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자의 기도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시 86:1)
본문해설
86편은 탄원시입니다. 개인적인 탄원과 하나님을 향한 찬송, 그리고 대적으로부터 자기를 구해주시기를 바라는 호소가 섞여서 17절까지 계속 되고 있습니다. 모든 시는 아니지만 시인은 상당수 시를 그렇게 썼습니다. 1절은 총론적으로 하나님께 호소하고 자기가 왜 그랬는지를 2절부터 반복해서 서술해나가는 방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86편이 바로 그 형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름
시인은 말합니다.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존함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주님’이라는 말도 사용하고 ‘하나님’이라는 말도 사용하고 ‘여호와’라는 단어도 사용하지만 하나님의 존함 중 가장 직접적이고 거룩한 존함이 바로 ‘야훼, 여호와’라는 이름이었습니다. 네 글자로 되어있는 ‘테트라그라마톤’(Tetragrammaton)이라는 신명인데 너무 거룩해서 감히 부르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글씨를 ‘여호와’라고 써놓고 읽을 때는 ‘아도나이’, ‘주님’이라고 읽을 정도로 감히 부르지 못했던 존함입니다. 모두 한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특별히 ‘야훼’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위대하심,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신 당사자로서의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여호와’라는 이름을 하나님 앞에 되뇌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있는 언약관계를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가깝게는 다윗, 멀리 보면 모세, 더 멀리 보면 이스라엘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까지 소급해 들어가면서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언약, 즉 하나님이 당신의 큰 은총과 권위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 하나님과의 관계로 데려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언약백성으로서의 의무를 지닌 거룩하고 특별한 의무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의식 속으로 데려간 것입니다. 어떤 의무를 진다고 할 때 어떠한 특권도 따르지 않는다면 그 의무가 거추장스럽고 힘든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의무에 어떤 특권이 따르거나 의무가 의미하는 바가 그 사람을 매우 특별하게 구별 짓는다면 오히려 그 의무를 지고 있는 것이 말할 수 없는 행복이 됩니다.
그리스 시대에 전쟁이 나면 노예들은 전쟁을 해야 할 의무가 없었습니다. 시민들, 양민들만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군대를 모두 모아서 제국이 된 다음에는 그렇게 했지만 제국이 되기 전, 도시국가로 있을 때는 나라에서 군대를 모아 군 장비를 지급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돈을 벌어서 좋은 무기를 사서 하나 둘씩 가지고 있다가 전쟁이 나면 긴급 출동을 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나라를 위해서 싸울 수 있다는 것을 엄청난 특권으로 교육받았던 것입니다. 돈을 벌어서 좋은 말을 사고 훌륭한 갑옷을 사고 창과 칼을 사서 갖추며 살아가는 것을 특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노예나 나그네들에게는 그런 권한을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은 양민으로서 커다란 특권을 누리고 시민으로서 통치자들을 자신의 힘으로 뽑았습니다. 통치자가 정치를 너무 잘못하면 ‘오스트라카’라는 제도를 통해 투표해서 해임할 수 있었습니다. 노예나 외국에서 와서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권리를 주지 않은 것입니다. 시민이라는 것 자체는 그런 커다란 권리를 의미합니다. 그 의무를 행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고, 오히려 그런 의무가 부과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소외감을 주는 것이 됩니다.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존함이 우리에게 그런 것들을 함께 말해줍니다. 하나님께 특별히 선택을 입어서 구원된 백성, 하나님이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기억하셔서 그들을 애굽의 포로 된 데서 건져주신 은총을 입은 백성, 율법을 주셔서 지키며 살게 하신 백성, 하나님이 간섭하셔서 늘 보호하시는 백성,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할 의무를 지닌 백성, 하나님과 자신들 사이에 불변하는 언약에 대한 그림을 가지고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존함을 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주님’, 혹은 ‘하나님’이라고 불러도 그런 개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야훼’라는 하나님에 대한 존함 속에 그런 그림이 아주 강하게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구원해주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수립된 새로운 은혜의 언약입니다. 우리가 “주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라고 부를 때 큰 사랑을 받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언약관계에서의 의무를 가지고 그리스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죄를 지을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지으려고 하는 이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자기 안의 죄를 죽이라고 권고합니다. 언약관계의 축복과 우리의 의무에 대해 함께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그것보다 훨씬 더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피상적입니다. 시인은 그보다 더 진지하고 깊은 느낌을 가지고 ‘야훼’라는 이름을 불렀던 것입니다. 끊을 수 없는 하나님과 시인과의 사랑, 그리고 언약적인 특권과 거룩한 의무로의 부르심, 이런 그림을 가지고 ‘야훼’라는 존함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가난할 때
그러면서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상태를 먼저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것입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주님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해주십시오. 왜냐하면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나옵니다. 시인은 “가난하고 궁핍합니다.”라고 자신의 상태를 고백하는데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이것이 정확한 번역입니다. 1절부터 하나님께 탄원 드리기 전에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그분 앞에 보이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을 모두 쏟아 놓는 것 같은, 하나님을 향해 물같이 녹는 마음을 1절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가난하다’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인가 자원이 필요한 상태를 가리켜서 가난하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육신적으로 가난한 것은 이 지상에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가난한 것은 하늘의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이 땅에서 빚어졌기 때문에 결국은 이 세상의 많은 자원들을 필요로 합니다. 자원이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매일 밥을 먹어야 하고 매일 마셔야 하고 매일 따뜻한 잠자리가 필요합니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문만 나가면 모두 돈이 필요합니다. 소비를 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지상의 자원을 소비하지 않고는 한 걸음도 떼어 놓을 수가 없습니다. 집 밖을 나서는 순간, 신발을 신어야 합니다. 그래서 소비를 합니다. 옷이 있어야 합니다. 자동차에 시동을 걸려면 기름이 필요합니다. 끊임없이 소비하면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75세쯤 되는 어떤 사람이 철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자기가 태어나서부터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고 얼마를 벌고 얼마를 썼는지를 적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양입니다. 철들면서부터 칠십 대 중반까지 썼으니 어마어마한 양이지 않습니까? 199억 원을 벌어서 196억 원을 썼답니다. 사람의 일생이라는 것이 특별한 사람 외에는 번 돈의 대부분을 그렇게 소비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자원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늘 자원의 중요성
우리는 이 세상의 자원으로 살지만 우리의 영혼은 하늘로부터 왔기 때문에 하늘로부터 오는 자원이 필요합니다. 불신자들은 물론이고 신자들조차도 이러한 사실을 너무 모릅니다. 영혼에 대한 감각이 흐려지면 영혼의 깊은 몸부림과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고 외면한 채, 육적인 욕망만을 극대화시킴으로써 영혼의 허함을 달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의미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예전에 없던 하늘 자원을 공급받으면서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의 말씀은 영혼의 양식이고 기도는 영혼이 하나님을 호흡하며 살 수 있는 자원을 우리에게 공급해줍니다. 물론 우리가 물질적인 자원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으면 어려움을 덜 만나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물질적인 자원이 있어서 어려움을 덜 만나거나 고통을 경감시킬 수 있다고 하더라도 삶이 직면하는 다양한 사태들을 근원적으로 행복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돈 많은 사람들은 자살도 하지 말아야 하고 고뇌도 없어야 하고 불행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결국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하고 신령한 자원을 힘입어 그 자원을 가지고 우리가 수시로 직면하는 삶의 사태 앞에서 헤쳐 나가게 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셔서 맺게 하시는 모든 관계들을 올바르게 유지해 나가는 힘들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불신자들뿐만 아니라 신자들에게도 종종 이러한 하늘의 자원이 딱 끊어지는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영혼의 침체 가운데 있을 때,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때, 범죄 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질 때는 하늘의 자원이 없는 것입니다. 원래 없는 사람들은 그런 것을 기대도 안하고 삽니다. 물도 없고 영양분도 없는 땅에서 형성되는 생태계와 땅의 자원이 풍부한 상태에서 형성되는 생태계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시냇물이 잘 흐르고 풍부한 영양분들이 있는 땅에서는 아름다운 풀과 수초가 자랍니다. 물이 다 사라지고 소위 ‘와디’라고 하는 무수천이 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이파리도 없는 거친 식물들이 그 속에서 자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고 나면 원래 그것을 몰랐던 때는 그냥 살았는데 신앙생활을 온전하게 못하고 하늘의 자원이 공급되지 않으면 불신자 시절에 살았던 것보다 더 힘든 상황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 자원이 있다는 것에 대해 눈을 떴고 누린 적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사라졌을 때 그 고통이라는 것은 굉장히 큰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말씀생활을 잘 하고 기도생활을 많이 하고 추운 새벽에도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나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은 남이나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왜 이렇게 말끔한 옷차림으로 나오셨습니까? 새벽기도 끝나고 돈 벌러 가려고 그러는 것 아닙니까? 왜 그렇게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야 되는 것입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이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죽을 수도 없습니다. 나이 드신 노인들을 대상으로 방송에서 계속 선전을 합니다. 죽을 때 자녀들한테 폐 끼치지 말고 죽으면 이천만원 주는 것을 들라고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죽어서 시체를 치우려고 해도 돈이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돈을 지불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불하지 않으면 시청에서 행려병자로 취급해서 처리를 해줍니다. 그것이 사회입니다. 그러면 그와 동일하거나 그 이상의 열심을 가지고 하늘의 자원을 자신 속에 채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궁핍할 때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시인은 매우 가난한 상태입니다. 이 시를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썼는지 왕이 된 후에 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왕이 되고 난 다음에 쓴 시 속에서도 똑같은 말이 후렴어구처럼 반복됩니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것은 단지 지상에 있는 육체의 자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자신이 핍절한 상태가 되었고 주님의 매우 특별한 은혜의 자원이 필요한 때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 영혼의 가난함, 심령의 가난함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궁핍하다’라는 이야기는 도움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물질적인 궁핍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시편 86편을 다 읽어보십시오. 왜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까? 지금 교만한 자들과 포악한 무리들이 일어나서 이 시인을 죽이려고 합니다. 집요하게 시인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으로 이들을 대적할 수가 없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나는 가난하고”라는 대목은 하나님 앞에서 영혼의 가난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궁핍하오니”, 즉 “나는 도움이 필요한 상태입니다.”라는 말은 세상에 있는 물질과 사람들의 관계의 질서에 있어서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난관에 처해있는 상태에 관해 호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가 쏟아져 나올 때는 어느 때입니까? 기도는 우리 마음의 연주입니다. 그래서 바이올린이나 피아노가 조율이 잘 되어 있으면 환상적인 소리가 납니다. 조율이 흩어지면 영 아닌 소리가 납니다. 그것이 악기를 다루는 기술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잘 조율되어 있을 때는 기도가 물처럼 쏟아져 나옵니다. 조율된 상태가 하나님을 향한 갈망입니다. 삶의 모든 어려움들을 하나님의 도움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하나님을 향한 가난한 마음, 하나님을 의지하는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 이것이 바로 기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은 살기 위한 것이고 기도가 끝나고 사는 것은 다음에 기도하도록 자신의 마음을 준비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귀를 기울이소서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여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귀’라는 단어가 히브리어 성경에 단수로 나옵니다. 두 귀는 멀리서 큰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쪽 귀를 기울여달라는 이야기는 가까이에서 하는 이야기를 말합니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남이 듣지 못하도록 소곤소곤 이야기할 때는 두 귀에다 대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한쪽 귀에 대고 이야기합니다. “제가 지금 시련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 앞에 작은 소리로 읊조리는데, 그것을 들을 수 있도록 당신은 내 입 가까이에 당신의 귀를 주소서.” 이러한 이야기입니다. 나의 탄원을 들어달라는 거친 울부짖음이 아니라 만사에 지쳐서 하나님의 두 귀에 들리도록 부르짖을 수 있는 기운조차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런 분은 아니시지만 문학적으로 그렇게 호소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한 귀만 나에게 기울여주시옵소서” 굉장히 인상적이지 않습니까?
환자가 병원에 누워서 말할 기운이 없을 때 그가 뭐라고 하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가까이 와서 상체를 숙이며 죽어가는 사람에게 귀를 기울여 대주면서 이야기해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는 유훈과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이 시를 그런 식으로 해석해보면 “하나님 도와주십시오”라고 당당하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절절하게 “한 귀만 나에게 기울여 주십시오. 당신은 내게 가까이 오십시오. 나를 친근히 대해주십시오. 내가 당신에게 호소할 말이 있습니다. 당신 외에 아무도 나의 울부짖음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 귀에만 비밀히 말하고 싶습니다.”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 때 어려움이 생기거나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겪거나 간절히 바라는 일들이 생기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서 지혜를 구해야 할 때도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 앞에 세우시기 위해서 그런 어려움을 쓰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때 시인의 말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당신의 한 귀를 나에게 기울여주십시오. 내가 당신께만 드릴 말이 있습니다.”
결론과 적용
1절은 시인이 느끼는 절절함이 얼마나 간절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삶의 사태를 만나면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아니면 사태를 직면하지 않으려고 하거나 사람들을 미워하면서 인생의 에너지를 허비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 나에게 당신의 한 귀를 기울여주십시오. 당신께 갈 힘이 없사오니 주님은 내게 가까이 오시옵소서.” 이렇게 호소하며 주님께 마음을 쏟아놓아야 합니다. 그런 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치매에 걸리거나 정신에 이상이 오면 그렇게 의지하던 하나님께 기도할 수조차 없게 됩니다. 이것도 우리에게 주신 한 때입니다. 마음을 쏟으며 시인처럼 주님께 간구하는 사람들 되기를 바랍니다.
시편86편 강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