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에스라 강해
녹취자: 김경애
왜 그 은혜가 그렇게 크게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고 돌아갔고 뭐 엄청난 회개가 일어난 것도 아닌데 때가 되매 주님께서 그런 은혜들을 여전히 베풀어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신실치 아니하였으나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신실하셨다는 사실을 에스라가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크다는 사실을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그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생각하면 이 에스라의 마음이 더 큰 절망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범죄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큰 은혜를 베푸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범죄하게 되었다고 했을 때 베푸신 은혜가 크면 클수록 어떻게 됩니까? 주님이 죄를 향하여 정색을 하시게 된다면 이제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고 마치 변명도 할 수 없는 심판이 이르게 될 수 있다고 하는 위기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10절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렇게 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배반하였사오니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까.’ 그러니까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이 심판하셔도 변명할 말이 없고 주님이 국문하셔도 변명할 말이 없는 그러한 상황으로 다다르게 되었음을 이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에스라는 11절에서 선지자들을 회상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지자들을 회상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어떤 하나님의 계명을 말했습니까?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범죄하고 있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도구였던, 선지자들의 선포를 저버린 행위였음을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 주의 종 선지자들로 명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얻으려는 땅은 더러운 땅이니 이는 이방 백성들이 더럽고 가증한 일을 행하여 이 가에서 저 가까지 그 더러움으로 채웠음이라. 그런즉 너희 여자들을 저희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저희 딸을 너희 아들을 위하여 데려오지 말며 그들을 위하여 평강과 형통을 영영히 구하지 말라.’ 이 이야기는 결국 무엇을 의미하느냐하면 연혼하지 말라는 결혼하지 말라는 것, 이방의 아들과 딸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혼인을 맺지 말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그 명령이 사회의 도덕이나 일반적인 사회 윤리나 그리고 사회의 규범이 아니라 하나님이 종들을 통해서 친히 입으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어기고 범죄한 것은 단순히 도덕적인 타락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거룩함의 명령에 위반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단순히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차원의 문제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최대의 언약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네 하나님이 되리라.’ 그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가장 큰 요구는 무엇이냐 하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 그것이 요구사항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교회가 또 개인이 이 도덕적인 문제들을 논할 때에 항상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세상적인 도덕기준입니다. 세상의 도덕적인 기준에 비추고 그래서 뭔가 거기에 세상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교회의 비윤리적인 면, 부도덕한 면, 이것들을 보면서 교회가 반성을 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그럽니다. 그런데 사실은 교회가 추구해야할 것은 도덕은 아닙니다. 도덕은 우리 인간들 속에서 인간들이 만들어내고 인간들의 행복을 보장하기 위해서 서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주님이 주신 그런 양심들을 최소한도로 규격화시켜서 이 정의 선은 지켜야 된다고 하는 그런 것들이 사실은 도덕인데 사실은 교회가 도덕을 추구하려고 할 때에 정말 도덕적인 교회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있는 여러 가지 도덕을 추구하는 운동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대단히 Naive한 면을 많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 되니까, 그런 도덕성이 회복되는 것이 안 되니까 저번에 기독교방송국에서도 나오는 이야기가 사회 도덕성을 파괴하기 위해서 기독교방송국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텔레비전 방송국이 필요하다고 그러는데 문제는 기독교 안에 있는 도덕성 그리고 혹시 기독교가 사람들에게 도덕적인 모습으로 만약에 보인다면 그것은 사실 교회가 도덕적인 것들을 추구함으로써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을 추구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경건해지려고 노력하는 것도 결국은 무엇입니까? 거룩함을 향한 추구입니다. 오늘 우리들 가운데 가장 잊혀가고 있는 고민들, 그런 것들이 거룩함의 개념들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최대 언약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네 하나님 되리라.’ 그 약속에 대한 주님의 기대는 무엇이냐 하면 ‘그러므로 내가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거룩해라.’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구약 전체를 그 맥락에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주님이 그렇게 제사 제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보여주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죄인이 자기의 힘으로써는 자신을 깨끗케 하여 거룩한 하나님 앞에 자기를 세울 수 없으므로 주님이 주신 제사라는 방법을 통해서 인간이 거룩해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이 그토록 비통하게 민족의 죄악을 꾸짖고 백성들의 패괴함을 탄핵하고 왕정의 부패를 고발하였던 그 모든 선지자적인 메시지의 핵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 사람의 관심은 사회와 교회의 도덕성을 회복시키고 윤리를 제자리에 돌려놓기 위해서 몸부림쳤던 도덕운동가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뭐냐 하면 근본적으로 선지자와 성령을 다루면서 언젠가 이야기를 했지만 근본적으로 그들은 백성들이 보지 못했던 하나님을 만났고 그 하나님은 거룩했기 때문에 그 선지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거룩함을 향한 추구가 그로 하여금 그렇게 선포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적인 거룩, 자기 속에 있는 거룩함에 대한 추구와 거룩하지 않은 세상에 대한 번민, 그런 것들이 없는 죄에 대한 지적은 생각을 많이 해보아야할 문제입니다.
에스라는 지금 하필이면 이 시점에서 주의 종 섬길 자들에게 명하셨던 주님의 말씀을 생각해낼 수 있었던 이유는 결국 무엇입니까? 무엇이냐 하면 에스라의 마음속에, 에스라의 신앙 속에, 그이 영혼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그 거룩함을 향한 추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그는 선지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아니었지만 지난시간에 이야기했습니다. 참된 선지자와 참된 제사장은 충돌하지 않습니다. 참된 선지자와 사이비 제사장이니까 충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의 충돌이 참된 제사장과 사이비 선지자 사이에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에 에스라가 이것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옛날 그 당시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명하셨던 그 명령 즉 ‘너희가 가서 얻으려는 땅은…….’ 이것은 어디부터 주어집니까? 모세에서부터 벌써 명령되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런 일들을 이 선지자들의 마음속에서 그런 하나님에 대한 거룩함의 추구가 하나님으로부터 선지자들에게 전달되었던 그것을 이 에스라는 그대로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제사장이심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들의 그런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던 이러한 메시지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가서 얻으려는 땅은 더러운 땅이니’ 여러분 그런 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구약에 보면 무참한 명령을 하나님이 많이 명하십니다. 가나안땅을 정복할 때 다 쓸어버리라고 하십니다. 심지어는 기식이 있는 것은 짐승까지도 다 죽여 버리라고 하십니다. 그 다음에 소나 우양이나 이런 것들도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얻은 것도 다 진멸해버리라고 명하시고 그러시는데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의식이 없는 그런 어린아이에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다 죽여 버리라고 그러시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일 중요한 것은 그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호의 이전에 땅이 너무나 패괴하고 죄악이 관영하니까 주님이 심판의 도구로써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땅이 어린아이까지 심지어는 짐승까지 모두 멸절당하는 그런 속에서 우리들이 보아야할 것은 너무 무차별하다든지 무참하다든지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안 되고 거기 깃들여있는 영적인 의미를 보아야합니다. 두 가지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느냐하면 예를 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망대가 무너져서 죽은 열여덟 사람이 너희보다 죄가 없는 줄 아느냐?’등등 이야기하면서 그러면서 회개를 촉구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은 무슨 이야기냐 하면 하나님이 나라를 보실 때 그 나라는 굉장히 묘한 연대를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 하면 하나님께서 전쟁을 일으키시거나 어떤 일들을 일으키실 때에 반드시 죄 많은 사람만 죽고 죄 없는 사람은 살아나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 땅을 심판하시고자 할 때에 결국은 하나님께서 하나의 단위로 보시고 심판하시는 일들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는 그런 것들에 대한 연대의식이 너무 없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이렇게 보실 때 ‘이 민족이 심히 부패하였도다.’ 그러면 그 속에 비교적 경건한 사람도 사실은 살아남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깊이 연구하면 모든 사람들이 결국은 민족의 문제를 짊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뭐냐 하면 나라의 구획을 정하고 민족의 경계를 정하신 분에 대해서 결국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변증학에서 유신논증에 활용됩니다. 그러니까 우주론적 논증, 존재론적 논증, 목적론적 논증, 쪽 나가다가 그것은 대표적인 것이고 그들이 쭉 나가면 뭐냐 하면 민족적인 논증까지 나옵니다. 그러니까 나라의 경계와 구획, 그것을 보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는 그런 변증으로 나가는데 말하자면 그런 연대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사고방식들은 물론 구약을 획일화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구약의 이스라엘은 국가 equal 곧 교회였으니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런 예언들이 성취되어지고 오늘날의 국가의 개념들을 그렇게 국가의 개념으로 묶어서 직접 대입시킬 수 있겠는가? 그 문제는 조금 신학적인 토론의 여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최소한 우리는 그런 시대에 이스라엘이 예표 했던 교회 전체문제, 조국의 교회 전체문제 그런 것들을 향하여 짐을 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유행하고 있는 이 개교주의는 사실은 많은 긍정적인 면들도 가져왔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참 위험한 것들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에스라가 선지자의 이런 음성들을 자기들을 향하여 주어졌던 음성들을 생각하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까 이야기로 돌아가면 민족을 그렇게 비참하게 멸절하는 것은 두 가지 개념을 내포하는데 하나는 뭐냐 하면 연대적인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연대적인 심판을 이야기합니다. 연대적인 심판의 개념이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거룩함과 관련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2절에 보면 연혼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그들을 위하여 평강과 형통을 영영히 구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구약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방의 사람들이 얼마든지 교회로 들어옵니다. 이스라엘은 개방된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신앙고백과 할례를 통해서 들어오는데 그들을 위하여 평강과 형통을 영영히 구하지 말라는 이 말은 우리에게 큰 경고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교회가 어떻게 다루어야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을 고백하고 할례를 받고 들어오는 많은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 속으로 들어와서 회중이 되었지만 그러나 이스라엘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근본적으로 돌아오는 그런 것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평강과 형통을 구하는 것이 결국은 무엇을 가져다주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평강과 형통을 구함으로 말미암아서 그들과 함께 안주하는 이러한 혼합주의만을 계속해서 부추긴다는 것입니다. 나는 반대입니다. 뭐냐 하면 기도회를 하려면 사실 그런 기도모임들을 보면서 결국 그것이 정말 기도를 위한 모임이냐는 거기에서 다 미국을 본떠서 하는 것인데 꼭 그래야한다면 국가를 위한 기도를 교회에서 하면 되는 것이지 그렇게 종교들이 각자 자기 위상을 높이려고 하는 그런 것들도 전부 다 세속주의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미국에서 클린턴이 성경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 많이 구시렁댄다고 합니다. 헌법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해야지 왜 성경에 손을 얹고 기도하느냐 하는 그런 이야기들도 많이 나오는데 결국은 통치자가 내면적인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앙, 그리고 모인 사람들이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그 문제를 위해서 기도해야겠다고 하는 마음이 없는 그런 상태에서 그런 흉내만을 내는 것은 별로 반갑지 않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런 허세를 좀 벗어버릴 수 있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무엇인가를 다른 것들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의연한 것들을 말입니다. 국회의원들이 클린턴 취임에 거기 가는 추태들을 보십시오. 얼굴도 못 본다는데 거기에 가서 아이고 속이 허하니까 그런데 가서 그러는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그리하면 너희가 왕성하여 그 땅의 아름다운 것을 먹으며 그 땅을 자손에게 유전하여 영원한 기업을 삼게 되리라 하셨나이다.’ 했습니다. 왜 지금 갑자기 이런 지상적인 축복이 나오는 이유는 결국 무엇입니까? 이방민족과 연혼하고 그 땅에서 사는 것이 결국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단순히 여자가 좋고 남자가 좋아서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겜에 살면서 야곱이 그들과 함께 무역을 하고 거래를 했던 이유는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먹고 살자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생각해볼 점들이 있습니다. 우선 뭐냐 하면 인간적인 세속적인 유대관계에 대한 기대입니다. 그러니까 세겜에 살면서 그들과 함께 무역을 하고 거래를 하고 그런 관계 속에서 살아야했던 것처럼 또한 여기에서도 이 사람들이 이렇게 그 사람들과 함께 연혼하고 사는 이것이 말하자면 그 땅에서 정착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 땅의 주인이지만 돌아온 포로 귀환의 맥락에서 이야기해본다면 전에는 그 사람들이 살았던 그 땅의 주인이었지만 수십 년이 지나고 나니까 이미 그 땅에는 자리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리 잡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와서 그들과 감정이 틀어진 그런 삶의 방식을 택하는 것이 그들이 거기 낯선 땅에 다시 돌아와서 정착하는데 무슨 도움을 주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세속적인 계산이 깔려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결국은 왜 연혼을 이렇게 문제 삼는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종교문제와 결부되기 때문입니다. 연혼의 문제와 종교적인 문제가 함께 결부되는 것입니다. 가족관계를 맺고 친구관계를 맺으면 반드시 그들의 신앙이 그 가족관계를 통해서 흘러들어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경건한 자녀들을 산출하고 경건한 자녀들을 양육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실패한 대표적인 케이스가 아합과 이세벨의 사건 아닙니까? 아합과 이세벨의 딸 아달랴의 사건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런 것들로 미루어 볼 때에 여기서 지금 지상적인 것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런 지상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이 해결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살아라. 그러면 내가 해결해준다. 어떻게? 너희가 왕성하게 될 것이고 또 그 땅 너희들이 다른 사람들이 점령하고 있고 그래서 두려워하는 그 땅의 아름다운 것을 너희들이 먹고 또 뿐만 아니라 그 땅을 너희 자손들에게 유전하여 영원한 기업으로 삼게 되리라. 는 것입니다.
13절에 내려가서 ‘우리 악한 행실과 큰 죄로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당하였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 죄악보다 형벌을 경하게 하시고 이만큼 백성을 남겨주셨사오니’ 그러니까 지금 무엇입니까? 지금 에스라가 말하고 있는 것이 지금 왜 포로로 끌려갔는가하는 것을 다시 회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지금 에스라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이 죄를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갔다는 것을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3절은 특별히 에스라의 바벨론 포로의 영적인 해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애굽이 갈그미스 전투에서 애굽이 바벨론에 졌기 때문에 그 정치적인 영향으로 이스라엘은 포로가 되었다고 정치가들은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학자들은 이스라엘 국권이 땅에 떨어지고 백성들이 단합심을 잃어버리고 어찌어찌 되었으므로 부정부패했기 때문에 결국 나라는 파멸되게 되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지도자는 이런 시각을 가지고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악한 행실과 큰 죄로 인하여 이 모든 일들을 당하였다. 그러니까 바벨론 포로로 끌려오게 된 모든 사건들, 그리고 그렇게 70년 동안 고토를 떠나서 고생하고 유리하던 그 모든 포로생활들은 모두 우리 악한 행실과 큰 죄 때문이었다. 악한 행실과 큰 죄를 하나님이 심판하신 결과가 바로 그렇게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당하였사오나’ 그러나 위로가 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하나님이 우리 죄악보다 형벌을 경하게 하시고 이만큼 백성을 남겨두셨사오니’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은 고난은 참 큰 것이었지만 그러나 이 에스라의 생각에는 무엇이냐 하면 그것도 감지덕지다 싹 쓸어서 완전히 파멸되었어야 마땅한데 이만큼 살려주신 것도 하나님의 기가 막힌 은혜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백성을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뭐냐 하면 하나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자신들의 죄악에 중차대함을 깊이 인식하니까 그런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만큼 백성을 남겨두셨사오니’ 이 말은 돌아온 귀환한 사람들이 더 특별한 은혜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어찌 다시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이 가증한 일을 행하는 족속과 연혼하오리이까?’ 그러니까 신앙의 경험으로 생각해보거나 그 다음에 논리적으로 생각해보거나 그리고 현재적인 신앙양심에 판단해보거나 모든 것으로 판단해볼 때 가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게 에스라가 자기가 하나님 앞에 반문할 수 있는 성질의 것입니까? ‘연혼하오리이까?’ 자기가 무엇인데 하나님 앞에 다시 반문할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에스라도 하도 답답하니까 이런 일들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논리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불가능에 가까운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제사장이었으면 백성들의 편에 서야할 것 아닙니까? 백성의 죄를 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이니까 결국은 이 에스라가 백성들의 죄악을 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백성들의 죄악을 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죄악을 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뿐이지 그 일어난 죄를 당연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점에서도 선지자와 제사장이 또 일치하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백성들의 죄를 지고 긍휼을 구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이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그런 일을 결국은 합니다. 10장에서도 보면 결국은 그런 일을 합니다. 결국은 그런 일을 하는데 그런 일을 한다고 해서 일어난 죄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14절 하반 절에 ‘그리 하오면 주께서 어찌 진노하사 우리를 멸하시고 남아 피할 자가 없도록 하시지 아니하시리이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패역할 때 하나님의 심판은 일어났습니까? 안 일어났습니까? 일어나지는 않았는데 일촉즉발이라고 합니다. 첫 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왜 에스라가 좀 더 빨리 알지 않았을까? 왜 이제야 이것을 알게 되었을까? 그런데 어쨌든 일촉즉발입니까? 그런데 ‘주께서 어찌 진노하사 우리를 멸하시고 남아 피할 자가 없도록 하시지 아니하시리이까?’ 당연히 심판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도 또 선지자와 제사장의 시각이 일치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제사장이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이 용서해주실 것이고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이라고 하는 이런 Naive한 시각들은 제사장들의 모든 제사장들이 똑같이 가지고 있던 신학이 아닌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중요한 신학의 흐름이 어디서부터 가닥이 문제가 되느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아브라함 때부터 부르심을 받아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고 아브라함의 가족이라는 하나의 단위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가족이 창세기 마지막장에서부터 뒤로 넘어오면서 출애굽기까지 오는 사이에 엄청난 규모로 불어나서 하나의 Nation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까지도 패밀리입니다. 시내 산에서 언약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Nation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민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주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땅이 있고 그것도 재미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가나안땅을 주노니’ 할 때는 완료입니다. ‘나카티’ 이미 주었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주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줄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옛날에 주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셨는데도 아직 실현은 안 된 것입니다. 그렇게 땅이 주어지고 율법이 주어지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에는 하나님이 무조건 호의적인 하나님으로 나타납니다. 심판을 하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리하면 내가 네 씨가 바다의 모래알같이 많아지고 내가 너를 복을 주어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되리라.’ 무조건적인 베풂의 은총입니다. 은총으로 일관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시내 산으로 들어오니까 칼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지키면 살고’ 말입니다. 누가 자기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다고 그런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제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언약백성입니다. 그렇게 해놓고 지키면 살고 어기면 죽여 버린다는 살벌한 언약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제사장들은 아브라함의 언약에 자꾸 기대를 거는 것입니다. 무제한적으로 은총이 많으신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이제 선지자들은 그 두면을 다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릴 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똑같은 문제들이 하나님을 하나의 사랑이라는 교리의 창살에 가두어놓고 하나님을 해석하는 그런 것들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보니까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5절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롭도소이다 우리가 남아 피한 것이 오늘날과 같사옵거늘 도리어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범죄는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주 앞에 한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 15절은 임박한 심판에 대한 절망적인 인식입니다. ‘주 앞에 한 사람이라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 는 누구라도 감히 설 수 없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심지어는 자신조차도 누구라도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15절이 10장 1절의 밑그림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10장의 내용분해를 해보겠습니다. 10장 1절 한절은 지도자의 회개입니다. 회개와 그 효과입니다. 그 다음에 2절부터 4절까지는 회개로 말미암는 삶의 변화 두 번째는 회개를 통한 지도자의 영적 권의의 회복 그 다음에 5절부터 8절은 지도자의 결단, 9절부터 14절까지 설교를 통한 민족적인 감화 즉 부흥입니다. 그 다음에 15절 한절은 부흥에 대한 국부적인 반대, 16절부터 18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하나님의 역사 19절부터 마지막까지 부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제목을 붙인다면 이스라엘 가운데 있었던 범죄의 보편성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 정도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10장 1절 한절만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그랬습니다. 결국은 10장에서 재미있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1절에서 그렇게 회개를 하는데 ‘하나님 우리를 살려주십시오.’ 그런 이야기가 안 나옵니다. 1절을 잘 보시면 당연히 ‘하나님 한번 용서해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그래야 되는데 안 나옵니다. 자 그러면 1절부터 보겠습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은 자와 어린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우선 1절 상반 절에서 보여주는 것은 지도자의 회개입니다. 에스라의 회개의 특징을 몇 가지 본다면 첫째는 자기의 죄가 아닌 민족의 죄를 위해서 애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앞에 9장 15절에 나와 있는 심판에 대한 임박한 인식 때문에 에스라가 기도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기도하는 것은 결국은 모든 사람들의 죄를 위한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받는 교훈 하나는 무엇입니까? 진정한 중보의 기도가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그들의 죄악을 나의 죄악으로 느끼게 되는 일들이 먼저 일어나야합니다. 그들의 죄악이 나의 죄악으로 느끼게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두 번째 에스라의 기도의 특징은 무엇이냐 하면 1절에 보면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 두 번째는 전 앞에서 그 기도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묵상을 한다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기도했다는 것은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지만 우선 민족적으로 범죄 했을 때 에스라는 성전을 찾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은 뭐냐 하면 민족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분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에스라에게는 백성들을 치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그런 행정적인 권한, 사법권 이런 것을 아닥사스다 왕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에스라는 먼저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울며 죄를 자복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무엇입니까? 에스라가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어떤 놈이 그랬느냐? 전부 잘라! 쫒아내!’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구약 신앙도 마찬가지지만 기독교 신앙은 이렇게 인간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들을 다루는 것입니다. 주변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들을 다루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늘 생각하는 시야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스라가 이러한 위기가 닥쳤을 때 하나님의 전을 찾았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좀 더 들어가 봅시다. 하나님의 전을 찾았을 때 그가 왜 하나님의 전을 찾았겠는가? 그런 물음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에스라가 되어서 하나님의 전 앞에 섰을 때 무슨 느낌이 들겠습니까? 거룩하심에 압도되기도 하겠지만 무슨 큰일이 닥칠 때 어떤 일정한 장소, 일정한 자리에 서면 항상 사람들은 무엇을 하게 됩니까? 생각을 하고 회상을 하게 됩니다. 그래도 모르겠습니까? 자매 한번 이야기해보십시오. 무슨 상황? 에스라가 지금 이런 상황에서 거기에 엎드려서 그런 민족적인 위기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전을 찾아서 그 앞에 섰을 때 그 에스라가 귀환한 이후로 잊히지 않는 한 사건 무엇을 회상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이 나지 않습니까? 성전을 짓기까지 지대를 놓고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감격해하고 눈물을 흘렸던 사건, 꼭 그것은 아니겠지만 그런 등등의 사건들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그렇게 율법을 낭독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던 그런 장면들, 또 아니면 성전의 지대가 놓이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감격했던 것, 그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말미암아 임재가 떠났을지라도 그러나 그런 임재가 있는 곳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속에서 에스라가 성전을 찾았다는 것은 문제의 해결이 하나님께만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실로 그렇습니다. 민족이 죄로 말미암아서 깊은 절망 속에 있을 때에 민족이 그런 위기가 처해있을 때 또는 교회에 위기가 처해졌을 때 결국은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분뿐입니다. 그러니까 에스라는 그런 면에서 옳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어디였습니까? 하나님의 전으로 들어갔습니까? 못 들어갔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러니까 민족이 이와 같이 죄를 지은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성전을 들어갈 수 있겠는가? 내가 감히 어떻게 성전을 들어갈 수 있겠는가? 그러면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성전 문 앞에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던 지도자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이 굉장히 많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얼마나 후안무취한 사람들인가? 얼마나 뻔뻔한 사람들인가? 지금의 교회의 개념과 성전의 개념이 똑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어쨌든 에스라는 자기가 지은 죄가 아니라 민족이 지은 그 죄를 인하여서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존재임을 깊이 느끼고 그 거룩한 성전 문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그 문 앞에 멈춰 설수밖에 없는 이러한 것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백성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그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늘 성전에 드나들던 사람이었습니다. 늘 드나드는 사람이었는데 이날은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 에스라는 문 앞에서 과거의 사건도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백성이 이러한 끔찍한 죄악 가운데 있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이 거룩한 성전을 말하자면 수시로 드나들면서 주의 거룩함을 능멸했구나 하는 그런 자책을 했을 것이라고 얼마든지 묵상할 수 있습니다. 하여튼 그 문 앞에 멈추어 섰다는 것을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그 아무 죄도 없는 에스라가 민족의 죄를 짊어지고 문 앞에 들어서지도 못하고 거기에서 멈출 수밖에 없는 것을 결국은 하나님이 그것을 보시고 긍휼과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만큼 시대와 교회는 지도자들이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그 지도자를 기억하셔서 하나님의 은총을 회복시키시는 일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더 깊이 묵상해보십시오. 아주 깊습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문 앞에 멈추어 섰을 때 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수시로 드나들던 그곳이었는데 하나님과 자기 사이가 차단되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말미암아서입니까? 백성들의 끔찍한 죄, 그러니까 자기가 백성의 죄를 위해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제사장의 기본 임무인데 제사를 드려서 속해야겠다는 엄두를 낼 수도 없을 정도로 차단된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런 것들을 거의 못 느끼면서 우리들은 강단에 오르내리고 교회를 섬기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속에서 그런 어떤 죄들이 일어나고 그래도 그것들이 ‘왜 그런 일이 일어날까? 못됐다.’ 그렇게 생각해도 그것이 나에게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에 말하자면 멈춰 서게 만드는 그러한 돌아봄이 결핍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 앞에’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것도 결국은 죄 때문입니다. 죄 때문에 무감각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이런 마음들이 무감각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단 하나 밖에 없습니다. 죄 때문입니다. 죄 때문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없습니다. 보이고 있는 바는 하나님의 전 앞에 들어가지 못하는 상태에 있는 에스라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스라가 얼마나 자기의 죄와 그리고 백성의 죄 사이에서 연대의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지체의식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로 마음속에 부흥이 일어나지 않고는 사실은 이런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결국은 우리의 무감각과 죄악 때문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전 앞에’ 라는 말이 보여주는 또 다른 것은 없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앞에 서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아갈 수 없고 그리고 백성들의 죄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게 만드는 이러한 것이 되었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망은 결국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버리실지라도 나는 주를 바랄 수밖에 없나이다.’ 라는 신앙의 고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려야지 살려달라는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지 그냥 성전 문 앞에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뻔뻔합니다. 또 하나님의 문 앞에 서있다는 이 말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설교자들이 죄를 어떤 방식으로 다루어야할까 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은 뭐냐 하면 죄인을 감화시키는 설교는 죄에 대한 예리한 지적이 아니라 그 죄에 대한 아픔을 공감하는 설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죄인들이 깨닫지 못하거나 지적으로 모자라서 죄를 짓는 것은 거의 없고 있어도 극히 일부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그 자체가 예리한 지적도 물론 필요하겠지만 그러나 그것 하나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자신들이 죄악을 인하여서 깊이 애통하는 것입니다. 참 제사장이 되지 않고는 선지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참 제사장이 되면 참 선지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더 생각을 많이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 다음에 나가면 무엇입니까?
그 문 앞에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거기까지입니다. 우선 에스라의 태도는 어땠습니까? 세 번째로 어떻게 했습니까? 엎드렸습니다. 엎드린 기도였습니다. 더 봅시다. 엎드렸다는 것은 기도하는 자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몇 가지의 기도의 자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것이 있습니까? 서서 기도하는 것, 그것은 경건한 기도의 한 모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뭐가 있습니까? 무릎을 꿇고 하는 것입니다. 엘리야 같은 경우는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해보아도 안 들어갑니다. 안된다고 하니까 우리 집사람은 배가 나와서 안 된다고 했습니다. 엘리아는 확실히 배가 안 나온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설교제목을 무릎과 무릎 사이라고 하면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기도하라고 그런 제목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어떤 기도가 있습니까? 손을 들고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의 탄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흔한 기도의 방식은 무엇입니까? 고개를 들고 하늘을 향하여 쳐다보고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도 보입니다. 그 당시의 흔한 기도의 방식입니다. 여기서는 엎드린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기도에 있어서는 격식에 없는 파격입니다. 엎드린 사람이 또 하나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바울의 경우에 엎드렸습니다. 엎드린 기도 이것은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느냐하면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는 극심한 절망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여기 에스라의 경우에는 고개를 들 수 없는 참괴감, 극도의 부끄러움입니다. 여기에 나옵니다. 9장 6절에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얼굴을 들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엎드린 것입니다. 엎드려서입니다. 세 번째는 완전한 항복입니다. Surrender! 하나님 앞에 완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완전한 순복? 완전한 복종? 항복? 그런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울었습니다. ‘울며’ 그것이 본문에 ‘박카’ 로 나옵니다. ‘베트카푸헤’ ‘울다’ 입니다. 이게 어디에 나옵니까? 보김이라고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곡함의 상수리, 그렇게 울면서 엎드려 울면서 기도하였다. 운다는 것은 슬픔이고 애곡하는 것입니다. 슬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났다는 후회와 그리고 심판이 다가올 것이라는 두려움 이러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10장 1절입니다. 똑떨어졌다는 나팔동사입니다. 위에서 사람이 뚝 떨어진 것같이 그렇게 이것은 털썩 엎드러진 것입니다. 그래서 ‘울면서 자복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그가 하나님 앞에 죄를 자복한다고 그랬는데 여기서 보여주는 죄를 자복하는 가장 훌륭한 수단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까? 우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여’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죄를 자복하는 가장 훌륭한 수단은 기도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보면 ‘죄를’ 이라는 말이 원문에는 안 나오는데 그러니까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며 자복할 때에’ 이렇게 나옵니다. 어쨌든 죄를 자복하는 가장 훌륭한 수단은 먼저 기도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기도를 통해서 영혼이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그 다음에 그 회개한 내용들이 삶에 옮겨지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그 뒤에 보면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드디어 그 통곡이 어디로 번져갔습니까? 백성들에게로 번져가는 장면입니다. 여기는 뭐냐 하면 확산되는 회개입니다. 그래서 양떼의 죄를 지고 자기 죄처럼 대신 슬퍼하는 지도자가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로 그들을 이끌어준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면 양떼의 죄를 지고 자기의 죄처럼 대신 슬퍼하는 지도자가 그들을 하나님 앞에서 회개를 이끌어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9장에 보면 어떤 일들이 일어나느냐하면 4절에 보면 여기에도 한번 모입니다. ‘이에 이스라엘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가 이 사로잡혔던 자의 죄를 인하여 다 내게로 모여오더라.’ 이 정도에 그쳤습니다. 그런데 말씀으로 인하여 떠는 자들이 모여 있는데 그 다음에는 진정한 회개가 터져 나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에스라가 하나님 전 앞에 울며 엎드려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그랬습니다. 여기서 우선 하나씩 주목할 것은 뭐냐 하면 백성들이 심히 통곡하는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1절 하반 절에서 보여주는 것은 민족의 확산된 회개입니다. 확산된 회개가 언제 일어났느냐하면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에 엎드려서 울면서 기도할 때에 그때에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울면서 기도할 그때에 많은 백성들이 심히 통곡하는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도자의 회개는 백성들의 깊은 회개를 가져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많은 백성들이 심히 통곡했다고 그랬는데 많은 백성들이 심히 통곡한 것은 결국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는 그 심정을 나누어갖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부흥은 바로 이러한 말하자면 확산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앞에 느끼는 것들이 한사람이 느끼는 그런 것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염되어지는 것과 같은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18세기 신앙부흥의 때에 설교자들이 그런 하나님 앞에 긴박감을 가지고 설교할 때에 회중들이 똑같이 느낍니다. 지옥의 벼랑에 서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는 즉 설교자가 느끼는 것들을 같이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지금 심히 통곡하게 된 것도 결국은 뭐냐 하면 하나의 각성으로 말미암는 통곡입니다. 각성으로 말미암는 통곡입니다. 무슨 각성입니까? 이전에 있었던 자기들이 행했던 이방민족들과 연혼하는 그런 것들을 우습게 생각하고 그 당시의 도덕적인 기준들로 볼 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그런 것들이 굉장히 심각하게 문제가 된다는 것이 어느 한순간에 떠오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각성입니다. 사실은 지금 진정한 각성이 여기서 세 번 일어나는데 9장 4절에서 한번 일어나고 10장 1절에서 일어나고 4절에서 한번 일어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듣고 우는 것도 뭐냐 하면 이러한 각성이 동반된 상태에서의 눈물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울기는 많이 울었는데 무엇 때문에 울었는지도 모르는 이러한 것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전하는데 있어서 사람들이 울 수 있는 그런 분위기들은 최대한 배격해야하고 조작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는 울지도 않으면서 덜덜 떨면서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도 생각해보아야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으로 말미암아서 어떤 각성이 일어나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울게 되는 눈물은 참 귀합니다. 그리고 또 오늘날 우리들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Naive한 견해는 예배는 경건해야 된다는 그런 의도에서 이런 어떤 감정의 표출 같은 것들이 경시되고 그리고 무시되는 경향이 있고 심지어는 억압받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자연스럽지 못한 것입니다. 안 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짜내는 것만큼 잘못된 것들을 표출을 못하는 것입니다. 생긴 대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그런 것들도 어떤 면에서 보면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일들이 너무나 희귀하니까 사람들이 그러한 일들을 오히려 더 하나의 원칙으로 세우는 것 같습니다. 늘 이야기하지만 어떻게 예배의 감격이 있다면 늘 똑같은 시간에 끝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은 방법이 있습니다. 헌금시간에 전부 다 시계를 다 걷어야합니다. 또 괜히 길게 질질 늘여도 안 됩니다. 그러니까 말씀 속으로 끌고 들어갈 때에 성령이 이끌어 가시는 것인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저는 하나님을 만난 것과 사람들이 이렇게 깊은 감화의 눈물을 흘리는 것은 완전히 일치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 눈물을 다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진정으로 하나님과 만났다면 어떻게 감정의 변화가 없을 수 있고 마치 죽은 자들의 무덤과 같은 기도시간이 계속될 수 있는가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확실한 것 하나는 말씀을 전하면서 사람들이 거기에 말씀이 학 빨려 들어간다고 느끼면 설교가 끝나고 나면 확실히 기도소리가 틀려집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그런 면들을 우습게 알고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죄를 자복할 때에’ 앞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가 자기의 죄를 인하여 다 내게로 모여들더라.’ 그랬는데 여기서는 많은 백성이라고 그랬는데 9장에서보다는 훨씬 더 숫자적으로 많은 ‘라’ 라고 나옵니다. ‘중다한 백성들이’ 이렇게 나옵니다. 중다한 백성들이 심히 통곡하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중다한 백성들이 심히 통곡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10장에 보면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에스라의 무슨 설교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이 사람들이 통곡하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부흥에 있어서 설교의 중요성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조금 기대에 어긋나는 사건이 아닙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랬을 수도 있고 또 하나는 이 에스라의 기도를 들었을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왜 그러느냐하면 9장 4절에 보면 ‘사로잡혔던 자의 죄를 인하여 다 내게로 모여오더라.’ 그랬는데 이 사람들이 흩어졌다는 이야기가 안 나옵니다. 그 소리를 들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것이 하나의 메시지가 되었을 수 있습니다. 어쨌든 많은 백성들이 심히 통곡하는 일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각성을 동반한 통곡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였는지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모인 것은 아니고 그 무리들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들까지 모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린아이에게까지 이런 감화가 미쳤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앙부흥에 아이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합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심히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그리고 이제 오늘 다 못하겠습니다만 2절부터 보면 ‘엘람 자손 중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에게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오히려 소망이 있나니’ 그러면서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스바냐를 통해서 에스라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4절에 가서 ‘이는 당신의 주장할 일이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이런 사람을 만날 수 있으니 얼마나 복된 사람입니까? 그것이 자꾸 들어옵니다. 3절 하반절 ‘모든 아내와 모든 소생을 다 내어 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이는 당신의 주장할 일이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기도를 하십시오. 이런 사람을 많이 보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자꾸 초치는 사람들 말고 이렇게 주님 나에게도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하는 사람들을 보내주시옵소서. 그러니까 결국은 이렇게 각성을 통하지 않고는 이렇게 하나가 되는 일들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에스라가 그런 민족적인 위기를 만났을 때에 누가 과연 내편에 서 줄 것인가? 귀환할 때에 아하와 강가에서 여기까지 올라올 때에 나를 전심으로 도울 동역자들의 목록을 짜자. 내가 누구인가? 누가 내 마음을 이해해줄 것인가? 그런 명단을 짜서 사람들을 찾아다니지 않았습니다. 홀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사람들에게 각성이 일어났고 그 각성을 경험한 사람들은 진심으로 에스라와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흥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참된 동역자를 얻기 위해서라도 부흥이 일어나야합니다. 각성이 일어나야합니다. 진정한 동역자들을 하나님께서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심히 통곡하며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우선 여기에서 몇 가지 단계를 보여줍니다. 1절에서 에스라의 회개를 보여주고 그 다음에 중반 절에서는 많은 백성들이라고 이름 되어진 각성으로 말미암아 통곡하는 백성들, 세 번째 단계에서는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아이의 큰 무리가 이렇게 확산되는 것입니다. 즉 에스라에서 많은 백성, 거기에서 큰 무리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다음에 9절에 가서는 유다와 베냐민 모든 사람들이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15절에 ‘오직 아세헬의 아들 요나단과 디과의 아들 야스야가 일어나 그 일을 반대하고 므술람과 레위 사람 삽브대가 저희를 돕더라.’ 그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그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민족적인 확산된 회개에 동참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절 마지막에 ‘그 앞에 모인지라.’ 재미있습니다.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그 앞은 누구 앞입니까? 에스라 앞에 모인 것입니다. 모일 때 그들의 심정은 어떤 심정이었겠습니까? 물론 회개하는 마음으로 통곡하는 심정으로 에스라 앞에 모인 것인데 결국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를 인도할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민족적인 위기 속에서 우리를 지도할 분은 당신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앞에’ 라는 말이 그런 의미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또 하나의 의미는 진정한 부흥을 경험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전 앞에서 엎드려 울며 기도하는 그런 에스라, 이런 사람 앞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참다운 회개가 선포되는 그곳에 하나님께서 반대와 함께 이렇게 사람들을 서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1절까지만 합시다. 다음에 1절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면서 다뤄봅시다.
우선 9장까지 에서는 사실 부흥이라기보다는 각성이 계속해서 누룩처럼 번지는 광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맨 처음에 에스라에게 와서 방백들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제사장과 레위사람들이 이 땅 백성과 떠나지 아니하고 다른 이방사람들과 함께 가증한 일을 행하고 잡혼을 일삼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 이제 에스라가 깊이 죄악의 심각성에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런 각성들이 사람들에게 다 이렇게 누룩처럼 번져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방백들이 나아와서 그렇게 에스라에게 고했을 때에 그 방백들이 에스라에게 고했을 때에 방백들도 역시 에스라의 태도를 보면서 각성의 심도를 더했을 것이라고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씀드려서 ‘어떠어떠한 것들은 깊은 죄다, 잘못이다, 하나님 앞에 바르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고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각성은 또 더 다른 차원의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신념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 심각성을 자기가 느끼는 것, 신념만이 아니라 그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큰 구도로 본다면 방백들이 다가오게 되고 그 방백들은 경건한 사람들로서 그런 잘못된 죄악들을 깨닫고 그래서 확신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에스라에게 이야기하니까 에스라가 너무나 의외의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 일을 듣고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히게 앉아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역시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이런 것들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자기가 생각했던 것들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깊은 죄악이었다는 현장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들이 나아오게 되고 이어서 에스라가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10장에서 그 영광스러운 부흥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본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스라서에서 이 10장이 본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좀 분해를 해보면 10장 1절에서는 지도자의 회개입니다. 그 다음에 2절에서는 회개를 통한 지도자의 영적 권위의 회복입니다. 그 다음에 3절에서는 뚜렷한 삶의 변화, 회개가 무엇인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5절부터 8절까지는 지도자의 결단. 그 다음에 9절부터 14절까지는 설교를 통한 부흥, 민족적인 부흥, 회개의 민족적인 확산입니다. 그 다음에 15절에는 국부적인 반대입니다. 16절부터는 부록으로 범죄의 보편성입니다. 그러면 하나씩 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1절부터 봅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며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그랬습니다. 9장에서는 에스라가 어디에서 기도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가 잘 안 나오는데 10장에서는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렸다는 이야기가 분명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씩 더듬어보면 먼저 10장 1절에 에스라의 회개로 시작됩니다. 엎드려 울며 회개한 사람이 에스라였다는 사실입니다. 이 당시에는 지도자들이 많이 있었는데 어떤 지도자들이 있었겠습니까? 방백들도 있고, 제사장들도 있고, 레위인들도 있고, 두목들도 있고 등등 9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장 1절에서 ‘에스라가’ 그렇게 시작합니다. 거기서 뭐 느끼는 것이 없습니까? 그러니까 ‘에스라가’ 하는 장면에서 느끼는 것이 없습니까? 오직 한사람 마치 창세기 35장에서 ‘너는’ 할 때 ‘너’ 2인칭 남성 단수처럼 우리는 흔히 이런 것을 읽을 때 어떤 생각을 하느냐하면 ‘에스라니까’ 이렇게 시작합니다. 날 때부터 틀린 사람 에스라니까 하나님이 쓰셨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에스라라는 이름은 이름 자체가 어떻게 보면 초라한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면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신앙고백이 이름에 담겨있습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우리 집사님이 맞춰주셨습니다. 여러 사람도 아니고 에스라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부흥을 시작하시는 원리입니다. 에스라라고 하는 한 사람입니다. 에스라라는 그림 속에서 우선적으로 굉장한 사람 엄청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고 그 민족적인 엄청난 부흥이 에스라라는 자연인 한 사람의 이름으로 시작된다고 하는 데에 우리가 깊은 도전을 느껴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에스라라는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 위대한 신앙부흥의 뇌관과 같이 그렇게 사건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격적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신앙부흥을 이 땅에 부어주심에 있어서 가장 확실한 것 하나는 주님의 방법은 다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소수입니다. 그리고 소수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소수를 사용하시느냐하면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은 뭐냐 하면 소수를 사용하시면서 하나님의 구원이 사람의 수에 있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소수를 사용하실 수밖에 없는 이유는 뭐냐 하면 이러한 죄와 불완전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를 바라고 그리고 또 바랄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하나님의 시각에서 자신들의 죄악 된 상태를 볼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다수일 수 있다는 것은 참 힘든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모든 것들의 수준을 어디에 놓고 생각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집회를 하면서도 그 자매가 굉장히 부러웠었는데 마지막 날인데 그 자매에게만 성령이 강력히 역사하신 것입니다. 거 자매는 성령 안에 있는 교제의 진수입니다. 그러니까 자매가 전혀 그런 체험이 없었는데 대게 뒷자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납니다. 앞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뒤에 앉아있는데 이 자매가 갑자기 하나님께서 부어주셨어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귀신들린 자매를 즉석에서 알아본 것입니다. 뭐냐 하면 그 자매가 너무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와서 이야기하는데도 불쌍하다고 눈물을 계속 흘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자면 불붙는 사랑으로 그 자매를 위해서 기도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사단아 물러가라.’ 그러니까 사람들이 ‘너 왜 그러니? 왜 그러니?’ 그러면서 떼어놓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런 것이 잠깐 있는 체험이고 물론 자매가 어떻게 자신을 잘 간직하느냐에 따라서 오래갈 수도 있는 것이지만 그런 것들이 말하자면 성령 안에 있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진수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중보기도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이유는 뭐냐 하면 주께서 기도의 영을 부어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또 주님께로 탓을 돌리게 되는 것이니까 기도의 영으로 사람이 충만해질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중보의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어떻게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소수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에스라가’ 라는 말이 보여주는 두 번째 의미가 바로 그런 그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민족사 그 하나님을 배반하고 타락해가지고 주님이 징계해서 바벨론으로 다 뿔뿔이 흩어지고 이제 70년 동안 그렇게 노예로 복역하는 가운데 조금 은혜를 베푸셔서 조금 소생하게 하셔서 이제 이 고토로 돌아오게 하시고 그런 가운데서도 또 다시 타락하는 이 굽이치는 역사 속에서 ‘에스라가’ 할 때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는 지금 이 에스라 한 사람을 주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에스라 한 사람에게 말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은 좀 과장일지 모른다고 생각하실지 모르는데 저는 한참 전에 작년 6월인가에 기도원에 가면서 요한복음 1장 6절을 보면서 확신을 가졌습니다. 보십시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이 하나님이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래 놓고 빛이 나타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장면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번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다고 한번 생각해보시란 말입니다. 완전히 구원을 잃어버린 역사 속에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아담 이후로부터 인간이 타락하고 나서 그토록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고대하고 갈망하고 그리워하고 아브라함이 바라만 보며 환영하며 즐거워하며 죽을 수 있었던, 수많은 선지자들이 그렇게 죽을 수 있었으면서도 바라만보는 것으로 만족해야했던 그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다는 것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사건이냐는 말입니다. 이 사건은 사실은 인간들의 역사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향해 주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십자가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온 우주가 지금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 그리스도의 오심에 주목하고 있는 것입니다. 별들에 귀의하는 전조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왜 그러느냐하면 인간들은 오히려 패역한 사람들은 회복을 기다리지 않지만 그러나 만물은 흐느끼면서 인간의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그 죄로 말미암아 영향을 받아서 주께로부터 저주받은 그 모든 우주와 땅과 피조 세계들이 회복되어지고 풀려질 날들 그 화목의 시간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사건이 얼마나 엄청난 사건인지를 생각해보시라는 것입니다. 상상이 잘 안 가는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우리의 사고는 늘 지상적입니다. 땅에 깔려 잇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도 친구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뭐하시는 분입니까? 그러면 취직도 시켜주고 없을 때 용돈도 좀 주머니에 찔러 넣어주시고 하는 그런 정도의 분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너무 평면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눈을 들어서 주님이 모든 온 천하를 다스리시는 분이시라는 그런 사실에 눈을 떠야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그 어마어마한 어떤 의미에서 보면 창조보다도 더 엄청난 사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사건은 말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예언이 사백년 동안 끊어졌습니다. 사백년 동안 완전히 침묵입니다. 잠시 후에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건을 무엇으로 시작하느냐하면 세례 요한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뭐냐 하면 그리스도가 오신다고 하는 깃발을 흔들면서 앞으로 지나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주목하는 모든 세상 사람들은 마땅히 그 앞에 그리스도 예수를 증언하고 있는 세례 요한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를 통해서 그가 깃발을 흔들고 지나가자 진짜 그가 말씀을 외치면서 ‘빛이 오신다.’하며 외치며 지나가고 그 사람이 지나가고 죽고 나니까 드디어 진짜 참 빛이 비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을 주목하게 됩니다. 여기서도 그런 하나의 원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단강가에서 있었던 세례요한의 선포도 의심할 여지없는 신앙부흥입니다. 어떻게 그 시대에 완고했던 사람들이 백성들에게 뭔가를 가리킬 것이 있다고 믿던 사두개인과 그런 유대인들이 그 앞에서 ‘어찌해야하오리까?’ 하고 물을 수 있는 완전히 처참한 상태가 된다는 것들이 하나님 말씀의 권능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그렇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 아닙니까? 항상 우리는 그것을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에스라’라고 그럴 때 느끼는 것이 어떤 느낌입니까? 그러면 집사님 ‘김경해’ 그러면 난 ‘우리교회 권찰’ 그렇게 생각하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으로서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에스라’ 그럴 때 그것은 하나의 연약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굶으면 배고프고, 추우면 따뜻하고 싶고, 그런 하나의 연약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풀잎과 같은 연약한 인간을 주님이 이 광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지금 우리가 에스라라는 말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계속 나옵니다. 에스라라는 말이 보여주는 의미는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에스라가 우연한 기회에 전혀 아무런 사전적인 준비도 없었는데 지금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울며 통곡하게 되었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사람을 사용하시고 소수를 사용하시는 것은 분명한데 주님이 이렇게 이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남들이 울지 않는 상황에서 울고 남들이 엎드리지 않을 상황에서 엎드리고 남들이 자백하지 않는 상황에서 남의 죄를 자기의 죄로 자복하고 민족의 모든 영적인 형편을 무거운 부담으로 걸머지고 성전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거기에 엎드려서 통곡하면서 주저앉을 수 있게 되기까지에는 그럴 수 있는 사람으로 주님께서 에스라를 빚으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선 어떻게 빚으셨습니까? 오늘 에스라만 하다가 끝나겠습니다. 어떻게 빚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7장 6절입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저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으므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더니’ 10절을 같이 읽읍시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거기에 보면 이 에스라는 이미 이런 일들을 우연적으로 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바 모세의 율법에 아주 익숙한 학사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사람이 이렇게 율법에 익숙하면서도 또 10절에 보니까 익숙한 학자이면서도 그 율법을 연구하고 준행하고 이스라엘에게 그런 율례와 규례들을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이전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말씀으로 이스라엘에 각성이 일어났을 때 백성들을 어거하고 이끌어 갈 수 있도록 그렇게 율법에 익숙한 학사로서 훈련받게 하시고 또 율례와 규례를 준행하는 삶을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해서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율법에 익숙한 그 자체가 지금 이 에스라를 이 엄청난 신앙부흥의 중심도구가 되게끔 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렇게 한 것만은 아니지만 그러나 문제는 뭐냐 하면 에스라가 단순히 한번 어떤 영적인 각성을 일으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뒤편에 보면 아주 조직적으로 그 율법을 따라서 뒤틀린 그 당시의 신앙을 바로잡아 놓고 사회질서를 다시 재정립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런 것들은 결국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준행하는데 훈련되지 않는 사람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에스라라는 적은 말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뭔가 하나가 가슴에 뜨끔해오면 그것 하나 가지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이 어리석은 광신주의자들에 가까운 신앙이 옳지 않음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설교자라는 것은 뭐와 같으냐하면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리포트를 쓰라니까 그렇게 써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설교라는 것입니다. 설교라는 것은 한번 피어난 것은 다 멋있고 이런 신앙부흥에 사용된 에스라와 같은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참 멋있게 쓰임을 받는 것 같지만 그러나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수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한번 광야에서 꽃을 피우기 위해서 32년 동안 빈들에서 고난을 받으며 하나님 앞에 깎여야했던 것을 생각해보셨습니까? 그러니까 결국은 무엇이냐 하면 신앙부흥만을 추구하면서 여기 이렇게 신앙부흥을 한참 이야기하다가 젊었을 때 딴짓거리 하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하라고 그랬는데 그게 또 어떤 사람은 걸림이 되어서 아니 왜 신앙부흥을 잘 나가다가 갑자기 공부하라고 그러느냐고 쪽지가 올라오고 난리가 났습니다. 왜 그렇게 이해를 못합니까? 뭐냐 하면 이 에스라라는 말이 에스라가 지금 여기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울고 매달리고 하면 된다. 그러면 하나님이 에스라를 각성시킨다. 맞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이 위대한 각성을 전개해나감에 있어서 이 에스라가 그 이전에 하나님으로부터 깊이 연단되고 준비되고 율법에 관한 지식들, 그 다음에 심지어는 재판에 관한 지식들 이런 모든 것들을 전부 다 활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두 가지가 충돌을 일으킨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늘 그것을 생각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것이 같이 훈련을 받으면서 자라가는 그런 관계에 있습니다. 아무튼 이 에스라라는 말이 보여주는 것이 참 많습니다.
우리들이 또 어떤 것들을 볼 수 있습니까? ‘에스라가’ 라는 말은 그렇게 연약한 한 인간인 것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누구였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였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지도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지도자의 깊은 변화, 깊은 회개 이것에 사실 교회의 운명이 걸려있다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도무지 움직이지 않고 각성되지 않은 요지부동의 지도자 밑에서 영광스럽고 위대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일인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어렵겠는가를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주님이 민주적인 방식, 아니면 민주적인 원리를 이상하게 이야기하는데 글쎄 초대교회에서 성령이 충만하고 사도들의 가르침이 있던 시대에 과연 제직회를 하기위해서 안건을 몇 십 페이지씩 써서 6시간씩 7시간씩 모여앉아서 차를 마시면서 회의를 했겠는가? 나는 그런 면에서 회의적입니다. 뭐냐 하면 그렇다고 해서 누가 어떤 사람의 독자적인 고난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뭐냐 하면 성령의 권능이 사라지고 주님의 직접적인 인도가 사라질 때에 사람들은 말이 많아지고 이견이 많아지고 규칙을 많이 세우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 것들을 우리들이 한번 생각해볼 수 있지 않겠는지 생각해봐야합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이 이야기가 나왔습니까? 그렇죠! 영적인 지도자 이야기를 하다가 나왔습니다. 그렇죠! 영적 지도자가 깊은 변화를 받지 못할 때에 그런 일들이 참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그리고 오늘날은 민주적인 방식 운운하는 이런 것들을 많이 이야기하는데 결국은 뭐냐 하면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지 못하고 결핍되어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것들을 좀 많이 생각을 해봐야할 것 같습니다. 사도시대에 과연 오늘날 우리들이 눈앞에 볼 수 있는 그런 식으로 회의가 이루어지고 그랬겠습니까? 성령께서 친히 명령하십니다. ‘누구를 선교사로 보내라.’ 성령께서 명하십니다. ‘너희는 금식을 행해야한다.’ 이렇게 성령께서 명하십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뭐냐 하면 그러면 지금은 성령께서 그렇게 간섭을 하시지 않느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도 간섭하십니다. 성령이 간섭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둔감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제한하고 둔감한 것입니다. 그것을 분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결국은 성령의 그런 민감하지 못하는 것들이 규칙이나 아니면 법칙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