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을 구하는 기도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시 39:13).
이 마지막 기도는 다윗의 회개가 얼마나 엄청난 강도의 회개였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시인은 다른 곳에서 이야기하기를 "밤마다 눈물로 자기의 침상을 띄우고 내 몸이 수척하였나이다." 고백했거든요. 그러면 자기의 체력을 소진할 정도의 그 깊은 참회는 결국 무엇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우선 첫째는 그의 참회가 온 마음을 쏟은 참회였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육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육체 자체에도 많이 좌우되지만 사실은 마음에 의해서 많이 좌우됩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어떠한 마음을 갖느냐에 따라서 육체가 영향을 받는다는 뜻이에요. 좀 고단하고, 또 잘 먹지 못하고, 그러면 육체가 상하죠. 잠을 자고 푹 쉬어주고, 그리고 적당한 영양을 공급하고, 그리고 또 운동을 하고, 이렇게 해야지만 육체가 괜찮죠. 그렇지만 그런 점에서 육체는 육체에게 영향을 받는 거죠. 육체도 자연이기 때문에 그런 거죠. 근데 사실은 마음에 의해서 훨씬 더 영향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어요. 자 보십시오. 마음이 괴롭다던지, 안정이 안 되면 많이 먹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먹는 것 자체에 별로 관심이 없고 그 다음에 먹어도 소화가 안 되죠. 밥을 먹다가 안 좋은 소식을 듣거나 기분 나쁜 생각을 하거나, 이렇게 되면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습니다만, 저 같은 경우에는 영락없이 얹혀요. 이게 마음이 올바르고 안정된 상태가 안 되면 그러면 잘 먹을 수가 없죠. 그 담에 마음에 근심이 많거나 괴로움이 있으면 푹 쉬고 잠을 잘 수가 없어요. 그렇죠? 마음이 깊이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이 있을 때 아주 경쾌하게 운동하는 사람 봤습니까? 안 되죠? 그러니까 결국은 육체의 모든 것들을 휘두르고 움직이는 것이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그 뿐만이 아니에요. 육체와 마음이, 육체와 정신 이런 것들이 마음 안에서 아주 신기하게 만나요. 그래서 만약에 기쁘고 아주 보고 싶었던 사람을 만나면 몸에서 어떤 액을 내는 거죠. 그리고 기분 나쁘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거나 그런 사람을 만나면 몸이 그런 것들을 분비해요. 그런 것들에 의해서 육체 전체의 작용이 움직이는 거에요. 그래서 왜 그런 것들이 나오는지 아직도 학자들은 몰라요. 그런데 그렇게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에 결국 여기서 시인이 건강을 회복시켜 달라고 하는 그 기도는 얼마나 자기가 긴 시간 동안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씨름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죠. 한 번 애달픈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렸다고 해서 건강을 회복시켜달라고 빌 정도까지 그렇게 건강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에요.
두 번째는 뭐냐 하면 기간뿐만 아니라 그 회개의 정도가 얼마나 그 마음 전체를 움직이고 쏟아 붇는 기도였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제가 기도를 해본 적이 있는데요. 일주일을 금식기도를 했는데 정확하게 10kg이 빠졌습니다. 일주일 금식기도를 한다고 10kg씩 빠지지는 않거든요. 5kg 정도 빠지는데 아주 절박하고 간절하게 매달리니까 아주 정확하게 10kg. 일주일 전체를 금식기도를 한 것도 아니고 일주일 중에서 사일정도 금식하고 나머지 삼일은 절식이라면 말이 안 되고 그 정도를 했는데 10kg이 빠졌습니다. 그 때 하나 깨달은 것이 뭐냐면, 이게 절대적으로 오래 금식기도하면 살이 많이 빠지고 적게 금식하면 적게 빠지고 이것이 틀림없는 이야기인데, 그것에만 달린 것이 아니라 마음의 강도에 많이 달려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근데 이 사람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매달렸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거에요.
사실 우리들이 이런 기도를 볼 때에는 정말 부끄럽죠. 왜냐하면 건강이 상할 정도까지 이렇게 하나님 앞에 매달려본 적이 있을까? 라고 하는 거죠. 결국 한 사람의 애절하고 간절한 기도는 그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을 얼마나 간절히 찾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죠.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고 매달리는 기도는 그의 마음을 반영하는 것이죠.
시인이 비록 죄를 지었지만 그 죄를 통해서 예전에 미처 깨닫지 못했던 그 깊은 신앙의 경지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던 거죠. 그게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늘 받으며 주님과의 불화가 거의 없는 속에서 일생을 살아온 사람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늘 햇빛 속에 있으면 그 햇빛의 고마움을 모르듯이, 그런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살았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에요. 그리고 얼마나 커다란 행복인가 하는 것을 몰랐던 거죠.
그리고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무리 행복하게 해주셔도 그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에요. 일단 그 영혼의 시선을 하나님에게서 떼어 놓으면 하나님도 인간을 만족시키실 수 없는 거에요. 왜냐하면 "당신 자리에 내가 가고 싶습니다." 그게 인간의 마지막인 거에요. 그래서 자기 자신 안에서 무한한 행복을 누리고자 하는 거에요. 근데 그것은 하나님이나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거에요. 그러면 인간에게 있어서 한 인간이 그렇게 눈을 하나님께로 떼지 않고 하나님 한 분 만을 오로지 바라보게 될 때 그 때에만 인간이 싫증나지 않을 수 있는 거에요. 왜냐하면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선하심은 무한하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는 그 아름다움과 기쁨 그 행복은 마르지가 않는 거에요. 하나님이 뭘 안주셔서 인간이 자원이 고갈 된다 그것 보다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시고자 해도 자신이 그 눈길을 돌리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께로부터 계속 받으면서도 그것에 아름다움을 모르는 거에요. 마음이 집을 떠난 가출하는 자식들이 부모가 늘 애틋한 마음으로 자기를 기다리고 찾고 눈물지어도 일단 그 눈빛이 이 세상에 더 재미있는 것, 가정을 떠나서 자기가 누릴 수 있는 자유, 이런 것들에 몰두하다 보면 그러면 부모의 그 애틋한 눈물, 사랑 그런 것들이 쉼 없이 생겨나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라고 하는 거죠. 이 시인의 건강을 위하는 기도는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난 후에 비로소 깨닫게 된, 그 하나님의 소중함,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의 소중함, 그것을 발견하는 데서 비롯되는 거죠. 그러니까 전심으로 그 잃어버린 것들을 찾고자 몸부림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러면서 그는 건강을 구하기 전에 먼저 "나를 용서해 주옵소서" 라고 빌고 있습니다. 이렇게 용서 받기를 원하는 시인에게 있어서는 용서보다 더 큰 다른 것이 없어요. 가장 크고 절실한 그 기도의 제목은 하나님의 용서였어요. 시인은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할 때, 형벌 받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죠. 그것은 진정한 회개일 수 없어요. 인간은 죄를 많이 지으면 지을수록 하나님 앞에 받을 심판에 대해서 담대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죄의 특징이 그 담대함과 맹렬함이에요. 그래서 담대해지는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우리를 진정으로 회개시킬 수 없는 거에요. 회개의 동기는 제공하지만 우리를 진정으로 회개시킬 수 없고 죄를 죽일 수도 없어요. 그래서 율법은 우리에게 진정으로 죄를 보여주지만 그 죄를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요. 그래서 두려움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깊은 고통 속으로 들어가 혼란에 빠지게 될 때, 인간은 얼마든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사실은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자기 마음속에서 사라진 것을 보여주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참 놀랍죠. 돌이키는 일은 너무나 쉽고 비용이 들지 않는 일인데, 심판 받는 일은 자신의 육체와 영혼 전체가 위험에 처하게 되는 일이거든요. 그런데도 오히려 돌이키기는 커녕 하나님의 심판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결국 인간이 이 마음을 바꾸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고,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은 자신의 마음을 따라서 살려고 하는 존재인가 하는 것을, 그런 점에 있어서 얼마나 강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보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의 마음에 거리라고 하는 것은 cm로도 잴 수 없는 거잖아요. 그렇죠? 근데 그 마음 하나를 어떻게 갖느냐에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완전히 다르게 보이는 거에요. 만약에 "이 그지 같은 인간들, 이 빌어먹을 세상" 이렇게 하고 보면 다 나쁜 사람들에요. 그리고 모두 다 정리해 버리고 싶은 사람들이에요. 그러나 "다 불쌍한 인간, 풀잎의 이슬 같이 가엽은 존재들이여,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그의 형상을 받은 존재들" 이렇게 생각하면 모두 불쌍한 거죠. 그 마음에 거리가 얼마쯤 되겠어요. 지극히 물리적인 길이로 잴 수 없을 정도의 이 마음의 움직임인데 그것에 의해서 인생 전체가 다르게 보이게 되는 거에요.
이 시인이 그런 마음이었다면 하나님 앞에 이렇게 부르짖을 수 없겠죠. 그렇죠? 그런데 그는 마음이 어린아이처럼 부드러워졌고 그리고 깊이 녹아 내려서 오랫동안 굳어져 있는 마음의 상태로 살면서 위선적으로 살아왔지만 그러나 이 순간에 자신의 마음이 온전히 녹아지고 그리고 상당히 긴 시간동안 하나님 앞에 매달렸던 거에요. 그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면서 그의 은혜를 구했던 것이죠. 그래서 만약에 하나님께 용서 받을 수 있고 예전에 자신에게 베풀어 주셨던 그 사랑과 자비를 다시 베풀어 주시기만 한다면 자기는 다른 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라는 마음을 갖게 되는 거죠. 왕위가 아까웠겠습니까? 아니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부귀와 영화가 아까웠겠습니까? 그런 것에 개의치 않을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건강을 회복시켜 달라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다시 살고 싶었던 것이죠. 그래서 주님 안에서 다시 희망을 가지고 살고 싶었던 거에요. 그래서 다시 예전처럼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주님과 동행하면서 살고 싶었던 것이죠. 그의 신앙을 보여주는 거에요. 그래서 죄 가운데 있고 하나님을 등지는 사람들에게는 절망의 어두움이 있지만 그의 죄가 무엇인지 주님 앞에 나오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희망이 되시고 주님 안에서 기쁨과 소망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