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지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유다에 알린 바 되셨으며 그 이름은 이스라엘에 크시도다 (시 76 : 1)
녹취자 : 조 원 정
76편은 전형적인 찬송시 입니다. 여기에 아삽의 시라고 되어 있는데 이 사람은 다윗시대의 그 아삽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고 아마도 그의 후손일거다 아삽 가문의 속한 시일 거라고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학자들은 76편의 배경이 무엇일까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하는데 가장 가능성 있는 것은 앗수르 산헤립의 군대가 히스기야 때에 쳐들어왔던 그때에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그 군대를 물리치시고 하나님이 히스기야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그때를 기념하면서 쓰여진 시일 것이다 이렇게 추측을 하고 있고 그것이 가장 많은 학자들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1절에 보면 이 시 전체에 탑픽이 나옵니다.
알려지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당신 자신이 특별히 언약 백성들에게 알려지시는 분이시다. 이것을 표제처럼 1절에서 제시를 하고 그리고 2절에서부터 어떻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지시는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전형적인 병행법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다에 알려지셨으며 하나님의 이름은 이스라엘에게 알려지셨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 한 짝을 이루고 유다에, 이스라엘에게가 한 짝을 이룹니다. 같은 의미의 단어들을 반복함으로써 이 시를 노래처럼 만들면서 같은 사상을 사람들에게 두 번 주입시키는 겁니다.
여기서 유다와 이스라엘을 구분하는 자체가 별로 의미가 없고 결국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언약 백성들 그들 모두에게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알려지시는 하나님 이시다라는 얘깁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몇 가지 중요한 교리들을 터득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알기를 원하신다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바로 하나님을 아는 거기에 당신이 이 세상에 인간들을 창조하신 뜻이 구현되는 길이 있고 또 그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사람답게 행복하게 살아 갈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인간에게 보여주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백성들이 아는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아는 지식을 이 온 세계의 사람들에게 전파하심에 있어서 하나님은 산봉우리와 산의 관계를 기억하시면 됩니다. 헐몬산에 내린 이슬이 흘러내려 헐몬산 아래로 내려오는 것처럼 헐몬산이 굉장히 높은 산입니다. 이천미터가 넘는 높은 산인데 그 위에 비가 온다던지 눈이 온다던지 하면 거기에서 수분이 형성되어서 서서히 서서히 스며들면서 물이 내려오는 계곡을 이룹니다. 이스라엘에 가보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어마 어마한 물이 쏟아져 나오는데 이스라엘 전역에서 거의 볼 수 없는 광경입니다. 생명의 젖줄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물이 헐몬산에서 쏟아져 내려오고 있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제일 먼저 언약백성들에게 주어지고 그 언약백성들에게 주어진 지식이 헐몬산의 이슬처럼 언약백성을 통해서 이 세상 사람들에게 흘러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산을 두루 적시고 그 산을 두루 적신 그 물이 산 아래 들판을 휘돌면서 모든 기름진 땅으로 만드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이 하나님을 알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유는 이 세상 모든 인류와 심지어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의 모든 세계까지 하나님의 은택을 인간을 통해 입게 하시는 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탐구하고 공부한다고 할 때 사실은 공부하는 탐구하는 주체가 탐구하는 개체보다 무한히 작기 때문에 탐구자체가 불가능 하다는 겁니다. 왜? 탐구의 대상이 하나님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 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도 가능한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그 일을 행하는 자체를 기뻐하셨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알 수 있는 선행된 지식들을 인간에게 먼저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지식은 마치 인간이 자연을 탐구하며 자연의 이치를 터득하며 알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먼저 자신이 이런 분이다 하는 것들을 우리에게 많이 남겨주셨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계시라고 부르는 겁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부지런히 이성을 사용하여 발견을 하고 탐구를 하면 그 계시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해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이성만으로는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계시해주셨더라도 이성만으로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성은 보조적이고 하나님을 믿는 신실한 신앙이 필요한 겁니다. 좋으신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에게 당신자신을 알리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라고 하는 것을 인식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지도를 받으면서 하나님이 남겨놓으신 계시들을 잘 이해하게 되는데 이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인간을 도우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 가는 겁니다. 이렇게 알아가게 될 때 이 지식은 자신을 위한 지식인 동시에 남을 위한 지식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가깝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체들을 위해 이 지식이 쓰여 지도록 도와야하고 멀리는 이 지식을 내가 만나는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빛처럼 비추어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사물들을 그 빛이 없었더라면 대하였을 것과는 다른 태도를 가지고 사물들을 대하고 하나님 기뻐하시는 삶을 살도록 이끄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의 의무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시인은 산헤립에 의한 앗수르의 침공이란 의한 커다란 국가적인 위기 속에서 결국은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에게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리시는 일을 하였다 결국은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우리에게 또 하나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이 당신을 아는 지식을 이 세상에 알리시기를 원하시는데 그 지식을 알리시는 첫 번째 가장 중요한 도구가 언약백성들이란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기의 언약 백성들에게 당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시는 그 일을 하기를 기뻐하신다라고 할 거 같으면 하나님과 맺은 언약관계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전달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금새 알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알려주셨지만 당신을 아는 지식을 마치 이 땅에 금광이나 혹은 경치 좋은 풍경이나 혹은 우주에 있는 사물처럼 그렇게 남겨 주신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게 남겨주셨다면 아무 도움 없이 인간이 부지런히 탐구함으로서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인간들이 자연에서 어떤 법칙을 발견하고 탄광에서 좋은 지하자원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좋은 유적지를 발견하고 하는 것들은 인간의 노력으로 발견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부지런히 탐구하고 하면 되는 거잖아요 물론 섭리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겠지만 그것은 간접적이고 인간이 부지런히 탐구하면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람은 공부 안한 사람보다 더 지식이 많아지는 것이고 열심히 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 찾은 사람들은 가만히 있는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발견하고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반드시 그 원칙만 통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러니드이그노런스라고해서 많이 배운 사람들의 철저한 무지라는 개념이 나오는 겁니다. 부지런히 공부하고 탐구한 사람들 그래서 상당한 학식을 갖춘 사람들 이상하게도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주 무지한 사람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우리가 한 가지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언약 백성들에게 알리시는 것을 매우 기뻐하시지만 그 하나님을 아는 것은 언약백성으로 사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잇다는 겁니다. 칼빈 선생은 자기의 책속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획득하는 일에 대해서 논하면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는 동기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향한 경배와 순종을 목적으로 하여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빌라도의 뜰에서 재판을 받으시고 그리고 헤롯에게로 송취 되십니다. 그래서 헤롯에게 또 심문을 받으십니다. 그때 헤롯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I am” “나다” 그 한마디만 하시면 됩니다. 왜? 예수님이 평소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근데 예수님이 일체 대답을 안 하십니다.
많은 주석가들은 그 부분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하면은 진리가 무엇인지를 호기심으로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진리는 감춘바 된다. 그러면 하나님이 유다에게 알려지시고 이스라엘에게 알려지시는데 유다와 유다 백성다운 유다 사람 이스라엘 백성다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알려지시는 겁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조금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돈을 주시지만 정말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당신 자신이 누구신지를 알게 해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우리들이 습득하는 것과 하나님을 향해 꾸밈이 없고 순수한 경배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둘 사이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겁니다. 이 세상의 철학에서는 지혜를 획득하기 가장 좋은 마음이 어떤 마음이라고 보느냐 하면 일체의 욕망에서 모두 벗어나서 무념무상하게 된 마음이야말로 진리를 편견 없이 받아들이기에 가장 좋은 마음이라고 가르칩니니다.
오늘날 불교에서도 시끄러운데 그것은 세 가지 때문이다. 욕심과 분노와 어리석음 이 세 가지가 인간의 마음속에서 격동 할때에 인간은 무지하고 사물의 이치를 판단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기독교에서는 설명이 좀 다릅니다. 진리를 습득하고 깨닫기에 가장 훌륭한 마음은 불붙은 마음입니다. 무엇에 대한 불붙은 마음이냐 하면 그 진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향한 경배와 사랑으로 불붙은 마음 차갑고 냉정한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사랑으로 불붙은 그 뜨거운 마음이야 말로 그 진리를 습득하고 체득하기에 가장 훌륭한 인간의 정신이상태가 되는 겁니다. 그런 하나님을 향한 불붙는 사랑과 뜨거운 정을 간직할 때에 인간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아주 충실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언약관계에 대한 충성과 꾸밈이 없는 헌신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당신을 아는 지식을 풍부하게 선물처럼 주시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은 체 수십 시간을 기도하는 것 보다는 단 한 시간을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채워진 가운데 주님께 부르짖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더 많은 교통을 여는 것입니다.
(예화) 미국에 많은 신학교들이 있지만 대부분의 신학교들이 우리가 믿는 이 신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20여년전에 집회를 갔다가 설교를 하고 은혜를 받아서 하버드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던 그 형제의 증언에 의하면 자기를 가르친 신학교의 선생님들 70%정도는 교회를 안다닌답니다. 예수를 안 믿는 겁니다. 학문적으로는 세계 최고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겠죠? 신학 논문을 쓰는데 언어를 8개를 요구를 합니다. 히브리어, 라틴어, 헬라어, 아람어, 아르메니아어. 곱틱어, 불란서어, 독일어 얼마나 철저하게 교육을 시키겠습니까? 그런데 믿지를 않습니다. 학문적으로는 세계 최고일지는 모르지만 아무 교수도 행복한 사람이 없답니다.
우리들이 정말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과 경배의 정이 있을 때에 그때 우리의 삶에 하나님과 맺은 언약관계에 충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깊이 더 많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부부로서 사람들을 안다는 것과 이웃으로서 사람들을 안다는 것 어떤 의미에서 절대적인 정보의 양이 이웃을 향해 더 많은 정보를 가질 수 있습니다.
(예화)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루터를 연구한다 칩시다. 그렇게 해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칩시다. 그러면 루터의 태어난 거기에서부터 시작해 루터의 살았던 곳 루터의 일생 루터와 인척과의 관계 아버지가 무슨 직업인지를 이러한 것들을 일평생 공부했으니까 어떤 의미에서 정보의 양은 자기 아내에 대한 정보의 양보다 더 많은 정보의 양을 가지고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이 아내보다 루터를 더 많이 안다는 것은 아닙니다. 아는 자체가 이미 차원과 종류 자체가 다른 것입니다. 사랑의 관계를 통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은 결코 머리 좋으신 사람들에게 알려지시는 하나님이 아니고 공부 열심히 해서 알려지시는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언약관계에 충실한 사람들에게 알려지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당신과의 언약관계에 충실하면서 그분이 자기 같은 사람을 언약백성으로 선택해 주신 것에 감사하며 찬송하며 살고 부지런히 믿음과 이성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탐구하고자 노력할 때 풍성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 속에서 남다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알려지시기를 기뻐하는 분이십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하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중대한 모독입니다.
(예화) 한 가지만 예를 들어 보자면 옛날에 모시고 있던 목사님인데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세상 물정에 별로 관심이 없고 티비도 안보십니다. 늘 성경보고 공부하기 좋아하시는 분입니다. 상가 집에 갔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목사님 안녕하십니까? 라고 인사를 했답니다. 목사님 저를 모르시겠어요?
글쎄 전 잘 모르겠는데요.
저 구봉서입니다 목사님.
구봉서라 ? 돌아가신 분하고 인척이 되십니까?
아니 목사님 저를 정말 모르세요?
글쎄 저는 안면이 없는 데요.
목사님 저 모르시면 우리나라에서 간첩입니다.
간첩은 아닌데 전혀 기억이 없군요 하며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물어봅니다. 구봉서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코미디언인데 3살 먹은 아이부터 할아버지까지 다 아시는 사람입니다. 구봉서가 누구인지 학교에 와서 조교한테 물어봅니다. 구봉서가 재계의 거물이냐? 정치인이냐? 학생들이 포복절도를 했습니다. 우리는 웃었지만 구봉서씨는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시겠어요. 온 나라 사람이 다 아는 유명한 코미디언인 자기를 목사님은 자기를 모르고 있다면 일종의 모독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하나님을 모르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건 하나님 앞에 중대한 신성모독입니다. 주님을 아는 것 이것이 언약백성들의 의무이고 그 지식을 통해 이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려지게 하는 것 이것이 언약백성의 의무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