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가까이 오게 하신 사람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시65:4)
시편 65편 제 4절입니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아멘.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아멘.
이 시편 속에는 과거에 이미 일어난 일인데도 현재 혹은 미래처럼 기술되는 경우가 있고요, 미래에 일어날 일인데도 과거처럼 기술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후자의 경우, 미래에 일어날 일인데도 과거처럼 기술되는 경우를 우리들이 예언자적 현재라 그래서, 선지자들이나 시인들이 이렇게 사건들을 적어 나갈 때 미래에 일어날 일인데도 꼭 과거처럼 그렇게 기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도 설명을 하자면 꽤 긴데, 아주 뭐 간단하게 요약을 하자면, 이런 겁니다. 예언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을 때, 혹은, 하나님의 큰 감동 속에서 미래의 사건들을 볼 때, 어느 정도는 시간을 초월하는 그런 감정으로 시간을 초월한 그런 의식의 상태에서 그것을 기록을 하는 거죠. 예를 들자면, 예루살렘의 멸망을 눈앞에 두고 슬퍼하는 선지자의 예언이 나올 때 그 때 마치 아직은 안 그런데 금방 망한 것처럼 그렇게 막 슬퍼하고 탄식하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예를 들자면, 아주 가장 대표적인 게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 우시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그런 것도 하나의 예언적 예언자적 프로페틱 프레즌트라고 그래서 예언자적 현재에 대한 경험이에요. 그와 마찬가지로 반대로 이번에는 반대로, 반대로 과거에 일어난 일인데, 일인데, 현재처럼 이렇게 기술한 경우가 있어요. 그것은 이제 회상이라는 작용 속에서 그렇게 되는 것 아니겠어요? 근데 이것이 이제 구약성경이 기록된 히브리어의 특징과 관련이 있는데, 우리 말에는 이렇게 했다...한다...할 것이다...시제가 현재, 과거, 미래 이렇게 돼 있잖아요? 더 나누면 이제 했었다...하고 있는 중이었다...뭐 지금 하고 있는 중이다...아니면 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이렇게 진행형으로도 나뉘고, 또 뭐 대과거로도 가잖아요? 했었었다...뭐 이렇게...내가 내가 밥을 먹었기 전에 먹기 전에 책을 내가 밥을 먹기 전에 뭐 책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어쨌든지 시제가 복잡하잖아요? 근데 히브리어에는 그런 시제라는 것이 없어요. 그래서 현재, 미래, 과거 상관 없이 어떤 행위가 끝났으면 끝났으면 완결형을 쓰고 끝나지 않았으면 미완결형을 써요. 그래서 그것은 하나의 동작의 전체적인 줄거리가 아니라 무 자르듯이 딱 잘랐을 때 그 나타나는 스페트라라고 그러는데, 이 상이 상이 완결상이냐, 아니면 미완결상이냐에 따라 가지고 그걸 나뉘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슨 얘기냐 하면은, 과거에 끝난 것도 완결이고, 지금 막 끝난 것도 완결이고, 미래에 딱 끝날 것도 완결이에요. 이러한 어법상의 특징 때문에 혼란스러워 보이는 일이 생겨나는 거죠. 근데 이게 여기서도 이제 그런 특징이 나타나는데, 그게 뭐냐면, 죄악이 나를 이겼습니다...그런데 우리의 죄과를 주님이 사하실 것입니다...이것도 사실은 과거에 일어난 일인데 지금 회상을 하는 거예요. 말하자면...그러니까 당연히 그 다음에 나오는 4절은 죄사함의 결과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거든요. 그런 것도 역시 이게 아직 발생하지 않은 미래의 일처럼 나오는데 사실은 과거에 일어난 그 일들을 회상을 하면서 또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전망하는 그런 말하자면 시제적 의미가 섞여진 그런 표현이라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는 이야기가 뭐냐면,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할 것입니다...이렇게 배부르다 그런 뜻인데...배부를 것입니다...이렇게 나오죠. 그럼 결국 우리는 분명한 것은 이 4절에 나오는 이야기는 3절과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거죠. 그게 뭐냐면 죄를 범해서 그래서 그 죄악이 자기를 이길 정도가 되었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당신의 집에 가까이 택하시고 가까이 하게 오십니다. 결국 뭐냐면 사죄의 경험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사죄...그래서 구약이든지 신약이든지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당신의 사랑의 크기와 넓이를 보여주시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 용서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거예요. 용서를 통해서...그래서 우주 전체에 죄가 들어와서 결국은 하나님의 구속의 영광을 구속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을 보여준 것처럼 꼭같이 이제 인간 개인의 범죄와 타락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 죄를 용서해 주시고 그 용서하시는 과정을 통해서 인간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가 어떤 건지를 깨닫게 하셔서 오히려 바르게 살아갈 때에는 하나님 앞에 굴복하지 않던 인간들을 그 죄를 용서해 주시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굴복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이에요. 그게 이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와 뭐 이런 것들이 굉장히 놀랍죠. 놀라운 그런 것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이제 이 시인이 복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복을...그 복에 가장 뛰어난 복이 바로 주께서 가까이 하게 하신 사람들이 바로 주께 가까이 하는 그것이 그것이 가장 큰 복이라는 사실을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여기에서 나오는 그 하나님께 가까이 한다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그 하나님께 가까이 한다라고 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하나님이 어떤 형체를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에 뭐 거기로 가까이 간다...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면 하나님과의 교통이죠. 교통. 그것이 아주 풍부하게 이루어져서 그래서 주님의 임재 속에 있는 영혼의 상태를 가리키는 거예요. 그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에요. 보면은 측근이 된다는 것, 왕의 측근이 된다는 것, 그 측근의 순서가 바로 왕의 사랑을 받는 순서이고, 그리고 두 번째로는 왕이 자기 백성들에게 베푸는 많은 혜택에 덕을 입는 수혜의 순서에요. 그러니까 왕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사람은 받을 수 없는 어떤 특별한 혜택을 측근에 있는 사람들은 받는 거예요. 그게 바로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특권이에요. 거기에는 영광과 혜택이 있어요. 권세와 영광과 혜택이 있어요. 친밀함이 있어요. 그것이 바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복이라고 하는 것을 여기에서 시인이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에요. 이런 사실들을 지은 죄에 대한 용서의 경험을 통해서 자신에게 진정한 큰 복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그 큰 사랑과 그리고 드넓은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품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크고 행복한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지만, 우리가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지 않은 동안에는 그 큰 축복과 은혜가 얼마나 고귀하고 놀라운지를 모릅니다. 오히려 우리들이 그런 다른 것들에 대한 욕망을 모두 버리고 주님 안에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알게 되는 것은 그것을 잃어버리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졌을 때, 오히려 그것을 알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지극히 크신 섭리 속에서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은혜의 상태에서 멀어지도록 허용을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멀리 계시거나 안 계시거나 우리를 버리셨거나 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용서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더 큰 사랑으로 돌아오도록 부르시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그 은총의 넓이와 크기를 알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죄악 중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사람들이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되느냐...그렇지가 않고, 오늘 시인은 택하시고 가까이 하게 하시는 사람이라고 묘사합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택한 백성이다라고 하는 그 큰 감격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용서라고 하는 영적인 축복, 그리고 가까이 오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기쁨에 참여하게 하시는 그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과 그 은혜의 크기와 넓이를 보여주시는 것이에요.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택함을 받은 사람들임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삶이 어떠한 난관에 부딪히고 때로는 우리가 불순종함으로 죄에 빠진다 할지라도 놓치지 말아야 될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어요. 그것은 뭐냐하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버려도 주님은 나를 버리시지 않는다는 사실...
(찬양)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 않네 온 천지가 변해도 날 버리질 않네
포기하지 않는 것이에요. 언젠가 일본 요새 그 재팬 에어라인이 뭐 파산하기 직전인데, 비행기가 추락을 했어요. 그래서 다 죽었죠. 다 죽었는데 갓난아이가 하나가 유일하게 산 적이 있어요. 근데 그 거의 기적에 가깝죠. 그래서 그 사건이 있고나서 비행기 앞좌석이 그렇게 불티나게 팔렸다고 그래요. 앞쪽이 비교적 안전하다 그래서...근데 뭐 어느 쪽으로 떨어지느냐에 따라 다 틀리겠죠. 근데...떨어졌는데 모든 사람이 감동을 받았죠. 왜냐하면 엄마는 아이를 엄마가 이렇게 안고 떨어졌는데 엄마는 만신창이가 됐는데 아이는 거기서 잠들어 있더래요. 그게 바로 부모의 마음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심지어 내가 나를 버릴 때 조차도 우리가 어떤 커다란 오류에 빠지거나 악에 빠지면 사실 우리 자신도 우리가 싫어지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런 얘길 했어요. “나도 내가 싫어진 지금에 와서야 ” 그러잖아요? “나도 내가 싫어진 지금에 와서야 오직 나는 당신만으로 나와 당신을 즐겁게 하고 싶습니다.” 그러잖아요. 그래서 그런 때가 있거든요. 근데 그것은 사실은 나도 내가 싫어지는 때가 있고 나도 나를 버리고 싶을 때가 있는데 나도 나를 배반합니다. 그 대표적인게 뭐냐면 양심의 작용이 강하게 일어났을 때 내가 그렇게 싫어지는 경우가 있잖아요. 물론 그런 작용을 통해서 하나님께 돌아오지만..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자기와 언약을 맺은 백성들을 택하신 백성들을 끝까지 사랑하셔서 그래서 당신께 가까이 오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이에요. 이것을 이제 이 시인이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이라고 다시 병행법적으로 서술합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신 그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냐 하면,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입니다...주의 뜰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당시 성전이죠. 다윗 시대 성전이었었으니까...성막이죠. 성막...거기에 하나님의 그 크신 임재 속으로 자신을 불러 들이는 그런 경험들을 말하자면 회고하며 서술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가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고자 할 때에도 제사를 받아 주시지 않고 하나님과의 그 단절을 시편 51편에서 말하잖아요? 그 후에 다시 주님의 뜰에 거하며 거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그런 제사를 올리고 주님과 교통하게 되었을 때, 그 때 그 신앙의 감격이 얼마나 컸겠어요. 오늘은 다 안 하겠습니다. 내일 4절 하반부를 더 하겠습니다마는 결론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이 바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그래서 그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그 아름다우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우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살 마음이 충분히 부어지는 이런 일들이 날마다 날마다 우리의 마음과 정신 속에서 일어날 때, 그 때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육체의 아름다움 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의 아름다움에 훨씬 취하게 되고 이 때 우리는 주님의 그 크신 사랑을 의지하면서 살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렇게 새벽에 나와서 기도하면서 마음의 비늘을 씻어내고 다시 주님의 아름다움으로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그 분께 우리의 마음을 쏟아놓는 이것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가까이 함이 우리의 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