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보다 귀한 것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 40:6-8).
아마 이것은 회상하는 것 같아요.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죄를 지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깊은 침체의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제사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했던 거 같아요. 그래서 시편 51편에 보면, 자기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범죄하고 난 후에 자기의 심경을 노래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이 기뻐하셨더라면 내가 번제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번제를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것은 상한 심령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고백해 가는 거죠.
20세기의 신학자 가운데 아주 걸출한 칼빈주의자였던 워필드 박사는 이 부분을 해설을 하면서 이것은 다윗이 이 범죄를 통해서 아주 깊고 심오한 복음을 깨닫게 된 것이라고 해설을 했습니다. 다윗이 살았던 시대가 주전 10세기였다는 것을 생각을 하면 그 때에 "하나님은 제사를 즐겨하지 아니하시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상한심령이라" 이것을 깨달았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렇게 고백했을 때, 그것은 엄청나게 충격적인 발언이었고, 왕이었으니까 망정이지, 다른 사람들이 그런 발언을 했더라면 아마 커다란 종교적인 논쟁에 휩싸였을 수도 있을 그런 발언이었거든요. 근데 그러한 것을 바로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영혼의 깊은 침체에 있는 동안에 깨닫게 된 거에요.
사실 다윗이 그 범죄를 하기 전까지는 참 순전하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았죠. 그런데 이 범죄를 통해서 그의 영혼은 일찍이 들어가 본적이 없는 깊은 영혼의 침에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려서부터 제사에 익숙해져 온 다윗이 죄를 지었을 때에 제사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그 율법에 익숙해져 있었을 것은 너무나 당연하잖아요? 그리고 이 사람은 왕이었어요. 그러니 얼마나 많은 제물이 있었겠어요? 그런데 그 제물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려 자기의 죄과를 씻어보려는 시도들을 했던 것 같고 거기에는 어느 정도 진실한 신앙심이 작용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차갑게 거절하시는 것을 시인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이러한 제사가 있기 전부터 다윗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서 산 사람이었기 때문에 제사를 드려도 하나님께서 이것을 받으시지 않는다고 하는 깊은 한계와 어려움들을 느꼈던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자기가 죄를 지었을 때, 이 제사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이에요. 이런 체험들이 토대가 되어서,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의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 하신다" 고백을 하게 된 것이에요. 어쩌면 이 40편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깊은 웅덩이와 수렁, 어쩌면 51편에 나오는 참회의 동기,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범죄에서 비롯된 침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우리들이 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이제 이 사람이 제사와 예물을 좀 더 구체화 시키면서 고백하기를, "번제와 속죄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랬거든요." 이 번제는 불로 태워서 드리는 제사인데, 태워서 드리지 않는 제사가 별로 없지만, 번제는 특별히 헌신을 가리키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 앞에 헌신을 가리키는 제사에요. 그런데 이 번제에서 모두 다 태워서 하나님 앞에 드리게 됩니다. 이것은 헌신이에요. 반면에 속죄제는 죄로부터의 구속을, 용서를 비는 그런 제사에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이 두 가지 제사에 몰두 했던 것을 볼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모든 것을 태워드리는 번제와 죄의 용서를 구하며 드리는 이 모든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니까 제사 자체가 사람을 바꾸어 놓는 위대한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정말 온전하게 제사의 정신에 부합하는 존재가 될 때에, 그 때에 그 사람이 그런 존재가 될 때에, 이 사람이 제사를 드리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구약의 제사 맥락에서 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제사와 제사 드리는 사람의 내적인 마음의 질이 일치할 때, 그게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제사에요. 그러니까 마음에 없는 제사를 드리는 행위가 그 사람 자신을 바꾸어 놓지 못합니다. 그것이에요. 그래서 공의는 바로 제사를 드리는 고백과 제사 드리는 자의 마음이 일치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에요.
그러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번제와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 한다"라는 메시지를 받게 되었을 때에 그 때에 시인이 그러면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할까?" 깨닫게 된 것이 무엇이냐면,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거워하오니, 내가 두루마리에 기록된 주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내가 왔습니다" 그 고백이에요. 그래서 "주의 법이 내 심중에 있습니다." 이 고백이었어요. 그러니까 제사보다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이라는 거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전임자인 사울이 그 위에서 내침을 당하면서 사무엘 선지자에게 들었던 말씀이잖아요. 사무엘이 뭐라고 했어요?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 그 말을 선언함으로써 이제 한 때에 하나님께 선택받았던 사울이 왕의 지위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에요. 똑같은 것을 전임자에게서 보고, 그래서 하나님이 전임자를 치우시고 다윗을 후임으로 삼으셔서 등극시키셨는데, 다윗이 똑같이 전임자인 사울과 같은 생각 속에서 살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순종보다는 제사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 뜻을 행하는 것 보다는 번제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에요. 그 끔찍한 고통을 통해서, 영혼의 깊은 침체의 아픔을 통해서 이것을 깨닫게 된 거에요. 그러니 순종하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 삶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잖아요.
그러면 여기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의문이 생기죠.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왜 그러면 51편에는 '참회하는 심령'이라고 했는데, 왜 여기서는 '주의 뜻을 행하는 것', 이것을 하나님이 번제와 속죄제를 대신해서 받으신다고 고백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잖아요? 그렇죠? 그것은 결국은 상한 심령이 되지 아니하고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기를 즐거워하는 사람이 될 수 없는 거죠. 불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마음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자기의 마음에 한 경향이 된 상태에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깊이 참회 한다"라고 하는 것은 이 잘못된 마음과 영혼의 경향을 바꾸는 것이에요. 그래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 그 자체가 뭘 "안 믿는 것을 될 것이다"라고 신념을 갖는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진정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주가가 오르는 것을 믿는다, 사놓은 부동산이 급등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 종류의 믿음은 영혼의 변화하고 상관이 없어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믿음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믿음이기 때문에 인간의 영혼, 그 자체를 자기를 향하던 것을 하나님 향하게 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들을 하나님 사랑하게 하고, 자기의 욕망에 굴복하는 것들을 하나님께 굴복하게 하는 영혼 자체의 경향성의 변화에요. 그런 놀라운 영혼 자체를 움직여 놓는 아주 위대하고 놀라운 힘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믿음은 사랑이고, 믿음은 소망이고, 믿음은 영혼이 움직이는 영적인 변화란 말이에요. 참회가 똑같이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는 거죠.
다만 구원에 이르는 그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참회, 구원에 이르는 그 믿음은 한 번의 결정적인 변화이고, 살면서 하나님 앞에 참회하는 이것은 그 결정적인 것들을 강화하는 부차적인 작용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지, 모두 이 참회는 영혼과 마음의 근본적인 변화를 위한 작용이란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욕망을 자신의 법처럼 여기면서 살던 사람이 "주의 법이 내 마음에 있나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없다는 거죠. 그래서 결국은 이러한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음적인 새로운 성품을 발견하게 되는 거에요. 그러니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던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어떠하심,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향해 바라시는 바가 어떠한가? 라고 하는 것을 깨닫는 그 자체가 얼마나 소중한가?" 하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