훼방으로 마음이 상할 때
“주께서 나의 비방과 수치와 능욕을 아시나이다 나의 대적자들이 다 주님 앞에 있나이다 비방이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불쌍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시편 69편 19-20절)
자신의 구속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릴 정도니까, 얼마나 많은 고통이 시인을 애워 싸고 있었겠습니다까. 그저깨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영혼은 목숨이라고도 번역이 될 수 있는 단어라고 말씀을 드렸죠. 그러니까, 그런 속에서 이시인은 구체적으로 자신이 당하고 있는 훼방과 수치와 능욕을 하나님 앞에 토로 하고 있습니다. 훼방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삶의 질서를 대적들이 흩으러 놓는 상태를 가리키는 거죠. 그러니까 이것은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것 이라기보다는 밖같에 환경이 영향을 주어서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삶의 질서를 뒤 흔들어 놓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에요.. 그리고 수치는 결국 영광이 사라지는 것이 잖아요. 그래서 성경에서 언약백성들이 생명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있어요. 그게 뭐냐면 명예에요. 그래서 우리들이 흔히 그 명예를 추구하는 것을 비난 하잖아요. 그런 것들을 비난 하는 것은 추구 할 때에 비난을 받는 명예는 어떤 종류의 것이냐하며는 사실 이상의 명예를 취할 때, 그것은 비판 받아야 되는 거죠. 그리고 그것은 마치 사치나 허영과 같은 것이에요. 그러나 만약에 한 사람이 태어나서 인간으로서 언약백성 으로서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할 정당한 명예를 추구하지 않는 것은 부꾸러운 삶이에요. 예를 들어 봅시다 우리가 어떤 죄의 유혹을 받을 때에 내가 이러한 죄를 짖고 어떻게 이다음에 주님을 뵈올 수 있을 까. 이것도 일종의 명예죠. 쉽게 이야기 하면, 그 죄를 지어도 구원에는 넌 이상이 없어. 라고 하면 우리가 담대히 그 죄를 짖겠습니까? 어짜피 모두 용서 받은 건데, 그렇지 않죠. 그러니까 마지막 날에 주님이, 넌 참 잘했구나! 인정이잖아요. 그런 명예를 우리들이 추구해야 되는 거죠. 근데 언약백성으로써 이렇게 이러 이러한 죄를 짖고 어떻게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이 세상 사람들에게 일컬음을 받을 수 있을까. 그건 정당한 명예의 추구고 그런 것이 없다면, 그는 사실은 죽은 사람이죠. 우리들이 솔직히 이야기 해서 구원다음에 우리들이 추구해야 할 것이, 정당한 명예 아니에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도 명예로써 영광을 돌리는 거에요. 그렇니까 하나님앞에 영광을 돌린다고 할 때, 사람들이 직접 돌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 돌리는 거에요. 세상 사람들은 믿음이 없으니까, 그리고 또 믿음이 있는 언약백성들도 육신의 눈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일을 보면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앙심 때문에 우리 인간에게 박수를 보내지 않고, 인간인 우리를 능하게 하신 하나님아버지께 박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들이 제가 가끔 설교시간에 여러분들에게 이야기 하잖아요. 사람들이 누가 길거리를 지나가는데, 멱살을 쥐고 호주머니에서 십만원만 뺏어도 큰일 날꺼에요. 그죠. 강도 현행범이거든요. 액수에 상관없이, 더군다나 멱살을 쥐고, 위협을 해서 돈을 뺏었다 그러면 강도에요. 단순히 살짝 소매치기나 쓰리를 해간 것 하고는 종류가 틀린 범죄고, 둘 이상이 그일을 하며는 특수 강도입니다. 그건 가중 처벌이 되는 거에요. 근데 사람들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정당한 명예를 훔치거나 더럽혔을 때에는 그것이 죄라고 생각을 안 하는 거에요. 오늘날 .이 쓰레기 같은 인터넷에 떠도는 그 글들처럼 말이죠. 굉장히 악한 것이죠. 난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생각을 해요. 사람의 주머니에서 돈을 오히려 하도 배가 고파서 훔친 것 보다 그 사람의 명예를 더럽힌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정당하지 않게 그사람의 옳은 명예를 더렵히는 그 것은 더 끔찍한 악이라 이야기에요. 더군다나 다른 사람들의 영광이나 명예를 가로체는 그것은 쓰레기 같은 일이라는 거에요.
예) 언젠가 한번 목회자들을 위한 잡지에 글이 실렸어요. 그래서 펴보니깐, 내 글이에요. 그래서 여기나 글을 낸 적이 없는 데, 저자에게는 수십권의 책을 써도 자기 글에는 지문이 있기 때문에 금방 알아요. 한 페이지를 쭉 읽어 나갔는데, 내글이야! 펴보니깐 다른 사람이름이야. 하도 신기해서 직원들을 불렀어요. 그리고 이름을 가리고 읽어봐라, 누구 글이냐. 어! 이거 목사님 글이 잖아요. 펴보니깐, 다른 다람 이름이 써있어. 이런 것들은 전부다 도둑질이에요.
뭐 그냥 넘어가고 말았지마는, 따지면 뭐하겠어요. 그렇게들 사는 지 모르겠어요. 그런 모든 것들이 다 잘못하는 거에요. 근데, 정당한 명예는 꼭 필요한 거에요. 그래서 불명예스럽게 오래 사는 것보다는 명예스럽게 죽는 것을 택했던 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장로님 그런게 군인정신 아닙니까! 명예에 살고 명예에 죽는, 명예스럽게 사는 것이, 명예스럽게 죽는 것이 수치스럽게 사는 것보다 훨씬 더 훌륭 한거에요. 물론 수치스럽게 죽는 것보다 명예롭게 사는 게 더 좋겠죠. 그런거에요. 그런 것들이 모두 박탈 당한 상태를 가리키는 거죠. 그러니깐 그런 수치를 당하는 거에요. 그러면서 수치는 소극적인 측이고 능욕은 그것보다도 훨씬 더 적극적으로 짖밟혀서 그래서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에요. 만약에 수치가 정당한 명예를 잃어 버린 것이라면, 능욕은 그 위에 불명예가 거름처럼 쏟아져 부어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거에요. 이게 능욕이에요. 그런 상태에서 이시인은 어떤 의미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죠. 그것을 하나님께 호소하면서 주님이 아십니다. 라고 고백을 합니다. 주님이 무엇을 아신다고 하는 그것은 몇일 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냥 객관적으로 정보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마음 깊이 아셔서 그래서 그것에 상응하는 감정을 가지시고 그것에 합당한 어떤 조치를 내리시는 거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아신다 라고 하는 표현이에요. 내대적이 다 주의 앞에 있나이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주님이 마음만 먹으시며는 정리 하실 수 있나이다. 내 대적이 다 주님 앞에 있나이다 이것은 결국은 하나님과 친밀 하다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직접적인 영향력 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상전이 하인에게 명하여 넌 가라! 하면 가고 엎드리라! 하면 엎드리는 것처럼 그렇게 주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또, 강한 군대가 아주 약한 적군을 맞이했을 때에 맘만 먹으며는 어찌 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다 주의 앞에 있나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앞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죠. 사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평탄 할 때에 매일 매일 하나님앞에 이렇게 기도하고 주님께 매달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는 이 모든 우리의 은혜의 생활들 주님을 향한 추구, 이런 것들은 결정적인 날에 이 기도를 드리기위한 준비라고 말 할 수 있는 거죠. 자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나의 회방과 수치와 능욕을 아십니다. 내 대적이 다 주의 앞에 있나이다 그리고 하나님앞에 호소할 때에는 이렇게 간절히 호소할 때에는 자신은 양심에 부끄러운 것이 없이 주님앞에 서 있을 수 있어야되. 물론 완벽한 인간일 수는 없죠. 누가 이 세상에 완벽할 수가 있겠어요. 그러나 최소한 양심은 자신을 책망하지 말아야지 되요. 네가 어떻게 어려움을 만났다고 하나님 앞에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냐! 네가 하나님의 원수로 행하고 저 원수들과 한패거리 잖아! 라는 양심의 외침이 들려서는 이런 기도를 할 수 없는 거죠. 그러니깐 우리가 어려움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사실 단순하게 생각을 해보며는 사실 하나님과 우리와의 문제이지 환경이 문제가 아니에요. 그래서 아브라함 링컨이 유명한 이야기를 했죠. 우리의 대적이 얼마나 많은지 그게 문제가 되는 게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애워싼 대적이 너무나 많아서 우리는 하나님의 섬리를 모르지마는 그 대적에게 핍박을 받거나 혹은 고난을 받아서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그러면 죽을 거죠. 우리는 그 일이 왜 일어 났는지 모르지마는 어째든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섬리 속에서 그렇게 됐고 그리고 그것이 잠시의 무질서 라면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이길 수 있게 해주시지 않겠어요! 그러면 그것을 기대하며 매달릴 수 있기 위해서는 깨끗함이 있어야 되요. 완전한 깨끗함이 아니라,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고 큰 나팔이 울려날 때, 주예수 오셔서 심판하셔도 나의 영혼은 겁없겠네. 주님 앞에 늘 부족하지만, 책망할 것이 없어요. 자가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이 그렇게 될 때에 그때,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 할 수 있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나의 처지와 환경을 아신 다 라고 하는 그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몰라요 거기서 시인들이 위로를 찾았던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섬리 속에서 일어나는 잠시의 무질서와 고통을 이길 수가 있었던 것이에요. 그러면서 이제 20절에서 이 시인이 훼방이 내 마음을 상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긍휼이 여김을 바라나 없고 아니할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그래서 이런 훼방이 마음을 상하게 하였다 라고 고백을 합니다. 훼방을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은 이런거죠. 무엇인가 사람은 다 자기가 원하는 마음속에 원하는 질서가 있는데, 이것들이 바깥으로 그대로 나타났을 때에 그때에 마음과 바깥에 이루어진 이 질서 사이에 조화가 이루어 지면서, 자신이 행복한 거에요. 성격이깔끔하고 단정한 사람은 남의 집에 초대를 받았을 때, 아무릴 맛난 음식으로 산해 진미를 해놓고 대접을 받아도 집안이 지저분 하며는 거기서 먹는 것 자체가 괴로운거에요. 그래서 제가 항상 하는 이야기가 난 음식점을 찾을 때, 깨끗하면 무조건 용서해 줘요. 음식이 별로 맛이 없어요. 깨끗하면 용서 해줘요. 적어요 환경이 깨끗하면 음식도 꼭 그렇지는 않지만, 대부분 그래도 막 하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근데, 지저분하고 그러며는 음식아 아무리 맛이 있어도 기쁘지 않죠. 마음속에 있는 그런 거에요. 처음에 제가 목회를 하면서 심방을 할 때, 마음이 되게 많이 걸림이 있었어요. 누구네 집에 삼방을 갔는데, 집안이 굉장히 지저분 한거에요. 하물며 목사가 온다는 데도. 자꾸 그자매에 대한 인상이 떠나지 않는 거에요. 지저분한 가정을 가진 자매, 청소도 않하는 자매,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도 다 선입견이지. 가정은 잘 청소는 않해도 교회와서는 열심히 봉사는 잘 하더라구요. 그래서 선입견을 버렸는데, 그런 것도 하나의 성향이죠. 그렇지 않겠어요. 이 마음에 있는 것들이 바깥의 질서, 이런 것들이 공격을 받을 때 환경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무너트리는 공격이란 말이죠. 깊이 고통을 받는 거에요.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나냐면, 마음이 상하는 거에요. 그래서 상한다고 하는 것은 리쉬바르 인데, 깨뜨려 지는 거에요. 사발이 깨지듯이 마음에 딱 금이 가는 거에요. 마음이 상하게 되는 거에요. 마음이 상하게 되는 이런 일들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어요. 어떻게 양면성을 가지고 있냐며는 마음이 상하는 그 일은 그 자체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딪딤돌이 될 수도 있고, 미끄러지는 딪딤돌이 될 수도 있는 거죠. 그래서 이 상함은 반드시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를 통해서 오는 것은 아니에요. 예를 들자면 이런 상한 마음은 불신자들에게도 일어날 수가 있는 거죠. 꼭 하나님의 감동을 받지 않아도 인생의 허무함을 직시한다든지, 아니며는 비슷한 말이지마는 죽음 뒤에 자기도 알지 못하는 무안한 세가가 있다든지, 아니며는 임과응보의 법칙이 있어서 오늘 내가 잘못 행하는 데로 반드시 갚음이 있으리라 고 할때에, 두려움과 함께 마음이 상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는 거에요. 그때에 인간은 두가지 반응을 보이게 되는 거죠.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며 신앙으로 해결이 되든지, 아니며는 마음이 미끄러져서 그런 고통을 잊기 위해서 쾌락에 빠지거나, 방탕의 길을 가든지, 관심을 돌리는 하나의 방법이 되는 거죠. 그런 방법을 취하는 거에요. 그래서 성경은 상함 마음은 언약백성의 고유한 마음이라고 생각을 안해요. 언약백성이 아닌 사람도 가능해요. 언약백성의 고유한 마음이 뭐냐하면 그 상한 마음에서 한걸음더 진전하며는 통회하는 마음이 되는 거에요. 통회하는 마음은 깨어진 마음이 아니라 으깨어진 마음이에요. 그래서 로하끄다끄해 라 그래가지고 마치 뭐라고 말 할 수 있을 까요. 고기같은 것을 방방이로 두둘겨 패면 짖이겨 지는 것 있잖아요. 자신의 형체를 상실해서 그 형체를 잃어버린 그런 종류의 마음을 가리켜서 로하크다끄해 라고 이야기 하는 거에요. 그래서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받으심 직한 마음인 거에요. 두 개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거에요. 시인이 그런 상태가 된거에요. 근심이 충만 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처지를 긍휼이 여기고 위로할 자를 찾아 보았지만, 찾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냐며는 상한마음이긴 한데, 철저하게 하나님을 향하여 집중하고 그리고 하나님앞에 매달리는 시인의 마음을 보여주는 거죠. 예를 들자면 주님이 말씀하시잖아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심령이 가난하다는 거는 뭔가 도움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호소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마음이잖아요. 주님께 간절히 매달리러 가는 길에 잠시 눈에 띄는 놀이나 즐거움을 보고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었는 지를 잊어 버린다면, 그는 충분이 가난한 사람이 아니죠. 정말 가나나한 사람은 주님의 도움을 간절히 갈망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우리들이 과거를 보며는 그 당시에는 쓰라리고 아픈 경험이었는데, 놀랍게도 그것이 후일 생각하면 하나님의 큰 은혜를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통로가 되는 적이 있는 거에요. 그것이 무엇 때문이냐며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때문에 은혜 때문에 내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은혜를 주시고 그런 사랑을 가져다 주셨기 때문이죠. 그러니깐,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우리를 대적들에게 애워 싸이고 원수에게 훼방을 당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당신을 의지하게 하시기위해서 섬리속에서 하나님앞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이죠. 그래서 적당히 괴로움과 고난이 있는 것은 우리가 경건하게 살기만 하면 이 땅에 우리의 마음이 찰떡처럼 달라 붙지 못하게 만들어 주는 좋은 하나의 자극제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수시로 그렇게 마음에 원하지 않는 훼방과 도전 속에서 우리의 본향이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나그네, 하늘로 가는 나그네 일 뿐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