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의 교만과 강포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시 73:6-7)
녹취자: 김은정
계속해서 시인이 보기에 악인의 형통함이 어떠한지를 진술해가고 있습니다. 이미 4절과 5절에서도 죽음과 관련해서 고난과 관련해서 악인의 형통함을 이야기 했듯이 여기에서도 악인이 어떻게 형통한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시인은 그들의 형통함을 말하기 전에 그들의 마음과 삶의 태도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제일 먼저, 교만입니다. 교만이 저 사람들의 목걸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아는바와 같이 이 목걸이는 부유한 사람들이 하고다니는 장식품이지 당시에 가난한 사람들이 하고 다니는 장식품이 아닙니다. 그래서 금부치로 목걸이를 하고 다니면 "저 사람이 부유한 사람이구나!" 는 것을 알게하는 표입니다. 그런데 그 표가 바로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이 교만은 사람들을 향하여 자신을 높이고 그래서 그 사람들을 깔보거나 무시하는 일인데 그런 태도를 가리키는 데 궁극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지 않으려고 하는 무지, 혹은 의도적인 지식의 거부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사람들에게 자랑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인은 이런 사람을 보면서 왜 낙심하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자신은 교만하지 못하게 하시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뒤편에 보면 아침마다 하나님이 자기를 징책하신다는 고백이 나옵니다. 좀 교만해지고 높아지려고 하면 아침에 기도할 때 자기를 책망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에 내 마음이 높아지는 것을 알라 하며 말씀을 통해서 이 시인을 책망하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깨뜨리지고 다시 마음이 낮아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이런 하나님의 징책과 자기 깨어짐의 과정은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 이후에 하나님과의 편화 은혜가 흘러들어온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나중에 일이고 깨어지고 책망을 받는 거기에서 희열을 느끼는 사람이라고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 교만이 저희의 목걸이가 되었기 때문에 이 시인은 깊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라고 했는데 이 강포라는 말은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하지 않고 폭력과 억압으로 대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저희의 옷이라고 했는데 이옷은 성경에서 수치를 가리고 사람들에게 언약백성으로써의 자존감을 유지하게 하는 성도의 올바른 행실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옷이되었다고 하니 이 강포를 옷으로 삼은 이 사람은 본질적으로 언약백성으로써의 삶을 저버린 사람입니다. 수치스러워야 하는 그것을 자신의 영광으로 삼고 있는 사람입니다.
강포라고 하는 이 한 단어는 시인이 상정하고 있는 형통의 악인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율법을 저버린 삶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면서 사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사랑의 표현이었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얽매이지 않고 강포한 삶을 사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언약백성을 향한 사랑의 원리를 저버렸던 것입니다. 결국 무법한 자의 삶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아노미아 "무법하다" 라고 하는 이것은 율법, 사랑이라고 하는 이 두 가지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내적으로는 사랑을 버리고 외적인 삶에 있어서는 율법의 기준을 버린 삶이 강포한 삶입니다. 강포한 이유는 자신의 이익을 침해하거나 혹은 손해를 입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율법과는 상관없이 자기의 마음먹은대로 악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악인은 계속 형통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그는 눈이 솟아났다고 했는데 이 이유는 살이 쪘기 때문입니다. 살이 찌면 눈이 솟아나지 않습니까? 아주 많이 살이찌면 눈이 솟아납니다. 그러니깐 무엇을 말하냐면 잘먹고 잘살았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더욱이 비대하고 기름지고 살이 투실투실한 것은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배가 나온 것이 흉이 아니었습니다. 돌아가신 저희 할머니 제가 직장다닐 때 조차도 그러셨습니다. 만나면 항상 제 배를 만지면서 "얘야 너는 언제나 배가 나오냐?" 요새 나왔는데 돌아가시고 안계십니다. 그 당시 저희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그 당시에는 외모에 신경을 쓰고 외모를 화제에 올리지는 않았습니다. 항상 학교에서나 가정에서나 외모 보다는 덕스러운 생활과 마음이 중요하다는 교육을 받았고 심지어는 유행가에서도 그런 것을 국민들에게 가르쳤지 지금처럼 이렇게 뭐 사기를 치고 사람을 해롭게 하여도 얼굴이 예쁘면 팬클럽이 생겨서 그 사람 용서해달라고 그렇게 이성없이 날뛰던 그런 때는 없었습니다. 그때에도 머리 벗어진 사람을 예쁘게 보지는 않았지만 지금처럼 아주 똑같이 예민하게 보고 사람에게 모욕한다든지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 그 때에 배가 나온 것은 부유하다는 하나의 상징이었고 사람들이 제가 어렸을 때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봤습니다. 그래서 부유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배사장이라고 했습니다. 배나온 사람들이 극히 드물었습니다.
당시 살이 쪘다는 것은 구약시대에는 더더욱 흉이 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살이 쪄서 눈이 솟아나는 것은 부유함을 가리킵니다. 개기름이 흐르고 잘 먹고 뒤룩뒤룩 살이 찐 것입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저희의 소득은 마음의 소득보다 진하며 악인이 금년에 이 정도는 벌어야지 그런데 한 해가 지나니까 자기가 벌려는 것보다 더 많은 양을 버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아주 곤혹스러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이런 생각으로 이 세상을 바라볼 때 그렇게 경건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오늘날 신실하다는 많은 기독교들이 이 수준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악인의 형통을 보면서 하나님의 선하고 진실하심을 의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보면서 신앙이 눈에 보이는 이 모든 현실의 증거들이 항상 우리에게 신앙을 격려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이유를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 속에 이루어지는 사건들을 보면서 그것 하나를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근거로 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하고 무지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의 신앙의 근거는 어떤 것이어야 되는가? 확실한 것 하나는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시고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실제로 이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분명하지만 그 도덕적인 통치가 우리들이 모두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권선징악의 방식으로 정확하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장 커다란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생각할 때에 언제나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때로는 그만큼 전체를 보지도 못합니다. 이 시인이 상정하는 악인의 형통을 보면서 괴로워할 때 과연 이 시인이 악인이 형통하기 전에 어떠했는지 그리고 형통한 후에 망하고 고통을 받는 악인은 얼마나 되는지를 과연 철저히 조사를 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형통, 악의 일시적인 번영은 믿음을 시험하는 시금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뢰와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큰지를 시험하는 시금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을 통치하시지만 우리와는 달리 한 번에 모든 것들을 보시고 태어나서 죽는 시점, 우리들의 눈에 띄는 형통하고 형통한 시점보다 더 넓게 심지어는 더 멀리 영원으로부터 영원까지 한 번에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살아야할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앙은 바로 그렇게 이해하고 모든 것을 해명할 수 없을 때 조차도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는 그 현실을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깊이 의지하면서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해명할 수 없는 현실 명백한 하나님의 부재의 증거에 대한 회피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경륜과 통치는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넓고 커서 때로는 그분은 우리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 없어도 때로는 우리는 그분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또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할 이유를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깊어지면 악인의 형통이, 악인의 행복이 우리 신앙의 거침돌이 될 수 없습니다. 악인의 징벌 그리고 선한 사람들의 형통함,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 나타난 이런 증거를 보면서 겨우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동의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과연 얼마나 불행한 사람일까요.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을 알 사람이 없도다. (찬양)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해할 수 없을 때에도 주님을 깊이 신뢰하면서 의지하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내적으로 주님과 만나는 은혜의 감격,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또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는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이중의 인침이 있을 때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우리는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향한 신뢰 때문에 주님이 살아계시다는 것과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하나님 의지하고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떨어진 사람들은 하나님이 다스리지 않는 증거들을 수없이 발견하지만 은혜가 충만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 안에 계신 확실한 증거 때문에 자기와 함께하시는 것처럼 모든 성도들에게 함께하시고 이 세상과도 함께하지만 그들이 주님을 모른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고 요동하지 않습니다. 이게 오늘 이 아침에도 주님 자신을 간절히 찾아야할 이유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