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과 하나님의 영광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발하셨도다”(시 50:2).
1절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온 땅과 그리고 온 나라에 미친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데 까지 그러니까 존재하는 땅 끝에서 땅 끝에까지 하나님께서 세상을 부르셨는데 그 부르신 세상에 나타나는 당신의 영광이 시온에서부터 발하기 시작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여기에 보면 시온의 아름다움과 하나님의 빛이 두 개가 짝을 이루면서 등장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빛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성경에 보면 이 하나님과 관련해서 이 빛이 사용될 때 그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진리를 가리키거나 또 하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영광을 가리켜요. 때로는 이 둘이 주의적으로 사용될 때도 있어요. 이 빛이 진리를 의미하는 이유는 이 빛 자체는 그 자체를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사물에게 비추어서 그래서 그 빛의 효과 때문에 사람들이 사물을 보는 것이 빛의 목적이죠. 그래서 우리는 빛이 가득 차 있을수록 빛이 잘 보이는 게 아니라 사물이 잘 보이게 됩니다. 그것이 빛의 효과인 것처럼, 진리의 효과는 우리의 어두운 지성을 비추어서 진리가 없었더라면 보지 못했을 많은 것들을 보게 만들어 주는 것이죠. 이 방에서 불을 모두 끈다면, 아마 아무것도 볼 수가 없겠죠. 모든 빛이 모두 없어진다면 전혀 볼 수가 없겠죠. 그 때는 소경이든지 아니면 아주 뛰어난 시력을 가지고 있든지 사람의 차이가 없이 무조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빛이 들어온다면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되죠. 이 세상에 물리적인 빛은 우리로 하여금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을 보게 만들어 주는 거죠. 그러나 우리는 육체의 눈으로만 사물들을 보는 것은 아니죠. 우리는 또한 지성의 눈으로 사물들을 보죠. 그래서 우리가 비록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의 겉모양에 모두 속지는 않습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선하게 대하는 것 같아도 그 마음에 나를 싫어한다는 것도 알 수 있고 또 저 사람이 행위로서 나에게 이익이 되는 어떤 행동을 해주지 않지만 지극한 사랑으로 나를 대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거죠. 그런 것들은 바로 우리가 보이는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볼 수 없는 것들이지만 우리의 지성의 눈으로 보는 것 아니겠어요? 육체의 눈으로 보는 것은 어두움이 사물을 볼 수 없도록 방해하지만 지성의 눈으로 보는 것들은 우리의 욕망과 헛된 사물들의 표상이 주는 효과에 의해서 수시로 가리워져서 그래서 우리가 바로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진리는 바로 그런 빛의 역할을 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그 흐리고 어둡던 사물에 물리적인 빛이 비치지면 윤곽이 또렷해지고 없었던 여겨졌던 사물이 거기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처럼 또한 진리의 빛이 우리의 마음에 비추게 되면 우리는 비로소 그 진리의 빛 때문에 없는 것처럼 여겼던 것들은 사실은 있는 것이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던 것은 사실은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죠. 이해되세요? 이해 되요? 열린 교회 교인들이니까 이해가 되겠지! 오래전에 다 옛날 사람들인데 우리교회 다니던 집사님이 있었는데 친구들하고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가 먹는 얘기가 나왔대요. 그래서 자장면은 의정부에서 포천 가다가 잘하는 집이 있고 한식은 어디가 잘하는 집이 있고 그러다가 우리 생선회나 먹으러 가자, 이렇게 저렇게 얘기를 하다가 한 사람이 회를 먹으려면 군산으로 가야지, 그래서 군산으로 가기로 결심을 하고 즉석에서 의기투합이 되서 차를 몰고 신나게 고속도로를 확 달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고속도로가 꽉 막히는 거예요. 왜 이러냐 이거, 차가 슬금슬금 한 대씩 빠지기 시작해서 가보니까 교통사고가 나가지고 사람이 그 자리에서 박살이 나가지고 피투성이가 된 거예요. 그때 타고 있던 한 사람이, “야 차 돌려서 집에 가자” 우리가 지금 뭐 하러 다니는 거냐? 거기 가서 먹으면 뭐하냐? 이게 정신이 들어 온 거예요. 뭐 거기 먹으러 가는 게 그게 나쁜 짓 이라는 그런 뜻이 아니라 죽음의 빛으로 딱 인간은 죽는다는 걸 확 비쳐보니까 자신들이 이 막히는 길에 그 한 점 먹으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내려간다는 것이 허무한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딱 들게 되는 거죠. 이게 진리의 효과는 이러한 것들을 가지고 있는 거죠. 근데 이러한 진리는 사실은 일반적인 진리잖아요. 그런데 성경에 나와 있는 이 진리는 단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하나님 뜻대로 안사는 인간은 심판 하신다, 인간은 죽는다, 죽음은 허무한 거다, 이러 정도를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진리는 그 이상을 가르쳐 주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 진리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그리스도를 가르쳐 주고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주는 놀라운 진리의 그 진리의 빛이 이 성경 속에서 비추고 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여기서 말하는 그 진리를 빛이라고 할 때에 성경에서 흔히 사용되는 의미에요.
또 두 번째 용례가 있는데 바로 이 본문이 두 번째 용례와 관련 되서 쓰여 진 거죠 그게 뭐냐면 영광의 빛이에요. 이 영광이 뭐냐면 하나님이 거기 계신 효과예요. 하나님이 거기 계신 효과예요, 이게 영광이에요. 하나님이 거기에 계신 효과라 이거죠. 그러면 하나님이라고 하는 분은 사실 이 세상에 있는 물질이나 이런 것과는 완전히 다르신, 영이신 하나님이시잖아요. 그러니까 물질과 관련해서 생각 하자면, 어디에도 하나님은 안계시다고 말할 수 있지만은 어디에도 하나님은 안계시다 라고, 말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물질의 시각에서 보면 물질과 하나님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무한한 질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에 어디에도 하나님은 안계시다고 말할 수 있는 거죠. 그러나 또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다고 말할 수 있는 거죠. 그러면은 그 하나님이 그러면 당신이 어디에나 다 계시다면 어디에나 당신의 영광이 있어야 하는데, 왜 하필이면 오늘 여기에서 이렇게 시온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발하셨다하고 성경이 우리에게 고백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거죠. 그래서 하나님은 어디에나 살아 계시지만 하나님은 당신이 살아계신 효과를 세계 어느 곳에서나 항상 균등하게 당신이 살아계신 효과를 드러내시는 것은 아니에요. 어디에나 하나님이 계시지만 하나님은 당신이 살아계신 효과를 이 세상 어디에서나 꼭 같은 정도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얘기에요. 그러면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곳에서 당신의 살아계심을 드러내실까? 우선 악인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살아계심은 보여 주세요. 그래서 악인이 있는 곳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악인을 심판하심으로서 소극적인 방법으로 당신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심판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 자신의 뜻과 생각을 거스려서 행하는 죄인들이 있는 그곳에 하나님이 심판을 행하심으로서 당신의 살아계신 효과를 드러내시는데 이것도 우리들이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하박국서를 보면 도대체 어떻게 악인이 이렇게 성하고 의인이 고통을 받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하박국이 마지막 장에 가서는 그렇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상황이 어떤 상화이냐 하면은 무화과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외양간에 송아지가 없는데 그렇게 기뻐하는 거예요. 그러면 포도나무가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무화가 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고 외양간에 그 송아지가 없게 되어 버린 이유가 무엇 때문이에요? 그건 그냥 우리들이 덜렁 그 성경구절을 뜯어서, 가난하고 일이 잘 안 풀려서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 좋아 한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고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거예요. 그 미래에 일어날 심판을 미리 보고, 미리 보고 그 고백을 하는 거예요. 그걸 예언적 과거라고 하는데 미래에 일어날 일인데 그 확정성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일어난 것처럼 묘사를 하는 거예요. 그럼 무슨 얘기냐고 하면은 하나님이 자기의 나라를 심판하셔서, 싹 쓸어 버려서 초토화 시켜서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폭격을 받아가지고 도시와 나라가 전부가 다 진멸이 되어서 포도나무고 무슨 무화과나무고 감람나무고 다 싹 쓸어서 다 없어져 버렸고 외양간의 송아지고 뭐고 다 죽어서 없어져 버려서 초토화 되어 버린 거예요. 그런데 바로 그 때에 하박국 선지자는 나는 즐거워하리다. 뭘 즐거워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무의 열매나 곡식, 그리고 심지어는 농사를 짓는데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외양간에 소 그런 것들이 하나도 없어서 이제는 입에 풀칠 할 것도 없는 상황이 되었지만 하나님을 거스르고 악을 행하는 인간들을 징벌하심으로서 만천하에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그 분이 이 모든 세상, 선하게 하나님을 경배하는 땅뿐 아니라, 악을 행하고 하나님께 범죄한 인간들의 땅도 당신의 통치권이 미친다고 하는 사실을 우면적으로 보여준 것에 대해서 그렇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인해서 이 선지자는 하나님 앞에 감격을 하고 있는 거예요. 왜 회의주의자였잖아요.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성행하고 의를 행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고통을 받는데 도대체 이게 뭔가?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성품을 보면서 회의주의자가 깊이 깨뜨려지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무슨 고백이 나와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는 고백이 나오는 거죠. 하나님의 영광이죠.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러한 질문을 할 수 있겠죠, 그러면 하나님은 악인들이 있는 그곳에서 이렇게 소극적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면 그러면 왜 하나님은 오늘날도 이렇게 많은 악을 징벌하심으로서 당신의 영광을 펼치시지 않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나오는 거죠. 이러한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징벌을 통한 영광의 나타남은 이런 것이에요.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영광을 그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기시고 그리고 그 영광을 해치려고 할 때에 그 영광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이 “의”에요 “의”, 그래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도전하는 인간을 향한 방어적 성품이에요. 그거를 자꾸 두드리면서 깨고 들어오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즉각적으로 당신의 진로를 발하심으로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시지는 않으셔요. 그 이유는 뭐냐면 죄인들을 참으시는 하나님의 오래된 사랑 때문이에요 그 사랑이 오래 참도록 하나님의 또 다른 성품을 자극하여 그래서 당신 자신이 만인을 향해 오래 참으심으로서 징벌을 통한 당신 자신의 영광을 나타남 대신, 오래 참으심으로서 죄인들을 향해 나타나시는 또 다른 종류의 도덕적인 영광을 하나님께서 발하시는 거죠. 또 한 경우는 하나님이 당신을 향해 선을 행하는 인간들을 향해 호의를 보이시는 영광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적극적인 표현이죠,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좋아하시는 것의 최고의 표현이에요. 그게 하나님의 영광이죠. 이 영광은 무엇이라고 정의하기가 어려운 개념이지만 이 영광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거기 살아계신 효과인데 그 영광의 빛이 비치면 그 영광이 아닌 모든 것들을 어둡게 만들어서 존재에 있어서는 거의 없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만들거나 혹은 중요성에 있어서 아주 가치가 없는 것처럼 만들어 주는 그런 효과가 있는 거죠. 그래서 이런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은 인간 최고의 행복이며 그리고 최고의 특권이고 좀 더 언밀하게 말한다면 누구든지 이런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전까지는 하나님에 대해서 참다운 앎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난다. 라고, 하는 의미는 곧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에요. 이 영광은 하나님의 존재나 속성의 어는 한 부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와 모든 속성의 나타남 전체를 포괄하는 것이죠. 그래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해 주시는 것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그곳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보기도 해요. 그렇지만 이 모든 것들을 포괄하는 영광의 본질적인 개념은 “거룩함”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모든 당신이 지으신 피조물과는 비교될 수 없는 질적인 차이를 가지신 초월적인 하나님이시라는 사실과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들의 도덕적인 성품과는 비교될 수 없는 탁월한 완전성을 가지신 분이시라는 사실이 어느 한 순간에 인간의 지성을 압도하면서 밀려오게 되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개념이에요. 그 영광의 빛 앞에서 인간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에 깊이 압도되며 그 분의 살아계심과 그리고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고 자기를 떠나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는 이 모든 우주의 최종적인 주권자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을 정말 제대로 만나게 되면 그는 결국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개념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정도의 차이는 물론 있겠지만,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해서 그래서 그의 존재와 성품에 압도당해 본 경험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의외로 아주 소수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심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 사는 인간의 가장 큰 비극중 하나다. 라고 하는 것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