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한 기도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시57:11)
하나님은 본래 하늘에 계신데 그 하나님이 하늘 위에 높이 들려지시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고백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에서는 이제 이 11절 자체가 병행법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이 병행법은 히브리 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하고 또 사전학적으로는 잘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들을 이해하게 하는데 아주 큰 도움을 줍니다. 병행법이라는 것은 ‘낮은 낮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전하니…….’처럼 앞의 구절과 뒤의 구절이 각각 동일한 사상을 반복하는 것이에요. 단순 반복하는 것도 있고, 발전하면서 반복하는 것도 있고, 두 개가 짝을 이루는 경우도 있고, 세 개가 짝을 이루는 경우도 있고, 다양한 기법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오늘도 우리가 읽은 이 구절을 잘 보면 이렇게 되어있어요.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에 높이 들리시며…….’ 뒤에 보면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라는 단어와 ‘주의 영광’이 짝을 이루고 ‘하늘 위에’라는 단어와 ‘세계 위에’라는 단어가 짝을 이루고 ‘높이 들리며’ 라는 단어와 ‘높아지기를’ 이것이 짝을 이루는 것이죠. 물론 히브리어 성경에는 ‘높아지기를’ 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만 그러나 생략된 것으로 보죠. 자, 이렇게 되니까 ‘하나님이여 하늘위에 높이 들리기를 원합니다.’ 라고 할 때 이것이 진짜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에요.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이 동일하게 사용됩니다. 그래서 성경의 사상에 의하면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당신의 이름은 이 세상에 두신 것이죠. 그러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 없으시냐하면 그것은 아니죠. 하나님이 이 세상에 계시지만 그러나 그 계신다고 할 때의 그 계신다는 말도 인간이 ‘여기에 있다.’고 하는 것과는 의미가 많이 다르죠. 예를 들자면 여기에 돌멩이가 있다, 물이 있다, 공기가 있다, 그리고 사랑이 있다, 할 때 모두 있다는 말을 하고 있지만 의미가 다 다르죠. ‘여기에 김 아무개가 있다.’는 것과 ‘우리 안에 사랑이 있다.’고 하는 것은 현저하게 다르죠. 그러니까 하나님은 어떤 형태로든지 우리 인간이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사물이 아니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세계에 계시다고 할 때 마치 흙이나 바위, 돌, 사람, 나무, 짐승, 이렇게 형체를 가진 사물이 이 세계 안에 있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죠. 그것은 대단히 미신적인 생각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하나님의 이름을 이 세상에 두셨다는 것이 성경의 일반적인 진술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세상에 없다고 말하면 안 되죠.
그래서 결국은 그 하나님의 이름이 주의 영광이라는 말하고 짝을 이루며 등장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결국 뜻을 보자면 ‘나는 하나님 당신의 이름이 하늘 위에 높이 들려지기를 원합니다.’ 이런 뜻이에요.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이 높이 들려지기를 원한다는 의미가 곧 하나님의 영광이 높이 드러난다고 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에요. 자, 깃발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땅에 깔아놓았을 때는 사람들이 그 깃발을 볼 수 없지만 높은 국기 게양대에다가 높이 끌어올리게 되면 수십 미터나 되는 꼭대기로 올라가고 하늘에 바람이 불 때에 그 국기가 펄럭이면서 수만 명의 사람이 그 국기를 볼 있겠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이름이 아주 높이 들리게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 있게 되고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또 깨닫게 되는 이러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이 땅에 있는 언약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야 되요.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은 안보이지만 하나님을 그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보이죠. 그 삶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죠. 이게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에요.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성품과 관계가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 사랑을 따라서 살 때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그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사랑을 행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죠. 그 모든 것들이 결국은 우리 안에 있는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죠. 이게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에요.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죠. 똑같은 말이 반복이 되는 것이죠. 그게 바로 주의 영광인데 그렇게 해서 주의 영광, 주님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그런 힘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옵나이다.
시인이 왜 억울한 일을 당하고 악인에 의해서 패인 웅덩이를 앞에 두고 그 속에서 고통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 많은 악인들이 시인을 향해서 창과 살이요 그리고 날카로운 칼과 같은 저희의 혀가 시인을 찌르고 고통스럽게 하는 이 모든 일들이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왜 악한 사람들이 시인을 그렇게 고통을 주었겠습니까? 결국은 그들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시인은 하나님의 이름이 하늘 위에 높이 들려지지 않은 세상에 살면서 나그네와 과객과 같은 취급을 받고 때로는 원수와 같은 취급을 당해서 그래서 사람들에게 만물의 찌기와 같은 존재로 취급되는 것이죠. 그런 것을 볼 때마다 자기 자신이 고통스럽다는 한계를 느꼈다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깊이 후회하면서 자기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온전히 높아지지 못한 세상에 살고 있는 그 비참한 고통을 경험하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더 처절한 사모함이 생긴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11절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시인을 본받아야합니다. 악인에게 많은 고통을 받을 때에 자기의 괴로움과 고통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얼마나 하나님을 싫어하는 지를, 이 세상이 얼마나 하나님을 미워하는지를 제대로 알고 그래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구하는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런 현실을 볼수록 시인의 마음속에서는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던 모든 것이 더 많이 복종하고 더 온전히 순종해서 자기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를 사모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고난을 통해 깨달은 시인의 마음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