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한 자가 미끄러질 때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 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시 73:1-3)
녹취자: 박지성
여기부터는 삼권입니다. 시편의 150편 전체는 1권·2권·3권·4권·5권으로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시를 쓸 때부터 그렇게 분류한 것은 아닙니다. 시가 써진 것이 모세부터니까 주전 1500년부터 시작을 해서 아마도 주전 5~4세기경 까지 써졌을 것으로 보고 그 이후에 이것들을 하나하나 전부 분류를 해서 편집을 한 결과가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편집을 할 때 150개가 되는 시편들을 내용상으로 분류했던 것 같습니다. 1권은 창세기에 어울리는 내용들을 모으고 2권은 출애굽기에, 3권은 레위기에……. 이렇게 해서 민수기, 신명기까지 모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1권을 보면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의 권능,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지은바 된 만물의 아름다움 등의 것들이 주제를 이루고 있고, 2권에서는 해방, 광야생활 그리고 하나님의 큰 능력으로 구원의 길을 여시는 광경 등이 주를 이룹니다. 그러면 3권에서는 어떤 주제를 이루고 있겠습니까? 당연히 창세기, 출애굽기 다음이니까 레위기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그래서 3권에서는 레위기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제사, 성전, 하나님께 올라가는 예식 등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4권에서는 민수기입니다. 그래서 4권은 불순종, 하나님의 징계,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계 등의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마지막 5권은 신명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말씀의 영광, 하나님의 권면 등의 내용들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시편 73편이 다루고 있는 것은 신정론입니다. 이것은 ‘정의로우신 하나님이 어떻게 이 세상에 악이나 모순을 내버려 두실까?’라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 73편은 우리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신정론에 관한 아주 중요한 언급들을 담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오늘 읽은 이 본문에서 시인은 세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기존에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인식, 둘째는 그 예상을 빗나간 상황을 보면서 실족할 뻔했던 자신의 경험 그리고 셋째는 구체적으로 실족하게 된 동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평소에 그가 가지고 있었던 확신은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였습니다. 이 사람은 구약시대에 신앙을 가진 사람이기는 했지만 신앙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우선 첫째로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우리 인생의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주어를 맨 앞에 놓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확신이 얼마나 분명한지를 “참으로”라는 부사를 사용해서 더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언약신앙입니다. 그의 관심은 이스라엘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이 매우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고 이 매우 특별한 언약관계는 ‘하나님의 선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는 그런 종류의 선이다.’라고 못을 박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고 하나님이 세계에 대한 인간들과의 관계의 가장 으뜸은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셋째로 이 사람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관계를 가지고 계시고 선을 행하시는 분이지만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마음의 정결함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내면적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정결한 자와 부정한 자를 하나님이 구별하셔서 그들을 다루신다는 내용, 그리고 하나님은 선한 분이시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을 행하신다는 확신, 이렇게 최소한 여섯 가지 정도를 1절에서 이 시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정도 되면 상당히 정확하게 하나님에 관한 지식, 특별히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이정도면 충분히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우리가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을 가지고 일생을 살아 왔던 것 같습니다.
그랬는데 어느 순간에 이 사람이 커다란 혼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 혼란은 “나는 거의 실족할 뻔 하였고”에서 볼 수 있습니다. 실족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길을 걷다가 발걸음을 잘못 딛고 몸 전체가 쓰러지거나 벼랑에 떨어질 위기에 놓인 것을 실족이라고 합니다. 본문에 보면 완전히 실족한 것은 아니고 실족할 뻔했다고 합니다.
(예화) 몸의 자세를 똑바로 하고 걸어 갈 때는 문제가 안 되지만 몸의 자세가 흐트러지면 큰 일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뚜벅뚜벅 자세를 정확하게 하고 걸어갈 때는 이 걸음에 큰 힘이 들어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잘못 딛고 쓰러지거나 넘어지면 중상을 입습니다. 몸에 큰 상처를 입거나 뇌진탕에 걸린다든지 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 때는 엄청난 힘이 우리의 몸에 가격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걸어 갈 때는 큰 힘으로 걸어간다는 느낌이 안 드는데 계단을 내려올 때 발을 잘못 딛게 되면 계단에서 구르게 됩니다. 그러면 60~80㎏의 우리 몸이 우리의 몸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몸이 종잇장처럼 가볍다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무게가 나가기 때문에 계단을 헛딛었을 때는 60~80㎏되는 그 몸이 강하게 우리의 몸에 중력으로 작용을 해서 쓰러뜨리거나 계단을 구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큰 힘이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실족할 뻔했고 걸음이 거의 미끄러질 뻔했습니다. 시편에는 미끄러질 뻔했다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미끄러진다는 것이 무엇이냐면 몇 가지 개념들을 보여주는데, 우선 미끄러져서 들어간다는 것은 안 좋은 곳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타락, 죄악, 환란, 시련 등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확 미끄러졌는데 풍덩 빠지고 보니까 ‘하나님의 복’이더라 아니면 미끄러졌는데 ‘선’으로 미끄러졌다는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선’, ‘하나님의 복’ 이런 것에는 미끄러질 수 없고 하나님의 의지가 작용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의지든지 사람의 의지든지 의지가 작용해야하기 때문에 미끄러진다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미끄러진다고 하는 것은 미끄러지는 그 결과가 잘못되는 것임을 보여주고 이것이 얼마나 신속하게 자기도 어찌 저항 할 수 없이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모두 ‘~ 뻔 하였고 ~ 뻔 하였으니’라고 했으니까 완전히 쓰러진 것은 아닌데 커다란 충격이 이 사람에게 온 것을 보여줍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마지막에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 하였음이로다”고 했는데 이 두 개가 거의 같은 말입니다. ‘오만하다’는 말은 시편 1편에 나오는 것처럼 ‘비웃는 자’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비웃느냐면 하나님을 비웃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만하다’는 것은 교만한데 그 교만의 이유가 사상에 하나님을 부인하기 때문에 있는 교만함입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가 무슨 뜻이겠습니까? 악인이 형통한 것을 보면서 하나님 없이 그렇게 교만한 자의 형통을 보면서 투기하는 것입니다. ‘저 인간은 되게 샘이 난다. 저 인간은 왜 저렇게 잘 나갈까? 하나님이 없다고 부인하고 하나님의 율법과는 상관없이 악하게 살아가는 인간인데 어떻게 저렇게 평안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할 때 미끄러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만 우리들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침체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 기도를 해도 헤어날 수가 없고 마음을 자기가 스스로 새롭게 먹어도 헤어 날 수가 없고 또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악인에게 준 것 같은 형통을 내게 주셔도 헤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형통하지 않아서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악인이 왜 저렇게 평안한 것인지 오만한자가 저렇게 잘 나갈 수 있는가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것은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의 교리에 대해서 아직 초보적인 수준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을 경험하면서 신앙 전체가 뒤흔들리게 되는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것은 새로운 지식을 부여 받음으로써 침체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시인이 그렇게 실족할 뻔했고 걸음이 미끄러질 뻔했던 것은 결국 그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한계와의 싸움입니다.
아마도 사람들이 기독교신앙을 거절하는 몇 가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신정론일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사람들은 ‘하나님이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라면 책임을 져야하지 않는가?’라고 말하고 어떤 철학자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지만 만약에 신이 있다면 무슨 권리로 인간의 삶을 주관하는가? 왜, 자기의 의무를 다하지 않아서 세상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는 무슨 권리로 우리 개인의 삶에 이래라저래라 의무를 부여할 수 있는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은 죽었다! 신은 지구를 떠나라!’라며 니체를 비롯한 대부분의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이렇게 극단적인 신의 부정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들은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정직하고, 의롭고, 완전하신 분이면서도 이 세상에 죄를 남겨두시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에 죄를 남겨두십니다. 그리고 때로는 악인이 형통하도록 내버려두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든지 혹은 하나님이 부도덕한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시고 도덕적이시며 하나님이 이 세상의 인간들을 얼마나 높이 대우해주고 계시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여기에 현존하는 악과 인간의 책임이 등장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