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
“만민들아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 송축 소리로 들리게 할찌어다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시 66:8-9).
여기에 셀라라는 말이 나오는데 아마도 음악적인 고조를 나타내는 단어일 것이다...이렇게 봅니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낮은 단조로 노래를 부르다가 갑자기 바꾼다든지 조바꿈을 한다든지 그런 음악적인 부호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제 이 셀라는 안 읽는 것이 원칙인데 그 셀라를 중심으로 그 앞부분에는 이 세상의 교만한 열방과 인간, 거역하는 무리들을 감찰하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는데 셀라를 중심으로 그 뒤편에는 이제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그리고 그 언약에 부종하여 살려고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주님의 인자하심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만민들아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며 송축하는 소리로 그에게 들리게 할찌어라...송축하는 소리로 들리게 할찌어라...이건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을 송축하되 큰 소리로 송축하라는 것과 충심으로 송축하여 우리 인간들에게 뿐만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에게까지 너의 중심이 열납되게 하라...이런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올려야 할 찬송이에요.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경배할 때 거기에서 더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하나님을 향한 경배가 충심적 경배냐, 충심적이며 소수의 사람들이 모인 경배냐, 아니면 가식적이며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경배냐라고 선택한다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전자가 되겠지만, 만약에 그것이 충심적인 경배이기만 하면은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충심으로 경배할수록 하나님께서는 그 많은 사람들의 경배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에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계량적 성격이에요. 성질적으로 완전하도록 하나님이 부르시고 계량적으로 완전하도록 부르셔서 당신이 이 세상에서 구원하고자 선택하신 사람들 모두가 실제의 삶에 있어서 당신을 높이고 경배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하나님이 당신을 송축하는 언약 백성들에게 찬송의 제목을 두 가지를 주셨어요. 그것이 뭐냐면, 찬송의 이유이기도 해요. 첫째는, 그는 우리의 영혼을 살려 두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이죠. 생명...그래서 시인의 고백 속에서는 우선 이런 몇 가지 사실을 엿볼 수 있어요. 첫째는 뭐냐면, 자신들이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 있는 도우심 때문이다....그걸 보여주는 거예요. 두 번째는 이러한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거죠. 우리들이 나무를 살아있게 하는 것은 물을 주고 비료를 주고 햇빛을 받게 하고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살아있게 하는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우리와 함께 관계를 가지시고 당신 자신의 힘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실 때만 우리의 생명은 살아있는 생명이 되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여기 말씀 속에 나타난 권면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죠. 하나님이 우리를 살려 두셨다고 하는 것은 특별히 영혼을 살려두셨다고 하는 것은, 언약백성의 진정한 생명이 영혼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거죠. 그러면 이 생명이라는 것이 무엇이냐....그것은 많은 신학자들은 이 인간 영혼의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존성을 본뜬 것이다....이렇게 보는 거죠. 그래서 여기에 이렇게 나무가 있는데 살아 있어요. 자기가 이렇게 살아있는 것은 우리가 이렇게 보기에는 홀로 스스로 살아있는 것처럼 보여요. 스스로 환경에 대해서 반응하고 자기를 위해 끌어올린 물과 받아들인 햇빛, 공기, 이런 모든 것들을 사용해서 스스로 자기 자신을 위해 공급함으로써 생명을 유지하는 것, 이 두 가지가 생명체의 핵심이에요. 즉, 외부에 대한 반응과 자기 조절 작용이에요. 이것을 가만히 보면 이 생명이 우리가 보기에는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자체가 살아있는 것이에요. 그러나 사실은 피조물들의 모든 생명은 그런 점에서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본뜨고 있는 거죠. 그래서 죽어있는 큰 나무보다는 살아있는 작은 풀이 아름다운 이유가 죽어 있는 나무 속에는 하나님의 자존성을 흉내내는 그런 아름다움이 없어요. 그러나, 이렇게 있을 때, 이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훨씬 잘 보여주죠.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한한 우리의 시각으로 보니까 그런 것이지 모든 물질 넘어에 계신 하나님이 힘으로 이 모든 사물들을 살아있게 하시지 않는다면 어느 사물도 하나님의 자존성을 본떠서 그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러니 하나님 보시기에 이 세상의 모든 만물들의 성장과 피어남, 그리고 아름다운 변화, 이것들은 하나님에게 얼마나 아름다운 것일까요...하나님은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나시기도 하지만, 만물 속에 있는 당신의 아름다움을 모든 인간들 보다 가장 탁월하게 감상하실 수 있는 최고의 심미자이시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보면서 당신 자신의 자존성을 보게 되는...그 때 그것이 한없는 아름다움으로 다가오게 되는 거죠. 그래서 지식을 가지면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알게 되지만 지식이 없으면 그저 지나가는 풍경에 불과한 것이에요. 그러한 자존성을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본뜬 것이 인간의 영혼이에요. 왜냐하면 이런 물질적인 것들이 하나님의 자존성을 본뜨지만, 그러나 그것은 다분히 물질과 물질들을 서로 사용하여서 본뜨는 과정이 사실은 올바로 통찰하면 보이거든요? 그런데 영혼은 그런 게 보이지 않아요. 그래서 결국은 물질의 자존성을 생각할 때는 하나님이 생각이 나지 않지만,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것을 생각할 때는 반드시 그것을 붙들고 계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저버릴 수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 우리의 영혼은 그래서 더 많이 하나님을 의식적으로 필요로 하는 거예요. 육체보다....그런 것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이 인간 존재를 창조하신 목적이다...이런 뜻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의 영혼을 살려 두시고 그렇게 그 생명을 누리면서 살게 하신 이것이 우리 하나님을 찬송하는 최고의 이유인 것을 보여주는 거죠. 언약 백성의 영광은 세상에서 부자가 되고 높은 지위에 오르고 사람들을 다스리는 거기에 언약백성의 영광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언약백성의 영광은 바로 하나님처럼 살아있는 영혼을 가지고 육체에 의해 영혼이 휘둘리고 억압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하나님과 교통하며 주님이 이 땅에 인간을 창조하신 그 목적을 따라서 때로는 그것이 이 세상이 너무 부패해서 비현실적이고 고고해보여도 그런 비현실적이고 고고한 것을 간직하면서 사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가장 커다란 목적이에요. 그런 영혼의 충만한 생명과 살아있음, 그것을 하나님이 고난과 시련, 모순된 현실 속에서도 언약백성들에게 주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을 하나님 앞에 가슴이 터지도록 찬송하고 있는 것이에요. 자, 이렇게 보면 우리들이 사실은 영혼의 죽음의 문제를 이야기 하는 것과는 얼마나 다른 각도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왜냐하면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환경이 어려우면 우리의 영혼도 곤고하고 환경이 좋으면 우리의 영혼도 피어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영혼이라기 보다는 우리 자신의 마음이 살아있는 영혼의 생명에 의해 다스려지지 않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이 세상 사물들에 의해서 우리의 모든 판단들이 지배를 받고 흔들려서 그래서 꺾어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에...세상을 이김은 이것이니 믿음이니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란 말입니다. 그러면서 두 번째 찬송 제목을 하나님 앞에 올리는데, 이게 바로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다...그랬죠. 실족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누가 의도적으로 넘어지기 위해서 발을 딛는 것, 자신의 몸을 던져 죽기 위해서 벼랑에서 미끄러지는 것, 몸을 던지는 것, 이런 걸 가리켜서 우리가 실족이라고 이야기 하지 않죠. 실족은 문자 그대로 걸음을 놓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자기는 옳게 딛은 줄 알고 디뎠는데 사실은 그것이 옳지 않아서 발목을 접지르거나 넘어지거나 미끄러지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거예요.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일인데, 배에서 내려서 그래서 큰 짐을 들고 가는데, 길이 내가 가야 할 곳이 저 멀리서 보이는데 길이 있는데, 굉장히 가파라요. 그리고 길이 굉장히 멀어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바닷가로 걸어가면 직선 코스고 그 다음에 길이 평평해요. 바닷가는 평평하니까...그래서 짐을 들고 그 길을 갔는데 저녁 때 내렸는데 결국은 깜깜해져서 도저히 그 짐을 들고 못 가서 할 수 없이 길가에다 짐을 두고 가서 자고 와서 그 다음날 가져 갔습니다. 그게 왜 그런가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길을 걸을 때는 높든지 뭐 어떻하든지간에 그저 걸으면 돼요.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가 어디에 딛을지까지는 생각을 안 하고 그냥 걸어가면 된다는 거죠. 그냥 길이니까...높아도 낮아도...근데 바닷가를 걸으려니까 수많은 조약돌들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한 걸음 한 걸음 내가 어디에 딛을지를 생각하면서 그 발을 정확히 옮겨야 되는데 그 걸음이 땅에서 걷는 것의 3분의 1도 안 돼요. 속도가..그 때 내가 깨달은 게 안 그렇구나...우리가 이렇게 평평한 땅을 걸을 때는 생각 없이 발을 내딛어도 이렇게 조약돌로 가득찬 바닷가를 걸을 때는 참 힘들구나...하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렇게 자기는 옳게 걸음을 옮겨 놨다고 생각했는데 돌 위에 이끼가 있다든지 아니면 그 돌이 돌에 발을 옮겨 놓을 때는 생각을 안 했는데 체중의 절반을 싣고 보니까 밑받침이 튼튼하지 않아서 돌이 뒤집어 진다든지, 할 때, 실족이 일어나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누가 실족하기 위해서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은 없어요. 그 실족할 때, 결국은 두 가지죠. 자기가 옮긴 걸음에 대한 판단이 잘못되거나 두 번째는 그 몸을 균형잡을 수 있는 힘을 상실할 때, 넘어지게 되잖아요. 하나님이 우리를 실족하지 않도록 붙드시는 방법이 우리가 인생길에 걸음을 옮겨 놓을 때 우리의 어리석음에 붙잡혀 그릇 판단하지 않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총명을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보면, 하나님 은혜 안에서 말씀을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지혜를 주십니다. 그러나 은혜에서 미끄러져 부패하게 되면 그러면 이런 판단력이 흐려지게 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의 마음의 부패는 제일 먼저 어디에 영향을 주냐면 우리의 총명에 영향을 주어서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알아야 할 판단력들을 상실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보면, 찬송가에 나오잖아요. 정결한 맘 정결한 맘 그곳에서 신령한 빛 비추오니 이 보다 더 원하는 것 정결한 맘 주옵소서...그러잖아요? 정결한 그 곳에서 그 총명을 가늠하게 해 주는 순전한 빛이 비치는 것이에요. 시간이 없어서 이 정도로 그치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실족하지 않게 붙드시고 또 우리의 의지에 힘을 주어서 그래서 균형을 올바로 잡아서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넘어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의 인생의 최고의 보험은 보험회사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주님을 잘 믿고 의지하면 커다란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