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6편 강해 II
2022년
주일오전설교
설교기간 | 2022년 11월 13일 – 12월 04일
편집내용 | 녹취 원본
출 력 일 | 2022년 12월 19일
목 차
1. 주께서 책망하실 때(시 6:1-2) 2022.11.13. 주일오전 6
2. 떨리는 영혼의 간구(시 6:3-4) 2022.11.20. 주일오전 17
3. 내 눈물이 요를 적실 때(시 6:5-7) 2022.11.27. 주일오전 28
4. 울음소리를 들으실 때(시 6:8-10) 2022.12.04. 주일오전 36
<설교 프레임>
시편 6편 강해1 2022. 11. 13 주일 낮예배
< 주께서 책망하실 때 >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시 6:1-2)
I. 본문해설
II. 주께서 책망하실 때
A. 진노를 깨달음
B. 은혜를 간구함
1. 뼈가 떨리기까지
2. 수척해지기까지
3. 나를 고치기까지
III. 적용과 결론
시편 6편 강해2 2022. 11. 20 추수감사 주일 낮예배
< 떨리는 영혼의 간구 >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시 6:3-4)
I. 본문해설
시인의 관심은 피골(皮骨)이 상접하고 뼈까지 떨리는 육체의 고통에서 영혼(靈魂)의 상태로 옮겨간다. 왜냐하면 모든 육체의 고통(苦痛)이 영혼의 문제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가혹하리만치 오래도록 지속되는 영혼의 침체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시인은 절망감 속에 부르짖는다. “어느 때까지니이까?”
II. 떨리는 영혼의 간구
시인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한다.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시 6:3)
시인에게 “떨리는 뼈들”과 “떨리는 영혼”은 동의어다. 이것들은 모두 자신의 죄(罪) 때문에 고통 받는 시인의 내면의 세계를 보여준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세 가지를 간절히 호소한다.
A. 영혼을 건지심
첫째로, 자기의 영혼(靈魂)을 건져달라고 간구한다.
여기서 “건지시며”()는 히브리어에서 “뜯어내다, 빼내다, 구출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통(苦痛) 받는 상황을 통해서, 시인은 자신의 죄와 비참(悲慘)의 끈끈이에 달라붙어 있는 자신의 영혼을 발견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있고 그것에 동의(同意)할 때는 죄가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실감하지 못한다.
그러나 자신이 죄 가운데 있음을 깨닫고 거기서 벗어나려고 애쓸 때, 비로소 죄의 속박하는 힘(power)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경험하게 된다.
* 흐르는 강물의 비유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리 떠날 때, 가엾은 영혼은 철그렁거리는 죄(罪)의 사슬에 매인 채 낯설고 어두운 비애(悲哀)의 땅을 걸어 절망의 벼랑 끝으로 다가간다. 우리가 그렇게 살았었다.
하나님을 항해 돌이킬 힘도 없고 죄를 버릴 힘도 없는 때, 가엾은 영혼(靈魂)은 비로소 자기를 도울 자가 아무도 없음을 깨닫는다.
시인은 세상 죄에 단단히 달라붙어 있는 영혼의 상태(狀態)를 보며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한다. 거기서 자기를 떼내어 달라고 울부짖는다.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기 힘으로 되지 않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죄(罪) 때문에 세상 사랑에 흩어졌던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로 결심(決心)했다. 그러자 그의 영혼의 시선은 즉시 하나님께 고정되었다.
우리의 영혼은 안전한 상태에 있는가? 내면의 죄 때문에 위기(危機)에 처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지 않는가?
은혜(恩惠)가 필요한 때다. 세상이 얼마나 헛된지를 알고 영혼의 안전을 위하여 근심하라. 하나님께서 건져주시기를 구하라.
위기 속에서 불안한 당신의 영혼을 구원(救援)할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하나님의 은혜(恩惠)만이 당신의 영혼을 건져낼 수 있다.
B. 사랑으로 구원하심
둘째로, 하나님의 사랑(love)으로 구해주시길 간구한다.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시 6:4)
자신의 영혼이 불행(不幸)하고 비참하다는 사실을 깊이 자각할 때 한 가지를 깨달았다.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love)밖에는 달리 의지할 데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주의 사랑으로()구원하소서”에서 ‘사랑’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로 ‘헤세드’인데, 이는 곧 하나님의 ‘인자’(仁慈)를 뜻한다.
이러한 간구는 영혼의 위기 가운데 자기를 의존(依存)하는 마음을 철저히 버린 시인(詩人)의 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육체를 위한 자원의 결핍을 통해서도 자신의 무력함을 느낀다.
그러나 영혼의 자원의 결핍 때문에 고통(苦痛)을 받을 때,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닫는다.
이때 우리 마음은 가난해지고 파산 선고를 받은 자처럼 한없이 낮아진다.
신앙이 없으면 그 지점이 절망(絶望)하는 지점이지만, 믿음이 있으면 오직 하나님 한 분의 도우심을 갈망(渴望)하게 된다.
자기도 스스로 자신이 싫어진 때에는 자기에게 희망(希望)을 거는 것 자체가 칙살스럽게 느껴진다. 이는 죄를 사랑하는 자신에 대한 미움이다.
그리하여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신뢰(信賴)하지 않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멀리 떠난 자기를 미워하게 된다.
자기를 불신하는 만큼 하나님의 은혜로 의존(依存)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기도의 정신이다.
사람에 대한 원망과 하나님께 대한 불평을 그치라. 하나님을 바라보라.
절망의 웅덩이가 깊으면 깊을수록 하늘은 점점 작아져 동전보다 작아진다.
그러나 거기서 땅바닥을 바라보는 자는 쓸쓸히 죽음(death)을 맞이하지만 작은 크기의 하늘을 바라보는 자는 바깥세상의 희망(希望)을 본다.
우리의 희망은 하나님의 인자(仁慈)하심이다. 선하신 하나님을 떠난 것은 악한 자신(自身)이건만 시인은 부르짖는다.
“여호와여 돌아와 …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시 6:4)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응답하시는 분이시니 이는 스스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이 불구가 된 자기 영혼에 대한 탄식이다.
참된 기도는 오직 하나님 한분께만 희망을 갖는 것이다. 오로지 그의 자비와 긍휼만을 절대적으로 의지(依支)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신자가 진정으로 겸비해지는 것은 영적인 침체(沈滯) 속에서 스스로 자기 영혼을 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한 때이다.
하나님의 은혜(恩惠)만이 자신을 살릴 수 있음을 통절히 깨닫기 때문이다.
그동안 덧없는 일상을 살면서 구원의 감격은 사라지고 세상 즐거움에 은혜의 갈망은 사라지지 않았는가? 은혜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다.
거친 들판을 헤메이는 이리처럼 굶주린 배에 포악한 눈빛으로 하나님을 향해 포달을 떨어보지만 영혼의 비참(悲慘)을 면할 길은 없다.
하나님께 반항할수록 더욱 깊은 소외(疏外)와 고독을 불러올 뿐이다.
하나님을 떠난 자는 햇빛을 잃은 식물과 같고, 물을 떠난 물고기와 같으니 거기에 어찌 영혼의 생명(生命)이 있겠는가?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호 5:15)
그리스도의 십자가(十字架)와 구원의 진리가 명백하게 알려진 지금에 와서야 여전히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을 무엇으로 변명할 것인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마음은 밝은 양심(良心)의 빛 아래 부끄럽게 드러나고 영혼은 갈 길을 잃은 채 상한 뼈처럼 떨린다.
이때 한 질문이 우리의 등짝을 내리친다. “나는 어찌하여 하나님께 사랑으로 구원해 주시기를 간구하지 않는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자.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자.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영혼의 깊은 골짜기에서 우리를 건지신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경험 없이는 누구도 그 사랑에 감격(感激)할 수 없다.
구원(救援)하시는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신다. 그 하나님께 돌아갈 때만 기뻐하며 살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라. 살아 있는 현실 자체가 감사(感謝)의 이유가 될 것이다. 구원의 감격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라.
시편 6편 강해3 2022. 11. 27 주일 낮예배
< 내 눈물이 요를 적실 때 >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시 6:5-7)
I. 본문해설
시인의 영혼은 죄(罪)로 인해 너무 깊이 상처를 받았다. 그는 어디서도 고침 받을 길이 없는 상태였다.
세상의 즐거움으로 위로 받기에는 그 마음의 고통(苦痛)이 너무 깊었다.
시인은 이미 하나님의 생명을 맛본 사람이었다. 충만한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비상한 은혜의 세계를 경험하였다.
오랜 세월 동안 신령한 은혜, 달콤한 기도와 감미로운 사랑 속에 살았다.
은혜로부터 멀어진 영혼의 침체(沈滯)는 시인의 온 영혼과 정신을 갈갈이 찢어놓았다. 가혹하리만치 아프고 긴 고통과 혼란이 계속되었다.
비록 범죄하였으나 시인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원했다. 온 마음으로 감사하며 살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는 마음을 다해 회개하였다.
II. 내 눈물이 요를 적실 때
시인의 이러한 정신(精神)의 고통은 육체가 쇠약해지는 것으로까지 나타났다. 그만큼 그는 온 마음으로 철저히 회개하였다.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시 6:7)
그는 어찌 할 수 없는 큰 영혼(靈魂)의 고통 속에서 아픈 몸으로 피곤하기까지 탄식하였으니, 눈물로 침상을 띄우며 요를 적시기까지 울었다.
A. 눈물로 띄운 침상
그는 많은 기도와 눈물 속에서 지냈다. 특별한 회개와 간구의 시간들이었다. 살 소망까지 끊어진 것처럼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는 시인의 철저한 회개(悔改)가 얼마나 그의 마음 아주 깊은 곳의 밑바닥까지 훑어갔는지를 보여준다.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 6:6)
그는 먹고 마시기를 거절하였다. 육신의 두 눈은 안력(眼力)이 쇠하여 사물을 분간하지 못하게 되었다.
마음은 여기저기서 날뛰는 대적(對敵)들 때문에 낙심 속에서 어두워졌다.
시인은 경건하고 순결하며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던 사람이었다. 일찍이 경험해본 적이 없는 깊은 죄에 빠진 것은 시인의 잘못이었다.
그러나 회개의 경험(經驗)을 통해 깨달았다. 범죄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결코 깨달을 수 없었던 깊고 심오한 은혜의 세계를 맛보았다.
이것은 그를 더욱 순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으니, 죄(罪)가 그리한 것이 아니라 죄를 통해 깨닫게 된 말씀 때문이었다.
시인은 죄 때문에 신음하면서 말씀을 놓지 않았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性品)과 자신의 마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늘 시인의 회개(悔改)의 경험은 다음 두 가지를 보여준다.
a. 범죄한 영혼의 비참(悲慘)과 마음의 상태
b. 절망적(絶望的)인 악에서 건지시는 하나님
시인은 이때만큼 자신에게 낙심(落心)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욱 하나님의 은혜에 목말라하였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런 진지한 회개가 사라졌기에 감격적인 용서도 경험하지 못한다. “나는 회개하기 위하여 세상에 태어났다”(Tertullianus)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깊고 진실한 회개(悔改)다. 죄를 발견하지도 못하고 뉘우치지도 않는 사람이 어찌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겠는가?
B. 생명을 간구함
시인은 자신의 영혼을 주의 사랑으로 구원(救援)해 달라고 간구한다. 그는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고 싶었을까?
이어지는 그의 탄식어린 간구가 그 질문에 대해 솔직하게 답을 해준다.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시 6:5)
사망과 스올(sheol)이 짝을 이루고, 기억(記憶)하는 것과 감사하는 것이 짝을 이루는 전형적인 대구법이다.
스올이란 아직 천국과 지옥(地獄)에 대한 신학적 개념이 분명하게 계시되지 않던 구약시대에 인간 사후에 들어가는 상태였다.
악인만이 아니라 선인도 함께 들어가는 곳이었으며, 음울하고 생명(生命)의 기운이 결핍된 상태로서 기쁨이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스올에 있다는 것은 현세에서 기쁨을 누리는 생활과 비교했을 때, 그것은 곧 절망(絶望)의 상태를 은유하였다.
시인은 죄 가운데서 영혼의 생명이 사라지는 정신의 낙망을 경험하였다.
구약의 표현에서 기억(記憶)한다는 것은 곧 찬양하거나 사랑으로 그 대상을 기린다는 뜻이다.
시인은 자신이 겪고 있는 무기력과 절망과 좌절을 스올로 표현하였다.
따라서 스올(sheol)에 있다는 것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實狀)은 죽은 자처럼 살아가는 사람의 상태를 비유하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자기 영혼을 건지고 구원해 주시도록 간청한 이유였다.
시인은 생명(生命)을 간구하였다. 그는 자신이 산 자로서 죽은 자처럼 스올과 같은 영혼의 침체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거기는 시인(詩人)이 가보지 않은 길이었으니, 생명이 없이 죽음을 친구 삼은 채 걸어가야 하는 길이었다.
스올과 같은 상태에서 좀비처럼 살고 있던 시인(詩人)에게 심장이 터지도록 그리운 것은 생명이었다. 영혼의 생명이었다.
시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사(感謝)의 찬송을 드리며 살아왔다. 영혼의 생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인이 죄를 짓고 곤고(困苦)해지기까지는 그것이 행복(幸福)인 줄 몰랐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육체의 생명(生命)은 육신을 살아 있게 하는 힘이다. 정신의 지도를 따라 행동할 수 있게 하는 힘이다.
영혼(靈魂)의 생명은 인간의 정신(精神)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게 해준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참된 주체성(主體性)을 가지고 살 수 있게 해준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하나님의 생명은 오직 그리스도(Christ)를 통해 온다. 신자는 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이다. 영혼의 생명을 받은 사람이다.
* 유사 생명과 사랑
인류역사 이래 사람들이 그토록 우주의 기원과 인생(人生)의 의미를 깨닫고자 탐구한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살아가는 힘을 얻기 위해서였다.
심지어 회의주의자(skeptics)들도 인생에 대한 회의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잘못 확신하는 것이 두려웠기에 그리한 것이 아니었는가?
어느 모로 보나 그들은 스스로 살아가는 데 도움을 받고 싶어서 의심한 것이었지 죽고 싶어서 의심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다(요 6: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그리스도가 충분히 계시(啓示)되지 않던 시대에도 시인은 영혼의 생명 없이 살아가는 비참함을 경험했다. 그것은 죄를 통해 경험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恩惠)가 절실하게 필요한 자신을 발견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그 사랑이 영혼을 살게 하는 생명(生命)이었으니, 그것을 회복하기를 그리워하며 간절히 회개했던 것이다.
III. 적용과 결론
우리는 인생길에서 온갖 역경(逆境)과 시련을 겪게 마련이다.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더 많게 마련이다.
신앙(信仰)은 그것들을 통하여 우리가 더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데 있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가? 은혜가 아닌가? 은혜(恩惠)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다. 그 사랑이 곧 영혼의 생명이다.
그 영적 생명(生命)으로 모든 환경을 이기며 믿음으로 살 수 있게 된다.
인생이 힘든 것은 영혼(靈魂)의 생명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은혜가 필요하다.
비록 시인은 크게 범죄하였으나 오직 하나님의 인자(仁慈)하심만을 바라보았다. 죽은 자 같은 영혼에 생명 주시길 믿음으로 갈망하였다.
마침내 응답을 받았고 하나님의 용서(容恕)를 경험하였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믿으라.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다. 거기에 살 길이 있다.
시편 6편 강해4(끝) 2022. 12. 4 주일 낮예배
< 울음소리를 들으실 때 >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소리를 들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시 6:8-10)
I. 본문해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슬픔과 탄식 속에 괴로워하던 시인은 여기서부터 자신의 담대한 확신(確信)을 보여준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응답을 들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어떤 주석가들은 시인이 문제를 안고 성전으로 들어가는 예배자를 그리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시인의 담대한 확신은 제사장이나 성전 봉사자들을 통해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신탁(神託)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본다.(삼상1:17참고)
II. 울음소리를 들으실 때
시인은 환란 중에 자신의 죄(罪)를 생각했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느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자신을 많은 행악자들 중 한 사람으로 여기실까 두려워하였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시 42:3)
그러나 기도응답을 통하여 의심의 어두운 그늘은 걷혔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악인들과 한 부류로서 다루지 않을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소리를 들으셨도다”(시 6:8)
이제 시인은 자신을 모욕하던 자들에게 대항(對抗)할 확신이 생겼다. 그들은 시인이 슬프고 괴로울 때 고통을 더할 목적으로 괴롭혔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경험했다.
A.들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불쌍한 시인의 기도에 응답(應答)하셨다. 그 시인의 간절한 회개를 받으셨다. "여호와께서 내 울음소리를 들으셨도다."(시 6:8)
이것은 하나님이 회개하는 시인의 간구를 들으셨음을 보여준다. 다시 하나님과의 교제(交際)의 문이 열린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품에서 내쳐진 것과 같이 버려진 영혼이었는데 다시 하나님의 은혜의 품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가장 불쌍한 때가 언제인가? 질병과 고통, 시련과 역경을 만났을 때가 아니라 기도할 수 없을 때다. 한 때 시인도 그랬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성찰하며 회개(悔改)했고 그의 끈질긴 기도에 응답해주셨다. 그의 마음을 때리셨으나 뉘우치자 고쳐주셨다.
무엇 때문인가? 하나님의 언약적(言約的) 사랑 때문이었다. 시인은 하나님을 떠났으나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시인을 긍휼히 여겨주셨다.
시인은 그 사랑(love)을 희미하게 보았으나 우리는 명료하게 본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났기 때문이다.
시인의 하나님의 인자(仁慈)하심을 믿어서 그분께 피하여 은혜를 입었다. 십자가 사랑을 믿고 그리스도께 피하는 사람은 얼마나 더 많이 긍휼히 여겨주시겠는가?
기도에 응답을 받은 계기로 그는 미래에 대한 확신에 넘치게 되었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시 6:9)
시인은 하나님께서 용서(容恕)하신 것을 경험했다. 이제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살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B. 담대함을 회복함
시인은 한동안 양심의 송사와 율법(律法)의 정죄 앞에서 영혼이 파리해졌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시 담대해졌다.
시인이 다시 은혜를 받고 하나님 앞에 살 힘이 생겼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고 기도(祈禱)를 받아주셨기 때문이다.
원수들의 목표는 시인을 하나님(God)께로부터 떼어놓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불신하게 하여 절망 중에 원망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인은 담대함을 회복하였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다시 만나주셨기 때문이다. 용서해 주셨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도 기도할 수 있으면 살 수 있다. 사면(四面)이 벽으로 막혀있어도 기도할 수 있으면 희망이 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시기에 이성을 뛰어 넘어서 희망을 주신다.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할 수 있으면 희망을 본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시인은 실패를 딛고 절망(絶望)에서 벗어나 다시 담대함을 얻었다. 자신의 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기를 괴롭히던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물러나게 될 것을 굳게 믿었다(시 6:10).
악을 행하며 비난하려던 자들은 검불이었고, 자신은 하나님의 집에서 사랑받는 감람나무임을 알았다.
시인은 더 이상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움으로 하나님 앞에 다시 설 수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이런 은혜(恩惠)를 믿으라.
III. 적용과 결론
1. 주께서 책망하실 때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시 6:1-2)
녹취자 : 조복령
<시편 6편 강해> 설교를 시작하며... 이 시는 참회시인 동시에 질병시다. 즉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의 질병에서 구원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탄원시다. 죄가 무엇인지는 고백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의 진노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거기서 간절히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다가 응답을 받은 경험을 노래하고 있다. 고난 속에서 영적인 혼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영적인 회복을 주실 것이다.”
I. 본문해설
시편 6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그리고 표제에는 성가대 지휘자에 맞춰서 낭독하도록 되어 있고, 현악 여덟 번째 줄에 맞춰서 이 노래를 부르게 지시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핫쉐미닛'라고 하는 이 여덟 번째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많은 학자들은 추정하기를 아마도 현악 중에서 가장 음이 낮은 줄을 뜻하는 것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렇게 보면 이 시를 낭송할 때는 높은음과 가벼운 곡조에 맞추지 말고 장중하고 낮은음에 맞춰서 이 시를 낭송하라는 지시어인 것 같습니다. 이 시의 성격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참회의 시에 속합니다. 다윗에게는 일곱 개의 대표적인 참회의 시가 있습니다. 6편 · 32편 · 38편 · 51편 · 102편 · 130편 · 143편 등을 가리켜서 다윗의 7대 참회시라고 합니다. 6편은 바로 그 참회시 중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시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에도 참회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는 언제 쓰여졌는지 연대를 확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윗의 전기에 있어서 어떤 사건과 이 시가 관련을 갖고 있음에는 틀림이 없는데, 그게 어느 연대기적 사건인지가 불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추측하기를 크게 세 가지로 추측합니다. 첫째는 아마도 이 시는 아들 압살롬에 의해 반역을 당하고 요단 건너편으로 도망을 갔을 때에 그 비극적인 상황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토해놓은 참회의 시일 것이다. 이렇게 추측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추측일 뿐입니다. 그리고 저와 같은 사람들은 이 시의 배경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간음 사건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겁니다. 그것도 추측입니다. 왜냐하면 이 시가 바로 그런 절절한 회개의 정서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추측은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다윗의 생애에 일어난 매우 커다란 환란과 시련 속에서 시기를 특정할 수 없는 때에 일어난 사건을 배경으로 자신을 돌아보며 참회했던 기록일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연대기를 어디로 정하든지 결론은 마찬가지입니다.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는 원하지 않는 매우 비극적인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고, 그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다가 자기의 죄를 살펴보면서 통회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했고, 영혼은 자유를 얻게 되었다는 결론을 내리는데 있어서는 셋 중 어느 의견을 택해도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6편은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는 우울한 모습으로 시작해서 감격적인 용서를 경험하고 자유를 얻는 밝은 마지막 절로 끝이 납니다. 비극으로 시작했다가 말할 수 없는 희망으로 끝나는 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II. 주께서 책망하실 때
1절과 2절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주께서 책망하시는 장면입니다. 제일 먼저 그는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시 6:1)
A. 진노를 깨달음
그는 여기서 하나님의 진노를 깨닫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주의 분노', ‘주의 진노'가 짝을 이루고 ‘책망하다'와 ‘징계하다'가 짝을 이루고 있는 전형적인 평행법의 문체입니다. ‘분노'와 ‘진노'가 반복되고 '책망'과 '징계'가 반복됩니다. 이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을 짝을 이루어 반복해서 설명함으로 읽는 이의 마음에 이 사실을 각인시키는 문체입니다. 시인이 무엇 때문에 주의 분노 아래에 있게 되었는지, 무엇 때문에 자신이 징계를 받는다고 느끼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이것이 어느 순간에 저절로 깨닫게 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매우 커다란 시련 아래 있었고, 사망을 생각할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많은 죄가 양심의 거울에 비추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그는 하나님 앞에 자기가 많은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자신의 영혼에 주님의 분노가 세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주님의 진노가 자기를 때리신다고 믿었고,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자비를 호소하며 자기를 좀 봐달라고 애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통을 당할 때 신음 소리를 내고 그 고통을 피하려고 하는 본능은 인간이나 짐승이나 매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동물이 할 수 없는 일을 합니다. 그것은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려는 시도입니다. 동물은 단지 고통이라는 것밖에 모릅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그 고통 속에서 의미를 생각하고, 그 의미를 깨달으면서 자신의 삶을 고쳐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사는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태어날 때에 우리의 뜻을 따라 태어난 것이 아니듯이 죽을 때에 저마다 희망하는 모습이 있지만 모든 사람이 자기의 의지대로 죽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저것을 원하나 이렇게 죽고, 저 사람은 저렇게 살기를 원하지만 이렇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인간의 여정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긴 기간 동안에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날지 알지 못하고, 일어난 많은 일들 중에는 우리가 뜻한 일도 있지만 어떤 일들은 전혀 우리가 뜻하지 않았는데 일어난 일도 있습니다. 이 일 때문에 우리는 울고 웃고 가슴 아파하고 기뻐하며 일생을 희로애락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즐거울 때 웃고 슬플 때 애달파하는 것뿐이라면 우리가 짐승과 다름이 없을 것이지만 인간은 의미를 묻는 존재입니다. 시인이 어려운 일을 만났고 그 속에서 그의 양심은 깊은 찔림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함부로 속단할 수 없습니다. 지금 겪고 있는 시인의 고통이 특정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었는지 우리는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시인이 무슨 죄를 지었느냐에 우리가 주목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6편은 그것을 어떠한 자료도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 시의 목적 자체가 죄의 종류를 토설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불결함을 깨달은 인간의 영혼과 마음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어 우리도 그 길을 따라가게 하려 함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어쩌면 시인에게 아무 일도 안 일어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시인의 마음은 깊이 요동쳤습니다. 환란을 당했든지 혹은 그것이 적은 환란이었든지 큰 환란이었든지 우리는 함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환란으로 인하여 그의 마음속에 물결치고 있는 내면의 변화였습니다.
그는 고통을 받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어떤 메시지를 찾아내고 싶었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에 양심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보게 되었고,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그러나 아직은 발견하지 못했던 죄의 심각성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분노가 자신에게 세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자신은 죄의 절그렁거리는 쇠사슬에 묶여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삶을 살아왔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자기를 고칠 수 없었고 하나님은 자신의 죄에 대해서 책망하고 징계하고 계셨으니, 이 시인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영혼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슬픔을 토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통의 방식으로 우리를 당신 앞에 세우십니다. 고통받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 고통을 통해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고, 그 고통을 통해서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발견하며 하나님 앞에 자기를 보다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다윗이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느냐 하는 것을 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욥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이 인정해 주실 만큼 이 세상에서 아주 순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커다란 재앙이 내렸습니다. 순식간에 재산을 모두 잃어버리고, 집이 무너지고, 자녀들이 죽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하나님도 순전하다고 인정한 욥에게 그런 엄청난 시련이 닥친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는 욥기를 읽으면서도 1장 · 2장 · 3장 · 4장 읽어가면서도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도 순전하다고 한 그 사람에게 복 대신 재앙을, 하나님의 칭찬 대신 징벌을 내리셨는지 우리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아주 더 놀라운 비밀을 발견하게 됩니다. 욥 자신도 자신이 하나님 앞에 순전하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삶의 동기는 정화되었고 혹시 자녀들이 죄 지은 것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는 끊임없이 번제와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야말로 사람이 보기에 순전한 생각과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징계가 떨어졌습니다. 처음에는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오 취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라고 주님을 찬송하고 싶어 했지만 잠깐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욥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하나님 앞에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항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원망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이렇게 재앙을 내리신 것은 바로 욥으로 하여금 순전한 자라고 할지라도 그 마음에 숨겨져 있는 불완전한 죄를 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내리신 것이었습니다. 더 오랜 시간이 계속 지속되고 더 많은 징벌을 겪으며 욥은 찢어지는 고통 가운데 자신은 하나님 앞에 순전하다는 편견의 틀을 깨뜨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깨뜨리면서 전개되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면서 자기가 얼마나 교만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의 은총 아래 살아가는 것이 자신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것을 발견하며 징벌을 받아서 쇠잔해진 자신의 육체를 바라보면서 육체 바깥에서 중보자를 뵈올 것이라는 고백을 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욥의 신앙에 차원을 훨씬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 올리셨고, 욥은 예전에 머물던 신앙의 단계에서 벗어나서 보다 더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과 성품을 목격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욥에게 시련을 주신 이유였고, 이 시련을 당한 후 욥은 그런 환란이 아니었더라면 결코 눈을 뜨지 못했을 보다 깊은 하나님 은혜의 세계에 대해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인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와는 상관이 없이 어쨌든 그는 시련을 당하게 되었고 그 시련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볼 때 예전에 발견할 수 없었던 큰 죄들을 발견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처럼 이 시인의 마음에 깨달음을 주자 그는 예전에는 죄로 여기지 않았던 자신 안에 있는 많은 더러운 것들을 토해내게 되었고,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얼마나 구역질나는 존재인가 하는 것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메시지가 없는 시련은 없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의 삶이 행복하지 않다면 무엇이 여러분을 우울하게 하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환경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들 중에 우리에게 허락된 것이 없고,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하나님의 허락 속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면 그 상황은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가 틀림없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캐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게 숨막히게 하는 삶의 상황, 그리고 내가 직면하고 있는 어려운 위기, 이 모든 것들이 어디서 왔을까, 무엇 때문일까를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묻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물으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할 때 자신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반드시 거기에서 죄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의 빛은 우리의 작은 죄까지 보게 만들지만 우리의 욕심으로 어두워진 눈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빛을 본 사람에게 어두움은 빛보다 더욱 분명하듯이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은 빛이 더욱 찬란하게 보이는 법입니다. 이 시인이 죄가 많아서가 아니라 그가 이 시련을 통해서 발견한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너무나 눈부셨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죄를 자복하게 되었고, 자기가 분노 아래 있고 징계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먼저 어떤 시련과 환란을 당하고 원치 않는 상황을 만났을 때 그것을 그냥 세상이 흘러가는 바라고 생각하고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어려운 일들이 일어날 때 그리고 그것이 여러분의 마음에 쓴물이 될 때 여러분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이렇게 쓰디쓴 시련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기를 ‘아! 결국 이 세상에서는 이렇게 쓰디쓴 열매를 거둬야 하니 이 세상은 영원한 나의 집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세상에 붙어 있는 우리 마음의 끈끈이를 뜯어버리기 위해서 하나님은 종종 이 세상에서 쓰디쓴 시련을 맛보게 하십니다. 그 시련 속에서 우리는 이 세상을 경멸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어느 한순간도 놓고 싶지 않았던 인생의 밧줄을 벼랑 끝에서 붙들고 있다가 놓아버리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더 이상 자신의 삶을 지탱할 수 없을 것 같은 한계를 느낍니다. 그때 세상을 경멸해 보는 것입니다. '그래, 세상은 이렇게 하잘 것 없는 것이구나!' '이 세상은 잠시 지나가는 것이구나!' 이렇게 경멸할 때 이 시련은 졸고 있는 우리의 등짝을 내리치는 하나님의 죽비가 되는 것입니다.
졸고 딴 생각을 하며 세상에 취해 있고 기력을 잃어버릴 때 등짝을 내려치는 죽비의 소리는 우리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듭니다. 그리고 다시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서 여기에 살아있고, 어떻게 주님을 만났고, 어떻게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왔는지를 회상하게 되면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정신을 제자리에 돌려놓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의미와 이 세상의 한계를 동시에 깨달으며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장소로 여기면서 사명감을 가지고 살되, 이 세상이 영원한 자신의 집이 아닌 것을 알고 적절히 경멸하는 것은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아주 중요한 방법이며, 누구도 이 세상을 경멸하지 아니하고는 죄를 이길 수 없음을 우리는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책망하시고 있다는 사실은 바르게 하고자 하심을 보여주는 것이고, 징계하고 계시다는 사실은 여전히 그를 향해 기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인이 징계 중에도 절망하지 않고, 책망 중에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 개입하시고 여러분을 책망하고 계시다면 여러분은 아직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무엇을 잘못했을 때 마음의 고통을 느끼고 하나님의 징계를 느끼며 아파한다면 기뻐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을 아직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낱만 한 희망이라도 굳게 붙들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설득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희망으로 자신을 설득하는 것이며, 더 이상 설득되지 않는 자신을 만났을 때 우리는 거기를 절망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삶의 어려운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해야지만 이 시련에는 끝이 있습니다. 의미를 안다면 우리가 하는 일을 우리들이 보람을 가지고 할 수 있고, 의미를 모른다면 아무리 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살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고 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모든 변명과 핑계를 버려두고 자신의 믿음을 찬란한 하나님의 거룩함의 빛으로 비추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결국 내게 일어난 모든 어려운 일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게 하시기 위함이며 하나님 앞에 내가 정결하게 되고자 하나님이 주신 사건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시인이 진노를 깨닫게 된 것은 결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시인이 유별나게 큰 죄인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시인이 가진 죄의 크기가 아니라 그가 받았던 거룩함의 빛에 크기를, 밝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 영적으로 몽롱한 상태에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눈을 뜨십시오. 여러분이 당하고 있는 삶의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여러분 자신의 양심에 자신을 비추어 보십시오. 어디서 떨어지고, 어디서 미끄러졌는지, 어디서 하나님의 책망을 받을 만한 일이 일어났는지를 생각하고, 어떻게 마음을 새롭게 하며 주님을 붙들고 살아야 할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인처럼 하나님께서 책망하실 때 거기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칠 희망을 발견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은혜를 간구함
마지막 두 번째는 은혜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시 6:2)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제 마음에 떠오르는 한 장면은 이런 것입니다. 밤늦게까지 흐느껴 울며 괴로워하다가 시인은 자신도 모르게 잠들었습니다. 새벽에 눈을 떴고 뜨자마자 괴로운 마음이 엄습하였고, 전날에 잠들기 전까지 있었던 마음의 고통은 다시 눈을 떴습니다. 이불 속에 자신의 손을 넣어보았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어, 누구지?' ‘이게 뭐지?' ‘이게 어떤 사람이야?' 어깨로부터 팔뚝에 이르기까지 가슴과 배 그리고 허벅지에 이르기까지 만져 보았더니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평소 자신의 체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피골이 상접한 몸을 가진 한 사람이 거기 누워 있었습니다.
그는 먹는 것도 잠시 잊었고, 맛있는 것도 잊었고, 그 어떤 즐거움도 그의 마음에 기쁨을 주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망가진 것을 깨달았고, 그 원인이 자신의 죄라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과의 평화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는 몸이 수척해지기까지 하나님 앞에 여위도록 고뇌하고 괴로워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시인은 아주 놀라운 문학적인 장치를 가지고 호소력을 더하는 문장을 구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수척하였사오니'라고 하는 상태를 말하는 형용사와 ‘나의 뼈가 떨리오니'라고 하는 표현입니다. 수척한 것은 자신의 살로 이루어진 육체였고, 뼈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어 시에서 종종 영혼에 대한 상징어로 쓰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큰 환란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며 징계의 고통을 겪고 있었는데, 그것이 육체적으로는 바짝 마르게 하였고 영혼으로는 뼈가 서로 힘이 없어서 함께 부딪히며 두려움 속에 떨리고 있는, 그런 절망적인 상태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리차드 포스터가 말하는 바와 같이 오늘날 현대인이 겪고 있는 끔찍한 저주 중에 하나는 피상성(皮相性)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안에서도 마찬가지이고 기독교 바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이것은 소위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논쟁으로 이어지는 현대 철학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철학에서도 문제가 되는 것은 피상성(皮相性)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철학이 들어올 때 그 철학을 깊이깊이 탐구하고 탐사해서 소양을 더하고 깊이의 지혜를 더하는 사람들이 환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엷얄지' 그러니까 엷고 얄팍하게 지식을 만들어서 대중화하는 사람이 권력도 쥐고 돈도 손에 쥐게 되고 사회적인 지위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환영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끔찍한 재앙은 결국 그대로 대중들에게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이러한 피상성(皮相性)들이 결국은 생각이 그렇게 피상적이니까 삶도 피상적일 수밖에 없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피상적이니까 피상적이지 않고 무언가를 천착해서 들어가는 사람들은 모두 소외된 사람처럼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피상적이 되도록 요구하고, 아무리 훌륭한 깊이라도 일단 피상적이지 않으면 들어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독자가 없습니다. 들어주는 시청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튜브에 나오는 모든 지식들에 대부분 해당되는 공통점이 뭐냐 하면 넓지만 얇은 지식입니다. 전공자가 보면 전혀 동의되지 않는 혹은 정반대의 거짓을 설파하는 내용들도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거에 매력을 느끼고, 그런 것에서 권력을 얻고, 그런 것에서 부(富)를 쌓게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문제가 기독교 안에도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아무것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고, 듣기는 했지만 자기가 소화한 내용은 없습니다. 원래 기독교 자체가 인생을 새로운 시각에서 보게 하는 철학이고 종교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도 인생에 대한 새로운 견해가 없습니다. 옛날 견해를 그대로 가지고 있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새 견해를 가졌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냐? 그냥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바깥에서 자기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것을 발견하면 채집하듯이 교회 안에서도 그렇게 채집하려고 하는데, 이 두 개를 섞어 놓으니까 이것은 양식도 아니고 중식도 아니고 일식도 아닌 잡탕입니다. 요약하자면, 중식도 아니고 양식도 아니고 한식도 아닌 것을 모두 섞어 놓으면 그게 뭐가 됩니까? 제3의 요리가 되는 게 아니라 돼지죽이 되는 것입니다. 돼지나 먹기에 적합한 음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피상성(皮相性)이 가져다 준 저주입니다.
결국 그러한 것들이 기독교 정신에 깊이 침투되면서 사람들은 자신을 깊이 성찰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닫고 자신을 불행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요소가 무엇인지를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결국 인간은 피상성(皮相性)을 면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설교들이 결코 대중적일 수가 없습니다. 제가 하는 설교는 좋아하는 사람은 미치도록 좋아하지만, 싫어하는 사람은 아예 10분도 듣지 않습니다. 대중성이 있었더라면 훨씬 더 큰 교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대중성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확실한 사실 하나는 우리들은 이 피상성(皮相性)의 저주에서 벗어나지 않고는 결코 우리는 자유로운 주체로 인생을 살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자유로운 영혼으로 일생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 이면에는 이렇게 비참하게 어두운 다크 사이드(dark side)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떻게 말하자면 남들은 감히 들어가 보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속에 드나드는 그런 깊은 탐구가 있었기 때문에, 그 속에서 쓰디쓴 절망을 맛보았기 때문에, 그 깊이만큼 자유로운 삶을 산 것이라고 말해도 전혀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인이 어떻게 답을 발견했겠습니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 나를 고치소서"(시 6:2) 이렇게 하나님께 탄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묘한 것은 여기에서 ‘은혜를 베푸소서'와 나를 ‘고치소서'라는 두 탄원이 짝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역시 완벽한 평행법입니다. ‘수척하였다'는 것과 ‘뼈가 떨리다'는 것이 한 짝이고, ‘은혜를 베푸소서'와 ‘고쳐주소서'가 한 짝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은혜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은혜는 하나님이 가치 없는 죄인들에게 베풀어주시는 분에 넘치는 너그러움입니다. 그리고 좋은 뜻입니다. 시인이 바로 이렇게 자신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면서 깊이 절망하는 동안에 자신에 대한 모든 희망을 접은 것입니다. 나는 이제 내 힘으로 일어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내 안에는 어떠한 선한 것도 없다는 절망적인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이 지점이 바로 삶의 끈을 놓아 버리는 지점입니다. 그런데 그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지점에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간절히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안으로부터 나온 구원이 아니라 자기 바깥으로부터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개척교회 때였습니다. 저녁 때 기도하러 교회에 나옵니다. 그러면 이제 강대에 엎드려서 간절히 기도를 합니다. 문이 삐그덕하고 열리면서 한 사람 두 사람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물론 평일입니다. 그리고 중얼중얼 기도하는가 싶더니 흐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흐느낌은 나중에 통곡으로 변합니다. 그러면 강대에서 기도하던 저는 내 기도를 잠깐 잊어버립니다. 어떤 사람은 목소리로 누구인지를 알고 어떤 사람은 모르지만, 어쨌든 내 기도를 끊고 그들의 기도에 동참하며 저이의 사연을 들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함께 기도하게 됩니다. 그때 흐느끼는 소리가 피어린 통곡으로 변해갈 때는 제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무슨 사연인지 나는 알 수 없지만 얼마나 안타까우면 저렇게 평일 사람들이 모두 파자마 바람으로 소파에 기대어 텔레비전이나 보고 있는 이 시간에 어둡고 습기 많은 컴컴한 교회당을 찾아서 저렇게 피어리게 통곡하며 하나님 앞에 울부짖을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누구이든지 심지어 그가 무슨 죄를 지었든지 난 아무 상관이 없이 그 사람이 너무 가엾어서 내 심장의 살점이라도 떼어서 입에 넣어주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참다 참다 못하면 할 수 없이 기도를 끊고 일어나서 흐느끼고 우는 교인들에게 가서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해줍니다. 그러면 그들의 울음은 더욱 복받쳐서 더욱더 절절한 통곡으로 변하고 우리는 그렇게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밤중에 와서 엎드려 기도하고 누군가 흐느껴 울면 ‘저이는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사람인가?' ‘이 시간에 저렇게 눈물로 기도하는 저 사람을 도와주지 않으시면 하나님은 도대체 누구를 도우실까?' 이런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저는 순간 그 마음이 내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임을 깨닫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아십니까? 씩씩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자신만만하게 쾌활하게 명랑하게 사는 것, 그게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죄를 짓고 돌아와서 하나님 필요하다고,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 없으면 못 살겠다고 우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더 빨리 만납니다. 죄가 만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는 간절한 마음이, 은혜를 구하는 간절한 마음이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은혜를 구하는 마음은 논리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했으니, 이렇게 할 테니, 나와 거래를 하시죠.'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내가 이렇게 하겠습니다.' 그게 아닙니다. ‘내가 무엇을 했든, 내가 무슨 죄를 저질렀던, 그리고 나의 과거가 무엇이든, 그리고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일이 무엇 때문에 비롯된 것이든,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 봐주셔야 됩니다. 그리고 나를 도와주셔야 됩니다. 나에게는 하나님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고 당신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를 뛰어넘는 몸부림이 은혜에 대한 갈망입니다.
(찬양)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고자 갈망합니다
주여 어찌합니까
간절한 부르짖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련을 주시지 않았더라면 시인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았을 리가 없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양심의 거울에 죄를 비추어보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온몸에 앙상한 것이 느껴졌어도 그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었고, 눈물로 침상을 띄워도 하나님과의 관계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몸부림은 은혜를 구하는 몸부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하나의 해결 방식이 아니라 유일한 해결 방식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자 하는 바인 것입니다.
시인은 ‘은혜를 베푸소서'와 똑같은 표현으로 ‘나를 고쳐주소서'라고 호소합니다. 묻습니다. 왜 망가졌습니까? 왜 마음이 병들었습니까? 왜 영혼이 고장 났습니까? 왜 그의 삶이 풍비박산이 되었습니까?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결국은 죄 때문이었고, 그 죄는 다름이 아닌 은혜 안에 살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은혜 안에 살았을 때 시인은 순결한 음악가였고, 거룩한 철학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궁창 위에 가득한 것을 보았고, 그리고 온 하늘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했었습니다. 영혼에 어두움이 찾아왔고 그는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캄캄한 가운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베푸소서'라는 말과 ‘나를 고쳐주소서'라는 말은 동일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망가진 죄인들을 위한 치료제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많이 받으면 그 주님의 은혜가 내 마음속에 스며들어서 내 자신의 관계를 고치게 만들어 줍니다. 육체와 정신, 마음과 나의 행동, 이런 것들 사이에 관계를 고치고 영혼 안에서의 저급한 기능과 고급한 기능 사이에 조화를 이루게 만듭니다. 그리고 보다 더 높은 것에 통제를 받도록 만들어줍니다. 이러면서 내 마음에 잃어버렸던 질서들이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은혜를 잃어버리고 죄에 빠지게 되면 즉시 느끼는 것이 혼란입니다. 무질서하다는 것이 느껴지고, 그것이 매우 고통스럽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정돈된 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행복입니다. 우리의 욕망은 절대로 질서를 따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질서가 없어서 고통을 받다가도 질서가 잡히면 우리의 욕망은 다시 질서에 항거하기 시작하고, 욕망을 따라 질서를 무너뜨려 버리면 온 마음과 영혼이 고통을 받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육체의 삶에서도 똑같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필요한 만큼 먹고, 적절하게 운동하고, 절제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우리의 육체는 너무 좋아합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에 야식을 하고 싶은 욕망이 막 솟구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규칙의 틀이 아주 성가시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걸 깨고 싶은 것입니다. 깰 때에 욕망은 최고조에 달합니다. 한 달 다이어트 끝에 찾아온 야식의 기회, 치킨과 피자 그리고 콜라와 사이다를 놓고 마음껏 먹을 때의 그 기쁨은 늘 그렇게 살던 때의 기쁨과 비교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따르면 그 다음에 질서들이 무너지고 다시 건강에 이상이 오는 것입니다.
이거를 계속해서 되풀이하면서 살아가는 게 인간인데, 이런 똑같은 일이 인간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금 시인은 그런 자신의 내면의 질서가 무너진 것을 발견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가운데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학적으로 고통은 원래의 좋은 상태로 돌아가는 과정입니다. 고통은 원래의 좋은 상태로 돌아가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에서 끝나면 진짜 고통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진짜 과정이 되면 그 끝은 정말로 선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말과 망가진 자기를 고쳐달라는 말을 동의어로 놓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 없음이 자기를 망가지게 만들었고, 하나님의 은혜만이 자신을 다시 새롭게 세울 수 있음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시인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말과 자기를 고쳐달라는 말을 동의어로 놓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은혜가 필요한 때에 놓여 있지는 않습니까? 망가진 채 살아가느라고 인생이 무겁고 삶의 심연이 더욱 깊어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절그렁거리는 죄의 쇠사슬에 매어 하나님의 분노가 여러분의 마음에 세찼건만 여러분은 그런 줄도 모르고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희망으로 불릴 만한 모든 것이 사라진 가운데 매일매일 고독의 깊은 절망을 잊어버리기 위한 마취제로서 즐거움을 찾으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영혼에 우울증이 오지는 않았습니까? 우리는 오늘 이 시인이 가장 고통스러웠던 때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고 자신의 죄를 발견한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면서 다시금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영혼에 은혜를 내려주실 때를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오게 된 과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에도 우리의 뼈가 떨리는 것 같았고, 우리의 몸이 수척해진 것 같이 깊은 고뇌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어떠한 희망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 자신을 넘어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 우리들의 간절한 소원을 따라서 주님은 우리의 마음이 준비되었을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모든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으며, 나의 인생의 모든 무게를 짊어지고 나를 대신해서 형벌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나의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기 때문에 망가진 것이었고, 망가진 나를 고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이 세상에 어떤 양약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되었고, 그 은혜를 영약으로 여기며 하나님 앞에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은 가난하게 되었고 주님의 분노가 우리에게 세찰 때 우리는 그 분노에 절망하는 대신 십자가의 은혜의 품으로 우리는 도망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서 피 묻은 그리스도 예수의 가슴에 안길 수 있었고, 그 피로 우리를 깨끗케 해주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제 나를 더 이상 의지하며 나에게 속으며 사는 대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에 의해 설득당하며 살기로 다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껏 이 믿음으로 살아왔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갱신이 필요한 때입니다. 나태한 우리의 등짝을 하나님 진리의 말씀으로 죽비를 때리고 다시 한번 정신 차려서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이 어떻게 살리셨는지,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았던 때에 우리가 걸었던 어둠의 길이 얼마나 끔찍한 길이었고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길이었는지를 생각하며 뜻을 정해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다시 그 길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며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품이야 말로 내가 쉴 수 있는 마지막 안식처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두운 밤 지하 예배당을 드나들며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던 성도들처럼 그렇게 어딘가에서 여러분도 이 시인처럼 마음을 쏟아 놓으실 때 하나님은 여러분을 긍휼히 여기시고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지 거기서 만나주실 것입니다. 그 주님을 만나고 다시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떨리는 영혼의 간구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시 6:3-4)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시인의 관심은 피골이 상접한 자신의 육신에서 영혼이 고통받는 상태로 옮겨갑니다. 왜냐하면 모든 육체의 고통이 영혼의 문제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죄를 지었고 가혹하리만치 오래도록 지속되는 영혼의 침체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절망감 속에서 울부짖으며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어느 때까지입니까?
II. 떨리는 영혼의 간구
여기서 우리는 떨리는 영혼의 간구를 만납니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 뼈까지 떨리고 영혼까지 떨리는 가운데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합니다. 그리고 이 기도는 자신의 영혼을 담아 울부짖는 비명소리 같은 기도였습니다.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시 6:3) 시인에게 떨리는 뼈들과 떨리는 영혼은 동의어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자신의 죄 때문에 고통받는 시인의 내면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두 가지를 간절히 호소합니다.
A. 영혼을 건지심
제일 먼저 그는 자신의 영혼을 건져달라고 간구합니다. 여기서 ‘건지며’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뜯어내다, 빼내다, 떼어내다, 구출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심하게 고통받는 상황을 통해 시인은 자신의 마음의 밑바닥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와 비참의 끈끈이에 달라붙어 있는 영혼을 발견했습니다. 지금은 쥐가 그렇게 많지 않은데, 예전에는 쥐가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쥐틀을 놔도 몇 번 속고 나서는 쥐들이 쥐틀 속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끈끈이라는 것이 나왔었습니다. 음식을 놓고 끈끈이를 놓으면 그걸 먹으러 가다가 끈끈이에 달라붙습니다. 거기에서 빠져나오려고 쥐가 몸부림치면 칠수록 그 끈끈한 젤(gel)이 쥐를 온통 휘감아서 아침에 나와보면 쥐가 끈끈이에 붙어서 죽어있습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있고 그 죄에 마음이 동의를 할 때에는 죄가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실감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자기가 죄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거기서 벗어나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면 비로소 죄의 속박하는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강물이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 위에서 물장구를 치고 강물이 흘러가는 대로 자신의 몸을 맡기면 강물의 힘을 느낄 수 없습니다. 부드럽게 떠내려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발을 강바닥에 딛고 그 물을 마주하고 서 있는 동안에는 상상할 수 없는 강 바깥에서 볼 때는 결코 느끼지 못했던 엄청난 힘으로 자신의 몸을 밀어내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똑같습니다. 그렇게 죄를 깨닫고 그 죄와 싸우려 할 때 매우 큰 힘이 자기 바깥에서가 아니라 자기 안에서 자신을 죄 가운데로 밀어내고 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리 떠나보십시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의 가엾은 영혼은 철그렁거리는 죄의 쇠사슬에 메인 채 낯설고 어두운 비애의 땅을 걸어 걸어 절망의 벼랑 끝으로 다가가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 살았던 삶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돌이킬 힘도 없고, 죄를 버릴 수 있는 능력도 없을 때, 가엾은 영혼은 비로소 자기를 도울 자가 아무도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시인은 깊은 고통 속에서 자신의 죄의 밑바닥을 보게 되었고, 그렇게 죄의 끈끈이에 붙어 있는 자신을 보면서 비로소 영혼의 자유를 잃어버렸음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자유를 다시 되찾기 위해서 몸부림칠 때 비로소 죄가 얼마나 단단히 자신을 얽어매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비극적인 영혼의 상태를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합니다. 거기서 자기를 떼어내 달라고 하나님께 울부짖습니다. 영적인 깊은 침체에서 벗어날 수 없고, 그 죄의 가책으로부터 헤어 나오는 것이 자신의 힘으로 되지 않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시인이 이제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죄에 빠져서 그동안 하나님을 멀리 떠나 살아가고 있었는지를 깨달으며 영혼의 신음소리를 기억하고 하나님께 돌이키기로 결심합니다. 죄 때문에 세상 사랑으로 흩어졌던 마음을 모아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러자 그의 영혼의 시선은 즉시 하나님께 고정되었습니다.
우리가 매일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이 안전한 상태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면의 죄 때문에 위기에 처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지는 않았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관심사를 외적인 것들에 다 돌려버리고, 감각적인 것에 정신을 팔고 자신을 성찰할 수 없을 때 인간은 결코 행복에 이를 수 없습니다. 저 멀리 소크라테스 이전서부터 현대 철학자에 이르기까지 도대체 사람들은 행복에 대해 뭘 생각했는지를 한번 전체적으로 살펴볼 기회가 최근에 있었습니다. 다 읽고 느낀 것은 아무도 헛소리 한 사람은 없고, 아무도 진짜 얘기는 한 사람이 없고, 모든 사람의 이야기가 부분적이고 파편적입니다. 그래서 누구 하나의 견해를 취한다면 그것은 결코 행복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리고 행복이라는 것 자체가 육체와 정신, 영혼에 걸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가 어떻게 변하느냐에 따라서 행복의 견해도 약간씩 수정하지 않으면 비현실적인 목표가 됩니다.
그런데 그리스와 동양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역사를 통틀어서 누가 행복을 논하든지 간에 결코 제외할 수 없는 두 가지 요소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인식의 질서와 사랑의 질서입니다. 그러니까 인식의 질서는 말하자면 여기서부터 시작을 해서 위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들 그리고 보이는 사물들을 존재하게 한 보이지 않는 세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물들의 질서를 자기가 인식하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무엇이 가장 높은 것이고, 무엇이 그보다 낮은 것이고, 무엇이 중요한 것이고, 무엇이 덜 중요한 것인가 하는 인식의 질서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누구도 행복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는 사랑의 질서입니다. 그 사랑의 질서는 중요하고 영원한 것은 많이 사랑하고, 덜 중요하고 영원하지 않은 것은 적게 사랑하고, 소중한 것에는 더 많은 사랑을, 덜 소중한 것에는 그에 합당한 사랑을 줄 때 그것이 사랑의 질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식의 질서와 사랑의 질서가 통합이 되어야 하고, 그것을 기본으로 시대마다 관점에 따라 행복에 관한 견해는 조금씩 조금씩 다른 것을 보태거나 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를 통째로 옮겨놓고는 결코 인간이 행복에 이를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점검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혹시 나는 이 세상에 보이는 사물들의 질서에 매혹된 나머지 진정한 인식의 질서 속에서 내가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반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가 필요한 때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영원한 것과 잠시 있는 것을 구별하고, 영원한 것에 의해서 잠시 있는 것들이 모두 빗질하듯이 쓸려나가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영원한 것이 영원하지 않은 것보다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정신 그리고 그것과 단절한 세상에 있는 것들이 그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이 헛되다는 것을 알고 영혼의 안전을 위해 근심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건져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위기 속에서 불안한 당신의 영혼을 구원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시인은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자신의 마음의 밑바닥을 보았고, 거기서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헤어 나올 수 없는 한계를 느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만이 자기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주님 앞에 매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멀리멀리 떠났을 때 가졌던 그 마음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해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혼에 대한 염려를 간직하고 주님께 호소할 때 여러분의 영혼은 안전할 수 있으니 이렇게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사랑으로 구원하심
마지막 두 번째는 사랑으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사랑으로 자기를 구원해 달라고 간절히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 선택지 중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도저히 자신이 희망이 없기 때문에 마지막 남은 희망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에 기대어 보는 것입니다. 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시 6:4) 자신의 영혼이 불행하고 비참하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주의 사랑으로 구원하소서’라는 번역에서 ‘사랑’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로 ‘헤세드(חֶסֶד)’입니다.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인자’를 뜻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성격이 달라 어떤 사람은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싫어할 수 있지만, 인자한 사람을 미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신의 이익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인자는 인자를 베푸는 사람의 성품이 사랑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가엾게 여기고 친절히 돌보는 성품입니다. 자신의 이익에 대한 애착이 없기 때문에 자기에게 손해를 끼치는 사람조차 용납하고, 모든 올바른 질서로 돌아와 주기를 바라는 그것이 바로 인(仁), 인자(仁慈)입니다. 심지어 오류에 빠진 사람들도 쳐내고 파멸하는 대신 그도 타이르고 돌보아서 올바른 질서로 돌아오게 하여 많은 사람에게 어진 삶을 살도록 격려하는 것이 인자한 성품이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이 인자를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마음이 너그럽고 어질며 모든 가엾은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친구가 그치지 않고, 포악하고 강포한 사람들에게는 적수만 있지, 친구는 없습니다. 따라서 시인의 이러한 간구는 영혼의 깊은 위기 속에서 자기를 의존하는 마음을 철저히 버린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오직 모든 희망을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걸고, 그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자신의 이 고통의 문제를 풀어보려고 한 것입니다.
저는 아주 한없이 가난한 세월을 지내본 적이 있기 때문에 가난이 얼마나 불편하고 아픈 것인지를 압니다. 육체를 위한 자원이 결핍된 것을 가난이라고 부릅니다. 자신을 위해서 먹고 입고 쓰지 못하는 것은 덜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가족을 위해 자기가 도울 수 있는 여력이 없을 때 그리고 맏아들로 태어나 가족들에게 도움을 줄 수 없는 무력감을 느낄 때의 그 고통은 육체의 아픔을 능가합니다. 이처럼 육체를 위한 자원의 결핍은 우리에게 무력감과 고통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영혼의 자원이 결핍되었을 때 느끼는 고통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영혼을 지탱할 수 있는 자원이 완전히 끊어졌을 때, 그때 우리는 살아있다는 이 실존을, 살아있다는 사실을 지탱해갈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시간과 공간 속에 살고 있는 이 실존을 견뎌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자기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게 될 때 우리는 거기에서 절망의 벼랑에 몸을 던지든지 아니면 울부짖으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이때 우리의 마음은 가난해지고 파산 선고를 받은 것 같은 그런 심정이 되어 겸비함을 배우게 됩니다. 신앙이 없으면 그 지점을 절망이라고 부르고, 믿음이 있으면 그 지점을 갈망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자신이 좋아서 자신의 손에 이끌려 죄에 빠져 들어갔고 하나님 거스르는 삶을 스스로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영혼이 비참하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그것이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생명이신 하나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자기도 스스로 자신이 싫어질 때에는 자신에게 희망을 거는 것 자체가 칙살스럽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결국 이는 죄를 사랑하던 자신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는 미움인 것입니다. 그때 더 이상 자신을 신뢰하지 않게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을 멀리 떠나게 만든 자신을 원망하고 미워하게 되는 것이니, 이런 사람이 다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으로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는 자기를 의지하든지 하나님을 의지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결국 자기를 불신하는 것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깊은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사람 속에 있는 기도의 정신인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원망과 하나님께 대한 불평을 그치십시오. 사람을 만나 사람에 대해 원망하고, 사람을 만나 하나님께 대해 불평하는 그 일을 그만두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의 인생에 추호도 도움이 되지 않고, 마음을 더 많은 죄로 먹칠하는 것이 될 뿐입니다. 자신이 자기의 행복을 위해 이바지할 수 있는 것이 여기까지 임을 정직하게 고백하고 눈을 들어서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사람이 2m 정도의 웅덩이에 빠지고 거기서 고개를 들면 온통 하늘밖에 안 보입니다. 근데 20m의 웅덩이에 빠지면 온통 흙과 땅과 어두움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늘은 동전만 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땅바닥을 바라보는 자는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지만, 동전만한 하늘에 시선을 고정하는 사람들은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희망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떠난 것은 악한 자신이건만 이상하게도 시인은 하나님 보고 돌아오라고 부르짖습니다. “여호와여 돌아와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니, 이는 스스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이 불구가 된 자신의 영혼에 대한 탄식입니다. 참된 기도는 오직 하나님 한 분께만 희망을 두는 것입니다. 오로지 그의 자비와 긍휼만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진정으로 겸비해지는 것은 영혼의 깊은 침체 속에서입니다. 거기서 자신의 영혼을 위해 티끌만큼도 좋은 일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때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자기를 살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거기서 가장 겸비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고 의지하던 모든 것들을 모두 내던지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자기를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며 하나님 앞에 지난날들을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믿고 살아왔던 모든 것들이 사실은 자기가 의지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능력으로 자기를 구원해 주시고 건져주셨는데도 스스로 자만하여 하나님 의지하는 마음을 버리고 자기를 신뢰하였기 때문에 결국은 스스로 오류의 어둠 속을 걸어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덧없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구원의 감격은 사라집니다. 세상 즐거움에 빠진 채 은혜의 갈망은 사라지고 있지 않습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은혜에서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다른 이유 말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 나 같은 죄인을 살려주시고 건져주셔서 여기까지 나를 인도하여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러주신 그 세밀한 사랑 때문에 '이것은 나의 분에 넘치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라는 감격 때문에 눈물 흘린 적이 언제입니까? 주님의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그리고 이 걸레 같은 인간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어루만지시고 그 피로 내 마음을 적셔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뜨거운 눈물이 쇳덩이 같은 뺨을 녹이며 흘러내렸던 적이 언제였습니까?
지난 금요일 연합기도회가 있었습니다. 코로나 기간인데도 많은 성도들이 나왔습니다. 주님이 은혜를 주셨고, 많은 성도들이 밤늦게까지 눈물로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하나님께 너무 감사했습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는 자신의 설교에서 말하기를 '성도는 마른 눈을 가지고는 천국을 볼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 때문에 흐르는 눈물이 없으면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은 세상에 있는 것들뿐입니다. 그리고 보이는 것이 세상뿐이면 결국 우리는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면 누구든지 그 마음 안에 하나님의 사랑은 없습니다. 그래서 미끄러지듯이 그렇게 우리는 너무나 쉽게 세상 속으로 자기애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그만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그 똑같은 과정을 거쳐서 시인이 깊은 웅덩이와 같은 영혼의 침체 속에서 울부짖게 된 것입니다. 거친 들판을 헤매는 한 마리 이리처럼 굶주린 배에 포악한 눈빛으로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며 포달을 떨어보지만 그것으로 영혼의 비참을 면할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니 선하신 그분께 반항하면 반항할수록 그는 행복으로부터 멀어질 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그 하나님께 대항하면 대항할수록 사랑으로부터 멀어져 모든 이로부터 버림받는 소외와 고독을 불러올 뿐입니다. 온 우주 캄캄한 공간에 혼자 던져진 것 같은 밑도 끝도 없는 외로움 속에서 그는 영혼의 위로를 찾을 길이 없습니다.
이때 그는 세상에 있는 것들에 정신을 팔게 됩니다. 그렇게 세상에 있는 것들에 정신을 파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비추어볼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렇게 위로를 구하는 세상에 있는 것들은 시간 속에 흘러가고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듯이 공간은 우리에게 사랑할 것을 제시하지만 시간은 그것을 빼앗아 가버립니다. 그리고 그것을 찾고 구하던 자신도 결국은 시간 속에 흩어지는 소멸할 존재일 뿐이니 그 두 가지 모두가 우리에게 슬픔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사라져 갈 필멸의 존재로 없어질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니 그것을 사랑하는 자신도 슬픈 존재이고 사라져가는 것들도 사랑하기 때문에 슬픈 것들이니 둘을 겹친 비애에 우리의 마음은 야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햇빛을 잃은 식물과 같습니다. 때로는 어떤 식물은 햇빛 없이 전기 불빛으로 생명을 이어가지만, 그러나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물을 떠난 고기가 잠시는 살아 있어서 온몸을 펄떡이며 지면 위를 구르지만 그것은 잠시고 그 땅 위에서 숨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그 물고기가 있어야 할 곳이 땅이 아니라 물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생명의 하나님을 떠나서 어디에서 살아갈 힘을 찾겠으며, 사랑이신 하나님 품을 떠나서 어디에서 외롭지 않은 인생을 영위할 수 있겠습니까? 거친 들판을 헤매듯이 철그렁거리는 죄의 사슬에 메어 그렇게 낯설고 험한 비애의 땅을 걸어가는 것이니 그 끝이 어디이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시인도 그 끝이 없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밑바닥까지 내려간 후에 그는 주님의 분노를 느꼈기에 두려워 떨었고, 주님의 진노 때문에 징계를 받는다고 느꼈기에 몸부림치며 주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영하는 세상나라의 영광에 취하여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물질에 취했고 우상이 그것을 준다고 믿었습니다. 타락의 비탈길로 브레이크도 없이 내달리고 있는 그때에 이미 파멸은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 역사의 비탈길에서 눈물의 선지자였던 호세아는 하나님의 심정으로 통렬하게 울부짖으며 그 백성들의 발걸음을 멈추고자 하였습니다. 그것이 호세아 5장 15절의 말씀입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호 5:15)
예전에는 그렇게 사는 것을 합리화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진리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천국과 지옥도 몰랐고, 거짓된 이 세상이 얼마나 유한한지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십자가와 구원의 진리가 명백하게 알려졌습니다. 그러니 지금에 와서 여전히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생명의 땅에서 떠나 멀리멀리 그리스도를 떠난 것을 무엇으로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지 않는 마음은 밝은 양심의 빛 아래 부끄럽게 드러나고 영혼은 심하게 매질을 당하는 것이니, 그 피곤한 영혼은 갈 길을 잃은 채 상한 뼈처럼 떨리고 있습니다. 이때 한 질문이 우리의 등짝을 내리칩니다. ‘나는 어찌하여 하나님께 사랑으로 구원해 주시기를 간구하지 않는가?’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없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곧 사라질 것들이고 잊혀질 것들이며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을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채봉'이라는 제가 좋아하는 시인이 있었습니다. 한 10년 전에 작고하셨습니다. 50이 넘었을 때 시 한 편을 썼습니다. '엄마가 (천국에서) 휴가를 나온다면'이었습니다. 끝 연이 내 마음을 때렸습니다. ‘엄마가 천국에서 휴가를 온다면 나는 엄마의 품에 안길 것이다.’ ‘한 손으로 엄마의 젖을 만지며 이 세상 살면서 가장 서럽고 억울했던 한 가지 일을 고자질하고 엄마의 품에서 펑펑 울고 싶다’라고 하였습니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쳐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우리는 한때 주님을 멀리 떠났고 잃은 양이 되었습니다. 목자가 우리를 버린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목자의 음성이 싫어서 양떼를 떠나 거칠고 험한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거기에 자유가 있을 줄 알았지만, 가시덤불에 떨어지게 되었고 살아 보려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그 가시에 온몸은 상하여 피투성이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끼며 거기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 예수 홀로 우리를 구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기쁜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살아온 길을 돌아보니 내가 한 일 가지고는 그 은혜를 입을 길이 없었을 그때에 그리스도께서 "너희의 죄를 위해 내가 죽었노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피로 뿌려진 보좌에 이르기까지 난 그 핏길을 찢어진 휘장을 지나 인간에 의해 신발을 벗어버리고 맨발로 그 길을 걸었으니 하나님이 그것을 믿음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하보다도 더 귀한 그리스도 예수를 만났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명백해졌고 모든 사물이 뚜렷해졌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위에 있고 무엇이 아래에 있는지, 어느 것이 사라질 것이고 어느 것이 영원히 있는 것이며, 내 영혼이 무엇 때문에 어둠 속에 있었고 밝은 빛은 어디에서 비추어 오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눈이 뜨여지면서 이제껏 보지 못했던 완전한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전개되었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나 같은 인간이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더 사랑스럽기에 나를 내셨고, 그리고 그 길을 어찌 갈지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진리의 아름다운 빛을 우리의 마음에 빗살처럼 비추셔서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하게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핏길을 걸어 더러운 죄인이 용서받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품 안에 안길 그때에 여러분의 모든 죄는 용서받았고 여러분 속에는 진리의 기쁨과 하나님 사랑으로 충만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우리를 일으켜 세워 어머니 같은 교회에 우리를 맡기셨습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그 진리의 말씀을 먹으며 은혜를 양식으로 삼아 우리의 지성을 키워가고 사랑을 길러가며 거미줄 같은 믿음으로나마 여기까지 걸어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왜 우리의 마음이 그런 첫사랑의 감격을 잃어버렸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때 이 세상에서 아무 길도 찾을 수 없어서 절망 속에 발걸음을 예배당으로 옮기며 '하나님! 여기가 나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나를 버리지 마시옵소서.' 하던 그 절절한 의존의 마음을 잃어버린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습니다.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고 있었습니다. 제목은 '국경의 꽃제비들'이었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먹고 살 수가 없어서 국경을 넘은 북한 어린이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접경지역에서 그들은 구걸하며 양식을 얻었고, 그것도 여의치 않자 식품 가게에서 계란 하나를 훔쳐 먹었습니다. 그러고는 병신이 될 때까지 작대기로 두드려 맞는 그 광경은 눈 뜨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아이들도 그 엄마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일 것입니다. 그 애들도 아빠의 마음에는 이름 석 자만 들어도 가슴이 저며 오는 슬픈 이름이었을 것입니다. 꽃제비로 살아가고 있는 그들의 불행한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마음속으로 한없이 울었고 울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입니다. 왜 여러분이 생각이 났을까요? 성도들의 핏기 없는 얼굴이 떠오르면서 제 눈물은 탄식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애들은 엄마 아빠가 없고 나라가 가난했기 때문에 꽃제비 생활을 했지만, 여러분에게는 모든 것을 가진 하늘 아버지가 계시고 교회 어머니가 있어서 여러분을 사랑으로 돌보건만 그 품을 떠나서 영적인 꽃제비로 하늘나라와 지상 나라의 국경에서 그렇게 꽃제비로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훔치다 두들겨 맞고, 아버지의 집에는 얼마든지 많은 양식을 몰래 찾다가 설움을 당하는 그 끔찍한 일은 왜 일어나는 것입니까? 북한의 꽃제비들은 타의로 고향을 떠나야 했지만, 여러분은 스스로 원해서 하나님의 집을 떠나고 사랑의 하나님 품을 떠났기 때문에 꽃제비가 된 것입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이런 영적인 꽃제비들이 교회 안에 얼마나 많습니까?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고, 아버지의 집에 풍족한 것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사상사? 철학사? 웃기지 말라고 하십시오.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주는 기독교 지성의 깊이와 넓이를 능가할 철학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유산을 모두 버리고 거친 땅을 헤매며 온몸에 한기(寒氣)가 나고 온몸에 병이 깃들고 그리고 남의 나라 땅에서 작대기에 두들겨 맞으며 사는 그 생활을 운명이라고 여기며 사는 그 모습을 보며 눈물 흘리지 않을 교회 어머니가 어디 있고 가슴 아파하지 않을 하늘 아버지가 어디에 계시겠습니까?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고 모든 것이 풍족하신 능준하신 하나님이신데, 그분에게 무엇이 필요하여 여러분에게 내놓으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그 하나님이 그렇게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당신의 품으로 부르셨고 지금도 모든 것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상하게 아버지의 집에서 그 진리의 양식으로 배부르기를 선택하는 대신 꽃제비의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영혼은 핍절하고 그리고 정신은 방황합니다. 영혼이 기쁨과 만족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의 마지막 희망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나는 나 스스로를 고칠 수 없고 주님 앞에 받아들여질 만한 사람으로 세울 수가 없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것을 주님은 모든 덕들 중 가장 큰 덕으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애덕(愛德)보다 더 큰 신덕(信德)으로 여기시는 것이니 그렇게 당신을 믿고 의지하는 자라면 죄가 있으면 용서해주시고, 병들었으면 고쳐주시고, 불구이면 온전하게 하시고, 그가 외로우면 주님이 친구가 되어주십니다.
그는 노예 상인이었습니다. 아프리카 노예를 실어 나르던 상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깊이 감격했습니다. 수없이 가족을 잃어버려야 하는 불행으로 점철한 인생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굳게 의지하며 믿음으로 일생을 견뎠습니다. 늙어서 치매기가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그를 보며 근심 어린 표정으로 염려했습니다. 그때 그는 말했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내가 노인이 되고 기억을 잃어버려 모든 것이 잊혀진다 할지라도 두 가지 사실은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끔찍한 죄인이었다는 사실과 그리스도께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다는 사실을 잊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존 뉴턴입니다. 18세기를 살았던 하나님의 종이었고, 그가 남긴 노래가 오늘도 우리의 가슴을 울립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Was Blind, but now I see.
그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여 거미줄 같은 믿음으로나마 살게 하셨습니다. 항상 잘 산 것도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넘어졌습니다. 그리고 쓰러졌습니다. 그때마다 주님이 쓰러진 그 자리에서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시고, 나무라는 대신 우리의 상처에 약이신 그리스도를 발라주시고, 영(靈)약으로 우리의 눈을 뜨게 해주셔서 가던 길을 계속 가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 은혜와 사랑을 힘입어 우리는 더 거친 땅으로 걸어 들어가 영원히 황야의 이리 같은 존재가 되는 대신 주님의 사랑의 품으로 수시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 떠난 것은 우리였고 기다리시는 것은 주님이었으니 언제나 우리가 갑(甲)이고 주님이 을(乙)이였던 것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그분은 스스로 을(乙)이 되셨습니다. 그 사랑을 모르는 패역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갑(甲)질을 하였으니 우리의 이 죄가 그분의 가슴에 박힌 못이 되었고 그리스도를 두 번 십자가에 못 박는 죄를 서슴없이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인자한 사랑으로 우리를 설득해 당신 옆에 있게 하셨으니 우리가 오늘 여기에 있는 것도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스물한 살에 무신론자에서 기독교로 귀의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고도 저는 마음의 교만을 완전히 떨치지 못했습니다. 회심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결코 택하지 않는 직업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목회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생각하기를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무슨 보람이 있길래 교인들 코 묻은 돈을 먹고살겠는가 하는 교만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내 영혼에 복된 어느 날 주님은 저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일주일 동안을 교회에서 묵으며 직장을 다니며 금식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5일째가 되는 저녁 아무도 없는 예배당에 깊은 밤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무신론자인 나를 불러주시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예수 믿지 못하게 그들의 마음을 설득하여 희망까지 버리게 하였던 이 더럽고 추잡한 죄인을 다시 불러주신 것을 생각나게 해주셨습니다. "네가 그렇게 오랫동안 나를 떠나 무신론자로 살았으니 이제는 내가 있다는 사실을 전하여 그들을 생명의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라"는 어김이 없는 분부였습니다. 내 마음은 물같이 녹아졌고 주님 앞에 굴복했습니다. "주여! 내가 무엇이기에 주님이 나를 부르시나이까!" "나는 아무것도 아니오니 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나를 쓰시옵소서" 그것이 저의 목회의 부르심이었고 그렇게 불현듯 제 인생의 방향은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쯤 지난 다음 저는 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속에서 저는 어린아이로 변해 있었습니다. 한두 살짜리 어린아이는 아니었고, 네 살 다섯 살 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였습니다. 온몸은 벌거벗고 약간 추운 기운을 느끼며 팔과 다리를 웅크린 채 떨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얀 옷자락만 보이던 누군가가 저를 높이 들고 어디론가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고 대리석으로 만든 재단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저를 거기에 바치고 사라졌고, 차가운 대리석의 질감을 느끼면서 저는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한동안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나는 그 꿈의 의미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대답했습니다. 묻는 것도 나의 이성이었고 대답하는 것도 나의 이성이었으나, 뒤에 이성은 믿음의 지원을 받은 이성이었습니다. 그리고 울면서 꿈에서 깬 그 자리에 누운 채 기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이제 나는 어김이 없이 주님께 바쳐졌으니 이제는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옵나이다.”
(찬양)
내 모든 것 주의 소유 삼으소서
그 일이 있고 난 후 참으로 긴 세월이 흘렀고 돌아보면 하나님이 나에게 무한한 은혜를 베푸셨다는 사실과 그리고 나는 그 은혜에 합당한 만큼 살아드리지 못했다는 후회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도 사실은 이렇게 살아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 죄송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은혜는 너무 크고 나는 하나님 앞에 너무나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이런 삶을 살게 될 것이고 인생의 마지막 끝자락에서도 나는 이런 후회 섞인 감정으로 성도들에게 간증을 하며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간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모든 인자하심으로 나를 사망에서 건져주셨고, 불신자일 때만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신자일 때조차도 목회자가 된 지금에도 그리고 오늘도 그의 인자하심을 힘입어 내가 살아있고, 기동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뉴턴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심하는 많은 사람에게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십니다.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인자하신 하나님이니 당신도 그렇게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이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증거를 보십시오. 내가 바로 그 하나님의 은총의 증거입니다." 이렇게 고백을 했듯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며 아직도 어두운 이 세상 죄의 광야에서 머뭇거리며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영적인 꽃제비와 같은 여러분에게 나는 똑같이 말하고 싶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풍족합니다. 내 어머니 교회는 사랑이 무한합니다. 믿을 수 없거든 그 아버지, 그 교회의 어머니 품에서 오롯이 자란 저를 보십시오. 그렇게 죄 많고 쓰레기 같고 걸레 같은 인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은 죄는 용서해 주시고 받은 상처는 싸 헤매시고 수치스러운 것은 덮어주셔서 오늘에 내가 있게 하셨으니 여러분이 무엇을 의심하려고 합니까? 나는 똑같이 그렇게 묻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에 긴급동의가 있습니다. 그것은 네가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그대로 가지고 가도 좋으니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가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희망으로 자신을 설득하며 살아있는 한 살아가야 한다는 명제를 받아드리며 하나님의 은혜에 희망을 가지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구원함을 받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영혼의 깊은 골짜기에서 우리를 건지십니다.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용사가 되어주셔서 우리를 위해 싸우시니 우리의 영혼이 그분 곁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고 그분을 떠났을 때 우리의 영혼은 가장 불안한 것입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 하나님께 돌아갈 때만 기뻐하며 살 수 있는 것이니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십시오. 살아 있는 현실 그 자체가 감사의 제목이 되는 것이니 그분의 사랑 안에서 살아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감격을 누리며 모든 죄에서 건져주셔서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을 만나고 지금과는 비교되지 않는 환희의 삶을 살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내 눈물이 요를 적실 때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시 6:5-7)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시인의 영혼은 죄로 인해서 깊이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그 깊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즐거움으로 위로를 받기에는 시인의 슬픔이 너무나 컸습니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신령한 은혜, 달콤한 교제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왔습니다. 이런 은혜로운 것들이 삽시간에 끊어져 버렸을 때 그는 자신을 지탱할 수 없을 정도의 깊은 슬픔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범죄했어도 시인은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었고,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누구도 보여주지 못했던 위대한 영적인 회복을 향하여 달려가는 회개의 몸부림을 쳤던 것입니다.
II. 내 눈물이 요를 적실 때
그는 문학적인 표현으로 자신의 정신의 고통 때문에 육체까지 쇠잔하게 된 것을 말하면서 자기의 처지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시 6:7) 이렇게 고백합니다. 어쩔 수 없는 영혼의 깊은 탄식과 고통 속에서 그는 하나님 밖에 의지할 분이 없었습니다. 결국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왔던 시인의 이 믿음은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삽시간에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져 버렸지만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그리움이 가득했으니 그 그리움이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A. 눈물로 띄운 침상
그는 “눈물로 자신의 침상을 띄우고 자신의 요를 적셨노라”고 고백을 합니다. 많은 기도와 눈물 속에서 여러 날을 지냈고 특별한 회개와 간구의 시간을 가지며 그의 영혼은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시인의 철저한 회개가 얼마나 마음 깊은 곳을 훑고 지나갔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6절에서 시인은 고백하기를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 6:6)라고 했습니다. 그는 먹고 마시기를 거절했고, 이로 인해 안력(眼力)이 쇠하고 이불 속에 손을 넣어보니 몸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수척해 있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향한 깊은 갈망을 기도 속에 담고 어찌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몸부림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얼마나 많은 회개의 눈물을 흘렸는지 침상이 눈물에 띄워졌다고 말하고, 요를 적셨다고 말합니다. 이 고백에 과장이야 있겠지만 어찌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세월이 흘러가고 감각적인 문화에 빠져서 경건 생활할 틈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으며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에 죄가 쌓이게 된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은혜의 단비가 내리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이 마른 땅과 같이 갈라져 무엇도 싹 틔울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전 세대보다 훨씬 바쁜 삶을 살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쏟아 놓을 시간을 갖지 못합니다. 시간이 되면 교회에 몰려오지만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채 돌아가는 예배자들이 훨씬 더 많은 시대입니다. 이런 때에 우리들이 회개를 잊고 산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영혼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지 않는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시인이 그렇게 순결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구조사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이 두 가지 사건으로 그는 가슴 깊이 무너짐을 경험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그 과오를 통해서 시인에게 이제껏 보지 못했던 은혜의 세계를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죄 가운데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고통을 받고 작동하는지를 배웠고, 또 한 가지는 그런 마음으로 살 때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갈망하게 되는지를 터득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며 달콤한 교제를 누리고 있을 때 가본 적이 없었던 더 거친 메마른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황량함이 극에 달하면 달할수록 그는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속속들이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마음 깊은 곳에서 부르짖는 죄인의 탄식을 배우게 되었고, 엄습하듯이 밀려오는 죄의 세력 앞에서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체험적으로 배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모든 주석가들이 공통적으로 고백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는 시인이 지었으나 하나님은 그 죄를 사용하셔서 시인으로 하여금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알 수 없었을 은혜의 세계를 보여주셨기 때문에 다윗이 우리가 아는 다윗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죄가 그것을 선물로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죄를 짓고 깊은 고통과 단절감 속에 죽어간 사람이 이 시인처럼 회복한 사람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죄는 시인이 지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는 이 시인으로 하여금 죄를 지어보지 않았더라면 결코 알 수 없었을 은혜의 세계를 보여주셔서 어두움을 안 사람이 빛의 고마움과 찬란함을 아는 것처럼 그렇게 주님의 은혜에 눈을 뜨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 우리가 걸어온 길이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주께 가까이 가는 복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겠습니까? 메마르고 거친 비애의 땅을 걸어가며 절망의 벼랑 끝에 서본 적이 없었다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희망의 찬가를 부르는 기쁨을 우리가 알 수 있었겠습니까? 어두움을 통해 빛의 고마움을 알게 되듯이 인생의 절망 끝에 서봤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희망이 얼마나 큰지를 뼈저리게 경험하였던 것입니다. 시인은 이전에도 죄를 지은 적이 결코 없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고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죄를 지었으면 그도 하나님과의 단절을 경험했을 것이고, 심령은 곤고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달랐습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어떤 깊은 시련을 만나게 되었고, 그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자기를 비추어보게 되었을 때 너무나 비참한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환경을 통하여 자신을 성찰하게 되었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놓은 것이 자신의 죄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시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사건을 명백하게 배경으로 하고 있는지, 아니면 먼 후일 그 사건이 생각이 났는지, 혹은 이것도 그것도 아닌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근본적인 죄성을 본 대서 오는 탄식이었는지 우리는 쉽게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가능성을 생각하더라도 결론은 마찬가지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깊은 고난 속에서 죄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모든 죄가 만나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커다란 자각 속에서 어두움을 보게 되었고, 어두움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시인의 마음에 비친 찬란한 빛의 기억들은 거기에 머물 수 없게끔 만들었습니다. 소위 빛을 향한 갈망이었던 것입니다.
날 때부터 맹인이 된 사람은 맹인이 된 것을 그렇게 비참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 눈에 보이던 아름다운 모습을 잊을 수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한순간에 맹인이 된 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니 빛의 기억 때문입니다. 시인은 이 빛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시기를 거절하고 먹기를 포기하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되었는데, 안력은 쇠약하여 사물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고 처처(處處)에 대적들은 날뛰며 자신을 공격하기에 그는 마음 둘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하나님만이 자신의 인생에 참된 소망이시며 주님을 의지하는 것 이외에 자신이 참된 삶을 살 길이 없다는 사실을 깊이 터득하였던 것입니다. 되고자 하는 자신과 지금 되어 있는 자신 사이에 거리가 너무나 멀었고, 그 간격을 좁힐 수 있는 아무것도 자신에게는 없었습니다. 그가 눈물을 흘렸던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슬퍼서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이외에는 도움이 없는데 자신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는 절망감에서 비롯되는 눈물이었던 것입니다.
악인이라도 눈물을 흘리는 순간만큼은 진심일 것이니 이 눈물이 있는 신앙을 성경이 칭찬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에게 눈물이 있는 신앙을 칭찬받았고, 다윗은 그렇게 눈물로 침상을 띄웠기 때문에 그 많은 죄의 씻음을 경험했습니다. 당신의 품으로 피하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주시는 것이니, 시인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눈물로 침상을 띄우며 자신의 죄를 고백했고 하나님은 그의 그 고백을 받으셔서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전에 본 적이 없는 더 큰 은혜를 주셔서 우리가 아는 위대한 사람 다윗이 되어 그를 통해 그리스도를 다시 보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진실함이 있습니까? 사람이 어떻게 완벽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넘어지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하고 때로는 눈이 어두워 하나님 앞에 잘못 행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무엇으로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 심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 자신이 불러일으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힘으로서 여러분의 영혼 안에 심어놓으신 새로운 본성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습니다. 아무리 여러분이 나태하게 살고 심지어는 방탕하게 산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숨길 수 없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져도 채워질 수 없는 갈증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한 회개가 사라진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는 신앙생활을 영위해 나가고 있습니다. 껍질만 신앙생활일 뿐이지 내용은 없고, 무늬는 신자의 무늬를 가졌지만 마음속엔 세상 사람들의 마음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그런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도 진실하게 자신에게 간구하며 은혜의 도움을 간구하는 사람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그렇게 주님께 용서를 비는 모든 사람들 마음 안에 주님은 눈물을 주십니다. 그리고 우는 이가 깨달은 자이니 그렇게 눈물 흘리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 주님은 이미 와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 간절한 기도의 몸부림과 침상을 띄우는 눈물을 통하여 시인은 이제껏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고 은혜를 받았으나 아직까지 미치지 못하였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부패성을 보게 되었고, 소스라치듯이 놀라며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어려움을 통하여 그는 죄를 발견했고, 그 죄를 깨달음으로 인하여 주님 더욱 의지하게 되었으니, 눈물도 많아져 침상을 띄우게 되었습니다.
이전보다 자신의 밑바닥을 보면 볼수록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고, 자신을 향한 일체의 의존을 버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전에 자신을 사용하여 심지어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기를 기쁘게 하려던 마음은 변하여 하나님 때문에 자기를 즐거워하고 자기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고 싶다는 소원으로 가득 차게 되었으니, 빛의 기억은 어두움이 깊을수록 명료해져서 시인을 하나님 은혜의 보좌 앞으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아름다웠겠습니까? 비록 잠시 눈이 어두워 세상의 죄에 빠졌으나 그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를 알고 빛의 기억을 더듬으며 당신의 보좌 앞에서 울고 있는 이 시인을 보실 때 하나님은 사랑스러우셨을 것입니다.
한순간이라도 진실해지십시오. 하나님 앞에 마음을 기울이고 하나님 앞에 눈물이 있는 신앙을 갖게 해달라고, 흐느낌이 있는 믿음을 갖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십시오. 메마른 눈으로는 천국을 볼 수 없다고 스펄전 목사가 말했습니다. 이는 우리 인간의 모든 탐욕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향한 눈물이 씻어내고 눈물에 우리 얼룩진 마음이 닦이고 나면 보이는 곳이 천국임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이렇게 한순간이라도 진실하게 회개하며 주님을 찾는다면 주님이 여러분을 다시 만나주실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B. 생명을 간구함
마지막 두 번째는 생명을 간구했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영혼을 주의 사랑으로 구원해달라고 간절히 빌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고 싶었겠습니까? 이어지는 탄식 어린 기도는 이 질문에 답을 줍니다. 5절에서 그는 말합니다.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시 6:5) 여기에서 ‘스올'이라고 하는 것은 구약시대에 쓰여진 독특한 단어입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계시가 아직 분명하게 제시되기 전에 있었던 인간 사후의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가 바로 ‘스올'입니다. 이 ‘스올'은 악인만 내려가는 곳이 아니라 의인과 선인도 공정하게 가는 곳이었으니, 그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이 ‘스올'은 현세의 생생한 삶과 대조를 이루는 파리하고 기운이 없는 희미한 곳이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기뻐하고 슬퍼하고 좋아하고 행복해하는 격한 감정의 그 출렁거림이 모두 사라진 생기가 없고 음습한 그러한 곳이 죽음 이후의 상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사람들은 종종 이 ‘스올'에 내려간다는 말을 아무 희망이 없이 자신이 몹시 무기력한 상태에 빠지게 되는 절망감을 대신하는 표현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멀리 떠났을 때 경험한 것이 바로 이 ‘스올'의 상태였습니다. 육신적으로는 살아있으나 영으로는 살아있다고 말할 수도 없고 죽어 있다고도 말할 수 없으니, 죽은 사람에게는 고통이 없을 터인데 시인에게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육신이 없을 텐데 분명히 육신은 살아서 마른 뼈도 만질 수 있고, 안력이 쇠하여 사물을 분간할 수 없게 된 것도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를 믿고 있으나 ‘스올'과 같은 상태 속에서 사는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혹시 여러분이 바로 이 ‘스올'에 있는 사람들은 아닙니까? 주님과의 생생한 만남이 있습니까? 지난주에 얼마나 주님 앞에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까? 얼마나 많이 아픔에 눈물을 흘렸습니까? 다른 사람을 생각하며 흘린 눈물, 자기를 기억하며 흘린 눈물이 있었습니까?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논할 수 없다고 말했으나 눈물 젖은 찬송가를 갖지 않은 사람, 눈물젖은 성경을 갖지 않은 사람은 신앙을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진수는 단순한 지식이나 감정의 변화 속에서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의 실천을 통해 그 진수가 경험되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무엇인지는 기도를 배운 사람보다 그 배움을 토대로 기도해본 사람이 더 잘 압니다. 전도가 무엇인지는 전도에 대해서 학습한 사람보다 직접 복음을 전하며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해본 사람들에게 경험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스올'의 상태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시인은 빛의 기억 때문에 괴로웠고 어두운 현실 때문에 미칠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자신이 누리던 충만한 생명,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 자신의 영혼을 어루만지는 비단결 같은 말씀의 감촉들과 하나님 사랑의 흔적들, 물살을 가르며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처럼 그렇게 자유롭게 하나님 은혜의 세계에 살던 이 시인이 그 물을 벗어나 육지에 던져진 바 되었으니, 지금은 생명이 있어서 펄떡거리고 뛰고 있었지만 언제 목숨이 끊어질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처지 속에서 시인이 원한 것은 세상의 부귀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섬겼던 육체의 정욕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보다 자신의 생각이 지혜롭다고 여기던 그 교만도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필요 없는 것이었고 오직 하나님의 생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스올'의 상태에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좀비처럼 사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많습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랑을 덧입고 하나님의 피 묻은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파리하게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없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의 마음의 문제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믿음이 하나님 앞에 식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충만한 믿음으로 살 때 어려움을 만나면 만날수록 그는 몸부림치며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한계에 부딪힐수록 무한하신 하나님을 의지했고, 비참할수록 아름다운 하나님을 생각하며 주님께 돌아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의 죄와 싸울 용기도 없고, 현실의 거대한 물줄기를 거슬러 살고자 하는 마음까지 사라졌습니다. 이것은 거듭되는 실패 속에서 그 현실을 운명처럼 받아들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게 있냐 하면 신앙생활을 하면서 간간이 가끔이라도 은혜를 받아서 마음이 물같이 녹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은혜의 갈망이 솟아납니다. 그런데 데 이게 오랜 기간 동안에 전혀 그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잠시 비가 오지 않는 땅은 깊이 파면 씨를 뿌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오랜 세월 동안 비가 오지 않는 땅은 파도 파도 그 흙덩이가 돌멩이 같아서 씨를 뿌릴 수가 없습니다. 비가 오기 전에는 그 땅은 아무 쓸모없는 땅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가리켜 나는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떡은 당시 히브리 사람들에게 주식이었으니, 등가 번역을 하면 예수님이 “나는 생명의 밥이니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간식은 안 먹어도 살 수 있지만, 밥은 먹지 않고 살 수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그런 존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주님을 먹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먹음으로 그 주님이 우리와 연합되시는 것을 이렇게 생명의 떡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받음으로 우리는 주님과의 연합을 경험하고, 기도를 통하여 은혜를 먹음으로 주님과 하나 된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내 슬픔이 주님의 슬픔이 되고 주님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되는 일체의 삶을 살면서 우리는 시도 때도 없이 밀려오는 인생의 파도를 타며 삶의 항해를 계속할 힘을 얻는 것입니다.
사람이 행복하고자 하는 것은 누구에게 배우지 않아도 본성입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그러나 모든 사람이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원심력과 구심력이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어떤 물건을 손에 들고 돌릴 때 튕겨나가고자 하는 힘이 원심력이고, 놓아주지 않고자 하는 힘이 구심력입니다. 이 두 가지가 유지될 때 이 물건은 공중 위를 돌 수 있는 것입니다. 똑같이 한편으로는 구심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깊이 성찰하는 것이 구심력입니다.
시인은 큰 어려움을 만나서 고통스러운 환경을 겪게 되었고, 거기서 자신의 죄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심력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설 수 없는 자신의 영혼의 깊은 밑바닥을 보며 탄식할 때, 그때 자신을 주님께 붙들어 매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시인이 죄를 지었으나 그 죄 때문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더욱 의지하게 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죄 때문에 망했기 때문에 예레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인자하심 밖에 이스라엘에게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처럼 말입니다. 폐허가 된 멸망한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그는 온 땅에 가득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노래했습니다.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세상을 보고 사람을 보면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절망은 그걸 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절망을 통해 희망으로 자신을 설득하라고 주님이 우리에게 당신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을 간절히 구하십시오. ‘스올'과 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지 마십시오. 거기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달으십시오. 나는 아무 선한 것이 없고, 아무 의지할 것이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믿음을 굳게 하십시오. 주님이 찢으신 휘장 사이를 지나 그 뿌리신 핏길을 맨발로 걸어가십시오.
그리고 ‘오직 당신의 피 때문에 내가 주님 앞에 나갈 수 있나이다.’ 고백하십시오. 양심이 소리치며 여러분을 고소할 때 ‘나는 예수의 피를 믿노라.' 고백하며 맞서십시오. 율법의 정죄로 피할 길이 없어 깊은 절망에 도달할 때 ‘나에게는 날 위해 죽으신 예수의 보혈이 있지 아니한가!’ 스스로에게 타이르십시오. 그리고 빈손 들고 주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피 묻은 예수의 십자가를 붙드십시오. 예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피 흘리신 것이 당신 생명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를 의지하여 주님 앞에 진실하게 뉘우치는 모든 사람에게 이 생명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굳게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우리의 인생은 어차피 우리의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때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타이릅니다. 믿음은 그때마다 이 세상이 너의 최종적인 목적지가 아니라고 가르쳐 줍니다. 믿음은 그때마다 ‘보라! 구름같이 허다한 많은 사람이 이 절망과 죄 속에서 예수를 힘입어 살지 않았느냐!' 우리에게 타일러 줍니다. 가까이 가기에 너무 멀어진 죄인은 없고, 주님께 용서를 받기에 너무 큰 죄를 지은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여전히 하나님 앞에 소중한 자녀들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고통과 눈물의 아픔을 느낄 때 주님은 이 세상의 어떤 부모들보다도 더 깊이 공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주님의 슬픔을 자신의 슬픔으로 삼지 못할지라도 주님은 여러분의 슬픔을 당신의 아픔으로 삼으십니다. 이 마음을 아는 것이 신앙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 놓여있든지 간에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영혼의 생명을 갈망하십시오. 눈물로 하나님 앞에 다시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달라고, 마음을 어루만져 중심을 쏟아 놓으며 시원하게 주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새로운 은혜를 달라고 간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울음소리를 들으실 때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 소리를 들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시 6:8-10)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슬픔과 탄식 속에 고통받던 시인은 갑자기 담대한 음성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시인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고 있었고, 진노를 당하는 것처럼 극도의 고통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담대함을 얻고 이렇게 소리치듯이 외치게 되었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를 용서해주신다는 기도의 응답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이 시편 6편을 성전으로 예배하러 올라가는 예배자의 모습을 그린 광경이라고 해석합니다. 시인이 예배자로서 성전에 올라갔고, 그때는 간절한 소원을 품었습니다. 그랬는데 그 성전의 제사장이나 혹은 성전 봉사자들로부터 다윗의 이 간절한 기도에 대한 어떤 신탁이나 격려의 말이 주어졌을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시인은 더욱 담대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악인을 향하여 대담하게 "너희는 나를 물러가라 하나님이 나의 울음소리를 들으셨도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한나가 마음에 억울한 사연을 안고 성소에 올라가 눈물로 간구할 때 엘리 제사장이 "평안히 가라 하나님이 너의 기도를 응답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는 격려의 말을 들었을 때 그 여종의 마음이 확신이 넘쳤던 것처럼 아마 시인도 그러한 경험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입니다.
II. 울음소리를 들으실 때
어쨌든 여기서는 하나님이 시인의 울음소리를 들으시는 광경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특별한 환란을 겪으면서 시인은 자신의 마음의 깊은 밑바닥을 들여다보게 되었고 그것은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느꼈고 자신의 이러한 불결한 마음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를 많은 행악자들 중 하나로 여기지 아니하실까 하고 깊이 근심하였습니다. 또 다른 시인은 시편 42편에서 다윗왕과 함께 요단 건너편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을 때의 경험을 말합니다. 그는 거기서 눈물로 음식을 삼으며 하나님께서 다윗의 왕권을 회복해 주시고 자신들을 성소로 돌려보내주시기를 간절히 구했을 때 그 땅의 사람들은 시인을 조롱하였습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하고 조롱하였습니다. 시인의 귓가에도 이러한 악인들의 조롱 소리가 가득하였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더더욱 두려움에 휩싸였고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수많은 행악자들 중 하나로 여김을 받으면 어찌할까 하고 염려하였습니다.
그러나 한순간 기도의 응답으로 의심의 어두운 구름은 사라지고 자신은 하나님 앞에 사랑받는 자녀인 것을 대담하게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소리를 들으셨도다"(시 6:8) 이제껏 시인은 자신을 모욕하던 대적들 앞에서 할 말을 잃었고, 다만 눈물만 흘리며 마음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고, 하나님과 한없는 거리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 응답을 듣고 나서 시인은 이 대적들에게 항거할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는 울부짖듯이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근거 없이 나를 비방하고 욕하는 너희는 모두 떠나라' 하였습니다. 이 속에는 자신의 양심의 송사까지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 근거로서 "여호와께서 내 울음소리를 들으셨도다"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크게 두 가지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A. 들으시는 하나님
하나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불쌍한 이 시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간절한 회개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의 문이 다시 열리게 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인이 자신의 마음에 깊은 악을 들여다보면서 절망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실제로 그는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었으나 그의 일생은 하나님을 찾아 살아온 생애였습니다. 아름다운 자연을 볼 때 그는 하나님을 찬송했고, 그리고 전쟁에서 이겼을 때 승리를 주시는 여호와를 노래하였습니다. 백성들이 평안을 누리고 왕국이 번영할 때 주님의 이름을 높였고 자신의 영혼을 말씀에 더욱 묶었습니다. 그렇게 살든지 죽든지 주님만을 바라보고 살아온 시인이었는데도 영혼의 깊은 어두운 밤을 지나는 때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인이 미워서 버리신 것이 아니라 큰 환란 속에서 자신의 마음의 밑바닥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절망적인 마음의 밑바닥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전쟁에서 수많은 승리를 거두고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하며 그 속에서 하나님 성품의 빛을 보았습니다. 이 세상에 누가 이 시인 만큼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 있으며, 시인만큼 하나님을 위해 아무것도 아끼지 않고 바친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이 시인에게 영혼의 어두운 밤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시인은 자신의 생애에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왕도 아니고, 수많은 전쟁에서 이긴 장군도 아니고, 위대한 문학가도 아닌 한 마리 어린양으로서 그렇게 주님을 찾으며 낯선 곳에서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잠시 그의 사욕에 하나님은 어리석은 눈 멀을 뿌리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세차게 하셨습니다. 이 일을 통하여 시인은 하나님 앞에 깊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세찼건만 그는 눈먼 채 절그렁거리는 욕망의 쇠사슬에 이끌려 어두운 비애의 땅으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위대한 임금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 앞에 길 잃은 한 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안타깝도록 목자 되신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찬양)
주님을 나의 길이라 부르면서도
그 길로 가기 싫어 딴 길로 헤맸네
어둡고 캄캄한 그 곳 가시밭길에
길 잃은 양 한 마리 떨고 있을 때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깊은 절망의 밑바닥에서 그는 하나님 없이는 자기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띄우기까지 울었고, 요를 적시기까지 흐느꼈습니다. 그것은 절망 속에서 흐느낌인 동시에 하나님 안에만 희망이 있다고 믿는 흐느낌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하여 시인의 마음에 찌끼들을 모두 쏟아내셨습니다. 죄가 컸기 때문이 아니라 회개가 깊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오랜 세월 동안 찌끼처럼 남아있던 시인의 밑바닥에 영혼의 때를 벗겨내셨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하나님은 그에게 당신의 감추어진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시인은 그렇게 들으시는 하나님을 다시 만났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불쌍한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환란과 시련을 당한 사람도 아니고, 질병과 가난으로 고통받는 사람도 아주 불쌍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상황을 만났어도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가엾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우는 마음 안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누리고 부족한 것이 없이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기도할 수 없는 사람은 가엾은 사람입니다. 모든 것을 가졌어도 그는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에 울음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그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그 순간 그는 모든 것을 다시 되찾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절망의 어두운 밤은 사라지고 희망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어제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했는데 오늘 아침에는 은총이 깃들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왕이었고 장군이었고 문학가였고 철학자였으나 불쌍했습니다. 이유는 여러 가지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이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시인은 불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인이 회개하였을 때 주님은 굳게 닫혀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기도의 문을 활짝 여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앞에 하늘의 은혜의 빛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태양이 얼굴을 가리면 모든 동물과 식물이 생명을 잃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햇빛이십니다. 그 햇빛이 우리를 비추는 동안 우리는 살 수 있고 어떠한 역경과 시련을 만나도 하나님의 능력은 그보다 크기 때문에 우리를 살릴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으며 우리가 인생의 바다를 항해해 왔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누리는 눈물을 흘림을 며칠 더 당하며 우리의 갈 길을 가야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살아온 지난날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의로운 오른팔이 우리를 붙드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 때조차도 주의 오른손이 우리를 붙드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만난 감격이 있는 그곳은 항상 문제가 있는 때였습니다. 기쁨의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환희의 포도주로 가득 채우신 그곳에는 언제나 우리의 눈물과 슬픔이 있었습니다. 사랑의 기쁨을 맛보던 곳에서는 소외의 외로움을 겪으며 흐느끼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으니 쓴맛을 안 자만이 단맛을 알고 그리고 괴로운 것을 안 사람만이 기쁨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어두움은 우리가 선택했으나 진리의 빛은 주님께로부터 왔고 그래서 어둠 때문에 진리의 빛을 보게 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이는 나로 하여금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죽은 자처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산 자처럼 담대히 죽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도 교회에 당신의 생명을 충만하게 부어주시고, 이 예배에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셔서 모든 사람이 새 생명을 얻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을 정직하게 살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돌아보십시오.
시인은 하나님을 멀리 떠났고 환란 속에서 죄의 밑바닥을 보았습니다. 그는 일찍이 경험한 적이 없는 하나님과의 단절을 경험했습니다. 지옥의 불길을 지나는 것 같은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시인의 모든 사소한 욕망들은 불태워졌고 살든지 죽든지 자신이 주님의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을 지명하여 불렀고, 자신은 주님께 속함으로 그의 소유가 됨으로써만 의미 있는 인생을 살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정신을 모두 모아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마음을 때리셔서 아프게 하셨으나 결국 다시 낫게 해주시고, 세상 사랑을 끊어버리고 주님의 품으로 다시 달려오게끔 만들어주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떠났으나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시인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시인은 비록 뛰어난 영성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을 사랑했지만 십자가는 몰랐습니다. 희미하게 예수를 보았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시인보다도 더 밝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우리는 얼마나 더 하나님께로 돌아갈 희망이 많이 남아있겠습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다고 노래하였습니다. 하나님 말고 여러분을 끝까지 사랑하는 분이 어디에 있습니까? 마지막 세상에서 돌아와 평안을 얻게 된 때가 어느 장소였습니까? 어느 안락한 곳이었습니까?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보드라운 곳, 코로 냄새 맡을 수 있는 향기로운 곳, 입으로 맛볼 수 있는 달콤한 곳에서 여러분이 평안을 누렸던 것이 아닙니다. 그 어떤 곳보다 완벽한 곳,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의 품 안에서 여러분이 안식을 누리고 평화를 찾았던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디에 계십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어디를 방황하고 계십니까? 하나님 사랑의 품이 있는데 그 품을 떠난 것이 영혼이 곤고한 이유이거늘 어디에서 하나님 사랑의 품에 비할 완전한 피난처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어거스틴이 고백했듯이 그분의 품에 안기기까지는 여러분의 마음이 결코 평안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시인은 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눈물로 자신의 죄를 고백했고 눈물로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점점 단순해지기 시작했고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구나!'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문턱 앞에까지 이르게 되었을 때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을 깨닫고 주님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마치 놀이터에서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가 입술이 새파랗게 질리며 엄마를 부르는 것처럼 그렇게 시인은 하나님 사랑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어 아버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이런 시인의 비명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지 않는다면 그분의 성품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어찌 시인뿐이겠습니까? 여러분 중 누구도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부르기만 하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실 것입니다.
세상은 결코 우리의 영원한 본향이 아니고,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로는 하나님 없어 곤고해진 우리의 마음을 채울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우리가 수없이 경험한 바입니다. 왜 물이 아닌 것을 먹고 해갈을 하려고 하며, 양식 대신 모래를 먹고 배부르려고 하는 것입니까?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오늘 내 앞에 벌어진 이 삶의 무게들이 결국 우리로 하여금 그 무게를 짊어지고 엎드려져 죽으라고 주신 무게가 아닙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하신 주님의 초청을 생각나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가장 불쌍한 자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십시오. 주님의 응답을 들을 수 없었던 사람이 변하여 언제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하나님이 그 마음에 와 계신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예배가 끝나기 전 마음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담대함을 회복함
두 번째는 담대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한동안 양심의 송사를 받으며 영혼이 파리해졌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자기의 밑바닥을 바라다보니 정말 형언할 수 없이 더러운 죄인이었고 그 때문에 자신과 악인 사이에 어떤 구별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를 그 행악자들 중 하나로 여길까봐 잠시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곧 시인의 마음에는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지만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찬양)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결국 시인의 마음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랑으로 잠시 그의 자아가 찢어진 바 되어 한 마음으로는 저것을 원하고 한 마음으로는 이것을 원했을 뿐이지, 저 마음 깊은 곳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무엇이 시인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멈추게 할 수 있었겠으며 찢어지는 시인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었겠습니까? 다시 만나주시는 하나님 이외에 누구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이러한 마음의 가난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먹고 입고 마시고 이 세상 물질 돈 버는 일과 세상사에 시달리는 바람에 조용히 우리의 영혼이 침잠하여 나를 구원해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내가 죄인이었다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고 이 구원의 자리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묵상할 수 있는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생각하는 것만큼 기억에 남게 되고, 기억에 남게 되는 것만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많이 듣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마음은 그리로 쏠리게 되고, 쏠린 그 마음은 그리움으로 변하여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사슴처럼 그리워하게 됩니다. 세상을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을 그렇게 목말라하고,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사람은 은혜에 목마르게 되는 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의 단식이 필요합니다. 잠시 눈을 감으십시오. 귀를 막으십시오. 입을 닫으십시오. 그리고 코도 봉하십시오. 그리고 감각도 잃어버리십시오. 그리고 '오직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봅니다.'라고 고백하도록 주님의 아름다움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가득 채워보십시오. 그분이 아름답게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세상이 추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분의 아름다움이 여러분의 마음에 감동을 주면 감동을 줄수록 여러분의 기도는 더욱 열렬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담대함을 회복하십시오.
시인은 다시 은혜를 받고 하나님 앞에 설 힘이 생겼습니다. 악인들의 조롱과 행악자들의 비난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시인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부르짖는 소리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고, 그분의 품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소리를 들으셨도다"(시 6:8)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원수들의 목표는 시인의 마음에 이간질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떠한 희망도 못 갖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고 시인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멀리 아버지의 집을 떠난 탕자가 아버지의 집을 잊지 않고 기억한 것은 흉년이 들고 먹을 것이 없이 곤고해진 때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풀렸던 다리에 힘이 솟고 아버지께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인도 그러했습니다. 깊은 영혼의 밑바닥을 보면서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다고 깨닫게 되었을 때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시인은 절망하고 낙심하는 대신 비양치는 악인들의 소리가 가득하였지만 그러나 그것을 모두 물리치고 자기를 버리지 아니하시는 인자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은 오늘 여러분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이 어떠한 인생의 갈림길에서 여러분을 만나주셨고, 어떠한 사랑으로 여러분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고 여기까지 인도하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중 누가 '나는 하나님 없이 살 수 있습니다.'라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하나님이 없지만 나는 지금 행복합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모든 행복이 하나님의 그림자이거늘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린 채 그림자로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햇빛을 가려도 그림자가 남을 것이라고 믿는 어리석음과 다르다고 누가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권고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구원해 주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어떠한 인생의 벼랑 끝에서도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사실과 그런 인생의 벼랑 끝에서 수없이 많이 우리를 건져 여기까지 오게 하셨다는 사실을 회상해 보십시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그 하나님의 사랑의 증인이니 그 사랑을 힘입어 여러분이 오늘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기도만 할 수 있다면 내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들어주시기만 한다면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 모든 형편과 사정을 그분께 아뢰고 그분께 맡기면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가장 선한 곳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옥에 갇힌 채 석양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황혼 무렵에 사형 집행을 기다리던 사도 바울은 자유롭게 옥 바깥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에게 옥에 갇힌 채 말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우리의 마음이 평안하고 우리가 주님의 손에 붙들려 있음을 믿고, 주님의 의로운 오른손이 나의 어깨를 잡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면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시인이 고백했듯이 "여호와는 나의 지극히 큰 상급이시며 방패이십니다."라고 고백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상급이시고 방패이시고 영원한 기업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지 않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깊이 돌아보고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십시오. 풍랑 치는 환경 속에 있을지라도 먼저 마음이 잔잔한 바다처럼 평안해지기를 바랍니다. 거기서 여러분이 처한 모든 상황과 환경을 주님께 그대로 아뢰십시오. 그리고 거기에 마음을 쏟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십시오. 지금보다 더 어려운 인생의 때에 뜨거운 사랑으로 찾아오셔서 여러분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피를 바르셔서 구별된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 하나만을 믿고 살아왔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믿고 살아오지는 않지 않았습니까?
III. 적용과 결론
그러므로 오늘 눈을 들어 자신의 복잡한 삶의 현장에서 떠나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태양처럼 변함없이 언제나 거기서 빛나고 계시는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다시 하나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괴롭게 하심은 우리를 벌주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렇게 괴로움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세상 사랑의 끈끈이에서 놓여날 수 있고 하나님 사랑의 품을 그리워할 수 있기 때문에 옳지 않은 우리의 마음을 옳게 하시려고 때로는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그 고통 속에서 자신의 잘못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억하는 것이 하나님 자녀의 도리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을 모두 거두십시오. 그리고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고백했던 것처럼 가슴을 치십시오. '이것은 모두 나의 죄, 나의 잘못이기 때문이옵나이다.' '하나님은 잘못한 것이 없고 언제나 선하시며 나는 늘 잘못하고 악하오니 내가 주님을 덧입지 않고 어떻게 살 수 있겠으며 은총이 없이 내가 어떻게 주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고백할 때 여러분도 시인처럼 눈물을 흘릴 수 있을 것이며 여호와께서 내 울음소리를 들으셨다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어깨를 펴십시오. 그리고 이제껏 수많은 일들을 겪으며 주님의 보호 아래 살아 온 내가 지금 이 현실도 넉넉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음을 가지십시오. '나는 마음을 모아 주께 기도하오니 주께서 나를 기억하옵소서.' 아버지 앞에 믿음을 고백하고 기도의 은혜를 다시 누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