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속성과 해석
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발하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너희는 하나님께 능력을 돌릴찌어다 그 위엄이 이스라엘 위에 있고 그 능력이 하늘에 있도다
아멘 (시 68:33-34)
녹취자: 양현정
이제 과거의 하나님이 큰 능력을 바라셔서 이스라엘을 지키셨던 일들을 회고한 후에 다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경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타나는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그랬는데 하늘이라고 하는 것이 원래 복수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늘들의 하늘을’이라는 이 표현이 성경에 몇 번 나옵니다. 여기에도 나오고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한 다음에 하나님께 봉헌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하나님을 용납할 수 없거든 하물며 사람이 지은 성전이겠습니까 하면서 하나님을 노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심과 특별히 광대하심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그저 단순한 복수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유가 있는 복수다라고 봅니다. 그래서 무엇이냐 하면 유대인들이 하늘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점들과 관계가 있습니다. 히브리어로도 우주를 가르치는 하늘과 땅에서 볼 수 있는 파란 하늘을 가르키는 그 하늘이 다릅니다. 그래서 이제 새들이 날아다니는 하늘이 있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이 있는 하늘이 있고 그리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늘이 있고 이런 하늘에 대한 다중적인 관점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하늘이든지 간에 그런 하늘들의 하늘을 타고 계신다라는 것입니다. 무엇 중의 무엇이라고 나온 이것은 하나의 최상급적인 것들을 의미하므로 그러한 하늘들이 많다고 하더라도 그 하늘 중에 가장 높은 하늘일지라도 바로 그것을 타신 자가 하나님이니까 그분을 찬송하라 그런 말입니다.
그럼 이제 답이 나옵니다. 하늘들의 하늘이라 그럴 때에 앞의 하늘들이라는 복수가 이런 다칭적인 하늘을 가르키는 것이라면 뒤에 있는 하늘은 주님이 친히 거하시는 그 가장 거룩하고 초월적인 곳으로서의 그 하늘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탄다라는 단어는 마치 그 전쟁에서 군인이 말을 타거나 혹은 말이 모는 병거를 탄 그런 모습을 연상시키는 것입니다. ‘탔다’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냐 하면 자신 마음대로 그것을 지배하고 그것을 사용하는 것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이 절대적인 크기와 힘에 있어서는 인간에 비할 데 없이 크고 강하지만 일단 유능한 군인이 올라타서 발길로 배를 차고 달리기 시작하면 그러면 그 말의 큰 힘이 그 줄 두 개에 의해서 말탄 기수의 뜻대로 모든 것이 움직이고 속도 방향 정지 운동 이런 것들이 그 기수의 손에 의해서 모든 것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동일하게 하나님이 그 하늘들에 하늘을 타고 그리고 그 하늘들을 움직이시고 또 그 하늘과 관련을 맺고 있는 땅을 움직이시고 삼라만상 그 모든 하나님의 하늘이 다스리지 않는 것이 없을진데 그 모든 것들을 주님께서 움직이시고 멈추게 하시고 방향을 정하시고 하기를 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천체로부터 시작해서 가장어린아이의 마음까지도 당신 수중에 놓고 그 모든 것들을 움직인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렇게 해서 이제 하늘을 타시고 달리시는 그저 소리를 바라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여기서 소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명령을 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전쟁에서 말탄 장수가 취하의 부하들에게 우렁찬 소리로 명령할 때에 그 명령 하나에 모든 대군들의 진들이 움직이면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이 외치실 때에 그때에 웅장한 소리로 들리면서 이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움직이는 것이다 라고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인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은 예전에 애굽을 물리치고 구스 사람들을 물리쳤던 그 놀라운 전쟁에서의 승리의 역사는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심히 싸워서 이긴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신앙적인 시야에서 보면 저 위에서 하나님이 하늘들에 하늘을 타고 우렁찬 소리를 발하시면서 그 하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이 세상의 역사에 개입하신 사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든 세계와 관계를 안 맺으시는 적은 없지만 특별히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기왕에 당신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관계들을 드러내신 그때에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구원의 사건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건, 이벤트라고 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간섭입니다. 그 의미들이 풀어헤쳐지면서 그 의미들을 사람들이 이해하면서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는 찬란한 지식의 빛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역사에 개입하신 것이 사건이고, 사건 그 자체가 해석되고 해석된 의미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넘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적하고 있는 이방에까지 알려지게 될 때에 거기에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아로새겨지고 전파된 것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누구이신가 하는 그것이 이스라엘에게 먼저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오고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이방사람들에게 전해집니다.
그래서 이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그것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당신의 속성을 보여주시는 수단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반드시 해석이 필요합니다. 그 해석은 이성만으로는 안되고 신앙이 필요합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당신을 보여주셔도 신앙이 없는 인간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그 하나님이 그 사건들을 통해서 당신이 누구신지를 보여주는 그 지식의 빛을 품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품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훌륭하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이 내면의 세계가 주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앙망으로 가득 차 있고 그리고 삶이 하나님 앞에 순전하여 복종하며 사는 사람들을 그것들을 잘 발견하게 됩니다. 작은 사건에도 아주 감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볼게요. 예를 들으시면 금방 이해가 될 겁니다. 여러분이 기도도 안하고 신앙에서 많이 물러가 있고 둔해지면 하나님이 정말 큰 일을 여러분을 위해 해주셔도 별로 감사가 안 나와요. 그리고 어려운 일이 일어나도별로 두려워하지 않고 쉽게 이야기하면 마음이 굳어지고 완고해지니까 그 어떤 사건들이 일어났을때에 그 하나님이 원하시는 쪽으로 해석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은혜가 충만하고 하나님을 사랑해요. 그래서 사랑의 성향은 즉 믿음의 성향, 너무 사랑하면 그 사람이 어떤 일들을 행하거나 생각을 했을 때 절대로 그것을 의심하면서 나쁜 방향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믿는 성향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과 믿음의 관계를 해석할때 그것을 엄중하게 분리하려고 하는 시도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틴루터가 사랑과 믿음을 분리하는 그런 접근의 방식도 우리는 이제 그 뜻은 이해하지만 우리는 깊이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지요. 어쨌든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조그만 사건이 일어나도 너무 감격하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만원 한 장만 생겨도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궁핍한 것을 아시고 하나님이 나에게 만원을 주시는 구나 정말 감사하다.’ 심지어는 기도하면서 ‘하나님 이 만원을 잘 쓸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요.’ 그런 마음이 생깁니다. 그것이 바로 이제 해석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또 똑 같은 사건을 보여주셔도 사람에 따라서 그 해석의 층차가 엄청 달라지게 됩니다. 그런 것들을 아주 풍부하게 해석해낼 수 있게 될 때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주 놀랍도록 빠르게 우리의 마음속에 축적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무지하고 어리석은 백성들인데도 너희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것에 대해서 책망을 받아야 된다 하나님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을 나무라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주님의 도움 없이는 알 수 없는 것이잖아요. 주님이 책망하시는 것은 해석적인 능력이 우리 지신의 상태에 많이 달린 것이라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해서는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그렇게 해서 당신의 계시가 이세상에 전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장 큰 의무는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 개입하셔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당신 계시의 말씀들을 성취해가고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찬란하고 아름다운 속성들을 얼마나 많이 발견합니까. 그 속성들을 따라서 우리들의 살아가려고 할 때 그 안에 놀라운 행복들이 있습니다. 미워할 때는 그렇게 마음이 고통스러운데 온 힘을 다해서 자신을 꺾고 그를 용서할 때 놀라운 자유가 주어지는 것도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을 알고 그 속성을 따라 사는 데서 오는 자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니라 했을 때에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방식이 무엇이냐 하면 진리가 쑥 들어와서 우리를 자유케 하는게 아니라 진리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수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주님께로부터 파생되는 발하되는 가르침이 진리라고 한다면 그러면 엄밀하게 말하면 그 진리는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과는 구분되는 것입니다. 나누어질 수는 없지만 구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말은 그 사람이 누군가를 보여주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려주지만 말이 곧 그 사람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진리를 파생적이라고 한다면 하나님 자신의 진리 자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그 진리는 가장 효과적으로 하나님 자신에게로 인도하는 수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는 그 말씀은 그런 파생적인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 그것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이 자유로워 질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역사속에 늘 개입하셨던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과정 뿐 아니라 때리시고 책망하는 과정을 통해서도 당신이 누구신가 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먼저 온 땅을 통치하시는 하나님, 그러면서 이제 능력과 능력을 돌릴지어다 그러는데 능력을 돌린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능력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신적인 큰 이스라엘의 역사에 일어났던 크고 놀라운 일들을 하나님의 신적인 능력을 기반하고 있는 그래서 그 능력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라는 그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돌린다는 것입니다. 인정하는 것. 그러니까 위엄에 대한 그 찬송도 마찬가지로 그 위엄이 이스라엘에게 있지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놀라운 위엄을 경험하면서 이 방들이 두려워 떨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 전쟁들을 통해서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위엄을 베푸신 것을 보면서 하나님 자신이 얼마나 엄격하시고 모든 만물들 위에 탁월하게 뛰어나신 분이신가 하는 것을 알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정할 때에 그 사람의 하나님을 향한 태도는 온전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질서 없이 행동하고 심지어는 교회에서 싸움하는 그런 모든 것들은 결국 그 사건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동안에 교회 다니면서 얼마나 봉사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기반이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경외하는 마음. 그것이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을 하나님이 어느 순간에 다 드러내십니다.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고 각 사람의 마음에 진리가 심겨져서 주님의 영광과 위엄을 알고 그 앞에서 인간의 분수를 아는 것이 몸에 베인 상태 그런 경외의 상태 그것이 사실은 진정으로 교회를 통해서 얻는 유익이고 진정한 신자의 진리로부터 받는 영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면 결국 우리에게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통해 주님이 얼마나 위대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면서도 우리 위에 뛰어난 위엄이 있으신 분인지를 깨닫고 그분께 그 모든 것을 돌려드리면서 주님 앞에 복종하며 사는 해석의 능력 이것을 우리가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