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통곡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셀라)”(시 84:5-8)
녹취자 : 조원정
오늘 성경이 매우 어렵습니다. 우선 6절이 무슨 뜻인지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안 갑니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 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시고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말이 좀 이상할 겁니다. 제가 히브리어 성경에서 이 부분을 읽어 드릴 테니까 기억을 하시면서 설교를 들으십시오.
당신 안에서 그를 향한 쉼의 사람의 복이여,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게 됩니다. 주님 안에서 쉼을 얻고 마음 가운데 큰 길이 있는 사람의 행복이여, 5절이 이렇게 됩니다. 6절은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 할 때에 이렇게 되어 있는데 눈물이 아니라 통곡으로 번역을 하는 것이 옳습니다. 큰 소리로 우는 것입니다. 저희는 눈물의 골짜기 가운데에 지날 때에 그곳에서 마시게 되며, 저희는 통곡의 골짜기를 지나가게 될 때에 그곳에서 마시게 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라고 했는데 논란이 많은 구절입니다. 아마 비를 만드나이다. 이렇게 되리라 생각이 됩니다. 너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서, 저희는 한 힘으로부터 또 한 힘에게로 걸어가며, 번역은 비슷하게 되었습니다. 힘을 얻고 또 얻어서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나타나리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이렇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 시간이 좀 모자라서 4절을 살짝 건드리고 지나간 것 같습니다. 조금 보충을 하자면 지난 시간에 언급한 것은 하나님의 집에서는 하나님의 집만이 가지는 놀라운 특징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헤세드, 아가페입니다. 긍휼과 자비입니다. 가치가 없는 참새나 제비 같은 것들이 안전하게 깃들일 수 있는 그곳이 하나님의 성소였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오늘날에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도 이렇게 생각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모든 집단은 자기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지만 교회는 스스로 가치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어느 곳에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 교회에서 도움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 어린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오면 물론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은 별도의 문제이지만 교회 오면 왠지 집보다 더 편하고, 더 기쁘고, 더 많은 은혜가 후히 주어지는 그런 곳임을 인식시켜줘야 된다는 얘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의 곁에 있을 때에 누리는 축복의 그림자들을 경험하고 맛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물고 뜯고 싸우고 이렇게 되면 모든 지체들의 신앙생활이 병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이렇게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 와서 긍휼을 얻고 세상에서는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가치 없는 인생들이 교회에서는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소중하게 여김을 받고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이 세상의 유일한 장소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많은 사람들에게 드러내어 주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이런 긍휼함을 잃어버리고 가치 없는 죄인들을 용납하고 실패하는 죄인들을 품어주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정말 쓰레기와 같은 인생들이, 지금 보면 여러분의 살아가는 인생이 세상에서 예수 안 믿고 살아가는 사람의 인생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때 어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때 그 사람들하고 똑 같은 쓰레기와 같은 인생들이었습니다.
난지도에 가 보셨습니까? 지금은 다 옛날 얘기가 되었지만 난지도에 한 번 가보셨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제는 구경하려면 김포까지 내려가야 됩니다. 별별 쓰레기가 다 모입니다. 확 쏟아 놓으면 어린애 똥 기저귀부터 시작해가지고 심지어는 다이아반지까지 거기 나옵니다. 그건 몰랐을 겁니다. 다이아반지가 한 달이면 서너 개씩 걷힌답니다. 이유는 모르지만 쓰레기통에서 나온답니다. 참 신기한 이야기지만 하여튼 나온답니다. 온통 쓰레기들이 다 깔리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옛날에는 분리수거가 있습니까? 무조건 쓰레기 더미에 집어넣어 가지고 갖다 버리면 그 쓰레기 더미 위에서 커다란 망태를 지고 집게를 쥐고 돌아다니면서 고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골판지 줍는 사람은 골판지만 줍고 플라스틱 줍는 사람은 플라스틱만 줍고 빈병 줍는 사람은 빈병만 줍고 그러면서 분류를 하여 재활용품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플라스틱 요강이 있었습니다. 나왔을 때 인기가 좋았습니다. 우선 엄청 싸고 부부싸움 하다가 신경질 나서 집어 던져도 깨질 염려 없고 좋았습니다. 그런 것도 옵니다. 쓰레기 분류작업을 하는데 플라스틱 요강이 넝마주이 손에 딱 집혔습니다. 망태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공장에 가져다 불을 때가지고 다시 만들었더니 이번에는 근사한 바가지가 되었습니다. 살 씻어먹는 바가지가 되었습니다. 그때 생각하기를 옛날 난지도 쓰레기 더미에서 함께 굴러다니던 생각은 안하고 자기는 근본이 틀리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쓰레기고 나는 그래도 인간이 먹는 쌀을 씻어주는 그릇이다. 주인이 나를 얼마나 구별해서 사용하는지를 봐라, 그런 것입니다. 똥바가지를 가지고 똥을 퍼지만 물바가지 가지고는 물을 펍니다. 그러나 과연 근본이 틀립니까? 처음에는 난지도 쓰레기장에서 온 것인데 그 처지를 깜빡 잊어버린 것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 긍휼을 잊어버리고 그러는 까닭은 자기가 하나님께 어떻게 긍휼히 받아서 여기까지 와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교회의 한 지체가 되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엉뚱한 사건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긍휼히 여기시는지를 자기의 신앙생활 속에서 깊이 체험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긍휼히 여기기에는 너무나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깨달은 대로 살아가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에 집에 거한다는 것은 잠시 들른다는 것이 아니고 히브리에 보면 ‘야샤브’입니다. ‘야샤브’는 오래 살 생각을 하고 털썩 주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래도록 거하고, 거한다는 단어가 하나님이 임하신다는 단어랑 똑같은 단어입니다. 그렇게 거하면서 오래도록 살고 있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항상 하나님을 찬양하고 주님을 노래하는 이런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성도의 삶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늘 보면 주께 힘을 얻고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 하나님의 집에서 일어나는 일이 어떤 일인가 하면, 주의 집에 거하는 사람들의 행복을 지금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도다.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당신 안에서 그에게 힘이 있는 그 사람은 행복하도다고 나옵니다. 하나님 안에서 힘을 얻고 그 마음에 큰 길이 있는 사람들은 복이 있도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한없는 은혜를 입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실제적인 삶이 무엇인지를 오늘 여기에서 말해 줍니다. 힘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배 가운데 기도했습니다만 우리 여기에 나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얘기해 보십시오. 왜 예배에 나옵니까? 말해 보십시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적합한 대답을 찾지를 못합니다. 목표가 분명하지 않게끔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목표가 없으니까 그 목표에 도달했는지, 못했는지를, 결과에 대한 측정도 없습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예배는 이천 년 전에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그리스도 예수의 추도행사가 아닙니다.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죽고 부활하심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죽고 부활하신 사실을 기억하며 모이기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부활하심을 단지 기념하기 위해서 모인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일 때 늘 예수 그리스도는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의 죽으심은 기념되어야 됩니다. 그 이전에 우리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그 은혜의 기초에서 이루어진 우리의 구원의 감격을 찾고 거기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일이 일어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그 사실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다 들어서 짜고 나면 마지막에 남는 것, 역사를 다 움켜쥐고 짜고 나면 마지막에 남는 것, 그것은 그리스도와 나, 그리고 하나님, 이것 셋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늘 그것은 기념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만을 기념하는 것만으로는 우리는 이 어두운 세상을 살아 갈 수 없습니다.
작년 사경회 때 우리가 전도지를 만들었습니다. 전도지 속에서 제가 그런 이야기를 썼습니다. 믿음을 따라 살고 싶으나 그 길을 알 수가 없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를 원하나 그럴 힘이 없는 사람,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사실도 알고 내가 그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도 아는데 그럴 힘이 없습니다. 세상을 이기면서 죄악을 이기면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힘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난 다음에 우리 속에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어떤 힘, 믿음대로 살아갈 수 있게끔 만들어 주는 어떤 능력, 이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역사하는 것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우린 예배에 실패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게 예배에 실패하게 되면, 하나님의 집에서 살아가는 그 생활에 실패하게 되면 그 사람이 세상에서 실패하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무엇으로 파도와 같이 밀려오는 노도와 같이 밀려오는 그 파도를 이기며 살 수 있겠습니까? 가능합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하나님의 교회와 바른 관계를 가지고 그 교회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구체화 시켜 가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힘을 얻는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아주 체험적으로 확신합니다. 어느 날 교회를 오게 되었습니다. 수요일입니다. 왜 그런지 밖에 비는 부슬부슬 내립니다. 우중충합니다. 맞고 가기에는 너무 큰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날도 써늘하고 방바닥에 드러누웠는데 텔레비전에서는 재미있는 것을 합니다. 이제 교회가기 가장 어려운 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예수님이 언제오시냐고 했더니 수요일 날 비가 우중충하게 내리는 밤에 텔레비전 프로가 제일 재미있는 것 할 때 교회로 오신다고 그럽니다. 가장 어려운 때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뿌리치고 교회를 향해서 걸어갈 때 막 가기 싫은 생각, 세상을 살아가는 3일 동안 너무 힘겹고 지치고 어떻게 살아갈 용기를 잃어버릴 것 같은 그런 자기 낙담에 깊이 빠져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교회 들어와서 고요히 우산을 내려놓고 비옷을 벗고 머리를 숙여 기도를 하기 시작하고 예배를 드리면서 말씀을 들을 때 우리 속에 이전에 없던 힘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래 맞아, 내가 이러면 안 되지,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 그래 내 인생의 대안이 무엇이겠는가, 두 가지 밖에 없다고 그랬습니다. 인생의 모든 비극은 그 두 가지 말고 다른 길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지고 너무도 당당하게 이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사는 것과 아니면 하나님을 버리고 이 세상 속에서 불순종하며 후줄근하게 그냥 살다가 죽는 것, 둘 중에 하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후줄근하게 살면서도 즐거움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나가 배 밑창에 가서 앉아 있었습니다. 제 3의 길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 어리석음 때문에 우리들이 자꾸 불순종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둘 밖에 없습니다. 매시간 마다 우리는 이것을 결단해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는 이 인식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제 3의 길이 없을까? 텔레비전에서는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예수만 믿고 살아가는 인생은 꽃처럼 향기 나는 생활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우리가 잘못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을 하늘로부터 공급을 받으며 살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어디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물론 세상에서 생활할 때 세수할 때나 밥 먹을 때나 친구들을 만날 때나 장사 집에 갈 때나 우리는 늘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은 하게 됩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생각할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나의 길로 삼으면서 살아가는 사람의 참된 행복 그것만이 우리에게 유일한 행복이라고 하는 그런 확신과 신념을 어디서 가장 잘 갖게 됩니까? 교회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늘 말씀드리지만 전심으로 사랑할 교회를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들은 가장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가족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과 똑같습니다. 사랑할 사람이 없는, 사랑해 줄 가족이 없는 사람, 사랑하고 배려해야 할 가정이 없는 사람들은 밤늦게 돌아다니면서 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며 며칠씩 나가서 안 들어와도 아무도 그를 염려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도 연락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예화) 어렸을 때 기억이 납니다. 중학교 때인가 고등학교 때인가 한 아이가 아주 먼 시골에서 하숙을 해서 서울에는 친척도 없고 해서 혼자 하숙을 하며 학교를 다니고 있는 학생이었습니다. 하숙도 하다가 자취로 옮겼습니다. 친구들이 다 앉아서 시간이 늦어지니까 한 아이는 일어나서 집에다 전화하고 다음에 엄마한테 전화하고 아버지한테 전화하고 심지어 동생한테 전화하고 하다가 안 되는 사람들은 하숙집 아줌마한테라도 전화를 해서 나 오늘 늦게 들어가니까 문 잠그라고 그렇게 얘기를 하는데 얘는 전화를 걸 데가 없습니다. 전화도 없거니와 전화 걸어도 받아 줄 사람이 없고 자기가 들어오든 안 들어오든 관심 써 줄 사람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 다 전화 걸려고 갔을 때 혼자 후줄근하게 앉아 있던 그 영상이 지워지지가 않습니다. 그것이 소위 얘기하는 한낮의 자유하다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여러분들이라는 것입니다.
전심으로 사랑하며 또 사랑받을 수 있는 교회를 가지지 못한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 불행이 여러분의 영적인 삶에 얼마나 크게 역사하는지를 여러분들이 만약에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아마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영적인 삶을 눈물 없이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실질적인 고아들이 교회 속에 즐비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몸이 교회 속에 있지 않습니까?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고 있지 않습니까? 다니고 있습니다. 교적부에 등록이 안 되어 있습니까? 돼 있습니다. 십일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정도의 교회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런 정도의 은혜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서 참 하나님의 힘과 그 은혜를 입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힘과 그 은혜와 그 능력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다면 그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노골적으로 쉽게 얘기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들이 목회자로부터 목회자의 설교를 통해서 큰 은혜를 받고 목회자의 가르침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다면 여러분들이 그 목회자를 마음 깊은 곳에서 존경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건 불가능한 것입니다. 진심으로 마음속에서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전에 있던 교회에서 목사님이 시편 설교를 하셨습니다. 설교를 끝내고 가방을 들고 목사님이 가려고 하는데 청년이 손을 모으고 문 앞에 서있는 것입니다. 목사님한테 뭔가 한마디 말하고 싶어서입니다. 목사님 제가 수요일마다 이 교회에 와서 시편 설교를 목사님께로부터 듣는 것은 제 인생의 가장 훌륭한 특권입니다. 여러분 그런 사람들이 교회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마음을 다해서 교회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속에서 그냥 사랑해야지 하는 그런 것이 아니고 애국가가 울려 퍼질 때 운동장에서 차렷하고 있는 그런 사랑 말고 그것을 뛰어 넘어서, 사랑이라는 어떤 것입니까? 그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그것이 사랑입니다. 내 몸은 비록 어디에 있던지 열린교회, 교회 안 나오고 열린 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확 열려지면서 즐겁고 한없이 위로가 되는 곳, 그 이름 때문에 내가 그곳에 소속해 있고 그 안에서 함께 말씀을 받으며 살아가는 지체들이 함께 있고, 그 속에서 우리들이 영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그 사실이 나로 하여금 오늘 고통스러운 현실을 이기며 살 수 있게끔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이름을 힘입어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그 이름을 교회 가운데 두셨습니다. 교회와의 관계가 깨어진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것이 먼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피상적이고 이 잘못된 것들을 엄청나게 각성을 해서 바로 잡아야 됩니다. 부흥의 때는 모든 교인들이 그렇게 뜨겁게 교회를 사랑했습니다. 부흥이 스쳐지나가지 않은 곳에서는 순교자가 나오는 법이 없습니다. 부흥이 스쳐가야만 순교자가 나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그 교회 안에서 힘을 얻는 것입니다. 교회가 힘을 주는 곳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그곳에 자신의 이름을 두신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모였을 때 힘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대로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우리가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힘주실 수 있도록 하나님과 화목한 대로를 가지고 있는 그런 삶이 바로 교회와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의 영적인 생활이 올바르게 됩니다.
사람들은 교회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날의 교회는 참 불쌍한 것입니다. 중보기도가 너무 희박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교회를 위한 중보기도가 희박해지는 것은 그 속에서 지체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갖는 그 관계가 희박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뒤에 보면 내가 악인의 장막에 거하는 것보다 여호와의 집에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는 고백까지 나오는 걸 봅니다. 다른 곳에서 천 일 보다 여호와의 집에서 하루를 지낸 것이 훨씬 더 좋다고 하는 고백이 나옵니다. 그런 고백이 나오는 이유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가장 잘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영적인 상태가 잘못되어 버리고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닫아버리시면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거의 느낄 수 없는 장소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커다란 비극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늘이 비를 내리고 적기에 햇빛을 주는 때에는 온 땅에 곡식이 성하고 열매가 풍성합니다. 그러나 비가 멎고 햇빛이 불규칙하기 시작하면 곡식은 자라지 않는 대신에 가시와 엉겅퀴가 덤불을 이루며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생명력이 질기니까 악한 조건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나무와 가시와 엉겅퀴들이 가득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는 신앙의 나무도 자라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거스르는 불순종과 죄악의 나무도 함께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가 멎게 되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는 신앙의 과목들은 성장을 멎고 가시와 엉겅퀴들이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교회는 더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인들과 선지자들이 그토록 예루살렘을 기억하고 또 성전을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던 이유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무너지면 우리의 신앙은 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인들의 지체된 관계는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가 단순히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우리는 은혜를 받은 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그런 것 정도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 속에는 인간의 논리를 초월하는 뜨거운 사랑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 이름을 기억하며 그 사랑이 우리에게 병이 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울입니다.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고 그래도 오히려 눌리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모든 교회들을 향한 나의 염려라, 그것 때문에 내 마음이 눌려온다는 것입니다. 고통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골수에 사무쳐서 불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인격을 지배하고 삶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향한 사랑이,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한 사람이지 제도에 충성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나님의 집안에 거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로부터 힘을 얻고 마음속에 주님이 오실 수 있는 대로가 언제나 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예배드릴 때마다 우리는 청소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는데, 언젠가 한번 예화를 든 것 같습니다.
(예화) 육군 사관학교에서 방위 근무를 했습니다. 육군사관학교라고 하면 사람들이 안 웃는데 왜 방위라고 하면 웃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지금은 안 그렇습니다만 옛날에 박 대통령이 3월에 졸업을 시켰습니다. 졸업식 하면 임관식도 함께 합니다. 대통령이 꼭 참석을 하는데 대통령이 오면 오는 건데 태릉로를 저기 버스 한 정거장까지 가서 아스팔트에다 그 아까운 하이타이를 수십 개를 뿌리고 그것을 문지르고 앉아 있습니다. 아스팔트에 뭐가 있습니까? 먼지 깨끗이 다 청소했는데 아스팔트를 하이타이를 가져다가 문질러서 닦는다고 하얀 길이 됩니까? 노란 길이 됩니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데 자기들도 이해를 못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안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뭔가를 해야지 될 것 같습니다. 대통령이 한번은 차를 타고 와서 그냥 지나가는 말로 이 산에는 솔방울이 많네 하며 지나갔습니다. 그날 저녁부터 온 장병들을 동원해 가지고 솔방울을 따는 것입니다. 왜 따냐고 했더니 모른답니다. 아니 소나무에 솔방울 달린 것이 당연하지 대통령이 소나무에 솔방울이 달렸네, 유감스러우면 할 수 없는 거지, 왜 그럽니까? 너무 높은 분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냥 아스팔트 바닥이라도 박박 문지른 다음에 그렇게 닦아놓고 새끼줄을 띄워 놓고 대통령 올 때까지 아무도 못 다니게 해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것입니다. 실화입니다. 그땐 그랬습니다. 문밖이 그러니 문안에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잡초까지 깨끗이 뽑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쥐 죽은 듯이 고요한 정적 가운데 차 한 대가 나타나길 기다리는 것입니다. 너무 높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그렇게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와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들으면서 청소를 하는 것입니다. 솔방울도 따고 하이타이로 뿌리기도 하면서 대로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 하면서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안 다니고 한 3개월만 집에서 주일은 기분 내키는 대로 아무 교회나 가서 졸면서 예배드리고 한번 해보십시오. 우리의 믿음이 대단한 것 같아도 하나님이 붙잡아 주실 때 그 믿음이 대단하지 우리가 하나님께 붙잡은 그 손이 놓인바 될 때 우리의 신앙은 거미줄과 같은 것입니다. 뭐가 있습니까? 떨어지면 다 똥통으로 직행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교회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늘 새롭게 하면서 힘을 얻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이 말을 하면서도 마음에 다 표현을 못해서 속이 탑니다. 사람들이 이 비밀을 너무 모릅니다.
여러분들이 어느 교회에 가든지 그 교회와 바른 관계를 맺고 전심으로 온몸과 마음과 뜻을 다 바쳐서 사랑해 보지 않고는 제 얘기를 고개를 끄떡이고 은혜롭다고 들으실 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여러분 증거 할 수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설교자로 만드시기 위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그런 것들을 신앙생활 하면서 굉장히 많은 체험을 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은 사랑할 교회를 갖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열심을 잃어버린 사람들, 마음에 대로가 막혀진 사람들도 하나님의 교회에서 새로운 길을 얻고 하나님의 긍휼한 은혜를 따라서 보좌 앞에 나아갈 담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하루는 무디 선생이 어느 청년이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요즘 교회는 문제가 하도 많아가지고 가면 오히려 신앙이 떨어질 것 같다고 이렇게 얘기하고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은 걱정 마십시오. 이미 완전히 떨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아무데나 가도 이익입니다. 아무데나 가라고 하십시오. 무디 선교사가 하도 답답하니까 말을 안 하고 조용히 일어나더니 난로 뚜껑을 확 열었습니다. 조개탄이 타고 있습니다. 주먹만큼 생긴 석탄입니다. 번개탄을 넣고 장작을 넣고 난리를 치면서 떼기가 힘든데 붙기만 하면 대단합니다. 쇠가 시뻘겋게 녹을 것처럼 타오릅니다. 집게로 하나를 딱 집어냈습니다. 시뻘겋게 타오른 것을 휙 집어던졌습니다. 5분 정도 지나니까 싹 싸여집니다. 이속에서는 뜨겁게 타오르니까 이게 바로 교회입니다.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교회라고 하는 제도는 선험적인 제도입니다. 인간의 경험에 의해서 만들어진 제도가 아니라 그 경험 이전에 하나님께서 주신 제도입니다. 이런 관계를 맺으면서 그렇게 하나님과 살아가는 사람들은 저희들이 통곡의 골짜기를 지날 때에 그곳에서 마시우고, 비를 만든다, 비가 오게 한다는 이런 뜻입니다. 여기에서 ‘바카’가 나오는데 ‘바카’가 통곡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보김이라는 장소가 나오는데 그 보김이 ‘바카’와 똑 같은 것입니다. 보김이 결국은 우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는 건데 그냥 우는 것이 아니라 소리 지르면서 우는 것입니다. 그 통곡의 골짜기를 지날 때에 그곳에서 마시운다, 그 곳으로 샘의 곳이 되게 한다고 번역을 했는데 비등합니다. 그곳에서 마시운다. 마시우게 한다. 통곡의 골짜기를 지날 때에 그 곳에서 샘이 솟아서 마시게 된다.
이런 얘기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이렇게 교회 속에서 바른 생활을 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환란이나 시련이 오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바울만큼 교회와 바른 관계를 가지고 살아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련의 골짜기를 지나고 환란의 비바람을 통과해야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주님으로 말미암아 힘을 얻고 그 마음에 대로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말하는데 이 복은 히브리말로 ‘아쉐르’인데 이것은 바로 팔복에 나오는 그 복입니다. 일반적인 복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언약의 백성들에게만 주시는 그런 신앙적인 축복입니다.
성경은 이런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기초해서 주어지는 복, 그것을 참다운 성도들이 받아야할 복의 목표로서 우리에게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도 눈물 골짜기를 통과한다는 것입니다. 흐느껴 울고 울다가는 나중에는 소리치며 통곡하지 않고는 지날 수 없는 그런 인생의 때가 이들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골짜기를 지나갑니다. 골짜기를 쭉 지나가는데 거기에서 샘이 터지는 것입니다. 통곡하며 그 골짜기를 지나고 사망의 위협이 도사리는 그 골짜기를 지나고 지나다가 지치고 지쳐서 엔학고레 앞에 쓰러진 삼손과 같이 그렇게 좌절할 때가 있는데 하나님의 집과 바른 관계를 맺고 거기에서 힘을 얻고 그 마음속에 주님이 언제든지 찾아오실 수 있는 대로를 소유하고 살아가는 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지치고 낙담한 그 골짜기, 도움이 끊어진 것 같은 그 골짜기, 아무도 동행해주는 사람이 없는 것 같은 그 골짜기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이 육신이 지치고 낙담할 때에 샘을 터트리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누가? 하나님이 높여 주시는 것입니다. 빵 터트리는 것입니다. 샘이 확 쏟아 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그 샘물을 마시면서 다시 남은 골짜기를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되었네.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든 힘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삶속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눈물 골짜기, 통곡의 골짜기를 통행 할 때에 오죽했으면 바카 골짜기라고 했겠습니까? 엉엉 울며 지나가야 하는 그런 골짜기,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이런 때 경험해 본적이 없습니까? 우리는 이런 때를 경험 할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이런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던 그 시인 다윗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야 할 때가 있었던 것처럼 이렇게 눈물을 흘리며 걸어야 하고 통곡하며 지나야 하는 인생의 골짜기가 있을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의 골짜기에서 무엇이 도움이 됩니까? 인간의 환란이 단순히 간단한 환란이고 사소한 환란일 경우에는 돈도 도움이 되고 주위의 격려도 도움이 되지만 그리고 돌아가신 집에서는 그저 위로를 합니다. 아 얼마나 상심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참 호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저렇게 80이 넘도록 강건하게 사시다가 평안한 가운데 하나님께 가셨으니 참 호상입니다. 감사하십시오.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도 잘 믿고 건강하던 남편이 아이들을 수없이 남겨놓고 급사를 맞아서 죽는 경우, 뭐라고 가서 위로할 말이 없습니다. 나도 그런 집에 갔는데 정말 난감합니다.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솔직히 말했습니다. 나도 주님의 뜻은 모르지만 그러나 믿음으로 사시면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고백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눈물 골짜기를 지나야 할 때에 과연 이 세상에 있는 재물이나 사람들의 위로가 도움이 됩니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샘을 터트려 주십니다. 그 샘물을 먹고 새 힘을 얻게 되는 것, 이런 일들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해서 결국은 모두 눈물짓고 한숨을 지으며 인생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인데 오히려 그 속에서 주님을 노래하고 마라와 같이 쓴 물을 머금어야 하고 내리쬐는 태양빛이 따가운 그러한 시련의 광야를 지날 때 오히려 주님을 찬송하고 노래하고 예수의 이름을 높일 수 있는 이런 힘이 어디에서 납니까? 골짜기는 우리에게 그것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골짜기 속에서 요소요소마다 터지는 샘을 보면서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경험하며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변하여 노래가 되고 한숨이 변하여 기도가 되는 이러한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낙담할 수밖에 없을 때에 용기를 얻고 모든 사람이 엎드러지는 것 같고 천만인이 엎드러지는 자리에서도 그 주님 때문에 다시금 일어날 수 있는 그 힘이 바로 교회와 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생활하다 보면 그런 경우 많이 봅니다. 저는 교회에서 살았고 어느 날 어느 집사님 한분이 막 교회로 뛰어 들어오는 것입니다. 난 호떡집에 불이 난 줄 알았습니다. 막 뛰어오더니 문을 열고 들어가더니 앉자마자 대성통곡하며 우는 것입니다. 남의기도 엿 듣는 것은 그렇지만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아무도 없는 교회당에서 부르짖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식이 행방불명되었답니다.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지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것은 평소에 하나님의 집을 가정처럼 여기며 바른 관계를 가지고 살지 않으면 그때에 파출소가 먼저 생각나지 하나님의 집이 먼저 생각나지 않습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신앙의 어떤 행위, 신앙에 있어서 어떤 결단, 신앙에 있어서 어떤 모습은 결코 우연히 생기는 법이 없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필연이 생긴 것입니다.
환란이 닥쳤을 때 왠지 내 마음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해야 되는데 의뢰할 마음이 안 생긴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럴 수밖에 없도록 되어온 필연적인 과정이 있는 것입니다. 시련과 환란이 확 닥쳤는데 하나님 앞에 결단하고 주님과 단판 해야겠다는 비장한 각오가 생긴다. 그날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여러분 기억하셔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마지막 순간을 기도로 마치시고 마지막에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말한 것,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늘 하나님과 그런 관계를 맺고 그런 정신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기도가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 읽기 하고 있습니까? 그저께부터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소나기처럼 읽는 것 안 쳐준다고 했습니다. 매일매일 읽는 것입니다. 그것도 매일매일 습관이 붙고 매일매일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마지막에 돌아가신 장면의 글을 보니까 성경 읽기 표에 죽기 이틀 전까지 체크표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죽을 때가 가까워서 결단을 하고 그렇게 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수십 년을 그렇게 살아오니까 베인 것입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눈물 골짜기를 지나면서 그곳에서 터트려지는 하나님의 샘을 인하여서 즐거워하고 그 샘물을 마시고 통곡의 골짜기를 지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수 있게 되는 것은 골짜기 들어가기 전부터 그런 삶을 살았기 때문에 골짜기에서 그럴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분이 평소에 교회와 그런 관계를 맺고 그 관계 속에서 힘을 얻고 그렇게 살아갔기 때문에 자식이 행방불명되었는데 지서에 먼저 찾아갈 마음이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먼저 갈 마음이 생겼던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아수르의 군대 18만 명이 쳐들어 와가지고 공격에 임박했을 때 제일 먼저 어디에 찾아갔습니까? 평소에 하나님의 집에서 늘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간구하고 그 곳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지 않았더라면 즉시 참모회의를 소집하고 국고가 얼마나 되는지 보물창고에 얼마나 돈이 있는지 따졌을 것입니다. 그것이라도 줘서 보내서 살아보려고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평소에 행하는 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주님 앞에 엎드려서 간구하면서 기도했습니다. 평소에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과 그런 관계를 맺고 살아가니까 그런 신앙의 행동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면서 사는 것은 의무가 아닙니다.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벌써 뭔가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특권입니다. 여러분들이 주일날이나 수요일 날, 교회 나와야 하는 의무를 느끼고 있다면 회개해야 됩니다. 여기에 지금 나와 앉아 있는 것은 특권입니다. 비록 지하실의 교회이고 화장실 앞을 통과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특권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특권을 누리고 있고 내가 향유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런 관계를 맺고 계속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교회 나오고 이곳에서 관계를 맺는 것이 즐겁고 좋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져야 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여러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말씀을 외치니까 삼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제자가 되었습니다. 집회가 끝났는데 가지를 않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다가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 집에 잠깐 갔다 올게, 그리고 집 팔고 통장에 예금 빼고 보따리 사가지고 교회로 들어왔습니다. 여기에서 살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 내놓았습니다. 사도들이 시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관계를 바르게 맺고 하나님을 기뻐하면서 살아갈 때 그들은 자기의 지체들을 보고 싶어 하고 그리워합니다. 그 모이는 장소를 사모합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나옵니다. 그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은 교회는 언제든지 사람이 그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교회는 요정도가 제일 좋다고, 난 그렇게 생각안합니다. 큰 교회와 작은 교회는 절대적인 가치가 없습니다. 좋을 것도 없고 나쁠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따지는 것은 마치 부엌칼을 놓고 큰 칼이 가치가 있느냐 작은 칼이 가치가 있느냐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참된 부흥이 일어나던 때에 하나님의 교회는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사모하니까 사람들이 모이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기를 원하고 말씀이 끝나고 나면 가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기도하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지체들과 함께 교제하기를 즐거워하고 그것을 특권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때 교회에서 최고로 무서운 벌이 무엇입니까? 출교입니다. 너 그렇게 잘못을 많이 했으니까 6개월 동안 교회를 나오지마 하면 6개월 동안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모임과 이 사귐이 너무 사랑스러운데 나오지 말라고 하니까, 지금은 쳇 하고 2층에서 자르면 1층으로 내려가고 1층에서 자르면 지하실로 내려간답니다. 또 저쪽 교회에서는 장로를 줄 테니까 유혹까지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무슨 징계라고 하는 것이 우스운 것이 됩니다. 남의 교회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교회 이야기입니다.
초대교회 때 안 믿는 집에 자녀들을 시집을 보내면 어머니, 아버지가 징계를 받습니다. 성찬을 받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6개월 내지 1년 동안 수찬 정지, 봄, 가을로 하는 성찬에 참여할 수 없게 됩니다. 요즘 사람들은 성찬 정지 하면 슈퍼에 가면 빵이 많고 포도주도 많은데 무슨 그것하며 치사하다고 합니다. 큰 감격 가운데 성찬을 받아 본 경험이 없고 그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하나도 겁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맺고 살아가는 이 사람들이 교회를 사랑하게 되고 뜨겁게 그 교회 속에서 기뻐하게 될 때에 그 속에서 진리를 듣고 그 속에서 진리 때문에 진리를 함께 알았던 사람들과 진리를 이야기하기를 즐거워하고 더 깨달아 알기를 원하고 함께 진리를 찾아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기를 원하고 하는 이런 것입니다. 이것이 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사도들의 선포가 있었습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선포가 있고 은혜를 받고 사람들이 헌신을 하고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런데 앞에 것 모두 빼 버리고 모이기만을 사랑하는 방법으로 만드는 것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로 충만하기 때문에 교인들이 모이는 것과 우정으로 모이는 것 때문에 충만한 것과의 사이는 분명히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신령한 은혜가 충만하고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고 영적인 깊은 감격이 있기 때문에 이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고 그 속에서 마른 땅에서 샘이 터지는 신앙의 개인적인 감격을 느꼈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에 머물러 있기를 즐거워하는 것과 우정으로 충만해지는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신령한 은혜로 가득차고 충만해진 교회는 영혼 구원을 지향합니다. 우정으로 충만해진 교회는 세상을 향해서 그런 우정을 나누어 주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영혼 구원에 대한 복음에 대한 열정이 세상을 향한 봉사 정도로 대치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들이 하나에서 뒤틀리기 시작하니까 연쇄반응을 일으키면서 다 뒤틀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그림이 잘못된 그림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교회 오시는 분들에게 늘 그렇게 고합니다. 가끔 보면 제가 가르쳤던 제자들도 옵니다. 그 사람들이 영원히 우리 교회 교인이 될 일이 있습니까? 가서 전도사하다 목사하다 와가지고 6개월 쉬는 동안 이 교회 출석하겠다는데, 내가 얘기를 했습니다. 출석하는 동안에 출석한다 말하지 말고 6개월이 되었든 3개월이 되었든지 교인이 되어서 이곳에서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힘나는 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의 지체로서 예배의 의무를 다하고 그 특권을 모두 누리다가 주께서 부르시면 가라고 했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시인은 통곡의 골짜기를 지나야 할 때에 마른 땅에 샘이 터트려져서 그 샘을 먹으며 노래를 부르며 그 통곡의 골짜기를 더 이상 흐느끼지 않고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때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교회가 깨달아야 할 복음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기회 있는 대로 사람들에게 다가가십시오. 권고하십시오. 너의 불완전한 신앙생활에 모든 기초는 하나님의 교회와의 불완전한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와의 불완전한 교회는 하나님과 불완전한 관계를 보여주는 반영입니다.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렇게 눈물 골짜기와 같은 위기 상황을 지나면서 마른 땅에서 샘이 터지는 그 은혜로 말미암아 어두운 세상을 힘 있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니까 그 골짜기를 통과한 다음에 더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마지막에 나는 주님의 집에 문지기라도 나를 붙여 주옵소서. 주님의 집에 문지기라도 있겠나이다. 그렇게 있는 것이 악인의 궁궐에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고 보람 있고 즐거운 일이기 때문에 이렇게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교회에서 섬기는 그 직원들이 모든 일하는 일꾼들이 이러한 감격 속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특권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직업주의로 흐르게 됩니다.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일이 바로 그런 일들입니다. 가슴에 불타오르는 어떤 동기도 없고 하나님과의 감격도 없으면서 기계적으로 자기의 의무를 감당하는 일, 이런 것들은 올바른 교회와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터트려진 샘물을 얻게 되고 그 샘물을 먹고 기운을 차리고 힘과 용기를 얻어서 다시 사람들에게 그 예수의 사랑을 전하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어주는 샬롬의 사람들이 되어서 어두운 세상을 지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비를 만드나이다. 무슨 뜻입니까? 여기에서 이른 비라고 번역을 했는데 이른 비와 늦은 비, 이른 비가 오면 파종을 하고 늦은 비가 오고 나면 추수를 한다고 했습니다. 비가 드문 지역이기 때문에 이 비는 아주 중요합니다. 비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게 비를 내리게 해서 하나님 안에서 축복을 받고 풍성한 열매를 내게 하는 이런 도구들로서 눈물 골짜기를 지날 수 있는 새 힘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있는 자는 점점 더 있게 되고 없는 자는 점점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그 속에서 시온의 대로를 소유하고 있고 그 하나님의 집에 거하면서 거기서 하나님께 힘을 얻는 사람들은 그 힘을 가지고 통곡의 골짜기를 지나면서 샘을 터트리고 터트린 그 샘에서 먹고 마시니까 또 그 골짜기를 지나면서 노래하고 통과하고 나니까 더욱 뜨거운 감격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런 관계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런 힘이 없으니까 눈물 골짜기에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원망하고 미워하고 원한 맺힌 상태로 살아가다 힘없이 골짜기에서 살아나오니까 이제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힘을 다시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악순환이 계속 되풀이 되는 것입니다.
늘 말씀 드리지만 1년에 한번 6개월에 한번 이렇게 철새처럼 교회를 옮겨 다니는 사람은 신앙도 철새를 면할 길이 없습니다. 교회를 옮길 때에는 원리가 있습니다. 한 원리만 기억하면 됩니다. 교회를 옮길 때 하나님의 분명한 응답을 받고 옮기라는 것입니다. 떠날 때에는 응답도다 더 센 응답을 받고 떠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이 그 후에 벌어지더라도 그 확신을 놓칠 수 없을 정도로 그런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움직여야 합니다. 교회 옮길 계획표를 수첩에 적어가지고 다니는 사람, 1월부터 6월까지는 설교 잘하는 교회, 7월부터 12월 까지는 행정을 잘하는 교회, 내년 1월부터 6월까지는 제자훈련을 잘하는 교회,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 비도 만들 수 있는 은혜를 주십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엘리야입니다. 그 사람을 가리켜서 어떤 성경 주석가는 하늘을 잠그고 열쇠를 호주머니에 집어넣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올라가서 다시 열어 준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늘을 열고 닫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살아가면 나만 은혜 받는 것이 아니라 나로 말미암아서 수많은 사람들이 사는 것입니다. 그 비의 혜택을 받고 사는 것입니다. 그 은혜의 혜택을 받으면서 사람들이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 영향을 끼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이런 모든 삶 세상을 향해 영향력이 있는 삶 가운데 이것이 있습니다. 년 초에서부터 표어 같은 것은 우리에게 없지만 늘 강조하는 것이 금연은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자입니다. 허황된 것부터 붙잡지 말고 불꽃이 일어나는 그 부딪힘이 어떠한 조건들을 갖추어 질 때 일어나는지를 우리들이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영적으로 충만한 교회에서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고 통곡의 골짜기를 지나야 할 때 그 속에서 힘을 얻고 대로를 마음에 간직하며 주께로 힘을 얻고 살아가는 매일 매일의 삶, 이런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어두운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가장 강하고 중요한 도구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늘 새로운 힘과 그 은혜를 입으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갈 수 있도록 교회를 위해서 교회 전체가 하나님과 갖는 관계를 위해서 늘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부르신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인 것입니다.
저희는 함께 힘을 얻고 더 얻어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나타나리이다. 힘을 얻고 통곡의 골짜기를 믿음으로 통과하고 메마른 골짜기에서 샘이 터지게 하고 비가 오게끔 해서 그 골짜기를 통과했는데 힘을 얻고 다시 또 힘을 얻는 것입니다. 있는 자는 점점 더 부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힘을 얻고 능력을 얻고 위로를 얻고 이런 일들이 시온에서, 성소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말의 의미를 우리들이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서 그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영적인 영향을 받으면서 그의 임재 속에서 새로운 힘과 능력과 은혜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할 삶의 방식입니다. 근본적으로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하면서 교회와의 관계를 점검해야 됩니다.
사랑할 수 있는 교회를 가지지 못한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전심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아까워하지 않고 하나님께 바치고 재능을 다해서 섬기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즐거워 할 수 있는 교회, 바카 통곡의 골짜기를 지날 때 생각나는 그 교회가 없는 사람들은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이것이 하나님 앞에 늘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마지막에 보니까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내 기도가 히브리어 성경에는 테필라피 단수로 나오는데 나의 한 기도를 들으소서입니다. 오직 기도 제목이 하나입니다. 그 한 기도의 제목을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반복되고 계속 내 입을 통해서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하나님 앞에 하소연 하고 있는 한 가지 기도 제목을 들어 주시옵소서. 그 얘기는 여호와의 집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해 가면서 우리들은 어떤 때는 부흥회를 열어서 큰 은혜를 받기도 하고 어떤 때는 수련회 가서 은혜를 받기도 하고 어떤 때는 새벽 기도 때 와서 혼자 기도하다가 하나님을 만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책을 읽다가 하나님을 만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구역 예배를 드리다가 하나님을 만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는 것이 어디 한 가지 방법이겠습니까?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렇게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교회가 사랑스러워 지는 것입니다. 왔다가 떠나는 사람은 교회에서 은혜를 못 받으니까 금방 가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고 깊은 감화가 있으니까 하나님의 교회가 더 사랑스러워 지고 이제는 단순한 건물이 아닙니다. 이 교회에 와보지 않은 사람들은 여기를 탁 들어오면서 별별 생각을 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 대부분 쓸데없는 생각입니다. 하필이면 화장실 앞을 통과할까? 또 지하실인데 불나면 어디로 도망가나? 아니면 이 지역은 교회가 설 자리가 아닌데, 아니면 좋은 색깔을 잘 칠했네, 별 생각을 다 할 것입니다.
참 신기한 게 있습니다. 목회자도 사람인데 이렇게 있다가 수백 명 모이는 교회에 가서 오백 명, 육백 명 사람이 막 들어오고 심지어는 한 자리에서 몇 천 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에 서면 그 교회가 좀 부러워야 될 거 아닙니까? 나도 이런데서 목회하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설교할 때 한 줌 밖에 안 되는 사람들 말고 한 아름 되는 사람들이 수천 명 앉아서 설교를 들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전혀 그런 생각이 안 듭니다. 2주 전엔가 3주 전에 집회를 갔는데 너무 우리 교회가 오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비교 개념이 안 듭니다. 그 교회는 그 교회로서 족하고, 그렇다고 이런 심리가 어떤 콤플렉스 때문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가면 교회 구경 시켜 달라고 하고 3층, 4층으로 올라 다니고 그러는데 나는 그런 마음이 별로 안 생깁니다. 잘 지었으면 자기네 거기에서 예배드리면 됩니다. 나는 여기가 좋습니다. 가장 행복하고 편안합니다. 그 교회 하고는 사연이 없습니다. 일주일이라도 가서 땀을 다 쏟고 집회를 하고 온 교회는 또 틀립니다. 그 다음에 몇 년 만에 다시 집회 초청을 받고 가면 기도할 때 저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이 은혜를 참 많이 받았는데 그런 생각이 떠오르고 얼굴이 떠오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고 은혜의 체험이 있고 말씀으로 말미암는 변화들을 우리들이 늘 경험하고 이 속에서 새롭게 하나님을 알아가는 놀라운 은혜의 체험이 있고 간증이 있게 될 때에 이것은 장소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전에 계시던 목사님이 자기는 나이가 칠순이 다 되었는데도 어느 날 밤은 엄마가 보고 싶어 운답니다. 그 목사님은 어버이날 설교는 수많은 사람을 울리는 것입니다. 당신이 북에 두고 온 어머니에 대해 한이 맺힌 것입니다. 어머님 음식 솜씨도 그렇고 해서 굉장히 멋있는 할머니인줄 알았는데 하시는 말씀이 우리 어머니는 곰보였답니다. 그런데도 그 곰보 하나하나에 파인 구멍에 사랑과 정이 가득했기 때문에 자기는 곰보로 된 사람만 보면 당신 어머니가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은혜를 받고 응답을 받고 눈물 흘리며 기도하고 내 인격이 깨트려져서 그리스도의 향내가 나는 인격으로 새롭게 고침을 받고, 바카 통곡의 골짜기를 지나야 될 때에 아 내가 저 자리에 앉아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큰 응답을 받고 그 골짜기에서 샘이 터지는 역사가 일어났지 할 때에 그것을 만지면서 그 책상이 얼마짜리 책상이냐 그런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여기에서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말씀으로 섬길 때에 수많은 성도들이 감격하고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고 주님을 사랑하는 인격으로 바뀌게 되는 역사가 일어날 때 수십 년이 흐른 뒤에 이 강단을 어느 창고에서 만났다고 합시다. 이게 얼마인가 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이곳에서 하나님과 말할 수 없는 사연들을 관계 속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더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아끼게 되고 물건도 아끼게 됩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공간이 어떠하든지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시인이 하나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한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의 한 귀도에 귀를 기울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의 삶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