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통곡의 골짜기를 지날찌라도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시 84:5-8)
녹취자: 백지영
오늘 성경이 매우 어렵습니다. 우선 6절이 무슨 뜻인지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안 가는데,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제가 히브리어 성경에서 이 부분을 읽어 드릴 테니까 기억을 하시면서 설교를 들으십시오. 5절, “당신 안에서 그를 향한 힘의 사람의 복이여.”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주님 안에서 힘을 얻고 마음 가운데 큰 길이 있는 사람의 행복이여.”, 6절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는 눈물이 아니라 통곡으로 번역을 하는 것이 옳습니다. 히브리어로 ‘바카’인데 큰 소리로 우는 것입니다. “저희는 통곡의 골짜기를 지나갈 때에 그곳에서 마시게 되며”, 그 다음에 “이른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는 논란이 많은 구절인데, “비를 만드나이다.” 이렇게 해야 되리라 생각됩니다. 7절,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서”, “저희는 한 힘으로부터 또 한 힘에게로 걸어가며”, 번역은 비슷하게 되었습니다. “힘을 얻고 얻어서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나타나리이다.” 8절,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이렇게 됩니다. 이제 풀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시간이 모자라서 4절을 살짝 건드리고 지나갔는데 보충을 하자면, “그 하나님의 집에서는 하나님만이 가지는 놀라운 특징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헷세드’다. ‘아가페’, ‘긍휼과 자비’다. 가치가 없는 참새나 제비 같은 것들이 안전하게 깃들일 수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성소였다. 그런 점에서 볼 때에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도 이렇게 생각해야 된다.”, 이 뜻입니다.
세상의 모든 집단은 자기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지만, 교회는 스스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어느 곳에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 교회에서는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물론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은 별도의 문제이겠습니다만 어린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오면 왠지 집보다 더 편하고 더 기쁘고 그리고 더 많은 은혜가 후히 주어진 그런 곳임을 인식시켜 주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 곁에 있을 때에 누리는 축복의 그림자들을 경험하고 맛볼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물고 뜯고 싸우고 이렇게 되면 그 다음에는 그 모든 지체들의 신앙생활이 병들게 됩니다.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렇게 소망이 없는 사람이 와서 긍휼을 얻고, 그리고 세상에서는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가치 없는 인생들이 교회에서는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소중하게 여김을 받고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장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사람들에게 드러내주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이런 긍휼함을 잃어버리고 가치 없는 죄인들을 용납하고 품어주는 일에 실패하는 이유는,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 자기가 누구인지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정말 쓰레기와 같은 인생들이 지금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인생은 세상에서 예수 안 믿고 살아가는 인생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때 어땠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한때 그 사람들과 똑같이 쓰레기 같은 인생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예화) 난지도에 가보셨습니까? 지금은 다 옛날이야기가 돼 버렸지만 별의별 쓰레기가 다 모입니다. 쏟아놓으면 어린애 기저귀부터 시작을 해서 심지어는 다이아반지까지 나오는데, 다이아반지가 한 달이면 서너 개씩 걷힌다고 합니다. 이유는 모르겠습니다만 금반지도 나오고 다이아반지가 쓰레기통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일부러 버리지는 않았겠지만 하여튼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온통 쓰레기들이 다 깔리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만, 옛날에는 분리수거가 없으니까 무조건 쓰레기더미에 집어넣어가지고 갖다 버리면 그 다음에는 그 쓰레기더미 위에서 커다란 망태를 하나 지고 집게를 들고 돌아다니면서 고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골판지 줍는 사람은 골판지만 줍고, 플라스틱 줍는 사람은 플라스틱만 줍고, 빈병만 줍고 하면서 분류를 하는 것입니다. 소위 재활용품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옛날에는 플라스틱 오강이 있었습니다. 볼일 보는 실내용 변소인데 이것을 플라스틱으로 만들었습니다. 나왔을 때 인기가 좋았는데, 우선 엄청 싸고 두 번째는 절대 깨질 염려 없고, 그런 것까지도 옵니다. 그런데 그 플라스틱 오강이이 넝마주의 손에 딱 집혔습니다. 그리고 망태 속에 들어갔습니다. 그것을 공장에 가지고 가서 녹여서 다시 만들었더니 이번에는 근사한 바가지가 되었습니다. 쌀 씻어먹는 바가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때 옛날 난지도에서 굴러다니던 생각은 안 하고 자기는 근본이 틀리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쓰레기이고 나는 그래도 인간이 먹는 쌀을 씻어주는 그릇이라고, 주인이 얼마나 나를 구별해서 사용하는지 아느냐고. 그러나 과연 근본이 틀립니까? 처음에는 전부 다 난지도 쓰레기장에서 온 것인데, 그 처지를 깜박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 긍휼을 잃어버리는 까닭은, 자기가 하나님께 어떻게 긍휼히 여김을 받아서 여기까지 와서 하나님의 교회의 한 지체가 되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러한 엉뚱한 일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긍휼히 여기시는지를 자기의 신앙생활 속에서 깊이 체험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긍휼히 여기기에는 너무나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이 깨달은 대로 살아가는 곳이 바로 교회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들을 “주의 집에 거하는 자”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잠시 들른다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어로 ‘야샤브’, 그냥 와서 오래 살 작정을 하고 털썩 주저앉는 것입니다. 이 ‘거한다’라는 단어가 ‘하나님이 임하신다’는 단어하고 똑같은 단어입니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그렇게 거하면서 오래도록 살고 있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항상 하나님을 찬양하고 주님을 노래하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성도의 삶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까지가 지난 시간의 이야기였습니다.
오늘 5절 말씀은 그 하나님의 집에서 어떤 일이냐 일어나느냐, 곧 주의 집에 거하는 사람의 행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히브리어 성경으로는 “당신 안에서 그에게 힘이 있는 그 사람은 행복하도다.”입니다. 즉, “하나님 안에서 힘을 얻고 그 마음에 큰 길이 있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그렇게 한없는 은혜를 입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실제적인 삶이 무엇인지를 말해 주는 것인데, “힘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제가 예배 가운데 기도했습니다만, 여러분이 교회에 나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왜 예배를 드리느냐고 이야기해 보십시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적합한 대답을 찾지를 못합니다. 그러니 목표가 분명하지 않은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목표가 없으니까 그 목표에 도달했는지 못했는지 결과에 대한 측정도 없습니다.
늘 말씀드립니다만, 예배는 2천 년 전에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그리스도 예수에 관한 추도식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죽고 부활하신 사실을 기억하며 모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단지 기념하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일 때 늘 예수 그리스도는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의 죽으심은 기념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그 은혜에 기초해서 이루어진 우리의 은혜의 감격을 찾고 거기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사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일이 일어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그 사실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다 들어서 짜고 나면 마지막에 남는 것, 역사를 다 움켜쥐고 짜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그리스도와 나, 그리고 하나님 셋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늘 기념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만으로는 우리가 이 어두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작년 사경회 때 전도지 속에서 제가 이런 이야기를 썼습니다. “믿음을 따라 살고 싶으나 그 길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를 원하나 그럴 힘이 없는 사람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사실도 알고, 내가 그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데, 아는 것만으로는 우리가 세상을 이기고 죄악을 이기면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리고 난 다음에 우리 속에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어떤 힘, 믿음대로 살아갈 수 있게끔 만들어 주는 능력, 이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역사하는 것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예배에 실패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배에 실패하게 되면, 하나님의 집에서 살아가는 생활에 실패하게 되면, 그 사람이 세상에서 실패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노도와 같이 밀려오는 그 파도를 이기며 살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이런 일이, 즉 힘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교회와 바른 관계를 가지고 그 교회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구체화 시켜가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주어지는 특권인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아주 체험적으로 확신합니다. 어느 수요일입니다. 맞고 가기에는 너무 큰 비가 밖에 내리고 있습니다. 날도 서늘합니다. 그리고 텔레비전에서는 재미있는 프로를 합니다. 이제 교회 가기 가장 어려운 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예수님이 언제 오시느냐고 하니까 수요일 날 비가 우중충하게 내리는 밤에 텔레비전 프로 제일 재미있는 것 할 때 교회로 오신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 모든 것을 뿌리치고 교회를 향해서 걸어갈 때 아주 가기 싫은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삼일동안 세상을 살아가는 자체가 너무 힘겹고 지치고 그래서 어떻게 살아갈 용기를 잃어버릴 것 같은 자기 낙담에 깊이 빠져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교회에 들어와서 고요히 우산을 내려놓고 비옷을 벗고 머리를 숙이고 기도하기 시작하고 예배를 드립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이전에 없던 힘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래, 내가 이러면 안 되지.”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 인생의 대안이 무엇입니까? 두 가지밖에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인생의 모든 비극은 그 두 가지 길 외에 다른 길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보무도 당당하게 이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사는 것입니다. 아니면 하나님을 버리고 이 세상 속에서 불순종하며 후줄근하게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후줄근하게 살면서도 즐거움이 있을 터이니, 그러므로 요나가 배 밑창에 가서 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둘 밖에 없습니다. 제 삼의 길이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 때문에 자꾸 불순종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 시간마다 우리는 이것을 결단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는 이 인식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제 삼의 길이 없을까? 텔레비전에서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예수만 믿고 살아가는 인생이 꽃처럼 향기 나는 생활이 아니지 않느냐고, 그러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우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을 하늘로부터 공급을 받으면서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에서 살아갈 때도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할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나의 길로 삼으면서 살아가는 사람의 참된 행복, 그것만이 우리에게 유일한 행복이라고 하는 확신과 신념을 어디서 잘 갖게 되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그곳은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교회를 갖지 못한 사람은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사랑할 수 있는 가족이 없는 사람과 똑같습니다. 사랑해 주는 가족이 없는 사람, 사랑하고 배려해야 할 가정이 없는 사람들은 밤늦게 돌아다니면서 술 마시고 노래하며 춤추고 며칠 씩 집에 안 들어와도 아무도 그를 염려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전심으로 사랑하며 사랑받을 수 있는 교회를 가지지 못한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 불행이 영적인 삶에 얼마나 크게 역사하는 지를 여러분들이 만약에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아마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면서 살아가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의 영적인 삶을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질적인 고아들이 교회 속에 즐비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몸은 교회 속에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다. 교적부에도 등록이 되어 있고, 십일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정도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런 정도의 은혜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참 하나님의 힘과 그 은혜를 입게 될까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힘과 그 은혜와 그 능력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다면, 그는 교회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노골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목회자의 설교를 통해서 큰 은혜를 받고 목회자의 가르침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나날이 새로워져가고 있다면, 여러분들이 그 목회자를 마음 깊은 곳에서 존경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마음속에서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중할 것입니다. 전에 있던 교회에서 목사님이 시편설교를 하셨습니다. 예배를 끝내고 목사님이 가방을 들고 가시는데 한 청년이 손을 모으고 문 앞에 서 있다가 한 말씀을 드립니다. “목사님, 제가 수요일마다 이 교회에 와서 시편 설교를 듣는 것은 제 인생의 가장 훌륭한 특권입니다.”
여러분, 그런 사람들이 교회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마음을 다해서 교회를 진심으로 사랑할 것입니다. 사랑해야지 해서 하는 사랑이 아니라, 애국가가 울려 퍼질 때 운동장에서 차렷하는 그런 사랑 말고, 그것을 뛰어 넘는 사랑으로.
그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내 몸이 어디에 있든지 열린 교회, ‘열린’ 소리만 나와도 그 이름 때문에 마음이 즐겁고 한없이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거기에 소속해 있고, 함께 말씀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지체들이 있고, 그 속에서 우리들이 영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그 사실이 나로 하여금 오늘 고통스러운 현실을 이기며 살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이름을 힘입어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이름을 교회 가운데 두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와의 관계가 깨어진 모든 사람들은 사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 깨어지는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 피상적이고 잘못된 것들을 크게 각성을 하고 바로 잡아야 합니다. 부흥의 때에는 모든 교인들이 뜨겁게 교회를 사랑했습니다. 부흥이 스쳐 지나가지 않는 곳에서는 따라서 순교자가 나오는 법이 없습니다. 부흥이 스쳐 가야만 순교자가 나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교회 안에서 힘을 얻는 것입니다.
교회가 힘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그곳에 당신의 이름을 두신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모였을 때 힘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의 대로를 가지고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큰 길, 언제든지 우리가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께서 오셔서 도와주시고 힘을 주실 수 있도록 하나님과 화목한 대로를 가지고 있는, 그러한 삶이 바로 교회와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의 영적인 생활이 올바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사람들은 교회의 영적인 상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중보기도가 너무 희박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위한 중보기도가 희박해 지는 이유는 그 속에서 지체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갖는 관계가 희박하기 때문입니다. 10절에서 시인이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 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라는 고백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가장 잘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영적인 상태가 잘못 되고 하나님께서 문을 닫아버리시면,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거의 느낄 수 없는 장소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커다란 비극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늘이 비를 내리고 적기에 햇빛을 주는 때에는 온 땅에 곡식이 성하고 열매가 풍성합니다. 그러나 비가 멎고 햇빛이 불규칙해지기 시작하면, 곡식은 자라지 않는 대신에 가시와 엉겅퀴가 덤불을 이루면서 자라기 시작합니다. 생명력이 질기기 때문에 악한 조건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나무와 가시와 엉겅퀴 같은 것들이 가득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는 신앙의 나무도 자라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거스르는 불순종과 죄악의 뿌리를 가진 나무들도 함께 자랍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가 멎게 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는 신앙의 과목들은 성장이 멎고 가시와 엉겅퀴들이 자라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더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인들과 선지자들이 그토록 예루살렘을 기억하고 성전을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했던 이유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무너지면 우리의 신앙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인들의 지체된 관계가 단순히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우리는 은혜를 받은 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그런 곳 정도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논리를 초월하는 뜨거운 사랑이 흐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기억하면 그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병이 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울입니다.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고 그래도 오히려 눌리는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모든 교회들을 위한 나의 염려이니 그것 때문에 내 마음이 고통 받는다는 것입니다. 곧, 골수에 사무쳐서 불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사랑이 그의 인격을 지배하고 삶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한 사람이지 제도에 충성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집 안에서 거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은혜를 주신다는 것이니, 주님께로부터 힘을 얻고 마음속에 주님이 오실 수 있는 대로가 언제나 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드릴 때마다 우리는 청소되는 것입니다.
(예화) 육군사관학교에서 제가 근무를 했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옛날에 박대통령이 3월 졸업식에 임관식도 함께 하는데 꼭 참석을 했습니다. 그러면 태능로를 버스 한정거장까지 가가지고 아스팔트에 하이타이를 수십 포대를 뿌리고 닦는데, 그렇게 한다고 아스팔트가 하얀 길이 됩니까? 이해할 수 없지요. 이해할 수 없는데, 자기들도 이해를 못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안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해야 될 것 같은 것입니다. 한번은 대통령이 차를 타고 들어와서 그냥 지나가는 말로 ‘이 산에는 솔방울이 많네.’ 그러면서 지나갔다고 합니다. 그날 저녁서부터 온 장병들을 동원해서 솔방울을 따는데, 왜 따느냐고 하니까 자기들도 모른답니다. 소나무에 솔방울 달린 것이 당연한 것이고 대통령이 유감스러우면 할 수 없는 것인데, 왜 그렇습니까? 너무 높은 분이 오시니까, 아스팔트 바닥이라도 닦아놓고 새끼줄로 표시를 하고 띠어놓고 대통령 올 때까지 아무도 못 다니게 해야지 직성이 풀리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말 한마디에도 온 장병이 동원되는 것입니다. 실화입니다. 지금이야 문민시대이니까 조금 나아졌을 것입니다만, 그러나 그때는 그랬습니다. 문 밖이 그러니 문 안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요. 잡초까지 깨끗이 뽑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쥐 죽은 듯이 고요한 정적 가운데 차 한 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너무 높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서 언제나 그렇게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합니다. 휴지도 떨어지고 가시덤불도 자랍니다. 그래서 오늘도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면서 또 청소하는 것입니다. 솔방울도 따고 하아타이도 뿌리면서 대로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면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삼 개월만 주일을 기분 내키는 대로 아무 교회나 가서 졸면서 예배드리고 그렇게 해 보십시오. 우리의 믿음이 대단한 것 같아도 하나님이 붙잡아 주실 때 그 믿음이 대단한 것이지, 하나님께서 붙잡은 그 손에서 놓인바 될 때 우리의 신앙은 거미줄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늘 새롭게 하며 힘을 얻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이 말씀을 드리면서도 마음에 다 표현을 못해서 속이 탑니다. 사람들이 이 비밀을 너무 모릅니다. 여러분이 어느 교회에 가서든지 그 교회와 바른 관계를 맺고 전심으로 온 몸과 마음과 뜻을 다 바쳐서 사랑해 보지 않고는, 지금 제 이야기를 고개는 끄덕이며 은혜롭다고 들으실지 모르지만 그러나 여러분은 증거할 수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설교자로 만드시기 위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것들을 신앙생활하면서 굉장히 많이 체험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은 사랑할 교회를 갖지 못한 사람입니다. 열심을 잃어버린 사람들, 마음에 대로가 막혀진 사람들도 하나님의 교회에서 새로운 길을 얻고,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한 은혜를 따라서 보좌 앞에 나아갈 담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하루는 무디 선생에게 어느 청년이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요즘 교회는 문제가 하도 많아서 가면 오히려 신앙이 떨어지는 것 같다고,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은 이미 완전히 떨어졌기 때문에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사람들이니까 아무데나 가도 이익입니다. 그러니까 무디 선교사가 하도 답답해서 말을 못 하고 조용히 일어나더니 난로 뚜껑을 확 열었습니다. 지금은 없는데 옛날에는 조개탄이 있었습니다. 주먹만큼씩 생긴 석탄인데 때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번개탄을 넣고, 장작을 넣고, 그 대신 붙기만 하면 대단합니다. 무디 선생이 쇠가 시뻘겋게 녹을 것처럼 타오르는 것을 집게로 쑤셔가지고 하나 끄집어 낸 다음에 휙 집어던졌습니다. 5분정도 지나니까 싹 사위어져버립니다. 속에서는 막 뜨겁게 타오르는데.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여러분이 기억해야 할 것은 교회라고 하는 제도는 선험적인 제도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경험에 의해서 만들어진 제도가 아니라, 그 경험 이전에 하나님께서 주신 제도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관계를 맺으면서 하나님과 살아가는 사람들을 오늘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저희들이 통곡의 골짜기를 지날 때에 그곳에서 마시우고 비가 오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카’는 통곡하다는 뜻입니다. 또 성경에 보면 ‘보김’이라는 장소가 나오는데, 그 ‘보김’이 ‘바카’와 똑같습니다. 우는 사람들인데, 그냥 우는 것이 아니라 막 소리 지르면서 우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그 통곡의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한다고 했는데, 비등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곳에서 마시운다, 마시우게 한다, 통곡의 골짜기를 지날 때에 그곳에서 샘이 솟아서 마시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교회 속에서 바른 생활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환난이나 시련이 오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만큼 교회와 바른 관계를 가지고 살아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련의 골짜기를 지나고 환난의 비바람 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5절에서, 하나님의 교회에서 주님으로 말미암아 힘을 얻고 그 마음에 대로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때 이 복이 히브리말로 ‘아쉐르’인데, 바로 팔복에 나오는 그 복입니다. 일반적인 복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언약의 백성들에게만 주시는 신앙적인 축복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초해서 주어지는 복, 그것을 참다운 성도들이 받아야할 복의 목표로서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도 눈물골짜기를 통과한다는 것입니다. 흐느껴 울다가 나중에는 소리치며 통곡하지 않고는 지날 수 없는 그런 인생의 때가 이들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골짜기를 지나갈 때, 거기에서 샘이 터지는 것입니다. 통곡하며 그 골짜기를 지나고, 사망의 위협이 도사리는 그 골짜기를 지나다가 지치고 지쳐서 엔학고레 앞에 쓰러진 삼손과 같이 그렇게 좌절하는 때가 있는데, 하나님의 집과 바른 관계를 맺고 주님이 언제든지 찾아오실 수 있는 대로를 그 마음에 소유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 지치고 낙담한 그 골짜기, 도움이 끊어진 것 같은 그 골짜기, 아무도 동행해 주는 사람이 없는 것과 같은 그 골짜기에서 하나님께서 샘을 터트리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터트리시는 것입니다. 샘이 솟아나서 그 속에서 그 샘물을 마시면서 다시 남은 골짜기를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되었네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그 힘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삶 속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죽하였으면 ‘바카’일까요? 엉엉 울며 지나가야 하는 그런 통곡의 골짜기를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이런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던 시인 다윗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야 할 때가 있었던 것처럼, 통곡하며 지나야 하는 인생의 골짜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의 골짜기에서 무엇이 도움이 되겠습니까?
단순히 간단하고 사소한 환란일 경우에는 돈도 도움이 되고 주위의 격려도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바카’, 통곡의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과연 이 세상에 있는 재물이나 사람들의 위로가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샘을 터트리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샘물을 먹고 새 힘을 얻게 되는 것, 이런 일들이 하나님의 교회와 바른 관계를 맺으면서 사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시며.” 결국은 모두 눈물짓고 한숨을 지으며 인생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오히려 그 속에서 주님을 노래합니다. 마라와 같이 쓴 물을 머금어야 하고 내리쬐는 태양빛이 따가운 시련의 광야를 지날 때, 오히려 주님을 찬송하고 예수의 이름을 높일 수 있습니다. 이런 힘, 골짜기는 우리에게 그것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골짜기 속에서도 요소요소에서 터지는 샘을 보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변하여 기도가 되고 한숨이 변하여 노래가 되는 이러한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다 낙담할 수밖에 없을 때에 용기를 얻고, 천만인이 엎드러지는 것 같은 자리에서도 주님 때문에 다시금 새롭게 일어날 수 있는 그 힘을 바로 교회와 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갖는 것입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데, 교회에서 생활하다보면 그런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저는 그때 교회에서 살았습니다. 어느 날 집사님 한 분이 막 뛰어와서 문을 열더니 앉자마자 대성통곡하면서 아무도 없는 교회당에서 부르짖고 기도하는데, 자식이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집사님이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파출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집이었습니다. 평소에 하나님의 집을 가정처럼 여기면서 바른 관계를 가지고 살지 않으면, 그때에 파출소가 먼저 생각이 나지 교회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의 어떤 행위, 신앙에 있어서의 어떤 결단, 그리고 신앙에 있어서의 어떤 모습은 결코 우연히 생기는 법이 없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필연이 있는 것입니다. 시련이 닥쳤을 때 왠지 내 마음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해야 하는데 의뢰할 마음이 안 생긴다면, 그것은 하루아침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럴 수밖에 없도록 되어온 필연적인 과정이 있는 것입니다. 시련과 환난이 닥쳤는데 하나님 앞에 결단하고 주님과만 담판해야겠다는 비장한 각오가 생긴다면, 그것은 그날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과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마지막 순간을 기도로 마치시며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아버지께 당신의 영혼을 의탁할 수 있었던 것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늘 하나님과 그런 관계를 맺고, 그런 정신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기도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마지막 돌아가신 장면을 기록하고 있는 글을 보면, 성경읽기 표에 돌아가시기 이틀 전까지도 성경 읽은 체크 표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죽을 때가 가까워서 결단을 하고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수십 년을 그렇게 매일매일 살아왔기 때문에 되는 것입니다.
통곡의 골짜기를 지나면서 그곳에서 터트려지는 하나님의 샘을 인하여서 즐거워하고, 그 샘물을 마시고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수 있는 것은, 골짜기 들어가기 전에 그런 삶을 살았기 때문에 골짜기에서 그럴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집사님이 평소에 교회와 바른 관계를 맺고 그 관계 속에서 힘을 얻고 살아갔기 때문에, 자식이 행방불명되었을 때 파출소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마음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앗수르 군대 18만 5천의 공격이 임박했을 때 제일 먼저 어디를 찾아갔습니까? 평소에 하나님의 집에서 늘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간구하고 그곳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지 않았더라면, 아마 즉시 참모회의를 소집하고 국고가 얼마나 되는지, 보물창고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를 살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평소에 행하던 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주님 앞에 엎드려서 간구하며 기도했습니다. 평소에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과 그런 관계를 맺고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신앙의 행동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 5주째 시편 84편을 풀어가고 있습니다. 또 시편 23편 마지막 절도 같은 맥락의 말씀으로 볼 수 있는데, 반복되면서 도달하는 평범한 결론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특권입니다. 여러분들이 주일이나 수요일에 교회 나와야 할 의무를 느끼고 있다고 한다면 오늘 회개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특권을 누리고 향유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이런 관계를 맺고 계속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교회에 나오고 이곳에서 관계를 맺는 것이 즐겁고 좋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여러분들이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말씀을 외치니까 3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제자가 되었습니다. 집회가 끝났는데 갈 줄을 모릅니다. 가만히 생각하다가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집 팔고 통장의 예금 다 빼가지고 교회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살겠다며 다 내놓았습니다. 사도들이 시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하나님을 기뻐하면서 살아갈 때 그들은 지체들이 보고 싶고 그리워합니다. 그 모이는 장소를 사모합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나옵니다. 그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은 교회에는 언제든지 사람들이 그치지 않습니다. 큰 교회와 작은 교회는 절대적인 가치가 없습니다. 좋을 것도 없고 나쁠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부엌칼을 놓고 큰 칼이 가치가 있느냐 작은 칼이 가치가 있는 것이냐고 하는 것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문제는 참된 부흥이 일어나던 때에는 하나님의 교회는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왜냐하면 사모하니까 사람들이 모이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기를 원하고 그리고 말씀이 끝나고 나면 가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기도하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지체들과 함께 교제하기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특권으로 여기고 그 속에서 살아가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 교회에서 최고로 무서운 벌이 출교였습니다. ‘익스커뮤니언’, ‘익스’는 "떼어내다"는 뜻이고 ‘커뮤니언’은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교통"입니다. 즉, 교통으로부터 떼어낸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잘못을 범한 신자에게 6개월 간 출교명령을 내린다면, 그것은 6개월 동안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징계라고 하는 것이 우스운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또 초대교회 때 안 믿는 집에 자녀를 출가를 시키면 부모가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성찬을 받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수참정지 1년, 그러면 봄, 가을로 하는 두 번의 성찬에 참여할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큰 감격 가운데 성찬을 받아본 적이 없고,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특권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하나도 겁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맺고 살아가는 이 사람들이 교회를 뜨겁게 사랑하고 그 교회 속에서 기뻐하게 될 때, 그 속에서 진리를 듣고 진리를 함께 알았던 사람들과 진리를 이야기하기를 즐거워하고 더 깨달아 알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진리를 찾아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사도들의 선포가 있었습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선포가 있고, 은혜를 받고, 헌신을 하고, 그리고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것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앞에 것 모두 빼버리고 모이기만을 사랑할 수 있는 교회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로 충만하기 때문에 교인들이 모이는 것과 우정으로 충만하기 때문에 모이는 것의 구별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령한 은혜가 충만하고,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고, 영적인 깊은 감격이 있기 때문에 이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고, 그 속에서 마른 땅에서 샘이 터지는 신앙의 개인적인 감격을 느꼈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에 머물기를 즐거워하는 것과 우정으로 충만해 지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령한 은혜로 가득차고 충만해진 교회는 영혼 구원을 지향합니다. 그러나 우정으로 충만한 교회는 세상을 향해서 그런 우정을 나누어주고 싶어 합니다. 그러므로 영혼구원에 대한 복음에 대한 열정이 세상을 향한 봉사정도로 대치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들이 하나에서 뒤틀리기 시작해서 연쇄반응을 일으키면서 다 뒤틀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그림이 잘못된 그림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교회 오시는 분들에게 늘 권합니다. 또 가끔 제가 가르치던 제자들도 오는 경우가 있는데, 전도사 혹은 목사하다 와서 한 6개월 쉬는 동안 우리 교회에 출석하겠다고 할 때 제가 이야기합니다. 출석할 동안에 출석한다고 말하지 말고, 6개월이 됐든 3개월이 되었든지 간에 교인이 되어서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그리고 힘나는 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의 지체로서 예배의 의무를 다하고 그 특권을 모두 누리다가 주께서 부르시면 가라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시인은 통곡의 골짜기를 통행할 때에 마른 땅에서 샘이 터트려져서, 그 샘을 먹고 노래를 부르며 그 통곡의 골짜기를 더 이상 흐느끼지 않고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깨달아야 할 복음입니다. 여러분들은 기회 있는 대로 사람들에게 다가가십시오. 그리고 권고하십시오. “너의 불안정한 신앙생활의 모든 그 기초는 하나님의 교회와의 불안정한 관계에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와의 불안정한 관계는 하나님과의 불안정한 관계를 보여주는 반영이다.” 변화가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눈물골짜기와 같은 위기상황을 지날 때 마른 땅에서 샘이 터지는 그래서 그 은혜를 인하여 어두운 세상을 힘 있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었기 때문에, 그 골짜기를 통과한 다음에는 더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인이 마지막에 “내 하나님의 성전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악인의 궁궐에서 거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고 보람 있고 즐거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섬기는 직원들은 이러한 감격 속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특권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직업주의로 흐르게 됩니다.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가슴에 불타오르는 동기도 없고 하나님과의 감격도 없으면서 기계적으로 자기의 의무를 감당하는, 이런 것들은 올바른 교회와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교회와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터트려지는 샘을 얻게 되고, 그 샘물을 먹고 힘과 용기를 얻어서 다시 사람들에게 그 예수의 사랑을 전하고, 그리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어주는 샬롬의 사람들이 되어서 어두운 세상을 지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 “비를 만드나이다.” 이른 비와 늦은 비, 이른 비가 오면 파종을 하고 늦은 비가 오고나면 추수를 합니다. 비가 드문 지역이기 때문에 비는 아주 중요합니다. 비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큰 축복을 의미하는데, 하나님께서 이 비를 내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 안에서 축복을 받고 풍성한 열매를 내게 하는 도구들로서 눈물 골짜기를 지날 수 있는 새 힘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있는 자는 점점 더 있게 되고 없는 자는 점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그 속에서 시온의 대로를 소유하고 그 하나님의 집에 거하면서 거기서 하나님께 힘을 얻는 사람들은, 그 힘으로 통곡의 골짜기를 지나면서 샘을 터트리고 터트린 그 샘에서 먹고 마시게 되니, 그 골짜기를 지나면서 노래하고, 노래하고 통과하고 나니까 더욱 뜨거운 감격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런 관계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럴 힘이 없으므로 눈물골짜기에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원망하고 미워하고 원한 맺힌 채로 살아가다가 힘없이 골짜기에서 나오게 되니, 이제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힘을 다시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악순환이 계속 되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말씀드립니다만, 일 년에 한 번, 6개월에 한번, 이렇게 철새처럼 교회를 옮겨 다니는 사람은 신앙도 철새를 면할 길이 없습니다. 교회를 옮길 때는 원리가 있는데, 이 한 원리만 기억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응답을 받고 옮기십시오. 그 다음에 떠날 때에는 응답보다 더 센 응답을 받고 떠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이 그 후에 벌어지더라도 그 확신을 놓칠 수 없을 정도로 그런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1월부터 6월까지는 설교 잘하는 교회, 7월부터 12월까지는 행정을 잘하는 교회, 내년 1월부터 6월까지는 제자훈련을 잘 하는 교회, 이렇게 교회 옮길 계획표를 수첩에 적어놓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비도 만들 수 있는 은혜를 주시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엘리야입니다. 엘리야를 가리켜서 어떤 성경 주석가는 말하기를, 하늘을 잠그고 열쇠를 호주머니에 집어넣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올라가서 다시 열어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을 열고 닫은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살아가면, 자신만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나로 말미암아서 수많은 사람들이 사는 것입니다. 그 비의 혜택을 보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 은혜의 혜택을 받으면서 사람들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 영향을 끼치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방법입니다. 세상을 향해 영향력 있는 삶 가운데 이것이 있는 것입니다.
표어 같은 것이 우리교회에는 없습니다만 늘 강조하는 것은,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자!"는 것입니다. 여러분, 허황된 것을 붙잡지 말고 불꽃이 일어나게 하는 그 부딪힘이 어떠한 조건이 갖추어질 때 일어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영적으로 충만한 교회에서 주님을 섬기고 살며, 통곡의 골짜기를 지날 때 그 속에서 힘을 얻고 대로를 마음에 간직하며, 그리고 주께로 힘을 얻고 살아가는 매일 매일의 삶,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어두운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가장 강하고 중요한 도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교회에서 늘 새로운 힘과 그 은혜를 입으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갈 수 있도록, 교회를 위해서 교회 전체가 하나님을 향해 갖는 관계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고 부르신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인 것입니다.
"저희는 함께 힘을 얻고 더 얻어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나타나리이다." 힘을 얻고 통곡의 골짜기를 믿음으로 통과하고, 메마른 골짜기에서 샘이 터치게 하고, 그리고 비가 오게끔 해서 그 골짜기를 통과하고 났는데, 힘을 얻고 또 다시 힘을 얻는 것입니다. 그렇게 있는 자는 점점 부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힘을 얻고 위로를 얻고, 다시 위로를 얻는 이런 일들이 시온에서, 성소에서 일어나게 되는 데,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말의 의미를 우리들이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것은, 거룩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영적인 영향을 받으면서 그의 임재 속에서 새로운 힘과 능력과 은혜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할 삶의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하면서 교회와의 관계를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반복하겠습니다. 사랑할 수 있는 교회를 가지지 못한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아까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재능을 다해서 전심으로 섬기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는 교회, '바카' 곧 통곡의 골짜기를 지날 때 생각나는 교회가 없는 사람들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하나님 앞에 늘 우리의 기도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8절의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여기서 ‘내 기도’가 히브리어 성경에는 단수입니다. “나의 한 기도”라는 뜻입니다. 오직 기도제목이 하나입니다. “그 한 기도제목을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마음속에서 우러나와서 하나님 앞에 하소연 하고 있는 한 가지 기도제목을 들어 주시옵소서,”라는 의미인 것이니, 여호와의 집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기를 원한다는 기도입니다. 오직 그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드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부흥회를 열어서 큰 은혜를 받기도 하고, 수련회에 가서 은혜를 받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새벽기도에 나와서 혼자 기도하다가 혹은 책을 읽다가 하나님을 만나기도 하고, 구역예배를 드리다가 하나님을 만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렇게 은혜를 받고 그러면서 하나님의 교회가 사랑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고 깊은 감화가 있으니까 하나님의 교회가 더 사랑스러워지고, 이제는 단순한 건물이 아닌 것입니다.
참 신기한 것이 있습니다. 목회자도 사람인데, 수백 명 모이는 교회에 가거나 심지어는 한 자리에서 몇 천 명이 앉을 수 있는 교회에 가서 그 강단에 서면 그 교회가 좀 부러워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2주전인가도 집회를 갔는데 너무 우리 교회가 오고 싶은 것입니다. 그 교회는 그 교회로 족하고 비교 개념이 안 듭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심리가 콤플렉스 때문이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교회 구경시켜 달라면서 3층으로 4층으로 올라 다니고 그러는데, 저는 그럴 마음이 별로 생기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교회가 가장 행복하고 편안하고 좋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교회하고는 사연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일주일이라도 가서 땀을 쏟고 집회를 하고 온 교회는 또 틀립니다. 그 다음에 몇 년 만에 다시 집회 초청을 받아서 가면, 기도할 때 저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참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하는 생각들 그리고 사람들 얼굴이 떠오르곤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고, 은혜의 체험이 있고, 말씀으로 말미암는 변화를 늘 경험하고, 이 속에서 새롭게 하나님을 알아가는 놀라운 간증이 있게 될 때, 이것은 장소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전에 제가 모시던 목사님은 자기는 나이가 칠순이 다 되었는데도 어느 날 밤은 엄마가 보고 싶어서 우신다고 하셨습니다. 북에 두고 온 어머니가 한이 맺힌 그 목사님의 어버이날 설교는 수많은 사람을 울렸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곰보였다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은 그래서 곰보로 된 사람만 보면 어머니가 생각이 난다고 하셨는데, 그 곰보 하나하나 파인 구멍에 사랑과 정이 가득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은혜를 받고, 눈물 흘리며 기도하고, 응답을 받고, 자신의 인격이 깨뜨려져서 그리스도의 향내가 나는 인격으로 새롭게 고침을 받습니다. 그리고 ‘바카’, 통곡의 골짜기를 지날 때 하나님 앞에 큰 응답을 받았던 기도의 그 자리, 그리고 그 골짜기에서 샘이 터지는 역사가 일어났던 은혜의 체험들을 영원히 잊지 못합니다. 또 여기 이 강단에서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말씀으로 섬기면서 수많은 성도들이 감격하고 그 은혜를 인하여 변화를 받아 주님을 사랑하는 인격으로 바뀌게 되는 역사가 일어날 때, 수십 년이 흐른 후 이 강단을 어느 창고에서 만났다고 한다면 이것이 얼마냐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하나님은 말할 수 없는 많은 사연들을 관계 속에서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더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더 아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공간이 어떠하든지,
(찬양)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시인이 오늘 이것 하나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의 한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의 이 한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바로 성도들의 삶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