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에스라강해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에스라 10:1)
녹취자 : 허 혜숙
10장이 9장과 이어지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에스라가 하나님 전 앞에 울며 기도하며’ 하다가 말았습니다. 에스라가 지금 민족적으로 확산되는 신앙부흥의 포커스라고 할까 그것이 9장부터 계속 되지만 10장 1절부터 본격적으로 연극으로 말하자면 막이 바뀐다고 할까 그 앞에 보면 어디서 그가 그렇게 기도를 하고 있었는지 그것은 자세히 나오지 않습니다. 하여튼 저녁 제사드릴 때까지 근신 중에 일어나서 기가 막혀 앉아서 기도하고 있는 것, 그 장면이 죽 나오고 10장 1절에서는 갑자기 하나님의 전 앞에 새롭게 엎드린 장면이 나옵니다. 그 사이에 날짜가 얼마나 흘렀는지 그것은 우리가 속단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 날 계속 되었을 수도 있고 하여튼 영화로 말하자면 화면으로 말하자면 죽 비춰 주다가 장면이 확 바뀌는데 그 장면에서는 에스라가 하나님 전 앞에 엎드려서 울고 있는 그 장면입니다. 어쨌든 얼마나 계속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추측할 수 있는 사실 하나는 굉장히 비통한 마음으로 상당 시간 동안 그는 아마 울었을 것이다 그런 것을 우리들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앞에 9장 1절에 보면 ‘이 일 후에’ 그렇게 나온 다음에 3절부터 본격적으로 반응이 나오는데 ‘내가 이 일을 듣고 기가 막혀 앉으니’ 했습니다. 4절에서 ‘이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가 사로잡혔던 이 사람들의 죄 때문에 다 내게로 모여오더라...’ 상당한 시간이 흘렀을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우선 에스라가 우리가 그렇게 이야기 하니까 통곡한다고 그러더라, 운다고 그러더라, 왜냐하면 에스라가 무엇을 선포하는 장면이 아니니까 그런 소문이 나고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가슴에 찔림을 받고 그래서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하는 시간이니까 상당한 시간이 흘렀을 것입니다. 장소가 어딘지는 알 수가 없지만 혹시 성전이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전에서 직무를 행하는 시간이었을 수도 있고, 거기가 아니었을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저녁 제사 드릴 때까지 기가 막혀 앉았더니’ 이것을 보면 확실히 동일한 날 일어난 일인 것 같습니다. ‘저녁 제사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채 무릎을 꿇고 나의...’ 하고 죽 나옵니다. 9장까지는 같은 이야기가 나오고 10장부터는 무대가 바뀌는 것입니다.
화채가 틀립니다. 9장에서는 내가, 내가 하고 나옵니다. 9장과 10장이 관점이 1인칭관점에서 3인칭 관점으로 바뀝니다. 3인칭 관점에서 보니까 9장의 무대가 어딘지 모르지만 10장에서 관점이 바뀐 것에서 보니까 어쨌든 에스라는 하나님의 전 앞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거기에 보면 에스라가 앞에서도 울면서 계속 기도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10장에서 3인칭 관점에서 성경을 읽다보면 3인칭 관점에서 1인칭으로 툭툭 뛰어넘는 것이 모세 오경에서 많이 나옵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비평주의에서는 저자가 틀리다고들 많이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꼭 그렇게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보면 계시록도 3인칭 관점으로 나가다가 1인칭 관점으로 나가기도 하고 하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서술해 나가다가 어떤 사건의 깊이를 더해나가기에는 1인칭 관점으로 사용하는 것이 훨씬 더 좋고 객관적인 것들을 보여주기에는 3인칭 관점이 좋으니까 성경을 읽는 사람들, 계시를 받게 될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서 1인칭 관점과 3인칭 관점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또 그 이후에도 성경의 전승기가 내려오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거기에다 1인칭 관점에서 3인칭 관점으로 관점을 바꾸어 쓸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무오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간에 10장에서는 관점이 확 바뀝니다. 에스라 한 사람이 신앙부흥의 관점에 민족사적인 장엄한 부흥 사건에 중요한 자리에 서 있는 것이 보입니다. focus가 거기에 맞춰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우리가 그 부분을 묵상을 했습니다. 10장에서 민족적인 신앙의 부흥을 이야기하는데 화면에 좍 비추는 것이 뭐냐 하면 성전 문 앞에 엎드려 있는 한 사람을 비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화를 잘 생각해 보십시오. 영화의 장면이 나오는데 아무 이야기도 안 나오는데 다음에 어마어마한 전쟁이 일어 날텐데 한 사람이 골똘하게 책상 앞에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과 전쟁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에스라 한 사람을 비춰주면서 결국은 10장에서 보여주는 것은 광대한 민족적인 영적인 부흥 그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이 일어날 때 주님은 그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것들을 보여줍니다. 비슷한 예로 요단강변에서 일어났던 세례요한의 위대한 각성, 거기도 맨 처음에 ‘요한이 외쳐 가로되’ 하면서 ‘빈들에서.. 말씀이 임하니라’ 그러면서 그 사마리아 빈들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있는 그 한 사람에게 focus가 맞춰지면서 그것을 태동으로 하면서 하나님께서 위대한 장면들을 이루시는 것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각성과 부흥을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원리입니다. 다수가 아니라 소수, 그리고 그것은 항상 ‘나’ 일수도 있다는 것을 여기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리어 울며 기도하며’ 하면서 에스라가 어떻게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굉장히 긴 설명을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렸고, 울었고, 기도했고, 하면서 긴 설명들이 나오는데 저는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그 긴 설명들이 에스라 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런 부흥을 이루시는데 그것이 무엇을 보여 주냐면 영적인 각성과 부흥을 위해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의 조건을 다 보여준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핵심적인 요소가 다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연약한 한 사람,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린 것, 그 다음에 우는 것, 그 다음에 기도하는 것, 그 다음에 다른 사람의 죄를 자기의 죄처럼 자복하는 것, 모든 것을 다 보여 준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에 보면 ‘기도하며’ 했는데 영적인 부흥과 각성에 대한 강의를 듣거나 설명을 들으면서 느끼는 것은 기독교 숙명론인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절망을 느껴야 한다, 그것도 하나님이 그렇게 느끼게 해 주시는 것이다, 그 다음에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고 정말 가난한 심령이 되어서 하나님을 소망해야 된다. 그것도 사실은 하나님을 소망 할 수밖에 없게 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여러 가지 생각을 모두 이야기 하다가 결국은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하나님이 일하시고, 결국은 신앙적인 숙명론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디에서 이런 강의를 했더니 별명이 몇 가지 붙었는데 그 하나는 ‘관념론 자’그러니까 자기네 말로 입증되지도 않는 가설을 무책임하게 퍼트리고 다니는 자, 두 번째는 ‘현실 도피’ 다. 그리고 세 번째는 현실적인 책임 회피다, 그런데 결국은 부흥이 안 일어나서 우리는 못 한다 이렇게 되니까 현실 도피다 라고 합니다. 사실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로이드 존스가 이야기 했던 같이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아는가? 우리는 기도를 거의 모른다 그렇게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 번 하나님을 깊이 체험했던 자매가 제가 내수동 교회에 가기 1년 전에 대학부에 그런 좋은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전도사한테 시집을 가서 사는데 자매가 한 번 이야기를 하는데 ‘내 안에 나 말고 다른 내가 있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 같다, 기도를 하고 나오면 완전히 탈진 되는 것, 주께서 기도를 시키시는 것 같다’ 그런 것들이 깊은 기도의 진수입니다. 오늘날은 기도도 막 짜내는 것 같은 그런 기도, 그런 기도는 사실 참다운 기도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기도는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기도의 세계에서도 항상 높은 것들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스라의 기도는 보통 기도가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내가 민족을 위해서 금식을 해야 되겠다 그런 것을 결심할 여지도 여유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데 그것이 얼마나 절박했느냐 하면 모든 것들을 다 잃어버리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아도 좋을 정도로 그럴 정도로 기도에 전념했으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신앙부흥과 영적인 각성에 대해서 나는 깊은 도전을 받고 소망이 있습니다. 기도 안 하는 것 그것은 믿을 수 없습니다. 참다운 각성일 수가 없습니다. 자기는 각성됐다고 하면서 기도하지 않는 것 그것은 믿을 수 없습니다. 여러 가지 견해들 가운데 신앙부흥에 대한 견해들이 신선하게 가슴에 다가올 수는 있지만 그러나 반드시 기도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목회와 신학의 18세기 영적부흥의 서평이 나왔다고 합니다. 제가 아직 읽어보지 못했지만 심심찮게 시비 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어제 수원에 강문진 강도사가 우리교회에 특강을 하러 왔습니다. 강문진 강도사 이야기가 늘 영적으로 곤고해 가지고 헤매던 서울대생이 하나 있었는데 서점에 갔는데 18세기 영적 부흥을 우연히 봤답니다. 그 앞에 서문을 읽다가 도저히 서문을 끝까지 못 읽고 그 책을 사가지고 와서 교회로 갔는데 하나님께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속에서 다른 내가 있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 앞에 자신을 다 쏟아 부으면서 애통하게 하셨답니다. 그것이 사실은 자신만을 위한 애통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그런 것입니다. 진실로 신앙부흥의 세계에 눈 뜨게 될 때 변하는 첫 번째 세계는 기도의 세계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앙부흥에 대한 생각은 진정 한가 진정하지 않은가 하는 것들은 기도의 세계를 통해서 입증될 수 있습니다. 저는 주위에서 많이 봤습니다. 그런 시각들을 상당히 신선하게 느끼고 받아들이는데 그것을 다 믿으면 안 됩니다. 반짝이는 모든 것들이 금이 아닙니다. 물론 살다가 보면 기도가 약해 질 때도 있고 성령이 더 충만할 때도 있고 사람들이 늘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근본적인 방향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깊이 애통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기도에 대한 출발이 부흥을 구하는 출발, 그리고 영적 각성에 대한 목마름으로 각성으로 시작된 기도가 아니면 그것이 정말 참다운 하나님에 대한 기도겠는가? 저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오늘 날 기도 많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각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그렇게라도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의 존재 자체가 바뀌지 않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모든 기도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몸부림으로 일관 된 기도가 될 수 있겠느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위대한 선조들이 부흥을 경험하면서 갖게 되었던 그 기도의 세계와 우리들의 기도의 세계와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영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이야기를 한다면 저는 상당히 많은 기도원에서 일어나는 귀신측출의 사건이라든지 영적인 역사라든지 저는 그것을 discount 하지 않습니다.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인정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모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두가 아니지만 저는 솔직한 심정으로 그것들을 부러워합니다. 그것이 만약에 전수를 받아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저는 전수 받겠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넘치는 것들을 가지고 추구하고 기도하는 분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 에스라가 성전에 엎드려서 기도하는 것과 같은, 어떻게 성전이 무너지는 것처럼 자신을 내동댕이치고 엎드려서 통곡하며 기도하는 에스라의 기도 속에서 세속적이고 자기를 위하는 기도가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우리들이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신앙부흥을 향해서 영적인 각성을 향해서 하나님이 각성시킨 사람들, 그 사람들의 특징은 기도의 세계가 정말 순수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하는 이런 것들로 되어져야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에스라가 마지막에 ‘기도 했다’라고 하는 이야기는 대단한 것입니다. 기도했다라고 하는 것은 100% 중보기도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 보면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이사야서 56장 7절에 나오는 ‘나의 집은 그 모든 백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워 질 것이다’ 그 때에 그 기도의 집이라고 하는 그것이 단순히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를 많이 하는 그런 집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백성들을 위한 모든 구원받을 백성들을 위해서 애통하며 기도하는 그런 집, 신앙부흥이 일어났을 때 교회 속에는 두 가지가 한꺼번에 찾아들었습니다. 큰 기쁨과 엄청난 슬픔이 동시에 찾아들었습니다. 세속적으로는 기쁨과 슬픔이 공존할 수 없습니다. 기쁨이 사라진 자리에 슬픔이 오고 슬픔이 사라진 자리에 기쁨이 오는데 이 신앙부흥의 시대에는 기쁨과 슬픔이 공존했습니다. 깊이 공존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고 세상을 바라볼 때에는 그 여호와를 기업으로 받지 못하는 세상의 백성들을 향하여 애통하는 그런 것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늘 드리는 말씀이 결코 아무리 훌륭하게 교회를 지원 받고 몇 십 억짜리 전자 오르간이 들어와도 해가 지면 미제 열쇠로 굳게 잠궈져 있고 경비병들의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는 교회는 주님이 세우시려고 했던 교회가 아닌 것만은 확실합니다.
교회 속에서 들려나오는 기도의 내용과 질을 보면 그 교회의 영성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 들려오는 내용과 질이 시종일관 새벽기도 나와서 기도하는 것들이 전부 다 자식들의 취업과 직장, 진학의 문제나 가지고 또 그런 것들을 가지고 진학 특별 기도회 그런 것 왜 합니까? 집에서 하면 되지?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에스라와 같이 순수하게 땅에 떨어지는 하나님의 백성의 명예, 그 분의 거룩한 이름, 그 하나님이 베푸신 무한한 은총에 답하지 못하는 그 현실 이런 것들을 위해서 애통하는 일들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통치가 그런 모순과 극단적인 하나님에 대한 반역 사이에 있는 그 백성들에게서 어떻게 하면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질 수 있겠는가 그 기도가 결국은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다스림과 통치를 구하는 기도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가장 확실하게 말해주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하지 않는 백성들을 향한 깊은 애통함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교회와 그리고 성도들의 기도소리가 그 도성에 관영한 죄악들, 그 속에서 환락하는 소리들, 그것을 능가하지 않으면 정말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는 그런 영적인 변화와 부흥 없이는 정말 그렇게 포효 하게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기도 한다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데이비드 브래드너드 같은 사람들이 계속 선교하면서 괴로워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는 선교사역을 그만 두고 싶다, 왜? 성도들의 선교 비를 낭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선교사들이 얼마나 그런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일에 진척이 없다라고 하는 사실에 너무너무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기도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날 소위 이야기하는 이분법적 기도가 따로 있고 행하는 것이 따로 있다라고 하는 것이 에스라 같은 상황에서는 하나로 통합이 되는 것입니다. 균형을 이루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윤리에 있어서도 평상시에 통할 수 있는 윤리가 따로 있고 종말에 통할 수 있는 윤리가 따로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평상시적인 윤리라면 식사하시는 예수그리스도 앞에 1200만 원짜리 향유를 부어버린 것은 윤리적으로 옳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뭐라고 합니까? ‘내게 잘 하였도다, 나의 장사를 예비하노라’ 이것은 평상시적인 시간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상황 속에서 종말적으로 통하는 그 윤리니까 주님이 그것을 부어버리는 것을 전혀 아깝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그리고 가난한 자를 위하여 얘기하니까 오히려 반대로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이 여자는 나의 장례를 예비 하였도다 하신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자기가 영적인 깊은 각성 속에서 하나님 앞에 서서 이 상황이 정말 위기이고 이런 상황에 도달하게 되었다라고 할 때 오해하지 마십시오, 어떤 의미에서 그는 균형 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치우쳤다’ 하는데 그래 나는 치우쳤다, 치우치기로 결심했다, 영원히 치우치고야 말리라, 어디에? 중심에. 그러니까 하나님의 시각으로 그런 앞에 서서 깊은 절망을 느끼게 될 때에 그 때에 에스라가 지금 이러고 있으면 안 되잖아요?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모든 권세를 부여받았기 때문에 가산을 몰수도 할 수도 있고 사람을 재판할 수도 있는 사법권을 가진 사람인데 ‘기도만’ 하고 있어서 되는 것입니까? 그런데 그런 모든 것들이 통합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왜 에스라가 이렇게 기도 할 수밖에 없느냐고 하는데 그 모든 문제들에 대한 해결의 근원이 결국은 인간의 소유욕에는 reformation의 구도를 짜고 planning을 하는 그것에 달려있는 것으로 보지 않은 것입니다.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까? 그것은 죄에 대한 문제와 관점이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완전히 틀린 것입니다. 왜 그러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느냐? 에스라가 하나님을 깊이 경험한 사람으로서 그 백성들의 죄가 관영할 때에 사람들 속에 깨어져버린 무질서와 부서져버린 법질서를 본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지 못하고 그 거룩함을 훼손하고 있는 인간들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법질서가 깨어진 것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이 깨어진 것이 먼저 인 것으로 이 사람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그 언약이 뭡니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그것이 주님의 거룩하심은 그대로 있는데 그 거룩함을 따라서 살아야 될 그 백성들 속에 그 거룩함이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이 에스라 앞에서는 죄 라고 하는 것이 사회의 무질서와 부패와 파괴를 가져오는 그런 주범 정도가 아니라 에스라의 눈앞에 이 죄는 주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집단적인 반항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우리 가운데 죄를 이렇게 보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에 대해서 회개하라고 할 때 사람들 머릿속에 굴리고 생각되는 것은 돈 떼어먹고 윤리적인 죄를 짓는 이런 것들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발견하지 못할 정도로 무딘 마음이 되었을 때 자신은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을 위로하는 그런 어리석은 것들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에 대한 그 견해 자체가 엄청나게 틀린 것입니다. 그래서 죠셉 어라이라든지 라이라든지 그 앞 시대를 살았던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이 회심에 대해서 너무 레벨을 높게 잡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야기를 합니다. 오늘날 그 레벨을 놓고 볼 때에는 구원 받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모순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 그 잣대를 갖다 대면서 ‘너희는 이 레벨에 미달됐으니까 구원을 못 받았다’ 이렇게 말을 해 가지고 불안하게 만들어야 되겠습니까? 아니면 이것은 그 때이고 이 사람은 좀 치우쳤다고 이야기를 해야 됩니까? 거기에 대한 답은 없습니다. 하늘나라에 가서 알 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구원에 대해서 그것을 제시하고 그렇게 이야기 하느냐 하면 그가 그 하나님의 영광 거기에 대해서 깊이 사로잡혔고 그 거룩함에 대해서 깊이 목말라 했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회심을 하고 났을 때 그의 거룩하심을 따라서 자기도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는 것은 자연스런 갈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들을 어떤 점에서 하나를 생각하느냐 하면 복음이 순수하지 못하니까 거기에 대한 반응도 불확실한 것입니다. 마치 기도가 모호하면 응답도 애매하듯이 복음이 뒤틀린 복음으로서 순수하게 정면으로 제시가 안 되니까 거기에 대한 response도 정확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복음을 전하면서 어떤 생각을 가지냐 하면 한 번에 순전한 복음이 능력 있게 전해지려면 단숨에 이 비참한 죄인이 주의 거룩하심을 보고 자기도 그렇게 거룩하지 못하다라고 하는 것을 인하여 고통 하는 그런 영혼이 될 것이다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패배주의 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영혼이 실족하면 어쩌나 하는 이런 뒤틀린 복음과 뒤틀린 사랑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런 기도가 안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영적인 각성과 부흥을 일으키심에 있어서도 사람들을 극도로 변화시키시는 것은 결국은 기도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기 위한 것이 목적은 아니지만 참으로 신앙부흥을 경험했고, 경험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각성했고, 그것을 추구하고 있는 사람의 기도는 틀릴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럽니까? 관점과 추구하고자 하는 내용이 다르니까 그 기도도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누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느 교회에 가서 몇몇 교인들이 기도하는 것을 들으면서 말씀이 아니라 기도에 너무 충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근본적으로 그 기도소리를 들으면서 내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인가 다시 검토해 보았다고 합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에스라가 지금 엎드려서 기도하고 있는 이 장면은 솔직하게 이야기 한다고 하면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그런 생각은 2차적인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그에게 이른 각성이 참된 것일 때에는 그는 기도의 영에 사로잡혀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된다가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를 사로잡아 주시도록 오히려 기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스펄전이 이야기 했던 것처럼 기도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 기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바로 신앙부흥을 일으키는 조건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위대한 신앙 부흥이 일어날 때에 하나님은 반드시 누구를 통해서든지 고난의 기도의 잔을 다 채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금산 목사님이 그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워치만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기도는 무엇이냐? 마치 레일과 같다’ 하나님은 어디든지 가실 수 있는 것처럼 기차도 어디든지 달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다위도 달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레일만 깔리면, 공중에도 레일만 깔리면 달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지만 주님은 그렇게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기도에 레일이 깔려진 그 위로 역사의 열차를 보내시기로. 우리가 신앙부흥의 조건이 아니라 그런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부흥이 가까웠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부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묘책은 엄청난 기도가 말하자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책을 읽든지, 강의를 듣든지, 아니면 설교를 듣든지 하다가 ‘아, 이것이다. 이것밖에는 소망이 없다’ 라고 느낄 때 터져 나오는 것이 무엇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사고의 전환? 그것과 함께 마지막으로 터져 나오는 것은 결국은 비통한 기도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서 있는 이 자리가 창34장이며 그리고 탕자의 돼지 우리간이라고 하는 그 깊은 한계를 고백을 하면서 아버지께로 가기를 원하는 뜨거운 그 열망이 기도로 이어진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위대한 신앙의 부흥을 보내시는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기도를 사양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해야지만 하나님의 주권이 가장 강력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심포지움을 해서 결론을 내려가지고 그대로 시행에 옮겼더니 부흥이 왔다라고 생각을 해 봅시다. 이 패역한 인간들이 생각하기에 우리의 방법이 그 신앙부흥을 불러왔다라고 생각할 것이란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오히려 기도 할 때에 에스라가 지금 이 성전 문 앞에 엎드려서 기도할 때에 그 느낌이 어떤 느낌이었습니까?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그 모든 은혜를 무효로 만들어 버릴 것 같은 엄청난 죄악, 그리고 진노하시는 하나님과 임박한 주님의 심판, 그리고 깨닫지 못하는 백성, 그사이에서 하나님과 백성을 사랑하고 주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한 사람, 그 사이에서 느끼는 그것이 어떠했겠는가를 한 번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런 속에서 에스라가 자기가 이렇게 기도를 하면 주님이 응답을 하시고 구하는 자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 주님이 응답해 주실 것이다 오히려 참된 믿음이라면 더 깊은 차원에서 그런 소망조차도 못 가질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에스라는 기도를 하면 주님이 내 기도를 들으셔서 응답하실 것이다 라는 믿음을 가졌다라기 보다도 말하자면 에스라가 최후에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는 없기 때문에 압도당하는 그 슬픔과 압도당하는 그 파톳으로 주 앞에 엎드려서 왜? 사태가 제가 가끔 쓰는 표현이지만 원수가 각개 전투로 올 때에는 대응할 수 있지만 노도와 같이 밀려드는 전환에서는 깃발을 세워 줄 수 있는 것은 여호와 한 분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스라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기도하는 장면 속에서 느끼는 것은 다른 모든 것들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에스라가 세속적인 사람이었다면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나에게는 아닥사스다 왕이 준 권세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의 재산을 전몰하고 사람들을 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있으므로 색출해 내서 그것들을 고치겠다라는 생각을 했더라면 결국은 대역이 태동 되다가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죄의 문제를 단순히 재판이나 사법권은 통해서 치유 될 수 있는 것으로 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죄에 대한 세속적인 견해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져야 할 엄청난 질적인 차이다 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엎드려서 기도할 때 결국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기도하는 이 에스라의 기도와 간구는 그 자신이 결코 우연히 그렇게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주님이 마지막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기도로 자기의 생을 마치시는데 그 장면을 읽으면서 큰 도전을 받았던 것은 아무나 그렇게 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분이 어떻게 기도로 살아오셨는지 더듬어 가지 않는 한 그 분이 그렇게 기도로 자신의 생을 마치셨던 그런 것들을 우리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자세한 이야기는 안 나오지만 에스라는 분명한 것 하나는 하나님의 율법에 아주 정통하고 있는 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이 사람은 9장에서 죄악에 대해 반응하는 mentality를 볼 때에 제사를 지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 시대에 있었던 제사장이나 또 율법에 대해서 정통했다고 하더라도 그 당시에 율법사들하고는 근본적으로 영성이 틀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제가 말씀드린 것이 참된 제사장과 참된 선지자는 충돌하지 않는 것입니다. 충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의 세계를 보면 더 할 이야기가 많지만 좀 더 진전을 합니다. ‘죄를 자복할 때에’ 그랬는데 결국은 이 땅을 고쳐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불러 내리기 전에 결국은 신앙부흥을 갈망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일은 죄에 대한 자복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여기에서 이상한 생각을 하나 하게 됩니다. 의문을 갖게 됩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다른 사람의 죄가 나의 자복을 통해서 용서 받는다’, 신학적으로 어떻게 생각 합니까? 이야기를 좀 해 봅시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죄를 자복할 때에’ 그러는데 이것을 두 가지로 봐야 됩니다. 어떻게 두 가지로 봐야 되느냐 하면 주님이 우리를 보실 때 어떻게 보시는가? 거기에 대해서 한 번 생각을 해 봅시다. 그것은 여러분, 두 가지를 잘 생각 하셔야 됩니다. 그러면 그 두 가지가 무엇입니까?
오늘날 우리는 각자가 우리 구주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을 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들어올 때 모두 그 문을 개인적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결코 합동으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단체적으로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 같아도 모두 개인이 아니면 결코 부르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큰 오해 가운데 하나는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았다라고 하는 그 사상이 너무나 강한 나머지 들어와서 ‘하나다’ 라는 생각을 못 갖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라고 할 때 그 ‘몸’은 단수입니다. 더 폭 넓게 말하면 이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심지어 하늘에 있는 교회까지 하나의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그리스도가 누구입니까? 머리시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 분이 지금도 보좌 우편에서 간구하시는 이유 중의 한 가지라는 말입니다. 그런 생각은 안 해보셨을 것입니다. 물론 사죄도 모든 것들도 개인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개인적으로 고백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을 생각해야 하느냐 하면 ‘내가 땅을 고칠 지라’ 심지어는 하나님을 믿는 백성과 그 분을 믿지 않는 그 땅, 피조세계까지 함께 연관이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타락을 하면 피조세계인 땅도 신음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사건이 일어날 때에 그 모든 우주적인 관까지 십자가에 도입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인간과 하나님사이에 맺힌 것들이 풀리면서 그것들도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냐 하면 주님이 백성들을 다루시는 원리는 두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는 개인을 보시기도 하고 전체를 보시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항상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것들을 잘 보여주고 있는 구약의 원리가 몇 군데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땅에 아직은 그 죄악이 관영하지 아니하므로 주께서 심판 할 때가 되지 않았다’ 라고 한 것이라든지 또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실 때에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망하게 되는 사건, 사실 의인이 누구인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공동체에 의인이 없다라고 하는 것, 그것을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판단은 더 큰 것입니다. 예를 들면 복음의 역사가 사도행전 2장에서 힘차게 시작되다가 5장에 와서 멈추게 됩니다. 그 복음의 능력이 딱 그칩니다. 무슨 사건입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 그 두 사람 사건입니다. 교회가 능력으로 충만하고 순수한 시대일수록 그런 교회를 전체적으로 다루시는 하나님의 그 면들은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뜨겁게 역사하시고 확연한 임재가 드러나실 때는 공통적으로 심판도 그렇게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1890년대 쯤 일이었습니다. 케나다 토론토에서 집회를 하는데 사람들이 회심을 해가지고 이 집회 때문에 우리가 술을 못 판다고 술집들이 연합한 것입니다. 거기 연합회 회장이 설교가 중간까지 왔는데 대드는 것입니다. 아주 건강하고 건장한 사람이었는데 대들었습니다.
하루아침에 변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서 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루아침에도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목사님이 받아서 그런데 요즘은 하나님이 그렇게 안 하시더라고,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요즘도 가끔 하십니다. 그랬는데 결국은 그렇게 뚜렷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죄에 대해서 그렇게 담대해 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죄에 대한 자복이라는 것은 결국은 첫 시간에도 이야기했듯이 에스라가 그런 하나의 커다란 유동체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하나의 백성이라고 하는 그 몸속으로 들어 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속에서 중보기도의 영이 그를 움직이니까 자신의 죄와 백성의 죄 그것이 구분이 안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히브리서 5장 17절에서 주님이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신 것, 어떤 사람들은 그 부분을 해석하면서 주님이 잔을 마시지 않게 해 달라고 통곡과 눈물로 기도했다고 해석하는데 예수님을 모욕하는 해석입니다. 주님이 뭐 할 일이 없어서 잔을 옮기게 해 달라고 세 번이나 통곡과 눈물로 기도 하셨겠습니까?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떨어진지라’ 그것도 잔을 옮겨달라고 기도한 것이라고 저는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1분도 안 되어서 끝난 기도입니다. 그리고 진짜 피가 땅에 떨어지도록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게 만들었던 기도는 요한복음 17장에 그 대제사장의 기도입니다. 이 땅에 남아있는 백성들을,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그런 기도였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시는데 마치 죄인 인 것처럼 그 죄인들 속에 들어와 있는 모습으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어떤 신앙부흥 이런 것들을 가지면서 참다운 기도의 영을 소유하고 있다 그런 것들 때문에 어떤 우월의식을 느낀다든지 그런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 그러지 말아야 됩니다.
16장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야(시몬아), 이것을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시니라’ 하나님을 아는 그런 지식들이 은혜로 주어졌다는 생각을 하면 늘 하나님 앞에 겸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떤 특권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늘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어쨌든 이 ‘죄를 자복 한다’라는 이 말의 단어는 지금 우리들의 신앙의 현실 속에서는 잊혀 진 그런 단어입니다. 지금 이것이 에스라가 자기의 죄를 자복하는 그것이 아니라 물론 자기의 죄도 있겠지만 백성의 모든 죄를 들고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처럼 느끼면서 애통하는 그런 것인데 그런 것이 사실 중보기도의 출발에 불과합니다. 중보기도의 출발에 불과하니까 어떤 의미에서 우리들은 거의 중보기도를 하지 않는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쓸어안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의 삶을 읽어보면 그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엄청난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기도가 대부분의 시간들이 우리들이 감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강도를 가지고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중보 하는 그런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이 교회에서도 지난번에 느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뭐냐 하면 하나님이 여기에 성령을 부어주시니까 귀신들린 자매를 보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어떤 귀신에 대한 깊은 증오심이 아니라 그 영혼에 대한 깊은 슬픔, 얘기를 하면서도 하염없이 불쌍하다고 우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결국은 주님이 주신 마음이고 그것이 바로 진정한 중보기도의 출발입니다. 그것은 바로 뭘 보여 주냐 하면 주님이 그 자매를 바라보는 그런 마음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결코 예외적인 것들이 아니라 그런 것들이 사실은 기본이고 지금 이 에스라가 죄를 자복할 때에 하는 그 문제가 결국은 하나님 앞에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를 자복할 때’의 두 번째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신앙부흥이 일어나는 데 있어서 제일 먼저 뚜렷하게 떠오르는 문제는 결국은 죄의 문제입니다. 신앙부흥을 하는 사람들을 절망하게 만드는 문제는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죄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도 하늘의 신령한 복을 부어주시는 그 필라델피아의 그 교회처럼 그 문만 열려있다면 사실은 두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상황도 절망적이고 하늘을 향한 그 문도 닫혀있고 그 속에서 죄를 자복하지 않을 수 없는 그것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깊은 비탄함 속에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죄를 자복 한다’ 라고 하는 말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결국은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이 그 땅을 고치심에 있어서 결국은 죄에 대한 자복함 이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고치신다는 것입니다. 역대하 18장 14절에 나옵니다. ‘겸비하여지고 나에게 고하면 내가 땅을 고칠지라’
그런데 그 다음에 보니까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매’ 그랬습니다. ‘이스라엘 중에 백성의 남녀와 어린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여기에서 적어도 세 단계가 나옵니다. 하나는 ‘죄를 자복할 때에’두 번째는 ‘많은 백성이 통곡하매’ 그 다음에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아이의 큰 무리가 모인지라’ 이렇게 나옵니다. 첫째 이야기는 1절 하반부에 나오는 이 사건이 신앙부흥을 가져오는 하나의 첫 번째 확산의 단계가 됩니다. 그런데 에스라 한 사람으로 시작되었던 것이 많은 백성들이 심히 통곡한지라 이렇게 확산하게 되는데 이런 확산들이 이루어질 때에 그때가 언제였었느냐 하면 에스라가 성전 문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며 죄를 자복할 때에 였더라고 하는 것들을 유의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주님은 회개한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서 누구를 기다린 것입니까? 누군가가 나와서 하나님의 전에 엎드리며 울며 기도하며 죄를 자복할 때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 때를 기다린 것입니다. 얼마나 가슴 떨리는 이야기입니까? ‘그 때에 나아온지라’ 주님은 훨씬 그 전에 백성들이 회개하러 나오기 전에 백성들이 돌이키고 그 땅을 고치시기를 원했는데 결국은 그 때를 주님이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부흥은 인간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인간들 속의 때를 기다리시는 그런 면도 있는 것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에 많은 백성들이 심히 통곡했다’ 이 통곡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확실한 각성으로 말미암는 통곡이었습니다. 의심할 여지가 없이 각성으로 말미암는 깊은 통곡이었다는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한 사람의 깊은 회개, 심지어는 재미있는 것은 회개가 확산됨에 있어서 어떤 설교도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외부적인 동작이 취해지지도 않았는데 진실한 에스라의 깊은 기도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불러 일으켰던 것입니다. 그와 비슷한 것이 누가복음 11장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기를 마치시매 제자들이 나아와 여쭈어 가로되 요한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 것 같이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주님이 한 곳에서 기도하시는 그 장면이 제자들에게 얼마나 깊은 감화가 되었으면 그 분께로부터 기도를 배워야 되겠다라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동일합니다. 여기에서 에스라의 깊은 기도를 보면서 사람들은 그것이 늘 제사장이 하는 그런 유의 기도가 아니라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그 기도하는 모습을 사용하셔서 사람들의 마음을 각성시키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의 죄악 됨과 더러움들을 깊이 회개하게 만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때에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였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두 개가 나옵니다. ‘많은 백성’과 ‘심히 통곡 하였다’ 라는 두 개의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백성을 우리들이 누구라고 봐야 되겠는가? 저는 아무래도 이 백성들 속에 제사장과, 방백들과 두목들이 빠져있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9장 1절에 보니까 단어를 다르게 쓰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이 일 후에 방백들이 내게 나아와 가로되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과 레위 사람과’ 그 다음에 2장 하반 절에 내려가서 ‘방백과, 두목과’ 이렇게 나옵니다. 그것을 볼 때 한 문장의 흐름 속에서 이 백성이 앞에 나오는 백성과 모두 포괄하는 개념의 백성이다 그렇게 생각을 한다고 해서 아니다라고 근본적으로 부인 할 수는 없겠지만 조금 어색합니다. 자연스럽게 본다면 이 백성은 우리로 말하자면 평신도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 훨씬 순리적인 해석일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본문을 보십시오.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매’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 때에 동료 제사장들과 성전에서 수종을 들던 레위 사람들은 어디로 가고 이 많은 백성들이 제일 먼저 그 기도에 감화를 받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심히 통곡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느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절에도 똑같은 것입니다. 세리와 죄인과 창기들이 주를 먼저 영접하고 그리고는 그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하나님의 성전에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의 설교자가 깨어나는 것, 지난번에 18세기의 신앙부흥에 보면 키시스에서 신앙부흥이 일어날 때에 어떤 노 목사님이 애통을 하면서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신학교 교수였습니다. ‘나는 여태 은혜의 교리를 말했으나 한 번도 은혜의 주님을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그 밑에 있는 100명의 평신도가 돌아서는 만큼 힘든 일입니다. 어제 통합 측 이 영일 목사님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다음 주에 약 천 명 정도 모이는 집회가 있는데 그 교회 목사님이 50세가 넘으셨는데 저는 정말 놀랐습니다. 그런 기성교회에서 그 목사님이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시다는 데 놀랐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비전’ 웃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비전 주신 적이 어디 있냐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복 받고, 성령 충만하고, 운수 대통하고 그런 복을 하나님이 주신 적이 어디 있냐는 것입니다. 모두 자기가 끌어 내려서 만들어놓고 그것이 하나님의 은총이요 축복이라고 하고 비전이라고 살아가고 있는 한심한 시대라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변화가 언제부터 왔습니까? 어쨌든 그 분은 자기 동료 목사님들과 있으면 이야기가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굳이 그렇게까지 하면서 목회를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어쨌든 저는 아주 신선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신앙부흥의 시각으로 돌아서서 가르치시니까 초신자들도 받아들이는데 처음부터 같이 있었던 전도사님들, 알도 못 낳는 늙은 교회의 중진들, 닭들, 씨도 안 먹힌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특별히 기도하고 있는 것들은 그 교회의 중직들, 장로가 가지고 있는 열쇠가 얼마나 무서운 열쇠인데 그것이 나중에 자기 목 옭아매는 것인데? 그런 것들을 보면서 제가 깊이 느낀 것은 어떻게 그렇게 신선할 수 있을까? 그리고 역시 보면 그 시대에서 힘든 이야기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항상 ‘나는 종교적이다, 나는 뭐든지 가지고 있다’ 그런 것들이 발판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도 보면 에스라가 기도할 때 ‘많은 백성’이 나오는 것입니다. 많은 백성이 나와서 심히 통곡하게 되는데 이 통곡은 결국은 각성으로 말미암는 통곡이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백성들이 죄에 가담한 자들이냐 아니면 죄에 가담하지 않은 자들이냐 우리는 그것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죄가 누룩과 같이 그 당시에 널리 퍼져있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각성이라고 에스라서에 표기될 때 그런 것까지 염두에 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쨌든지 간에 신분이 백성입니다. 이 백성들이 나와서 심히 통곡하는 것입니다. 통곡은 무슨 의미의 통곡이었겠습니까?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단절되었다는 통곡입니다. 이 통곡의 의미와 에스라가 우는 그 의미가 같아지는 것입니다. 일치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창세기 신앙을 보면서도 감정이입이라는 말을 많이 썼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진실 하게 설 때에 이렇게 확산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충격을 좀 받았는데 교회가 참다운 복음이 선포되어지는 교회가 아니면 그 교회를 세운 선교지의 교회가 어떻겠느냐 그것은 보나마나다, 순수한 복음이 선포되지 않는 교회, 거기에서 감화를 받았다 그러고 자라난 사람이 선교사로 나가서 교회를 세운 그 교회가 본국의 교회보다 더 뒤틀리면 뒤틀렸지 그것을 능가하는 교회는 없습니다. 늘 이야기하지만 본국의 영적인 수준을 능가하는 교회가 printing 된다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이레적인 일입니다. 한 사람 속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똑같은 질에 애통의 이유가 하나님을 원천으로 해서 에스라에게 에스라로 해서 많은 백성에게 흘러가는 것입니다. 심히 통곡했다는 말을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어쨌든 각성이라고 하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앞에서 일상적으로 늘 해오던 일이 죄라고 느껴지는 것입니다. 늘 하는 이야기이지만 그 시대에 태어나서 그 시대의 문제를 꿰뚫어본다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사도가 ‘이 악한 세대를 본받지 말라’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영혼속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것을 못 느낍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 다음에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매, 그 통곡의 정도가 아주 심했던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신앙부흥이 일어날 때 ‘다 같이 힘차게 소리 높여 통성기도 합시다’ 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죄를 인해서 부르짖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부르짖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짖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심히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 지라’ 그랬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보여준 바는 이것입니다. 이스라엘 중에서 각성과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것은 백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남녀를 구분하지 않았고 어린아이까지 망라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신앙부흥의 총체성을 보여준 것입니다. 아주 어린아이에게도 각성이 일어날 때에 얼마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가 하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런 가능성들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어린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결국은 이러한 상황 속에 1절을 볼 때에 ‘이스라엘 중에서’ 그랬으니까 이스라엘 전체는 아닙니다. 두 번째 단계에서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했고 그 다음에 더 많은 사람이 늘어났는데 거기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각 층으로 누룩처럼 번져서 더 많은 수가 총체적으로 1절 하반기에서 모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은 교회가 사명감을 가지고 나가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부흥의 때에는 이상하게 하나님이 사람들을 몰아서 교회에 집어넣으신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무슨 일이 터지고 그 일이 터지니까 사람들이 애통하게 되고 하나님을 느끼게 되고 그래서 세상은 ‘야 이것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구나’ 그러면서 나아오게 되고 그 때에 나오게 되는데 그것이 총체적이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남녀 지성인들, 이렇게 총체적인 부흥이 일어난다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그랬는데 그 큰 무리는 많은 백성이라고 하는 boundary보다 훨씬 더 큰 boundary였다라고 하는 사실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흥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모읍니다. 에스라가 수를 추구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수가 늘어난 것입니다. 그 다음에 더 많이 생각을 해 봤으면 좋겠는데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에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됩니까? 그 앞이 어디입니까? 그 앞이라고 했는데 그 앞에서 모였다고 하는 말에 무슨 의미를 찾아보십시오. 3인칭 남성 단수입니다. ‘엘라 후’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성전이 아니라 여성 형입니다. 그러니까 에스라 앞에 모인 것입니다. 모였을 때에 그 심정이 무슨 심정입니까? 다른 곳에 모인 것이 아니라 에스라 앞에 모인 것은 ‘당신이여, 우리를 이끄소서’ 그런 뜻입니다. 결국은 영적인 지도를 원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죄를 회개했고 그리고 통곡했고 눈물을 많이 흘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은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인도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늘 이야기 하는 것과 같이 신앙부흥이 일어날 때 영적인 권위와 지도력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동일한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나 여기에서나 모두 동일한 것입니다. 34장에서도 백성들이 결국 각성하게 될 때에 모세를 따라서 회막 앞으로 나아오는 무리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와 그리스도의 영적인 사역자들이 영적인 지도력을 회복하기 위한 영적인 원리를 여기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