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신에게 절하지 말라
“내 백성이여 들으라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이스라엘이여 내게 듣기를 원하노라 너희 중에 다른 신을 두지 말며 이방 신에게 절하지 말지어다”(시 81:8-9)
녹취자 : 조 원 정
8절서부터 마지막 까지 나오는 찬송은 시인이 직접 지었다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나오는 내용들을 생각나는대로 군데군데 모아서 자기말로 해서 이렇게 시를 써내려갔습니다. 앞에 보면 6절에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 화법으로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6절을 설교 했을 때도 말씀을 드렸지만 이것은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정리해서 생각나는대로 적어내려 갔다고도 볼 수 있고 또 하나의 개연성은 하나님이 이 시인에게 직접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진 말씀들을 군데군데 반복하는 말씀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모세오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던 말씀 중 반복된 구절들이 여기에 대부분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이여 들으라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이스라엘이여 내게 듣기를 원하노라. 들으라, 증언하리라, 원하노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말 원하시는 것은 듣는 것이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듣는다는 동작 듣다라고 하는 이 동작은 재밌게 샤마라고 하는 동산데 인투라고 하는 전치사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형식적으로 수박 겉핥기식으로 듣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관통해 들어가며 그 말씀 속을 듣는 겁니다. 그런 마음의 태도로 하나님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5장에 보면 듣는 것과 순종하는 것이 동일한 반복으로 나옵니다. 듣는 것과 순종하는 것 수양의 기름보다 낫고 재물보다 나은 것 그것이 바로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깊은 들음이 없이 드리는 희생 제사는 하나님께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다라고 본 것입니다. 재물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재물과 헌재자가 일치를 이룰 때 그 제사는 하나님 앞에 받음직한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들으라 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좋은 신앙은 잘 듣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교회 와서 받아야 할 훈련이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속에서 진리를 받으려고 하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증언은 에다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 증언은 법정에서 하는 증언입니다. 증언이 어떠함에 따라서 피고석에 있는 사람은 죽을 수도 있고 무죄로 방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증언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내 백성이여 들으라 내가 하는 얘기는 괜히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이야기가 너희가 법정에 서 있을 때 내가 증언하는 것처럼 너희들에게 나란히 이 말이 너희를 판결하리라 하는 말씀입니다. 앞에 나오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 내용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뒤에 있는 것은 들어야 할 태도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이스라엘이여 내게 듣기를 원하노라.
사람마다 다 자기가 임금이고 자기가 철학자고 자기가 사상가입니다. 학식이 모자라면 그 사람이 엉성해서 그렇지 엉성하다고 해서 강력하게 붙들고 있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집을 많이 지었어도 그것을 강력하게 못 붙들고 있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엉성하게 지었는데도 그것을 굳세게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현명하고 판단력이 있으면 당신이 붙들고 있는 그 사상이 잘못된 것이라고 허술한 점을 이야기하면 알아듣는데 지력도 모자랍니다. 무지한자가 용감하다고 말도 안 되는 자기 사상을 굳게 붙들고 순교 신앙 가지고 예수 붙드는 교인처럼 그렇게 산다는 것입니다. 가르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돌아 앉아 있는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 쉽지가 않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여 내게 듣기를 원하노라 얼마나 재밌습니까? 왜 하필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이여 라고 말했습니까? 이스라엘이 뭡니까? 언약을 맺은 백성의 이름입니다. 언약을 맺은 백성의 특징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원한다는 것은 단순한 희망이 아닙니다. 갈망입니다.
여러분이 렌즈를 가지고 옛날에 할아버지 쓰던 돋보기 가지고 이렇게 한번 보십시오. 초점이 안 맞으면 글자만 크게 보이지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왔다 갔다 하며 초점이 모이면 영락없이 빛이 모이면서 종이가 타기 시작합니다. 그 추운 겨울에도 말입니다. 어마어마한 빛의 힘입니다. 어떤 태도로 듣느냐 라고 하는 것 이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너무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자기가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것은 따로 떼어놓고 생각한다 하더라도 떼어 놓을 수도 없지만 그것은 다음의 문제라고 보고 일단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면서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진리의 말씀을 깨달으려 하는 사람들은 희망이 있습니다. 아무리 잘못되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결국은 누군가가 흔들리지 않고 일평생 신앙의 길을 걸어갔다면 그 사람은 그만큼 빨리 빨리 교정이 된 사람입니다.
누가 책을 한권 썼는데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 어른이 되는 게 젊은 사람들은 아프기를 싫어합니다. 서울대 김남도 교수가 아프니까 청춘이다. 그 책이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수백만부가 팔렸고 중국에서도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답니다. 누구든지 젊은이들은 아프기를 싫어하고 조금만 흔들리면 자살해 버리는 것입니다. 무풍지대 속에서 부모가 베풀어 준 모든 은덕을 입으면서 곱게 자란 것입니다. 아픈 것에 대한 두려움 못 견딤이 있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흔들리는 것을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조금 빗나가도 하나님의 말씀을 착념하는 사람은 다시 돌아옵니다. 아침 저녁으로 교정되면서 가는 겁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엇간 길로 갔을 때 교정 받을 수가 없는 겁니다. 결국 엇간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듣기를 원하라 하는 하나님의 충고가 얼마나 강력한 충고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너희 중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내용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방신에게 절하지 말라 십계명에 나오는 것입니다. 첫 번째 나오는 계명인데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도 이방신들을 많이 섬기는 사람들 속에서 살았지만 광야를 거칠 때에도 이미 많은 우상들의 문화에 접촉하였습니다. 그것은 예고편에 불과한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나니까 이방 종교의 천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장사를 하는 사람과 유목을 하는 사람보다도 하늘을 더 많이 의지하는 사람이 농사를 짓는 사람입니다. 농사한번을 망치면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펄벅 여사가 쓴 유명한 대지 소설에 보면 중국이 흉년이 거듭해서 들었을 때에 흙을 빨아서 먹는 장면이 나옵니다. 실지로 아이티 같은 곳에 보면 진흙을 구워가지고 돈을 받고 판다는 것입니다. 그걸 먹으면 속이 찬 것 같은 느낌이 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흉년은 무서운 것입니다. 비를 내리고 적당한 일기를 주고 하는 것들을 전부 신들이 주장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알 종교 아세라 종교 이런 모든 종교들이 결국은 농사 번영 이것과 관련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신앙의 최고의 덕은 하나님을 향한 순수하고 절대적인 의존입니다. 다른 어떤 선행이나 어떠한 공로 어떠한 헌신보다도 가장 커다란 미덕입니다.
이방신을 둔다는 의미는 하나님을 동등히 혹은 하나님 앞에 심지어는 하나님 뒤에 두는 것도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만 의지하고 살면 선택하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신다고 약속했던 것입니다. 그런 강력한 약속을 하나님이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다른 신을 둔다는 목적은 다른 게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번영입니다. 그 신을 마음 깊이 사랑하고 공용하고 그러는 게 아니라 자신들을 복주고 이 농경사회에서 부강하게 할 것이다라는 적극적인 마음과 또 하나의 소극적인 마음은 그들이 벌을 내릴까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신들이 각각 이 세상의 구역을 나누어서 다스린다 이렇게 본 것입니다. 여호와라고 하는 신은 그런 구역이 아니라 다스리기에는 이 세상도 너무 좁아서 온 우주를 통치하는 여호와입니다. 이런 신관 개념이 잘 안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광야에서는 우리를 인도하였지만 애굽에서 행하였던 모든 일들은 잊어버렸습니다. 대부분이 다 죽었고 광야에서 새로 태어난 세대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이적들을 물론 보았지만 하나님을 버리겠다는 신앙이 아니라 이 땅에 있는 신들에게 믿보여서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하며 양다리를 걸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혼합신앙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한분만 경배하는 것이 아니면 하나님은 그것을 당신을 향한 경배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신을 두지 말지어다. 이방신에게 절하지 말지어다 이것은 단순한 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적극적인 경배의 문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경배한다는 이야기는 순종하고 복종하겠다는 뜻입니다. 이방신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고 강요하는 것들 중 단 하나도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지 않고 하나님께 범죄 하지 않고 이 신들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마라 이방신들에게 절하지 말지어다 이 문제를 가지고 성경에서는 질투하시는 하나님 이야기를 하는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질투라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사랑하는 것을 빼앗기는 상실감에서 오는 것이 질투입니다. 은밀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질투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아주 쉽게 이야기해서 우리를 모두 잃어버리는 것이 하나님에게 손해라도 되는 것입니까? 우리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아내나 남편 내사랑하는 자녀들이 죽거나 사라졌을 때 나 자신의 존재를 계속하고 싶지 않습니다. 가족들이 죽으면 자살을 하는 사람들도 속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부족한 분이라고 보면 안 됩니다. 이것은 소위 이야기하는 신학용어로 아코모 다치오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친히 내려오셔서 알아듣게끔 우리 수준에 맞추어 이야기 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신학에서는 적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못 알아듣겠으니 그걸 어떻게 설명할 수 없으니까 하나님은 질투하신다고 표현을 하시는데 사람들은 살면서 질투를 수없이 받지 않습니까? 이때는 일부다처제니까 여자들이 시기하고 하는 거 수없이 많이 봅니다. 야곱의 경우에도 바람 잘 날이 없습니다. 하나도 데리고 사는 게 힘든데 여럿을 데리고 사는데 그 사람들이 다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인데 곱게 한남자의 말에 순종하고 복종하며 따라오겠습니까? 쉽지 않으니까 끊임없는 질투 속에서 고통을 받는 겁니다. 서로 질투하는 것을 보는 남편 질투하는 여자, 질투를 당하는 그 여자 생각해 보십시오. 셋이 다 지옥인 것입니다.
(예화) 오죽했으면 옛말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첩 가진 남자는 산에서 호랑이를 만나도 안 잡아먹는 답니다. 호랑이가 사람을 물면 어디부터 먹는지 아십니까? 배부터 먹는답니다. 내장을 좋아합니다. 근데 그런 남자를 꽉 깨물면 썩은 것이라고 옛말에 그럽니다. 그런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 알고 있는데서 인하여 라고 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할 때 사람들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다른 긴 논문으로 이야기할 필요가 없이 그 한마디로 우리가 다른 신을 섬길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가 하는 것이 확 하고 꽂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을 주시는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들으면서 야 하나님은 우리보다 정말 유식하시구나 이게 목적이 아니라 삶을 고치고 인생을 바꾸기 위함입니다. 쉬우면서도 가슴에 확 꽂히는 한마디야 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이 그대로 전수가 되는 것입니다.
질투에는 항상 그 끝이 살인을 지향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 존재가 없었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살인, 살육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그게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중요했으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왜 하나님은 그렇게 가슴에 비수처럼 꽂힐 정도로 그렇게 적나라하고 전격적인 말씀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충고하였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다른 신을 두거나 이방신을 섬기면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방신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탐심이 곧 우상숭배다. 오늘날 구약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이런 이방신을 섬기는 그리스도인이 없다고는 말 못하지만 아직까지도 교회에 점 보러 가는 사람들도 있고 교인들이 점치고 심지어는 굿까지 하는 경우도 봤는데 물론 그 사람들이 진짜 그리스도인이라면 문제가 되지만 그런 사람들이 있답니다.
(예화) 어떤 사람이 점 보러 갔더니 점통을 막 흔들더니 짜증을 내면서 니년들 중에 예수 믿는년 있지 그러더랍니다. 제가 다니긴 다니는데요 했더니 막 야단을 치더랍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여기에 왜 오느냐 하면서 예수 믿는 것들은 절대로 우리 점괘대로 안살아 팔자대로 안살아 왜? 하나님이 그들의 팔자를 따로 정해주시니까 그 분만 잘 믿으라는 겁니다. 그것이 회심의 도구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처음 회심했을 때 전도사님이 계셨는데 그분이 오래 교회를 충직하게 잘 섬기셨는데 증조할머니 때 예수를 믿었답니다. 집안의 아이가 죽으려 하고 우환이 있어서 굿하는 무당을 불렀더니 한창 굿을 하더니 내 힘으로 안 된다 하면서 요새 새로 들어온 귀신이 있는데 예수인데 꽤 세니까 거기로 한번 가보랍니다. 아픈 애 데리고 선교사한테 찾아간 것이 예수 믿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그렇게 의지하고 당신을 경배하며 살지 않으면 고통당하는 우리가 너무나 불쌍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위로를 해 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강력하게 너희는 이방신에게 절하지 말라 이것을 사도바울이 탐심에 적용을 하는 것입니다. 1계명에서 마지막 계명까지 마지막 계명은 다시 1계명으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 중에 하나를 범하면 모두를 범하는 것이고 하나를 지켰다고 모두를 지켰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결국 매순간마다 우리에게 주님밖에 의지할 분이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믿으면서 걸어가는 것 이것이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