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입은 자의 탄원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내 주 하나님이여 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시 86:2)
˚나는 경건하오니˛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기도제목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고백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경건하오니”라고 되어 있는 말은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인자를 덕 입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 단어 ‘하시드’(dysij)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어떤 성경에서는 이것을 ‘성도’라고 번역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관계를 기초로 해서 베푸시는 무한하고 끝없는 언약적 사랑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아가페’ 정도가 됩니다. 그런 사랑을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데, 그 사랑을 입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피동명사로서 많은 그림이 들어오게 됩니다. “하나님, 사람들을 보십시오. 저들은 되는대로 막 사는 짐승 같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래도 저는 경건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의미가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의 선택함을 받아서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입니다.”라는 뜻입니다.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시인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간구하고 있습니까?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영혼이 어디로 도망을 갑니까? 아니면 영혼이 파괴 됩니까? 영혼이 망가지기라도 합니까? 보존해 달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영혼’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이 됩니다. 때로는 지성이나 생각하는 구조로 사용되기도 하고, 혹은 ‘목’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들이쉬고 내쉬는 ‘숨’, ‘목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내 영혼을 보존해 주시옵소서”라고 할 때 ‘영혼’의 의미는 ‘목숨’입니다. 요나서를 보면 요나가 물고기 속에 들어갔습니다. 뱃속은 아닙니다. 사학자들은 커다란 물고기의 후두부라고 생각을 합니다. “물풀이 나의 영혼까지 들어왔으며”라고 합니다. 이것은 ‘영혼’이 아니라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과 공기가 함께 들어왔을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육체와 대조되는 개념으로서의 ‘영혼’이라기보다는 ‘목숨’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뒤에 나오는 “구원하소서”라는 대목과 짝을 이루면서 반복적인 상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 목숨을 보존해 주시옵소서”라는 것은 단순하게 “아무리 생고생을 해도 목숨만 살아 있으면 됩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살인범 앞에서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한번만 살려주십시오.”라고 할 때는 정말 목숨만 살려달라는 이야기이지만, 일반적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호소하면서 살려달라고 할 때는 단순히 목숨의 위협을 느끼기 때문에 살려달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곤란하고 어려운 처지에 버려두지 말고 구해달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시인은 “저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자이오니 내 목숨을 보존해 주시옵소서. 나의 생명을 살려 주시옵소서. 주 하나님이여, 종을 구원해 주시옵소서.” 하면서 호소하고 있습니다. 14절로 넘어가보면 시인은 악하고 포악한 자들에게 에워싸여 있습니다. 그들의 간절한 바람은 시인을 없애는 것입니다. 이 시를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쓴 것이라고 보면 사울과 그의 일행의 집요한 추격과 살의를 생각할 수 있고, 왕이 된 다음에는 반란에서 오는 생명의 위협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을 보존해 주시옵소서”라는 것은 “나의 목숨을 살려주십시오. 나의 목숨을 나를 에워싸고 나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로부터 나를 건져주십시오.” 하는 탄원입니다. 성경을 이렇게 해석할 때는 먼저 그 단어가 문맥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이 되었는지를 정확하게 판단을 하고, 그 다음에 거기에서 해석을 이끌어내야 합니다.
14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교만한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의 무리가 내 영혼을 찾았사오며 자기 앞에 주를 두지 아니하였나이다” 시인의 주위에는 교만하고 포악한 자들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교만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고, 포악하다는 것은 자기보다 힘이 없거나 연약한 자들에게 폭력적으로 대하는 악한 뜻을 암시합니다. 포악한 자들의 무리가 시인을 죽이려 했기 때문에 그의 영혼을 찾고 목숨을 노렸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인은 “나의 목숨을 보존해 주옵소서.” 하면서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을 만나고 고통을 당해봐야 비로소 신앙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느끼게 됩니다. 우리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오늘 숨 쉬고 살아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건강검진을 받으러 갔는데 초음파를 하면서 심장을 보여줍니다. 심장이 움직이면서 호박씨보다 더 작아 보이는 이파리 하나가 팔락팔락 거립니다. 심장에서 피를 뿜어내는 판이 열리면서 피가 나오고 거꾸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한참 보면서 ‘인간의 생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웃긴 것인가?’를 생각했습니다. 호박씨만한 이파리 하나가 팔락거리는데 저것이 안 움직이면 죽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이 몇 십 년이 지나도 쉬지 않고 계속 움직이고 있으니 참 신기합니다.
자신의 생명이 어떻게 유지되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외부에 접촉하는 것만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면 인간은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영혼은 고사하고 기동하는 육체를 생각하고 그것만 보아도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매순간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기 때문에 겨우겨우 살아있는 존재라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해집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음을 자각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보존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교만한 자들이 일어나 자기를 치고, 포악한 자의 무리가 목숨을 노리기 때문에 시인은 “군대를 보내주십시오. 저들 가운데 배신자를 만들어 주십시오. 나를 구원할 특공대를 파견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시인은 “나의 영혼을 보존하시옵소서. 나의 생명을 살려주십시오.” 하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에워싸도 자신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주 하나님이시여˛
두 번째는 “내 주 하나님이여 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 하고 탄원을 합니다. “내 주 하나님이시여”라는 고백은 무슨 의미입니까? 시인이 1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부른 것에 이어서 언약관계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은 나의 일생의 주인이 되시고 인생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라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이 주님 앞에서 “주는 내 하나님이시며 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라고 할 때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요, 자신의 삶과 모든 존재에 대해서 최종적인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신앙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중 고유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깝게 보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우리 자신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로부터 온 것입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의복, 허리에 차고 있는 벨트, 몸에 걸치고 있는 모든 것들은 생산자가 있고, 남은 몸도 스스로 소유하게 된 것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피와 살을 받아서 ‘나’라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위로 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들도 이미 있는 것으로 우리가 입는 옷이나 사물들을 만들었고, 우리 부모도 이미 있는 살과 피로 우리를 만든 것이지 재료 없이 만들어진 것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거슬러 올라가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책속에서 고유하게 우리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죄 밖에는 없다고 했습니다. 죄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존재입니다.
예전에는 많은 것들을 받고 누리고 눈앞에 보이도록 살면서도 이것의 근원이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를 몰랐지만, 그 근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고 신자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기본적으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기반위에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은 3장 16절이 성경의 가장 위대한 복음이지만, 창세기 1장 1절의 기초에 놓이지 않으면 3장 16절은 허공에 뜬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세상은 어떻게 생겨났고, 인간은 누구이며, 왜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는가? 하나님께서는 왜 독생자를 주셨는가? 영생은 무엇인가? 누가 무슨 권한으로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가? 이런 것들을 요한복음 3장 16절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 속에서 이 모든 구속의 근거가 나오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 세계가 우연히 생겨났다고 믿고, 자기가 지니고 있는 것들이 자신의 것이라고 습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눈을 떠서 창조주 하나님이 계셔서 그분을 의존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심지어는 우리의 생명이 유지되는 것 자체도 하나님의 은혜의 장중에 있다고 믿으면서 그분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오늘 시인은 ‘주를 의지하는 종’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주를 의지하는 사람이라는 고백입니다.
˚주의 종을 구원하소서˛
세 번째로 보여주는 것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존재의 이유와 목적에 대한 언급입니다. 시인이 자신을 뭐라고 언급합니까? “나는 하나님께 헤세드를 입은 자입니다. 혹은 성도입니다.”라고 고백을 하고 여기에서는 ‘종’이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종’이라고 할 때 시인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그림은 주인에게 채찍질을 당하면서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주인을 섬기는 종이 아닙니다.
그 시대에도 가족 같은 종들이 있었습니다. 희년이 되면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주인보다 더 좋은 분을 어디에서 만날 수 있겠습니까? 이 집에 영원히 있겠습니다.”라고 하면 데리고 가서 기둥에 못을 박고 귀를 뚫어서 영원히 그 집의 종이 되었습니다. 해방이 되어서 종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도 주인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두려움과 공포로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종으로 살지만 주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주인의 사랑을 받으면서 일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문맥에서 볼 때 ‘종’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지만 하나님께 특별히 사랑을 받는 종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목적을 가지고 주어집니다.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인생은 자기가 태어난 값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노예적인 복종이나 착취가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셨지만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내가 사람으로 지은바 된 사실들을 고려할 때, 내 인생의 진정한 가치는 하나님이 이 세계와 인류와 나라는 인간을 빚으실 때 의도하셨던 바에 이바지하면서 살 때 그 안에서 가장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나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고백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고 지금도 움직이고 계신, 능력이 충만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까? 만약에 인간의 노동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충족하시다는 교리에 모순이 됩니다. 하나님이 기왕에 땅을 만드시려면 더 이상의 노동이 필요 없게 만드시지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땅을 다스리라.” 이러한 복잡한 노동명령을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죄가 들어온 다음에 이것은 고달픈 노동이 되었지만 죄가 들어오지 않았을 때 인간은 거기에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영광입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의 도움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창조된 지위를 누리며 그 안에서 행복을 얻게 하기 위해 그것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높은 수준으로 대우하고 계시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 외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목적을 알아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노동으로 거기에 이바지하며, 하나님처럼 모든 세계를 다스리고 통치하고 가꾸고 생육하고 번성하면서 그분께서 원하시는 세계를 이루어 가는데 이바지하도록 부름을 받은 존재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노동이 되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농사를 중시여기는 왕이 있었습니다. 임금이 계시는 궁전에 임금이 친히 경작을 해서 가꾸는 논이 있었습니다. 임금님이 거기에 직접 들어가서 모내기도 하고 추수까지 하는 논입니다. 그런 논에서 일을 하도록 정승이나 유력한 사람들이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것을 수치로 여기겠습니까? 한없는 영광으로 여기겠습니까? “김 정승, 내일 시간 좀 내게. 나와 함께 내가 가꾸는 논에 김을 매세.” 혹은 추수를 하자고 부를 때 그것은 선택된 것입니다. ‘내가 정승인데 임금님이 노망이 나셨나. 내가 무슨 종인 줄 아시나.’ 그렇게 생각할리가 없습니다.
결론과 적용
그런 종이 “나에게 하나님 앞에 받은 소명이 있고 내가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악한 자들에게 에워싸여 있습니다. 하나님 나를 구원해 주십시오.” 하고 구원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삶에 대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의 공식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자신의 삶의 주인이 자신인줄 여길수록 기도는 마음에서 멀어집니다. 그러나 ‘내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나는 다만 그분의 은총을 입어서 살아가는 연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리고 나의 본분은 나를 구원하신 거룩하신 하나님을 미력이나마 섬기는 것입니다.’ 하고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마음이 생겨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삶과 나뉘지 않는 것입니다.
시편86편 강해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