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출 수 없는 탄식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픈 중에 다니나이다.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의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의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시 38:6-9).
계속해서 시인은 죄 가운데 있을 때에 자신에게 일어나는 육체와 마음의 상태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고 슬픔 중에 다닙니다.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살에는 성한 곳이 없습니다." 이런 모든 이야기들은 신자가 죄 가운데에 있을 때에 느끼는 고통이 영혼에 뿐만 아니라 육체에 까지 미치게 된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이것은 사실 처음부터 인간이 영혼과 육체가 함께 아울러 하나로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에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우리들이 신경을 많이 쓰는 것이 있으면 소화가 안 됩니다. 저 같은 경우는 신경을 쓰는 것이 탁하고 들어오게 되면 곧바로 언칩니다. 사람에 따라 조금 틀리지만 공통적이에요. 무엇 때문이냐면 위에서 위액이나 이런 분비물들이 나와서 소화를 시키고 하는 것인데 신경을 쓴다던지 마음이 상하던지 하면 순간 그런 작용들이 지장을 받는 거죠 곧바로 오게 되는 거잖아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계속 근심이 있고 이러면 암에 원인이 된다는 것은 여러분 너무나 잘 알잖아요. 이렇게 모든 육체는 영혼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죄 가운데 있으면서 신자가 괴로워할 때 그것이 육체에 까지도 그 영향이 미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이치죠. 육체에 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통계가 나왔더라구요. 어느 분이 나한테 보내줬는데, 결혼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훨씬 더 오래 산대요. 혼자 사는 것보다. 그리고 또 같이 결혼해도 좋은 관계를 부부가 서로 갖고 사는 사람들이 훨씬 건강하죠. 그리고 오래살고, 이것들이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에게서도 똑같이 발견이 된답니다. 새끼가 태어나서 부모 곁에서, 어미 아비 곁에서 같이 자라면서 이렇게 자라는 것과 그렇지 않은 동물들을 다 이렇게 수명이나 질병 이런 것들을 비교를 했어요. 근데 차이가 나요. 처음부터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그렇게 인간의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도 하나님께 의지하고 가족들을 의지하고 형제들을 의지하고 이렇게 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처음부터 이렇게 의존적인 존재로 창조하신 거죠. 예를 들자면, 꽃 같은 경우를 생각해 봅니다. 꽃 같은 경우는 암술과 수술이 꽃에 같이 있잖아요. 그래서 자가수정이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암술과 수술이 서로 이렇게 바람에 옆에 있는 꽃가루를 이렇게 떨어줘서 수정을 하는 것을 자가수정이라고 그러거든요? 그렇지만 그렇게 자가수정을 계속 반복하게 되면 상당한 결함이 있는 말하자면 후손들이 나오게 되요. 인간이 근친상간을 못하게 어느 나라에서든지 금했던 것들도 그런 이유거든요. 그런 걸 맨 처음 발견한 사람이 멘델이에요. 그래서 멀리서 다른 나무에서 날아오는 다른 나무에서 벌이나 이런 것들이 그 꽃가루를 찍어다가 다른 나무로 옮겨줄 때 그때에 건강한 것들이 나와요. 이렇게 의존하면서 살게끔 하나님이 그렇게 인간을 창조하신 거에요. 죄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고립이거든요. 하나님으로부터의 고립이고, 교회 공동체로부터의 고립이고,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의 고립이고, 자기 자신의 고립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큰 죄가 아니더라도 어쨌든 잘못 살아서 죄를 짓고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게 되면 자꾸 이 외로움 뭐 꼭 그렇게 죄를 지어서만 외로움이 생기는 것은 아니고 거룩한 종류의 외로움도 있지만, 그냥 통속적으로는 그런 외로움을 느끼게 되는 거죠. 그리고 다 나를 버린다. 그리고 하나님도 나를 버렸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이런 사람들의 경우에는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사랑해줘도 이게 해소가 잘 안돼요. 이것을 해소하는 가장 좋은 길을 뭐냐면 사랑을 받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사랑하는 거에요. 그러면 그 안에서 인간이 행복해지는 것이에요. 그래서 많은 사람을 많은 사람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인간이 얼마든지 외로울 수 있지만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사는 사람은 외롭지 않아요 오히려 거기에 더 큰 행복과 기쁨이 있는 거죠. 오늘 이 시인이 이렇게 자신의 영혼과 육체에 넘치는 고통을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죠. 자신의 죄 때문에 이런 상황이 생겼다고 고백을 하면서 하는 말이 뭐냐면, 나의 모든 소원이 주께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지 아니 하나이다. 자기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다. 역설적으로 이 시인은 죄 가운데 있게 되었을 때 자신의 참 기쁨과 소망이 오직 하나님 한분 밖에 없다라고 하는 사실을 아주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던 것이에요. 그것이에요. 바로 그것을 이 시인이 경험했던 겁니다. 그래서 존 오웬 목사님은 신자가 죄를 선택할 때 하나님이 왜 내버려 두실까? 이렇게 질문하면서 그 중에 중요한 이유 하나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요. 그것을 선택할 때에는 그런 생각을 안해요 그런데 정말 그 선택 속으로 깊이 들어가게 되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고통이 밀려오게 되는 거에요. 그렇게 될 때에 마치 불에 덴 어린 아이가 그 불을 멀리함 같이 그 죄의 본질을 깨달으면서 그 죄로부터 멀어지는 거에요. 예전에는, 어렸을 때에는 엄마가 그렇게 하면 매질을 하기 때문에 그 일을 못했는데 아이가 자란 후에는 그것이 처음에는 좋아보여도 마지막에는 얼마나 나쁜 것인지를 깨닫고 그 다음에 스스로 그것을 버리게 되는 거에요.
저희 고등학교 다닐 때 담배피고 술 먹는 애들이 많았습니다. 삼분의 이 이상은 다 그랬습니다. 얼마나 재밌느냐 하면 중학교 때 착실하고 고등학교 1학년 2학년 때까지 착실하던 애들은 3학년 쯤 되어서 예비고사 보고 그러면서 그때 처음 보는 세상입니다. 담배도 피고 술도 먹습니다. 아예 중학교 때부터 시작하던 애들은 아예 집에서 부모도 내버려두고 담배도 피고 술도 먹던 애들은 스스로 그만둡니다. 3학년 때 쯤이면 담배를 줘도 안 핀다고 하고 술을 줘도 안 먹는다고 합니다. “왜 그러냐?” 스스로 이거 굉장히 나쁜 거라고 합니다. 담이 올라오는 것입니다. 뚜렷하게 나쁘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싫다고 합니다. 친구들이 줘도 나는 끊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끊는 것은 확신이 있는 것입니다. “담배한대 펴야지.” “걸리면 우리 아버지한테 맞아 죽어.” 그러면 끊어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저도 담배를 아주 많이 폈는데 끊게 된 것에는 신앙적인 이유가 가장 컸지만 또 다른 이유는 폐가 상당히 건강했는데 저는 더군다나 중학교 때 약간 결핵을 앓았기 때문에 그것이 치유되고 나서는 굉장히 폐가 건강하게 됐었는데 두 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광화문 지하도에서 금연캠페인을 하는데 폐암으로 죽은 사람들의 폐의 샘플을 유리통에 넣어서 보여주는데 마치 짜장에 범벅을 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보는데 역겨운 것이 확 올라왔습니다. 그 다음에는 생전 담이라는 걸 몰랐는데 담이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끊었습니다.
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아무리 하나님께서 너의 행복은 나다. 나 없이는 너는 살 수 없다. 아무리 가르쳐 주어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하나님보다는 죄가 더 사랑스러울 때가 있는 거에요. 하나님께서는 그럼 한 번 맛을 봐라 허락을 하시는 거에요. 그래서 마지막에 처음에는 꿀과 같이 단거 같지만 마지막에 돌아오는 거에요. 아주 쓰디쓰게 돌아오는 거에요. 고통을 당하는 거죠. 그래서 사실은 가만히 보면은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깊이 들어간 사람 중에는 이렇게 죄의 맛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그 마지막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뼈저리게 경험하고 그 자체 안에 있는 그 앞과 비참한 결과를 이해하기 때문에 글로 돌아가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요. 또 어떤 사람들은 예전에 그 맛을 보았기 때문에 그 담에 다시 거기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결국은 이 모든 것들이 그 맛을 보았느냐, 안 보았느냐 그 하나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어떻게 은혜 가운데 있느냐 이것과 더 밀접한 관계에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무슨 얘긴지 이해 가시죠? 그래서 어떤 사람은 예전에 많이 타락한 길을 걸었기 때문에 지금 온전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예전에 그랬기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미끄러지는 사람들이 있는 거죠. 그러니까 그것은 과거에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 나에게 이점이 있다, 불리하다, 이런 이야기를 획일적으로 할 수 없는 거에요. 사도바울의 경우에는 어때요? 예전에 그렇게 하나님 앞에 반역하고 교회를 핍박하고 악하게 살았는데, 은혜가운데 있으니까 이것이 계속해서 자기를 겸손케 하는 요소가 된 거죠. 그래서 뭐하고 그래요? 난 죄인 중에 괴수다. 늘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를 세우는 이유가 되는 거죠. 그런 거죠. 그러나 또 반대로 그렇게 포악스럽고 악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예수를 믿고 난 뒤에도 여전히 그러한 행동들의 잔재가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는 거죠. 그렇죠? 그런 것들은 결국은 과거에 일어난 일들만이 아니라 지금 현재 내 안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도 중요한 거죠. 그래서 신앙은 영원한 현재형이에요. 지금 어떻게 사느냐 이게 중요한 거죠. 그래서 예전에 일어났던 가슴 아프고 괴로웠던 일들도 지금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은혜가운데 살고 온전히 살게 될 때에 거기에서 기쁨과 은혜의 샘이 솟아나는 원인이 되는 거죠. 그래서 결국 시인이 나의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탄식은 주 앞에 감추이지 못하나이다. 이제야 그 고통 속에서 그 눈이 열리면서 하나님이 들어오는 거죠. 아 그렇구나. 주님 없이 내가 누리는 이 모든 것들이 다 잘못된 것이구나. 하는 깨달음이 깊이 밀려오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주님이 주시는 모든 것들은 좋은 것이고, 주님이 주시지 않는 모든 것들은 나쁜 것이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거죠. 그래서 신자는 참된 행복의 근원을 하나님에게서 찾는 거에요. 그리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행복해지는 비결을 발견하고 살아가는 거에요. 거기에 신자의 참된 행복이 있는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