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관계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몬 1:1-2)
녹취자: 김명진
빌레몬서는 사도바울이 빌레몬에게 쓴 편지입니다. 성경이 모든 것을 명백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바울이 로마 옥 속에 갇혔을 때에 쓴 편지일 것이라고 봅니다. 순교하기 4-5년 전쯤이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빌레몬이라는 사람은 노예를 거느린 돈이 많은 유력한 부자였던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아마 사도 바울이 전도여행 중에 예수님을 믿게 된 것 같고, 골로새에서 살고 있을 것이라고 보고, 이때 오네시모라고 하는 노예가 있었는데 아마도 주인의 집에 상당한 손해를 입히고 도망친 것 같습니다. 이 당시에 노예가 도망치면 사형입니다. 무슨 이유였는지는 모르지만 사도바울이 옥에 갇혔을 때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와 사도 바울이 관련을 갖게 되고, 사도 바울이 옥에 있을 때 바깥에서 사도 바울과 접촉을 하면서 사도 바울의 심부름도 하면서 사도의 사역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게 되기까지는 사도바울의 전도와 돌보는 양육이 있었을 것입니다. 상세한 이야기는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옥 속에 갇혔을 때에 거기에서 나은 아들이라고 했으니까 거기에서 무엇인가 사도바울에게 복음을 받고 구원을 얻은 것이 분명합니다. 어떻게 도망을 쳐 나온 노예가 사도바울과 관련을 갖게 되었는지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 옥 속에 갇혀 있는 사도 바울이 찾아 온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자유가 어느 정도 있었고, 누군가가 오네시모의 이야기를 바울에게 하고, 바울이 그 사람을 보자고 해서 복음이 전해졌을 가능성이 많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지 성경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오늘 사도 바울이 빌레몬이라고 하는 사람을 잘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이라고 하면서까지 편지를 쓴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였습니다. 도망쳐 나온 노예를 만났고, 그에게 복음 전해서 예수를 믿고, 사도 바울을 신실히 섬겨서 복음 사역에 도움을 주었는데 알고 보니 그가 손해를 끼치고 도망쳐 나온 부자인 노예의 주인이 사도 바울의 복음 사역에 함께 관련 되어 열심히 신실하게 섬긴 형제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사람 빌레몬에게 편지를 쓴 것입니다. 노예를 석방시켜 주라고 한지는 이 서신서에 잘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주인에게 손해를 끼치고 도망쳐 나온 이 노예를 형제처럼 대해 달라는 것, 그리고 지난날에 로마법을 어기고 빌레몬의 집에 손해를 끼친 것도 탕감해 달라고, 필요하면 자신이 그것을 대신 갚겠노라고 까지 이야기를 한 것을 보면 사도바울의 마음에 보통 오네시모를 향한 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이 정말 신실하게 예수그리스도를 믿었다면 관계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네시모는 주인에게 손해를 끼치고 도망쳤으면 주인에게 용서를 빌어야하고, 그럴 수 있는 용기와 자신의 잘못에 대한 회개가 있었을 것이고, 빌레몬에게는 도망친 노예를 언제든지 체포해서 죽일 수 있는 그런 하찮은 자신의 집안에 있는 한 물건과 같은 태도를 갖지 말고 형제로 대하고, 소중한 그리스도 안의 지체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당시의 로마 제도가 그대로 살아있지만 이렇게 주님의 사랑이 역사하니까 제도가 있어도 제도와 상관없이 노예와 노예의 상전이 예수 안에서 형제가 됩니다. 오늘날 노예 제도가 없지만 누구든 누구를 노예로 부릴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노예와 같이 사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변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를 바라보고 그 안에서 이루어진 인간관계를 생각하느냐에 달린 문제입니다. 이것이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과 잘 사는 것’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의 본성은, 헤라클레이투스라는 철학자도 말합니다. 우리의 본성은 우리의 운명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본성은 타고나기도 하지만 살아가면서 형성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부가 대물림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부유한 집안의 아이들이 여건이 좋으니까 공부도 잘합니다. 모질게 시달리지 않으니까 성품도 좋은 아이도 비율적으로 더 많다고 합니다. 그리고 좋은 교육을 받고, 좋은 환경에서 살고, 같은 환경에 있는 사람끼리 결혼 하고, 아이도 낳고, 자신들끼리 써클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 써클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삶이 고달프기 짝이 없습니다. 제가 사역할 때도 가난한 동네 심방을 하면 아이들은 너무 거칩니다. 그런 아이들이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는 과정을 보면서, 모두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당연히 필요하지만 이 아이들이 예수가 아니면 어디에서 변화를 받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 안에서 성화 되어간다는 것은 이렇게 인간관계가 바뀌는 것입니다. 노예제도는 오늘날 없지만 인간의 탐욕과 사람을 지배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들이 신종 노예관계를 만듭니다. 이런 것에 항거하면서 사람의 존엄성과 가치를 사람들에게 일깨우고 그것을 우리 자신이 먼저 느끼면서 사람들을 대하는데 있어서 변화된 인간관계를 가지면서 사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겨 누리면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이고, 그 삶이 너무나 많은 손해와 고통을 수반하는 삶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없는 은혜와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는 분명히 자신이 옥 속에 갇혔다고 말합니다. ‘예수를 위해 갇힌 자 된 바울’이라고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와 함께 빌레몬에게 편지를 쓴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집안의 사람들, 교회에 편지한다고 되어있는데 당시에는 교회의 간판을 달고 단독 건물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가정이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가정교회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절대적인 가정의 모습으로 주장하면서 가정교회를 주장하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핍박을 받으면서 가정이 예수를 믿으면서 한 교회를 이루면서 살아가고 있는 이 집에 이 편지를 보낸 것이니까 빌레몬 개인이 읽고 끝내는 편지가 아니라 그 가족이 모두 있는 곳에서 이 편지가 낭독되어 모든 사람들이 이 편지 속에 담겨진 사도 바울의 교훈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사랑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이라고 했습니다. 이름 앞에 붙여져 있는 몇 개의 묘사들은 우리들에게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이라고 되어있습니다. 빌레몬이라는 이름을 떠올릴 때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골로새의 큰 부자, 돈이 많은 사람, 자신의 선교에 뒷돈을 대는 사람,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손을 벌릴 수 있는 교회에 있는 부자, 이런 생각이 떠올린 것이 아닙니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사랑 받는 자, ‘아가페 토스’라고 하는데 아가페의 사랑을 받은 자, 그러면 빌레몬은 누구에게 사랑을 받았을까요? 우리들이 하나님께로 오는 사랑을 아가페, 그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도를 향한 사랑을 ‘까리따스’ 이렇게 분리를 하는데 성경은 그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아가페’ 하나로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사랑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어떻게 같겠습니까?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부모 자식 간의 사랑도 다른데 어떻게 같겠습니까?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사람은 그 사랑을 구분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베푸시는 사랑은 완전한 사랑, 자기 자신에게로 회귀하는 사랑,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사랑은 그 사랑에 감화를 받은 은총으로서의 사랑으로서 구분했습니다. 그렇지만 에드워즈가 이야기한 것처럼 이 사랑은 성질상으로는 함께 통하는 하나의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서 까리타스의 사랑도 아가페의 사랑 때문에 생긴 사랑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사랑받는’이라고 하는 것은 아가페의 사랑을 받는, 그러니까 완전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형제들에게도 사랑을 받는 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빌레몬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그림이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 그것이 제일 먼저 떠오른 것입니다. 여러분도 우리의 신앙의 가장 큰 대의는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목자나 목회자나 다른 지체들이 여러분을 위해 기도할 때 마음속에 떠오르는 제일 큰 특징이 돈 많은 사람, 교회 오래 다닌 사람, 이런 사람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변함없이 사랑을 받는 사람, 성도들에게 늘 사랑스러웠던 사람,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 이런 사람들로 남는 것이 신앙의 가장 중요한 대의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동역자인 빌레몬’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인간적인 방법으로 생각하면 사도바울 같이 그렇게 로마 정부의 미운 물건이 되어서 수시로 투옥되었던 사람이 어떻게 이 유력한 부자인 빌레몬과 함께 친구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사도는 그 ‘빌레몬’ 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부자임에도 사회적인 신분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업을 끊임없이 도왔던 사람, 그래서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일을 생명처럼 생각하고 사도 바울의 일에 동역자였던 사람, 그 사람으로 비춰졌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잘 믿고, 평안을 누리고, 안전한 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신앙의 모든 것이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순간 교회라고 하는 어머니의 품에서 젖을 먹으면서 자라는 아이같이 보호받고 사랑받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군대에 편입된 병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 같이 어머니인 교회의 섬김을 받으면서 양육되는 그림과 말씀과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분투하면서 사는 군사로서의 모습이 함께 우리의 마음속에 각인 되어야 합니다. 용사와 같은 자신이 용사 같은 사람이라는 분에 넘치는 생각을 하면서 교회의 돌봄을 받기를 소홀히 해서도 안 되고, 어린아이 같이 교회에서 말씀의 젖을 먹는 유아기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하나님의 일에 동역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런 점에서 사도 바울에게 빌레몬은 그저 단순한 자기의 돌봄을 받은 교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훌륭한 동역자였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이런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된 아킵보’라고 나옵니다. 아마 자매 압비아라고 했으니까 빌레몬의 아내였을 가능성이 많고, 그렇지 않다면 그 집안에 있는 식구 중 한 사람이 되겠지만 아마 아내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리고는 나오는 이야기가 무엇이냐면 ‘우리와 함께 병사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라고 나왔습니다. 아킵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병사입니다. 시련과 역경,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곤란과 힘든 것을 이기면서 군인이 싸움에 전무 하듯이 그렇게 전투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님 앞에 보여 드려야할 우리들의 삶인 것입니다.
오늘 빌립보의 첫 페이지를 열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랑과 은혜는 우리 인간관계를 변화시키는구나, 우리의 신앙의 본질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것이요, 동역하는 것이요, 병사와 같이 주님을 위해서 전투적인 삶을 사는 것이 구나’라는 것을 깨닫는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