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부인하는 악인들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하도다 (시73:10~11)
녹취자: 임종찬
여기에서 그 백성들이라고 되어 있는 부분이 히브리어성경에서는 그의 백성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앞에서 이야기한 악인들을 가리킨다고 보기 보다는 그 악인들의 영향들을 받은 더 많은 다수를 가리킨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들의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으로 말미암아 언약백성들에게 실천적인 무신론이 광범위하게 유포된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 시인이 보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언약백성들 안에서 하나님을 마음에 부인하며 살아가는 악인의 형통함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누룩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퍼져서 그들의 삶의 태도를 뒤따르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잔에 가득찬 물을 마셨다고 되어 있는데 잔이라는 말은 히브리어성경에 안 나오고 그냥 가득찬 물을 마셨다고 되어 있는데, 많은 백성들이 왜 물을 마시냐, 이에 대해 명확하게 말할 수는 없겠으나, 이 사람들이 저희의 입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말이 온 땅에 두루 다녀 전파될 정도가 되었으니 얼마나 많은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부인하는 말을 많이 하였으면 목이 마를 정도가 되었겠습니까? 이러한 상황을 비유적으로 이 시인이 노래를 지은 것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형통한 악인의 뒤를 따라서 모든 사상에 하나님 없이 살고, 말로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렇게 말한 것들이 소문이 나서 많은 사람들에게 유포될 때 까지 이들이 얼마나 쉬지 않고 입을 놀리면서 떠들었겠는지 추측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악인의 절제 없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위하여 뜻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절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악한 자들에게는 절제가 없습니다. 마음에 가득한 욕망, 하고 싶은 말, 내뱉고 싶은 모든 의사표현들, 밖으로 행동하고 싶은 모든 행동들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그것은 절제 없는 사람의 대표적인 행동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하는 말이 주목할 만한 말입니다.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알겠느냐? 무슨 뜻 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백성이지만 주님의 율법을 어기고 우리 맘대로 산들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아시겠느냐? 그 뜻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모든 악은 결국 하나님에 대한 무지, 혹은 하나님에 대한 바르지 못한 앎에 기초한 것입니다. 또, 모든 선한 삶, 그리고 창조의 목적을 따르는 인간의 덕스러운 생활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과 관계가 없어보여도 사실은 그 뿌리를 더듬어 가면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가는 그러한 그 행복 안에서 인간은 그것과는 별로 상관이 없어 보이는 그의 모든 삶에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찌 알랴? 아마도 원래 이런 사람들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들이 악을 행하며 죄를 짓고 이 세상에서의 번영과 형통을 위해 삶의 기준인 율법을 버렸습니다. 그러고도 형통하고 번영하는 것을 보면서 한사람, 두 사람씩 율법을 꼭 지키며 살아가야 할 의무의 짐들을 내려놓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생각해볼 때 우리에게 개인적인 삶이란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모든 사람에게 항상 노출되어 있고 그것은 사람들에게 항상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에 대한 암시를 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기를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지극히 높으신 자와 함께하는 지식이 어디에 있느냐, 혹은 지극히 높으신 자 안에 있는 지식이 어디에 있느냐, 혹은 지극히 높으신 자에 의한 지식이 어디에 있느냐 비슷한 말입니다. 그러면 지극히 높으신 자라고 하는 이 말을 엘리온이라고 하는 단어인데, 구약에서 이 엘리온이라고 하는 단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그 무한한 존재의 질적인 차이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지존자, 지극히 높으신 자 이런 뜻으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서 아주 교묘한 말재간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극히 높으시다고 하는 것은 질적으로 인간과 하나님은 비교할 수 없이 차이가 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 속에 계실수 있는 분이 아니라 본질과 존재에 있어서 인간을 초월하시는 아주 탁월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악인들은 이 엘리온이라는 말을 장소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죠? 하나님이 아주 높은 곳에 계시니까 하나님이 계신 곳과 우리 사이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서 하나님은 이 세상을 아실 리가 없다 그런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셔서 존재가 불완전하시기 때문에 능력이 모자라시기 때문에 이 땅의 일을 모르신다는 사상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창조하신 이 세상을 하나 하나 간섭하면서 악인에게는 형벌을 의로운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복을 주시는 실질적인 도덕적 통치를 안 하시는 분이시다는 그런 뜻입니다. 역사 속에서 이런 사상들이 항상 교회에 이단의 모습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 모습으로 들어왔습니다. 칼빈시대에 오시안노라고 하는 사람이 바로 이러한 사람이었습니다. 온 물질세계도 하나님이라고 믿었고 그러나 그 하나님은 인간의 삶에 개입하고 간섭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이렇게 믿었습니다. 루터시대에 소키누스라고 하는 사람도 꼭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세계는 기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그 법칙에 따라 움직일 뿐 하나님은 인간 사이에 깊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사상을 가졌습니다. 이러한 사상들의 유혹이 항상 있었습니다. 18세기에는 과학이 발달되면서 과학 안에서 일어나는 법칙과 하나님이 이 세상에 간섭하시는 것 사이에 어떻게 조화를 찾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사람들이 이 세상이 기계론적인 우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과 그래도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종합해서 이신론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법칙이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늘 높은 곳에 초월적으로 계시고 도덕과 그리고 자연의 법칙에 따라서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움직이는데 사람들이 올바로 도덕을 지키고 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개입해서 간섭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끼리 그 문제들을 해결하며 살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세계를 경륜하셨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언제나 이런 사람들이 있었고 이러한 사상은 항상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불신앙으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만큼 인간이 세계와 역사의 주최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러한 사상은 하나님을 어른이라고 인정은 하지만은 실제 권한은 없는 뒷방 늙은이처럼 만들거나 아니면 허수아비 같은 입헌군주국의 의례적인 왕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너무나 높은데 계시는데 과연 그분이 이 낮고 낮은 땅에 멀리 떨어진 땅에 관한 일을 아실 수 있겠느냐 이런 고백을 낳았던 것입니다. 이 사실이 이 악인들에게는 커다란 격려가 되었습니다. 무슨 격려가 되었을까요? 아 우리가 이러 저런 악을 행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알 수도 없거니와 혹시 아신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과연 우리의 삶에 간섭하시겠느냐는 생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대한 신앙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에 대한 신앙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그의 신앙의 질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으면서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되냐 하면은 때로는 우리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일어나고 또 하나님이 간섭하시지 않는 것 같은 모순이 일어나지만은 그러나 하나님은 아주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우리의 삶 안에 계시며 우리를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깊이 인정하고 우리의 가장 큰 의무는 해명할 수 있을 때나 해명할 수 없을 때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거룩한 의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주님의 때를 기다리면 하나님은 얼마나 정확한 저울로 인간을 달아 보시고 통치하시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이러한 관점을 이생뿐 아니라 저 영원한 세상에까지 확장시켜서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간의 이익과 번영 보다는 지극히 높으신 그분의 의지를 따라 사는 그런 신앙생활이 우리의 가장 큰 기업이라 이렇게 믿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은 홀로 있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사람들에게 밟히는 자 같아도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런 확신을 가지고 우리들이 살아가는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