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변하시는 하나님 1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 들으시고 변치 아니하며 하나님을 경외치 아니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리로다”(시 55:19)
요 앞에 보면은 셀라라는 말이 나오거든요. 시편에 여러 곳에 이 말이 등장 합니다.이 말은 읽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왜냐하면 이 셀라라는 말은 음악적인 부호에요, 그러니까 학자들은 생각하기에 이 셀라라는 말이, 음을 이 시편전체가 곡조가 있는 것이었거든요. 그 곡조를 지금은 우리는 알 수 없죠. 유대인들은 어느 정도 알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도 거의 잊혀졌다고 그래요 그래서 56편에 보면은 요낫엘렘르호김에 맞춘 노래, 그러고 나오거든요 그 당시에 사람들이 모두 아는 가락이 있었는데 그 가락이 요낫엘렘르호김이라는 가락이에요. 그 가락에 맞추어서 이 시편을 읽어라 이렇게 되있는거거든요. 그런데 이 표제가 안 붙여진 곡도 있거든요 마스길이라 그랬지만 시편의 종류를 이야기하는 거고 성가대 악장에 현악에 맞추라고만 되어있지 무슨 곡조인지 모르잖아요. 어떻든 그 곡조를 부르다가 셀라라는 부호가 나오면 옥타브를 올려서 이렇게 소리를 내어서 불렀을 거라 보거든요. 그래서 이 셀라라는 단어는 읽어도 문제가 없지만 좀 우습죠, 그래서 읽지 않고 음악적으로만 참고하는 단어라는 이 말씀입니다. 그렇게 해놓고,
그 다음 나오는 얘기는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 들으시고 다음에 변치 아니하며 하나님을 경외치 아니하는 자에게 보응 하시리로다고 나오거든요 여기서 그래서 여기 변치 않는다는 것은 그 악인들을 두고 하는 이야기겠죠, 악인들이 하나님을 향한 태도를 고치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경외치 아니하는 하나님이 자에게는 갚아주실 것이다, 하나님이 징벌로 갚아주실 것이라고 하는 것이죠. 성경에서 의인과 악인의 대비는 시편첫째편의 관심사에요,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하고 시작되는 그것이 시편에서는 거꾸로 되어있어서 이거 이거 이렇게 하는 사람의 행복이여 그러고 나오는 거거든요. 이 문학적인 구조가 신약에서 그대로 반복되는 구절이 있는데 그게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나오는 첫 번째 말씀이에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것이 바로 시편1편의 희랍어적인 표현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도 이 시편 1편을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그래서 시편1편에 나오는 것이 구약의 성도들의 행복이 어떤 성격의 행복인가 보여준다면, 마태복음 5장 3절 이하에 나오는 예수님이 그 팔복은 그러한 그 구약성도의 행복이 이제 신약의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어떤 행복으로 신약적인 전환을 하는 지를 보여주는 거죠 근데 그것들이 놀라운 연속성과 유사성이 있습니다. 지금 그 얘기를 할 시간은 없지만 시편1편에서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그러고 나오거든요.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그리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나오거든요, 그래서 이쪽에서도 악인, 죄인, 오만한자 이렇게 발전을 하고요. 그 다음에 이렇게 꾀를 좇으며, 길에 서지 아니하며, 자리에 앉으며 이렇게 발전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악인이라고 하는 것은 꼭 반드시 악을 계속 행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어느 순간에 악하게 된 사람들에게 꾀가 있어요. 히브리말로 애차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카운슬이라고 번역이 되요. 악인의 계획이죠, 악인이 가지고 있는 이 계획을 따르질 않는다는 거죠, 거기서 발전된 사람이 누구냐고 하면 죄인인데 오만한자는 아예 죄를 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모든 사상에 없다고 멸시하는 사람이에요. 그 중간에 있는 사람이 죄인인데 호테라고 히브리어에 나오는데 히브리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이야기겠지만 아는 사람들한테는 참 신기한 거예요. 그 호테라고 하는 세 글자로 되어있는 죄인이라는 명사에 가운데 점이 찍힙니다. 히브리어에서 단어 속에다가 점을 찍어요. 글자 속에다가. 예를 들자면 ‘아’ 그래놓고 동그라미 속에다가 점을 탁 찍는다, 이 얘기입니다. 그게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냐면, 어떤 죄를 계속해서 짓는 사람, 그러니까 죄를 짓는 것이 인격적인 특성이 되어버린, 그런 종류의 죄인을 가리켜요. 그러니까 시편 1편에 두 번째 나오는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랄때에 그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연약하기 때문에 죄를 지은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떠나서 죄를 짓고 그것이 인격적인 특성이 되어버린 사람을 의미하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면 변치 않는 것, 쉽게 변하지 않는 것. 그에 비해서 성도는 죄를 지어도 쉽게 변하는 사람들이예요. 은혜를 받으면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는 사람들. 오전에 죄를 지었지만 오후에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하면서 회개하고, 이렇게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사람들이예요. 그런 사람이 아닌 불변하는 사람, 변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오지 않는 가운데 죄를 짓는 그런 사람, 이 죄인의 특징 이예요. 죄인의 불변함은 성도의 불변함을 능가합니다. 성도의 불변함은 본성을 따르는 불변함이 아니라 은혜의 효과를 따르는 불변함 이예요. 왜냐하면 그 성도 안에 여전히 부패성과 연약성들이 남아있기 때문이죠. 그러면, 이러한 부패성과 연약성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가 아무리 하나님 앞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도 그것은 늘 하나님의 은혜가 붙들어 줄때에만 그게 가능하다는 단서가 붙는 거예요. 그러나 악인의 죄인들의 악을 행하는 불변함은 자신의 본성을 따르는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들이예요. 그러니까 변해야 할 이유가 없는 거죠. 모양이야 더 강렬하게 약하게 그리고 이런저런 형태로 나타날 수 있겠지만 기본적인 방향에 있어서는 항상 같은 거죠. 그래서 오늘 시인이 많은 경험을 통해서 불변하는 것을 죄인의 특징이라고 보는 거죠. 그렇게 불변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치 아니하는 자들이 있다 그 사람이 바로 시인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이라 이거죠. 그럼 어떻게 보면 악인이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변하지 않는 이 불변함의 성격도 하나님의 불변하심을 악한 방식으로 본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악인이 아무리 자기가 악을 행하는 일에 있어서 자기의 즐거움과 존재의 과시를 위해서 하나님의 불변함을 본받는다 할지라도 인간의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고 하나님은 영원하실 뿐만 아니라 불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는 것이죠. 왜 인간의 악인의 불변함이 변치 않는 악인의 불변함이 일시적인 이유는 무엇 때문이겠어요? 그가 영원히 선택받지 못하고 하나님께 멸망 받을 악인 이라고 할지라도 그의 끊임없는 악을 행하는 변하지 않는 성품 그 자체가 영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를 죽이시기 때문 이예요. 그래서 어제 설교한 바와 같이 악인은 벤 풀과 같아서 하나님을 속히 마르는 사람들이예요. 그래서 지나가는 것이 예요. 그래서 그 악인들은 모두 사라지는 사람들이예요. 하나님이 그들을 살려두시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그들의 악을 사용하셔서 인간이 이해하기 어려운 방법으로 섭리 속에서 그들을 가르치시고 그들을 사용하셔서 사랑하는 자기의 백성들을 향해 유익을 끼치게 하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용도가 끝나고 나면은 하나님은 변치 않는 그들을 멸하시는 것이죠. 그래서 악인이 악을 계속 하지 못하도록 그 생명을 멸절시키시는 것이죠. 혹은 환경을 바꾸셔서 그들로 하여금 그 정도로 많은 악을 토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놀라운 방법으로 막아주시는 것이죠. 어쨌든 어떤 경우에든지 악인에게는 그것이 커다란 파멸이요 보응이 될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우린 여기서 하나님의 불변하심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가 불변할 뿐 아니라 그의 성품도 불변해서 하나님의 존재의 불변함은 그의 성품의 불변함에 놀라운 방식으로 투영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가 불변하다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존재자체를 직시함으로써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존재에서 흘러나오는 성품의 지속적인 행사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불변하심을 어렴풋이 추론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불변하심을 믿기 보다는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불변함을 알게 되고, 그리고 우리의 실제적인 짧은 구간에서의 삶을 통해서도 우리는 불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불변하심이 바로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소망이 되는 것이죠. 왜냐하면 지금은 하나님이 우리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어떤 특별한 섭리 속에서 악인을 살려두시고 악인에게 고통 받는 자신을 외면하신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현상이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 속에서 악인의 악을 사용하신 후에는 우리에게 이 모든 것들을 사용하셔서 유익을 이루신 후에는 하나님이 이 인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불변하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악을 행하는 악인들의 불변함을 하나님의 의로우신 불변함이 능가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을 바꾸려고 시도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존재하시게 하고 자기가 하나님을 향한 태도를 바꿔야 하는 것이죠. 이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에요. 우리들이 약이라고 하는 것들도 보면은 우리가 먹거나 혹은 인체에 접촉해서 우리를 도와주면은 그것을 이로운 식품, 혹은 약이라고 말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를 도와준다 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에요. 우리의 생명이 유지되는데 있어서 도움을 주는 거예요. 신진대사를 통해서 생명은 유지가 되는 거예요. 신진대사를 통해서 생명이 유지되는데 이 메타볼리즘이라고 하는 신진대사가 활발한 것이 생명이 충만한 거예요. 어렸을 때 보면은 수 없이 밥을 그렇게 엄청나게 먹어도 만약에 우리가 그렇게 한 달만 먹는다면 배가 땅에 끌릴 텐데, 근데 애들은 밥통에 하나 가득 먹어도 살이 안 쩌요. 왜냐면은 신진대사가 활발해서 그것을 다 없애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하루 칼로리 섭취량이 2400킬로 칼로리라 그래도 그건 젊은 사람들을 두고 하는 이야기고 나이가 많이 들면은 1800킬로 칼로리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 이상 먹으면 이제 몸 자체가 생명럭이 떨어져서 신진대사 잘못해서 그게 계속 축척이 되는 거예요. 방앗간에다 쌀을 집어넣는데 벼를 다 못 빻아내는 거예요. 그리고 그 다음 벼가 또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몸에 계속 쌓이면서 몸이 흉악하게 몸이 체형이 변하게 되는 거죠. 근데 또 젊었을 때는 그냥 배가 고프니까 먹었지만 나이가 들면 오랜 세월 살아오면서 온갖 음식에 이 혀가 닳아가지고 맛있는 것만 만나면 꼭 과식을 하게 된다는 거죠. 그래서 이렇게 해서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근데 우리들이 흔히 독이라고 분류하는 많은 것들도 보면은 그게 절대적으로 이건 독이고 이건 약이다 이렇게 되어 있는 게 아니라 약으로 분류되는 대부분의 것이 독이예요. 충격적이죠. 약이라고 분류되는 대부분의 것이 독이에요. 어유 목사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비타민 같은 좋은 게 있는데, 실컷 먹어봐요 독이 되지, 독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내 아는 목사님 사모님이 비타민 요법을 한다고 그랬는데 하루에 6000mg씩 먹었대요. 한주먹씩 먹는 거예요. 매끼마다, 그러면 뭐가 좋으냐고 그랬더니, 비타민이 남는 게 빠져 나갈 때 나쁜 것도 빠져 나간대요. 웬걸, 정기검진에서 대학병원에 갔더니 도대체 아줌마 뭘 먹었길래 간수치가 이렇게 높냐고, 비타민 먹었다고 했더니, 당장 그만 두라고, 큰일 난다고, 그게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가장 좋은 것도 많이 먹으면 독이 되요. 여러분 단공우왕암이라고 북한계 명품인데, 거의 졸도하는 사람 딱 떠서 먹이면 금방 살아나는 약들이 있어요. 그게 뭐냐면 주토라는게 들어가요 그 주토가 뭐냐면 주사, 주토라고 하는데 그것은 티스푼으로 하나만 먹으면 죽어요. 즉사하는 거예요. 근데 그걸 아주 미량을 집어 넣으면 우리의 몸을 활기를 돋구는데 도움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양을 조절하는 것이 약간 조절할 때 약이 되고 확 집어넣을 때는 그 사람을 죽이는 독이 되는 거예요. 복어국이 왜 그렇게 맛이 있는지 아세요? 얘기에 의하면 거기에 미량의 독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게 맛이 있대요. 그러니까 그렇게 모든 이치가 되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악이라는 그 자체는 나쁜데 그걸 쬐금 사용하셔서 사람들을 말할 수 없는 방법으로 유익을 끼치지 못하신다면 그 하나님이 어떻게 지혜로운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 악인과 성도의 차이는 악인은 그렇게 살면서 자신은 불변하고 그리고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성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악인은 불변하는 것 같아도 그 불변함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 앞에 망하고 그리고 악인이 본받지 못하는 하나님의 불변하심은 의로우심이라고 믿는 거예요. 그래서 악인은 자신이 끊임없이 바뀌지 않음으로 징벌을 받지만 하나님께 속한 의인들은 끊임없는 회개와 참회, 말씀의 깨달음과 자기반성 속에서 하나님을 불변하시게 두고 자신은 끊임없이 바뀌어서 그 하나님께 돌아감으로서 지금은 불완전하고 연약하지만은 때로는 악하게 살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은혜 아래서 사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묵상하면서 시인이 악인의 멸망을 기대하고 자신의 구원을 바라보는 것이에요.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