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향한 즐거움
“우리 능력 되신 하나님께 높이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께 즐거이 노래할지어다
시를 읊으며 소고를 치고 아름다운 수금에 비파를 아우를지어다“(시 81:1-2)
녹취자: 백지영
여기에 보면 이 시인이 하나님을 향한 감격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시편 81편 전체는 찬송시의 분류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이 81편에서는 하나님께 올리는 시인 자신의 찬송도 있지만, 6절부터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시의 내용으로 삼아서 그래서 마치 시인의 하나님을 향한 찬양에 대해서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것처럼, 마치 판소리나 오페라처럼, 나오는 시입니다. 이런 시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래서 이것은 아마 시인이 하나님을 향해 찬양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실 것이라고 하는 감동으로 적어갔다고 대개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문학적으로 하나의 시니까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고 보는데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두 가지 가능성인데, 우선 첫째는 이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하셨던 말씀 즉 두 가지 자료인데 하나는 성경에서 이미 하셨던 말씀들, 그 다음에 자신이 신앙 생활해 오면서 하나님이 주셨던 말씀들을 이것들을 함께 엮으면서 그 다음에 그것들이 자기를 통한 자기고백이라는 형태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시라고 하는 자기 고백적인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을 조합해서 정리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모든 시가 그렇게 쓰여 졌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이럴 가능성을 우리들이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시인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시인 다윗이 범죄하고 51편에서 탁월한 참회의 시를 씁니다. 죄의식 속에 몸부림치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하다가 어느 시점에 “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물러가라 여호와께서 나의 울부짖음을 들으셨도다.”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그 말을 히스기야에게도 직접 하시고 그리고 다윗에게도 하십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계시의 내용들을 하나님이 불러 주시는 것처럼 썼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우리들이 조심스럽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시인의 찬송인 5절까지에 대한 반응으로 나오는 6절부터의 하나님의 음성은 어떠한 도입부 그러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혹은 오늘 여기에 도역으로 나온 것처럼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르시되 이런 어떤 말의 도입도 없이 바로 마치 따옴표에서 따오는 것처럼, 히브리 시에는 따옴표 그런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내용들이 그냥 통째로 툭하고 제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이렇게 풍부한 계시의 영(靈) 속에서 산 사람들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계시해 주시는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그대로 적어서 옮겼을 수 있다고 상당히 많은 가능성이 있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물론 지금이야 그런 계시가 그쳤지만 그 당시에는 이것이 가능했다 그런 것입니다. 그 정도로 하고,
1절의 내용을 보겠습니다. “우리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에 기쁘게 노래하며”, 이 시인이 하나님을 향하여 기쁨이 넘쳤던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포함한 이스라엘의 백성들에게 능력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보면서 이렇게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찬송했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역사를 회고하면서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전개된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쁨의 찬양을 올리게 된 것입니다. 거기에는 7절부터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의 역사들이 제시가 됩니다. 그래서 출애굽뿐만 아니라 이후에 가나안 정복에 이르기까지, 소위 이야기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네 가지 사이클,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교만하여 타락하고, 하나님이 징계하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하고, 회개하면 하나님이 다시 축복하시고 하는 소위 네 개의 사이클이 반복되면서 하나님 앞에 받은 축복과 이스라엘 백성의 반역 그리고 하나님의 징계와 회개 그리고 하나님의 새로운 축복 이런 것들을 7절 이하에서 제시해 주는 데 그렇게 하나님이 도저히 이스라엘 백성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구원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 오는 것이라는 것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위기와 고난 중에서 스스로 국가의 운명을 개척하고 나라의 운명을 개척하고 나아갈 수 있는 큰 능력이 되어 주셔서 그래서 멸망당할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하나님이 개척해 나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능력이 공동체의 복수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입니다. “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능력이 되셔서 그래서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고난 중에서, 범죄하여 하나님을 멀리 떠난 중에서 하나님이 다시 구원하셨습니다.” 그것이 찬송의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능력은 공동체에 대한 구원의 능력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향한 기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신자의 삶을 한마디로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기쁘게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기쁨의 이유가 예전에는 이 세상 자랑에 있고 나의 육신의 번영에 있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하나님의 사랑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시인이 하나님을 향하여 기쁘게 노래하는 한 비결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노래합니다. “야곱의 하나님을 향하여 즐거이 소리칠 지어다.” 이것이 묘한 대조를 이루는데,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과 야곱의 하나님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나라를 모든 역경 혹은 시련으로부터 그것이 애매히 당하는 것이든지 혹은 그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아 당하는 것이든지 간에 거기서 하나님이 그들을 외적으로 건져주시고 구원해 주신 것에 대해서 하나님을 기뻐하고 노래했다면, 이 야곱의 하나님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고 있는 관계를 기초로 해서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소리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야곱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앞의 시편에서도 가르쳐드렸습니다만 이스라엘의 애칭입니다. 에브라임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애칭이고, 야곱은 갈라지지 않은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애칭이고, 유다는 유다나라에 대한 애칭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혹은 시인들이 이것을 노래할 때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친밀한 관계 그리고 그것은 언약관계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마땅히 보여주시는 호의인 것입니다. 그런 친밀한 내적인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신 외적인 구원의 역사를 통해서 이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 언약을 저버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우의(友誼) 혹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깊이 느꼈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 즐겁게 소리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고 감격에서 터져 나오는 기쁨의 노래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인 교회인 공동체가 무엇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면서 살아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그림처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함께 모여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겨 하나님의 백성들로 살아갈 때에 공동체적으로 개인적으로 많은 시련을 만나게 되는데, 거기에서 하나님이 수시로 건져주시는 외적인 구원 그리고 그런 구원의 위대한 역사를 통해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난 받고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 편이시고 우리는 하나님께 특별히 선택된 사랑하는 백성들이라는 그러한 언약적 관계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있기 때문에 두려울 것이 없다고 하는 기쁨, 이것이 교회가 성도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입니다.
이런 좋은 예가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성령이 강림하고 예루살렘의 공동체는 아주 열렬한 복음전파의 사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전파는 새로 생겨난 기독교 신앙, 기독교의 사상의 체계들을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그 핵심 속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핍박을 받고 그때마다 하나님이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예루살렘 공동체를 하나님이 구원해주십니다. 큰 능력으로 구원해 주십니다. 핍박을 받고 폭행을 당하고 피투성이가 되어서 교회에 들어와 “우리가 이렇게 얻어맞았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받기에 합당한 자로 여김 받는 것에 우리는 기쁘다.” 그리고 간증을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빌고 기도하면서 이런 서슬이 시퍼런 핍박 속에서도 지체들을 건져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우리가 매우 특별히 하나님 앞에 사랑 받은 언약관계에 있다는 것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 감격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어디든지 성령의 역사와 함께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늘 있었던 일들입니다. 이것을 이미 시인이 구약시대에 맛보고 하나님을 향한 감격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우리들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세상을 고쳐나가고 거기서 우리를 건져주시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당신과의 관계를 기뻐하고 감격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2절에서는 그렇게 하나님을 즐거워하게 되는 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를 읊으며 소고를 치고 아름다운 수금에 비파를 아우를지어다.” 구체적으로 이 시를 읊기 위해서는 지어야 될 것이니 하나님을 향한 아름다운 찬양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락으로서 악기를 이용해서 그것을 연주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기쁨에 자기 자신이 잠기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의 음악은 음식하고 비슷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올바르게 잘 사용을 하면 하나님을 경배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만, 좋다고 해서 잘못 사용하거나 남용하면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고민을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고백록에서도 피력을 합니다. 회심하고 얼마 안 되지 않을 때인데, 교회에서의 찬양소리가 신기하게 자기 마음을 열어주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경건에 도움을 주는데 어떤 때는 가락에 빠져들게 만들어서 하나님을 만나는 데 방해가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벌써 1600 년 전에 우리의 신앙의 선배가 그런 고민을 했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큰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을 향한 찬송을 기록으로 남기고, 하나님을 향한 그 즐거움과 기쁨을 구체적인 예배와 찬양의 형태로 하나님께 올림으로써 이것이 일시적인 기쁨이나 감흥이 아니라 항구적인 자신의 영적인 자원이 되어서 하나님을 향해 살게 하는 그러한 믿음 그러한 신앙생활이 되도록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행복이고 기쁨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