하면 하나님 속으로의 기쁨이예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하나님의 깊은 속을 헤아려 가면서 그러면서 그 안에서 하나님의 기쁨을 발견하게 되요.
형제들이 이제 장가갈 때가 되면은 처자들을 고르잖아요. 자매들도 마찬가지지 서로 다 모르는 상태에서 강력하게 마음을 끄는 것이 머겠어요. 새벽의 시간이지만 말해봐. 머겠어여? 왜 말을 못해. 머겠어여? 외모 왜 만나본적도 없고 먼 발치에서 쳐다봤는데 머가 그렇게 마음을 끌겠어여? 기껏해야 외모지. 외모가 아주 예뻐 예쁘다고 그래봐야 사실은 몇 센티 차이인데 코가 0.5센치 더 튀어나왔다든지, 허리가 머 5센티 더 들어갔다든지, 가슴이 한 3센티 나왔다든지, 머 그런 차이 아니예요. 그런거예요. 그런데 어쨌든 강력한 매력을 끄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머냐면 그렇게 용모로는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끄는데 이 가슴 깊이 독이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마치 사과에 독이 들어 있는 것처럼 그 독이 들어 있다는게 무슨 뜻이냐면 자기와 관계를 갖는 사람들에게 깊은 고통을 주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것도 모르고 좋아해. 그건 속으로 기뻐하는게 아니죠. 겉을 즐거워 하는 것이죠. 겉을 그런데 진정한 기쁨은 그걸 뚫고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저 속으로.. 대화를 하고 사귀고 생활을 하고 할수록 그 에서 자기를 기쁘게 하는 참답고 아름다운 그 무엇이 그 안에 많이 발견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안에 아름다움의 본체는 누구겠어요? 아니 그렇게 가르켜 줬는데 왜 몰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아름다움의 그 원형은 누구예요? 그렇치. 하나님이지 하나님 닮은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속은 아주 아름답게 되는 거죠. 그래서 그 아름다움을 발견하면 발견할수록 기뻐하게 되고 소중하게 여기게 되고 사랑하게 되는 것이예요. 그러면서 하나님을 알아가게 되는 것이예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 하나님을 속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장가갈 형제가 빤드르한 얼굴과 외모를 보고 가슴을 뛰듯이 성도들이 그렇게 그러는 거예요. 그런거 사랑 아니예요. 젊은 청소년들이 이렇게 영화나 텔레비전에 나오면 머 박수치면서 너무 예뻐. 너무 예뻐. 우리 딸도 가끔 그러는데 근데 자꾸 변해. 저사람 좋아하다가, 이사람 좋아하다가, 저사람 좋아하다가, 그렇게 그런 감정은 사랑이 아니예요. 사랑이 아니예요. 다시 말하면 나의 예쁜 외모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것은 그건 참다운 사랑이 아니예요. 왜냐하면 나의 외모가 시간이 지나가서 늙고 모양이 바뀌면 그 사랑도 끝날거라는 거예요. 언제나 그 모습 그냥 있나 그렇게 몸이 균형이 잡히고 예쁘던 그 외모도 시간이 지나가면 붙어서는 안될 곳에 살이 잔뜩 붙고 볼도 쳐지고 그리고 목에는 주름이 생기고 눈도 껍질도 무거워져서 내려와 그러면서 몸의 형체가 다 틀려지죠. 그러면 그때는 사랑할 대상이 어디 있는 거예요. 없죠.
그러니까 참다운 사랑이 아니죠. 아니죠. 그러니까 참다운 사랑은 그 사람의 영혼에 속하는 것이어야 되는 것이예요. 그래서 영혼의 아름다운 경향 그 자체가 바뀌기 전까지는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거죠. 이게 바로 참다운 사랑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을 기뻐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알아야죠. 알아야죠. 하나님을 알아가야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워가야줘. ‘하나님이 그런 분이셨구나. 하나님이 그런 분이셨구나 하나님이 그런 분이셨구나’ 그러면서 하나님을 알아가고, 알아가고, 알아가고, 알아가고 ,그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 생활이예요. 우리의 신앙이예요. 그 속에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이게 바로 신열의 삶,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는 신열의 삶, 또는 도이신 그리스도 때문에 기뻐하는 도열의 삶이 되는 거죠. 그 속에서 인간은 한없는 행복을 느끼면서 그 하나님을 위로로 삼으면서 동행하게 되는 거예요. 그게 자기 허물의 가리움을 받은 사람 고난과 시련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피난처로 삼는 사람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배풀어 주시는 복이예요. 여러분들이 이렇게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설교가 너무 길었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