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피난처이신 하나님 1
“하나님이 그 여러 궁중에서 자기를 피난처로 알리셨도다”(시 48:3).
이 부분이 좀 그 히브리어 본문이 좀 복잡하고 어려워서 그 대게 다른 번역들을 여기서 여러 가지로 내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삼절에서부터 나오는 내용은 그 하나님이 당신 자신이 피난처이신 것을 공동체적으로 입증하시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 개개인이 어려움을 당할 때 피난처이시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자체가 위태롭고 어려움을 당할 때 피난처이기도 하거든요. 그렇게 그 그래서,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이 국가적으로 어려움을 당할 때, 이스라엘이 국가적으로 어려움을 당할 때,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피했더니 하나님이 나라를 구원하신 이야기는 전쟁의 역사에서도 특히 많이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오늘날 하나님이 내 인생의 어떤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께 피하고 하나님께 도망치면 하나님이 나를 숨기시고 보호해 주신다 라고 하는 생각은 있지요. 그래서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그래도 신앙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매달리게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 하면 이런 생각이, 이런 생각을 공동체적으로 갖고 있지 못해요. 그것이 문제예요. 그래서 오늘날의 우리의 신앙은 그 반쪽짜리 신앙이에요. 성경은 철저하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개인적으로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다루어 가시는 거예요. 본문의 내용은 아니지만 조금 더 말 나온 김에 설명을 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될 거 같아요.
하나님이 맨 처음에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그때에 좀 이상하지 않아요? 아니 뭐 이렇게 복잡하게 하나님이 명령하시기를 바다에는 물고기들이 다니고, 하늘에는 공중에는 새들이 날아라, 땅 위에는 온갖 짐승들이 있거라 로 한번 명령하시니까 그대로 되잖아요. 그게 뭐 복잡하게 한 사람만 만들어서 그저 태어나고 또 무슨 시집, 장가 복잡하게 하시는가. 땅위에는 인간들이 수두룩하게 살아라, 그렇게 한 번에 휙하고 창조해 버리시면 여기저기 사람들이 수없이 흩어져서 살 거 아니에요. 왜 하나님이 그렇게 안 하셨을까라는 궁금증 안 드세요? 외롭고 힘들게 그 왜 한 사람을 창조하시고 조금 있다가 또 한 사람을 창조하시고 해서 모두 그 두 사람에게서 씨가 나와서 퍼지게 하셨을까 라는 궁금한 생각 안 드세요? 성경을 보면서 쓸데없는 공상하는 거야 위험하지만 정당한 생각을 하면서 혹시 거기에는 무슨 뜻이 있을까라고 생각하는 것은 참 건전한 거예요.
왜 그러셨을까요? 만약에 한꺼번에 하나님이 수천만의 사람을 땅 위에 확 창조해 버리셨으면 그게 가족일 수가 있겠어요?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이 가족이야 가족.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당신을 아버지로 하는 가족으로서 살아가기를 원하셨던 거예요. 당신과 관계를 맺고, 그게 공동체적이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한 사람의 남녀를 지으셔서 그래서 만드셨는데, 그것도 참 재미있는 게 남자와 여자를 동시에 확 창조해 버리셨으면 그리고 서로가 관계없이 창조하셨으면 둘은 가족이 될 수가 없겠죠. 결혼을 했으면 가족이 아닙니까 물론 그렇죠. 그런데 하나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굳이 아담은 흙을 빚어서 만드셨는데 하와는 흙을 빚어서 만들지 아니하시고, 또 동시에 만들지도 아니하시고 아담의 갈비뼈를 빼어서 그래서 그를 만드셔서 그래서 그를 아담의 아내를 삼으신 거예요. 그러니까 둘이 존재에 있어서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주시고 싶었던 것이죠.
그리고 그 이후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은 어떤 인간도 그리스도 예수를 제외하고는 어떤 인간도, 혹시 죽음을 보지 않고 올라간 인간은 희귀하게 가끔 있었지만 엘리야나 모세나 이런 사람들처럼, 모세야 좀 틀리지만 엘리야 같은 사람처럼 그런 사람은 있었지만, 남녀의 결합을 통해서 이 세상에 오지 않은 인간은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게 신기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왜 하나님이 데려가실 때 특이한 방법으로 데려가셨으면 올 때도 좀 특이한 방법으로 오는 인간들이 한 교회에서 그저 대여섯 명씩 이렇게 나올 만한데 왜 그러셨을까 라는 생각은 안 드세요? 그렇게 하시면 안 되었던 거예요. 어떻게?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것이 하나의 가족으로 만드시는 것이었어요. 근데 죄 때문에 그것이 모두 실패한거죠.
실제로 생육하는 면에 있어서는 그 피를 받아서 인간이 계속해서 만들어지지만, 그렇게 인간이 그 피를 받아서 인간들이 만들어지지만 그런 종류의 가족을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은 아니거든요. 혈통적인 그런 가족이 아니라 하나로 일치를 이루어, 하나로 일치를 이루어 사랑 안에서 서로가 한 가족이 되는 그것을 원하셨던 것이죠. 이게 죄로 말미암아서 깨지는 거죠. 혈통은 남녀의 결합을 통해서 태어나는데 근데 산산이 부서져서 부모를 미워하고 죄가 들어오면서 제일 먼저 일어나는 게 가정을 깨뜨리는 거잖아요. 어떻게? 아담과 하와 사이가 갈라지고 그 다음에 형인 가인이 동생인 아벨을 때려죽이는 거죠. 그러니까 성경 전체의 역사는 온 인류를 가정으로 묶으셔서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역사와 죄의 물을 먹은 인간들이 그렇게 공동체적으로 살기를 거절하면서 그것을 부서뜨리는 것의 역사, 갈등의 역사 그래서 구속의 대 드라마가 이어질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시는 그 첫 번째 일이 뭐냐 하면 당신의 구속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인간들을 하나씩 연합시키셔서 그래서 그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를 이루게 하시는 거예요. 교회를 이루게 하실 때에 그 모델이 뭐냐 하면 맨 처음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그 인간들이 한 가족으로서 살아가기를 원하셨던 그것을 모델로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죄가 들어오게 되면, 죄가 들어오고 그리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이제 은혜가 떨어지게 되면, 죄가 들어오고 은혜가 떨어지게 되면 그러면 이제 교회 안에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을 끊임없이 도전하는 거예요. 그리고 마치 자기는 아무 가족도 없이 홀로 살아가는 인간인 것처럼 그렇게 자기를 주장하고 공동체성을 허무는 거예요. 그래서 은혜를 받으면 다시 거기로 들어오고 그렇지 않으면 깨뜨려 지고 은혜를 받으면 깨뜨려지고 이렇게 하면서 그러면서 이게 연결이 되는 거예요.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에요. 그리고 그거거든요. 그렇게 해서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구약성경을 보면 특히 이제 이 구약성경에는 그러한 신약성경에 도래하게 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창조,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창조 시에 이루려고 했던 인간들의 연합을 그렇게 이루시는 거죠. 그러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렇게 되는 것이 연합이거든요. 그래서 신약시대에 이렇게 이루어질 이것의 모형을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나라라고 하는 그 맥락에서 보여주는 거죠. 그래서 나라의 어려운 일이 생기면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소에 나아와서 기도하고 그리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개개인에게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피난처가 되어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에게로 도망치고 피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거예요.
이렇게 개인은 그 한편으로는 그러니까 이 구도는 사실은 필연적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할 때 그 이웃이 누구냐면 그 명령은 타락하지 않은 아담도 받아들였어야 할 명령이에요. 그럼 그것은 뭐냐 하면 가족을 향한 사랑이었다고 가족을 향한. 그래서 자신의 씨로 퍼지는 모든 인류를 향해서 그 사랑이 스며들어서 하나로 묶여져야 하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었고, 그 사랑은 자기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랑하는 그 사랑과 완벽하게 동질의 사랑이었던 거죠.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 명령이 전혀 새로운 명령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독창적이고 새로운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뜻을 이제 뜻을 이룰 수 없는 인간에게 오셔서 당신의 구속을 통해서 그것을 이루시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혀 새롭고 독특한 명령이 아니라 맨 처음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 그들에게 거셨던 그 명령이에요.
그러니 내가 아까 제가 반쪽짜리 신앙이라고 얘기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교회건 무슨 공동체건 나발이건 간에 전부다 다 자기가 행복하고 자기가 필요하니까 예수를 믿는 것이고, 그리고 교회에는 있으니까 마치 이 세상에 있는 많은 단체나 사교 단체들이 자기가 무엇을 하려고 할 때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로서 자기를 돕고 이용가치가 있으면 계속 나가는 거고, 필요 없으면 집어 치우고 딴 데로 가거나 아니면 그만 두어버리는 것처럼 이런 식으로 공동체성을 생각을 하는 거죠. 그렇지 않으면 이제 자기 교회 하나만 딱 잘라버리고 나머지는 전부다 다 집어치워 버리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거죠.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속에서는 제가 장담할 수 있는데 성경의 진리를 절대로 바르게 볼 수 없어요. 이런 얘기하면 좀 특정한 사람들에 대한 공격이 되지 않을까 그래서 걱정이 되지만 그런 마음은 없구요.
교회에서도 제가 목회를 15년 하다가 보면 교회에서 교회로 이동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70% 이상은 아무 개념이 없어요. 교회가 무엇이고 하나님이 인류를 하나로 부르시고 구속받은 자녀들을 하나로 묶으시는 이런 것에 대해서 아무 개념이 없어요. 어쩜 그렇게 교회에서 안 가르치는지 몰라요. 아무 개념이 없어요. 심지어 장로가 되어서 왔는데도 장로였던 사람들이 왔는데도 아무 개념이 없어요. 그 중에서도 인격적으로라도 좀 올바르고 그리고 전에 교회에서 제대로 훈련을 받고 그런 전통 속에서 자란 사람들은 훨씬 나아요.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전혀 개념이 없어요. 아무 개념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 교회에 왜 있냐? 은혜가 되니까 그것도 말 안되거든요. 그것도 말 안되거든요. 그것도 말이 안 된다는 거죠. 은혜가 되기 때문에 여기 있다, 그럼 은혜가 떨어지면 집어치우는 거죠. 언제든지 보따리 싸는 거죠. 그러니까 그것은 말이 안 되는 거죠. 더 펼칠 생각은 없어요.
그런데 이제 그것도 말이 안 되는데 개중에 보면 아예 교회를 안 다니던 사람들이 교회에 와요. 교회에 안 다니고 불신자들은 오히려 신앙생활을 잘 해요. 불신자들이 와서 은혜를 받으면 가르쳐 주면 다녀본 적이 없으니까 예배 시간이 3시간이라고 하면 원래 이렇게 믿나보다, 십일조 하라고 그러면 아 이거, 예수는 원래 이렇게 믿나보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죠. 그러나 이제 수없이 돌아다니면서 생활하던 사람들은 그게 안 돼요.
근데 그런 사람들 말고 신앙생활을 했는데 교회 생활을 안 하던 사람들 있잖아요. 뭐 선교 단체, 아니면 자기들끼리 무슨 모임을 해서 믿고 그러죠. 여기에서 그렇게 은혜를 받아도 죽어도 안 고쳐지더라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일단 처음 신앙생활 할 때서부터 이게 입력이 안 되고 일그러지니까 교회에 와서 말씀의 은혜를 받을 때에도 자기를 다 열고, 그리고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 안에서 자기를 받아들이면서 건축해 가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원래에 싫고 없는 것들은 이게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주어져도 이것을 빼버리고 받아버리는, 안 받는 거예요. 자기 사상하고 안 맞으니까 거부해 버리는 거예요. 자기 사상에 맞는 것만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지금은 교회 떠났습니다만 언젠가 그렇게 은혜를 받았다고 감격하고 하는 사람에게 내가 부부를 앉혀놓고 얘기했어요. 나는 목회자의 정직한 양심으로 얘기 하는데 당신은 이 교회에서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그러는데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당신 가슴 속으로 흘러 들어간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목자로서. 그게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당신 위에 소낙비처럼 수없이 부어지기는 했지만 그러나 당신을 뚫고 들어간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게 당신을 지켜본 7년 동안의 목회자인 내 마음이다. 뭐 아프긴 했겠죠. 그러나 아파도 필요한 얘기였어요. 이게 추호의 거짓이 없는 정직한 목회자로서 당신을 7년간 동안 보아온 느낌이다.
이런 거예요. 뭐냐 하면 들어보세요.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성화의 삶을 살잖아요. 사는데 다른 모든 방면에서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따라 하려고 해요. 근데 어느 한쪽이 구멍이 뚫려서 죄를 계속 짓는 거예요. 그러면 다른 방면의 모두 잘하는 것이 잘할 수도 없겠지만 잘한다는 것은 자기 생각이고 잘할 수도 없겠지만 그 한 구멍을 통해서 계속해서 죄의 물이 들어오는 거예요. 나머지 모든 것들을 더럽히는 거예요. 다만 다른 데서는 욕망이 적기 때문에 문제를 덜 일으키는 것뿐이거든요.
그럼 똑같이 자기가 기뻐하는 진리는 받아들이고 어떤 자기 사고하고 안 맞는 어떤 진리는 거부할 때 그때 그것은 구멍 하나가 뚫어지면 다른 모든 것이 막혔어도 그리로 죄의 물이 들어와서 그 사람을 다 더럽히는 것처럼, 그 어떤 면에 있어서는 받아들이지만 어떤 것은 자기 사상하고 안 맞아서 그것을 거부하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가 진정으로 들어와서 그 사람 자신의 본성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기예요. 왜냐하면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개가 아니라 하나의 덩어리이고, 은혜라고 하는 것도 여러 개의 종류가 있는 게 아니라 한 하나님과 한 성령을 통해서 한 사람의 마음과 영혼 속에 들어오는 은혜이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해서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안 되는 것을 수없이 실험을 해보면서 사람이 한번 이렇게 해 보면서 자기가 말씀을 듣고, 열심히 찬양을 하고 봉사해도 곤고하면 그러면 자기가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지금 잘못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자기의 의예요. 그래서 벗어날 수 없어요. 절대로 벗어날 수 없어요.
그러니까 그런 게 있는지 없는지도 상관없이 그냥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하고 상관없는 사람들이예요. 교회 안에 있지만, 그런 사람들이 구원 받았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죠.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일단 구원을 받게 되면 하나님의 마음이 그 사람 안에 있는 것이에요. 여러분들이 이제 마지막 하늘나라에 가보면 ‘이렇게 구원 얻은 무리가 소수이구나’ 하는 것에 충격을 받게 될 거예요. 그런데 애처로운 것은 뭐냐 하면 교회 안에서도 구원받지 못한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자기는 절대로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주님이 말씀 하세요. ‘열매로 그 사람을 알찌니라’ 하고 말이죠. 뭐 어쨌든 얘기하다가 너무 많이 빗나갔습니다 만은 내일 다시 하죠.
하나님이 이렇게 그 이스라엘 나라 자체를 하나의 가족으로 다루시는 거죠. 그래서 뭘 고백 하냐하면 하나님이 여러 궁중에서, 궁중이라고 하는 곳은 왕이 있는 곳이잖아요. 나라의 실제적인 권세를 잡은 사람들이 있는 그곳에서 자기를 피난처, 여기서 피난처는 높은 산꼭대기에 있는 요새를 가리키는 거죠. ‘그러한 산성이요 요새, 전쟁시에 당신에게 피할 곳으로 알리셨도다 너희 나라와 위기와 어려움에 처했느냐 그러면 너희 나라는 나에게 피하라’ 그게 실지로 온 백성을 데리고 산꼭대기로 올라간다고 그럴 때 그렇게 많은 백성들이 들어갈 수 있는 성이 있겠어요? 그렇다기 보다는 어려움과 어떤 환란과 국가적인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될 때에 하나님이 당신의 날개 그늘 아래 그 백성들을 품으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 하나하나를 당신의 창조의 목적을 위하여 지으셨지만 하나님이 하나의 나라를 당신의 세계의 구원과 창조의 목적을 위해 부르셔서 그래서 그 나라를 위한 뜻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나라를 위해서 늘 기도해야 되요. 우리나라를 위해서, 하나님의 뜻이 그 속에 있는 거예요. 내일 계속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지켜주시고 오늘 이 시간에도 아버지 앞에 나아와 간구하고 기도하게 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신실하신 주님 오늘 이 시간에도 저희와 함께 해 주시옵소서.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그래서 정말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진리에 붙잡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