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반항과 시험함
저희가 광야에서 그를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고 저희가 돌이켜 하나님을 재삼 시험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격동하였도다(시78:40-41)
녹취자: 김복녀
40-42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해석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에 성실하지 않고 돌이키는 것이 거짓되다는 평가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평가하신 것은 그들이 광야에서 행한 일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가 보여줍니다. “광야에서 그를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반항이라는 단어는 반역을 말합니다. 즉, 합법적인 통치자의 다스림에 항거하고 대항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합법적인 통치자에 대한 반항과 대항했다는 것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행한 불순종을 반항이라고 보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가지고 있는 문제는 하나님의 통치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 통치 속에는 왕국을 세운 경륜이 있고 이미 있는 왕국을 더 나은 왕국으로 완성해가고자 하는 왕의 의도가 있을 것이고 그 의도대로 현자의 나라에서 실행해 가는 것이 있습니다. 법을 재정해서 세금을 내고, 국방을 튼튼하기 위해 양민들을 군복무하게 하고, 나라의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물길을 내기 위해 부역을 시키는 등등 희생이 없다면 어떻게 나라가 유지되겠습니까? 그런 헌신이 가능한 이유는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계획에 찬동하고 복종할 때 가능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반역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로왕의 통치를 받으면서 비천하고 노예생활 하던 시절을 그리워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평가였습니다. 이 반항심은 모든 불순종의 원인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거룩함을 하나님의 성품과 뜻에 우리가 합치된 상태라고 말했습니다. 거룩함을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로 설명되겠지만, 우리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는 결과를 어떻게 나타내며 살아가느냐하는 각도에서 설명하면, 에드워즈의 설명은 적실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온 땅과 만물위에 탁월한 놀라운 분이시지만 그것만으로는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지 않으신 적이 있었습니까? 우리에게 그분의 거룩하심에 부합하는 삶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과 뜻이 하나님의 성품과 의지에 합치된 상태가 되어야합니다. 그런 합치와 일치는 사랑의 일치이고 사랑의 합치입니다.
한 신자가 주기도문을 마음 깊이 우러나오는 자기기도로 눈물로 기도할 수 있다면 지상에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나라가 임하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지게 해주시라는 기도가 절박하고 절실한 마음의 기도라면 그의 마음이 하나님께 합치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의 마음의 최고의 합치된 상태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갈망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입니다.
"사막에서 그를 슬프게 함이 몇 번인가?" 슬픔이란 감정이 어떻게 생깁니까? 슬픔이나 기쁨은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보면서 마음속에서 상정하는 틀에 온전히 합치되거나 현저히 어긋났을 때 기쁨이나 슬픔이 찾아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특정한 음식을 좋아하는데 배고플 때 그 음식이 있으면 기쁩니다. 그 음식이 공짜로 생겼다면 얼마나 기쁩니까? 풍경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 좋아하는 풍광이 있었을 때, 그 풍광을 만나면 기쁩니다. 반대로 슬픔은 내가 마음속에 바라는 것과 현저히 어긋날 때 슬픕니다. 어떤 한 사건에 한 사람에게는 기쁨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슬픔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날 때, 승리국은 기쁠 것이고 패전국은 슬플 것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바라보시면서 슬퍼하셨다.'고 하는데 어떤 것이 슬프셨다는 것입니까?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계획들이 궁극적으로 취소될 수는 없지만 일시적으로 성취가 장애를 만나는 것 같을 때 당신의 뜻이 이 세상에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에 대해 슬퍼하시고 근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광야에서 그들이 반항해도 하나님의 뜻은 결국 이루어집니다. 반항한 삶의 현재와 미래의 살이 너무 비참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바라보시면서 슬퍼하십니다. 하나님의 정말 간절히 원하시는 바는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면서 당신께 영광돌리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이 슬픕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수많은 감정으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은 느끼는 없이는 말씀을 이 세상에 주시지 않습니다. 표면에 나타난 하나님의 발화가 의미하는 것을 깨닫는 것 가지고는 그 의미를 제대로 알았다고 분명히 터득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발화로서 주신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기 전까지는 그 거룩한 뜻과 사랑을 알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반항하는 그들을 향하여 슬퍼하신 이유입니다. 사도 바울의 회심에 관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끊임없이 당신을 대적하고 교회를 핍박하는 사울을 보시면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는 것이나? 네가 나를 핍박하는 것이 가시 채를 뒷발질하는 것과 같다." 말 같은 짐승이 뒷발이 뭐가 걸리는 게 불편해서 찼는데 그것이 가시 채라서 뒤꿈치를 다쳐서 피가 낭자해집니다. 그것이 바로 불순종하고 반항하는 사람들의 모습니다. 그것과 같은 사람들을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슬퍼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돌이켜 하나님을 거듭거듭 시험하며 거룩하신 이를 노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돌이킨다는 말은 앞 구절에 나오는 "돌이켜서 하나님께 간구하며"라는 구절과 똑같습니다. 가던 길을 돌아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반항이 완벽한 반항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옛말에 오십 보 백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전쟁에서 군인의 의무는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적을 섬멸해야합니다. 그런데 돌이켜 도망을 갔다면, 전쟁에 패해 죄를 물을 때 오십 보를 도망갔거나 백 보를 도망갔거나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돌이켜 서지만 않았다면, 최소한 전쟁에서 도망치려는 마음이 없었다면, 달려가 싸운 사람, 천천히 간 사람, 너무 지쳐 잠시 주저앉은 사람에 차이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도망가지 않았으니까 반역은 아닙니다. 이들은 완벽하게 하나님께 반항해서 돌이켰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으로부터 돌이켜 어디로 가고자 했습니까? 그들은 아우성치며 "애굽의 날이 좋았다. 돌아가게 해달라."고 항의했습니다.
그러나 애굽에서 살던 그들이 어떻게 광야로 나왔습니까? 하나님이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셔서 친히 하감하사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보냈습니다. 여기에서 상반된 종교심리를 보게 됩니다. 옛날에 이 세상에서 주님께 구원을 간청하고 하나님께 나올 때는 이 세상의 생활에 대한 공평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즐거움도 주었지만 본질이 고통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공정하게 세상살이를 깨달았는데, 잠시 느끼는 즐거움이 있을지라도 마취주사와 진통제 같고 본질은 슬픔의 바다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이 비참한 처지에서 구원해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셨습니다. 구원의 길이 순종하고 은혜 받으며 걸어가면 걸어갈 만한 길입니다. 고통과 함께 은혜와, 권능과 영광을 주십니다. 다양하게 새 힘을 주십니다. 그런데 불신앙 때문에 이 모든 기쁨을 잊어버리고 나면, 믿음의 길에서 걸어가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다 잊고 고통만 떠오르고, 자기를 고통스럽게 하여 주님께로 도망쳤던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은 기억이 안나고 즐거움만 기억나기 때문에, 우리들이 세상 유혹을 받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그렇게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시험했다."고 했습니다. 시험한다는 뜻은 당연히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야하는데 하나님께 대한 신뢰 없음과 불신앙 때문에 모든 것이 과연 그러한지를 입증하고자 의심하면서 어떤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신뢰할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들이 누군가 너무 불쌍해서 도와주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 "뭐가 그렇게 어려우냐? 내일 돈을 줄 테니 쌀도 사고 먹을 것도 사서 가난을 면해 보거라."라고 말했다면, 상태편이 "고맙습니다."하며 깊이 감사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만일 "내가 아줌마 말을 어떻게 믿어요?"라고 한다면 돕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시험은 신앙이 충만한 상태에서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 시험은 하나님을 얕잡아보는 행동입니다. 경외의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시험이 가능합니다. 단순히 어떤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충분히 얕잡아보는 경외심 없음의 표현이기 때문에 시험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더욱이 그것이 행동으로 표출된다면 하나님은 더욱 노하십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노엽게 하였더라" 여기서 이스라엘이라는 말을 덧붙인 이유는 이스라엘이 언약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야곱과 맺은 언약에서 생겨나 이스라엘이란 뜻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었다"라는 뜻입니다. 야곱이 하나님보다 힘이 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야곱이 씨름에서 환도 뼈가 상하며 주저앉아 슬피 울며 통곡하는 모습이 하나님의 자비심을 자극해서 하나님을 이겼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자비심이 이스라엘의 반역과 모든 불신앙을 이겼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을 영원토록 이겼다는 것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와 긍휼과 사랑과 끊을 수 없는 언약 관계를 내포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한 언약의 하나님을 그들이 분노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요, 불순종이었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떤지 생각해봅시다. 오늘 우리의 날들이 광야와 같은 우리 인생에 대해 원망으로 가득 차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정말 주님을 슬프게 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을 얕잡아보는 태도로 우리의 일보다 하나님의 능력이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분을 경멸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보면서 노여워하지 않는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자신감과 용기가 하나님과의 평화 그분을 향한 어린아이 같은 의존의 마음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명심해야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반항의 씨앗, 슬픔의 씨앗들을 우리 마음속에서 제거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