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주께 피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영히 수치를 당케 마소서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 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 (시 71:1-2)
녹취자: 윤은정
71편 표제에는 저자가 붙어있지는 않지만은 많은 사람들이 ‘다윗의 시 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여기에서도 마치 시편 70편하고 아주 유사하게 하나님 앞에 자신이 간절히, 고난을 받을 때에 간절히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그런 장면을 여기에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영히 수치를 당케 마소서‘라고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기도는 결국은 뭘 보여 주냐 하면은 자신이 악인으로 말미암는 고난을 통해서 자신이 얼마나 수치를 당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 아니에요?’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할 때에는 자신의 비참함을 알기 때문에 그런 기도가 나오는 것이고, 하나님이 공평을 베풀어 달라고 호소할 때에는 역설적으로 자신이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고, 부당한 일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공평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여기에서도 꼭 같이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수치를 당하지 말게 도와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고 있는 것은 이미 자신이 악인들로 말미암아서 수치를 당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시인의 시편에 보면은 수치라는 말이 아주 많이 나옵니다. 이것은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표현입니다. 시인이 이야기하는, 시편에서 이야기하는 수치라고 하는 것이 아주 미묘한 단어입니다. 이것이 왜 그렇게 미묘하냐 면은 시인이 하나님 앞에 탄원 시에서 부르짖는 간절한 기도 속에 나오는 이 수치는, 사실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이 됩니다. 그러면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과 관련이 되냐 하면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순종하고 하나님의 법도대로 행하며 살려고 하는 이 시인이,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수치를 당하게 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사람들이 시인을 싫어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싫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 시인의 일관된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대한 그 사랑은 하나님만 사랑하게 해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하는 것들도 사랑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특징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하나님께 대한 미움은 하나님 때문에 미워해야하는 모든 사람들을 함께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은혜를 받게 되면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데, 하나님만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련을 맺고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만 사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말씀, 그리고, 하나님이 정하신 교회의 제도, 그리고, 하나님 때문에 만나야 하는 사람들, 하나님 때문에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 이 모든 것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인이 가지고 있는 일관된 생각입니다. 수치에 대한...
두 번째는 뭐냐 하면은 이 시인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존감입니다. 자존감... 그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존감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아주 신앙이 뛰어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깊을 때에 우리의 인생의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시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인데, 그것과 관련이 되어서 이 수치라는 말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이냐면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존감입니다. 이 하나님 없는사람들의 자존감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을 높이기 위한 자존감이지만은 그러나, 언약백성으로서의 자존감은 하나님과 맺은 관계에서 나오는 자존감입니다.
그 교육이 잘 된 교육이냐, 잘못된 교육이냐에 대해서는 사람마나 평이 다를 수 있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교육이 아이를 잘못 자라게 했다. 그러기도 하는데.... 나폴레옹의 이야기입니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학교 다닐 때, 초등학교 때쯤 됬을때, 뭔가를 잘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장선생님 실에 불려가서 무릎을 꿇어라. 그랬더니, 이 어린아이가 하는 말이, ‘선생님, 제가 잘못 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엄마는 나에게 하나님 아버지 한분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지 말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어떻게 보면은, 하나님의 백성들로서의 자존감을 가르쳐 주려고 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꼭, 우상숭배라기 보다도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것이 수치라는 개념과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의 신앙의 경험을 보면은 이렇게 자존감과 거의 없이 사람들이 살아오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반대로, 자존감이 너무 높아서 그래서 결국은 교만이 되어서 인생을 망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이런 것들이 어디에서 조정이 되냐면은, 하나님을 만나고 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고, 만나게 되면은 그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이 모든 인간과 세계에 대한 질서의 망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 망 위에 내가 어느 위치에 있어야 되는가 하는 것을 보면서, 그러면서 자기 자신이 무엇 때문에 존귀한지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배우고, 무엇 때문에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지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배우게 됩니다. 그러면서 거기서 정당한 자기의 자존감, 정당한 자기 자신의 대한 존중히 여김이 나오게 되고, 자신이 그런 정중한 자존감을 갖게 됨으로서 다른 사람들도 정말, 그렇게 하나님 앞에 소중한 자존감을 가져야 하는 인간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기독교가 진정한 휴머니즘입니다. 진정한 휴머니즘은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하나님 중심적인 생각이, 참으로 인간적인 생각이다라고 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신본주의 안에서 비로서 진정한 인간주의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본주의 안에서 참된 휴머니즘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이게 이제, 수치를 당치 말아달라고 호소할 때, 이 기도가 사실은 이런 배경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자신의 자존감에 관계되는 문제이기 이전에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그 하나님의 영광에 관련된 일입니다. 자신이 수치를 당함으로서 하나님께 누를 끼칠 수 있다 라고 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수치를 당하지 말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우리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자녀들에게 가르칠 때에, 생명 다음으로 소중하다고 가르쳐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은, 하나님 안에 있는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명예입니다. 그것이 부정적으로 묘사될 때에 수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한 형상을 닮은 한 인간으로서 누구에게도 멸시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명예롭게 사느냐. 이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명예 안에서 하나님과 그리고, 그 모든 관련된 사람들이 함께 영광을 받기 때문입니다.
환란과 핍박을 당해서 악인에게 고통을 당하는 것 하고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이제 그런다고 하나님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어짜피 불완전하기 때문에 주님의 이름은 인간의 악함에 의해서 짖밟히기도 하고, 땅에 떨어지기도 하고, 그런, 가변적인 것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이름과 함께 고난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영광,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세상에 가득해 지는 것, 모든 것들이 결국은 알고 보면은 하나님이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시고, 존귀하게 영광을 받으시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온전한 자존감을 가지며,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그 모습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시인이 2절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 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 라고 말합니다. 마르틴 루터가 매우 주의 깊게 들여다 보았던 성경본문입니다. 그중에서도 이 71편에 나오는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 주시며‘ 라고 하는 구절입니다. 루터는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을 했습니다. 시인이 악인에게 끔찍하게 고통을 당하고 괴롭힘을 당하고 억압을 당하는 그런 속에서 나를 구원해 주십시오. 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려니까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면은, 하나님 앞에 ’나를 이렇게 해 주시옵소서, 저렇게 해 주십시오‘라고 아뢰면서 자신 있게 하나님 앞에 그렇게 청구하기 위해서는 그에 어울리는 올바름이 있어야 하는데, 시인이 하나님 앞에 매달리다 보니까 그것이 없다 이것입니다. 또, 있다고 한들 그것은 사람 앞에서나 통용될 가치가 있는 것이지,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통용될 만한 그런 가치가 있을 정도로 고뇌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소하는 것이 뭐냐 하면은, ’주님의 의로 나를 건지시옵소서. 나의 의로움을 보지 마옵시고, 주님 안에 있는 그 의 때문에 나를 건지십시오.‘ 그건 어떤 뜻이 있을까요? 그런 것 아니겠어요? 이 시인이 아무런 사람이 아니라, 언약백성입니다. 언약백성과 관계를 맺으신 하나님이 완전한 관계를 맺으시기 위해서는 언약 백성과 관계를 맺은 하나님께서 그 인간의 의가 부족하고 모자랄 때 하나님의 의 때문에 신실하게 그 언약관계가 유지되어야지만, 이 하나님이 완전하신 하나님이 아니시겠느냐! 이런 뜻이 깔려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옵소서.’ 여기에서 이신득의의 사상을 읽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문제를 어떻게 봐야하는 것이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카톨릭에 있는 신학자들이야 펄펄 뛰겠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이미 벌써 루터 나오기 2500년 전에 성경본문에 갖다가 쑤셔 놓은 것이라 이야기를 하겠죠. 그러나,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우선 우리들이, 이 구절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라고 하는 이 구절을 우리들이 제일 먼저 생각 할 것은 뭐냐 하면은, 이신칭의에서 ‘하나님이 그 의를 우리에게 덧입혀준다’ 라고 하는 사상이 우선이라기 보다는, 근본적으로 이것은 뭐냐하면은 시인이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의 질서를 다시 잡아달라고 하는 간구입니다. 질서를.... 그것이 의의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불의는 뭐냐하면은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를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과는 다른 질서를 고집하는 것이 불의이고 악입니다. 그러니까 일차적으로 여기에서 의라는 말이 사용되었을 때에 이 당시에 시인과 사람들 속에 있었던 일차적인 생각은 이 의는 무엇이냐면, 법률적인 의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법률적인 의를 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뜻, 의지, 생각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헌법을 볼 때에 법체계가 공산주의와 유물론으로 되어있으면 살해주의적인 국가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법체계가 다수에 의해서 권력이 배분되고, 국민의 뜻에 의해서 움직이고 할 때에는 민주 공화정을 하고 싶은 것이라 이것입니다. 이해되시죠? 그러니까 여기에서 나오는 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이 율법과 이 모든 것들, 여기에 부합하는 것이 의인데, 그런데,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런 의를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라 이것입니다. ‘좀, 깨끗이 좀, 손 좀 씻어주면, 깨끗하게 위생적으로 살아라.’ 이렇게 아주 강력하게 자녀들에게 촉구한다면 이 어머니는 깔끔한 사람이어야 된다 이것입니다. ‘뭐, 아무렇게 살면 뭔 상관이 있어’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녀들에게 그렇게 정색을 하고 명령 할 수 없단 말이죠. 더군다나 그렇게 안하면 책망할 듯이 명령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여기에 나오는 의의 첫 번째 개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의 의로 나를 건져달라고 하는 이야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율법의 질서대로 이 세상을 재편해 주십시오. 그러면 자신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것입니다.‘ 그 얘기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 되시죠. 법이 법대로 잘 통용된 사회가 안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법을 지키는 사람들이 바보취급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법이 법대로 시행 된다면은 나를 보고 바보라고 했던 사람들은 오히려 부끄럽게 될 것이고, 법을 법대로 지켰던 사람들이 존중히 여김을 받게 되고 하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겠어요? 그것이 사실은 이 시편 71편 2절에 나오는 주의 의의 의라는 말이 담고 있는 첫 번째 개념입니다.
이것을 인제, 좀 더 확대해서 생각을 할 때에 루터가 이야기 한 것처럼 충분히 인간의 의로서는 자신을 스스로 건질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로서 그래서 주님이 악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는 공정하게 당신의 선악의 잣대를 가지고 책망하시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선택된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이 자기를 베풀어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의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을 한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을 토대로 적용을 하면 충분히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면은 모두 하나님 앞에 그 고난을 당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불순종함으로서 하나님께 책망을 당하고 벌을 받고 그럴 때에 놀랍게도 내가 회개하니까 하나님이 용서해 주셨을 때에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은 왜 나만 용서해 주시지? 정말 신뢰할 수 없는 분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까지 포함되어서 참, 하나님은 공평하고, 의로우신 분입니다. 하는 것을 우리들이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근거가 뭐냐 하면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는 하나님을 의존하는 신앙에 대한 반응으로서 하나님이 의로서 나를 건지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미묘한 연결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생각을 하잖아요. 그러면은, 도대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모든 사람들이 다 언약관계 안에 충실 한 것은 아니거든요. 언약관계 안에 들어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불신앙으로 언약을 어기고, 하나님께로부터 이탈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그들도 하나님이 건져 주셔야지만 여기 이렇게 의로 나를 건지시며 라고 하는 것에 해당이 되는데, 왜, 하나님은 그들은 같이 언약을 맺은 백성이면서도 언약바깥으로 도망쳐서 떨어져 나가도록 하나님이 내버려두실까? 아까의 논리, 루터의 논리에 의하면은 그런 사람들도 하나님이 붙잡아 주셔야지만 하나님의 이 의로우심이 입증되는 것 아니에요? 그죠?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우리는 이제, 시간의 문제, 영혼의 문제, 이런 문제들을 우리들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만 오늘 마지막으로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이 언약관계 안에서 끝까지 붙드심으로 자신의 의를 나타내실 때에도 하나님 홀로 하지 아니하시고, 놀랍게 그렇게 하나님이 건져주시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간절한 기도와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는 절실한 열망과 부르짖음, 그런 것들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자기의 의를 보이시는 방법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 의가 되었다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제, 반대로, 그렇게 하나님이 왜, 언약관계 안에 있게 만드신 다음에 그 언약관계를 파기하고 떠나가는 것이 가능하도록 내버려 두셨을까? 그죠? 그런 언약관계 안에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고, 그런 사람들은 건저주시고, 불순종하는 사람들이잖아요. 불순종하는 사람들은 불순종 함으로서 자신이 하나님앞에 선택되지 않은 사람들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은 어떤 식으로 하든지 간에 결국은 이 죄인을 건져주시고, 우리를 풀어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의는 주님께만 있는 것인데, 그것이 우리에게 나타날 때에는 언제나 우리의 신앙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접목시키면서 이신칭의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 세세한 논의까지는 우리들이 다 공부할 수는 없지만은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은 당신의 의로 우리를 건져주십니다. 그러나 당신의 의로 우리를 건져 주실 때에 언제나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을 사용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이 우리의 근거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은 우리의 신앙을 통해서 주님 안에 있는 그 의는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우리에게 하나님이 부여해 주십니다. 라는 결론을 내림으로서 우리는 안정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어떤 신학자들은 이제 이렇게 주님 안에 원래 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냥 믿으면 하나님이 의로 우리를 여겨주신다. 하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결국은 그리스도 예수의 의에 전가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게 그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보면은 간절히 매달리는 것이 의가 아니라, 그것이 이미 주님 안에 있는 그 의를 우리가 더 깊도록 만들어 주었던 수단이었던 것처럼, 이것이 기독론적인 전환을 거쳐서 신학시대에 와서는 예수가 우리를 위해서 이루신 그 의가되고, 그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이 우리의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격려 속에서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주님을 믿는 시작뿐만 아니라 믿는 과정, 믿고 난 후에도 주님께서는 이러한 이치를 세움으로서 우리를 당신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에서 떼어놓지 않는 것입니다. 떨어질 수 없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굳게 붙들어 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은 모든 사람들의 극치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의존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