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하는 은혜로 이김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나를 대적하는 자 많더니 나를 치는 전쟁에서 그가 내 생명을 구속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 (시 55:17-18).
원수들에게 에워싸이고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여 그렇게 깊은 고통을 겪을 때 그때에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니까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라고 나옵니다. 이렇게 세 때,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라고 부르는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는 시간관과 관계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들은 해가 뜨면서부터 시작을 해서 해가 지면 그것이 날이 바뀌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이 사람들은 해가 떨어지면 그 다음에 저녁이 오는데 저녁부터 시작을 하는 것이 그것이 날이 바뀌는 것이다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저녁을 먼저 거론을 하는 거죠. 그래서 이 고백은 사실은 어떤 위미에서 보면 너무 고통스러운 시기들을 지나고 있기 때문에 하루가 끝나고 다시 돌아오는 그 날은 지금 있는 날과 같지 않기를 원하는 시인의 소원이 묻어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시인은 저녁과 아침과 그리고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그러니까 자기의 모든 날들이 하나님 앞에서 근심하고 탄식하는 날들인데 되풀이 되고 싶지 않은 날들이 반복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러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깊이 탄식하고 근심하는 데 그러한 근심과 탄식이 하나님 앞에 기도처럼 되어서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기도가 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살아도 아프고 괴로운 일이 일어나면 마음은 쓰리고 고통을 받습니다. 그때에 그 쓰리고 고통하는 마음이 될 떼에 그러한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방법이 있고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이 그것을 느끼는 방법이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만드는 마음이지만 전자의 마음은 그렇게 고통을 느끼고 아파할수록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 마음입니다. 아마 이러한 사실들은 여러분들이 살면서도 많이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즉 만약에 여러분들이 많은 고통을 겪고 힘들어할 때 여러분들이 은혜가운데 있고 하나님을 많이 생각하게 되면 그 고통이 어디에서 왔든지간에 그 아파하고 고통하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고 하나님 은혜에 더 많이 기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을 더 많이 구하며 그분의 품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때로는 모든 것이 그렇게 잘 준비되지 못할 때 고통과 괴로움 사랑하는 자의 배신 이 모든 것들은 여러분들에게 많은 불평과 불만을 일으키고 그리고는 삶의 희망을 사라지게 만듭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절망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죠. 그러한 사실들을 시인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고통받을 때에 다행히 살아있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많이 의지하면서 주님께로 가까이 다가가는 마음의 경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소원은 자기의 소리를 하나님이 들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그것이야말로 자기의 절실한 기도의 제목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연약한 것을 아시기 때문에 때로는 하나님 이외에 아무에게도 호소할 곳이 없는 처지에 우리를 처하게 하십니다. 때로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총이 다하였는가 이제는 나를 버리셨는가 탄식하지만 사실은 그렇게 되는 상황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고 그리고 표징이며 확증인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붙드셔서 하나님의 그 큰 사랑으로 이끄셔서 아버지 앞에 살게 하신 것입니다. 시인은 그러면서 갑자기 앞의 기도와는 어울리지 않는 전쟁의 문맥이 등장합니다. ‘나를 대적하는 자 많더니 나를 치는 전쟁에서 그가 내 생명을 구속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 얼핏 보면 지금 자기가 처하고 있는 이 상황, 사람들이 자기를 대적하고 자기를 가장 가깝게 하던 친구요 동료이던 사람들이 발꿈치를 들고 자기를 대적하는 이러한 상황이 전쟁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처럼 해석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다기보다는 오히려 고대의 경건한 사람들이 위기에 처할 때에 하나님 앞에 사용하던 경건의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회상이라고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회상은 곧 위기에 처했을 때에 하나님이 자기를 가장 잘 도와주셨던 그런 과거를 회상함으로써 그래서 오늘 확정되지 않은 미래에 대해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게 만들어 주는 경건의 기법이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이 시편에 보면 수많은 경건에 관한 기법들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 보면 위기에 처했을 때 절망하고 좌절하게 하는 현실 보다는 과거에 이 보다 더 절망스럽고 고통스럽던 그 속에서 자기를 건져 주었던 하나님의 그 큰 역사를 회상하면서 오늘 새 힘을 얻는 것이죠. 시인은 이미 이런 일이 있기 전에도 전쟁을 누볐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많은 전쟁 속에서 하님이 자기를 어떻게 도우셨던지를 회상하였던 것입니다. 지금보다 더 많은 원수들이, 더 많은 적들이 자기를 치기 위해서 일어나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어도 하나님은 생명싸개에 자기를 감추어서 그 칼과 그 극한 전쟁과 화살로부터 자기를 보호해주셨습니다. 그 치열한 전쟁, 죽을 수 밖에 없는 그 전투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구해주신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자기를 특별히 사랑하시고 자기의 인생을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치열한 전쟁에서 그 수많은 대적들이 자기를 해치지 못했다면 그만 못한 이러한 배신의 상황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실 리가 없을 것이라는 신념을 다시 갖게 된 것이었죠.
우리에게도 이러한 기법들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처럼 느껴지고 나 홀로 시련과 고통을 온 몸에 당하고 있는 것 같은 괴로움이 넘쳐날 때에 그때에 우리는 회상하는 것이죠. 그러면서
하나님이 베푸셨던 그 크고 놀라운 은혜, 사랑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신앙인 것이고 우리의 믿음인 것입니다. 오늘 이 시인은 고백하기를 ‘나를 치는 전쟁에서 하나님이 내 생명을 구속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 평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날마다 하는 인사입니다. 샬롬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로 말미암아 사람들 속에서도 이루어지는 평화, 하나님과의 평화로 말미암아 사람들 속에서도 이루어지는 안녕의 상태, 이것이 바로 샬롬입니다. 진정으로 시인은 그것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이 쓰라린 배반의 시기, 고통받는 영혼의 가장 아픈 시기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평화가 이룩되고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과의 평화가 이루어지는 그러한 변화가 오기를 간절히 갈망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없는 평안한 삶은 그저 잠자는 일락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있는 가운데 사람들 속에 이루어진 평화. 우리는 그 속에서 우리의 삶 실재 속에서 곳곳에 침투해 있는 하나님을 의존하는 사상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든 것들이 그분의 뜻대로 이루러진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작은 인생사 속에서도 가장 큰 하나님과의 관계가 지배하고 있는 것을 터득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구석구석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며 그분이 받으시며 흠향할 만한 생활이어야 한다는 것을 배우면서 소위 이야기 하는 전포괄적인 주권의 사상을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에게 일어난 쓰라리고 고통스러운 일은 당장 시인이 지은 그 죄 때문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과거에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이 징계하시고 발생한 사건이라도 이것은 하나님이 시인을 향하여 퍼붓는 신경질이나 혹은 보복의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말할 수없는 큰 섭리 속에서 이 사람을 어루만지시고 지키시는 그 큰 능력을 하나님이 보이고자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더 많이 사랑하며 살게끔 만드시는 그러한 새로운 섭리를 시인은 발견을 할 것이었습니다. 그 때까지 시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신앙이 필요하다고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어려움이 오고 고통이 와도 인간이 사는 세상은 항상 불완전하기 때문에 오히려 완전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갈망하게 되는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