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보여주소서
“어찌하여 열방으로 저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주의 종들이 피 흘림 당한 보수를 우리 목전에 열방 중에 알리소서“(시 79:10)
녹취자 : 김세나
여기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탄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탄원은 바로 앞에서 올린 기도,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도우시고 건지시며 사해 달라는 이 기도의 구체적인 실행입니다. 시편을 읽으면서 우리들이 마음에 걸리는 내용들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악인을 징벌해 달라는 저주의 탄원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시편에 나오는 이러한 저주 기도들을 영적으로 미성숙한 상태의 말하자면 민족주의의 결과이다라고 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렇게 원수들에 대해서 경렬한 분노가 치밀어 올라 하나님께 징벌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헤세드의 정신에도 맞지 않고, 물론 복음의 정신에도 맞지 않는 시인들의 영적인 미성숙의 소치이다라고 해석합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우리들이 시편의 이러한 저주들을 해석할 때 이러한 태도는 잘못되었다고 성격을 해석해야 하니까 적잖은 어려움을 우리들에게 줍니다. 그러나 이제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다면적으로 이 문제를 접근해야 합니다. 우선 첫째는 이 저주 기도는 복음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은 구약시대 때의 기도라는 것을 고려를 하면 그러면 우리의 의문중 상당한 부분이 해결되리라 보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복음을 펼치실 때 그 복음의 씨앗은 인간이 타락하자마자 하나님이 심으셨지만 그 심으신 것이 싹이 나고 뿌리가 내리고 그것들이 전개되어서 나무로 자라고 거기에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이 전개과정은 역사 속에서 시련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뿌려진 복음의 씨앗의 만개, 꽃이 활짝 피고 열매를 맺는 이 놀라운 역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성령이 강림하심으로써 이제 활짝 피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시인들이 활동하던 이 시대에는 분명히 복음이 있고, 그 아가페의 사랑이 이 헤세드를 통해서 가르쳐 졌을 때 모든 인간에 대한 인류애로서 가르쳐 진 것이 아니라 언약 공동체에로서의 헤세드를 가르치고 이것들이 확산되어 가면서 이제 교회에서 다시 세상으로 확산되는 까리따스로 가르쳐 진 것입니다. 그러한 복음의 전개, 성취, 구원 역사의 확장 과정을 생각하면 이러한 기도도 가능하겠다고 하는 일종의 해결책을 얻게 됩니다.
두 번째 해결책은 뭐냐 하면, 그러니까 전적으로 이 사람들의 영적인 미성숙이라기보다는, 분노로 보기 도하는 그러한 어떠한 복음의 계시의 역사적 말하자면 과정의 맥락에서 본다면 이러한 기도에 대한 의문점도 어느 정도 해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여기에 나와 있는 여기에 나와 있는 시인의 저주 기도를 단순한 자신에게 고통을 준 사람들에 대한 보복의 개념으로만 보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의문이 생깁니다. 어떠한 의문이 생기는가 하면 예레미야 선지자 같은 경우에는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침략하는 바벨론의 모든 공격과 모의에 대하여 순종하도록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그러면 어떻게 설명해야겠습니까. 현저히 애국심이 부족한 것이라 봐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영적인 미성숙을 거론하기 전에 민족에 대한 사랑이 없는 것이라 해석해야겠습니까? 그것은 곤란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단순히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안 되고, 이 경건한 시인들로 하여금 커다란 하나님의 진노와 보복을 간구하게 만들었던 근본적인 동인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입니다. 즉, 하나님이 하나님이사는 사실이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드러나야 하는데, 그런데 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방나라들이 짓밟고 모욕하고 박해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는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심판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양면성인가 하면 이스라엘 내부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충분히 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었고 악을 행했고 하나님께 불순종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경건한 사람들은 이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노의 정당성을 깊이 인식하고 오히려 경건한 사람들은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또 하나의 국면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그것은 내부적인 이스라엘 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역사의 해석이고 이방인들이 바깥에서 볼 때에는 그러한 상세한 도덕적인 경륜이 보일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저 이스라엘은 자기들을 하나님이 지켜주신다고 믿더니 결국 우리가 공격하니까 저렇게 파멸 당하는구나. 그렇다면 도대체 그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 질문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 답은 하나님은 없구나. 하나님은 없다. 아니면 최소한 이러한 생각을 합니다. 아, 하나님이라는 신은 우리의 신들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심지어는 신의 도움 없이 우리가 공격해도 파멸될 수밖에 없으니 그들을 꺾은 것은 우리가 그들의 신을 꺾은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인식들이 퍼져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이 이렇게 도덕적이고 위대하시고 능력이 있으시고 모든 만물위에 뛰어나신 여호와이시구나. 라는 이스라엘의 생각들이 열방 중에 계속 퍼져나가 이민족에게까지 알려져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의 선교의 소명과는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이 선지자들이나 혹은 이 시인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중대한 모독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시인도 똑같이 양면성을 가지고 이 심판의 문제에 접근하는 것입니다. 내부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이러한 진노를 퍼붓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조상부터 잘못했고 죄를 지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정당하시고 우리가 죄인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전적으로 승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 앞에 하나를 붙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아닙니까. 그러면서 자신들의 정당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한 성품에 호소하여 자기들을 도와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 국면으로는 이스라엘이 잘못해서 그들을 징계하시고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진노는 정당하지만 그러한 진노를 하나님이 직접 하늘에서 불을 내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망시키신다든지, 하나님이 직접 천사를 보내어 죽여 버리신다든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악인들을 사용하셔서, 악한 나라들을 사용하셔서 이 일들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바로 이방인들의 손에 이스라엘을 붙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도구가 되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크게 말하자면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도구로 사용하신 것은 도구로 사용한 것이고, 이 악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짓밟히고 고통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도덕적인 판단에 비추어서라도 그들은 유죄입니다. 이것입니다. 유죄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심판하시는 것이 하나님에게는 두 가지 점에서 정당합니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여전히 이스라엘을 지키고 살아계시다는 선교적 측면에서 정당한 것이고, 비록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했지만 그래서 하나님께는 징계를 받아 마땅하지만 저 악한 이방 나라에게는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짓밟을 권리가 없다는 점에서는 그 징벌은 정당합니다. 이것은 시인들의 논리입니다.
이러한 저주에 대한 기도는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 중 이 경건한 시인들의 갈망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김희보 박사님 같은 경우는 이 저주에 대한 기도가 신약시대에 그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치열한 신약 성도들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갈망을 바라본 것이라고 해석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경건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악인들을 향한 진노를 하나님 앞에 구해야 했던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면적으로 놓고 보면 그러면 이러한 기도들이 단순히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것 같은 말하자면 통제되지 않은 분노, 영적 미성숙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현실을 하나님께 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이방 나라들이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자기들끼리 여호와는 없다 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어떻게 하나님이 없다 라고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은 간단합니다. 이스라엘을 짓밟을 때 이스라엘이 짓밟혔다는 것. 그것을 보고 하나님은 이들 가운데 계시지 않는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라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서 시인이 깊이 아파하고 고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지 생각해 봅시다. “이방 나라들이 어찌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말하나이까” 라고 시인이 말하였는데, 이렇게 이방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소문을 들으면서 이 시인은 마음속에 피가 흘렀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할 때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그 이름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나는 이것을 이름 신앙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은 완전히 동의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 이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태도는 하나님에 대한 태도와 완전히 일치합니다. 그런데 그 이름이 뭐냐 하면 명예입니다. 명예. 그래서 하나님은 높아지실 수도 없고 낮아지실 수도 없는 분이시지만,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떠한 태도로 살아가느냐에 대해서 높아질 수도 있고 낮아질 수도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시인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간절한 사랑을 품었던 사람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라고 이야기 하는데, 하나님이 정말 어디에 계신지 알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없으십니까. 이들이 없다고 부인하는 것이 하나님의 존재에 영향을 줍니까. 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하나님이 백 번 없다고 해도 하나님이 계신 것이 틀림이 없는데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이들의 질문에 대해서 시인이 마음이 상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염려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염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점에서 보면 이 시인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이렇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기들이 어디 있느냐고 백 번 묻는다고 하나님이 어디를 가시는가. 자기들이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짓밟고 살아도 하나님은 천상에 언제나 홀로 계셔서 어떠한 피조물들에게도 영향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나는 이 사실로 충분히 만족하고 이 땅에서 주님의 이름이 짓밟히던지 말던지 나는 상관이 없다. 주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이 있는 성도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땅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이름의 모습을 보면서
(찬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그 위대한 하늘의 하나님을 현실적으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소명은 이 세상에 눈이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살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우리가 행하는 것을 통하여 그 분의 이름이 만물 위에 뛰어나도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사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소명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시인이 이렇게 황폐한 이스라엘을 바라보면서 이방 나라들이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이 이렇게 짓밟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이렇게 멸시를 받아도 됩니까. 이것이 나의 고통입니다 라고 하는 이 질문과 이 갈망이 현실적으로 집을 잃고 가족들이 흩어지고, 먹을 것이 없고 집이 부수어져서 가산을 박탈당한 이 현실보다도 더 깊이 이 시인의 가슴을 찔렀던 것입니다. 교회가 품어야 할 마음이 바로 이러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이 바로 예수님 안에 있었던 마음이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설교하고 가르치고 병자들을 고치고 불쌍한 자들을 먹이고 섬기셨던 그 모든 당신의 아름다운 섬김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이 사람들 속에 짓밟히지 않고 존귀히 여김을 받도록 봉사하신 생애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을 때,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달라는 기도가 양식을 위한 기도와 모든 인간들의 자신의 안녕들을 구하는 기도보다 앞섰던 것입니다.
후반절에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달라는 간구가 나옵니다. 주의 종들이 피 흘림에 대한 복수를 우리 목전에서 이방나라에서 보여주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바벨론이 쳐들어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륙하고 특별히 하나님을 섬기던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을 도륙한 이 피 흘림을 밝히는 것입니다. 이들을 죽이는 복수를 이방나라에게 보여 주십시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은 모두 억울하게 죽었는가. 그러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들이 피 흘리고 죽은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이러한 피 흘림이 하나님에게는 정당하였다고 할지라도 이 피흘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사람들은 주님의 손에 붙들려서 강제적으로 그 일을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그 이스라엘의 주의 종들을 죽이고 피 흘리고 잔혹하게 학살하는 그 일을 좋아서 스스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들을 징벌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도덕적인 모순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해 복수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복수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복수입니다. 그래서 열방들이 하나님을 얕잡아 보지 못하도록 보여주는 하나님의 정의의 복수였습니다. 이러한 복수를 우리 목전에서 보여 달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한번 그 광경을 보면서 야, 정말 고소하다 이러한 쾌감을 느끼기 위해서 보여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진노를 통하여 하나님이 자신들을 아주 버렸다고 믿는 흔들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심판의 광경을 보게 함으로써 믿음을 갖게 하시고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심판을 하는 광경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심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죄를 심판하시는 일이 언약 백성들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방 백성들에게도 공정하게 행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줘서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 나라에게도 보여 주옵소서. 결국 이 심판을 통하여 하나님의 모든 나라들이 거룩하심과 두려움을 알게 하도록 하나님 앞에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