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이 기뻐하는 날에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시 68:3).
앞에서 보면 하나님이 원수들을 향하여 하나님 앞에 탄원하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그래서 이제 그 원수를 흩어 주십시오...이제 전쟁의 문맥과 관련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어제? 그리고 미워하는 자로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해 주시옵소서....전쟁의 문맥과 관련이 된 거예요. 그리고 연기가 휘몰려 가는 것 같이 저희를 몰아내소서 불 앞에서 밀이 녹음 같이 악인이 주 앞에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하는 이 모든 그림이 하나님이 천천히 천천히 천천히 역사하셔서 조금씩 조금씩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게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강력한 간섭 속에서 그래서 이런 일들이 아주 과격할 정도로 확연하게 일들이 일어나 주기를 바라는 거예요. 그게 어떻게 보면 이제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강력한 부흥에 대한 갈망이고 섭리론적으로 보면 그 하나님의 아주 과격할 정도로 급한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강력한 간섭을 하나님 앞에 청구하는 거예요. 그 간섭이라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기적이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역사에 깊이 간섭해서 그래서 아주 급격하게 자기의 일들을 자기 일을 이루어 가시는 거예요. 그게 바로 하나님 앞에서의 강력한 기대예요. 기대....그러면 그 날은 언제 오느냐 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면 여호와의 날에 대한 기대를 바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 여호와의 날이라고 하는 것, 그것은 도대체 뭘 의미하냐....그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의 모든 역사를 매순간 역사에 개입하셔서 그래서 흔들어 놓으시는 것은 아니거든요.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돌봄을 벗어나는 피조물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고, 인간의 마음과 정신의 작용까지도 결국은 하나님의 주권의 수중에 있죠. 그러면에서는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를 벗어날 수 없는 거예요. 이제 그런데, 벗어날 수 없이 그렇게 흘러가지만, 성경은 종종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를 주셔서 그래서 인간들이 각기 자기의지를 행사하면서 살아가도 이게 너무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멀어지면 하나님이 직접 역사에 아주 보다 확실한 방법으로 개입을 하시는 거예요. 개입을 하셔서 악인을 무너뜨리시는 그런 날들이 있어요. 그게 바로 여호와의 날의 개념이예요. 그 여호와의 날은 항상 누구도 어떤 죄인도 하나님 뒤에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지만 그러나, 의심할 수 없이 하나님을 마주 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날이 온다...그걸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당신 자신의 성품을 따라서 정의를 실행하시는 날이 온다...이 뜻이에요. 이게 여호와의 날의 개념이에요. 여호와의 날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냐 하면 한편으로는 악인들을 강력하게 징벌해서 그래서 이 세상을 청소하는 효과가 있어요. 그래서 왕을 폐하게도 하시고 나라를 망하게도 하시고 하는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지는 거죠. 그러한 측면이 악인에게 있다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온 언약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아주 특별한 호의, 그리고 고난 받으며 살아왔던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상급과 보상이 있는 날이에요. 그러니까 여호와의 임하시는 그 날이 어떤 날이 될 것이냐 하는 것은 그 동안 하나님 앞에 살아온 삶의 태도와 방식에 달려 있는 거예요. 그러면 보십시오. 그 날이 하나님의 진노와 축복을 함께 가지고 있는 날이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맨 처음에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를 시작되며 선포하신 그 메시지는 세례 요한의 메시지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었죠? 회개하라...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그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도 또 다른 그 여호와의 날의 개념이에요. 그러면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그 개념이 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사실은 자신들이 바로 그 나라 안에 있는 사람들이다...이렇게 생각을 했거든요. 믿어 의심치 않았죠. 근데, 그것은 혈통이나 민족, 역사, 나라, 지역, 이런 것들로 임하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특별한 교통으로 이루어지는 나라라고 본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도록 촉구하고 있는 장면은 이 사람들에게 굉장히 충격적인 그림이죠. 우선 자신들이 하나님의 나라 바깥에 있다는 것도 충격이고 그 나라가 오는 것이 마치 커다란 바위가 굴러오는 것처럼 어떤 식으로든지 너 있는 자리에서 태도를 바꾸고 사는 것 고치지 않으면 깔려 죽는다는 식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오니까...결국 뭘 보여 주냐면 언약백성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못하니까 그 나라가 오는 것이 그들에게는 심판의 대상이 되었던 거예요. 그래서 구약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여호와의 날의 개념을 볼 때, 그 날이 도래했을 때 막 기뻐하고 찬송하고 이러는 사람들은 누구냐 하면 대개 고난 받던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올바르지 않은 구조 속에서 고통을 받고 괴로워하던 사람, 실제적으로 악인에게 그냥 눌림을 당하면서 고통을 받는 그런 물리적인 고통일 수도 있고 자기를 그렇게 괴롭히는 사람은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지 않은 현실을 보면서 애통하고 아파하는 그런 종류의 고통일 수 있는 거죠. 어떤 종류의 고통이든지간에 그런 식으로 고통 받고 분투하던 사람들이 그 날에 여호와의 날에 기쁨의 국면에 참여하게 되고 악인들은 여호와의 날의 심판의 측면에 참예하게 되는 것,,,,그러니까 1절에서 2절 사이에 일어나는 적들의 무너지고 그 다음에 소멸하는 그것과 뒤에 나오는 의인이 기뻐하고 하나님 앞에서 뛰노는 그것은 여호와의 날의 양 국면을 차례대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한꺼번에 보여주는 거...한꺼번에 ..그래서 악인이 멸망당하고 막 이랬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의미가 아니라, 글쎄 뭐 뭐 묘사가 적합할지 모레겠는데, 비유가? 예를 이렇게 들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그냥 여러분을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고 쳐요. 그런데 하나님이 간섭을 해 주셔서 그래서 하나님이 강력하게 임재해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얼마나 사랑하신다는 것, 그리고 그 고통 속에서 그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 몸부림 치는 여러분들을 하나님이 이해해 주신다고 하는 것이 여러분들에게 믿어지게 되었어요. 성령의 넘치는 위로가 있어요. 근데 들리는 소식이 여러분들을 괴롭히던 그 사람이 뭐 죽었다더라...아니면 뭐 실컷 어디서 다쳐 가지고 두 다리를 공중에 매달고 병원에 누웠다더라...그럴 때, 여러분들은 그 사람이 다리 모가지가 부러져가지고 두 다리를 걸고 병원에 누웠다는 사실 때문에 기뻐해요, 아니면 하나님이 오셔서 여러분들을 어루만지신 그것 때문에 기뻐해요? 당연히 후자죠. 그러니까 말씀 드리는게 차례대로 일어나는 게 아니라 이거야...차례대로 악인이 무너졌기 때문에 막 기뻐하고 그러는게 아니야...그건 오히려 부차적인 것이고, 여호와의 날의 두 측면,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특별한 관계를 맺게 해 주시고 악인의 그 소멸되는 그것을 하나님이 함께 보여주시는 가운데 그 때, 그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뻐하는 날이 오는 거예요. 기뻐하는 날이....그래서 그가 비록 악인이라고 할지라도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같은 마음이야. 하나님의 마음이 뭐예요? 나 여호와의 바라는 바는 악인이 멸망을 당하는 것이 아니요....아니요...그가 많이 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파멸을 보고 기뻐하는 그것은 온전한 사랑의 성숙한 상태라고 말할 수 없는 거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그런 사랑이에요. 그래서 여기에서 의인은 기뻐하며...그랬어요. 의인은 기뻐하며....의인은 뛰놀며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그랬는데 그 앞에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이 나와요. ‘루뻬니 아도나이’라고 그러는데,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은 얼굴이라는 말 하나하고 그 다음에 전치사 to가, 혹은 at이 하나 붙어서 그래서 ‘리푸네’라고 그래요. 그래서 직역을 하면 누구누구의 얼굴 앞에서....얼굴과 대하여...그런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뭐 얼굴이 있으신 분이 아니잖아요. 그죠? 그래서 얼굴이라고 하는 표현은 우리에게 이해시키기 위한 말하자면 신인동형적인 그런 표현이에요. 자, 참 재밌잖아요? 누군가가 거짓말을 하려고 그러는데 심증만 있지 물증은 없어요. 그럼 뭐라고 그래요? 야...너 얼굴을 보고 얘기해봐.. 그럼 두려움이 생기는 거...그래서 히브리어에서 이 얼굴이라는 단어를 신비한 의미를 갖는 복수로 사용을 해요. 신기한 거예요. 자...내 얼굴을 보고 말해.그래서 발끝을 보면서는 거짓말 할 수 있는 사람이 눈을 보면서는 거짓말을 못 하는 거야, 차마...결국은 하나님 닮은 영혼을 가진 인간의 그 본 모습에 직면하게 될 때 그런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내가 악을 행해도 어린 아이가 나를 딱 뚫어지게 보고 있으면 내가 악인이라고 할지라도 그 악을 계속 자유롭게 수행할 수 없는 거야...그게 하나의 신비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의 최고의 특권이 뭐냐면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눈빛 앞에서 사는 거예요. 제가 좋아하는 표현 중의 하나가 ‘구김이 없는 꾸밈이 없는’.. 그 표현이 나는 꾸밈이 없다라는 것을 ‘언핀디’ 라고 하는 표현인데 오웬 목사님한테 참 많이 배웠는데 꾸밈이 없다는 것....응? 꾸밈이 없는....그리고 금방 뭐라고 그랬죠? 구김이 없는...꾸밈이 없고 구김이 없는....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하는 것, 그것은 나 이정도 살았으면 잘 살았죠? ‘나는 주님 앞에 설 자신이 있습니다...’그런 의미에서의 구김이 없고 꾸밈이 없다...그런 뜻이 아니야. 무엇인가 마음에 접고 있는 자락이 없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를 감추고 자기를 포장하려고 하는 그런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자기를 하나님 앞에 세워,
(찬양) 이 모습 그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삶이 완전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게 마음에 구김이 없어야 되는 거야. 무슨 뜻이냐 하면, 옳지 않은 면도 많이 있어. 모자라는 면도 많이 있어요. 그런데, 어느 것도 내가 의도한 것이어선 안 되는 거죠. 그것도 아주 굉장히 일관된 의지를 가지고 강력하게 그걸 의지하고 있을 때는 그렇게 찬송을 부를 수가 없는 거야. 누가 완전하대? 도대체 누가 완전할 수 있겠어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데...아마 하나님을 가장 기뻐하고 경배하는 그 날에도 그 사람 마음 속에 죄책과 오염의 흔적이 묻어있고 사고 속에도 여전히 죄에 대한 영향이 완전히 제거되진 않았어요. 그런데, 양심의 자유가 있는 것, 양심의 자유가 있는 것, 이것도 사실은 완전하다고 생각 안 해..그런데 자기가 아는 한에서는 의도된 것이 별로 없다야...그럴 때, 구김이 없는 마음으로.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마음에 구김이 없는 사람들이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하느냐 하면 그거 아니거든요? 하나님 앞에 섰을 때는 그 모든 것들이 보이는 거야...그래서 나도 내가 싫은 거죠. 네? 그래서 제가 언젠가도 한 번 가르쳐 드렸잖아요 그죠?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니까 하나님 앞에 가장 잘못한 것은 내가 나인 거예요. I'm sorry for what I am.. 내가 나여서 정말 죄송합니다...왜? 하나님이 원하신 나와 현재 존재하는 나 사이의 격차가 너무 큰 거예요. 그러니까 뭐냐면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느끼고 임재를 느끼면 나의 행한 일과 나의 존재 그 자체가 한 덩어리로 다가온다는 것을 나는 경험을 해요. 그렇게 하나가 되는 거야. 그러니까 그런 인간의 본질로부터 삶이 개별적 행동이 흘러 나오고 개별적인 행동은 통해서 자신을 발견하지만 그러나 마지막에 돌아가는 것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정말 하찮은 인간이라...더러움과 악이 가득찬 존재라고 하는 것을 깨닫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회심할 때, 우리가 무슨 뭐 옛날에 친구 돈 훔친 거 회개합니까? 엄마 속 썩여 드리는 거 회개합니까? 그런 거 포함되지 않는 건 아닌데 그거보다 훨씬 더 깊고 심오한 거야. 자기 존재 자체가 죄인입니다...그래서 고백이 뭐냐면 회심의 놀라운 은혜가 임할 때 ‘하나님 나 돈 훔쳤습니다’그렇게 고백을 하는 게 아니라 나는 죄인입니다...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가득찬 죄인일 뿐입니다....나의 정신과 영혼은 물론이고 행동과 육체 어느 속한 한 부분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감당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깨닫게 되는....여기서 이제 꾸밈 없이 하나님 앞에 사는 것...꾸밈이 없이......그리고 또 뭐라고 그랬지? 구김이 없이...꾸밈이 없이 구김이 없이....그러기 위해서는 완전한 삶을 살 순 없지만 언제든지 주님이 지적해 주시면 그 주님의 뜻대로 되고 싶다라고 하는 선한 의지가 자기 안에 남아 있고 그래서 양심을 거스르지 말아야 되는 거야...죄 중에서 제일 큰 것은 양심 그 자체가 자각을 하는데도 실행을 하는 거야. 그것은 자신의 영혼에 미치는 그 죄의 흔적이 굉장히 큰 거예요. 그게 없어야 돼요. 물론 이제 그럴 때 여러분들은 ‘아이 그 양심이 뭐 양심에 털 난 놈들도 많은데 그거 뭐 믿을 수 있습니까?’ 물론 그런 것도 있죠. 근데 이제 그러니까 전혀 양심이 없다 이렇게 말할 순 없고 그러니까 그런 양심의 발현의 크기도 그 사람의 영혼의 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죠. 추호도 그런 것에 자극 받지 않는 거의 자극 받지 않는 그런 아주 완악한 악인도 있는데 그래서 양심에 화인 맞는다고 그러잖아요? 인정해요. 인정하는데, 그건 뭐 남의 얘기고...우리 자신이 주어진 한계 안에서 그렇다고 그 양심까지 집어 던져 버리면 법 자체가 없어지는 거죠. 그래서 그거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우선 그것부터 하지 말아야 돼요. 양심이 거스리는 것부터...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구김이 없이 꾸밈이 없이...꾸밈이 없이가 더 중요해...꾸밈이 없이...구김이 없이.....그렇게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살아갈 때, 어느 날이 여호와의 날이 되든 그 날은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그 온전한 통치를 기다리는 날이 되는 거죠. 좀 더 하고 싶은데 고만 할게.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