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시기하지 말라
“너희 높은 산들아 어찌하여 하나님이 거하시려 하는 산을 시기하여 보느뇨 진실로 여호와께서 이 산에 영영히 거하시리로다”(시 68:16).
여기에 이제 “높은 산들아 어찌하여 하나님이 거하시려 하는 산을 시기하여 보느뇨” 이제 이렇게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나오는 이 높은 산이라는 것이 그저 제 생각에는 아마 이 시인이 두루두루 여행하였을 테니까 아마도 이 북쪽에 있는 지금 사마리아 지역의 산지에 많은 산들을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앞에 보면 “바산의 산”이라는 이야기가 나와요. 굳이 우리들이 시인의 마음속에 있는 산이 어디였는지를 우리들이 찾아낼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그 높은 산들은 지금 하나님이 거하시려고 하는 산을 시기한다 이렇게 나옵니다. 이 산은 바로 뒤에 나오는 시내산일수도 있고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서 전통적으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산지라고 받아들여지던 시온을 가리킬 수도 있어요.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보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사실에 대한 하나의 비유죠.
“높은 산들아” 라고 할 때 이것은 열왕들의 교만을 의미한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왕들이 나라를 다스리면서 그들은 통치의 이상 자체가 자신의 영토에서 자신이 하나님이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성군으로서 자기의 나라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궁극적으로 이 땅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사실을 인정을 하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을 구현해가는 종으로서 그렇게 자신을 자처할 때에 올바른 통치가 이루어지는 거죠.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세우신 목적이기도 하였던 것이에요. 사람들이 육신의 눈으로는 하나님을 볼 수 없지만 그 왕국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도덕적인 질서, 통치의 질서를 통해서 그 모든 보이는 왕권 너머에 계신 하나님의 통치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죠.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그 모든 눈에 보이는 과정을 통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성품이 어떤지를 알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세우신 목적이었단 말이죠.
그런 것들을 이스라엘 조차도 훌륭하게 구현하면서 살지 못할 때가 많았던 것이에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왕들이 교만해 지는 것이에요. 권력 그 자체가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한 방법이기 때문에 그 방법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을 때 모든 지도자들과 왕은 그 권력을 사용해서 하나님처럼 자기 자신을 높이려고 한단 말이죠. 그래서 고대의 사회를 보면 그 모든 왕들은 항상 자신을, 자기 자신이 하늘이라고 이야기한 루이 14세 같은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자신을 천자라로 불렀어요. 그러니까 ‘하늘의 아들’이란 말이죠. 가장 가까운 아들, 그 자체가 뭘 보여주느냐 하면 왕 자신도 자신이 모든 궁극적인 존재의 목표일 수 없고 하늘의 뜻을 받드는 사람일 때에 비로소 올바른 왕이 될 수 있다는 사상을 일반 은총 속에서 하나님이 넣어주신 거예요.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고백을 해도 실제의 삶이 그 고백을 따라주지 않으면 말 뿐이지 실제는 그렇게 구현되는 것이 아니죠. 더욱이 그들은 마음으로 자신이 하늘의 아들로 행사한다 할지라도 실제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고 나라를 다스려야지만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아들과 같은 왕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들은 잘 모르는 것이죠. 그런 맥락에서 볼 때에 여기에 높은 산들이라는 것은, 히브리 원문을 보면 여러 산들이라고도 나오는데 이렇게 여러 산, 높은 산들이 이어지는 그 산지가 모든 평지 위에 높고, 모든 산들 위에 서로 높아지려는 것처럼 이 세상의 열왕들이 그렇게 하나님보다 자신이 매우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 그리고 자기 자신을 높이는 것이죠. 그러면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산을 시기하여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열왕들이 하나님의 보좌를 시기하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통치의 그 주권을 말하자면 부러워하고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시기할 때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 모든 권력과 임금들의 교만이라는 이런 이야기에요. 하나님은 가장 높은 봉우리에 계시는 것도 아니고 가장 큰 나라를 선택하시는 것도 아니에요. 만약에 하나님의 나라가 그러한 크기로 해결하는 문제일 것 같다면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역사적으로 두 나라만 선택하셨으면, 세 나라 정도만 선택하셨으면 모두 끝났어요. 이집트, 중국, 그리고 로마 정도만 선택하셨으면 끝났어요. 그리고 만약에 그 높은 것이 그 높은 것이라면 하나님은 모세를 히말라야 산에서 만나셨어야지요. 하나님은 그렇게 안 하십니다. 그래서 이 열왕들이 하나님이 계신 산, 그것이 시내산일 수도 있고, 혹은 시온산일 수도 있지만 어느 산이든지 간에 그것은 자신들과 같은 키높이에 맞추어서 시기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작은 동산이라 할지라도 그 산이 높은 것은 봉우리가 높아서 높은 산이 아니라 높으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높은 산이죠. 그리고 그 높음의 의미를 알고 자신들의 이 세상에서의 높음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는 것이죠.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 앞에서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 앞에서 떨며 무릎을 끓는 것이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이 크고 두려우실 뿐만 아니라 어떻게 자비로우시고 인자하신지를 언약관계를 통해서 보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무는 이 세상 다른 나라 백성들의 의무보다 더 탁월한 것이었어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 앞에 벌벌 떠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 하나님의 깊고 놀라운 사랑을 언약 관계 속에서 경험하게 하셨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떨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섬기도록 하나님이 불러 주신 것이에요. 그러나 이방 사람들에게는 언약 관계 속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시하신 것처럼 그렇게 풍부하게 계시하시지 않으셨어요. 그들의 가장 중요한 이 의무는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두려우신지를 알고 떨고 그분에 대해서 삼가는 마음만 가져도 하나님은 합당한 복을 베푸셨던 것이죠. 물론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그들은 더 찬란한 계시의 빛 아래서 그 언약 백성들처럼 주님을 섬기고 구원 받기를 원하셨습니다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지식의 층차를 가지고 민족들을 다루시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가 멸망되어 가고 있는 상황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로마가 이렇게 망하게 된 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비난을 하니까 기독교 최초의 역사 철학서를 쓰면서 그는 로마 제국 초창기의 5현제 시대를 언급하면서 그들의 시대에 나라에 융성하였던 것을 말하며 그것이 바로 일반 은총 차원에서 하나님이 그 현명하고 덕스러운 황제들을 축복하셨기 때문이라고 언급했어요.
지금도 이 세상에는 이게 어디 왕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까? 우리가 복음을 전해 보십시오. 그러면 왕이 아닌 사람들도, 심지어는 아주 어린 아이들도 그 복음을 싫어하는 태도를 분명히 드러냅니다. 모든 인간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께 돌아가려는 마음도 있지만, 하나님을 싫어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마음도 인간 속에 본성적으로 내재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하나님을 멸시하고 능가하려는 인간의 교만도 본성 속에 함께 내재하고 있어요. 그래서 헤르만 바빙크라는 학자는 말하기를 “인간은 그 하나님의 품을 그리워하면서도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는 불가해한 존재다”라고 이야기 했어요.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죄의 본질은 자신을 왕처럼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자신의 존재가 우주 전체의 중심이고 그리고 자신의 행복이 최고의 가치이고 무엇이 높은 존재이고 무엇이 참된 선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고 인간은 그 하나님의 판단에 굴복해서 자기의 존재의 위치를 정하고 그리고 무엇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인지를 하나님이 정해 주시는 바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에 승복하고 더 높은 가치를 위해 더 낮은 가치를 희생하고 사는 것이 그게 인간의 참된 본분이에요. 그런데 인간은 그렇게 살려고 하지 않아요. 그래서 자신을 더 높이고 자신의 판단으로 하나님을 부인하는 거예요. 그게 죄의 본질이에요. 인간은 결국은 하나님을 능가하는 존재가 되고 싶은 거예요. 그런 열왕의 마음이 모든 인간 속에 깃들여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시시때때로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라고 돕기 위해서 때로는 우리를 비참 속에 처하게 하시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글 속에서 이야기하기를 이렇게 말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종종 큰 어려움 속에 두십니다. 그때에 우리는 비로소 예전부터 이미 있었던 자신의 비참에 대해서 깨닫게 됩니다.” 늘 비참한 존재인데 평소에는 못 깨닫다가 하나님이 큰 고난을 주시거나 어려움을 주실 때 그때 비로소 아 내가 비참하구나 하는 걸 깨닫는데 그것은 그때 생긴 비참이 아니라 원래에 그런 존재인데 눈이 가려서 그걸 못 보고 있다가 고난을 통해서 비로소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걸 깨달으면서 인간은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이 시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산을 넘보지 말라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거하시는 산이 높으신 것은 높으신 하나님 때문에 높으신 것이니 그 하나님의 높으심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정말 사랑하고 그분 앞에 겸비하게 되면 그러면 하나님이 관계를 맺으신 모든 사물과 사람을 보면서 그 높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거죠. 교회는 눈으로 보면 작은 건물에 불과하지만 거기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높은 건물, 화려한 건물이 이 세상에 훨씬 많지만 그러나 주님이 그 건물과 관계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교회를 높은 건물로 생각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의 모임이 있지만 교회 안에서의 성도의 모임이 가장 탁월한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말할 수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 교회와 관계를 맺고 계셔요. 그래서 우리는 성도들의 그 모임이 이 세상의 어느 회합보다도 탁월하게 높은 모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죠. 우리가 하는 일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 큰 일이 아닐 수 있어요. 세상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은 큰 영광이지요. 세상 나라를 위해서 많이 일할 수 있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의 권력도 누리고 부도 누려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하찮은 사람들이에요. 그러나 이 세상 나라의 일 넘어서서 하나님 나라의 일에 하나님이 관여하시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 앞에 중요한 사람들이에요.
이러한 각도로 주님이 관계를 맺고 계신 모든 것들을 높이 보고 그렇지 않은 것들을 낮추어 보면서 우리의 눈으로 들어오는 이 가치의 질서들을 재편해야 되는 것이에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누구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 수 없고 충성스러운 삶을 살 수 없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진실로 여호와께서 이 산에 영영히 거하시리로다. 하나님은 변함없이 그 산에 거하셔서 당신이 그 산에 거하시는 효과를 나타내시고 그 산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만나러 오는 모든 백성들과 함께 관계를 맺으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사람 보기에 높은 사람들이 되지 말고 하나님 보기에 높은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거예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리고 높으신 하나님을 경배하기 때문에 높은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거예요. 교회도 그렇게 세상 보기에 큰 교회, 세상 보기에 높은 교회가 아니라 정말 주님 때문에 의미 있는 교회, 주님 때문에 높은 교회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이죠.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