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한 자의 칼 같은 혀
“저희가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숨은 곳에서 완전한 자를 쏘려 하다가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않도다”(시 64:3-4).
시편 64편3절과 4절입니다. 시편 64편 3절과 4절입니다. 저희가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숨은 곳에서 완전한 자를 쏘려 하다가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않도다. 다신 한 번 저희가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숨은 곳에서 완전한 자를 쏘려 하다가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않도다. 아멘.
여기에서 완전한 자라고 하는 것은 우리말로 하자면은 저 온전한 자라..그런 뜻입니다.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완전이 아니라 상대적인 의미에서의 완전이죠. 상대적인 의미의 완전이라고 함은 최소한 두 가지 뜻을 내포하는데, 우선 하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완전하다 그런 뜻입니다. 그리고 그 완전의 기준은 율법이 되는 거죠. 외적인 외적인 행동에 있어서만 외적인 행동에 있어서 율법의 그 음 기준에 부합하는 그런 사람일 뿐 아니라, 또한 내적인 마음의 질에 있어서 내적인 마음의 질에 있어서 그 다른 사람보다 더 온전하다...그런 뜻이에요. 그런 뜻입니다.
두 번째는 온전하게 되는 완전하다라고 하는 이 말의 상대적이라고 하는 두 번째 의미는 뭐냐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받아들여졌다...이런 뜻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완전하지 않은데 하나님이 완전하다고 인정을 해 주신 것이다...이런 뜻입니다. 예를 들자면 노아와 같은 사람, 당세에 의인이요 완전한 자라고 했잖아요? 노아 홍수가 끝나고 나서 그가 그 얼마나 부주의하고 그리고 어리석은 사람인지가 그 후에 그의 잘못을 저지르는 기사에서 나타나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뭐 없다가 갑자기 생긴 거겠어요? 사람됨이라고 하는 것이? 그러헌 사람인데도 하나님께서 그를 완전한 자라고 인정해 주셔서 주시는 거예요. 그 의도는 뭐냐면 그 시대에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람을 어떤 의미에서 표준으로 삼고 살기를 바라시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이유다 이런 뜻입니다. 그런 중에 또 대표적인 사람이 다윗이잖아요 그죠? 누가 다윗을 완전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그렇게 인정해 주시고 그리고 이후에 열왕들이 그 분을 따르도록 그 표준으로 삼으시잖아요. 그것은 하나님이 어떤 교육학적인 의도와 관련이 있는 거예요. 이런 두 가지의 이유에 의해서 완전하다라고 하는 것이 상대적인 완전이다 이런 뜻이에요.
그러면 여기서 이러한 모든 사실들을 기초로 할 때 그러면 여기서 완전하다고 하는 사람의 그 정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이런 의문이 떠오르게 되죠. 여기에 대한 대답은 이런 거예요. 절대적인 의미에서 완전이 아니라, 두 가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완전하고 하나님에 의해서 받아들여짐으로써 완전한 사람인데 그러면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그래서 자신은 완전하지 않아도 하나님을 끊임없이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사람들이 이게 바로 완전한 자들의 정체에요. 이 완전한 자의 개념은 시편의 신학에서 악인과 의인의 대조와 연결이 돼요. 그래서 성경 이 시편에서 이야기하는 특별히 시편에서 이야기하는 악인과 의인의 대조는 인간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해요. 그러면은 이 악인과 선인을 어떻게 대조하느냐....악인은 언제나 악을 행하며 사는 사람이고, 선인은 의인은 언제나 의만 행하며 사는 사람이냐 하면 그렇지 않아요. 아주 극단적으로 이야기 하면 의인 중에도 악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고, 그리고 악인 중에도 선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까 단순히 윤리적인 행동의 구별이 아니라 그들의 뿌리에 관한 뿌리에 뿌리를 그들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판단과 관련이 돼요. 그 뿌리가 뭐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사람인가, 하나님을 아는 자는 사랑할 것이고 사랑하는 자는 순종할 것이잖아요. 이 세 가지는 인간의 가장 큰 의무에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거....어떻게 말하면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종교를 가르쳐 주신 것도 이 세 가지를 하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잖아요. 근데 그 아는 것, 사랑하는 것, 순종하는 것, 이것이 어느 한 순간 외부에서 밀려 들어와서 우리의 마음 속에 부어지는 우리의 마음 속에 주어지는 기계처럼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물이 소용돌이 치면서 맴돌 듯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의인이라고 인정해 주신 사람들은 이 세 가지를 구심점으로 그의 사고와 삶, 모든 생활들이 달음질 치는 거예요. 끊임없이 그들은 인제 회귀하는 거죠. 그러면서 그 핵심을 향해서 가는 거예요.
그러면 이제 이렇게 핵심을 향하여 가는 그러한 그 끊임없는 회귀, 이것들이 믿고 그 다음, 믿고,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는데 이게 안 될 때가 있잖아요 그죠? 그러면 다시 회귀하고 은혜를 입고 다시 사랑하고 이런 순서로 계속 이러한 자기, 자기 나름대로 인간을 만드신 이 선한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는 자기 회귀성이 있는 인간들이 바로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의인의 내면의 세계에요. 어디에서도 이 의인이 완전하다고 말하지 않죠. 그래서 구약의 성도라고 하는 그 이름이 핫시딤이에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다...자비를 입은 사람들이다...그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나의 나된 것은 나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한 이 사상은 전혀 새로운 사상이 아니에요. 구약에서 이미 익숙하게 흐르는 하나님 은혜 입은 자로서의 성도 사상이 기독론적인 전환을 거쳐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된 것이라...그게 바로 사도바울의 아주 독특한 고백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해야 하는 고백이라 이거에요. 일반적인 고백이라 이거에요. 그러고 그 고백이 없으면 그는 성도일 수 없고 그리스도인일 수가 없는 거죠. 그러헌 사람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완전한 자..입니다. 그러고 그것은 또 자기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해요. 그런데 이 사람에게 악한 자들이 행하는 가장 일반적인 범죄가 뭐냐하면은 말로써 그에게 그 고통을 주는 거예요. 응? 말로써 고통을 주는 거예요. 그래서 뭐냐면은 말로써 고통을 주는데, 그것이 화살이라고 비유를 하는 거죠. 자 보십시오. 연마하기는 칼 같이 연마하는데, 그 다음에 그것을 사용하여서 완전한 자에게 해를 입히는 방식은 화살과 같은 방식이에요. 그러면 이 두 무기의 차이점이 뭐겠어요? 칼은 어쨌든지간에 칼은 자기를 노출하지 않고는 쓸 수 없는 병기에요. 칼의 길이가 어차피 1미터 좀 넘으니까 그러니까 칼 대밀고 상대방을 공격하려면 자기 자신을 완전히 노출하고 공격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렇죠? 그런데 화살은 그렇지 않아요. 어디에서 날라왔는지도 몰라요. 이 시대의 활이 뭐 주전 10세기 경이니까 이 때의 활이 얼마나 날라갔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근데 고구려 시대의 화살을 그 한 번 연구한 걸 보니까 놀라지 마십시오. 430미터를 날라갔답니다. 뭐 어마어마한 겁니다. 여기서 인덕원까지가 900미터 밖에 안 되는데 두 번 화살을 쏘면 닿을 수 있는 거죠. 그것이 이 그 북쪽 오랑캐들을 이기는 큰 무기가 됐다는 거예요. 그래서 한 거의 한 100미터 가까이 차이가 나는 거죠. 적의 사정거리와 여기의 사정거리가...그러니까 430미터니까 뭐 어마어마한 거죠. 그러니까 끊임없이 더 멀리 화살을 내보내기 위해서 활의 활의 시위, 그 다음에 활의 재질, 그 다음에 엄밀하게 수학적으로 계산된 이 그 화살의 크기, 무게, 이런 것들을 끊임없이 계산해서 이 사정거리를 높이는데 사용했던 거예요. 굉장한 거리 아닙니까? 430미터면은 어유 엄청난 거리죠. 그러니까 뭐 그 정도 거리에서 쏘면 사람이 보이겠어요? 그리고 은신해서 쏘면은 누가 알 수 있겠어요? 말이라고 하는 것이 인제 그런 거거든요. 그래서 결국은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쌓여있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첫 번째 작용은 마음의 작용이고, 마음이 어떠한 마음인지를 드러내 보여주는 첫 번째 표지는 말이에요. 그래서 은혜로운 사람들은 은혜로운 말을 해요. 악한 사람들은 말에 있어서 악의가 드러나요. 그래서 끊임없이 그의 마음은 솟구치는 흙탕물과 같이 악한 분노, 그 험악한 말들을 쏟아내는 거죠. 배설하듯이 무절제하게 막 쏟아내는 이것 자체가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칼을 혀를 혀를 연마하였다...그리고 그 다음에 쏜 것은 화살이에요. 이게 무슨 무슨 얘기겠어요. 그림 같잖아요 묘사가? 혀를 길게 내밀고 그 혀를 숯돌에 간다고 생각을 해 보세요 응?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요, 옛날에 옛날에 이 활을 만들 때 활의 활을 인제 살상력을 높이기 위해서 이제 대장간에서 두드려서 화살촉을 만들어서 나무에 끼고, 왜냐하면 쇠로 만들면 멀리 못 나가니까...그래서 그거를 가볍게 해서 가볍게 해서 그 캡을 씌우듯이 화살촉을 씌우고 그 다음에 나무로 하고 뒤에다 깃털을 다는데, 그 그렇게 한 다음에 살상력을 높이기 위해서 그 화살촉 하나하나를 숯돌에다가 가는 거예요. 그러면 뾰족하면 적은 힘으로도 푹 뚫고 들어가겠죠. 그런 살상력을 높이기 위해서 그걸 갈아요. 그리고 더 살상력을 높이기 위해서 그 앞에다가 독을 바르는 거예요. 그러면 인제 살짝 닿기만 해도 죽는 거죠. 이런 식으로 병기를 만들던 그 어 광경을 여기에 도입을 한 겁니다. 그러니까 화살을 그 화살촉을 뾰족하게 갈아서 일발필살의 기회를 노리듯이 악인은 평소에 이 혀가 연마된 거예요. 어떻게 연마됐을까요? 한편으로는 마음 안에서 경건을 잃어버리고, 악의에 가득참으로써 그 여기서 이 혀라고 하는 것은 결국 마음이잖아요. 마음에서 끊임없이 그 연마질을 해서 그러헌 악한 말을 하기에 적합하도록 이 의인을 향한 하나님의 완전한 사람을 향한 그 적의와 그리고 반감들을 키운 거죠. 그러고 어느 한 순간에 그것을 확 하고 쏟아내는 거예요. 자기는 화살을 쏘고 잊어버렸지만 그 화살은 이제 이 완전한 자의 그 가슴에 박혀서 큰 고통을 겪게 만드는 거죠. 그래서 롱펠로라는 사람이 그런 시를 쓰잖아요. 하늘 향해 화살 하나 쏘았네. 그리고 잊어버렸네. 먼 후일날 알았네. 그 화살이 고목나무에 박혀 있는 것을. 쏜 사람은 잊어버려도 그것에 격발하여 맞은 사람은 오래도록 그것을 잊을 수 없는 거예요. 그리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거예요. 완전한 자는 그런 화살에 맞았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주님께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기회로 삼지만, 악인이 그렇게 쏜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반드시 갚으시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사람은 이렇게 이 세상 자신이 어둠 가운데 있기 때문에 빛의 사람들은 싫어하고 이 세상이 굽기 때문에 옳은 사람들은 매우 미워하고, 그리고 이 세상이 어둡기 때문에 환한 빛 가운데 사는 사람들을 싫어하는 것이에요. 미움으로 가득찼고 자기 사랑으로 찼기 때문에,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들은 싫어하는 것이에요. 이게 바로 이게 바로 우리의 현실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완전한 자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는 이렇게 악한 말로 겨누고, 화살처럼 쏘는 사람으로부터 종종 고난을 당해도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악을 행하고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우리는 그런 모든 과정들을 통해 주님께로 피하기를 원하시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완전하지 않지만 그분께 받아들여지고 은총을 입음으로써 더 온전한 사람이 되도록 하나님이 이렇게 매일 우리를 이끄시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