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강해Ⅲ
(2003-2004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3-2004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마음이 상하기까지 주님을 구함(시119:20) 2004.5.25 교직원예배 1
2. 성경 읽기와 은혜(시119:20) 2004.6.15 교직원예배 5
3. 큰 일을 위한 헌신(시126:2-5) 2003.7.14 교직원예배 8
4. 섬기며 인자함을 맛보는 것(시136:1) 2003.11.10 교직원예배 12
5. 정직하라(시140:13) 2003.4.21 교직원예배 16
6. 주의 법을 마음에 품은 사람(시37:31) 2003.11.4 교직원예배 22
7.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두고(시37:31) 2003.10.7 교직원예배 27
8. 열납하는 날에(시69:13) 2004.4.20 교직원예배 31
9. 경건한 불안(시77:2-3) 2003.9.1 교직원예배 34
10. 주를 아는 것 의지하는 것(시9:9-10) 2005.6.1 교직원예배 40
11. 감사하는 자에게 나타나는 선하신 하나님(시34:8) 2005.3.22 교직원예배 45
12. 말씀의 미각을 잃지 말자(시119:111) 2005.4.6 교직원예배 48
1. 마음이 상하기까지 주님을 구함
“주의 규례들을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시119:20)
신앙전기 같은 것들을 읽다가 보면 위로와 격려를 받을 때도 있지만 정말 낙심될 때도 많아요.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어쩜 그렇게 절망스러울 정도로 그렇게 견고할까? 거기에 비하면 흔들리는 내 삶은 너무나 부끄러울 정도로 연약한 것을 경험하게 되요. 그래서 사실 나는 모든 전기를 다 믿지는 안거든요. 항상 거기에는 누가 우리의 전기를 대신 써준다고 하더라도 거기엔 늘 그런 면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난 살아서 자신의 전기를 쓰는 사람들을 정신병적 증세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난 생각을 하거든요. 사실 그게 공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게 그런 거에 비하면 오히려 ‘로이드 존슨’ 목사님이 지혜로우셨지요. 십년을 기다려라. 그리고 써라. 근데 어쨌든 그렇게 견고한 거를 보면서 참 낙심 될 때가 있어요. 그리고 근데 이제 잘 살펴보면 말입니다.
요번에도 이제 책을 한권 읽으면서 그런 걸 많이 생각을 하게 되는 데 이렇게 우리들이 말로만 이렇게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참 견고하게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지요? 근데 사실 깊이 캐 들어가 보면 그 사람들이 얼마나 두렵고 떨면서 연약한 삶을 살았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요. 그러니까 요점은 이것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할 줄 몰라 하는 자기 떨림과 두려움, 그 연약함, 그 속에서 서 있는 그 사람이 바로 결과적으로 하나님 앞에 견고한 사람으로 나타난다. 라고 하는 것이 에요. 그래서 오늘 이 시인이보면 바로 그렇게 떨고 있는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내가 주의 율례를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항상 상하나이다.’ 그래서 상한다. 라고 하는 의미는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이렇게 아픔을 당한다. 라고 하는 그런 의미예요. 그게 무슨 뜻이냐면 우리가 기대하지 않는 것에 의해서는 사실은 상하지 않거든요. 예를 들자면 내가 큰 죄를 지어서, 혹은 내가 전쟁 중에 포로로 잡혀서 그래서 적군에게 학대를 받는다. 그것은 마음 상할 일이 없잖아요? 그 사람에 대해서 기대하는 바가 없어요.
그러나 사랑을 기대할 때 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기대하는데 자기를 차갑게 대할 때, 그리고 그 사람을 깊이 존경하는데 야비한 행동으로 자기에게 실망을 줄때, 또 내가 많이 사랑해주는데 그래서 나도 그 사람에게 사랑 받고 싶은데 그 사람이 나를 향해서 대하는 것이 너무 사랑 없을 때, 그때는 아주 작은말이나 아주 작을 행동을 가지고도 많이 마음이 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례로 인해서 마음이 상했다. 라고 하는 이야기는 이 사람의 영혼이 얼마나 하나님께 집중되어 있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에요. 이 세상에 태어나서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그 사람은 아주 연약하고 상처받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 말 한마디에 천국으로 오르기도 하고 그 사람의 행동 하나에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해요. 시편을 보면 바로 그러한 경험들을 하나님께 대해서 풍부히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등장해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이제는 은혜가 다했구나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은 버리셨구나. 그리고 내 손에 죄가 있으므로 하나님 나를 이제 영영히 잊으셨구나. 그렇게 생각하다가 어느 순간에 주님의 긍휼의 사인을 받고 그리고 “행악하는 무리들아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나의 울음소리를 들으셨도다.” 이런 고백이 나온다 이것입니다. 그게 신앙적 불안정에서 오는 기복이 아니라 그들이 얼마나 간절하고 열렬하게 하나님을 추구하면서 살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에요.
저는 최근에 한 한 두 달 동안에 하나님께서 마음에 많이 깨닫게 하시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면 우리가 하나님을 이렇게 자주 찾아야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걸 사실 ‘존 오웬’ 은 ‘스피리춸 마인디드네스’ 라고 하는 제목의 책에서, 엄청나게 두껍습니다. 거기서 그걸 상세하게 파 해쳤습니다. 근데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 이니라 이렇게 새벽에 기도 할 때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다음에 밤에 기도할 때 하나님 을 생각하고 하는 것으로서는 우리들이 정말 주님 중심의 삶을 살 수 있겠는가? 그게 불가능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신학적으로는 동의 할 수 없지만 그러나 많은 영적인 인물들이 매 순간 하나님과 합일된 삶을 살려고 했던 그런 처절한 노력들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말을 많이 하지 말고 오히려 마음속으로 주님을 많이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되요. 말이 많다. 라고 하는 이야기는 마음에 생각들이 많이 분주하게 스쳐 지나간다. 라고 하는 이야기에요. 꼭 필요한 이야기는 하지요. 그리고 또 우리가 함께 신앙생활하면서 건네는 아름다운 대화, 격려의 말,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고 풀어주는 고품격의 조크, 이런 것들은 정말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누리면서 살아야 되는 것들이 에요. 근데 거의 쓸모없는 말 이런 것 들이 배설이 되듯이 우리의 입속에서 계속 쏟아져 나올 때 마음이 말이 마음을 움직여서 마음을 굉장히 분주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는 하나님 만나기 힘들어요. 그래서 고요히 하나님을 응시하는데 그래서 매 순간 길거리를 걸으면서도 하나님! 내가 주님의 손에 붙들리고 싶습니다. 심방을 가기위해서 차를 타고 거리를 지나가면서도 가슴에 손을 대고 하나님! 제 마음을 다스려주십시오. 유혹 받을 때 하나님! 이 죄의 즐거움보다는 이 죄로 말미암아 도래하게 될 그 죄와 그 죄의 비참함을 깨닫게 해주십시오. 그러면서 끊임없이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루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드리는 그 기도의 시간이 무기력해지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꽉 차게 되는 것입니다. 청교도들이나 경건한 믿음의 사람들이 활용했던 묵상이라는 기법 그 자체가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저절로 신령한 생각들이 쏟아져 나오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니라 하나님 생각하기에요. 하나님 생각하기, 그 하나님을 쭉 생각하는 거! 그 생각을 안 하면 멀어져요.
엊그제도 잠깐 기도하면서 그런 생각했는데 의식적으로 가족을 생각해야 해요. 의식적으로! 그렇지 않으면 함께 살면서도 점점 멀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가족들을 너무나 많이 사랑해서 그 사랑을 주체 할 수 없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데 방해가 될 정도라면 모르지만은 그러면 멀어져요. 그건 마찬가집니다. 여러분 어린아이를 낳아서 엄마가 젖을 먹이고 이렇게 길러놓고 직장엘 가게 되잖아요. 직장생활 하게 되면 그럼 누구도 그 아이를 달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울고 이 마음에 엄마에 대한 공허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직장생활 한 육 칠 개월 만 해봐! 그러면 자기 도와주는 할머니를 더 좋아해요. 불편해하고 그게 우리 모두의 공통적인 생각이 에요. 그래 생각해야 되요. 그래서 사랑이 가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는 데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는 대상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가족들에 대해서, 사랑하는 지체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 무엇보다 더 우리의 그 모든 사랑의 궁극적인 원인이고 대상이신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는 거. 나는 그 묵상을 설교 하면서도 여러분들에게 이야기 했지만 만약 하루에 이십 번 정도씩 하루에 이십 번 정도씩 여러분들이 가슴에 손을 얹고 한 십오 초 씩 만이라도 간절히 마음을 쏟으며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제가 주님의 것이 되고 싶습니다. 주님이 아닌 것들에 대한 사랑과 집착들을 오늘 이 낮에도 내 마음에서 덜어내 주십시오. 사랑하는 지체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다가도 어느 한순간에 그 대화의 자리에서 빠져 나와서 가슴에 손을 얹고 하늘을 우러르며 주님! 제 마음과 저의 온 영혼이 주님의 것이 되고 싶습니다. 세상의 유혹 속에서도 주님의 순결한 신부로 남고 싶습니다. 하루에 이십분 정도씩 여러분이 그렇게 기도한다면 영적 생활에 있어서 놀라운 진보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건 제 체험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그리고 있는 참된 신자! 그리고 주님을 너무나 사랑하고 그리고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날 동안에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 하는 그 온전케 되어가는 신자의 참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느 날 열정적으로 헌신해서 삶의 위대한 족적을 남기는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을 그렇게 많이 사랑하지 않은 사람들도 많아요. 그게 아니라 정말 온전한 신자의 표는 그렇게 전심으로 주님을 구하는 것.
박 윤선 목사님이 마지막에 간암에 걸리셔서 침대에서 눕지도 못하고 앉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허리를 구부리고 신음소리를 내니까 그 사모님이, 그 사모님이 재혼 하셨거든요. 원래 간호원 출신인데 다들 하는 이야기가 그 박 목사님은 그 두 번째 사모님을 못 만났더라면 한 십년쯤 일찍 돌아가셨을 거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그 목사님을 상처하신 후에 섬기셨어요. 어쨌든 총신의 학장으로 계실 때 매일 점심시간마다 점심을 해서 날라다가 학장실에다가 상을 차려드렸다고 하니까 참 대단하지요. 근데 그 목사님의 사모님이 ‘여보 그렇게 아파서 어떻게’ 그러면서 그렇게 안쓰러워 하니까 목사님이 얼굴을 찡그리시면서 “ ‘여보 이게 다 성경적인데 뭘 그렇게 마음을 애달파해? 죄 많은 이 세상에 질병과 고통이 있는 것이 성경적이 아니겠어?” 그러니까 완전히 소화한 것입니다. 가까운 지인들이 그 목사님하고 차를 타고 가면 하여튼 차 안에서 좌불안석 일 정도로 뒷좌석에 앉으셔서 “하나님 이 나라를 보살펴 주십시오. 제 마음을 붙들어주십시오. 이 학교를 도와주십시오. 아버지!” 출발지서부터 목적지까지. 이런 어떤 그 거룩한 생활의 목표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마음이 하나님 앞에 대체적으로 주님을 향하고 있는 것만으로는 그렇게 만족스런 성화의 진전을 이룰 수가 없어요. 날마다 마음이 깨뜨려지고 주님께 구하세요. 더 순전하고 더 순결해져서 이 땅에 있는 것들 중에서는 티끌만한 것도 우리의 마음을 티끌만큼도 빼앗을 수 없고 그리고 이 죄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께 사랑받고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나를 불러 주신 그 은혜의 계획을 따라서 사는 것 이외에는 어떤 희망도 없어요. 그리고 전심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안식을 사모해야 해요. ‘윌리엄 로어’는 영국의 국교도였고 ‘클리마 쿠스’ 라고 하는 사람은 신비주의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의 뛰어난 영성과 삶을 보면 공통점이 있어요. 그거는 ‘칼빈’에 의해서도 발견 됩니다. 아주 뚜렷하게 발견 됐어요. 제가 강요를 읽으면서 그 깊이 감동을 받았던 그 성화에 있어서 감동을 받았던 부분이 바로 그거였습니다. 그게 뭐냐면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과 함께 죽음에 대한 현재적 경험 속에서 살았어요. 그래서 삶의 빛으로 죽음을 본 게 아니라 죽음의 빛으로 삶을 봤어요. 그래서 잠시 머무는 이세상이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 가 그리고 허망한 것인가 그리고 나니까 주님이 보이는 것입니다.(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하 생략!) 우리들이 이렇게 질병에 걸리면 모든 일을 전폐하고 병원에 가서 드러누워서 배를 가르고 수술을 해야 되는 것도 건강을 지키는 비결이지만 매일 매일 건강을 헤치 는 요인을 멀리 하고 살아가는 거 그게 건강의 비결입니다. 그래서 몇 달에 한번 가슴이 끊어질 정도로 떼굴떼굴 구르며 통회 자복하는 일 필요해요. 새벽에 기도회에 나가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 하면서 이 목 줄기에 땀방울이 맺히는 그런 기도도 필요해요. 그러나 매 순간 가슴에 손을 얹고 그리고 주님을 찾는 것, 그래서 매 순간 하나님에 대한 은혜의 감각, 신령한 하나님의 만져주심에 대한 감각이 사라지는 것 그렇게 되지 않도록 이 시인이 경험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율례로 인하여 마음이 상했던 것처럼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을 통해 다가오는 그 사랑의 감각의 상실 때문에 마음이 상하고 그 아침에 충만하게 하루를 시작했는데 이 마음의 굳어짐과 여려짐, 이 변화가 하루 동안에 얼마나 파도치는지 여러분 아십니까? 오전에는 물 같이 녹았던 마음이 점심때가 되어서 딱딱하게 굳어지고 아무런 느낌이 없는 마음이 되고 그러다 저녁때는 건조한 스펀지 같은 마음이 되고, 밤에는 모래와 같은 마음이 되고, 자기 전에 회개할 때 다시 촉촉한 마음이 되고 ,그래서 그 하나님을 우리의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그게 뭐냐면 그분을 인해서 마음이 상하는 것, 항상 죄 많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다 필요 없고 그리고 하나님 온전히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성경 읽기와 은혜
“주의 규례들을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 (시119:20)
‘존 오웬’ 이 자신의 방대한 ‘성경 신학’ 이라는 책에서 마지막 내린 결론이 며칠 동안 제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맴돕니다. 그게 뭐냐면 참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하기위해서는 인간의 지식과, 성경을 연구하는 것과, 모든 것들이 다 필요하고 그리고 이 사회에 대한 지식과, 그 다음에 얼마나 많은 철학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허무한 결론에 도달했는지 이 모든 것을 아는 것이 사실은 성경진리를 아는데 꼭 필요하다 이런 이야기지요. 그렇지만 마지막에 딱 한 가지가 없으면 그러면 그가 무엇을 공부하고 심지어는 성경을 아무리 연구한다고 하더라도 그 연구를 통해서 참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성경읽기에요. 성경읽기. 성경을 읽으면서 거기에서 생생하게 자신의 지성을 굴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 성경 읽기 속에서 자신의 변덕스런 감정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의 감정, 말로 다할 수없는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운 은혜로운 사랑의 감정, 정서, 같은 것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원대한 창조의 계획과 구속의 목적, 그것을 향해 진행하는 하나님의 그 위대한 의지 앞에 내가 하고 싶은 이 의지라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을 깨닫는 그것 없이는 아무리 성경을 많이 공부하고 세상의 학문을 배워도 참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대가가 마지막에 진짜 흐느끼듯이 우리에게 강조하는 것이 있는데 결국은 성경을 꾸준히 읽으면서 그 성경 속에서 주님을 만나야 된다 이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신학 연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하는 공부의 가장 기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위에 성경 원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 그 위에 가슴을 쪼개듯이 쏟아 붓는 그 말할 수 없는 폭포수와 같은 기도, 이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에요. 그러면서 그가 말하기를 자신이 이렇게 오랫동안 신학을 공부하면서 철학과 이 세상의 학문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하고 성경의 원어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지만 그렇게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깨달은 그 지식이 많은 학문적인 연구를 통해서 도달한 지식을 훨씬 능가하는 평범한 성도들을 많이 만났다고 이야기해요. 그래서 이 성경읽기와 그다음에 진실하게 마음을 깨뜨리며 드리는 이 기도는 고래로부터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두 날개였습니다. 근데 이 날개가 거의 없이 신앙생활들을 해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겠습니다. 날수 없으니까 다리만 굵어지는 것입니다. 열심히 모이를 쪼아 먹으니까 다리통이 통통해지고 걸어 다니기에 아주 적합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참새 같은 거 보셨지요? 참새가 이렇게 걸어가잖아요. 톡톡톡톡 한 일 킬로쯤 걸어가는 거 보셨어요? 차라리 참새는 날아가는 게 훨씬 편해요. 불과 몇 미터 걷지 않아요. 원래 성도가 그랬었거든요. 원래 성도가! 근데 이젠 그 두 달개가 다 퇴화하고 마치 갓 태어난 병아리처럼 양쪽 어깨 죽지 에 조그맣게 달라 붙어있으니까 하긴 해! 근데 이게 자기를 공중에 띄울 정도로 그렇게 충분하진 않아요. 다리통만 굵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냥 세상에서 먹어대니까 그러니까 가슴이 튀어나오고 근육이 발달되고 해서 점점 날개로는 감당할 수 없는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결국 하늘을 날아오를 수 없는 그런 닭 같은 존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찬양)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듯이~ (이하생략!) 독수리는 아주 큰 새지요. 오직했으면 그게 날아와서 닭 같은 것을 채 가지고 가고 아무도 본 사람 은 없지만은 시골에서 어린아이 작은 갓난쟁이들이 밖에서 멍석 같은 것을 깔고 놀고 하면 독수리 날아오면 엄마가 채 가지고 안으로 들어가잖아요. 들리는 이야기는 애도 채 갔다 하는 그런 이야기 시골에서 많이 들었거든요. 얼마나 몸집이 커요. 근데 하늘 높이 치솟잖아요. 왜! 큰놈은 날개 길이가 이 미터가 넘어요. 그러니까 그 육중한 몸매를 하늘 높이 띄우는 것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도 신앙의 원리는 변하는 게 없어요. 기도에 대해서 많이 가르쳐도 기도한건 아닙니다. 성경에 관해서 많이 공부해도 그 공부가 영혼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이 성령으로 사모하는 자의 마음에 스며들 때 그때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인터넷쉽’ 을 하는데 누가 저한테 마지막 날 그런 질문을 해요. 집회도 많이 다니시고 해외여행도 많이 다니시는 데 기도하고 이런 게 불규칙해 지면 힘들지 않냐? 솔직히 그랬어요. 힘들다. 그래서 할 수 있으면 가지 말아야지요. 안가는 게 좋고요. 근데 이제 오래 그렇게 여행을 하면서 나름대로 터득한 게 있어요. 요번에 시찰 회 에서 수련회를 하면서도 그런 걸 터득을 했는데 그게 뭐냐면 오래도록 엎드려서 기도 할 수가 없잖아요. 스케줄이 짜져있으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하냐면 성경은 잠깐 동안 읽을 수 가 있잖아요. 그때 은혜를 주시고 그 말씀이 마음에 깊이 스며들도록 그렇게 간구해야하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장시간 오래 엎드려서 기도하지 못하니까 수시로 깊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마음속에 쭉 기경이 되요. 그리고 이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밀려들어옵니다. 하나님은 기도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도 기뻐하시지만 더 좋아 하시는 것은 살아서 숨 쉬는 날 동안 언제나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되는 거, 근데 전자 없이는 사실은 후자가 어렵지요. 그걸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를 선교지에 보내놓고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스케줄이 꽉 짜있는 걸아시고 날짜선을 넘어 들어서 온몸이 곤죽이 되어있는 걸 아시는 하나님이 너 왜 여기 와서도 하루에 네 시간씩 기도 안 하냐 그렇게 하시지 않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더 필요하다 구요. (
찬양) 약할 때 강함 주시고~ 약할 때 강함 주시고 나의 빈 잔을 채우시는 하나님을 우러러 볼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귀한 은혜를 채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을 읽어야 해요. 근데 ‘멕체인’ 성경읽기나 성경읽기표가 가지고 있는 문제가 있어요. 그게 뭐냐면 작대기 네게 긋고는 의무를 완성했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작대기 네 개 그었어도 자신의 영혼에 아무 유익이 없을 수 있어요. 그래서 말씀을 그건 그거대로 의무를 완성하지만 동시에 성경을 읽으면서, 다만 다섯 절 이라도 읽으면서 성경의 말씀이 자기의 영혼을 쭉 적시고 성경을 읽은 다음에 엎드려서 기도 할 때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오늘 읽은 그 말씀 때문에 내 마음을 움직이시고 내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흐르게 하는 그런 감화가 필요해요. 인간의 연약함과 악함이 얼마나 큰지 몰라요. 그 말씀 묵상도 말입니다. 매일 한 장씩 이렇게 읽어가도 가슴에 깊이 스며들지 않으면 그것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오웬’ 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야말로 신학 연구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습득하는 데의 최고의 장애물이다. 어떤 식으로든지 우리 신학연구에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변화되지 않으려고 하는 작용을 한다. 이게 에요. 우리 안에 있는 죄가! 그걸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오늘도 성경을 읽었고 의무를 완수했는데 가슴에 아무것도 부딪히는 것이 없었습니다. 내안에 오늘아침 죄가 융성하고 있습니다. 당연 하잖아요. 당연한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뭐가 필요해요. 참회가 필요하지요. 그리고 내일 성경을 다시 읽겠지만 오늘 내가 성경을 읽을 때 그 말씀이 내 마음에 깊이 스며들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해야 됩니다. 그래서 난 여러분들에게 권하고 싶어요. 교회를 좀 일찍 옵니다. 그렇게 이 분전에 저기서 하이힐 소리를 내면서 탁탁탁탁 그리고 무슨 일 을 하겠습니다. 기도 안할 사람도 집에서 이미 기도를 충분히 한 사람도 한 아홉시 출근이면 여덟시 삼십분쯤 옵니다. 와서 사무실에 앉아서 혹은 ‘벤치’ 에 앉아서 혹은 교회당 한 구석에 창문을 열고 앉아서 성경을 펼치고 한 이십분만 이라도 시편 한두 편이라도 성경읽기 말고 꼼꼼히 읽으면서 주님! 은혜를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고 그 말씀에 의해서 마음이 하늘 이슬로 잘 젖은 상태에서 한 십분 전쯤 올라와서 기도하고 그담에 불을 켜고 창문을 열고 찬양이라도 한곡 들으면서 그러면서 오늘도 나를 쓰셔서 당신의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진정한 평안과 기쁨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그렇게 하면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3. 큰 일을 위한 헌신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시126:2-5)
우리가 흔히 기적이다 신화다 그리고 인간승리다 이런 말로 어떤 사람들의 성공을 칭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근데 실제 우리 삶을 이렇게 들여다보며 실제 성공하는 사람은 수만 명 가운데 한두 명이고 나머지는 다 박수치는 사람입니다 이런 일들이 신앙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아침에도 새벽기도 끝나고 나오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누가 이 신앙의 세계를 쉽다고 말했는가. 그래서 대충 신앙인의 이름을 갖기에는 참 쉽습니다 그러나 정말 모든사람이 그사람의 신앙이 아름답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인식되기까지에는 신앙이 누구도 쉽다고 말할 수 없고 아주 굉장히 어렵고 커다란 세계를 지나야하는 것이죠. 길거리 같은데 가보면 시골에 가보면 복숭아 같은 것들이 그냥자랍니다 돌복숭아이고 어떻게 하다보니까 복숭아씨가 날아와서 몇 년 전에 그게 어떻게 우연히 터져서 나무가 되어서 자라다가 그냥 지가 아무러케나 열매를 맺은 겁니다. 전혀 못 먹습니다. 그렇게 농사짓는 것이 쉽다고 그러면 농사 안 짓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내버려둡니다. 곡식이 맺힙니다. 제가 가끔 드나들던 기도원에 사과밭이 있는데 사과밭과수원을 하다가 내팽개치고 주인이 가버렸어요 거기서 사과가엽니다 여는데 주인이 팽개치고 갔는데 사과가 여니까 그다음에 와서 따기만하면 되잖아요. 먹을 수가 없어요. 그 주인이 돌보면서 키운 사과밭과 팽개치고 가서 맺히는 이듬에 사과사이에는 현격한 격차가 있고 도저히 상품으로는 가치 가없는 사과가 맺힙니다. 사과가 그렇게 맺히면 새들도 와서 안 먹어요. 새들도 맛있는 거 먹지 아무거나 길가에 있는 그런 돌사과, 돌복숭아 안 먹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을 포장을 하고 비료를 주고 소독을 하고 벌레를 잡으면서 그렇게 길러주면 그러면 아주 놀랍게 사과가 되고 복숭아가 됩니다. 이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을 들여 야해요 공을, 자신의 영혼에 마치 어디 버릴 물건을 싸다가 구석에 내동댕이 쳐둔 것처럼 그렇게 살아서는 결코 좋은날을 볼 수가 없어요. 공을 들여 야해요 그리고 일만 한다고 막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이 되느냐 일이 안되죠. 하늘로부터 오는 자원이 거의 없는데 일이 되겠느냐고 겉으로 볼 때는 단정하게 직원으로 근무하고 겉으로는 볼 때는 열심히 심방도 하고 전도도 나가고 그러는데 문제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쏟아나리라” 그런 원리 자기 속에서 그것이 쏟아나서 흘러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는 그래야 된다는 겁니다. 나는 어저께 저녁때 오후예배시간에 자매가 간증한 것을 보면서 참 은혜를 받았어요. 그러고 내가 생각한 것이 뭐냐 하면 나도 저런 삶을 살고 성도들도 저런 삶을 사는 것이 사실 어떻게 보면 성화에 있어서 섬김의 마지막지점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가져요 저런 마음을 가지고 저 자매처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해서 시골에 내려가서 복음을 전하지 못해도 저렇게 영혼을 향해 울먹이는 마음을 가지고 직장생활하고 그 마음을 가지고 가정생활하고 가정의 영혼을 돌보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본분이고 그런 성도들을 만들라고 우리들을 일군으로 불러주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참 많이 감동을 받았어요. 그것이 문제다 그렇게 공을 들이면서 살아야지만 그런 삶도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그래서 먼저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성화의 삶에 공을 들이는 삶을 살아 야해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목마름을 갖기가 이 세속적인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보다 더 어려워요 왜냐하면 자기 손으로 자기발로 자기마음속에서 하는 모든 일들이 당장 하나님과 가까이 있다는 표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은혜 받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 어떤 갈급함을 못 갖는 경우가 참 많단 말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해야합니다 다지나간 우스운 이야기지만 옛날에 제가 떡 장사를 했다는 이야기를 했잖아요.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쌀을 잔뜩 자전거에 실고 방앗간으로 가요 아참 젊은 나이이니까 밤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서 그렇게 자전거를 몰고, 몇 키로나 될까? 오륙 키로 데려나, 칠팔 키로가 되려나, 꽤 멀어요. 그렇게 갔을 때 얼마나 허기가 지겠습니다. 밥을 먹을 시간이 없어요. 가자마자 쌀을 빻고 거기서 또, 온 사람들이 많으니까 조금이나 먼저가야지만 기계를 사용하니까 여기저기서 앞을 볼 수 없는 김으로 가득차고 그리고 숨돌릴만하면 금방 떡이 쏟아져 나오니까 그것을 정리하고 그렇게 하다보면 10시 가까이 되요 얼마나 배가 고프겠습니다. 그렇게 힘이 드는데 그런데 죽어도 밥을 먹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떡냄새가 들어가 가지고 말입니다. 배고프다는 마음이 살라져요 그래서 요즘 다이어트 아로마향, 아로마향 그러는데 밥냄새 맛는 게 제일 다이어트 아로마야 딴 것이 필요 없어요. 비싸게 아로마를 살 필요없이 밥을 해가지고 냄새가 나가해서 계속 코에다 되고 있으면 밥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 집니다. 그러고 나고 나서 그것을 실고 배달하는 곳으로 가면 벌써 12시에요 그러면 얼마나 배가 고플까요? 배가 안 고파요 언제 배가 고프냐하면 다 정리하고 떡이 하나도 없고 냄새가 하나도 안날 때 그때 시장기가 시작 되요 그러면 자장면하나 굴다리 밑에서 사먹고 빈통 메고 오는 겁니다.
이런 삶을 사는 겁니다. 난 똑같다고 생각해요 생각해봐요 여기는 늘 은혜의 향기가 있어요. 여기에 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그래요 누가 은혜 받았다고 그러고 누가 변화 받았다고 그러고 그다음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다. 그러고 마음에 없지만 찬송도 하고 그러니까 자기가 은혜 받은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겁니다. 그것은 은혜 냄새에요 다른 사람이 받은 거지 자기가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은혜의 냄새지 그러니까 뭐냐 하며 하나님의 향한 갈급한 이런 것이 없는 겁니다. 여러분 그런 것 못밨어요. 나는 옛날에 직장다닐 때 억지로 이끌려서 술집 같은데 가고 그래요 그러면 가서 앉아있으면 그렇게 곤고할 수 없어요. 내가 이러고 직장을 다녀야하나 나중에는 생각을 바꾸어서 그러면 안 되겠다고 생각을 하고 피치 못하게 갈 때는 농담도 하고 우스갯소리도 하면서 자중을 이렇게 하기도 했지만은 정말 성숙하지 못했을 때는 막 괴로운 거야 영이 다른 곳에 왔다는 겁니다. 술 먹고 노래하는 영이 예배하고 찬송하는 영이 어떻게 같겠습니다. 그렇게 곤고한데 환경이 이러니까 늘 은혜의 냄새가 나는 거야 자기 자신이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해요
근데 그것은 전혀 다른 겁니다. 그렇죠. 공을 들여 야해요 그래서 내가 하나님 앞에 좋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살아야 되는가. 자기하고 있는 일들이 언제나 기도의 제목이 되고 기도하는 것처럼 근무하고 근무하는 것처럼 기도하고 이것이 늘 연장선상에 있고 일을 하면서 당하는 어려움들을 십자가화 할 수 있는 은혜의 세계를 가져야 해요 물로 나는 여러분들을 끊임없이 문제를 해결하고 합리화해서 좋은 환경 속에서 사역하기를 원해요 그렇지만 누구지만 그렇게 해줄 수 없는 부분들이 있어요. 그런 것들을 십자 가화하는 방법들을 배우면서 그러면서 은혜의 지배아래 계속 살도록 노력해야하는 것이요. 개인적인 신앙의 인격의 성화에서 뿐만 아니라 또 하나는 우리의 섬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상반기를 지났습니다. 우리들이 눈물을 뿌리면서 애쓴 때도 있었고 게으른 때도 있었고 또 열매를 많이 맺은 때도 있었고 적게 맺은 때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사역을 보면서 우리의사역이 하나님의 큰일을 이루었을 때 여호와께서 대사를 행하셨도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야 사람이 참 대단하다 그러나 그 사람 뒤에는 큰일을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그 일들은 많은 사람들이 단지 차가운 인간의 노력으로만 일구어놓은 업적과는 비교될 수 없는 그런 신령한 빛들이 그 사역 속에 깃들여있어요 이것이 비밀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뭐냐 하며 한 번 더 깊이 들여다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큰일을 행하실 때는 하나님이 혼자 행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반드시 사용하신 재료가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며 눈물을 뿌리는 수고에요 눈물을 흘리는 고생, 눈물을 흘리는 아픔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서 그래서 하나님이 그것들을 사용하셔요. 우리들이 평범하게 생각할 수 없었던 큰일들을 하나님께서 행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우리의 헌신을 이렇게 비유합니다. 갈멜산에서 엘리아선지가가 쌓아놓은 장작과 같다 가장자리를 두루 파고 물을 붙고 거기에 장작을 올려놓았는데 그렇게 놓고 엘리아는 자기의 능력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했죠. 거기에 장작이 있으니까 하나님이 거기에다 불을 내리셨죠. 장작을 여기에, 갈멜산 쌓아두었는데 하나님이 다른 산에 불을 던지신 것이 아니었고 같은 산이라도 장작이 쌓인 곳에 불을 내리셨지 다른 곳에 불을 내린 것이 아니잖아요. 솔로몬이 낙성식에서 엎드려져서 간절히 기도할 때에 그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교회에 가득히 했잖아요. 이렇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헌신이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불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근데 하나님께서는 헌신을 양으로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질로 많이 판단하셔요. 그래서 무슨 일이냐 하면 대체로 주님을 위해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 많은 양의 헌신보다는 오히려 전적으로 주님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들에 작은 헌신을 통해서 양적으로 작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사용해서 역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중국에 가보면 참신기합니다 그 사람들이 신약공부도 안 한사람입니다 그중에는 대학을 나오고 요번에도가보니까 북경 대를 다니고 있는 엘리트로 있더라고요 중국만 해도 북경 대는 아무나 못 들어갑니다. 탁월합니다. 그런 사람도 있는가하면 진짜 무지랭이같은 에비시하나 모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은혜를 받고 목회자가 되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거기 자꾸 자기 집에 모이니까 전도하면 더 가르쳐 달라고 모이니까 이렇게 해가지고 오륙십 명이 모이면 교회가 됩니다. 더 모이겠죠. 더 할 수가 없어요. 더 모일 장소가 없으니까 그렇게 해서 오륙십 명이 모여서 아파트나 동네 가장자리에 허름한 집하나 얻어서 살 면시 살며시 주민들 눈에 안 띄게 모이는 겁니다. 근데 우리가 이렇게 볼 때에는 새가 족반 수준이야 근데 어떻게 목회를 하느냐고 그래도 된 다말입니다. 그게 어떻게 되느냐 하면 물로 풍성하고 기름진 사역, 말씀과 지식들을 체계적으로 깊이 세우는 사역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뭐냐 하며 그렇게 만나서 영혼들을 돌보면 회심이 있어요. 회심을 위해서는 장엄하는 신학의체계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복음의 작은 진리하나를 가지고도 하나님이 그를 회심시킬 수 있잖아요 그런 역사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그 사람들은 자기를 바치는 헌신에 있어서 그리고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곳에서 그 여건을 탓하지 않고 자신의 신명을 바쳐서 일하는데 있어서 절대적으로 헌신된 사람들입니다. 언제든지 잡혀갈 각오가 되어있어요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 요번에 만난 지도자 한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우리를 순진하기 때문에 들여다보고 막 그 사람들 돈 주고 싶어 하고 그러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우선 그 사람들의 자존감문제도 있고 또 하나는 그 중국자매가 아마 사십, 마흔이 되어 보이던가. 그 정도 되어 보이는데 이제 그런 이야기를 저에게 해요 뭐냐 하며 중국교회도 이렇게 보면 이렇게 어렵게 목회를 할 때에는 자기를 다 쏟아 부으면서 그 많은 눈물을 가지고 영혼들을 돌본다는 겁니다. 독일이나, 미국 같은 데서 그리스도인들이 와서 보고 너무 감탄을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본국에서는 그런 사역자를 볼 수가 없는데 너무 훌륭하다는 겁니다. 뭐가 필요하냐. 그러니까 그 순수한 마음으로, 중국은 들어오는 선교비가 장난이 아닙니다. 몇 십만불 들어온답니다. 그것을 주는 사람의 마음은 순수하잖아요. 그것을 받아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사람의 마음도 순수하잖아요. 그런데 순수한 두마음이 만나서 부패한 마음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몇 십 만 불의 선교비가 들어오면서 그러면서 돈으로 일을 해나가기 시작하면서 그 돈이 풀어지면서 그 공동체 내에서 사역하던 많은 사람들이 이상하게 영성이 옛날같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것이 처음에 있어서 아름다운 목회의 정신들은 잃어버리고 정말 쓸모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리는 마는 사역자를 주위에서 많이 본다고 예기를 해요 그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을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것이 그러한 여건이냐 그게 아닙니다. 이 여건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다만 그것들을 통해서 그런 사실들이 들어났을 뿐이지 여건이 아닙니다. 그러면 뭐냐 그 모든 것은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나는 정말이지 존경스러운 몇몇 목사님들은 물질적으로 참 여유로운 가운데 사셨어요. 그래도 순결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정말 가난하고 어렵게 살았는데 불결한 목회자를 많이 만났어요. 그러니까 그것은 유무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계속 쏟아 붓던 이것들을 물질로 그것을 해결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쏟아 부을 여지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이 이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맡은 영혼들이 진심으로 회심하는데 그것이 돈으로 해결됩니까? 돈으로 해결 되냐고 오죽했으면 내가 김기언 집사보고 회심탕있냐고 물어봤는데 약을 먹어서 회심할 것 같으면 돈을 주어 약을 사주지 그렇게 해결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왠지 내가 맡고 있는 사역에 생기가 살아져가 버릴 때 거기다가 돈을 투입한다고 문제가 해결됩니까? 아닙니다. 부분적으로 그 주의에 여건들은 개선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마지막을 우리 사역하는 사람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해결해야 되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으로도 해결 되지 않아요. 영혼이 살아있으면 무엇으로 해결될 수 없는 그것을 향한 십자가는 부요할 때 나 가난할 때나 동역자가 많은 때나 적을 때나 이교회조직이 합리화되었을 때나 비합리적일 때나 언제나 자기 속에 살아있는 겁니다. 그것을 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누구도 대신질 수 없는 십자가야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고 그것은 매일 하나님 앞에 자기가 눈물을 흘리고 피를 흘려야 될 싸움이고 그것을 넘지 않고는 하나님께서는 대사를 행하시지 않는다. 그래서 눈물이 필요한 겁니다. 그래서 씨를 뿌리러 나갈 때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그 일이 여전히 필요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 세계를 우리들이 가지면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큰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정말큰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우리는 하나님께 더 많이 사랑을 받을 것이고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 더 귀한 일들로 부르심을 받아서 더 보람 있게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같이 기도하겠습니다.
4. 섬기며 인자함을 맛보는 것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으리로다(시37:31)
여기서 시인이 고백을 하고 있는 바는 하나님은 선하시며 그 이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36편에서 후렴구처럼 반복되는 이 노래는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체험 속 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사실 은 저는 예수님을 믿고도 정말 긴 세월동안 이 단순한 구절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살아 왔습니다. 신앙의 경험도 있고 또 여러 가지 은혜도 체험했지만 이 구절의 의미를 모르는 채 긴 세월을 살아 왔습니다. 여기서 보이는 선하심 과 인자하심은 성경 속 에서 짝을 이루면서 많이 나옵니다. 대부분의 성경 구절에서 반드시 선하심이 앞에 나오지 인자하심이 먼저 나오지 않습니다. 시편 23편에서도 그의 선하심 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그렇게 고백되어 있는 것을 보아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그 선과 인자하심이 항상 따라 다니고 이 130편에서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그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경험하고 한없는 감격 속에서 노래하고 있잖아요?
실제로 우리들 가운데 그런 하나님의 선하심 과 인자하심 의 감격 속 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소 수 인지 모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기 안에 일어나는 그 격렬한 죄 와의 싸움을 위해서 분투하면서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감격 때문 이였고 또 사방으로 우겨 쌈 을 당하는 섬김의 현장 속에서도 낙담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도 이런 바로 감격이 뼈 사이에서 흘러 나왔기 때문입니다. 실로 이러한 하나님의 선하심 과 인자하심에 대한 확신, 그리고 거기 에서 비롯되는 주관적인 경험의 풍성함, 이것이야 말로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고난 과 시련을 이기며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근데 왜 그렇게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런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한 주관적이고 경험적인 감격을 소유하며 살아갈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화의 교리를 터득하고 있는 여러분들은 아마 간단하게 죄 때문 일 꺼라 이렇게 설명할 것입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마는 본문 속 에 그 해답이 담겨 져 있습니다. 선하심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라고요. 하나님의 이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강물처럼 도도히 역사 속을 흐르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 속에 흘러갑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두루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을 적셔서 꽃피고 새가 노래하는 아름다운 생태계를 만들어 갑니다.
그런데 그런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주관적으로 경험적으로 풍부하게 누리며 살고 있지 못하는 그 이유는 바로 무엇 때문이냐 하면 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하나의 짝을 이루는데 항상 하나님의 선하심 과 인자하심이 그렇게 짝을 이룬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이 선하심이 자기중심적인 선하심이 되기를 바라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면서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보려고 하기 때문에 언제나 우리의 이 선과 인자함에 대한 경험이 박약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즈음 천지창조의 목적이라는 시리즈를 듣고 있는 여러분 들은 이미 이 선이 무엇을 이야기 하는지에 대해서 풍부한 이해를 갖게 되셨을 지를 믿습니다. 마는 이 선은 그 관점 자체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의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계획이 기준이 되어서 거기에 부합한 상태가 바로 선 한 상태이고 이것은 가깝게는 각 사람들을 향한 섭리 속에서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계획 이지만 멀리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이 세상에 만들어 놓으셨을 때 가지고 계신 그 계획이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마음속에 설계도를 가지고 하늘의 별과 땅에 온 육축과 생물들을 지으셨을 때 하나님이 보실 때 좋았더라고 그렇게 말씀 하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계획을 지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멀게는 그렇게 창조 에 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가깝게는 여러분들을 주관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계획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은 구속의 계획과 일치하고 그 구속의 계획은 매일 매일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 의 계획과 일치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추호도 오차가 없이 이해와 의지를 가지고 우리의 인생을 창조 된 사람을 구속을 통해서 구속된 사람을 섭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원래 우리를 창조 신 목적 에 부합하도록 그렇게 살아가게 하 시는 것입니다. 가깝게는 여러분들을 하나님이 지난 한 해 동안도 하나님 의 교회에 일꾼으로 세우셨습니다. 그 계획은 정확하게 여러분들 이 그리스도 예수 안 에서 구속 받을 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쓰시고자하시는 계획 과 연결 선상에 있고 또 그 하나님의 계획은 여러분들을 이 세상에 창조하신 것과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그래서 한 해 동안도 하나님께 세움을 받아서 우리의 생명을 거두지 않으시고 또 우리가 하나님께 섬 길 이 직분들을 걷어가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여기에 세우셔서 한 해 동안 도 주님 섬기게 하셨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아마 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의 인자하심만 많이 맛보면서 살아온 일 년은 아니었을 것 입니다. 혹은 하나님 앞에 은밀한 자신의 죄로 인해서 곤고해지기도 하고 혹은 눈물을 흘려도 고쳐지지 않는 자기 안에 있는 죄 된 본성 때문에 영혼이 곤고해 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혹은 매일 매일 순종하며 부지런히 살아가는 육체의 근면함속에서도 영혼의 싫증으로 인해서 마음이 곤고 해진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해 나가면서 우겨 쌈을 당하는 그 많은 고난 속에서 곤고해 진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풍성히 맛볼 때도 있었지만 이런 곤고함을 맛볼 때도 있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향해 가지 고 계신 인자한 성품에 어떤 속성 적 변질이 온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히 그리스도와 함께 동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한 해 동안도 살면서 경험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인자하심, 인자하심 대신에 경험했던 완전한 고립감 그리고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면서 고통을 당할 때 주님이 내게 계획 따라서 살아가지 않을 때만 그런 단절들이 경험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선은 인간이 훔쳐서 제 마음대로 휘고 뒤틀리게 만들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을 이 자리에 세우신 하나님의 계획은 여러분들이 그 계획에 따라서 충성스럽게 살아갈 때 나 여러분들이 게으르게 행할 때 나 하나님을 향해서 온전한 마음을 품고 어린 아이처럼 주님을 의지할 때 나 혹은 마음이 강퍅할 때 나 하나님의 계획 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계획을 우리의 태도를 따라서 휘게 하시고자신이 정해 놓으신 목적을 철회하거나 그렇게 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그 선하신 계획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주님이 우리를 여기에 세우셨을 때 주님이 우리에게 섭리 속에서 기대하신 바가 무엇인지 그 계획대로 잘 이뤄드리면서 그 이뤄 드리는 계획의 과정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기뻐하면서 살아가는 그 생활이 있을 때 는 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맘껏 맛보았습니다. 죄인을 향해 베푸시는 그 말할 수 없는 은혜 그리고 핍절한 나의 영혼에 내려 부어주시는 하늘을 열고 부어주시는 그 하나님의 그 말씀에 신령한 세계와 은혜들 모든 것 들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한없이 느낄 수 있었고 사역이 고달프고 우리가 원수들에 의해서 사방으로 에워쌈을 당하고 만물의 찌끼와 같이 된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다 거나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이제는 다하였다거나 하나님이 은혜 베풀기를 이제는 중지 하셨다고 하는 느낌은 한 번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고난보다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이 시련보다 넘치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격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역을 하면서 뿐 만 이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모든 불만족과 고통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이 인자하심을 철퇴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그 계획을 따라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그리고 우리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그 선한 계획을 즐거워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을 거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열렬하고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이 세워둔 자리에서 그렇게 기도 할 때에 그 기도에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지 하나님이 세워둔 자리를 이탈하고 주님이 우리를 세워 두실 때 에 가지고 계신하나님의 선한 계획에 정면으로 배치된 삶을 살면서 열렬하게 간절히 기도 할 수 도 없거니와 혹시 그렇게 하기를 힘쓴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에게는 모두 허공을 울리는 기도 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는 이런 저런 많은 갈래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세우시고 섭리 속 에서 여기에 나를 붙잡아 두신 그 계획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향해 갖고 계신 계획에 따라 사는 삶 이 선한 삶이고 그리고 그 계획을 내가 기뻐하지 않거나 혹은 현저히 덜 기뻐하고 그리고 또 내 방식대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 이 모든 것 들이 하나님 앞 에 죄라고 하는 사실을 여러분이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 안 되는 일년 의 기간이기는 했지 마는 우리가 마음을 하나님께 기울이고 그리고 정말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세우신 계획들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그리고 주님이 나를 통해서 이루고 싶어 하시는 그 계획들이 적어도 나의 불순종과 게으름, 그리고 나의 무지와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온전히 이뤄지는 일이 없도록 그렇게 마음을 쓰며 나의 모든 말과 그리고 나의 손의 섬김으로 이 모든 나를 여기에 세우신 하나님 의 계획을, 그 선을, 이루어 드리고자 온전히 나를 기울이는 삶을 살 때 우리들이 경험하는 하나님의 인자는 이루 말할 수 가 없습니다. 폭풍의 시련 가운데를 지나는 것 같은 때에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맛보고 위기가 있는 것 같을 때에 오히려 그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그 크고 넓은 세계를 경험하는 훌륭한 기회가 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쓰고 결코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세워 놓은 것이 우연의 일치나 혹은 하나님의 실수가 아니라 정교한 구속 의 목적 을 따라서 나를 여기에 세우시고 이곳에서 천사도 할 수 없는 복음의 비밀들을 섬기며 성도들을 온전한 믿음으로 자라게 하기 위해서 봉사하며 살게 하신 그 하나님의 크신 계획을 온 몸으로 온 맘으로 기쁘게 받아들이고 그리고 자신의 참된 행복을 나를 하나님이 충분히 사용하셔서 그래서 나를 하나님이 여기에 세우신 계획을 따라서 사용하시는 것이 우리 각자 각자의 기쁨이 될 때 그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한없이 맛보게 됩니다. “여호와의 친밀한 사랑이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 있으며” 성경이 말합니다. 하나님의 그 친밀한 사랑 인자야 우리를 향한 그 하나님 의 넓고 크신 그 무한한 사랑이 하나님의 그 넓은 사랑이 당신 을 경외하고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경험되어집니다. 한해가 저물어져가고 있고 또 한해가 다가오겠지요. 오늘 새벽에도 기도 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이 세상에서 우리가 아무리 많이 행복하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이 보람을 느낀다고 할지라도 역시 이 세상에는 끊임없는 눈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말입니다. 왜냐하면 섬김이라는 것이 한고비를 넘고 나면 또 한고비가 나오고 이일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 앞에 도움을 얻고 나면 또 다른 일 이 우리의 눈물을 기다립니다. 계속 그런 일들이 연속되고 그 삶이 바로 선한 삶이고 그 삶이 바로 자신의 존재를 통해서 하나님 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무제한의 자기 부인과 무한정한 헌신이 우리에게 요구 됩니다. 자기를 부인하되 할 수 있는 영역에까지 뿐만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되 말씀이 요구하는 한 무제한으로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신 목적 을 따라 세우신 그 자리에서 주님이 우리를 쓰시고자 할 때 무제한의 헌신이 우리에게 필요 합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것들을 남겨둔 헌신이 아니라 주께서 쓰시겠다면 생명까지도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는 무제한의 헌신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런 삶이 우리에게 요구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노예와 같이 일에 매여서 당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벤허 에 보면 은 그 벤허 가 어떻게 하다가 끌려가서 노예선 에 배를 젓는 장면이 나오지요. 발을 모두 묶이고 쇠줄로 묶이고 그리고 감독하는 사람들이 배 밑창에서 채찍을 휘두르면서 힘껏 노를 젓지 않는 자들의 등에 가격 합니다. 적군이 쳐들어 와서 배가 함락되고 군인들이 모두 바다로 빠지거나 혹은 도망치거나 죽어도 노예들은 도망하지 못하고 계속 배를 저을 수 밖 에 없도록 그렇게 만들어 노은 노예선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인격적인 승복이 없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보는 일이 없이 하나님을 섬긴 마지막 결과는 망가진 사역 의 현장과 고장 난 자기 자신의 영혼이 재고품처럼 버려지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없고 자기도 없고 은혜도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배워야 합니다. 무제한으로 나를 부인하고 그리고 무한정한 헌신 속에서 나를 여기에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온 몸으로 기뻐하며 받아들이는 그 승복이 필요 합니다. 그리고 정말 동의해야 합니다. 정말 여기에 나를 세우셨을 때에 내 인생의 참 된 가치는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세우셨을 때에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는 것이다. 라고 하는 그 철저한 자기 승복 그 철저한 자기 복종이 필요 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의 이 인자하심에 대한 경험은 강물같이 우리에게 밀려들어옵니다.
그래서 고난의 사람 이 동시 에 기쁨의 사람이 될 수 있고 빌립보에서 보여주었던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말입니다. 고난의 사람이 기쁨의 사람이 될 수 있고 시련의 사람이 정말 희락 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없이 많은 하나님 일속에 살아가면서도 일에 치이는 자 대신에 맛본 그 인자하심 때문에 넘치는 그 하나님의 사랑에 넘치는 일에 치이는 자가 아니 라 은혜에 넘친 자 가 되어서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그런 생활을 해 나가 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제 추수철이 되어서 한해가 마무리 되고 추수 가 모두 끝나고 알곡들은 곡간에 들이는 때입니다. 얼마이든지 간에 우리는 한 해 동안 섬겼고 그 열매는 우리 각 각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산 한 해 동안 의 우리의 삶 이였습니다. 바라기는 얼마 남지 않은 계절이기는 하지마는 마지막 밭 에 떨어진 이삭까지 모두 거두어서 우리 주님께 돌려 드릴 수 있기를 바라고 지나간 시절이야 우리의 무지와 어리석음 속에서 하나님 의 선한 계획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해서 기쁨이 없이 섬 긴 때가 있었지만은 이제는 우리의 삶의 온 현장에 사역의 온 마당이 온전히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경험으로 차고 넘치는 그런 한해의 마지막이 되기를 전심으로 빌어 마지않습니다. 그래서 올해의 경험이 내년 한해를 계획 하고 다시 힘차게 주를 위해서 살아가는데 말할 수 없는 기쁨이 되도록 여러분들이 그렇게 한해를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5. 정직하라
“진실로 의인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가 주의 앞에 거하리이다” (시140:13)
오늘 성경에 보면 ‘의로운 자가 주께 감사하며 정직한 자가 주의 앞에 거하리이다’라고 했는데 히브리 성경에 보면 의로운 자가 하나님께 찬송하며 그의 이름에 찬송하며 그리고 뒤편으로 넘어가면 정직한 자가 주의 면전에 ‘야샤브’ 앉으리이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야샤브’ 앉는다, 거한다는 동사는 시편 1편에 나와있는데 악인의 꾀를 쫒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할때에 그것입니다. 그래서 ‘야샤브’는 이렇게 거기에 사는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요세브’라고 하면 건의라고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정직하다라는 것이 무엇일까 ‘야샤르’라는 단어인데 구약에 아주 많이 쓰이는데 하나님이 특별히 당신이 정직한 분이라고 하는것을 나타낼 때 아사를 비롯해서 믿음의 사람들이 주 앞에 정직히 행하였사오며 할때 즐겨 쓰이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우리가 아는대로 ‘정직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직하다’라고 하는것은 뭐냐면 의롭게 산다, 잘산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마음에 있는 그것이 밖에 있는 것과 일치한다 그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품과 그의 행하심이 항상 같습니다. 성품이 이러신데 행하시는것, 성품은 A인데 행하시는것은 B로 C로 이렇게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은 하나님의 행하심과 꼭 일치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품 자체는 우리에게 계시해 주실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두가지 점에서 불가능한데 성품 그 자체가 Glory 영광이기 때문에 그 자체를 계시해 주셔도 우리가 그 영광의 계시를 감당할수 없기 때문이고 또하나는 비교 개념이 우리에게 거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의 완전하신 성품에 관해서 내 성품이 이것이다 라고 계시를 해 주셔도 인간이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우리 인간에게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성품이 일부 있는데 신학적으로 그것은 유통적 속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의 그 본체적인 사랑을 추론해 들어갈수가 있습니까? 어느 정도야 가능하겠지만 아주 오염된 개념 밖에는 갖기가 힘들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뭐라고 이야기 하냐면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묘사를 능가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어떻게 말로 할 수가 없다. 인간의 사랑과는 비교가 안되는 완전한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렇게 이야기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성품을 나타내시는 방법은 하시는 일을 통해서 당신의 성품을 나타내십니다. 그래서 하신 일을 보면 하나님이 직접 말씀으로 계시해 주신 당신의 성품이 그제야 비로서 아 이런 것이구나 하고 이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긍휼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시다 이렇게 말로 가르쳐 주셔도 그 성품에 대한 이해를 뼈져리게 느끼고 아 그거구나 그래서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긍휼한 성품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되는것이 언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혹은 내가 아는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구원 행동을 경험하게 될 때 그때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 분명합니다. 똑같이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정직한 성품을 당신의 행동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6장에 보면 그것은 우리 영혼의 답과 같아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완전하게 하나님 자신의 정직을 드러내기 때문에 그래서 그 약속의 말씀이 있으면 우리들은 그것을 믿고 거기에 온 몸을 던져도 우리가 실패하거나 우리가 기대하지 못했던 말씀에 적힌것과는 표리부동한 결론에 도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결코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야굽입니다.
그래서 이 정직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가 선택한 백성들의 가장 뚜렷함 특징입니다. 그래서 선행을 행한것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되게 만드는 아주 중요한 특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만약에 자기의 백성들이 부정직하고 거짓되면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아무리 많은 은혜를 주셔도 그들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구약에서 우상숭배의 죄와 함께 가장 미워하던 죄가 둘이 더 있었는데 그것이 뭐냐면 하나는 간음이고 또 하나는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상이 계속 줄달음질 치다가 신약시대에 와서 그 사고들의 권면에 있어서 거짓말하지 말라는 권면이 수 없이 나오고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도 거짓을 행한자는 택함을 받지 못한자의 표 였습니다. 그리고 계시록에 가면 하나님의 나라는 거짓말을 행하는 사람들을 우상숭배를 행하는 사람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올수 없는 사람들의 구원 받지 못한 특징으로 낙인 찍힙니다. 그러니까 이 거짓말은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선행을 하는 삶보다 더 중요한것은 표리가 부동하지 않는 내면과 외면이 일치되는 정직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제사를 드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지자를 통해서 탄핵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이유는 제사의 정신과 제사자의 마음이 불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괜챦은 제물을 가져와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데 그 마음이 밖으로 드리워지는 제사행위, 제사제물과 일치를 안하고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아주 엄청난 모욕감과 불쾌감을 느끼면서 선지자를 통해서 탄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정직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자기속에 죄가 있으니까 그것을 다 드러내고 살아가는 것은 악인의 삶이지만 정직속에 이런 하나님을 향한 반역과 죄가 있기 때문에 감히 난 제물을 드릴수 없습니다. 그리고 내 속에 있는것이 이것입니다 하고 쏟아놓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 예물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온갖 더러운 죄와 악인데...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속에 있는 그것이 밖으로 쏟아져 나올 때 마음을 찢으면서 마음에 피를 흘리면서 쏟아져 나오는데 그 찢어지는 마음이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그렇게 찢어서 피가 낭자하게 만드는 그것이 짐승을 죽여서 피가 바닥에 흐르도록 만드는 그것보다 하나님 앞에 훨씬 바람직한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벌써 야외 종교속에도 복음들이 선명하게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께달은 대표적인 사례가 다윗입니다. 바세와와 함께 간음하고 제사장이 없겠습니까 제물이 없겠습니까? 온 나라가 자기것인데... 시도했지만 비로소 그때 꺠달은 것이 뭐냐면 하나님의 성품을 새롭게 깨닫는 것이었습니다. 정직한 성품... 그것이 뭐냐면 하나님이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 하시나니 기뻣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그러면서 중신의 통회하는 자에게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다윗이 선지자로서 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우리에게 적용이 되어야겠는데 우리가 이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정직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저는 거짓말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얼마나 불결하게 생각하시는지에 대해서 눈을 떠야 합니다. 이러한 정직이 하나님 앞에서 짧은 시간에 다 이야기 할수 없겠지만 구약에서는 하나의 신학적 주제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정직이 하나님 앞에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온 수 많은 공로 보다도 이 정직이 하나님 앞에 위기속에서 하나님 앞에 자기를 세울수 있는 아주 중요한 자산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정직의 문제가 그렇게중요한데 그 한 예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기브욘 주민과 화평 조약을 맺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들이 와서 빵도 다 썩었고 이런것들을 보면서 자기들은 굉장히 먼대서 온 사람들인데 자기들을 살려달라고 하면서 그런가 보다 하면서 너희를 해치지 않겠다 하고 화평조약을 맺는데 알고보니 곧 가서 공격해서 부셔버릴 그 땅의 백성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와서 말하자면 거짓말로 조약을 맺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대로 이해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특징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이렇게 동양에 속한 사람들은 이런점있어서 사실 넘어질 확률이 굉장히 많습니다. 나는 동양이 서양보다 훨씬 더 비 윤리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문제는 뭐냐면 문화라고 하는것은 상대적이고 동양은 항상 사람 자체가 백이면 한 팔십쯤을 가지고 그것을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건강도 그렇고 모든 것에 있어서 무슨 이야기 인가하면 널널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확도가 떨어집니다. 정확도가 떨어지면 반드시 거기에는 거짓이 개입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살아 갑니다. 서양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정직이라는 면에서는 이 쪽 사람들보다 훨씬 더 정확합니다. 그런 문화속에서 살고 있다는 이야기는 뭐냐면 그 만큼 성경이 요구하는 정직에 대해서 자기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반응하지 않을수 있다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화는 누리면서 살아야 되는 면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고통스럽지만 그것을 극복해야 하는 면도 있는 것입니다.
(예화) 그런데 몇년전에 필라델피아 웨스터 민스터 신학교에 갔을 때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교수들이 한국 학생들 때문에 진절머리를 냅니다. 그런데 왜그러냐면 시험보는데 컨닝하는 것이야 못하겠지만 ‘페러프레이즈’ 즉 레포트를 쓰는데 남이 다 써놓은 것을 단어 앞뒤를 바꾸고 말을 장난쳐서 다시 글짓기 해서 교수들이 레포트 하나 받으면 그 ‘페러프레이즈’ 한것의 원본을 찿아 다니느라고 어느 교수는 하루종일 도서관에서 산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하도 짜증이 나니까 토플 점수를 550점이면 웨스터민스터 들어 갔었는데 580점으로 올려 버렸습니다. 한국 학생들 들어오기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런것을 보면서 너무 마음이 상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면 안되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선생 노릇 할때도 보면 진짜 인간도 아닙니다. 레포트를 냈는데 한 사람은 신명조 한사람은 샘물체 한사람은 고딕체 이렇게 해서 레포트라고 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사람 돌아 다니면서 레포트를 편집해서 냅니다. 조교하고 둘이 쪼그리고 앉아서 하루종일 찿아 냈습니다. 그렇게 찿아내서 1번 레포트는 8번 레포트하고 똑같고 15번 레포트는 23번 레포트 삼분의 일, 38번 레포트 삼분의 일, 59번 레포트 삼분의 일 이렇게 되어있다하고 방을 써서 붙여놓고 여기서 해명하지 않으면 다 F학점이다. 그런데 낄낄낄 웃으면서 봅니다. 하나도 양심의 가책이 없습니다. 이것은 안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랬냐하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돌아 가셨는데 남대문 교회 원로 목사이시던 배명준 목사님이 한번 저에게 그럼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자기도 정직하게 살려고 애를 쓰는데 자기보다 더 지독하게 정직한 친구가 일본 유학 시절에 있었는데 한국에 나와서 이야기 하다가 날이 더운데 긴팔을 입고 다니다가 “야 넌 왜 날도 더운데 긴팔을 입고 다니냐 짧은 팔을 입고 다녀라” 했더니 “나는 짧은 팔이고 긴팔이고 와이셔츠라고 하는것이 두개 밖에 없어” 그랬습니다. 그리고 갔는데 등기 속달로 편지가 왔습니다. 일본에서 등기 속달로 왔는데 뜯어 보니까 “내가 정말 미안하다 집에 가서 찿아 보니까 세벌이더라.” 그러니까 부지불식간에 거짓말 하는 것을 면한 것입니다. 교회적으로 어려움을 많이 당하셨지만 저는 김창익 목사님을 개인적으로 많이 알지 못하지만 몇가지 점에서 참 존경스러운 분입니다. 그 분이 이북에서 신앙생활 하시다가 점점 공산당들이 정체를 드러내니까 신앙생활이 불가능하다는것을 알고 넘어 왔습니다. 38선을 넘어 오는데 교회에서 전도사나 하다가 넘어 오는데 뭘 압니까? 혼자 넘어 오다가 밤새도록 넘어 온다고 돌아 다녔느데 아침에 눈을 떠 보니까 북한군 초소 앞에 서 있더랍니다. 그래서 “야 임마 넌 누구냐?” “나는 아무개입니다.” “너 거기 왜 서있냐?” “길을 잃고 여기 서 있습니다.” “왜 길을 잃어 버렸냐?” “신앙의 자유를 찿아서 남쪽으로 내려 가려고 밤새도록 했는데 내려 가는줄 알고 한참 다니다 보니까 여기 당신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죽어야 되는데 살았습니다. 남쪽에 내려 와서도 미처 교회를 돌보다 피난을 못갔습니다. 그러다 공산군이 쳐들어 왔습니다. 마루 밑에 숨었는데 걸렸습니다. 공산군이 “넌 뭐하는 놈이냐?” “전도사입니다.” 전도사라는 용어를 공산당이 알수가 있습니까? “전도사가 뭐하는 사람이냐?” “전도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가 있는데 거기서 하나님 잘 믿으라고 성경을 가르쳐주고 안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믿게 하는 사람이 전도사입니다.” 그랬더니 그 공산군 하는 이야기가 “내가 예수 믿는 사람 많이 만나 보았는데 너처럼 정직한 사람은 처음이다. 너는 더 살아라.” 그래서 살았습니다. 그분이 그런 정신으로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직해 지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 합니다. 첫째는 무슨 뜻인가 하면 정직해 지는 것으로 말미암아 당하게 될 모든 불이익 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자로 남는 하나님이 인정하심이 더 크다라고 하는 확신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예화) 제가 김 경해 전도사님 여기 있는데 토요일 오후에 개척예배를 드리고 첫 주일이 되었는데 첫주일이니까 교회 불쌍하다고 해서 사람들이 많이 와 주었는데 신학교 선생을 하다가 개척을 했으니까 한달도 채 안되는 동안에 기도 응답을 받고 결정을 하고 깃발을 꼿고 시작을 했으니까 얼마나 고단 했겠습니까? 그래도 지하실을 다 칠하고 닦고 난리치면서 그렇게 했는데 토요일날 3시에 개척예배를 드리고 밤 늦게까지 설교 준비를 하고 주일 예배를 드렸는데 주일날 예배 끝나고 나니까 1시 반쯤 됐는데 3시에 예배니까 잠깐 집에 들어 갔는데 눈을 뜨고 나니까 3시 였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망신 입니까? 교회 개척하고 첫날인데... 그래서 차를 몰고 급히 왔더니 3시 10분이 넘었습니다. 우리 집사람은 완전히 초죽음이 되었습니다. 예배에서 손님도 오고했는데 15분인가 늦게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떻합니까? 차 타다가 늦었다고 죄송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굉장히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부정직해 지는 것이 땅을 파고 돌을 나르는 일이라면 소위 하나님이 죄의 산출을 막으시는 방법 가운데 불편함의 논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리즈닝 오브 인컨비니어스라고... 그런 불편함이 있어서 죄 지을 의도를 가지고 있지만 산출을 안한다는 그런 것입니다. 그런것들 때문에 하나님이 세상을 보호하는 것인데 그 부정직해 지는게 땅을 파고 돌을 나르고 진짜 손발이 닳도록 노동을 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그럴 바에야 정직해 지고 말지 그럴텐데 살짝 비켜가는것은 어떠한 노력도 안듭니다. 그리고 그 위기를 모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 가면 어떠한 결과가 오냐면 하나님 앞에서 사는것이 불가능해 진다는 것입니다. ‘코란데오’의 삶이 불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코란데오’의 삶은 모든 아름다운 영적인 삶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타난 최종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산다라고 하는것은 무슨 이야기 인가하면 우리가 의롭습니다 이제 저는 도덕적 수준이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눈빛 정도는 감당할수 있습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시편에 뭐라고 했냐면 하나님이 여호와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데 누가 그 앞에 설수 있겠습니까? 선다는 말이 아마도 버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약에 죄악을 감찰하시면 누구도 그 하나님의 눈빛을 버틸수가 없습니다. 지탱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이 코란데오의 삶을 산다고 하는것은 무슨 이야기 인가하면 완전하다 완벽하다라고 하는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정직하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에 보면 주께서 판단하실때에 내가 주를 의롭다 하리이다. 무슨 뜻이냐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올 때가 되면 주님의 판단이 의롭습니다라고 인격적으로 무릎을 꿇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직한 삶과 모두 맥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삶이 정직해야 합니다. 일초를 하나님 앞에 ‘코란데오’의 삶을 살기 위해서 10년을 고통속에 지내야 할지라도 그것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것이 진짜 하나님의 면전에서 ‘야샤브’ 거하기를 원하는 그런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순간의 편의를 위해서 부정직해지고 이렇게 하는것은 그 사람의 영 스러움을 한없이 파괴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자신이 못 느껴서 그렇지 계속 파괴해 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것이 한없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것이 성경에 의하면 신자의 최고의 행복입니다. 하나님의 면전에서... 천국이 그렇게 행복한 이유가 뭐냐면 하나님 면전에서 사니까 행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면전에서 사는것이 한없이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햇빛이 잘 드는 양지 바른곳에서 자라는 식물과 거의 햇빛이 들지 않는 칙칙한 곳에서 자라는 식물류는 종류가 완전히 다릅니다. 햇빛이 하나도 들지 않는 곳에서 자라는 식물은 곰팡이, 이끼류 같은 것들입니다. 햇빛이 찬란하게 비치면서 그곳에서 자라는 식물은 그런것하고 완전히 종류가 다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비치는 얼굴 빛으로 살기를 원했던 모든 사람들, 시편 67편에 나오는 ‘주의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시고 그 도를 만방에 알리시옵소서’할때 그 하나님께로부터 비치는 그 영광의 빛 앞에서 살고 싶어 했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의롭다고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정직한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까놓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분명하게 단 1초의 정직한 삶을 위해서 신령의 고통도 때로는 목숨도 잠깐 동안이라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주의 면전에서 살기 위해서 죽음도 불사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의 표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런 정직한 삶을 사는것이 아주 굉장히 힘듭니다. 왜냐하면 모두 정직하면 괜챦은데 경쟁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부정직 합니다. 그런데 나만 정직해 진다고 하는것은 많은 손해를 감수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것들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고방식이고 우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으로 보고서를 쓰고 이런것들도 전부 다 죄악입니다. 제가 알던 한 자매는 서울대학교를 나왔습니다. 공부도 아주 탁월하게 잘했고 좋은 회사에 취직했는데 결국은 사표 냈습니다. 왜 그랬냐했더니 자꾸 가짜 보고서를 쓰는 것을 강요한다는 것입니다. 관공서에... 그래서 자기가 사표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거짓입니다. 그런것들이 우리의 영성을 파괴하고 하나님 앞에 정직한 참회의 삶을 사는데 아주 커다란 걸림돌이 되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 비껴 가는 것입니다. 마치 마늘을 놓고 찧은데 잘 안찧어 집니다. 때리면 이리로 넘어가고 때리면 저리로 넘어가고... 그래서 부정직한 사람은 항상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잘 깨어지지 않습니다. 정직한 사람들이 깨트려지지 부정직한 사람들은 절떄로 깨트려지지 않습니다. 부정직한 사람들은 말씀에 깊이 은혜받을수 없습니다. 정직한 하나님의 말씀이 부정직한 사람을 감동시키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친구들도 사귀는것 보면 압니다. 정직한 사람이 부정직한 사람속에 섞이면 부정직한 사람이 정직한 사람을 왕따 시킵니다. 한없이 불편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것입니다. 그래서 정직하게 살아 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더 첨가시켜서 말씀드리자면 투명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뭔가 이렇게 특히 교역자들에게는 프라이버시라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유리로 만든 집에서 사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어제 새가족 환영회에서 어느 교회 장로님 부인이라고 왔는데 우리 많이 충격 받았는데 교회에서 자기네 부부 같은 사람 없는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기 볼때는 자기 남편이 좋은 신자라고 생각이 안되는 것입니다. 자기속에서 일어나는 고통스러운 갈등을 다른사람들이 다 다른사람들은 자기를 본 받으려고 하는데 그 판단에 대해서 동의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안되는 것입니다. 유리로 만든 집에서 사는 것처럼 투명하게 그래서 누가 그집을 내려다 보더라도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에 대해서 동의 할 수가 있고 모범이 되는 삶을 살고 못사는 것에 대해서는 말씀이 지적하는한 잘 못살고 있다고 정직하게 이야기 할수 있는 그런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역자가 감추는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마음이 청결하지 않은 것입니다. 노출하지 못할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기독교 윤리적으로 볼 때 알아야 할 권리가 없는 사람에게 침묵함으로서 어떤 특정 사실을 공개하지 않는것은 죄가 아닙니다. 무슨뜻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부정확한것도 부정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실이나 사실 관계나 혹은 어떤 내용들에 대해서 애매모호한것은 대게 정직에 가까운것이 아니라 부정직에 가깝습니다. 알면 안다 모르면 모른다 하면 했다 안했으면 안했다 이렇게 분명하게 행하는 이것이 우리들이 미끄러지지 않고 사는 아주 중요한 비결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하나하나의 실천들이 주의깊게 부정직의 죄들이 우리속에 깊이 들어와서 우리의 영혼을 혼탁하게 하고 그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엄위로우신 분이고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이십니까? 그분 앞에서 그래서 나는 그분의 눈 앞에서 살고 싶다 그것을 원한다면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정직이 여러분 자신의 전폭적인 특징이 되도록 말입니다. 그래서 세월이 많이 흘러가도 여러분들 생각하면 아 그 정직한 사람 이럴수 있도록 그렇게 살아갈때에 여러분들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이 될 수 있을 것이고 늘 우리들이 꿈꾸는 ‘꼬란데오’의 삶이 그런 정직해지고자 하는 몸부림 속에서 끊임없이 스며들어오는 이 부정직하게 하는 유혹의 요소들을 거절하고 부패성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부정직의 욕구들을 제어하고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이 아주 정직하고 사람다운 삶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6. 주의 법을 마음에 품은 사람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으리로다(시37:31)
우리의 신앙생활이 미끄러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미끄러짐이 눈 에 보이게 서서 이 서서 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어느 순간에 꽉 미끄러지는 것처럼 그렇게 한 번에 신앙생활에 미끄러짐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근데 그런 미끄럼은 우리들이 볼 때는 참 갑작스럽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사실은 마음에서는 오랜 시간을 두고 준비된 것 입니다. 이번에 나온 열린 신문에 형제 하나가 산상 기도회에 다녀오고 쓴 간증을 아주 인상 깊게 읽었는데 여러 가지 테이프도 듣고 교회에서 은혜도 받고 그랬는데 결국 마음이 많이 미끄러져 있었는데 그 원인이 배운 족족 지성의 창고 에 가서 드러누워 있었을 뿐 자신의 마음속에 역사 하지 않는 다 라고 하는 것을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가장 커다란 원인이 뭐냐면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속에 없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여기 시편에 보면 하나님의법이 마음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 여러분 눈여겨 다시 읽어 보면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근데 그게 의뢰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무슨 뜻이냐면 그냥 있으니까 있나 보다 그 게 아니라 암탉이 병아리를 까기 위해서 달걀을 품듯이 의지적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의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의 마음속에 늘 품고 살려고 애썼던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런 생각을 해요. 뭐냐면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듣고, 또 그것으로 책을 만들고 그걸로 테이프를 만들고 그걸 듣고 사람들에게 가르쳐주고 이런다고 해서 결코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영적으로 사고되는 것, 육신 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이라 할 때, 생각이 라는 것이 생각되는 것을 의미하는 건데 그 부분을 해석 하면서 존 웨인이 이런 이야길 합니다. 한사람의 내면의 세계가 영적인 사고 속에서 지배 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늘 가르친 다는 거 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다 이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잘 가르치고 이런 것과는 상관이 없다 이것입니다. 그럼 뭐냐 자신 속에서 그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품어져 있는 상태에서 불씨처럼 그 말씀에 자기의 마음과 온 그 지정의와 영혼이 계속 영향을 받고 있어야 된 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법을 품고 사는 사람들은 실족하는 일이 없다 라 고 하는 것이 에요. 그래서 우리에게 있어서 현저하게 부족한 노력이 뭐냐면 지금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말씀이 부족한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많이 깨달았던 말씀 그 옛날에 우리를 바른길 가 게 만들어 주었고 순종하는 길을 보여 줬고 또 순종할 힘을 공급해 줬어요. 그래요 그렇지만 일단 그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에 현재적인 영향력이 사라지게 되면 은 과거에 그 사람이 어떤 말씀에 깊이를 터득한 사람이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현재적인 내적인 부패성이 다시 고개를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고개를 드는 죄와 부패성은 수많은 말씀의 폭탄을 맞고 그리고 기도의 폭풍우 속에서도 살아남은 죄에요. 그게 다시 고개를 든 다 구요. 그때 차이점이 뭐냐면 머리는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 이거는 분명히 내가 옛날에 배우기를 잘못 됐다고 배웠는데 하는 것은 살아 있어요. 근데 마치 내가 게으름에서 이야기 했듯이 담 넘어 오는 도둑을 보고 훔쳐가기만 해봐라 그랬던 농부처럼 파악은 되는데 파악한 죄와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근데 그것이 사실은 죄의 지배 아래 있는 가장 중요한 특징 중 에 하나에요. 파악한 죄 인데도 그것을 버리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가만히 보면 은 이런 거 있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눈을 뜨고 나면 거룩한 삶을 살기위해서 정말 많은 말씀의 지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잖아요.
근데 주위에 보면 우리처럼 이렇게 깊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눈 뜨지 못 했는데도 우리보다 훨씬 경건하게 살고 진실하게 사는 사람들을 볼 수 있잖아요. 그 중요한 원인 이 뭐냐 하면 비록 그 양 이 아주 많지 않아도 작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그것을 가슴에 품고 그 불씨를 그 마음에 그 하나님 의 말씀의 법을 불씨처럼 간직한 사람들은 머릿속에 그보다 더 치밀한 개념만 가득 찬 사람보다는 훨씬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이렇게 설교 하면 이런 의문이 들 거 아닙니까? “아 그럼 정답을 찾았네. 그럼 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 없구나. 몇 가지만이라도 제대로 똑바로 알아서 그걸 계속 붙들고 살면 거룩한 삶을 산다며 그렇게 하면 되겠구나.
근데 그 문제에 대해선 제가 두 가지로 답을 할 수 있는데 우선 첫째는 뭐냐면 그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살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문제, 다시 말하면 그 말씀이 매우 달게 느껴지고 깊게 느껴지는 것은 양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세요? 건강을 잃어서 입맛이 없어져 버린 사람은 많은 음식을 향해서만 입맛을 잃은 것 이아니라 미음을 갖다 줘도 그것조차도 먹기가 싫어져요. 무슨 뜻인지 알지요? 식욕을 느끼는 사람은 많은 음식도 맛있지만 뭘 먹어도 맛있어요. 뭐든지 아무 음식점에 가서 먹어도 정말 맛있어요. 그리고 뭘 먹어도 입에 달아 그러니까 양이 많은 양이냐 적은 양이냐를 선택할 문제가 아니라고 이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영적인 작용이 잘 못 되어가고 있는 것이지 결코 양의 문제가 아니라고요. 그런 점에서 볼 때 이런 것은 양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걸 말씀드리고 싶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한사람이 작은 말씀의 지식을 가슴에 품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경건하고 진실하고 그리고 거짓 없이 그렇게 살아간 다 라고 할 때 만약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체계적이고 풍부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워진 그런 지식의 세계 속에서 그 모든 말씀을 그렇게 붙들고 살아간다면 그 삶이 얼마나 달라질지 생각해 봐요. 전자의 사람은 비유하자면 벼랑 끝에 죽지 않고 끈질기게 붙어 있는 나무와 같아요. 그 벼랑에 바위에 붙어서 자라는 나무들은 수령을 계산할 수가 없어요. 충무에 가면 한려수도로 나가면 말입니다. 사공 이야긴 대요 거짓말이겠지요. 근데 천년 묵은 소나무가 있데요. 그런데 일 미터가 안 됩니다. 천년, 천년 묵었데요. 그런데 천년 까진 몰라도 내가 캐나다 갔을 때 300년 된 소나무는 봤어요. 근데 뭐 300년 된 소나무라는데 다 어른 키 만해요. 왜냐하면 얼음 벌판에 붙어 있는 바위에 거기에 붙어서 자라는 나무에요. 안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빨아들이고 붙들고 살려는 본성을 가진 사람이 만약 총체적인 하나님의 풍부한 체계와 지식 속 에서 그것들을 붙들고 산다면 마치 그 기름진 산에 심겨진 거목과 같이 자랄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뭐냐면 많은 하나님의 말씀을 개념으로 가지고 살 거냐? 작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가슴에 품고 살 거냐. 그러면 두말 할 필요도 없이 후자에요. 그러면 가장 좋은 것은 그 하나님의 풍부한 말씀을 자기가 가지고 있고 동시에 때마다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때 그때에 그 말씀 이 여기서 심겨 질 때 우리의 모든 영적인 생명이 풍성하게 불러 일으켜 지는 것입니다. 우리 아들이 사경회에 참석을 했습니다. 그래서 공부가 한 참 바쁘데 엄마 눈치 보면서 사경회 참석을 했는데 닷새 동안 참석하면서 뭘 깨달았느냐 했더니 아침 먹으면서 그런 고백을 해요. 여름 수련회에 갔다 오고 나서 은혜를 받고 한 달 반 이상 기도가 정말 잘 되더래요.
근데 그다음에 어느 순간부터 미끄러져서 기도가 안 되더라 이것입니다. 근데 사경회 참석해서 이렇게 듣고 보니까 자기에게 선명 하게 깨달아 지는데 뭐냐면 자기 의 영혼의 상태가 어떤지를 몰랐었는데 말씀을 듣고 보니까 자기가 살아가면서 짓는 잔잔한 죄 들 을 하나님 앞에 처리하기 위해 용서를 빌었는데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자기를 용서 해 주신다는 사인이 없으니까 혼자 분투하고 괴로워 하다가 영혼의 싫증을 느끼면서 마음이 굳어져 가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입니다. 근데 신기하게 그 사실을 깊이 깨닫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를 용납해 주신다고 생각하니까 다시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기도가 옛날처럼 다시 쏟아지기 시작하더라.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거는 개념 속에서 수없이 스쳐지나 가는 거 그런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한순간에 우리들이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다 가슴에 끌어 않고 살수는 없어요. 또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세요. 다만 거기에 관해서는 두 가지로 이야기 할 수 있는데 하나는 영적인 깊이의 문제에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냐면 지금 나와는 상관이 없는데 어떤 진리를 펴놓고 천천히 그 진리를 묵상하면 이 진리가 이끄는 대로 내 마음이 거기에 가서 달라붙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서 그 설교를 쏟아 놓게 되는 것입니다. 오리버 크롬웰 시대에 존 하웨라고 하는 유명한 청교도 설교자가 있었어요. 오리버 크롬웰이 얼마나 깊은 신앙을 기지고 있는 사람인지 난 잘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개신교를 지지한 사람이라는 건 분명한데 그 사람이 존 하웨 목사를 궁정 설교자 로 와서 설교를 해 주도록 초청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쪽에서 설교할 본문을 보냈는지 어쨌는지 그렇게 됐겠지요? 그런데 오리버 크롬웰의 마음속에 존 하웨 목사를 얼마나 말씀에 깊이가 있는 사람인지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 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도착한 사람을 보고 갑자기 메모지를 주면서 이거를 설교 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그러고 본문을 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황당했겠습니다. 자기는 설교 준비 다해가지고 왔는데 쪽지 가 날라 오더니 그것 말고 이거 해 달라고 하니까 딱 올라가서 찰깍 펼치더니 두 시간을 연속으로 설교 한 것입니다. 그 날 설교하러 올라가기 직전에 쫙 펼치니까 본문을 가지고. 그러고 나서 오리버 크롬웰이 존 하웨 목사를 깊이 존경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설교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뭐 때문이냐 하면 성경을 펼치고 예배드리러 올라가기 전에 쭉 읽고 설교하기 시작했는데 마음이 거기 딱 달라붙은 것입니다. 이게 저는 그 진리,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영적 순발력이라고 그렇게 이름을 붙이는데 이런 것 들이 아주 탁월하고 뛰어나야 해요. 이런 것 들은 어디서 나오는 거냐면 평소에 그 사람이 기독교의 모든 진리를 아주 풍부하게 묵상하면서 살아온 장구한 세월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식 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으면 언제든지 그것을 다시 꺼내어서 묵상할 때 그 이해가 처음 대하는 것보다 훨씬 깊게 스며들어갈 수 있다 이것입니다. 빨리, 빨리. 그런 방식으로 내가 설명할 수 있 구 요 또 한 가지 는 뭐냐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인생을 사는 동안에 우리를 말씀으로 인도하셔요. 그래서 그 때 그때 마다 우리에게 우리를 어떤 쪽으로 움직이시려고 하시는 것이 있잖아요? 그렇지요? 그때 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집중적으로 같은 시기에 대개 같은 종류의 말씀을 계속해서 거듭거듭 우리에게 주신다구요.
그래서 우리가 견디기 힘든 시련의 폭풍을 통과 할 때는 인내 하라는 말씀을 계속 우리에게 주시고 누군가를 미워 할 때는 우리의 영혼에 미움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비참한 상처를 보여주시면서 용서하라고 하는 메시지를 계속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운행하는 경로에 따라서 수시로 하나님이 말씀을 주실 때 가 있단 말입니다. 그런 점 에서 우리가 모든 것을 한꺼번에 끌어 앉고 사는 것을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지 간에 지금 담겨져서 우세하게 내 마음속에 품고 있어서 그래서 끊임없이 그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하고 그 말씀 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내 삶이 통제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고 특별히 그 말씀이 계속해서 불순종 하는 나의 삶에 고삐가 되어서 나를 뒤에서 낚아채는 그런 역할을 하는 재갈과 같은 그런 하나님의 말씀 또 적극적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앞 에 선한 뜻을 품었을 때 그 말씀이 우리를 놀랍게 격려해서 우리로 하여금 처음에 품은 뜻대로 살도록 우리 에게 계속해서 무언가를 불어 넣어주는 이런 말씀의 작용이 자신 속에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근데 우리의 박약한 영적 생활과 그 황패한 신앙생활 은 말 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도지지 부진해.
그러니까 선명하지가 않고 처음에 들어 올 때부터 이게 가슴을 후비고 파고지나 갔다가 그냥 이렇게 들어와서 창고에 눕는 것도 아니고 아 예 그 지성의 창고에 눕기는커녕 그냥 오자마자 외출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냥 가버려 지성의 창고에 정리 되는 것만으로도 보통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 지성의 창고에 가서드러눕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문 두드리고 들어 왔다가 그냥 바로 외출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뭘 먹었는지 들었는지 몰라 그래서 그 예수님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에 보면 새가 와서 그냥 먹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런 생각도 없이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근데 그런 문제에 대한 대책은 두 가지로 요약 되어야 된다고 봐요. 첫째는 뭐냐면 그 집중하지 못하는 그런 습관들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딴 생각이나 하고 졸고 있고 그러면 안돼 그거는 그래서 집중해서 이성적으로 그것을 깨달으려고 해야 되고 또 하나는 뭐냐면 성령께 의탁해야 돼. 예배 중에 성령께서 오셔서 말씀을 사용하셔서 나를 깊이 감화시켜주시기를 사모함이 없이 설교를 듣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이아니라 설교자를 의지하는 것 입니다. 이건 반드시 하나님께서 실 망 하게 하신다구요. 그렇게 기도해야 되요. 여러분들이 설교자 가 자신의 주일 설교를 위해 기도하는 것만큼 회중 은 자신이 들을 설교를 위해서 기도해야 된다. 얼마나 여러분들의 영혼을 잘 돌보고 있는지 스스로 깊이 생각해 봐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숱한 개념들을 파악하고 있는 사람들의 나라가 아니라 그 뜻대로 산 사람들 그 뜻대로 된 사람들의 나라에요. 그 성령께서 오셔서 여러분들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여러분들의 마음이 찔림을 받고 뜨거워지고 그 말씀에 깊이 영향을 받아서 그 불덩어리 가 자기 속 에 남는 것 같은 은혜가 없으면 그냥 없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계속 굳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뒤로 물러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불씨를 마음 에 가지고 있지를 않으니까 기도 생활 이 안 되는 것입니다. 말씀의 불씨가 마음에 남아 있으면 기도 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기도 하게 되요. 기도를 하게 되고 그 기도는 다시 불이 되어서 마음속에 있던 말씀의 불씨를 다시 불붙게 만들어요. 계속해서 그렇게 역사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어느 시인은 보세요. 미끄러지지 않을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이야기 했던 죄의 법이 생각나지 않아요? 바로 그 법입니다. 그러니까 죄의 법이 얼마나 질긴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지요? 너무 질기고 이것이 지긋 지긋 하도록 질겨서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데 그렇게 하도록 나를 데리고 가요. 그러니까 얼마나 이것이 질긴지 생각해 보세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법이 그런 죄의 법 보다 더욱 질기게 내 안에서 작용하기 위해서는 나 지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착념하고 그래서 그것을 붙들고 살려는 의지와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불씨처럼 안고 그래서 그것을 계속 생각하며 그리고 그 말씀에 의해서 내 생각이 또한 붙들리며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될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나날이 거룩하게 하실 것 입니다.
7.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두고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 걸음에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시37:31)
저의 모든 관심은 어떻게 하면 좋은 신자가 될 수 있을까? 그래서 저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런 은혜를 하나님 앞에 늘 고하며 삽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해도 그것도 어떻게 보면 세상의 일입니다. 주님이 부르시면 저는 여러분들과 헤어지고 이 교회도 떠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하는 이 일이 하나님이 불응하시고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하늘의 일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모두 세상에 속한 일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항상 하나님의 일을 하고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도 항상 섬기는 원리가 자신 속에 두신 하나님의 놀라운 새 창조의 은혜가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그런 방식의 삶의 비결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늘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길이고 또 우리가 그렇게 사랑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우리의 일을 잘하는 비결입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주님이 새롭게 창조하신 우리의 본성을 따라서 하나님의 성품의 영광에 충만한 것을 드러내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바깥으로 흘러나와서 우리들이 하고 있는 모든 일속에 용해되어 스며들어서 일이 아니라 일속에 깃들여져있는 우리가 하나님 사이에 맺고 있는 관계가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을 들어낼 때 섬기면 섬길수록 주님이 귀하게 여겨지고 우리도 주님을 닮아가고 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이렇게 출발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 속에서 한때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껴서 그래서 사역에 들어와서 시간이 지나는 동안에 영혼은 파괴하고 그리고 교회의 사역에 큰 기계 속에 한 부속품이 되어서 힘겹게 소리 내어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그렇게 타의에 의해서 생활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너무 슬픕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은 매우 쓸모없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이 사역으로 부르셨다고 하는 목회자적이고 선교사적인 소명도 중요하지만 그 소명을 계속 유지하면서 사는 삶은 그 처음 소명 못지않게 더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섬기며 살아가는 모든 삶이 그러한 현재적 소명의 재현을 통해서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지 않을 때에는 대개 망각에 나와서 성경을 새벽기도 끝나고 읽는 습관이 있습니다. 지나가는 찻소리가 좀 시끄럽기는 하지만 나무아래서 차근차근한 아침공기를 마시며 성경을 읽는 것이 제게 말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보면 직원들이 보입니다. 어떤 사람은 일찌감치 나와서 기도하고 예배당에서 나오고, 허겁지겁 그냥 시간이 30분되어서 정신없이 뛰는 그리고 그다음에 터덜터덜 걸어오는데 그 사람은 아예 30분이 넘었기 때문에 포기한 사람, 그렇게 생활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출근시간을 지키라는 의미도 되지만 약속이기도 하지만 그러면 나는 출근시간이 늦어져서 비어있는 여러분들의 자리보다는 분주한 여러분들의 마음을 보며 더 걱정합니다.
(예화) 제가 안양에서 대학의 교수로 있을 때 집이 인천이었는데 출퇴근길이 막히는 것이 아예 지옥과 같았습니다. 심지어는 두 시간을 넘게 남겨놓고 안양에서 출발했는데 인천에까지 도착을 못해서 강의 시간을 한번 유실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새벽에 일어나면 바로 세수하고 5시 좀 넘어서 차를 몰고 학교로 오는 습관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교수실에 들러서 깔판과 방석 파커를 들고 학교 뒷산 높은 곳으로 올라갔습니다. 거기에 깔판을 깔고 파커를 뒤집어쓰고 그리고 거기서 기도했습니다. 한참 기도하면 저 멀리서 와글와글하는 소리가 들리고 햇살이 환하게 퍼집니다. 그때 기도를 충분히 끝내고 성경 찬송과 깔판을 들고 그 산에서 내려오면 저 멀리서 강의 시간에 맞춰서 허덕거리고 올라오는 학생들과 교수님들이 빼곡하게 도로를 메우고 있습니다. 그렇게 허겁지겁 올라와서 숨도 돌리기가 무섭게 출근부에 도장을 찍고 근무를 시작하거나 교수실에서 강의안을 가지고 허겁지겁 4층 5층으로 올라가서 강의를 시작하는 교수님들이나 수업시간이 늦을까봐 숨을 몰아쉬면서 강의실로 들어가는 그런 학생들이나 직원, 교수들과는 비교될 수 없는 마음의 여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루를 시작할 때 하늘의 이슬로 우리의 마음이 깊이 젖은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지 않고 성화의 길을 걸어가고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길은 이 세상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니까 어떤 일이 일어 나냐면 자꾸 실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꾸 미끄러지고 넘어지는 것입니다. 올라가려고 하는 의지가 있기는 있는데 그런데 자꾸 미끄러지고 올라가려는 의지는 있는데 그 가지고 있는 의지는 매우 박약해서 목표한바 에 도달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진 의지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자동차가 헉헉거리고 8부정도 능선을 올라가기는 하지만 8부정도 가서 그 다음에는 모든 힘이 다해서 미끄러지는 그런 일들을 계속해서 되풀이 하는 것입니다. 얼마의 세월이 흘러도 신앙의 진전이 거의 없고 사역이라고 몇 년 하고 나면 망가진 사역과 XX처럼 찌그러진 영혼,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 그런 것들만 중복되어 남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을 살아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것이 숙명처럼 돌을 굴려 산에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굴려 내리고 굴려 내린 돌을 다시 끌어 올리고 영원히 그런 일들을 되풀이 했는데 그에게는 결코 한 번도 그 산위에 돌을 올려놓고 쉬는 평온함이 없었습니다. 미끄러지기를 반복하고 계속하니까 우리의 삶의 진전이 없는 것입니다. 수시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수시로 정말 일 년에 한 번씩 일 년에 두 번씩 일 년에 세 번씩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각성하고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계속 자다가 일 년에 몇 번씩 일어난 것입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법이 마음에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오늘 시편에 보니까 하나님의 법이 마음에 있기 때문에 실족치 아니 하였다고 시인이 고백합니다. 마음의 법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마음속에서 그 법이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도록 그렇게 자기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법을 보존하며 살았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가끔 뭘 사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저는 제일 곤란한 질문이 선물을 하고 싶은데 필요한 것이 있냐고 물어볼 때 가장 힘이 듭니다. 왜냐하면 필요한 것이 별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이 있어서도 그런 것이 있었겠지만 그렇게 꼭 가지고 싶었던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다가 마치 화살을 맞은 것처럼 저것 꼭 사고 싶다 그런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두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는 처음에 막 사고 싶은 것입니다.
(예화) 이번에 미국에 가서 백화점에 갔습니다. 그래서 보는데 도자기 그릇이 너무너무 쌌습니다. 보는 그 순간에 우리 집사람 생각이 났습니다. 왜냐하면 6명만 손님이 오면 그릇이 없습니다. 엊그제 보니까 4피스가 들어있는 도자기 세트가 있는데 12명을 한꺼번에 서빙 할 수 있는 세트인데 8만원인가 밖에 안 합니다. 그래서 사고 싶다. 들어보니까 한 30키로는 되었습니다. 그래서 너무 사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 싣고 갈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매니저를 불러서 비행기에 실으려고 하는데 되겠느냐 했더니 글쎄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확신하기는 어려운데 그럼 둘로 나누어서 싸가지고 기내로 들어가면 괜찮을 것 아니냐 했더니 그것은 괜찮을 수도 있겠다 해서 빨리 사야지하고 마음이 확 꽂혔습니다. 이것 사가지고 가면 집에서 얼마나 좋아할까? 이제 12명 손님이 와도 그릇은 충분하다 앉을 자리가 없어서 그렇지. 그래서 사야겠다 마음을 먹었는데 나하고 같이 간 형제가 “목사님 미국에서 박스 인쇄해서 담았으니까 기가 막히죠. 그러지 말고 목사님 더 돌아보시죠”. 그래서 이렇게 돌아봤는데 저쪽에 갔더니 더 이쁜 것이 있는 것입니다. 봤더니 접시 6개에 25만원 이었습니다. 그런데 내 것은 왜 104개나 되는데 8만원 9만원 밖에 안 되나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더니 “목사님 껍데기는 광을 미국에서 인쇄를 해서 이렇게 곱게 인쇄가 되었는데 사실 이 제품이 중국제입니다. 샘플을 한번 보시고 결정하시죠.” 그래서 한번 보자하고 봤더니 이건 아니었습니다. 전혀 아니고 접시 하나에 오백 원 줘도 살까말까한 접시였습니다. 그 순간에 사고자하는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마음에서 욕구가 강력하게 생겨날 때에는 다른 모든 것을 생각해서 그것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만 마음에서 욕구가 사라지고 나면 그 다음에는 거져 줘도 가져가기가 싫은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똑같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일 년에 몇 번씩 사경회 때 은혜를 받고 놀랍게 깨어났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은 깨어난 것만 생각이 나지만 주님이 보실 때에는 잠을 잔 시간이 훨씬 더 깁니다. 그런데 그것은 궁극적인 대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말씀을 마음 갈피에 불씨처럼 간직해서 그것이 계속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도 제대로 읽지 않고 그 성경 말씀을 빛을 삼아서 자신의 삶을 비춰보며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자기를 조명하고 참회하는 시간도 없고 또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아도 그것을 반복적으로 곱씹으며 그 말씀의 영향력이 자신 안에 영향을 행사할 틈도 없이 바로바로 잊어버리거나 기껏해야 지성의 창고에 가서 조용히 드러눕는 시체가 된 말씀을 간직하고 사는 삶을 통해서 우리는 성화의 진전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엊그제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이 세상에 책들이 수없이 많이 있지만 반복해서 계속 읽어야 할 책들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그 몇 십 권 안 되는 책들을 계속해서 반복해서 읽으면서 살아가는 사람 그것이 정말 훌륭한 삶입니다. 제가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를 4번을 사서 그리고 적어도 5번 이상 읽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첫 번 읽을 때 보다는 두 번째 읽을 때가 세 번째 읽을 때보다 네 번째 읽을 때 감동이 훨씬 크고, 계속해서 읽을수록 결국 그 내용들이 내 마음에 불을 붙이고 다시 그렇게 살게 해주는 효과 면에 있어서는 오히려 첫 번째 읽었을 때보다 더 강력한 효과를 불러일으킵니다. 그것이 바로 어떤 진리를 마음에 품은 효과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머리 큰 사람들의 나라가 아닙니다. 거룩하고자하는 사람, 거룩하게 되고자 하는 갈망이 없는 사람들이 개별적인 지식의 축적은 반드시 직접 소화 불량에 걸리게 만들고 그렇게 되면 음식을 잘못 먹었을 때에 피부에 이상한 두드러기가 돋고 문제가 일어나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이 소화 불량이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소화불량에 걸리고 나면 머리가 아픕니다. 그래서 가스가 나와서 뇌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고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화불량이 온몸 전체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지적 소화불량은 더 그렇습니다. 그렇게 해서 온몸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책을 읽고 말씀을 듣는 모든 것들은 결국 다른 목적이 아니라 우리의 거룩한 삶을 위한 것입니다. 일만 권의 책을 읽고 거룩한 삶을 꿈꾸고 성화의 언저리를 맴돌다 짐승처럼 죽은 사람보다는 열권의 책을 일고 하나님 앞에 더 신실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서 거룩의 길을 간 사람들이 훨씬 더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을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마음에 두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일 때는 말씀이 그 불씨를 지속적으로 자신의 삶속에서 일주일 동안 유지하도록 그 불씨를 간직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달은 내용들이 자신의 삶의 혈관 구석구석 스며들어서 자신 속에 역사한 말씀이 끊임없이 자신의 삶과 존재로 재창조 되도록 그렇게 마음을 기울이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정말 그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실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8. 열납하는 날에
“여호와여 나를 반기시는 때에 내가 주께 기도하오니 하나님이여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시69:13)
어느 쪽 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겠지만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 보 면 은 하나님이 특별히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시인도 열납 하시는 때에 기도 하겠다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그 앞에 보면 은 시인이 말할 수 없는 많은 어려움에 속에 처해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많은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아마 안으로는 자신의 죄와 그리고 밖으로는 감당할 수 없이 밀려드는 그러한 시험 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사랑하고 친근하게 지낼 수 있는 많은 교제들이 끊어졌습니다. 가까이 있던 사랑하는 사람들이 떠나고, 배신하고, 하는 그런 일 들이 이 시인에게 고립감을 더해 준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경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늘 원수가 있게 마련이지만은 이 시인에게 지금 이 시간에는 원수들이 힘을 얻고 기승을 부리는 그런 때였습니다. 이런 삼중의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 그의 영혼은 견디기 힘든 고통 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경건한 시인은 바로 그런 때가 하나님께서 열납 해 주시는 때라고 그렇게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세상의 물결에 떠나내려 갈 수밖에 없을 때 그리고 큰 환란과 어려움 속에서 스스로 그 물에 떠내려 갈 수밖에 없을 그때에 그 마음을 세우고 뜻을 정해서 믿음으로 살겠다고 결심하는 이것은 결심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님 앞에 참 아름답고 그리고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 신자들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매우 특별히 은혜를 베푸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늘 우리를 사랑 하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도록 지켜달라는 우리의 기도는 늘 되풀이 되지 마는 바로 그때 하나님의 이런 사랑과 긍휼 이 크게 나타나는 것은 신자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때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인이 그것을 경험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때가 바로 열납 하시는 때다 그런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을 살다가 보면 은 환란과 어려움이 차례대로 줄서서 오지 않고 포위해서 밀려오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우리의 영혼은 위협을 받고 그리고 우리의 마음은 매우 약해지기가 쉽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그 상황 속 에서 새로운 해석을 내릴 필요가 있는 것 입니다. 이때가 바로 주님이 열납 하실 만 한때이다 이렇게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특별한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기회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 말입니다. 그런 특별한 때에 열납 하실 만한 그때에 시인이 하나님 앞에 결심 한 것은 기도 하는 것 이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 기도 할 결심을 한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나서서 빨리 움직여야지만 되는 상황이 있고 기도를 하면서도 동시에 움직여야 되는 때가 있고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며 기도해야 할 때 가 있습니다. 그때가 어느 때 이던지 간에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기도의 은혜에 의해서 깊이 녹은 마음 그래서 우리 자신이 깊이 부서져서 그래서 그 주님의 마음이 그 모든 어려움 속에 놓여 있는 그 기도자의 마음속에 스며들 수 있도록 그렇게 약하게 되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황 앞에서 마음이 녹아내리면서 그때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그 녹아내리는 것이 우리의 마음에 있는 악한 찌꺼기까지 함께 태워서 마치 은혜를 재련 하듯이 그렇게 불순물들을 뽑아내는 그런 역할들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불같은 시련을 주십니다. 땅에 태어나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사람들 가운데 길고 넓게 펼쳐진 잔디밭과 같은 그 길을 카펫을 밟듯이 걸어가다가 편안하게 하나님의 나라로 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는 이제 막 신학교 들어가고 이런 어린 학생들을 보면서 크게 쓰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이렇게 신학교에서 가끔 보면서 웃음이 나옵니다. 그게 얼마나 피나는 고난의 길인지 아직 모르지요.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하기를 너는 하나님의 능력을 쫒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그러니까 하나님이 크게 쓰시는 사람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이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함으로 그 열납 하실 만한 때 에 그때마다 무릎을 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나가다가 어느 한순간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잘 나가다가 가슴을 찢으며 통곡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도록 만드시지요. 그렇게 안하시면 그들은 금방 교만해 진다구요. 탁월한 신앙의 사람이었던 아사나 히스기야, 요시야 ,이런 사람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도 교만해서 넘어집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인간이 연약한 존재인가 하는걸 아시겠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다루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인이 바로 그 열납 하시는 때에 그래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로 다짐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응답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응답을 기대하고 있는데 그 응답이 뭐냐면 하나님의 인자와 구원의 진리였습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구원의 진리였습니다. 여기서 인자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슬픔이 어린 자비한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많이 사랑하면 슬퍼지는 것입니다. 아파지지요. 사랑하는 사람이 고생을 하면 참 마음이 아프지요. 우리들이 주님을 사랑하면 눈물이 많아지잖아요.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뤄지다. 앞에 나가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나라에 임하옵시며 이런 모든 기도가 결국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아픔을 헤아리는 기도란 말입니다.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기대 했던 것이 바로 이런 사랑입니다. 인자 하나님에게 있는 인자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서 열납 할 만한 때에 엎드린 자신에게 응답 해 주실 것을 기대 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제일 소중한 것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 주님의 은총 하나님의 자비 그분의 사랑하심 이것이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 한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주님께 사랑 받는다는 그 마음이 결국은 우리 모든 섬김의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구원의 진리로, 하나님의 진리로 자기를 건져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때가 어느 때 이든지 간에 평탄할 때이든지 환란이 많을 때이든지 고난이 겹칠 때이든지 미혹 받을 때든지 세상의 염려와 근심으로 마음이 상한 때든지 언제든지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그들을 건져내십니다. 말씀으로 그들을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깊이 하나님을 마음에 담으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이 그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던지 간에 그 말씀으로 우리를 건지신다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러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 막혀도 좋으니까 하나는 막히지 말아야 해요. 계속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깨달음의 빛 그리고 생각이 그 빛을 붙잡고 그것이 우리의 삶 속에 온전히 적용해서 우리가 더 슬기로운 자들이 되고 한걸음 더 나가서 마음이 그 빛을 온전히 사용해서 그래서 우리가 살수 없는 삶을 우리 안에 빛을 주신 주님께서 사실 수 있도록 그렇게 하는 그 하나의 작용, 그것은 우리에게서 떠나가지 말아야 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의 모든 삶과 우리의 모든 기대는 수포로 돌아 갈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매 순간 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뜻대로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생사 간에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있어서 전부가 되시도록 그런 삶을 우리들이 살아가야 합니다. 봄입니다. 모든 것이 다 좋은 그런 계절이 아닙니까? 정말 새 힘을 얻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그렇게 살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9. 경건한 불안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으며 내 영혼이 위로받기를 거절 하였도다 내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셀라)”(시77:2-3)
신앙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이 환난이라고 하는 것이 단지 사업의 위기를 만난다든지 건강을 잃어버린다든지 커다랗게 명예가 실추당해서 고통을 받는다든지 그런 외적인 것이 아니라 점점 내적인 것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것이 정상적이 영적 성장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환란과 많은 어려움들 또 거기에는 대부분 반드시 우리의 죄의 결과와 결탁되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내적인 죄의 뿌리를 보게 하시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그 환난과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그런 환난이 계기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그러면서 무너진 마음과 영혼의 틀들을 회복하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쇄신의 기회를 갖게 하시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도 하나님께서는 때로 그들의 죄를 그냥 묻어두지 아니하시고 그 죄가 어떤 환난으로 연결되게끔 만드셔서 그래서 쇄신의 기회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신앙이 깊어지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성장하게 되면 자신 속에 있는 죄가 바깥으로 악이라는 고통으로 들어나서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커다란 환란을 불러오기 전에 자기 안에서 자라나고 있는 쓴 뿌리들을 보게 하시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들이 마음과 영혼에 은혜로운 틀들을 허물고 요동치면서 밖으로 산출되려고 하는 그래서 환난과 시련 같은 것들을 가져오게 하려고 하는 그런 기도들이 이미 마음속에서 잃게 된단 말입니다. 그 때 이미 벌써 경건한 사람들은 이미 환난이 자신 속에 도래 했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윗을 비롯한 시인들이 시편에서 큰일을 만난 것처럼 괴로워하고 하나님 앞에 당장 주님이 도와주시지 않으시면 나는 이 인생길에서 쓰러져 죽을 것 같다고 할 때 배가 고파서 그러거나 전쟁이 나서 그런 경우도 있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많은 경우는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것처럼 자신 안에 일어나고 있는 이 특정한 죄의 성행 그리고 쓴 뿌리들을 보면서 그것이 가져올 미래의 결과를 보고 경건한 두려움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을 그렇게 강력하게 호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원래 이 시인의 기도도 그런 내적인 깊은 성찰 속에서 우러나온 기도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물론 그런 기도를 드리게 된 계기에는 환난과 시련이 문자 그대로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 경건한 시인은 문맥 전체로 볼 때 단지 환난을 물러가게 해주셔서 내 고통을 잠재워 달라거나 시련을 떠나가게 하므로 다시금 내 육신을 만족시켜 달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뭐라고 그랬냐면 이제 하나님의 은총이 다하였는가. 이제는 하나님이 나를 생각하시지 않는가. 마치 아가서 3장에 나오는 내가 사랑함으로 병들었다고 전해다오 라고 한 것처럼 2장에 나오는 그렇게 그런 고백을 여기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것은 죄와 더불어서 싸우고 있는 신자의 경건한 내면의 세계에 투쟁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환난과 시련을 당하면서도 그 의미를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에요. 그래서 커다란 환난과 시련을 당하는 데도 근거 없는 낙관에 사로 잡혀서 누구도 이런 일을 당했는데 살다보면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는 거지 하면서 심지어는 마음에도 없는 감사를 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전적으로 곡해하는 것이다. 가지 않는 말을 향해서 마부가 채찍을 내리칠 때 말이 그 채찍의 의미를 깨닫고 달려 나가면 적게 맞으려니와 그 채찍에 맞으면서 온 몸에 피가 흐르는데도 다 말의 생애가 이런 거지 이런 말도 있는 거지라고 생각한다면 마부가 그 말을 죽여 버리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제일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환난이 이미 시작되었는데도 그 속에서 자기의 영혼 속에서 일어나는 일과 그 환난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 다시 말하면 환난이 일어나는 상황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고, 하나님의 그 부정적인 평가를 불러일으키기까지 자신의 내면에 어떤 경향이 있는가 하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미 자신을 안 기뻐하신다는 증거를 삶 속에서 많이 보여 주시는데도 그것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가질 수 없고, 이 시인처럼 절대 절명의 갈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총이 다 하였는가. 이것은 믿음이 없는 불안이라기보다는 경건에서 오는 불안입니다. 약간의 의심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워낙 갈망하는 나머지 경험하는 그런 불안입니다. 그래서 즉시 시편 뒤에 보면 시인이 자기의 그런 것들을 잠재우면서 믿음으로 그것을 극복해요 이것은 나의 연약함 때문이다 사실은 하나님이 그러실 리가 없다 그러면서 믿음에 호소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밖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은 의미가 없는 일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삶의 환경은 모두가 연결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돌아가신 김희보 목사님이 수업시간에 항상 기도를 하면 그렇게 기도하셨어요. ‘하나님 이 학생들이 학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후고에 염려가 없이 신학에 정진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그랬더니 어떤 전도사가 “후고가 뭐야” 후고가 뭐냐 하며 뒤 후( )자에 고는 뒤돌아볼 고( ) 자인데 내가 신학을 하는데 집에서 가정에 풍파가 있고 경제적으로 쪼들리고 애가 아파서 병원에 응급실로 실려 가고 아내가 마음이 상하고 우울증이 걸려서 정신병원에 왔다 갔다 하고. 이러면 신학이 안 되잖아요 그게 다 후고의 염려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그럴 수가 없잖아요. 다 자기의 문제이니. 그러니까 목사님은 항상 많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눈뜨고서 그 목사님 생각이 참 간절했지요. ‘후고의 염려가 없이.’ 당신도 후고의 염려 속에서 많은 고난 속에서 공부를 하셨지요. 그러니까 후고의 염려가 없이 해달라고 기도하시는 목사님은 그 분 한 분 뿐이었어요. 그 후로 나도 늘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후고의 염려가 없이 해달라고
그런데 자꾸 뒤를 돌아보게 하는 상황이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나에게 자꾸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런 후고의 염려가 하나도 없이 몰두를 해도 능력이 모자라서 잘 안 되는데 후고의 염려가 자꾸 생기는 것입니다. 은혜 받고 신앙생활 잘 하던 아내가 자꾸 바가지를 긁기 시작하고, 애들이 자꾸 마음을 갈리게 하고, 그리고 가정에서 동기간들이 불화해서 자꾸 신경을 상하게 만들어요. 이런 일이 자꾸 일어나니 후고의 염려가 생기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거 없이 몰두해도 지금 능력이 모자라서 될까 말까인데 안 되거든요. 집중이 안 되거든요 그러니까 자꾸 하나님 앞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날 때에는 그 무언가를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그리고 이걸 통해서 하나님은 나에게 뭘 보여주시고 싶은 것일까 또 그런 후고의 염려가 없다 할지라도 사역을 하면서 열매가 많아야 되거든요. 그래서 그게 얼마나 중요 했으면 예수님께서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나의 제자가 되고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라고 했는데 거기에서 이야기 하는 열매는 오늘날 생각하는 것처럼 업적주의적인 그런 열매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녜요. 거기서 이야기 하는 것이 무어냐 하면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거하면 과실을 많이 맺나니.’ 그러니까 그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의 연합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의 결과라고 그랬어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원리적으로는 연합되어 있지만 실제적으로 연합은 순결하고 온전한 사람에 의해서 촉진됩니다. 그래서 원리적으로는 여러분이 모두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서열이 있어서 맨 앞에 설 사람이 있고 맨 뒤에 설 사람도 있으니 절대로 똑같지 않아요. 똑같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성화의 정도에 비례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순전한 상태가 또 필요합니다. 그것은 불변이 아니라 항상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지요. 어제 이룬 기초위에 오늘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어제는 어제이고 오늘은 오늘입니다. 그래서 항상 현재적인 은혜 속에서 살아야 하는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역의 열매가 없다면-단순히 등록을 많이 하느냐 적게 하느냐 그런 문제가 아니라- 열매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없다는 것입니다. 농사를 지어 보신 사람이면 이해하실 수 있을지 모르지만 모든 것이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땀을 많이 흘린 농부가 추수를 많이 합니다. 그리고 게으른 자의 밭은 잡초가 우거집니다. 똑같은 조건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부지런히 일해도 열매가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축복이 없이 일할 때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 안에 있는 사람들의 부지런함을 기뻐하시는 것이지 당신 안에 없는 사람들의 부지런함을 기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부지런함에 대해서 게으름에 대해서 우리가 몇 달 동안 쭉 들었잖아요. 다음 주 다다음주에 책이 나오겠지만.
이번에 유럽을 여행하면서 하나님이 싫증에 대해 많이 열어 주셨는데 그중에 한 깨달음은 ‘육체가 게을러도 영혼이 싫증을 느끼지 않고 열렬하면 쳐서 복종이 됩니다. 그런데 육체가 아무리 부지런해도 영혼이 싫증을 느끼면 어떤 결과가 오냐 하면 사역은 성실하게 하는데 분발함이 없고 새벽기도는 꾸준히 나오는데 마음을 쏟아놓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은 몸에 배어서 꼬박꼬박 하루에 넉 장씩 읽는데 아무런 깨달음도 없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뭐냐 하면 있으나마나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엄밀한 의미에서는 육체가 게으르면 영혼이 싫증을 느낄 때 확 잡아 채가지고 연자 맷돌을 목에 건 것처럼 물속에 빠뜨리는데 열렬함이 살아 있으면 게으른 육체를 채찍질해서 할 일을 한다. 이것입니다. 그런데 육체가 아무리 부지런한 습관이 배어 있어도 영혼이 열렬함을 잃어버리고 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가장 좋은 건 영혼이 싫증을 느끼지 않은 열렬함이 있고, 거기에 육체까지 부지런해서 순종을 하면 그건 기가 막히게 좋은 것입니다.
교회도, 지도력도 마찬가지예요. 지도자의 가슴이 열렬하면 게으른 일꾼들을 채찍질해서라도 갈 길을 가요. 100미터를 가려고 했지만 30미터밖에 못 갈수는 있지만 지도자가 열렬하면 갑니다. 아무리 게으른 사람들이 있어도 채찍질 하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도자가 게으르고 싫증을 느끼면 슬하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부지런하게 하려고 해도 교회 전체는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냥 바쁘게 돌아갈 뿐이지 진전을 안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비참한 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없이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표징들이 많이 나타나요. 그런데 그걸 인식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해결책만 내놓는 것입니다. 제도 위에 제도를 만들고 방법위에 방법을 만들고 물론 그건 필요합니다.
(예화)그래서 그 지난번 이야기 했지만 ’나는 외과의사다 ‘ 그 사람이 외과의사 자격이 생기겠냐고요. 사자 같은 신자. 왜냐하면 설교자로서 ’나는 외과의사다’가 아니라 ‘나는 목사다’라고 써야 되겠다고 생각이 되더라고요. 담대한 사자의 심장이 있어서 멀쩡해 보이는 사람에게 ‘너 뚜껑 열어야 돼’그리고 톱으로 두개골을 확 잘라서 뚜껑을 확 열 수 있을 정도의 담대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독수리 같은 정확한 눈-이건 복음 교리에 대한 지식이지요―그리고 여인의 손길-이게 skill이죠- 목회의 기술입니다. 기술만은 아니지만 반드시 하나님은 기술을 사용하셔서 하십니다. 인격적으로도 메시지에 있어서도 깊이 동의 할 수 있는 사람들인데 사실상 목회 현장은 건강하지 않은 경우가 있어요. 그건 목회 기술의 문제입니다. 수술을 할 때에는 수술 하는 칼은 한번 쓰고 버린대요. 갈아서 쓰는 게 아니라. 왜냐하면 수술하는 칼은 부엌칼처럼 서너 번 긁어야지만 살이 찢어지는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다. 내장에 들어가서 심장 같은 것을 수술하는데. 한 번 쓰고 다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리한 칼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세미한 기술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방법을 만들어 내야지요. 뭐가 안 되면 대책을 세워야지요. 당연하지요. 그래서 내가 항상 문제가 꼬이면 “대책이 뭐냐 대안이 뭐냐” 정확한 상황에 대한 분석, 그리고 반성과 대안. 그러면 되잖아요. 그래도 대안이 안 될 경우 다시 반성하고 또 다른 대안. 또 다른 대안. 그래서 그 부정적 상황이 종료 될 때까지 숨질 때까지 그렇게 해야 되요. 그러면 어느 한 순간에는 그런 모든 방법을 세우는 데도 안 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 땐 어떤 생각을 해야 되냐 하면 정말 방법은 최선이지만 최선의 하나님의 축복이 주어지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목회를 해 보면 선배 목사님들이 목회는 내가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그게 실감이 나요. 왜? 어떤 때는 쫓아다니며 사정을 하고 똑바로 믿어라 그러지 마라 내 얼굴을 봐서라도 교회 나와라 밥 사줄게(특히 중고등부는 잘 그러지요)빵 사주고 밥 사주면서 많이 꾀잖아요. 그런데 중학교 1학년 때 까지만 통하더라고요. 그렇게 해도 안 되는데 어떤 때는 너무 사역이 바빠서 일에 몰두하고 있는데 소식이 들리는 것입니다. ‘목사님 아무개 그 생짜배기 변화되었답니다. 아무개 누구 회심 전야랍니다. 누가 마누라가 하도 교회 가서 안와서 성질이 나서 저녁예배에 왔는데 그날 폭탄 맞고 졸도했습니다.’그런 소식이 계속 들어오는 것입니다. ‘너무 완강해서 찔러도 바늘도 안 들어가던 사람이 목사님이 심방하고 나서.’ 이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축복이 우리에게 계속 따라다녀야 해요.
그럼 마지막으로, 그럼 어떻게 그런 축복이 따라다니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되겠는가. 그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존재가 하나님의 관심을 끌어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의해서 이걸 잘 보여 주는 거지요-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그것입니다. 아모스서 2장에서도 ‘내가 나의 종 선지자에게 내가 하고자 하는 비밀을 보이지 않고 내가 행하는 적이 없다.’ 그게 뭐냐면 당신의 종인 선지자와의 말할 수 없는 친밀한 연합의 관계에서 오고 가는 그 비밀 -히브리말로 쏘우드거든요. 아주 은밀하게 귀에 속삭이는 국가 기밀 같은 거란 말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겁니다. 어떤 사람에게? 비밀스런 사랑을 가진 사람에게 밀어를 속삭이듯이 당신의 미래에 행하실 위대한 일들에 대한 쏘우드를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나님께로부터 뭔가 쏘우드를 전수받는 그런 것 없이 사역을 하는 것은 정말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이 시인과 같은 고민을 가져야 해요. 왜냐하면 일이 안되고 뭐가 안 되어 항상 한 쪽으로 치우치고 말아요. 한쪽으로는 정확하게 객관적인 이성으로 분석을 해야 되요. 왜 이럴까 정확하게 분석을 하고 주님 주신 이 지혜를 가지고 처방을 내려야 해요. 그걸 연구해야 되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또 더 본질적으로 해야 될 것은 무엇인가 하면 내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지 못하면 어떻게 할까 그리고 나의 어떤 것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안 기뻐하고 계실까? 그리고 그러한 상황이 계속 된다면 내 사역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없을 텐데 어떻게 하나? 그 문제를 깊이 고민해야 되요. 그러면 우리들이 뒤로 물러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러한 고민은 곧 무엇을 의미하냐하면 기꺼이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의미하고, 기꺼이 십자가를 질 준비를 의미하고, 그러면 그럴 준비가 이미 이 속에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의 싫증을 극복하는 가장 중요한 비결이 뭐냐 하면 -여러 가지가 있는데-가장 중요한 비결 가운데 하나가 뭐냐 하며는 인생의 목표를 재설정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 앞에 이렇게 사역하게 된 것- 귀하지요. 그리고 교회를 하는 것도 귀하고요.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아서 이런 저런 모양으로 섬기는 것도 귀하지요. 그러나 그것보다 더 귀한 것이 있습니다. 그분의 사랑을 받으면서 이 세상에 존재해야 되는 것보다 더 귀한 가치는 없어요. 하나님께 사랑을 받지 못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있을 수도 없거니와 또 있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나에게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악인으로 살다가 준엄하게 심판을 받아서 그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이 엄위하신 분이라는 것이 내 인생을 통해서 드러나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는 것 그런 삶을 여러분은 원하시나요?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전해주는 중요한 도구가 되어서 내가 전해준 죄 때문에 다른 사람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빛나게 하는 존재가 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성경은 엄밀하게 그런 것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아요.
그 하나님 앞에 자신의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깊이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어떠한 것이 하나님을 안 기쁘게 하는 것인가? 여러분들이 하는 많은 사역은 본질적으로 죄와의 싸움이 아니기 때문에 그 사역을 통해서 여러분 안에 있는 죄를 죽일 수 없어요. 우리 안에 있는 죄는 자신을 직접 공격하지 않는 한 모든 것에 대해서 관용해요. 목회를 하든지 뭘 하든지 간에.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그런 고민을 해야 해요. 그러면서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존재가 되지 못하는 이유가 뭔가 왜 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존재가 되어 있을까 왜 그럴까 그런 것들을 고민하는데 이 시인의 자세를 보면 그냥 고민하는 정도가 아니라 타들어 가는 것 같은 갈망을 가지고 고민 합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맘에 안 드신다는 살을 깎고 뼈를 잘라서라도 주님의 맘에 드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런 갈망을 가져야 해요. 그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급속하게 고쳐 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기뻐하시기 시작할 때 다시 우리를 기뻐하신다는 증거를 우리의 성경과 모든 삶 속에 드러내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살아가는 삶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돌아가야 할 창조의 원래의 목적입니다. 그것을 따라서 살아야 됩니다.
그래서 이제 여름이 지나가고 나니까 이제 갑자기 옷깃을 여미게 되죠. 이제 석 달 밖 에 안 남았어요. 11월에 사실상 우리가 마감하니까. 9,10,11. 이제 어떻게 할까 그래서 또 우리들이 일 년을 본 다음에 눈물을 흘리면서 열심히 뿌리지도 못했다고 회개하거나 뿌렸는데 열매가 없었다고 말하거나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좀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요. 사역은 조금 줄이더라도 자기를 깊이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고 그래서 저녁때 따로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다든지 깊은 밤에 그런 시간을 갖는다든지 그러면서 자기를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으로 다시 세울 때 정신없이 뛰어다니면서 사역을 할 때에 도저히 거둬들일 수 없었던 그 열매들을 하나님께서 다시 부어 주신단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0. 주를 아는 것 의지하는 것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시9:9-10)
소돔과 고모라성의 모든 백성들을 멸망시킬만한 유황과 불비가 내릴 때 롯이 피했던 곳이 ‘소알’ 이라고 하는 작은 성이였습니다. 아마 높은 지대에 있는 이 성으로 하나님께서 피난 할 것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성을 쌓아서 자기를 보호했습니다. 성에는 재성과 나성이 있는데 하나는 큰 지역을 막는 성이고 또 하나는 특정한 장소를 에워싸는 성입니다. 산성은 바로 그 후자 가운데 하나인데 지형지물을 이용해서 외적의 접근이 불가능 할 위치에 성까지 쌓아서 마지막 자신을 보호하고 적에 항쟁하는 그런 장소로 사용을 했었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환란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산성이 되신다고, 압제를 당할 때에 하나님이 자신의 산성이시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압제가 없는 것은 아니고 환란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탁월하신 보호 때문에 환란의 물결이 치고 압제하는 자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가득하지만 대적들이 자신의 요구를 하나님의 백성인 시인을 향해 이룰 수 없었던 상황을 문학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런 대적들이 자신의 소욕을 이룰 수 없도록 산성이 되어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인은 말합니다. 주를 아는 자들은 주를 의지하리니 주께서 저희를 지키실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에게 산성이 되신다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동네마다 도피성이 있었습니다. 부지중에 실수해서 사람을 죽인 자가 도망을 치는 그 도피성 말입니다. 사람을 실수로 죽였을 때 자신의 가족을 죽임당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타오르는 복수의 불길은 가장 진노한 대적의 마음일 것입니다. 생명에는 생명으로 갚으라는 율법의 요구를 이행하기 위해서 대적 자들이 부지중에 오살한자를 찾아 나설 때 그에게 있어서 유일한 희망은 빨리 달음질하여 산성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 도피성에 들어가면 부지중 오살한자만 용납하고 복수심에 불타는 대적을 맞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런 도피성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심지어는 구약의 율법에 기록된 도피성은 반드시 부지중에 오살한자만 용납되었고 의도적으로 죄를 지은 자들은 성 밖으로 내침을 당해서 원수들에게 진멸당하도록 율법에 규정되었지만 새로운 도피성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죄인들을 당신에게 피할 수 있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하나님께로 피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대적과 그리고 환란으로부터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일언반구도 압제자를 죽여 버리신 다든지 환란의 비바람이 멎게 하신 다든지 하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압제자는 여전히 압제하기 위해서 삼킬 자를 찾고 환란은 여전히 물결처럼 요동치며 삼킬 자를 구하고 있습니다. 환란의 풍랑도 그대로 일어나고 압제하려는 대적자의 힘도 그대로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산성이 되어주셔서 도피하게 하심으로서 원수들의 요구를 이루지 못하게 하신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마치 하나님이 환란보다 힘이 약하신 것처럼 압제자보다 더 연약하신 것처럼 압제자를 피하여, 환란을 피하여, 그것들은 그대로 일어나게 버려두시고 우리만을 보존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주님이 압제자를 이기고 환란을 제어하실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지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수많은 사람의 가슴에 특별한 인상을 새겨주었던 사건이 풍랑 이는 바다를 잔잔케 하시는 사건 이였습니다. 만약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풍랑이 이는 그 큰 바다를 고요하게 하실 수 있다면 그 풍랑보다 훨씬 작은 인생의 파도쯤이야 얼마나 더 한순간에 잔잔 하라 는 말씀으로 평정하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경우에 환란을 당하고 압제를 당하는 우리들을 구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그 환란의 풍랑과 압제의 칼바람 소리를 그대로 듣게 하시면서 당신의 생명 싸게 안에 우리를 품고 건지심으로서 우리를 구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의 목적은, 우리들이 하나님께 피한 목적은 압제하는 자를 벗어나고 풍랑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우리의 목적 이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 압제와 풍랑을 통해서 당신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고 그리고 그분께 생명처럼 붙어있어 연합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에 있어 가장 커다란 행복이며 그리고 가장 안전한 삶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고 싶어 하십니다. 어린아이를 앉고 파도치는 깊은 바다 속으로 들어가 보셨습니까? 좀 더 들어가면 들어 갈수록 어린아이는 아빠의 목을 강력하게 끌어 앉습니다. 환란 가운데 산성이신 주님이 우리를 도피하게 하실 때에도 이런 원리를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환란이 여전히 일어나고 압제하는 자의 칼 바람소리 가 우리주위에 가득하게 내버려두시고 우리를 앉고 그 풍랑과 압제의 한복판을 지나게 하심으로서 우리가 주님의 목을 꼭 끌어 앉고 우리 인생의 가장 곤고하고 위태한 때를 지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세상은 비관하며 살기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세상에서의 분깃, 우리에게 주신 섬김, 어제 죽어간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내일을 오늘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살게 하시는 이 하나님의 축복! 이런 것 들을 모두 즐거워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전도서에서 죽은 사자보다는 산개의 행복을 노래했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래서 늘 감사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해서 과도한 기대를 가지고 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윌리엄 로우’ 는 청교도적 정신을 가진 국교도 이었습니다. ‘크리마 크스’ 라고 하는 사람은 같은 시대의 신비주의 자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온전하고 완전한 삶을 추구했던 뛰어난 하나님의 사람들 이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두 사람의 생애를 연구하면서 공통점을 이야기 합니다. 그들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완전해지기를 갈망하며 살았지만은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이 세상의 삶에 공들인 만큼 죽음에 대해서 치열하게 생각했던 사람들 이였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의 어두움이 아니라 죽음의 빛을 통해서 삶을 비춰본 사람들이 삶의 빛을 통해서 죽음을 비춰본 사람들보다 훨씬 슬기롭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의 시속에서 ‘내 주밖에 나의 분깃이 없나이다’. 고백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그런 마음을 갖고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때론 우리에게 압제도 보내시고 환란의 칼바람 소리도 듣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배신도 당하게 하시고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게도 하시고 그리고 존귀 히 여김을 받았던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영광을 잃어버리고 이 땅에서 짓밟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게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과정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향하게 하시고 싶으신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두 가지인데 그것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주를 알게 하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우리로 하여금 그를 의지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시인은 오늘 말하기를 ‘주는 아는 자는 주를 의지 하오리니 ’주님을 아는 것만큼만 주님을 의지하지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주님을 의지 할 수 없습니다. ‘뻬네롱’ 이라고 하는 불란서의 유명한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아미 십 팔세기 사람 인 것으로 제가 기억을 하는 데 그는 자신이 쓴 책 한권에서 이런 이야길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 갈 때 우리에게 가장 커다란 대적은 주님을 위해서 게으르게 산다든지,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소홀히 한다든지, 열정이 모자란다든지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주님을 섬기면서 살려고 할 때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커다란 문제는 우리 자신의 꺽 이지 않는 완고함이라고 말했습니다. 때로는 그 완고함을 따라 잠시 사는 일을 위해서 영원하시고 존귀하신 하나님의 의지를 꺽 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으며 하나님마저도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경배를 받아야한다고 규정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의지하는 마음을 기뻐하시는 이유는 바로 이 의지하는 마음속에는 그런 완고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상하고 통회하는 자에게 가까이 계시고 중심에 아파하는 자들 곁에 계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온전한 삶을 산 도덕적인 사람보다는 오히려 부도덕하게살고 깨어진 심령을 가진 사람들이 주님을 더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요. 쓰레기와 같은 인간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자부심을 가지고 주님을 섬겨온 사람들보다 훨씬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이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열 번 받으실 경배를 딱 한번만 받으셔도 당신이 원하는 대로 당신께 순종하는 경배 자를 통해 경배를 받고 싶어 하시지 제 멋대로 자신이 규정한 방식대로 열 번의 경배를 받기를 원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시인의 고백대로 하나님은 생각하시지요. ‘내가 주릴지라도 너희에게 고기를 구하겠느냐 ’온 천지가 모두 주님의 것이고 주님 그 자신의 성품이 모자람이 없으신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누구도 주를 의지하는 마음으로 깨뜨려지지 아니하고는 그가 하는 모든 일을 통해서 그가 하고 있는 인생의모든 계획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렇게 살아야합니다.
‘쌀레’ 라고 하는 한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글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이제 이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고 이제 이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그분의 뜻대로 사는 것을 내 인생의 최고의 영광으로 알고 살겠습니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완전을 추구할 것이며 그분의 마음에 들기 위한 삶을 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릴 것이다. 그러나 피할 수 없이 내가 이 모든 일에 실패하는 때가온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즉각적으로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의 공로를 의지하여 다시 그분께 용서를 구할 것이며 애초에 살기로 결심했던 그 삶으로 돌아갈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메마르고 건조 할 때뿐만이 아니라 충만하고 주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 더더욱 주님을 의지해야하고 그리고 주님을 부르는 그 의지는 우리의 삶에 매순간 계속되어야합니다. 아침과 그리고 저녁에 드리는 기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매순간 마음의 무릎을 꿇고 손을 모으고 주께서 분초마다 붙들어주시기를 구해야하고 주님이 붙들어 주실 그때에만 주님의 사람으로 살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주님을 많이 의지하게 되면 우리는 이 세상에 우리들이 누리면서 살 수 있는 것들 보다는 사실은 경계하고 두려워하면서 살아야 할 것들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들로부터 받는 인정도 어느 한순간에 우리에게 올무가 될지 모르고 심지어는 주님이 우리의 사역으로 주시는 그 복도 언젠가는 우리에게 덫이 될지 모릅니다. 심지어는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달은 이 은혜도 우리에게 얼마나 커다란 덫이 될지 모릅니다. ‘리전트 칼리지’를 나온 아주 신실해 보이는 한 작가가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리전트 칼리지’ 앞에는 편의점이 하나있었는데 음료수 사 먹을 때라곤 딱 거기하나밖에 없데요. 그래서 달려가서 음료수를 사먹는데 하필 그 음료수 사먹는 그 앞에 포르노 잡지가 쭉 진열이 돼있데요. 처음에는 눈을 돌리고 먹었는데 자꾸 눈길이 가면서 그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전에는 ‘제임스 파커’ 의 장엄한 로마서 강의를 듣고 점심땐 거기 가서 포르노 잡지를 곁눈질 하면서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강의시간에도 그 상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아 그래서 이 사람이 참 신실한 사람으로 여겨지더라고요. 어느 날 그 편의점에 갔다 나오면서 두 손을 높이 들고 소리를 질렀대요. 내 이 세상에서 이놈의 편의점이 음료수를 구할 수 있는 마지막 남은 편의점이라고 하더라도 때려죽여도 다시 이집에 안 간다. 그리고 그 순간 승리의 환희를 맛본 것입니다.
근데 그날 저녁에 차를 타고 갔는데 자기가 그렇게 유혹을 이겼는데 주님과 가까이 다가갔다는 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것입니다. 운전대를 붙들고 간절히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더래요. 그게 뭐냐면 그 유혹을 이긴 순간부터 계속해서 마음속에 가득 찬 생각이 뭐냐면 나는 이겼다! 나는 이겼다! 그러니까 쓰레기차를 피하려다가 쓰레기차는 피했는데 똥차하고 부딪친 것입니다. 자긴 이겼다라고 하는 이 확신과 그리고 자기가 이 유혹을 이겼다라고 하는 자신의 의에 대한 확신이 더 큰 죄가 되어서 유혹은 분명히 이겼는데, 양심은 깨끗해졌는데 그것뿐이고 예전에 주님과 느끼던, 오히려 유혹을 받으면서 주님을 의지할 때 느꼈던 그 친밀함이 없는 것입니다. 전 그 부분을 읽으면서 무릎을 쳤어요. 야! 정말 맞다. 여러분! 공허한 승리를 경험해 본적 없습니까? 많습니다. 그렇구나. 그러니 이 세상에서 우리를 의지하며 산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래서 우리의 삶은 항상 둘 중에 하나, 유혹에 지고 넘어져서 죄에 짓밟히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피하고 이기고 나서 자기 의로 뿌듯해져서 또 다른 죄에 빠져서 주님에 대한 의존의 감정을 잃어버리거나 둘 중에 하나잖아요. 그래서 깊이 생각하게 되었어요.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이하 생략 !)
그래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매순간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야 해요. 정말 그래야 합니다. 저는 최근 몇 주 동안 저자신이 주님이 제게 요구하시는 완전이라는 표준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있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진실이고 우리의 욕망을 따라 살려고 하는 것도 진실입니다. 거짓된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나 사실은 그 두 가지가 함께 너무나 자주 공존할 때 우린 그것을 거짓이라고 말해요. 그래서 하나님을 정말 목마르게 사랑하는 사람들, 주님 안에서 우리에게 제시된 그 온전함의 표준에 이르기를 말할 수 없이 갈망하던 사람들, 그들은 모두 이 세상에 대해서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던 사람들 이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얼마나 기쁜 일이 많았습니까. ‘마게도니아’ 교회의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희열에 떨면서 좋아하지 않았습니까? 환란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극한 가난 속에서도 저희의 기쁨으로 말미암아 넘치도록 헌신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뻐했습니까? 자기의 동료들과 함께 주님을 섬기는 것을 얼마나 행복해 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욕망을 더 좋아했습니다.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것이 좋았습니다. 어떤 동역 자가 제게 목회가 무어냐고 묻길 레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한 것이 목회라고 말을 했었는데 최근에는 신자의 삶이 무엇이냐 물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 때문에 또한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한 것이 신자의 삶이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괴롬과 죄가 있는 이 세상보다는 그 나라를 끊임없이 갈망하고 그래서 주님을 매순간 의지하지 않으면 그런 소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안전하게 그 항구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야합니다. 그래서 더 많이 주님을 알아가고 주님을 의지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11. 감사하는 자에게 나타나는 선하신 하나님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찌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34:8)
다윗이 일생의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기에 남긴 고백입니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사실 우리가 인생을 살다가 보면 하나님이 선하시다 라는 사실은 우리의 지성 속에서는 이해가 되지만 그 선하심을 누리지 못할 때 그 때에 우리는 많은 불만과 불평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행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린의 진정한 만족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계획과 뜻들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데서 만족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밖에서는 어떠한 만족도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사실은 못 누리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자기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계획을 다 받아들일 마음이 사라지게 되자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도록 주셨는데도 그 무엇인가 매우 부족한 갈망을 느끼게 되었고 그것이 범죄가 되었습니다. 다른 곳에는 어떠한 만족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을 맛보아 안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을 받아들인 사람들뿐입니다. 그 사람들만 하나님의 선을 맛보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들이 하나님이 자신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물론 우리들은 죄를 짓거나 하나님 앞에 미끄러진 것이 계기가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용서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자기가 지금 붙들고 있는 죄가 아니라 이전에 지었지만 지금은 그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만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이 그에게 경험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그 사랑을 맛보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똑 같이 하나님의 선하심도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참 선하시구나 이제껏 나의 길을 돌아보고 나니까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시구나 그리고 그 길이 비록 그때에는 나에게 만족을 못 주었지만 그러나 가장 좋은 길이었구나 이렇게 고백하게 될 때는 언제냐 하면 하나님 앞에 반항하고 살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다 받아들이고 그 뜻을 모두 받아들여서 거기에 복종하면서 사는 것이 내게 기쁨이 될 때 그 때에 하나님의 선하심이 맛보아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즐거워할 때 하나님이 정말 선하신 분이구나 하는 것이 신자의 마음 안에 경험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인생의 가장 곤고한 시기를 지내면서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자 흉내를 내면서 자기의 목숨을 노리는 사울의 일당들의 추격을 피했습니다. 그런 살아있는 것 자체가 치욕스럽고 아주 고통스러운, 자신의 어떤 허물도 발견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치욕을 발견할 때 그 때 거기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았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부족한 것이 없이 모든 것을 후히 주셔서 누리게 하실 때에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결핍과 고난 치욕과 깊은 시련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것을 통해 알게 되는 교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 되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 자기를 향해 가지고 계신 모든 계획과 뜻 앞에 부복하여 무릎을 꿇는 자기 복종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이 자기 인생을 향해 가지고 계신 모든 계획을 부복하며 모두 받아들이고 그 뜻이 자신의 인생을 통해서 풍족히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내에 맡길 때 surrender 할 때 그 때에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에게 맛보아지는 것입니다. 평탄하고 하나님이 번영하게 하시고 많은 이 세상과 하늘의 자원을 주시고 형통하게 할 때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은 맛보아 질 수 있고, 아무것도 없고 심지어는 사방을 두루 보아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 하나 없는 깊은 외로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은 맛보아 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성도가 맛보는 것은 환경이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가져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았는데 여기는 모두 지나가는 한 과정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세워 주신 자리에서 걸어온 길도 잘 기억이 나지 않고 앞으로 갈 길도 나는 확신할 수 없지만 내가 아는 한 가지는 이것이니 하나님은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것을 기뻐하신다. 그리고 나는 지금 여기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두 사람의 삶은 얼마나 큰 차이가 나겠습니까? 전자의 사람은 언제나 항상 아직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중이 아닙니다. 아직 자기가 자기의 인생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궤도로 들어 선 것이 아니지요. 그는 계속해서 선로를 이탈한 기차를 선로위에 올려놓으려고 애를 쓰는 것 같은 그러한 시간들을 보냅니다. 그러나 후자의 사람들은 얼마나 복된 사람들입니까? ‘걸어온 길도 잘 모르고 앞으로 가야 할 길도 잘 알지 못하지만 지금여기에 하나님이 있게 하셨고 여기에 있는 것을 하나님이 좋아 하셨고 지금 내가 여기에 하나님이 있게 하셨고 지금 나는 여기에서 지금 나를 향해 하나님이 여기에 가지고 있는 모든 뜻과 계획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어느 시점에 서 있든지 항상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 아닙니까? 전자의 사람은 늘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볼 계획 속에서만 살아가지만 후자의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현재적으로 경험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복된 사람입니까?
오늘 다윗을 보십시오. 인생의 가장 비참한 때 친구도 없고 사랑하는 사람들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떠돌이처럼,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기름 부음을 받고 하나님이 택하셔서 이스라엘을 세우실 그 소명 받은 이유 하나 때문에 사울과 그의 일당들에게 지독한 미움을 받으며 유리하는 한 마리 어린 양처럼 그렇게 고생스러운 인생의 길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이 땅에 있는 자원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거렁뱅이와 같았고 빌어먹는 자 같이 되었고 원수들의 조롱거리가 될 수 있는 충분할 정도로 그렇게 비참한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거기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았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 시인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 하신 것은 그가 놓여 있는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누리고 있는 하늘 은혜의 자원이 하늘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 없이 살았던 때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이 무지하게 지냈던 때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어도 순종할 힘이 없고 길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도 길을 깨달을 수 없었던 무지하던 때를 기다리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합니다. 존귀한 가운데 처하면서도 자신이 존귀한 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매우 부끄러운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현재 놓여 있는 삶의 자리,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며 하나님 나라의 한 모퉁이에서 주님을 섬기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나의 섬김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 이런 인생에 필요한 필수적인 모든 것을 우리들이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이번에 두어 주간 동안 교회를 떠나 있으면서 순간적으로 깊은 외로움 속에 들어갔었습니다. 하나의 사단의 시험일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이내 잘 극복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통증이 나고 아픈 데 나 혼자 뚝 떨어져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내 묵상을 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통 받고 시련이 있을 때 생각나는 지체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가 이내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게 하기 위해서 너를 이 세상에 보냈다. 순간 마음의 어두운 그림자들이 속히 물러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고 감사함으로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감사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쓸데없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탐욕으로 가득한 사람 중에 감사로 하나님 앞에 찬양을 드리는 사람이 없습니다. 부요한 자는 감사할 수 없어도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그래서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세상에서 아무것도 안 가진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하면 이런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인생이 무엇이겠습니까?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과 평화하고 글 하나님과의 평화 때문에 내적인 평강을 누리고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므로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모두 받아들이고 그리고 나를 버리고 열려진 하늘의 은혜를 통해 하늘의 자원들과 땅의 자원들을 공급받고 우리의 지위를 높이고 우리에게 많은 자원을 주셔도 자원을 주신 근원이신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그 자원들을 끌어안고 강물처럼 흘러가는 그런 삶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약할 수 있는 그런 삶이 아니겠습니다.
저는 아파서 며칠 있는 동안에 달라이라마의 <용서>를 읽었습니다. 그 사람이 비록 크리스천은 아니지만 읽으면서 많은 번득이는 본성의 지혜와 빛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인간이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고민함으로써는 도저히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염려함으로써 자신이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말 감사하고 우리가 쾌활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대화를 나눌 때도 하나님을 높이고 주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고 그래서 함께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렇게 섬기면서 살 수 있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합니다. 고난 주간에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운 선물은 감사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선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기의 외아들을 은사로 주셨으니 다른 모든 것들은 무엇을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것을 다 받아들이며 하나님 앞에 감사함으로 순종하는 삶 그것이 이 고난의 주간에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일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2. 말씀의 미각을 잃지 말자-2
“주의 증거로 내가 영원히 기업을 삼았사오니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시119:111)
좋으신 주님 오늘 이 시간 저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저희로 주님의 뜻을 좇아 행하도록 복을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 주셔서 주의 말씀대로 행하도록 하나님이 저희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기업이라고 하는 것은 곧 땅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에 이르러서 정착하기 전까지는 -그 전에도 기업 사상이 있었지만- 그 기업사상이 보다 분명하지가 않았습니다. 이 기업사상이 분명하게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가나안에 정착하고 나서 부터입니다. 그 이전에도 기업에 대한 사상이 있었는데 오히려 그 전에는 기업에 대한 사상이 예를 들면 장자 됨, 하나님의 축복,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는 것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그 기업이 구체적으로 땅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땅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부어주시는 축복들을 땅을 통해서 받고 또 땅을 통해서 그것을 누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땅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생명이고 그것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의 보증을 의미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엘머마튼스 같은 신학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땅이 곧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았어요. ‘그 땅 안에서’는 곧 ‘그리스도 안에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는 이런 뜻입니다. 어쨌든 이 기업사상이 본격적으로 들어오는 것은 가나안에 정착하고 나서부터입니다. 그 전에 이미 그들이 가나안 건너편 요단강 건너편에서 제비를 뽑아서 기업을 나눕니다. 그것을 ‘할로끄’라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각자 자신들의 땅이 어디인지 지파별로 지파는 다시 족속별로 족속은 다시 가정별로 땅을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나안을 모두 정복하고 이미 뽑은 제비대로 정복이 끝난 후에 이것이 너희 지파의 땅이요 이것이 너희 족속의 땅이요 이것이 너희 가정의 땅이라고 땅을 떼어 주었을 때 그 땅에서 누렸을 이스라엘 백성의 기쁨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왜 그렇게 긴 세월 동안 방황해야 했습니까? 그들이 광야에서 배운 원시신앙 고백의 자기 확인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 조상이 유리하던 아람 자손이었는데. 이었습니다. 자신들을 돌아보고 자신들의 역사를 돌아보아도 유리하던 백성들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유리해야 했습니까? 그들이 기업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땅이라고 하는 기업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산겁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것들을 누리고 많은 영광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라는 기업이 없는 사람들의 삶은 유리하고 방황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일에 증인이 아닙니까? 그리스도 없는 삶은 땅이 없는 이스라엘 민족의 삶과 같아요. 끊임없는 방황, 어디서도 그것이 영원한 집이 될 수 없어요. 가끔 기쁜 일도 있고 즐거운 때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이 영원한 기업은 아니기 때문에 역시 참되고 영원한 기쁨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기업으로 삼았다고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느꼈던 그 기업사상에 따른 깊은 감격과 감동을 우리가 모두 이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처음 가나안 땅에 들어가 기업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감격을 알았을 것이고 그 후로부터 500여년이 지난 후에 이 시편을 읽는 독자들도 그 기업사상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차적으로 그 기업의 영광스러움과 행복에 대해서 느꼈을 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업으로 삼은 사람들은 얼마나 복된 사람들이냐 하는 것입니다. 기업이 있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 기쁨은 비할 데 없이 큰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시인 다윗이 이 시편에서 말하기를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기업을 삼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시인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얻은 그 커다란 유익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기업은 무엇입니까? 답을 이미 가르쳐 드렸으니까 아마 여러분에게 물으면 ‘우리의 기업은 그리스도라’ 고 말하실 것입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그리스도가 여러분들의 기업이 되십니까? 오늘 여러분들의 삶에 어떻게 그리스도가 여러분들의 기업이 되십니까? 그리고 그 기업이 여러분들에게 정말 행복을 가져다주고 있습니까? 그 기업 때문에 정말 행복하고 기쁘냐는 말입니다.
저는 태어나서 여태까지 내 땅이라는 것을 가져 본 적이 없습니다. 내 땅은 아니지만 땅을 제일 먼저 소유해 본 게 열린 교회 이 땅을 샀을 때입니다. 지금도 사실 그 때 감격을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포함해서 1200여명의 성도들이 어디론가 가야 하는데 정말 갈 데가 없습니다. 수원까지 내려가서 우리 이사 갈 집을 찾아보았지만 아무데도 없어요. 그리고 고민을 하다가 이 땅을 딱 얻게 되었을 때 그 때 여러분들이 이 땅을 밟았던 감격이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과 신앙의 깊이에 따라 그 즐거움은 달랐겠지만 우리 모두 한마음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커다란 문제는 이처럼 기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과 같은데 그리스도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에드워즈가 고백했듯이 오늘날 우리 시대의 최대의 죄악은 첫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하나님을 즐거워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인을 보십시오. 주의 말씀을 자신의 기업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즐거워하고 그 기업에 희망을 걸고 그 기업 속에서 미래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업 속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누렸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습니까? 그가 다른 것이 아닌, 눈에 보이는 땅이나 왕국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업을 삼고 그 안에서 자신의 미래를 보고 행복해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즐거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즐거웠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이야기해서 시인은 안 가진 것이 없이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세 번이나 기름 부음을 받았죠, 하나님이 그를 왕위에 세우셨죠, 성신의 충만함을 세우셨죠, 가는 곳마다 이기게 하셨죠, 백성들의 신망을 얻게 하셨죠, 하늘과 땅의 모든 보화를 그에게 주셨죠,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되었죠, 무엇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이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기업인데 왜냐하면 그 말씀이 나에게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랬어요.
그러면 거꾸로 뒤집어서 만약 이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즐거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즐거운 유익을 그의 영적 생활 속에서 누리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는 기업이 없는 삶이었습니다. 시인의 생애에서 그런 적이 있었지요. 범죄하고 흑암가운데 있었던 때 하나님의 말씀이 즐거움이 되지 못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말씀이 끊임없이 시인의 양심을 찌르고 그 율법이 그를 끊임없이 정죄하던 때가 있었지요. 영혼의 깊은 암흑기였죠. 그때에 시인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 있었습니까? 왕국도 그대로 있었고 나라도 강성했고 백성들도 그대로 살아있었고 수많은 보물들도 그의 수중에 그냥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참된 즐거움을 상실하게 되자 그는 아무것도 없는 기업을 강탈당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인식이 이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깨닫고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말씀에 의해서 치료를 경험하고 말씀에 붙잡혀서 주님의 크신 사랑을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그 말씀은 그 때 여러분들을 거룩하게 했습니다. 그 때에 여러분들로 주님을 사랑하게 했고 그 말씀은 그 때 여러분들로 하여금 주님을 위해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품고 주님을 섬기게 했습니다.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들로 하여금 진실한 삶을 살고 헌신되게 하고 어린아이 같이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 앞에 두려워 떨게 하고 주님을 섬기는 즐거움 속에 살게 하는 것은 그 때 생애적으로 만나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지금, 오늘 아침에, 오늘 밤에 그렇게 여러분 마음속에 담겨져 있는 그 말씀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그런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신의 설교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쇠가 불에 달구어 질 때 그 쇠는 매우 물러지고 그래서 대장장이가 두드리는 대로 잘 조형이 되어서 새로운 연장을 만들지만 일단 그 쇠가 식고 나면 불에 달구어지지 않은 쇠보다 더 딱딱해지는 것처럼 주님을 깊이 만난 사람들의 마음이 은혜가 식어지면 더 강퍅해진다고 말입니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고백했던 것처럼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려야 해요.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난 은혜의 경험에 대한 자부심―잊어버려야 합니다. 적어도 내가 이 정도로 하나님 앞에 깨뜨려 졌었고 사명을 받았다고 하는 것도 잊어버려야 합니다. 잊어버려야 합니다. 오늘 우리로 하여금 은혜의 감격 속에서 살게 하는 자원이 뭐라고 생각합니까?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30년 전에 베푸셨던 하나님의 은혜가지고 오늘 우리가 살 수 없습니다. 오래 전에 주님을 만나서 깨뜨려 졌을 때 그 은혜는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고 우리로 이 길을 걸어가게 하고 이 교회를 섬기게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길을 하나님 보시기에 정말 착하게 걸어가는 것은 옛날에 방향을 바꾸어 놓던 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다.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며 주님의 성품을 느끼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내 마음에 핏빛으로 담겨 있어서 내 심장을 교훈하고, 내 피를 뛰게 하고, 내 심장을 뛰게 하고, 내 심장을 덥게 하고, 내 피를 덥게 하고, 그 피가 나의 온 혈류 속에 흘러 나의 온 몸을 두루 덥히는 그것을 통해서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기업으로 여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이는 것이 모두가 아니요 이것은 모두 잠시 스쳐 지나가는 것이고 육신을 통해 열매를 맺는 썩어질 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요 성령으로 영생을 심는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기쁨이다 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왕도가 없어요(*3)
제가 오랫동안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을 묵상하다가 며칠 전부터 제 생애 전체가 흔들리는 감격을 경험했던 --감격이라기보다는 신학적 충격이었어요.--그런 것을 경험했던 존 오웬의 mortification을 다시 묵상하고 있어요. 처음 보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그래서 깊이 절망하며.
나는 죄와 악함이 가득하게 찼으나예수께는 진리와 은혜 충만 하도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정말 사랑으로 권면하고 싶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이전의 말씀은 다 지나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 마음에 지금 나의 심령에, 그 화실에, 말씀의 불이 타고 있어야 되요.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모든 성화의 삶의 원천이고 주님을 위해 헌신하되 순결하고 순전한 삶을 살게 하는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도 이것 없이는 거룩함에 이를 수 없어요. 그래서 이 불이 우리 속에서 꺼지지 않고 계속해서 쌓여가야 되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거나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면서 가장 마음이 무너지는 것처럼 아픈 때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싫증난 얼굴들을 볼 때에요.
주의 말씀에 싫증난 영혼에 다시 한 번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은 이제 이 세상의 쾌락 이외에는 없어요. 그렇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우리의 마음에 즐거움이 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기업이 아닙니다. 그렇게 느끼는 이 세상의 쾌락은 이스라엘 백성이 영원한 기업 가나안을 향해 가다가 버리는 한 마당의 어지러운 잔치일 뿐입니다. 그럴 수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싫증 , 하나님 자신에 대한 권태감, 의무를 행하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도 없고 일의 노예, 일정의 종이 되어서 그냥 꾸역꾸역 자기의 일을 해 나가는 이런 삶, 하나님 앞에서 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아마 어쩌면 인생에 있어서 지워지면 그 사람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 더 빛날 그런 시간들입니다. 더군다나 성도들을 그렇게 살게 하지 말게 하기 위해서 섬기고 있는 우리들이 만약 그런 삶을 산다면 하나님 앞에 우리는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입니까?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정말 호소하고 싶어요. 그게 뭐냐 하면 말씀의 불을 여러분의 가슴속에 담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해요. 하나님이 다른 모든 것을 빼앗아 가시더라도 그것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달라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가 있는 삶을 살아야 해요. 말씀을 마음에 담을 시간도 없이, 담겨진 말씀이 마음에 타오를 시간도 없이, 타오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할 시간도 없이 살아가는 삶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될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도 없는 삶입니다. 그래서 아무거나 무슨 상관이 있어요? 모두 다 새로워요.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다 새로워요. 어떤 말씀이든지 아침마다 붙들고 묵상하세요. 교리묵상 정도로 만족을 해서는 안됩니다. 묵상하세요. 깊이 마음을, 그 말씀의 은혜의 소금물에 깊이 잠그세요. 정욕의 독기가 빠져나갑니다. 싫증의 쓴 것이 빠져나갑니다. 그 모든 하나님을 향한 악한 마음들과 의지의 소원들이 빠져 나갑니다. 그리고 급기야는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주는 토기장이 나는 진흙이오니 날 빚으소서 라고 말입니다. 주님의 형상대로 날 빚으소서 라고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시편강해Ⅲ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